어젯밤, 아무도 보지 못했겠지만 나는 똑똑히 보았다. 음대 앞 임균수광장의 조형물들이 살아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사대 성인상이 하나 둘씩 탑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평소 '의외성'에 얘길할 때 늘 반색을 하던내가 실제로 눈 앞에 벌어지고 있는 상황 앞에서 안절부절하지 못한 것은 안온한 일상에 물든 내 삶에 그 연유가 있었을 테다. 어쨌든 나는 혹시나 그들이 나를 발견할까봐서 벤치 밑에 엎드린 채로 그들의 잠행을 훔쳐볼 채비를 했다.
내가 그러고 있는 사이, 한 다정한 연인이 도서관가는 벚꽃길에서 광장의 잔디밭에 발을 들여놓는 게 보였다. 저들은 사대 성인이 눈에 보이질 않는가. 내가 지금 헛 것을 보고 있는 것인가. 벤치 밑에 기어다니는 개미가 한 마리 두 마리 내 몸위로 기어올라오고 있었지만 나는 그것들을 쳐낼 생각을 하지 못했다. 사대 성인은 둥그런 조형정원 안으로 들어갈 것 같았다. 연인들이 정원 앞 둥근 의자에 앉았다. 사대 성인은 그들과 반대편에 무리지어 서 있었다. 나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 기대가 되어 좀 더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았다. 달빛이 좀 거뭇하여 시야는 좀 흐려져 있었지만 스케치하듯 움직이는 그들의 몸짓만은 어느새 눈에 익어 관찰에는 별 문제가 없었다. 그들이 하는 말소리가 멀리 떨어져 있는 내게 까지 들려왔다. 이상한 일이었다. 요즘 내 청력이 떨어지고 있던 중에 저렇게 먼 거리도 마치 지척 거리나 되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 뭔가 불가사의한 일이 일어나고 있음은 분명한 일이었다.
"저, 누나... 저 할 말이 있어요."
남자의 목소리는 감기들린 것처럼 조금 쉬어 있었다.
"인철아, 뭔데? 넌 항상 할 말 있다고 하구 제대로 말도 못하더라. 이번에는 꼭 해. 무슨 말이든 우리 인철이 말이면 다 들어줄 테니까."
"저 사실은 힘들어요. 제가 누나를... 사랑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어요. 이게 사랑인가요?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이 지독히도 외롭고 쓸쓸한 것이. 누나는 가끔 말하죠. 사랑은 완벽해지려는 것이 아니라 늘 부족한 것을 서로가 알고 있음으로 충분한 것이다라고. 그게... 그런데 너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드는 거에요. 내가 지금 누나를 좋아하고 있는 건지, 아님 김연화라는 여자를 좋아하고 있는 건지. 이렇게 좋아하고 해서 나중에 뭘 어쩌자는 건지. 그러다보니 더욱 혼자라는 생각이 들고, 누나 옆에있는 내가 지질컹이가 된 듯한 느낌이 드는 거에요... 그래서"
"아, 잠깐! 지금 너의 심리적 상황을 내가 하나 하나 분석해 줄게. 가만 기다려봐. 너는 지금 정서적 아노미상태에 이르고 있는 것이 분명해. 눌려 있던 제도권 생활, 아니 그건 별로 어울리지 않는 표현이군. 다시 말해, 그러니까설라무니 넌 지금 의기소침해져 있는 게 분명해. 그 이유는 네 말을 곱씹어보면 나오는 거야. 자, 보자. 가만 있어 봐. 노트를 꺼내서 차근차근, 조목조목, 하나하나 따져보자는 거지."
"누나, 그러지 말아요. 나는 누나가 좀 바보스러웠음 좋겠어요. 계산하지 않고, 깊은 생각으로 내 얕은 순간의 감정을 무시하지 말고, 그냥 요, 좀 유치한 데가 있더라도 그 유치함을 못 이겨 짜증을 내지 않고, 내가 누나에게 차마 말 못할 그런 바램이 있으면 솔직히 좀 귀찮더라도 가만히 다가와 묻는게 먼저가 아니라 손 먼저 부드럽게 잡아주었으면 하는 거요. 근데 누난 그게 아니잖아요."
나는 이 둘의 상황을 좀 전의 자세 그대로 서서 목도하고 있는 사대성인들 하나하나를 눈 여겨 보았다. 우선 예수는 여자가 말을 할 때마다 눈살을 찌푸리는 것 같았고, 석가는 남자의 어깨를 가련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것 같았다. 소크라테스나 공자는 둘의 대화에 별 관심이 없다는 듯 묵연히 졸고만 있는 붉은 달을 쳐다보거나 딴 짓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야, 김인철! 넌 그게 문제야. 사랑은 그런 유치한 짓이 아니야. 남들처럼 사랑하고 싶니? 그러니까 네가 바라는 여자는 내가 아니라는 거야. 우리가 헤어질 시간이 가까워져 오나보다. 네가 그런 말도 다하고."
"...누나, 내 생각도 그런 것 같아요."
연인의 끝은 항상 이런 식일 거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서로의 현재를 위해 끝을 낸다고 말이다. 지금 그들에겐 과거의 추억도, 미래에 대한 열망도 모두 거품이고 현재의 뜨거움만 남아있을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현재만 있는 사랑. 그것이 연애이던가. 연인관계가 시작되면서 두 사람은 마법사가 된다. 시간을 맘대로 없앨 수도 조작할 수도 있다. 없던 일을 그 사람의 기억의 흐릿한 지점을 찾아 새로이 그려넣어줄 수도 있는 독선적인 화가이며 침묵 속에서 깊은 사랑의 우물을 파내는 기술자이기도 하다. 아이디어가 넘치는 젊음이며 점차로 식어 가는 애정을 데우기 위해 나무를 하러 다니는 나뭇꾼이기도 하다.
두 사람은 잠시간 말이 없었다. 서로의 미세한 동작 하나까지도 애정으로 가는 길의 관심수단이던 것이 이젠 상황에 제대로 처신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동체의 몸짓이 되버렸다. 말은 없어져서 탬색의 침묵에서 어색한 침묵으로 바뀌어버렸고 간헐적으로 내뿜는 한숨조차도 격렬한 키스 뒤 애정의 호흡같은 느낌이 아니라 듣기 싫은 바람소리가 되버렸다.
"날 사랑했니?"
"누나는 날 사랑했나요?"
이 때 멈칫해 있던 사대성인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달빛아래 흘러드는 어둠을 이리 밀고 저리 밀고 하면서 그들은 서서히 원래 있던 곳으로 되돌아 가고 있었다. 당시의 나는 그들의 뜻을 잘 알 수 없었다. 왜 돌아가는가. 왜 다시 돌처럼 굳어버린 사상으로 돌아가려 하는가. 그들이 깨어났으니 이 말많은 세상에 힌바탕 찬물을 끼얹어줘야 하지 않겠는가.
지금와서 생각건대 나는 그들이 소심해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의 뜻에서 너무나 멀리 와 버린 우리의 사랑이 그들을 무안하고 소심하게 만들었기 때문이 아닐까하고 말이다.
오늘 아침, 전공 수업을 마치자 마자 나는 그 곳으로 달려가서 어젯밤의 일을 떠올렸다. 세계의 겉과 속이 만날 뻔한 그 자리엔 지금 있던 것이 없어져 버린 허공만 있을 뿐 내가 숨어 있던 벤치 아래엔 일어설 때 죽여버린 개미의 시체조차도 남아있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