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의 말씀은 감옥에 갇혀 있지 않습니다
2티모 2,8-15; 마르 12,28-34 / 연중 제9주간 목요일; 2024.6.6
사람이 하느님의 빛과 힘을 받지 않고서는 이기적이고 세속적인 속성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는 마치 햇빛이 비추어지지 않는 캄캄한 밤에는 아무리 우리 눈의 시력이 좋아도 또 무언가를 간절히 보고 싶어도 전혀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이치와도 같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하느님을 닮고 또 다른 이들에게도 하느님의 소식을 기쁘게 전하자면 이기적이고 세속적인 본성을 넘어서서 하느님의 빛과 힘을 받아야 합니다. 이 빛과 힘의 본질이 사랑입니다. 이 사랑이 하느님의 말씀에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간추린 내용으로서, 십계명에서 출발한 유다교의 가르침을 단 두 가지로 요약한 사랑의 계명에 관한 말씀입니다. 그 첫째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요, 그 둘째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두 가지 계명을 순서상 첫째와 둘째로 구분하기는 하셨을지언정 두 가지 모두 가장 큰 계명으로 가르치셨습니다. 이를 ‘하느님 사랑과 인간 사랑의 단일성’이라 합니다.
이는 마치 예수님 안에 신성과 인성이 다 같이 들어있는 것과 같아서, 그분의 삶에서는 하느님 사랑으로 인간을 사랑하는 단일성이 녹아 있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당신에게 다가온 이웃들을 대하시는 태도는 마치 하느님 아버지를 대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일찍이 이사야가 예언했던 대로(이사 42,3 참조), 예수님께서는 꺼져가는 심지도 끄지 않고 부러진 가지도 꺾지 않는 듯이 당시 유다인 사회에서 소외되고 차별받았던 이들을 마치 정성껏 보살피시고, 제자들에게도 이들의 천사가 하느님을 매일 마주 뵙고 있다고 가르치시면서(마태 18,10 참조) 하느님을 대하듯이 정성껏 돌보라고 당부하셨습니다. 그래서 결국 이 보잘것없어 보이는 이들에 대한 사랑의 태도야말로 당신을 대하는 태도로 간주하시겠다는 최후 심판의 기준(마태 25,40 참조)까지도 나오게 된 것입니다.
이로써 구약과 신약, 유다교와 그리스도교의 경계가 뚜렷하게 그어졌습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유다교 지도층의 박해를 받을 각오를 단단히 하고 하느님의 진리에 대한 용기를 내신 것인 바,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하고 구현하는 일이야말로 하느님 흠숭의 척도라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아끼던 제자 티모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복음 즉 사랑의 복음을 위하여 죄인처럼 감옥에 갇히는 고통을 겪고 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하지만 감옥 생활의 고통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마음에 간직하고 있는 하느님의 말씀은 여전히 살아있음을 아울러 고백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감옥에 갇혀 있지 않다.”(2티모 2,9)는 것입니다. 이는 진리와 사랑이 하느님께로부터 나오는 빛으로 우리를 비추고 있으며 또한 하느님의 힘으로 우리를 살아있게 만들고 있다는 뜻입니다.
수사학적인 기교가 엿보이는 이 표현이 사실은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사도 바오로의 심오한 사색에서 나온 산물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발현을 체험한 다마스쿠스 사건 이전까지는 그도 열성적인 바리사이 출신으로서 바리사이의 전통에 따라 율법에만 정통했었습니다. 하지만 구약성경에 담긴 하느님의 말씀의 두 기둥은 율법과 예언입니다. 메시아 대망 사상은 율법이 아니라 예언을 통해서 아나빔들을 통해서 대대로 전수되어 왔던 것입니다. 다마스쿠스 사건 이후 그는 ‘십사 년 동안’(갈라 2,1 참조)이나 구약성경을 다시 훓다시피 읽으면서 특히 예언자들이 전해 주었던 말씀에 주목했습니다. 말씀에 집중하느라 아라비아 사막에 가서 피정을 하기도 했고(갈라 1,17 참조), 타루수스에 있는 자기 집에서(사도 11,25 참조)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예수님이야말로 예언자들이 아나빔들에게 예고한 메시아이심을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비로소 그는 하느님 말씀의 정수를 보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그에게 ‘하느님의 말씀’은 ‘진리’(에페 1,13)이며 또한 ‘빛’(에페 5,14)이고 ‘성령의 칼’(에페 6,17)이자 ‘생명’(필리 2,16)이었습니다. 그 말씀은 “과거의 모든 시대와 세대에 감추어져 있던 신비”로서, “이제는 하느님의 성도들에게 명백히 드러났다.”(콜로 1,26)고 그는 굳게 믿었습니다. 이를 요약한 문장이 이것입니다: “사랑하는 그대여,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십시오. 그분께서는 다윗의 후손으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습니다. 이것이 나의 복음입니다.”(2티모 2,8)
사도 바오로가 ‘나의 복음’이라고까지 강조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그분과 함께 죽었으면, 그분과 함께 살 것이고, 우리가 견디어 내면, 그분과 함께 다스릴 것이며, 우리가 그분을 모른다고 하면, 그분도 우리를 모른다고 하실 것입니다.”(2티모 2,11-12)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우리도 본받아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사도 바오로가 전하고자 했던 복음입니다. 이를 다시 강조하고자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신자들에게 이러한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설전을 벌이지 말라고 하느님 앞에서 엄숙히 경고하십시오. … 그대는 인정받는 사람으로, 부끄러울 것 없이 진리의 말씀을 올바르게 전하는 일꾼으로 하느님 앞에 설 수 있도록 애쓰십시오.”(2티모 2,14-15)
교우 여러분! 하느님의 말씀을 성서 안에 가두지 말고 십자가와 부활의 진리로 받아들이십시오. 말씀은 진리요 사랑입니다. 우리를 비추는 빛이요 우리가 살아갈 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