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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성인 이냐시오(10.17)
이냐시오(10.17)
성인명 이냐시오 (Ignatius)
축일 10월 17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주교, 순교자, 교부
활동지역 안티오키아(Antiochia)
활동연도 +107년
같은이름 이그나티오, 이그나티우스, 이냐시우스
성 이그나티우스(또는 이냐시오)는 초대교회의 사도 교부이자 순교자로서 일명 ‘테오포로스’(Theophoros, ‘하느님을 모시고 다니는 사람’이란 뜻)라고 불리는데, 그의 생애에 대해 알려진 것은 별로 없다. 아마도 그는 35년경에 시리아의 안티오키아(오늘날 튀르키예 남부 지중해 연안의 안타키아[Antakya])에서 태어난 듯하며, 사도 성 요한(Joannes, 12월 27일)의 제자였음이 분명하고,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사람이다. 에우세비우스(Eusebius)의 “교회사”(Historia Ecclesiastica)에 따르면, 그는 사도 성 베드로(Petrus, 6월 29일)와 성 바오로(Paulus, 6월 29일)가 세운 시리아의 안티오키아 교회에서 사도 성 베드로의 뒤를 이어 제2대 또는 제3대 주교로 임명되고 축성되었다고 한다. 당시 안티오키아는 이탈리아의 로마(Roma)와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Alexandria)에 이어 로마 제국 내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였다.
그리고 안티오키아 교회는 신자들이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 불린 곳이며(사도 11,26), 사도 성 바오로와 성 바르나바(Barnabas, 6월 11일)의 이방인을 향한 선교 여행의 출발지이자 중심지였다. 특히 예루살렘이 멸망한 후에는 초대교회 안에서 로마 교회와 함께 교회를 떠받치고 있던 곳이 안티오키아 교회였다. 따라서 약 40여 년 동안 안티오키아 교회를 위해 헌신하던 성 이냐시오 주교가 트라야누스 황제(98~117년 재위)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 체포되어 재판을 받고 로마로 압송된다는 사실은 전 교회의 큰 슬픔이었다. 그는 10명의 군인에 의해 육로와 배를 이용해 소아시아 연안을 따라 그리스를 통과해 로마로 호송되었다. 그 과정에서 그는 머무는 도시마다 그를 위로하기 위해 몰래 찾아온 신자들에게 그리스도와 일치하고 사도적 전통에 충실할 것을 설교하고 권고했다. 마케도니아의 네아폴리스(Neapolis)에 와서는 나중에 같이 순교하게 될 성 조시모(Zosimus)와 성 루포(Rufus)가 그와 합류하였다.
로마로 압송되는 과정 중에 그는 모두 일곱 개의 편지를 썼는데, 이는 ‘그리스도교 문헌학의 진주’라고 불릴 정도로 그 내용이 풍부하고 가치가 높다. 특히 신학적으로 교회, 결혼, 삼위일체, 강생, 구속 그리고 성체성사에 관한 그의 교육적인 편지들은 초기 그리스도교 저서 가운데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역사적 문헌들이다. 성 이냐시오는 여섯 개의 편지는 교회 공동체에 그리고 한 개의 편지는 스미르나(Smyrna)의 주교인 성 폴리카르포(Polycarpus, 2월 23일)에게 보냈다. 성 폴리카르포 주교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선배 주교로서 후배 주교에게 사목자로서 지녀야 할 자세와 덕에 관해 설명하였고, 로마 교회에 보낸 편지 외에 다른 다섯 교회 공동체에 보낸 편지에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일치하고, 주교에게 순명하며, 이단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권고를 담았다. 그러면서 그는 그리스도 교회 공동체를 일컬어 처음으로 ‘가톨릭교회’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로마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그는 순교지로 가는 여정 중에 자신의 신앙과 주님께 대한 사랑을 감동적으로 전해주었다. 그는 여기서 자신의 순교와 성체성사를 긴밀히 연결하였다. “나는 모든 교회에 편지를 쓰면서 여러분이 방해만 하지 않으면 내가 하느님을 위해 기꺼이 죽으러 간다고 모두에게 알렸습니다. 나의 간청입니다. 불필요한 호의를 나에게 베풀지 마십시오. 나를 맹수의 먹이가 되게 버려두십시오. 나는 그것을 통해서 하느님께 갈 수 있는 것입니다. 나는 하느님의 밀알입니다. 나는 맹수의 이에 갈려서 그리스도의 깨끗한 빵이 될 것입니다. 이 맹수라는 도구를 통해서 내가 하느님께 봉헌된 희생 제물이 될 수 있도록 그리스도께 기도하십시오.”(4,1-2) 또한 그는 같은 편지에서 순교의 고통을 영원한 생명을 위한 ‘출산’으로 표현했다. 해산의 고통을 통해 새 생명이 태어나듯이, 순교의 고통을 통해 하느님 안에서 새로 태어나 부활의 기쁨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는 그의 믿음에 따라 그리스도인이 순교한 날을 ‘천상 탄일’(dies natalis)로 부르며, 순교한 날을 축일로 정하는 전통을 갖게 되었다.
안티오키아를 출발해 스미르나, 트로아스(Troas), 네아폴리스, 브린디시(Brindisi) 등을 거쳐 아피아 가도(Via Appia)를 통해 로마로 압송된 성 이냐시오는 교회사학자 에우세비우스에 따르면 107년에 로마의 원형 극장에서 맹수형을 받고 사자의 밥이 되어 장렬히 순교했다고 한다. 그로써 그는 성체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와 완전히 일치하여 하느님 안에서 새로 태어나 부활의 기쁨을 누리는 ‘천상 탄일’을 맞이했다. 하지만 성 이냐시오가 순교한 시기는 에우세비우스 외에 다른 학자들의 기록에서 2세기 중엽까지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또한 순교한 날도 정확한 기록이 없어 다양한 날에 축일을 기념해왔다. 아무튼 성 이냐시오는 자신이 원하던 대로 사자의 밥이 되어 맹수들을 자신의 무덤으로 삼고자 했으나 신자들이 남은 유해 일부를 모아 안티오키아로 옮겨 안장했고, 7세기에 사라센인들의 안티오키아를 침략했을 때 유해를 다시 로마로 옮겨서 산 클레멘테 알 라테라노 대성당(Basilica di San Clemente al Laterano)에 모셨다.
성 이냐시오가 순교한 정확한 날을 알 수 없기 때문에 그의 축일은 다양한 날에 기념되었다. 그의 고향인 안티오키아에서는 10월 17일에, 가톨릭교회에서는 12세기부터 1969년 로마 보편 전례력 개정 전까지 2월 1일에, 동방 정교회에서는 순교한 날로 추정하는 12월 20일에 축일을 지냈다. 그래서 옛 “로마 순교록”은 2월 1일 목록에서 사도 성 베드로에 이어 안티오키아 교회의 주교가 된 성 이냐시오 순교자의 탄생일로, 그는 트라야누스 황제의 박해 때 로마로 압송되어 원로원 앞에서 끔찍한 고문을 당한 후 맹수형에 처해져 사자들의 이빨에 갈려 그리스도교께 자신을 제물로 바쳤다고 전해 주었다. 1969년 전례력 개정 이후 가톨릭교회는 그가 죄수의 몸으로 압송되어 로마에 도착한 날로 알려진 10월 17일을 축일로 기념하고 있다. 그래서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도 10월 17일 목록에서 사도 성 요한의 제자로 사도 성 베드로 다음으로 안티오키아 교회의 제2대 주교이자 순교자인 성 이냐시오를 기념하는데, 그가 107년 트라야누스 황제 치하에서 로마로 이송되어 맹수형을 받고 영광스러운 순교를 맞았다고 했다. 그리고 그가 로마로 가는 도중 표범처럼 사나운 경비병들의 공격을 받으면서도 여러 교회에 일곱 통의 편지를 써서 형제들에게 주교와 함께 하느님을 섬기고 그리스도를 위한 희생 제물이 되려는 자신을 막지 말라고 권했다고 기록하였다.♣
호세아(10.17)
성인명 호세아 (Hosea)
축일 10월 17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구약인물, 예언자
활동지역
활동연도 +8세기BC
같은이름 오세아, 오지
구약성경 열두 소예언서의 하나인 호세아서는 예언자 성 호세아(라틴어 Osee)가 쓴 것이다. 히브리어인 호세아(hoshea)는 ‘구하다 · 돕다 · 해방하다’라는 뜻을 지닌 ‘야샤’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주님의 구원’, ‘주님께서 구원하신다’란 의미를 지닌다. 총 14장으로 이루어진 호세아서 1장 1절에 따르면, 그는 브에리(Beeri)의 아들로 남유다 임금 우찌야(기원전 781-740년) · 요탐(기원전 740-735년) · 아하즈(기원전 735-716년?) · 히즈키야(716-687년) 시대에, 그리고 북이스라엘의 임금 여호아스의 아들 예로보암 2세(기원전 787-747년) 시대에 하느님을 말씀을 받아 예언자로 활동하였다. 그는 북이스라엘 왕국 출신으로 점점 더 정치와 종교의 부패가 극심해지는 시대적 아픔을 함께하며 기원전 722년 북이스라엘 왕국의 멸망을 예고한 비운의 예언자였다. 실제로 호세아 예언자의 활동 초기에는 북이스라엘이 번영하는 듯했으나 점점 쇠퇴해서 예로보암 2세 사후에 북이스라엘은 끊임없는 피와 배신의 쿠테타로 점철되었다. 호세아서가 사마리아의 멸망을 기록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그의 예언자로서의 활동 시기는 대략 기원전 745-725년 정도로 추정할 수 있다.
호세아 예언자의 생애에 대해 호세아서를 통한 것 외에 알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그는 하느님의 명령으로 디블라임의 딸 고메르와 결혼하여 세 명의 자식(첫째 아들 이즈르엘, 둘째 딸 로 루하마, 셋째 아들 로 암미)을 낳았다(1,2-9). 그런데 이 결혼도 글자 그대로 이해하기보다는 상징적 행동으로 보아야 한다. 이스라엘이 하느님을 저버리고 가나안 종교와 뒤섞여 바알 우상을 섬기는 등 부정한 행위를 저지른 것에 대한 준엄한 비판이자 심판이다. 또한 동족끼리 권력을 위해 서로 죽이고 강대국에 의존하는 기회주의적 정치 행태에 대한 도전이기도 하다. 옛 “로마 순교록”은 예언자 호세아와 하까이(Haggai, 12월 16일)를 7월 4일에 기념한다고 간단히 기록했었으나,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호세아 예언자의 기념일을 정교회와 같은 10월 17일로 옮기고, 말로만이 아니라 자기의 삶으로써 불충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무한한 자비를 베풀어주시는 신실하신 하느님을 보여주었다고 기록하였다.
호세아서의 주제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과 은혜를 잊고 ‘창녀’ 같이 우상숭배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과의 대조를 통해 하느님께 돌아가는 회개의 필요성과 백성을 용서하고 되찾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보여주고 있다. 주 하느님의 노여움은 자식을 사랑하는 아버지의 분노이며, 이전의 잘못을 뉘우친 자식들이 당신 품 안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사랑의 표현이다. 호세아는 자기의 혼인과 가정생활을 통해 하느님의 말씀을 전해주었다. 남편을 배신하고 창녀가 된 아내를 저버리지 않고 다시 찾아 나선 호세아처럼, 이스라엘이 주님을 떠나 우상을 숭배하는 큰 죄를 저질렀어도 주님은 당신 백성 이스라엘을 포기하지 않으신다. 부정한 아내라도 회개와 보속을 통해 새로 출발할 기회를 주실 만큼 끝까지 사랑하시는 주님이시다(3,3-5). 이렇듯 호세아서가 전해주는 호세아 예언자의 삶은 그 자체로 이스라엘 백성의 회개를 촉구하고 주님께 되돌아오기를 바라는 하느님 사랑의 메시지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호세아서의 정신은 예레미야서와 에제키엘서에도 영향을 주었고, 신약성경에서도 곧잘 인용되고 있다.
‘내가 내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내었다.’(마태 2,15; 호세 11,1),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마태 9,13; 12,7; 호세 6,6), 그때에 사람들은 ‘산들에게 ′우리 위로 무너져 내려라.′ 하고 언덕들에게 ′우리를 덮어 다오.′ 할’ 것이다(루카 23,30; 호세 10,8), “나는 내 백성이 아닌 자들을 ‘내 백성’이라 부르고 사랑받지 못한 여인을 ‘사랑받는 여인’이라 부르리라. 그들에게 ‘너희는 나의 백성이 아니다.’ 하던 바로 그곳에서 그들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자녀라 불리리라.”(로마 9,25-26; 호세 2,25; 2,1), “죽음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죽음아, 너의 독침이 어디 있느냐?”(1코린 15,55; 호세 13,14), “여러분은 한때 하느님의 백성이 아니었지만 이제는 그분의 백성입니다. 여러분은 자비를 입지 못한 자들이었지만 이제는 자비를 입은 사람들입니다.”(1베드 2,10; 호세 1,6.9; 2,1.3.25)♣
마리아 아우구스티나(10.17)
성인명 마리아 아우구스티나 (Maria Augustine)
축일 10월 17일
성인구분 복녀
신분 수녀, 동정 순교자
활동지역 발랑시엔(Valenciennes)
활동연도 1760–1794년
같은이름 메리, 미르얌, 미리암, 아우구스띠나, 오거스틴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10월 17일 목록에서 프랑스 북부 발랑시엔에서 성 루도비코(Ludovicus)의 복녀 마리아 나탈리아(Maria Natalia, 또는 마리-조세핀 바노[Marie-Josephine Vanot])와 하느님께 봉헌한 네 명의 동료 동정 순교자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우르술라회(Ursulines)의 동정녀들로 1794년 프랑스 혁명 당시 가톨릭 신앙에 대한 증오로 사형 선고를 받고 단두대에 올라 시편 51편(Miserere, 하느님,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을 낭송했다고 기록하며 그들의 이름을 추가하였다. 네 명의 동료 순교자의 이름은 다음과 같다. 성 스타니슬라오(Stanislaus)의 복녀 마리아 라우렌티나(Maria Laurentina, 또는 잔-렌 프린[Jeanne-Reine Prin], 성 베르나르디노(Bernardinus)의 복녀 마리아 우르술라(Maria Ursula, 또는 히아신드-오귀스탱-가브리엘 불라[Hyacinthe-Augustine-Gabrielle Bourla], 성 프란치스코(Franciscus)의 복녀 마리아 루도비카(Maria Ludovica, 또는 마리-주느비에브 뒤크레[Marie-Genevieve Ducrez]), 예수 성심의 복녀 마리아 아우구스티나(Maria Augustina, 또는 마리-마들렌 데자르뎅[Marie-Madeleine Dejardins]이 그들이다.
이들 다섯 명의 수녀들은 1794년 10월 23일에 순교한 여섯 명의 수녀들과 함께 프랑스 혁명(1789~1799년) 중에 발랑시엔에서 순교한 11명의 우르술라회 순교자로 불린다. 우르술라회는 수도회의 소명대로 발랑시엔에서 소녀들을 위한 학교를 운영하고 있었다. 수많은 성직자와 수도자가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프랑스 혁명의 광풍 속에서 발랑시엔의 수녀들도 수도회와 학교가 폐쇄되는 아픔을 겪었지만, 수도 생활을 포기할 수 없어서 1792년에 인근 국경을 넘어 벨기에 몽스(Mons)의 우르술라회 수녀원으로 피신하였다. 오스트리아가 발랑시엔을 정복한 1793년에 몽스로 피신했던 수녀들이 돌아와 학교 문을 다시 열었다. 하지만 1794년 6월 오스트리아가 패배하면서 발랑시엔은 다시 프랑스령이 되었다. 이때부터 프랑스 혁명 정부의 공포정치가 절정에 달했다. 당시 발랑시엔 수녀원에는 모두 32명의 수녀가 있었는데, 1794년 8월 31일에서 9월 1일 사이에 혁명군이 입성하면서 모두 체포되었다. 그들은 혁명정부의 법령에 따른 선서를 하고 수녀원을 떠나라는 선택을 강요받았는데, 21명의 수녀는 죽음의 두려움 앞에서 혁명군의 요구대로 선서하고 풀려났다.
하지만 나머지 11명은 끝까지 수녀원을 지키겠다고 남았고, 정부의 승인 없이 가톨릭 학교를 운영하고 혁명법에서 금지한 수도복을 입었다는 죄목으로 재판을 받게 되었다. 이들 가운데 다섯 명의 수녀들이 먼저 심문을 받았는데, 그들은 당당히 자신들은 가톨릭 신앙을 가르치기 위해 돌아왔다고 진술하고 10월 16일 사형 선고를 받았다. 10월 17일 사형 집행을 앞두고 그들은 밤새도록 주님의 수난기를 읽고 시편 51편과 시편 130편(De profundis)을 포함한 죽은 자를 위한 기도를 바친 다음, 사형 집행인의 수고를 덜어주기 위해 서로의 머리카락을 깎아주었다. 그들은 단두대로 향하면서 시편과 테 데움(Te Deum)을 노래하며 영광의 날을 맞이하는 환희 속에 용감하게 걸어갔다. 발랑시엔 주민들은 그들이 수녀이며 한때는 자신들의 스승이었던 사람임을 알고 슬픔과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이렇게 다섯 명의 수녀들은 단두대 위에서 천국의 문을 열고 올라갔다. 나머지 여섯 명의 수녀들도 같은 죄목으로 사형 선고를 받고 10월 23일 순교의 월계관을 받았다. 교황 베네딕토 15세(Benedictus XV)는 1920년 6월 13일 11명의 발랑시엔의 우르술라회 순교자들을 복자품에 올렸다. 그들은 순교한 날에 따라 10월 17일과 10월 23일에 축일을 기념한다.
복녀 마리아 나탈리아는 1728년 6월 12일 프랑스 북부 발랑시엔에서, 복녀 마리아 라우렌티나는 1747년 7월 9일 발랑시엔에서, 복녀 마리아 우르술라는 1746년 10월 6일 콩데쉬르레스코(Conde-sur-l’Escaut)에서, 복녀 마리아 루도비카는 1756년 9월 27일 콩데쉬르레스코에서, 복녀 마리아 아우구스티나는 1760년 6월 11일 캉브레(Cambrai)에서 태어나 발랑시엔의 우르술라회에 입회하여 수도자로 활동하다가 프랑스 혁명 중에 단두대 위에서 순교의 월계관을 받았다.♣
마리아 라우렌티나(10.17)
성인명 마리아 라우렌티나 (Maria Laurentine)
축일 10월 17일
성인구분 복녀
신분 수녀, 동정 순교자
활동지역 발랑시엔(Valenciennes)
활동연도 1747-1794년
같은이름 라우렌시나, 라우렌씨나, 로렌틴, 메리, 미르얌, 미리암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10월 17일 목록에서 프랑스 북부 발랑시엔에서 성 루도비코(Ludovicus)의 복녀 마리아 나탈리아(Maria Natalia, 또는 마리-조세핀 바노[Marie-Josephine Vanot])와 하느님께 봉헌한 네 명의 동료 동정 순교자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우르술라회(Ursulines)의 동정녀들로 1794년 프랑스 혁명 당시 가톨릭 신앙에 대한 증오로 사형 선고를 받고 단두대에 올라 시편 51편(Miserere, 하느님,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을 낭송했다고 기록하며 그들의 이름을 추가하였다. 네 명의 동료 순교자의 이름은 다음과 같다. 성 스타니슬라오(Stanislaus)의 복녀 마리아 라우렌티나(Maria Laurentina, 또는 잔-렌 프린[Jeanne-Reine Prin], 성 베르나르디노(Bernardinus)의 복녀 마리아 우르술라(Maria Ursula, 또는 히아신드-오귀스탱-가브리엘 불라[Hyacinthe-Augustine-Gabrielle Bourla], 성 프란치스코(Franciscus)의 복녀 마리아 루도비카(Maria Ludovica, 또는 마리-주느비에브 뒤크레[Marie-Genevieve Ducrez]), 예수 성심의 복녀 마리아 아우구스티나(Maria Augustina, 또는 마리-마들렌 데자르뎅[Marie-Madeleine Dejardins]이 그들이다.
이들 다섯 명의 수녀들은 1794년 10월 23일에 순교한 여섯 명의 수녀들과 함께 프랑스 혁명(1789~1799년) 중에 발랑시엔에서 순교한 11명의 우르술라회 순교자로 불린다. 우르술라회는 수도회의 소명대로 발랑시엔에서 소녀들을 위한 학교를 운영하고 있었다. 수많은 성직자와 수도자가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프랑스 혁명의 광풍 속에서 발랑시엔의 수녀들도 수도회와 학교가 폐쇄되는 아픔을 겪었지만, 수도 생활을 포기할 수 없어서 1792년에 인근 국경을 넘어 벨기에 몽스(Mons)의 우르술라회 수녀원으로 피신하였다. 오스트리아가 발랑시엔을 정복한 1793년에 몽스로 피신했던 수녀들이 돌아와 학교 문을 다시 열었다. 하지만 1794년 6월 오스트리아가 패배하면서 발랑시엔은 다시 프랑스령이 되었다. 이때부터 프랑스 혁명 정부의 공포정치가 절정에 달했다. 당시 발랑시엔 수녀원에는 모두 32명의 수녀가 있었는데, 1794년 8월 31일에서 9월 1일 사이에 혁명군이 입성하면서 모두 체포되었다. 그들은 혁명정부의 법령에 따른 선서를 하고 수녀원을 떠나라는 선택을 강요받았는데, 21명의 수녀는 죽음의 두려움 앞에서 혁명군의 요구대로 선서하고 풀려났다.
하지만 나머지 11명은 끝까지 수녀원을 지키겠다고 남았고, 정부의 승인 없이 가톨릭 학교를 운영하고 혁명법에서 금지한 수도복을 입었다는 죄목으로 재판을 받게 되었다. 이들 가운데 다섯 명의 수녀들이 먼저 심문을 받았는데, 그들은 당당히 자신들은 가톨릭 신앙을 가르치기 위해 돌아왔다고 진술하고 10월 16일 사형 선고를 받았다. 10월 17일 사형 집행을 앞두고 그들은 밤새도록 주님의 수난기를 읽고 시편 51편과 시편 130편(De profundis)을 포함한 죽은 자를 위한 기도를 바친 다음, 사형 집행인의 수고를 덜어주기 위해 서로의 머리카락을 깎아주었다. 그들은 단두대로 향하면서 시편과 테 데움(Te Deum)을 노래하며 영광의 날을 맞이하는 환희 속에 용감하게 걸어갔다. 발랑시엔 주민들은 그들이 수녀이며 한때는 자신들의 스승이었던 사람임을 알고 슬픔과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이렇게 다섯 명의 수녀들은 단두대 위에서 천국의 문을 열고 올라갔다. 나머지 여섯 명의 수녀들도 같은 죄목으로 사형 선고를 받고 10월 23일 순교의 월계관을 받았다. 교황 베네딕토 15세(Benedictus XV)는 1920년 6월 13일 11명의 발랑시엔의 우르술라회 순교자들을 복자품에 올렸다. 그들은 순교한 날에 따라 10월 17일과 10월 23일에 축일을 기념한다.
복녀 마리아 나탈리아는 1728년 6월 12일 프랑스 북부 발랑시엔에서, 복녀 마리아 라우렌티나는 1747년 7월 9일 발랑시엔에서, 복녀 마리아 우르술라는 1746년 10월 6일 콩데쉬르레스코(Conde-sur-l’Escaut)에서, 복녀 마리아 루도비카는 1756년 9월 27일 콩데쉬르레스코에서, 복녀 마리아 아우구스티나는 1760년 6월 11일 캉브레(Cambrai)에서 태어나 발랑시엔의 우르술라회에 입회하여 수도자로 활동하다가 프랑스 혁명 중에 단두대 위에서 순교의 월계관을 받았다.♣
마리아 나탈리아(10.17)
성인명 마리아 나탈리아 (Maria Natalia)
축일 10월 17일
성인구분 복녀
신분 수녀, 동정 순교자
활동지역 발랑시엔(Valenciennes)
활동연도 1728-1794년
같은이름 나딸리아, 메리, 미르얌, 미리암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10월 17일 목록에서 프랑스 북부 발랑시엔에서 성 루도비코(Ludovicus)의 복녀 마리아 나탈리아(Maria Natalia, 또는 마리-조세핀 바노[Marie-Josephine Vanot])와 하느님께 봉헌한 네 명의 동료 동정 순교자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우르술라회(Ursulines)의 동정녀들로 1794년 프랑스 혁명 당시 가톨릭 신앙에 대한 증오로 사형 선고를 받고 단두대에 올라 시편 51편(Miserere, 하느님,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을 낭송했다고 기록하며 그들의 이름을 추가하였다. 네 명의 동료 순교자의 이름은 다음과 같다. 성 스타니슬라오(Stanislaus)의 복녀 마리아 라우렌티나(Maria Laurentina, 또는 잔-렌 프린[Jeanne-Reine Prin], 성 베르나르디노(Bernardinus)의 복녀 마리아 우르술라(Maria Ursula, 또는 히아신드-오귀스탱-가브리엘 불라[Hyacinthe-Augustine-Gabrielle Bourla], 성 프란치스코(Franciscus)의 복녀 마리아 루도비카(Maria Ludovica, 또는 마리-주느비에브 뒤크레[Marie-Genevieve Ducrez]), 예수 성심의 복녀 마리아 아우구스티나(Maria Augustina, 또는 마리-마들렌 데자르뎅[Marie-Madeleine Dejardins]이 그들이다.
이들 다섯 명의 수녀들은 1794년 10월 23일에 순교한 여섯 명의 수녀들과 함께 프랑스 혁명(1789~1799년) 중에 발랑시엔에서 순교한 11명의 우르술라회 순교자로 불린다. 우르술라회는 수도회의 소명대로 발랑시엔에서 소녀들을 위한 학교를 운영하고 있었다. 수많은 성직자와 수도자가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프랑스 혁명의 광풍 속에서 발랑시엔의 수녀들도 수도회와 학교가 폐쇄되는 아픔을 겪었지만, 수도 생활을 포기할 수 없어서 1792년에 인근 국경을 넘어 벨기에 몽스(Mons)의 우르술라회 수녀원으로 피신하였다. 오스트리아가 발랑시엔을 정복한 1793년에 몽스로 피신했던 수녀들이 돌아와 학교 문을 다시 열었다. 하지만 1794년 6월 오스트리아가 패배하면서 발랑시엔은 다시 프랑스령이 되었다. 이때부터 프랑스 혁명 정부의 공포정치가 절정에 달했다. 당시 발랑시엔 수녀원에는 모두 32명의 수녀가 있었는데, 1794년 8월 31일에서 9월 1일 사이에 혁명군이 입성하면서 모두 체포되었다. 그들은 혁명정부의 법령에 따른 선서를 하고 수녀원을 떠나라는 선택을 강요받았는데, 21명의 수녀는 죽음의 두려움 앞에서 혁명군의 요구대로 선서하고 풀려났다.
하지만 나머지 11명은 끝까지 수녀원을 지키겠다고 남았고, 정부의 승인 없이 가톨릭 학교를 운영하고 혁명법에서 금지한 수도복을 입었다는 죄목으로 재판을 받게 되었다. 이들 가운데 다섯 명의 수녀들이 먼저 심문을 받았는데, 그들은 당당히 자신들은 가톨릭 신앙을 가르치기 위해 돌아왔다고 진술하고 10월 16일 사형 선고를 받았다. 10월 17일 사형 집행을 앞두고 그들은 밤새도록 주님의 수난기를 읽고 시편 51편과 시편 130편(De profundis)을 포함한 죽은 자를 위한 기도를 바친 다음, 사형 집행인의 수고를 덜어주기 위해 서로의 머리카락을 깎아주었다. 그들은 단두대로 향하면서 시편과 테 데움(Te Deum)을 노래하며 영광의 날을 맞이하는 환희 속에 용감하게 걸어갔다. 발랑시엔 주민들은 그들이 수녀이며 한때는 자신들의 스승이었던 사람임을 알고 슬픔과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이렇게 다섯 명의 수녀들은 단두대 위에서 천국의 문을 열고 올라갔다. 나머지 여섯 명의 수녀들도 같은 죄목으로 사형 선고를 받고 10월 23일 순교의 월계관을 받았다. 교황 베네딕토 15세(Benedictus XV)는 1920년 6월 13일 11명의 발랑시엔의 우르술라회 순교자들을 복자품에 올렸다. 그들은 순교한 날에 따라 10월 17일과 10월 23일에 축일을 기념한다.
복녀 마리아 나탈리아는 1728년 6월 12일 프랑스 북부 발랑시엔에서, 복녀 마리아 라우렌티나는 1747년 7월 9일 발랑시엔에서, 복녀 마리아 우르술라는 1746년 10월 6일 콩데쉬르레스코(Conde-sur-l’Escaut)에서, 복녀 마리아 루도비카는 1756년 9월 27일 콩데쉬르레스코에서, 복녀 마리아 아우구스티나는 1760년 6월 11일 캉브레(Cambrai)에서 태어나 발랑시엔의 우르술라회에 입회하여 수도자로 활동하다가 프랑스 혁명 중에 단두대 위에서 순교의 월계관을 받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