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敎文化財 (9) 湖南地方(2)
扶安 來蘇寺 -全北 扶安郡 鎭西面
(01) 來蘇寺一圓 -전라북도기념물 제78호 -觀音峰중턱에서 본 모습 -扶安郡 鎭西面
邊山半島에 있으며, 조그만 河川이 來蘇寺앞을 흘러 곰소만으로 들어가며, 來蘇寺뒤에는 바위를 깎아 세운 듯한
蓬萊山의 佳人巖이 병풍처럼 둘러 있고, 절 入口에는 약 50년된 울창한 전나무들이 양쪽으로 500m나 늘어서 있다.
來蘇寺는 百濟 武王 34년(633) 惠丘頭陀가 創建하고, ‘蘇來寺’라고 했으나 ‘來蘇寺’로 이름을 바꾸었는데 바뀐
까닭은 확실하지 않으며 그 時期는 壬辰倭亂以後로 추정하고 있다. 境內에는 大雄寶殿(보물 291호)과 設禪堂,
寶鐘閣, 扶安郡 邊山面의 實相寺터에서 옮겨 세운 蓮萊樓가 있으며, 高麗時代의 銅鐘(보물 제277호)과
三層石塔(전북유형문화재 제124호) 등이 있다. 附屬庵子로 靑蓮庵·地藏庵이 있다. (*萊: 명아주 래 *陀: 비탈질 타)
(02) 扶安 來蘇寺 大雄寶殿 -보물 제291호 -全北 扶安郡 鎭西面
大雄寶殿은 釋迦牟尼를 중심으로 文殊菩薩과 普賢菩薩이 夾侍한 佛殿으로 朝鮮 仁祖 11년(1633) 淸旻大師가
절을 改築할 때 建立했다고 전한다. 규모는 앞면 3칸·옆면 3칸의 팔작지붕 多包樣式인데, 밖으로 뻗쳐 나온
部材들의 포개진 모습은 우리나라 옛 建築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건물 앞쪽門에 달린 문 살은 꽃무늬로
彫刻해 당시의 뛰어난 彫刻솜씨를 엿보게 한다. 建物內部 壁體윗부분의 部材끝은 연꽃 봉오리모양으로 裝飾하고,
보머리에는 龍이 물고기를 물고 있는 모습을 나타내 건물의 華奢함을 더해 준다. 천장은 우물천장으로 꾸미고,
佛像뒤쪽壁에는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것 중에서 가장 큰 ‘白衣觀音菩薩像’을 그렸다. 工藝價値가 높은 문살彫刻과
獨創的인 裝飾物등 朝鮮中期以後의 建築樣式을 가늠할 수 있는 중요한 건물이다.
(*夾: 낄 협 *旻: 가을하늘 민 *奢: 사치할 사 *薩: 보살 살 *飾: 꾸밀 식)
(03) 扶安 開巖寺 大雄殿 꽃살문 무늬
(04) 扶安 來蘇寺 銅鍾 -보물 제277호
高麗時代銅鐘의 樣式을 잘 보여주는 종으로 높이 103㎝, 입 지름 67㎝이다.
鐘의 上·下帶에는 덩굴무늬 띠를 두르고, 어깨부분에는 꽃무늬로 裝飾하했으며,
4개의 四角形乳廓에는 9개의 乳頭가 있다. 撞座는 연꽃으로 장식하고, 鐘身에는
三尊像을 구름위에 새겼다. 가운데 本尊佛은 활짝 핀 연꽃위에 앉아 있고,
左·右양쪽에 夾侍佛이 서 있다. 頂上部에는 音筒과 종을 매다는 고리인 龍鈕가 있다.
高麗 高宗 9년(1222) 靑林寺鐘으로 만들었으나, 朝鮮 哲宗 元年(1850) 來蘇寺로 옮겼다.
韓國鐘의 傳統을 잘 繼承한 종으로, 그 표현이 精巧하고 寫實的이어서 高麗後期의
傑作으로 손꼽힌다. (*廓: 둘레 곽 *撞: 칠 당 *鈕: 인 꼭지 뉴)
扶安 開巖寺 -扶安郡 上西面
(05) 扶安 開巖寺 大雄殿 -보물 제292호 -扶安郡 上西面
울금바위를 등지고 있는 南向의 大雄殿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多包系팔작지붕建物로, 朝鮮 仁祖 14년(1636)
戒浩大禪師가 重建하고, 正祖 7년(1783)과 1913년에 重修했다. 건물규모에 비해 우람한 기둥을 사용해 安定感을
주며, 栱包의 外部彫刻이 힘있게 처리해 朝鮮初期 手法을 나타내며, 建物內·外部의 龍頭 및 鳳凰등의 彫刻과
佛壇위의 화려한 닫집은 洗鍊美를 보이고 있다. 17~18세기에 前面을 重視하는 경향으로 앞면 中央칸에는
四分閤의 꽃살문을, 左·右칸에는 井字살문을 3짝씩 달고, 옆면에는 앞쪽 칸에 각각 외짝문의 출입구를 만들었다.
佛壇에는 釋迦三尊佛을 奉安하고 위에는 닫집을 설치했으며, 建物內·外部를 연꽃, 龍, 鳳凰등 佛敎의 象徵物로
가득 장식해 부처님이 주재하는 佛國土를 상징하고 있다. (*栱: 두공 공 *閤: 쪽문 합)
(06) 扶安 靑林里 石佛坐像 -전라북도유형문화재 제123호 -開巖寺 地藏殿佛壇
扶安 靑林里 石佛坐像은 靑林寺터에 있던 佛像으로 開巖寺 地藏殿에 모셨으며, 원래 목과 몸체부분이 떨어져
있었는데 近來에 復原했다. 頭巾은 등부분까지 길게 늘어져 있고, 오른손 위에 왼손을 포갠 뒤 양손의
엄지 손가락을 곧게 펴 맞대고, 손바닥으로 구슬을 감싸 쥐고 있다. 自然石받침대 위에 연꽃 잎을 彫刻한
八角形 臺座 위에는 무늬 없는 낮은 장구모양의 돌을 올려 놓았으며, 맨 위에는 활짝 핀 연꽃모양의 臺座를
올렸는데 뒤집어져 있다. 彫刻手法으로 보아 高麗時代 作品으로 推定된다.
高敞 兜率山 禪雲寺 –全北 高敞郡 雅山面 兜率山
(01) 高敞 禪雲寺 萬歲樓 -보물 제2065호 –高敞郡 雅山面 兜率山
禪雲寺 萬歲樓는 光海君 12년(1620) 건립한 대양루가 燒失되어 英祖 28년(1752) 再建한 정면 9칸, 측면 2칸의
翼工系 맞배지붕 건물이다. 처음에는 重層樓閣으로 지었으나 單層建物로 再建했는데, 이는 樓閣을 佛殿의
延長空間으로 꾸미는 朝鮮後期 寺刹空間의 變化傾向을 보여 주고 있다. 寺刹樓閣은 정면 3칸이 대부분이며 5칸,
7칸규모도 있으나 萬歲樓는 가장 큰 9칸이다. 萬歲樓의 가운데 3칸은 앞뒤 平柱위에 대들보를 걸고,
左右 각 3칸은 가운데 高柱를 세워 맞보를 거는 방식을 취했는데 하나의 건물에서 두가지 방식으로 보를 걸어
構造的安全과 樓閣의 중앙공간을 강조하고 있다. (*敞: 시원할 창 *兜: 투구 도 *率: 거느릴 솔)
(02) 高敞 禪雲寺 大雄殿 -보물 제290호 -高敞郡 雅山面
禪雲寺는 兜率山북쪽기슭에 있는 절로 新羅 眞興王이 세웠다는 說과 百濟 高僧 黔丹禪師가 세웠다는 두가지 說이
전하고 있으나 가장 오래된 朝鮮後期의 사료에는 眞興王이 세우고 黔丹禪師가 改築했다고 기록했다.
現建物은 朝鮮 成宗 3년(1472)에 개축했으나 壬辰倭亂때 燒失되어 光海君 5년(1613)에 重建했다. 앞면 5칸·
옆면 3칸의 多包樣式의 맞배지붕으로 옆면에는 높은 기둥 두 개를 세워 간단히 처리했다. 전체적으로 기둥사이의
간격이 넓고 建物幅이 좁아 길면서도 안정된 外形을 지니고 있다. 건물 뒤쪽의 처마는 간략하게 처리되어
앞뒤 처마의 모습이 다르며, 벽은 나무板의 널빤지벽이다. 內部는 우물천장을 설치하고, 丹靑壁畵가 아름답다.
朝鮮中期의 建築답게 纖細하고 裝飾的인 구성과 빗살 여닫이문이 화려하다. (*黔: 검을 검 *纖: 가늘 섬)
(03) 禪雲寺 兜率庵 內院宮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25호
高敞 禪雲寺의 4個庵子의 하나인 兜率庵의 내원궁은 험준한 바위 위에 세운 法堂으로 上兜率庵이라고 부르며,
朝鮮 中宗 6년(1511)과 肅宗 20년(1694), 純祖 17년(1817)에 重建했다. 이 건물은 巨大한 바위 위 扁平한 곳에
建立해 基壇없이 圓形주춧돌에 圓形기둥을 세운 팔작지붕建物이다. 壁에 亞字形 2짝여닫이문을 달았는데,
가운데 칸과 옆 칸은 그 간격을 다르게 해 禮佛空間을 크게 하했다. 天障은 천장 속을 가리고 있는 우물天障이며,
金銅地藏菩薩坐像(보물 제280호)을 奉安했다.
(04) 高敞 禪雲寺 兜率庵 金銅地藏菩薩坐像 -보물 제280호
머리에 頭巾을 쓰고 있어 高麗後期地藏菩薩그림에서 보이는 樣式이다. 일반적으로 地藏菩薩은 다른佛像과 다르게
頭巾을 쓰고 있으며, 地獄에서 苦痛받는 衆生을 救濟한다는 의미를 가진다. 둥근 얼굴은 端雅한 인상이며, 목에서
어깨로 내려가는 線이 부드럽다. 上·下體모두 균형을 이루고 있으며, 띠를 매고 배가 들어가는 등 寫實的으로
표현했다. 어깨를 감싼 두꺼운 옷은 배에서 띠매듭을 짓고, 다리에는 간략한 몇 가닥의 옷주름을 나타냈다.
앉은 자세는 오른발을 왼쪽 무릎에 올리고 발을 실감나게 표현했으며, 오른손은 가슴에, 왼손은 배에 들어
작은 수레바퀴 모양의 물건을 잡고 있다. 高麗後期의 佛像樣式을 충실히 反映하고 있는 優雅하고 세련된
當代最高의 작품이다. (*巾: 수건 건)
(05) 高敞 禪雲寺 東佛庵址 磨崖如來坐像 -보물 제1200호
兜率庵으로 올라가는 길옆 絶壁에 새긴 磨崖如來坐像으로, 머리주위를 깊이 파고, 아래로 내려가면서 점차
두껍게 새겼다. 平板的이고 네모진 얼굴은 도금 딱딱하지만 눈꼬리가 치켜 올라간 가느다란 눈과 우뚝 솟은 코,
일자로 도드라지게 나타낸 입술 등으로 얼굴 전체에 파격적인 微笑를 띄고 있다. 목에는 3개의 가느다란 주름이
있으며, 머리가 거의 맞붙은 上體는 四角形인데 가슴이 넓고 平板的으로 量感없는 형태를 보이고 있다.
옷은 양어깨를 감싸고 있으며 옷주름은 線을 이용해 형식적으로 표현하고, 가슴아래로는 치마의 띠매듭이
선명하게 가로질러 새겼다. 두 손은 體軀에 비해 큼직하고 투박해 寫實性이 떨어지는데 이는 月出山에 있는
高麗特有의 磨崖佛樣式이다. 高麗初期의 磨崖佛系統佛像으로 주목받고 있으며, 특히 가슴의 腹臟에서
東學農民戰爭때의 秘密記錄을 발견해 더욱 注目받고 있다. (*軀: 몸 구)
(06) 高敞 禪雲寺 懺堂庵 大雄殿 -보물 제803호
禪雲寺에는 많은 庵子가 있었으나 지금은 東雲庵·兜率庵·石床庵·懺堂庵만 남아있다. 懺堂庵 大雄殿은
新羅 眞平王의 부탁으로 義雲和尙이 건립했다고 하는데 現建物은 朝鮮時代의 것이다.
규모는 앞면 3칸·옆면 3칸의 맞배지붕建物로, 앞면은 18세기의 多包樣式이며 뒷면은 高麗時代의 部材를
재활용한 것으로 보이는 柱心包樣式이다. 고려시대 다른 건축물과 비교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되는
건물이다. (*兜: 도솔천 도 *率: 거느릴 솔 *懺: 뉘우칠 참)
(07) 高敞 禪雲寺 懺堂庵 石造地藏菩薩坐像 -보물 제2031호
高麗末~朝鮮初에 유행한 頭巾쓴 地藏菩薩坐像으로, 佛敎繪畵에서 많이 그린 圖像이다. 溫和한 표정과 불룩한 입술,
양쪽에서 如意頭形態로 마무리된 띠 장식, 둥근寶珠를 든 모습, 가슴의 띠 매듭 등은 高麗 末 菩薩像樣式을
잘 반영하고 있다. 이地藏菩薩坐像은 均衡잡힌 比例, 주름잡은 섬세한 頭巾등 造形이 優秀하고, 地藏의 圖像을
정확하게 具現헤 麗末鮮初의 地藏圖像硏究에 귀중한 事例이다. 이時期에 金銅과 木彫 地藏菩薩像은 몇 점 있으나,
石造地藏菩薩像中 保存狀態가 거의 완벽한 작품이다.
文殊寺 -禪雲寺의 末寺 -高敞郡 古水面 文殊山 (*殊: 다를 수)
(08) 文殊寺 大雄殿 -전라북도유형문화재 제51호 -高敞郡 古水面
文殊山중턱에 있는 高敞 文殊寺는 百濟 義慈王 4년(644) 慈藏이 창건했다. 唐나라의 淸凉山에서 修行하던
慈藏이 꿈속에서 文殊菩薩을 만나 부처님의 뜻을 깨닫고 돌아왔는데, 우연히 이곳을 지나가다가 땅의 形勢가
唐나라 淸凉山과 비슷하다고 절을 짓고 文殊寺라 이름 지었다고 전한다. 그후 朝鮮 孝宗 4년(1653)과
英祖 40년(1764)에 重創했다. 釋迦牟尼를 모신 大雄殿은 建立年代가 확실하지는 않으며, 高宗 13년(1876)년
高敞縣監 김성로의 施主로 묵암대사가 重建했다고 한다. 앞면 3칸·옆면 3칸의 작은 건물로 多包樣式建物에
맞배지붕을 올린 것이 특이하다.
- 佛敎文化財 (10) 湖南地方(3)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