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렌 켈러(Helen Keller, 1880년∼1968년)
사흘만 세상을 볼 수 있다면 첫째날은 사랑하는 이의 얼굴을 보겠다. 둘째날은 밤이 아침으로 변하는 기적을 보리라. 셋째날은 사람들이 오가는 평범한 거리를 보고 싶다. 단언컨대, 본다는 것은 가장 큰 축복이다.
-사흘만 세상을 볼 수 있다면.The Story of My Life. Helen Keller. 1905
세상은 고난으로 가득하지만, 고난의 극복으로도 가득하다.
장애는 불편하다. 그러나 불행하지는 않다.
미국의 사회 운동가. 들을 수도 볼 수도 말할 수도 없었으나 이 삼중고의 장애를 극복하고 장애인 인권 운동가, 사회주의자 등 다방면으로 활동한 인물.
1880년 6월 27일 앨라배마주 터스컴비아에서 부유한 가정의 딸로 태어나 자랐으나, 생후 19개월 때 앓은 뇌척수막염으로 인해 시청각장애인이 되어, 시각장애, 청각장애, 언어장애라는 3중고를 가지게 되었다. 당연히 정상적인 교육이 될 리 없었고, 대여섯 살이 될 때까지도 물건을 던지거나 사람을 할퀴거나 때리는 정도로밖에 의사표현을 할 수 없었다. 6살이 되던 무렵에 부모는 볼티모어에 사는 유명한 안과 의사 줄리안 차이소름 박사가 장님의 눈을 뜨게 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고, 헬렌을 치료할 수 있을까 해서 데려갔다. 그러나 시신경이 남김없이 모두 죽은 후라서 치료는 불가능했고, 대신 교육을 충분히 시킬 수 있다는 의사의 말에 따라 장애인 문제에 관심이 많던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 박사를 소개받는다. 그를 만난 부모는 "퍼킨스 맹인 학교"를 추천받고, 그 학교에 의뢰하여 가정교사를 부탁한다. 이때 온 사람이 유명한 앤 설리번이다.
앤 설리번은 응석받이로 자랐던 헬렌에게 극도의 인내심을 가지고 손바닥에 글씨를 쓰는 방식으로 언어를 가르치려 했다. 물 펌프에서 처음으로 'water'의 의미를 깨닫게 되는 에피소드는 매우 유명하다. 이후 8살때 퍼킨스 맹인 학교에 입학하여 정식 교육도 받게 된다. 6년 후에는 뉴욕으로 가서 라이트 휴먼스 농아 학교를 다니고, 그 이후에는 호렌스 만 농아 학교를 다니는데, 이 학교의 선생인 새라 풀러가 목의 진동과 입의 모양을 만지고 느끼게 하는 방법으로 헬렌에게 말하는 법을 처음으로 가르친다. 이 방법으로 말은 할 수 있게 된다.
그 후 동생인 밀드레드와 함께 케임브리지 여학교에 다닌 뒤 16세의 나이에 래드클리프 여대에 입학하고, 04년 졸업할 무렵에는 5개 국어를 습득했다. 이후에는 활발한 사회, 봉사 활동(특히 장애인 인권 운동)을 했다.
서리 임금님 사건
오늘날에는 우연의 일치로 치부되지만 동화 표절설이 있다.
1891년에 헬렌이 쓴 단편 동화인 <서리 임금님>은 마거릿 캔비가 쓴 <서리의 여신>과 유사해서 표절 의혹을 받았다. <서리 임금님>은 낙엽을 울긋불긋 칠한다는 내용인데, 그 내용이 똑같았다는 이유였다. 여러 의견이 있지만 고의적인 표절이 아니라, 1888년 무렵에 보스턴에 갔을 때 소피아 홉킨스에게 들은 내용을 헬렌이 무의식적으로 쓴 게 아니냐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고 한다. 캔비는 고의가 아니라고 판단해서 넘어갔지만, 학교에서는 '서리의 여신'을 표절한 것 아니냐며 다그쳤다고 한다. 이게 헬렌에게는 어지간히 상처가 되었는지 헬렌 켈러의 후반부 생애를 다루는 전기에서는 이 에피소드가 꼭 언급된다.
장애의 극복 사례 및 장애인 인권운동가로만 알려진 것과는 좀 다르게, 헬렌은 1909년(29세)부터 사회당에 가입한 사회주의자로 허버트 조지 웰즈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그 외 작가로서의 저술 활동도 활발하고 여성 참정권, 인종차별반대, 장애인 복지, 노동자 보호 운동 등 사회 운동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허나 그녀가 열렬한 사회주의자였다는 것은 당시 매카시즘 때문인진 모르겠지만 미국 대중들에게도 잘 알려지지 않았고, 국내에서도 관심을 갖고 관련 서적과 자료를 찾아보지 않았다면 성년기 이후 헬렌의 활동은 잘 알려지지 않은 편이다.
사실 그녀는 1차 대전 연간의 미국 사회주의 운동과 반전 운동을 보면 반드시 이름이 언급되는 사람이다. 사회주의자로서의 헬렌 켈러를 다룬 레디앙의 기사. 1912년의 대선에서 유진 뎁스가 패배하자 이후 사회당의 소위 개량주의 노선을 비판하면서 전투적 노동자 단체인 IWW(세계 산업노동자 동맹)에 가입했다. 이후에도 죽기 전까지 사회주의 관련 운동에 앞장섰다. 이러한 그녀의 행보 때문인지 한동안은 FBI에게 감시당하기도 했다고 한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서프러제트이기도 하다. 여성 참정권 운동에 참여했다. "고통을 감수하며 싸우지 않는 한 아무것도 얻을 수 없습니다"라는 말을 남겼고, 말년에는 이것과 더불어 사회주의 등의 정치적 성향을 드러낸다는 이유로 비난을 받기도 했다.
대학을 졸업한 헬렌은 작가가 되어 자서전을 포함한 여러 책을 쓰면서, 보스턴 근처인 랜섬에 정착했다. 한편 언어를 깨친 이후로도 그녀의 성장 과정은 그리 순탄치 않았다. 그녀의 곁에는 항상 애니와 (그 후임인) 폴리 톰슨이라는 보조자가 붙어 손바닥에 모든 정보를 전달해주어야 했다. 그것을 수십년 동안 계속해온 탓에 톰슨의 오른손은 비정상적으로 커지고 핏줄이 튀어나올 정도였다.
또한 애니는 가방끈이 짧았던 탓에 헬렌의 수업을 청강할 때 따라잡기 힘들어했다. 그리고 처음에는 밥벌이로 시작한 일이었지만 금전 감각이 부족하며 완벽주의적인 성격 탓에 후원자들과 마찰도 자주 빚었고, 헬렌이 책을 써서 번 저작료와 강연비 등으로 생계를 잇는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헬렌의 아버지인 아서가 사업에 실패하며 가세가 기울게 되자, 헬렌 부모가 딸의 후원금을 착복했다는 의혹도 있다.
다행히 헬렌이 자기 힘으로 돈을 벌 수 있게 됐으니 애니 입장에선 가르친 보람이 있었다. 실제로 앤 설리번의 한 친구가 앤을 칭찬하기 위해서 "당신이 없으면 헬렌은 아무 것도 아니에요."라고 말하자, 애니는 "그럼 내가 헛되이 산 게로군요."라고 답했다고 한다.
한편 1915년에는 비서인 피터 페이건(Peter Fagan)에게 청혼을 받았으나, 헬렌의 가족들이 반대해서 헤어졌다.
헬렌은 장수했으나 그만큼 주변 사람들을 먼저 떠나보냈다. 먼저 애니가 1936년에 세상을 떴고, 2차대전이 끝난 뒤에는 코네티컷에 있던 집에 불이 나서 그 동안 쓴 원고가 대부분 소실됐다. 당시 애니의 전기를 쓰던 헬렌은 이 화재 때문에 원고를 다시 써야 했고 1958년에 출간했다. 폴슨이 1960년에 사망한 뒤에는 은퇴했고, 헬렌은 노환으로 은퇴한 뒤 후임 도우미인 에블린 시드(Evelyn Sid)와 집에 머물다가 1968년에 향년 87세로 사망했다. 그녀의 88번째 생일을 불과 26일 앞둔 때였다.
어릴 적 일만 널리 알려지고 정작 성인이 된 이후 활동들은 거의 알려지지 않은 편이다. 이는 당시 심하게 반사회주의적인 미국 분위기 때문인 영향이 크며 역경을 이겨낸 삶의 전반기만 나오고 사회주의 활동을 한 중반기 이후는 그저 복지활동, 장애인 인권 운동을 했다는 말만 남기고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대부분 생략하는게 보통이다. 실제 헬렌 켈러의 위인전 대다수가 설리번 선생과 함께 한 어린 시절이 내용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심한 경우 100페이지가 넘는 위인전에서 대학 졸업 이후의 활동을 한두 줄로 때운 경우도 있다. 그래서 위인전 독자들에겐 장수하진 못했다는 인상을 주기 쉬우나 헬렌 켈러는 88세까지 천수를 누렸다. 게다가 1960년대 후반까지 생존했기 때문에 그녀가 어른이 되고 나서의 활동을 한 사진이나 영상도 많이 남아있다. 본래 위인전이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는 만큼 해당 인물의 어린시절을 창작까지 과도하게 곁들이며 분량을 증가시키는데 헬렌 켈러의 위인전은 그러한 편성의 극치를 달린다. 국내에서도 헬렌 켈러 위인전이 처음 출간될 때가 냉전기였으니 만큼 당연히 페미니즘과 사회주의 활동을 한 부분은 철저하게 삭제되었고, 장애인이나 인권운동쪽으로 초점을 맞춘 정도의 내용으로 간략하게 나왔다. 이러다보니 어린이들 중에서는 헬렌켈러가 3중고를 이겨낸 건 알겠는데 그래서 뭘 한 거지?라며 의문을 가지는 경우가 많다. 사실 어른들조차도 정작 헬렌켈러가 뭐 했는지 잘 모르는 경우가 대다수. 다만 인터넷이 보급되고 헬렌 켈러의 사회주의 행적이 어느정도 알려진 이후로는 헬렌이 성인이 된 이후의 활동들도 상세하게 다루는 위인전이 나왔다.
1999년부터 시작된 미국의 25센트짜리 동전 50개주 시리즈의 앨라배마 판의 모델이다.
1937년 일제강점기 시절 한반도를 방문한 적이 있는데, 서울(당시는 경성)에서 강의를 마치고 평양으로 향하는 기차가 개성에 잠시 정차했을 때 그 시간을 놓치지 않고 강연을 했다고 한다. 대구에도 방문했다. 그리고 이후 한국전쟁 때도 방한한 적이 있다.
헬렌 켈러와 설리반 선생의 일화를 그린 유명한 영화로 1962년작인 <Miracle Worker>이 있다. 영화 <보니 앤 클라이드>의 감독인 아서 펜이 연출한 작품으로, 이 영화로 헬렌 켈러 역을 맡은 패티 듀크는 16살의 나이에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받았고, 설리반 선생 역을 맡은 앤 밴크로프트는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설리반 선생이 헬렌 켈러에게 물 펌프를 통해 처음으로 'water'의 의미를 깨닫게 만드는 그 유명한 에피소드도 영화 속에서 등장한다. 특히 1962년작은 헬렌 켈러 역과 설리반 선생 역의 엄청난 연기로도 유명한데, 순정만화 유리가면에서도 이와 관련된 내용이 나온다. 무려 10분간이나 대사 없이 몸싸움만으로 이루어진 장면과 Water을 깨닫는 장면을 보면 그야말로 신내림급 연기력이 폭발한다. 2000년에 디즈니에서 이 영화를 리메이크했다.
2005년작 영화 블랙이 헬렌 켈러와 앤 설리반의 스토리를 각색해 제작된 인도 영화이다. 잘 안 알려진 영화이지만 관심있는 분이라면 꼭 보길 바란다. 자세한 내용은 블랙 참조.
헬렌 켈러가 어떻게 말을 배우게 되었는지 설리번 선생과 직접 시연하는 영상. 영어, 국어 자막 버전 동영상을 보면 말하는 사람의 목젖에 손을 대고 입술을 손가락으로 만져 진동과 입모양으로 내용을 전달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교육법으로 처음 가르친 사람이 호렌스 만 농아 학교의 교사 새라 풀러였고, 이후 설리번 선생도 이 교육법을 익혀 헬렌에게 가르쳤다.
일본과도 상당히 인연이 있는데 1937년에 일본을 방문했고, 아키타현에 가서 아키타견 하치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아키타견 1마리를 얻어가지고 와서 길렀다. 그 아키타견의 이름이 카미카제였는데 털이 부들부들했는지 헬렌 켈러가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일본 방문 당시 헬렌은 지갑을 도둑맞았는데, 이 사실이 알려지자 일본인들이 '일본을 나쁘게 생각하지 말아달라'고 애걸하며 그녀 앞으로 돈과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참고로 같은해 일본은 난징대학살을 저질렀다(...) 서양인에겐 설설 기고 동양인은 학살
중국도 방문하고 싶다고 본인이 몇차례 언급한 적이 있으나, 당시 중국의 상황이 군벌, 2차 세계대전, 국공내전등등으로 난장판이라 성사되지는 않았다.
레즈비언 아니냐는 이야기도 있다. 영어의 슬랭 가운데 헬렌 켈러와 앤 설리번 선생이 연인이었다는 속설을 반영한 'Pulling a Helen Keller'라는 표현도 있다.
헬렌 켈러의 성 Keller는 독일 쪽의 성으로, keller는 독일어로 "저장고"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영어 단어 cellar와 같다. 헬렌 켈러의 조상은 독일이 아니라 스위스에서 왔다고 한다. 스위스의 국어 중 하나가 독일어이니 이상한 일은 아니다.
다소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그녀는 스스로가 장애인임에도 장애인을 열등하게 표현하는 우생학을 지지하며 이에 대해 찬동한 적이 있다. 지금 시점에서는 매우 충격적인 사실이지만 당시의 분위기와 지식인들의 풍조가 그러했으며 그녀가 살아있을 때는 아직 장애에 대한 개념이 명확하지 않던 시기였기 때문에 이러한 판단을 한 것으로 보인다. 거기다 그녀와 인연이 있었던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 역시 우생학에 찬동했기에 영향을 받았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