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자베스 1세 (1533~1603)
잉글랜드 튜터왕조의 여왕으로 부왕인 '헨리8세'와 헨리8세의 두번째왕비인 '엔 불린' 사이에서 태어났다. 헨리8세는 케서린왕비와 이혼하고 엔불린과 결혼하기 위해서 카톨릭과의 단절을 선언하고 영국국교회를 창시한 인물이었다. 헨리 8세는 케서린과의 이혼 사유로 대를 이을 왕자가 없다는것을 내세우고 일방적인 이혼을 선언했으며 시녀출신인 엔불린과 두번째 결혼을 했다. 따라서 엘리자베스가 태어났을때 헨리8세의 실망감은 매우컷고, 케서린과의 이혼을 합리화 하기 위해서 엔불린에게 간통죄를 뒤집어 씌어 처형시켰다. 그와중에
엘리자베스는 왕위 계승권을 박탈되었고, 동생인 에드워드가 태어나자 그녀의 입지는 더욱 좁아지게 되었다.
1547년 헨리8세가 죽고 에드워드가 왕위를 이었으나 병약한탓에 일찍 요절하였고, 장녀인 메리가 왕위를 계승하게 되면서 이제는 생명의 위험까지 느끼게 된다. 엘리자베스의 이복언니인 메리1세는 카톨릭복귀 정책및 스페인과의 동조를 추진했고, 이에 반발한 반란이 확대되면서 그녀도 혐의를 받아 1554년에 런던탑에 유폐되는등 다난한 소녀시절을 보냈다. 석방된후에는 '어스컴'에게 학문을 배우고 외국어를 공부하여 역사 음악 신학에 능통하게 되었다.
메리1세가 죽자 25살의 나이로 영국왕에 즉위하였으며, 스페인왕 펠리페에게 구혼을 받았으나 이를 거절하였다. 즉위하면서 카톨릭에서 다시 영국국교회로의 회귀를 추진했고, 스페인 및 로마교황청과는 사이가 멀어지게 된다. 영왕은 수장령과 통일령을 다시 부활시키면서 국왕을 종교상의 최고 수장으로 인정받도록 하고, 전국민에게 국교회를 강제로 지키게 하면서 국교의 확립을 꾀했다. 더불어 카톨릭과 청교도를 억합하여 종교통합을 추진하면서 메리1세시대와 마찬가지고 종교문제로 화형당하는 사람들이 빈번하게 되었다.
정치면에서는 의회에 대하여 강경책과 유화책을 같이 사용하면서 권한을 축소시켰고, 45년동안의 치세중에 의회를 열지 않은건 10회뿐이었다. 출밀원 중심의 정치를 폈고, 정치범을 위한 성실청 외에도 종교범을 위하여 특설고등법원을 설치했다. 세실,월싱엄을 중용하고 베이컨등의 진언을 받아들였으며 지방에는 치안판사를 임명하여 지방행정을 담당하게 했다.
또한 화폐의 개혁을 단행하여 물가의 앙등을 억제하였고, 도제조례로 노동시간 임금등을 정하였으며 빈민구제법으로 토지를 잃은 농민을 구제를 시도했다. 또한 중상주의 정책을 채용하였으며 모험상인조합에게 독점적인 면허장을 교부하여 보호하였고, 회사조직에 많은 특허장을 교부하면서 해외진출을 시도했다.
해외진출면에서는 1600년에 동인도회사가 설립이 되었고, 북아메리카의 버지니아에 식민지를 건설했으며, 사략해적을 운영하여 스페인의 해상지배를 위협했다. 또한 네덜란드의 독립을 배후에서 지원하여 스페인의 세력약화를 시도했다. 이에 스페인은 스코틀랜드의 여왕이었다가 잉글랜드로 망명한 메리스튜어트를 여왕으로 옹립하고, 무적함대를 파견하여 무력으로 잉글랜드를 제압하고자 했다. 이에 메리스튜어트는 엘리자베스1세의 명령으로 처형당했고, 무적함대는 프랜시스 드레이크가 지휘하는 함대에 의해 칼레해전에서 참패함으로써, 스페인은 몰락하게 되고 잉글랜드는 스페인을 제치고 해상으로 진출하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
헨리8세가 기초를 세운 절대왕정을 엘리자베스1세가 확립함으로써 영국은 그후 300년에 걸친 해상지배의 기반을 쌓게 되었고, 세익스피어, 베이컨, 스펜서등 학자와 문인들을 배출하면서 문화적 황금기에 도래하게되었다. 이리하여 여왕은 온갖 영광의 상징이 되었고 잉글랜드의 절대왕정은 절정에 이르르게 되었다. 엘리자베스 1세는 결혼을 하지 않은채 1603년 죽었고, 제임스 1세가 후계자로 즉위했다.
첫댓글 다섯개 님의 요청으로 올립니다... 대충쓴건데도 힘드네요;ㅅ;
오홋..ㅎㅎ 감사합니다 !
저도 이걸 영어학교 숙제로 영작해가야 가는데에 참고해야겠네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