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프란볼루 6 - 케르반사라이 진지하느를 보고 샤프란볼루의 골목을 구경하다!
5월 15일 앙카라 에서 샤프란볼루 Safranbolu 에 도착해 신시가지 크란쿄이
를 거쳐 구시가지 오래된 차르쉬 Carsi 마을에 이르러.....
약재 및 향신료로 쓰였던 사프란 꽃 에서 유래한 오래된 마을을 구경합니다.
그러고는 17세기에 실크로드의 "케르반 사라이 진지하느" 를 찾아 들어가는데
낙타 와 말 에다가 비단이며 진귀한 보물 을 싣고는 사막을 넘고
강을 건너서 험한 산을 넘어 하룻밤 묵는 숙소가... 이런 캐라반 사라이 입니다.
그런데 1402년 7월 20일 여기 샤프란볼루에서 멀지 않은 쿠북 에 있는
벌판에서 오스만 투르크의 술탄 바예지드 1세 와 티무르 제국의
티무르군 이 운명의 전투를 벌이는데 보통은 “앙카라 전투” 라고 부릅니다.
몽골 징기스칸의 후손 티무르 는 투르키스탄 귀족가문 출신으로 몽골제국을 부흥시키기 위해
1390년 그루지야와 아르메니아를 점령해 오스만 투르크 국경 까지 제국을 확장하자
셀주크 술탄 바예지드 는 티무르에게 충성을 맹세한 투르크계 제후에게 공물 을 요구합니다.
이에 티무르가 바예지드를 모욕하고 1400년 오스만 투르크의 도시인 세바스테 를
약탈하고는 티무르군이 동쪽으로 부터 아나톨리아를 공격했을 때.....
바예지드는 군대를 소집해 앙카라 근처에서 티무르 군대와 대치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양쪽 군대의 규모는 서로 엇비슷했으니... 티무르군은 20만 이었고
오스만 투르크 술탄 바예지드 의 군대도 비슷한 숫자 였다고 합니다.
오스만 투르크 바예지드의 군세는 주로 보병 과 세르비아 군주 스테판 라자레빅이 지휘
하는 세르비아 중장기병 으로 이루어졌는데.... 이에 비해 티무르의 군대에는
대부분이 기병 이었으며 전투용 코끼리에 탑승한 소수의 인도인 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전투는 오스만군의 공격 과 티무르군의 궁기병대가 쏘아올린 화살 의 파도로 시작되었는데
티무르군이 쿠북강의 흐름을 바꾼지라 오스만군은 물을 얻지 못하는 어려움을 겪는중
카탈 언덕 전투에서 목마르고 지친 오스만군은 패배했고 술탄 바예지드는 포로 가 되었지요!
오스만 투르크 침공 앞에 전전긍긍 하던 유럽인들은 티무르 침략에 고무되었으니 티무르의
지원 하에 제노바인들은 콘스탄티노플 갈라타의 성벽에 몽골의 군기 를 걸었다지만...
아나톨리아에서 오스만 투르크가 괴멸 되는 것을 보고는 공포가 유럽인들을 옥죄었습니다.
앙카라 전투 결과는 오스만 투르크가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던 발칸 상황에 영향을
끼쳤으니 이 패배로 터키군의 콘스탄티노플 공격은 연기 되었고....
오스만 투르크 군대는 새로운 위협에 저항하기 위해 유럽 발칸반도에서 퇴각 합니다.
바예지드가 생포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들들은 살아있었기 때문에 오스만 투르크 는
네 아들간의 내전 으로 황폐화되자 오스만 투르크인들은 유럽으로 달아났으며
오스만의 일시적인 약화는 비잔틴 제국의 멸망을 조금이나마 지연 시켰던 것 입니다.
그리고 티무르 는 20만 대군을 동원해 몽골 원나라 를 멸망시킨 중국 명나라 를 치러
동쪽으로 원정하는 도중에 병사 하고 그의 왕국은 손자대에서 거의 망하는데...
증손자 바부르 는 아프카니스탄 에서 일어나 인도 를 침략해서는 무굴 제국 을 세웁니다.
이런 저런 회상에서 깨어나 케르반사라이 진지하느 를 나와서는 점심을 먹을 레스토랑을
찾는데 이슬람 국가라 맥주 파는데가 없으니 아쉽지만 레스토랑은 포기하고 흐름한
식당으로 들어가니 체험활동을 왔는지 초등학생들로 붐비는데 우릴보고 무척 신기해합니다.
그러고는 갑자기 애들이 비명을 지르며 일어나서 이리저리 피하는데 보니.....
고양이 가 먹이를 노리고 아이들 다리 밑으로 들어갔나 보네요? 옛날에
여학교 교실에서 쥐 한마리 가 나타나면 그 시간 수업은 종쳤던 것과 같네요!
쉬쉬케밥 을 시켜 콜라 와 함께 먹고는 일어나 이번에는 반대편에 위쪽 언덕
인 아라스타 바자르 Arasta Carsisi 위쪽의 골목길 을 걸어 올라 갑니다.
여기는 기념품 숍이며 레스토랑 이 밀집한 저 아래동네와는 달리......
조용한 주택가 인지라 이리저리 골목을 기웃거리며 옛 집들을 살핍니다.
이 좁은 골목에도 가이드 가 차에 사람을 태워서는 한바퀴 돌면서 조금 유명한
곳이면 차를 멈추고 내려서 설명을 하는걸 보고는..... 마침
현지인 가족이 돌담에 앉아 건너편 사원을 배경으로 사진 을 찍는걸 따라 합니다.
여러 골목길을 다니면서 오래된 집과 장식 등을 구경하고는....
다시 걸어서 우리가 차를 타고 도착했던 차르쉬 광장 으로 돌아옵니다.
마눌이 저 큰 집 둥근 천장 에 박혀있는 하얀 것 이 뭐냐고 묻기에 보니 터키 목욕탕인
하맘 Hamam 으로 빛 을 들어오게 하기 위해 유리 를 박은 것인가 봅니다.
하맘은 밀실에 열기를 가득 채워 땀을 내고 씻는 건조욕으로 모스크 주변에 많이 보입니다!
증기탕 이라지만 증기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고 밀실에 열기를 가득 채우는 건조욕 으로
땀을 내고 나서 몸을 씻는 것이니 한국의 한증법 과 같은 원리 라고 하겠습니다.
고대에는 그리스 를 거쳐 로마 로 건너갔고 올림피아에서는 BC 8세기 마루 밑 난방식을
행하였는데 폼페이에서는 욕탕을 테르메 라고 불렀으며 공중욕탕 이 있었다니...
냉욕실에서 저온욕실과 적온욕실을 거쳐 마지막에 열기실 로 들어가게 되어있다고 합니다.
이탈리아에서는 18세기 말엽 부터 증기탕 을 하기 시작 했는데..... 통에 작열된
돌 을 넣고 여기에 물을 부어 뜨거운 증기 가 오르게 하여 얇은
천으로 몸을 가린 욕객이 증기찜 을 하는 것인데 주로 여성 들이 많이 하였답니다.
“사우나” 목욕은 핀란드의 증기욕 과 터키의 열기욕 을 결부시킨 것으로 땀을 낸 후에
백양나무 가지 로 피부를 가볍게 두들기고 냉수욕 을 하는 것이라고 하네요?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일본 뇌염, 홍콩 독감 그리고 터키탕 이라는 말을 많이 씁니다!
“터키에는 터키탕이 없다?” 6.25전쟁때 터키는 미국과 영연방에 이어 3번째로
많은 1만 5천명을 파병 한 때문인지 관심이 높아져 우리나라에서는 예전에
관계가 이루어지는 목욕탕이라는 뜻으로 “터키탕” 이라는 말이 참 유행했습니다.
몇년 전에 JTBC “비정상 회담” 에서는 방송인 김구라 가 게스트로 출연한
가운데 G 11 멤버 들이 세계 각국의 목욕 문화 에 대해 이야기 했습니다.
이날 에네스 카야 는 "터키엔 작은 때 타월 이 있는데 문지르면 지우개 처럼
때가 쭉 나온다" 며 "목욕탕에 씨름 선수 같은 아저씨들이
있어서 욕객에게 마사지 를 해준다" 라고 터키의 목욕 문화 를 설명했습니다.
이어 에네스 카야 는 “터키탕이 있냐”는 질문에 "없다, 과거 오스만투르크 시절엔
씻는 문화가 중요했다" 면서 "그걸 일본 사람들이 보고 공중목욕탕 을
만들기 시작한 거다. 이후 일본에서 탕에 여자를 들이기 시작했다" 고 답했습니다.
이어 일본 대표 테라다 타쿠야 역시 "일본인들은 장 오귀스트 앵그르
등이 그린 여자가 있는 터키 목욕탕 그림 을 보고는....
오해해 남녀 혼탕을 만들었지만 지금은 없다" 라고 말을 보탰습니다.
또 에네스 카야 는 "남녀 혼탕 문화를 한국이 일본에서 들여와 터키탕 으로 만들었는데
1996년 터키 대사관이 항의 를 해서 그 이름이 없어졌다고 하더라" 라고 말했지요?
1996년 당시 터키 대사는 데리야 딩겔테페 씨인데 우리는 재미로 쓴 "터키탕" 이라는
말을 6.25 참전 의 은혜를 원수로 갚는다 고.... 매우 서운하게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임진왜란 7년간 참전한 연인원은 조선군 10만 에 일본군 30만 과 명나라군 20여만명
이니...... 조선인들은 중국이 망해버린 우리나라 조선을 일으켜 다시
세워주었다고 “재조지은 再造之恩” 이라며 고마워하면서 부모의 나라 로 섬겼습니다.
1592년 명나라는 건국한지 200여년이 지난지라 빈부격차가 심해지고 환관의 횡포와 관리의
부정부패 에 흉년이 겹쳐 농민들의 반란 이 일어나던 차에 몽골족들이 반란 을 일으키니
만주에 주둔한 이여송이 2천리를 달려 토벌에 나섰는데, 3개월후 임진왜란 이 발생하니
조승훈이 5천기병 으로 조선을 구원하다 패한후 심유경을 보내 화평교섭 으로 시간을 법니다.
이여송이 3천리 를 달려와 명군 4만 3천에 조선군 1만 이 고니시 유키나가군을 격파하고
평양성 을 찾았으며 교섭으로 서울을 차지한후 4로 병진 공격으로 일본군과 싸웠는데,
7년간 원거리에 대군 파병으로 재정이 파탄난지라 가혹한 조세를 거두니 농민반란 이
일어나고 진압에 몰두하다가 여진족이 흥기하는 것을 막지 못해 나라가 망했던 것입니다!
명나라는 천자의 나라이니 제후국인 조선의 어려움을 외면할수 없다고 제 코도 석자인 주제
에 대군을 보내 싸우다 보니 재정파탄으로 망하는데...... 명나라가 자신의 분수를 알고
조선에 파병하는 대신에 압록강에 성채를 쌓고 대군을 주둔시키는 한편 여진족들을 통제
했더라면 조선은 일본땅 이 되었을지 모르지만 명나라는 저리 허무하게 망하지 않았을 것 입니다.
오늘날의 한국인 들은 중국인을 만나면 그때의 은혜 에 대해 고맙게 여기는 사람은 없고
오히려 왕서방이나 짱깨, 짱꼴라, 되놈 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일른지...
터키탕 은 남의나라 이름을 붙인것이니 일본뇌염, 홍콩독감, 호열자, 영국병 이 그러하지요!
첫댓글 즐겁게 봅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별 재미도 없는 글을....
반갑습니다
즐겁게 봅니다
그래도 관심을 가져 주시는 분도 있네요?
터키는 정말 여행자들에게는 좋은 나라인가 합니다!
사진 보니 감회가 새록이는 곳들이 보이네요~~터키는 터키탕이 있고..ㅎ..사마르칸트등 사진이 예술 입니다~
터키는 다녀오신 분들이 많은지라.....
그런데 저 아라베스크 문양과
푸른색 타일은 참으로 예쁜가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