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간 곳은 정말로 별천지가 펼쳐져 있었다. 바깥의 허름한 건물에 어울리지 않게 값비싼 자재로 구성되어 아름답게 만들어진 건물은 분위기 자체가 음탕함을 머금고 있는 듯 했다. 여기저기 책임자를 따라 내려가는 우리에게 추파를 던지는 여자들, 남자들, 그리고 어느 쪽인지 알수 없는 존재들도 다들 반라에 몸에 화려한 문신이나 바디페인팅을 하고 번들거리고 있었고, 하나같이 다들 술과 약물에 취해 흐느적 거리고 있었다. 건물안의 공기는 뭔가 야릇하면서도 비릿한 향기가 가득차서 금방이라도 이성을 잃을 것 같은 그런 분위기였다.
처음에 들어간 모습은 점차 책임자의 뒤를 따라 안으로 깊숙히 들어갈수록 점점 더 화려하고 음탕해졌고, 우리들은 그 사이를 걸으며 종종 우리에게 추파를 보내는 사람들과 저속한 농담을 건내는 사람들을 무시하며 걸음을 재촉했다. 그리고 잠시후 건물안에서도 다시 몇 명의 경비원이 중무장을 하고 지키고 있는 방이 나오자 지배인은 잠시 헛기침을 하고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안을 향해 말했다.
"제독님… 리엔 지부장이 왔습니다."
그리고 곧이어 안에서는 좀 나른한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라고 그래."
"그런데… 이번에는 동행이 있습니다. 같이 제독님을 보겠다고 하는데…
"아아… 그렇구만. 역시나… 같이 들어오라고 해."
뭐가 역시나인걸까? 지배인은 나의 의문을 아랑곳하지 않고 경비원들이 열어준 문으로 나를 들어가라고 손짓했다. 나는 조금 망설이다 방으로 들어가자, 처음 눈에 들어온 광경은 생각보다 넓은 공간이었다. 분명히 들어온 길을 생각해보면 지하임에 틀림없는데… 그곳에는 마치 건물의 한층을 뚫어버린 것 같은 높이에 천장과 작은 운동장만한 공간이 존재하고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공간은 2실제로 2층이 맞았다. 가운데는 뻥 뚫려 높은 천장을 두고, 방의 4면에는 어디론가 통하는 발코니들이 2층 정도 되는 위치에 둘러싸고 있어 그 발코니들 마다 화려하고 선정적인 아가씨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공동에 들어가는 우리를 바라보고 저마다 은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리고 가운데 넓은 공간에 문의 맞은편 벽의 조금 앞에…. 그가 있었다.
"오신걸 환영합니다. 추방된 왕자님… 오랜만이 뵙는군요."
강렬한 인상의 남자였다. 리엔이 말한대로 에라드나 리엔보다 서너살 정도 위로 보이는, 우리들보다는 연배가 위였지만 아직 젊은 사람인데도… 그 분위기가 뭐랄까나… 지금까지 만나본 사람들 중에서 가장 강력한 인상을 풍기고 있었다. 이탈리아인 특유의 검은 곱슬 머리를 흐트러트리고 적당히 그을린 근육질의 몸을 편안해 보이는 쿠션과 융단에 파묻고 곁에는 몇몇 다양한 인종의 여성들이 역시나 반라로 그에게 달라붙어 시시덕거리고 있었다. 나는 예전 프로방스에서 만났을 제국의 유망주이자 유년기의 친절했던 형의 모습을 찾아보려 하였지만… 도저히 무리였다. 뭐라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내가 머뭇거리는 것을 본 리엔이 나섰다.
"저… 안젤모 제독님,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죤 왕자님을 모셔왔습니다."
그는 비릿하게 웃으며 리엔을 보며 말했다.
"제독님은 무슨, 오빠라고 부르라니깐! 우리 이쁜이… 인상 구기지마. 예쁜 얼굴 망가진다. 네가 이곳에 왕자와 같이 나타났다는 건, 내가 말한대로 일이 흘러갔단 소리군. 그렇지? 내가 황제 폐하는 확보할지 몰라도 그렇게 하면 네가 낭패를 볼꺼라고 했을대, 니가 뭐랬더라? 체스를 우습게 알지 말라고 했던가? 당연히 우습게 안보지. 마틸다 누님이 어떤 분인데. 마틸다 누님이라면 분명 널 버리고 뜰꺼라고 생각했는데, 예상대로 되버렸나 보구나. 큭큭큭… 한잔해. 아름다운 미끼 됐잖아?"
그의 말에 리엔은 분한듯 입술을 깨물고 이렇다 할 말을 하지 못했다. 나는 그에게 물었다.
"폐하를 납치하는데 지원하셨다고 들었습니다만…"
"아, 네 그렇죠. 괜찮은 비즈니스였죠. 요즘 여기서도 일거리가 없어 불경기였는데, 간만에 마틸다 누님이 사람 보내서 일하나 해보자고 하길래 이게 왠 떡인가 했습니다. 의뢰 받은대로 확보된 타겟을 잘 포장해서 목적지에 배달해주는 걸로 선금에 몇가지 옵션까지 얹어서 주다니… 우리 누님이 의리하나는 죽여 준단 말이죠. 에라드, 엄마한테 내가 고맙다고 했다고 나중에 보면 꼭 좀 전해드려라."
에라드는 좀 황당하다는 눈빛으로 말했다.
"저를 아십니까?"
그러자 그는 잠시 비릿하나 눈빛에 조금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추억을 회고하듯 대답했다.
"기억 못한다니 섭섭하구나. 내가 다리가 불편한 너를 몇번이나 말에 올려주고 승마 연습을 도와줬는지 잊었나 보구나. 너희들은 다들 기억하지 못하지만 여기 있는 제국 출신들은 다들 그때 프로방스에서 만났었어. 뭐, 너무 오래전이라 기억 못하는게 무리는 아니겠지. 그때 내가 14살, 에라드가 10살, 왕자님이 6살, 멜리장드가 2살 정도였으니깐, 정말 오래전의 일이군. 아, 그러고 보니 리엔도 있었구나. 그때도 지금처럼 드레스 예쁘게 차려입고 부끄러움이 많아서 항상 커튼 뒤에 숨어 있었지."
그의 말에 나와 같이온 동료들은 다들 리엔을 미심쩍게 쳐다봤다. 뭐야? 변장하려고 이번만 여장한거 아니었어? 그러나 리엔은 당황하며 손사래를 치며 소리쳤다.
"그 눈빛은 뭡니까? 오해하지들 말아요. 그건 그때 폐하가 이뻐보인다고 입어보라고 하셔서 별 생각없이 입고 있었던 거지 내가 무슨 의지나 취향을 가지고 그랬던게 아니라구요!"
멜리장드는 눈빛으로 '아예… 그러시겠죠. 다들 그렇게 말하긴 하데요.' 라는 의사를 그에게 보냈고 여성진들의 혐오스러운 눈빛에 리엔은 멘붕을 다시 한번 겪고 있었다. 나는 내 눈앞에 있는 남자, 옛 이야기를 꺼내어 우리를 약간 어린아이 취급하고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는 여전히 알수없는 눈빛으로 흥얼거리며 우리의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다. 나는 조용히 한걸음 나서며 그에게 이야기를 계속해 나갔다.
"폐하께 총애를 받으셨다고 들었습니다. 근데 그런 페하의 의지를 사반하는 행동을 하셔도 되는 건가요?"
그는 태연하게 말했다.
"울티넘이었잖습니까? 그 또한 폐하가 천명하신 자기 통제에 대한 폐하의 의지입니다만. 본인의 의지대로 집행해드린게 사반된 행동이라고 주장을 한다면, 모순된 이야기 아닌가요?"
역시 호락호락한 사람은 아니었다. 역시나 술인지 약물인지 모를 것에 찌들어 보여도 제법 날카롭게 대화하고 있다. 나는 방향을 달리 해서 물었다.
"듣기로는 비즈니스의 일환으로 체스의 의뢰를 받아 처리하셨다고 들었습니다만. 평소에도 이런 식으로 일하시고 대가를 받으셨나요?"
"뭐, 그때그때 다르죠. 이런 일을 할때도 있고, 좀 고상하게 제국이나 다른 상단, 길드, 조합등의 의뢰를 받아 수로나 풍향을 측량해주는 일을 대행하기도 하고, 운송도 가끔 합니다. 하지만 그래도 뭐니뭐니 해도 제일 짭짤한건 역시나 노예 사업이죠.
세상에는 주님의 축복으로 함부로 다뤄도 되는 무슬림들이 너무 많아요. 배를 타고 돌아다니다가, 눈독들인 마을을 발견하고 쳐들어가서 사내놈들은 죄다 죽이고, 반반한 계집들은 줏어다 좀 가지고 놀다가 고분고분해지면 잘 씻겨서 스칸디나비아나 신대륙에 팔아넘기는 겁니다. 세상에 널린게 그 돼지 같은 무슬림들이니 상품은 넘쳐나고 기회는 충분한 영원한 블루오션이죠.
그러고 보니 마침 잘되었군요. 이렇게 다시 재회한것도 인연인데 왕자님도 우리랑 같이 하시죠? 저나 왕자님이나 피차 제국에서 눈밖에 난 존재들인데 그러고 다니는 것도 나름 나쁘지 않은 인생일겁니다. 오히려 재밌으실껄요? 항상 박아줄 계집들은 줄을 서있고, 돈과 고급 포도주는 평생 쓰고 먹어도 모자랄 지경이죠.
그렇다고 고향을 등지느냐? 그것도 아닙니다. 들으셨겠지만 전 제국에는 적대적이거나 해를 끼치지 않아, 터부시 될 지언정 공격당하지는 않고, 나름 예전에 거기서 좀 놀던 가락이 있어서 아는 친구들이나 친척들 만나는 것도 어렵지 않습니다. 아버지야 절 죽이려 날뛰시지만 어머니랑 여동생은 얼마전에 만나고 선물도 주고 왔는걸요? 한번 남자라면 해볼만한 모험과 인생 아닐까요?
같이 가시죠? 마침 제 함대의 음유시인 자리가 비어있습니다. 동행하신다면 왕자님은 최고의 귀빈 대우로 모셔드립죠. "
나는 고개를 돌려 내 동료들을 바라보았다. 그의 천연덕스럽지만 잔혹한 말에 멜리장드와 아이샤, 에스더는 대단히 불쾌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좀 과장된 이야기이길 바랬는데, 역시나 그의 노예 사업은 사실인듯 했다. 그것도 생각보다 잔혹한 듯 했다. 나는 말을 이어갔다.
"제안은 고맙지만 배에서는 숙면에 취하질 못하는 체질이라서요. 당신의 무용담은 충분히 들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들어보니 그 명성이 과장은 아닌듯 하군요. 그리고 당신의 사업방식도 의외로 간단한게 좋군요. 그래서 한가지 부탁을 하고 싶습니다. 보아하니 이제 체스와의 거래는 종료된 것 같은데, 그렇다면 이번에는 우리를 좀 도와줄 수는 없을까요?"
나는 그런 말을 꺼내면서도 상당히 불안한 기분을 느꼈다. 내 눈앞에 있는 예전 사랑하던 아내와 그 가족을 학살하고, 제국을 박차고 나가 한 종교를 상대로 잔인한 전쟁을 벌이고 있는 이 광인에게 과연 내 말이 씨알이나 먹힐까? 그리고 먹힌다고 해도… 그 대가로 그가 지불을 요구할것이 나는 어떤 것이 될지 상상도 할수 없었다. 나의 말이 끝났으니 그는 이제 거친 협상에 접어들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가 말했다.
"그러죠 뭐."
"네, 역시 쉽게 수락하지 않을… 네? 뭐라구요?"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그는 예상과는 달리 너무나 선선하게 우리에게 협조를 동의했다. 그의 말이 이어졌다.
"말하지 않았습니까? 난 제국과 적대하는 존재는 아닙니다. 오히려 우호적인 관계죠. 거기다 예전 나를 아껴주셨던 폐하의 성은을 생각해보면, 딱히 제국의 기조에 어긋나지 않는 범위내에서 왕자님을 돕는 일에 굳이 거절할 이유도 없습니다. 일행분들 성지에서 탈출시켜서 리마솔까지 데려다 드리면 되는거죠?'
어째 너무 쉽게 수락하나 했더니 뭔가 그는 오해를 하고 있었다. 나는… 조용히 그의 착오를 정정하여 그간에 있었던 일에 대해 그에게 설명을 하여주었다. 한참동안 나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그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것참… 무의미한 짓을 하시려고 하시는군요. 성지에 있는 곱트교도와 유태인과 시아파 무슬림 들을 맘루크의 압제에서 탈출시켜 안전한 비잔틴과 제국으로 망명시킨다고요? 거의 백만에 달하는 사람들을요? 왜 그딴 짓을 하려고 하시죠?"
"제가 결정한 일이 아닙니다. 폐하께서 결정하신 의지입니다. 전 다만 이 상황으로 인해 폐하를 대신해 폐하께서 결정하신 뜻을 추진하려 할 뿐입니다."
"하이고… 우리 폐하께서 또 길거리에서 비맞은 강아지를 보셨군요. 그것도 한 백만마리 정도… 스케일 크게 주워오는 건 여전하시네요. 뭐, 늘 그런 양반이셨으니 뭐라 논할바는 없습니다만… 이거 정말 가능하기는 한겁니까? 자기 동포도 아니고 같은 종교도 아닌 사람들을 백만명이나 도주시키려 하다니… 이런 엄청난 일을 대체 어떻게 추진하시려구요? 계획서 세우는 것만도 몇 달은 걸릴만한 일인데 너무 쉽게 생각하시는거 아닌가요?"
그의 말에 멜리장드가 한걸음 나서며 말했다.
"계획은 대략적으로 준비하였어요. 하지만 누구 덕분에 갑작스러운 변수가 발생했고 그로 인해 예상되는 구심점의 역할 공백을 메우기 위해 다른 대안들을 찾는겁니다."
그녀의 조금 항의 섞인 말에도 안젤모는 히죽 웃으며 빈정대듯 말했다.
"아이고, 우리 깐죽이 멜리장드가 많이 컸네. 기저귀 갈아주던게 엇그제 같은데 이제 이렇게 쫑알쫑알 대들줄도 알고… 뭐, 소식은 많이 들었다. 필립 영감님의 후계를 자처하며 영재로 소문이 났다던데… 아마도 이 멤버들이라면 그 계획 수립을 주도한건 너였었겠지? 한번 줘봐바. 오빠가 검사해줄께."
그의 나른한 목소리는 아무리 봐도 장난끼가 가득했다. 멜리장드는 그의 가벼운 태도에 심히 불쾌해 하였지만 그래도 자신이 주도한 그 계획서의 사본을 그에게 내밀었다. 그는 싱긋 웃으며 그 계획서를 받아들더니 대수롭지 않다는 듯 휘리릭 흩어봤다.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도 않고 대충 흩어본 그는 조금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재밌네. 뭐 시간 때우기로는 나쁘지 않은 내용이야."
"뭐라구요? 지금 각 선발된 사람들이 심혈을 기울여서 만든 계획을 그따위로…"
그러나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안젤모가 말을 막아서며 말했다.
"한가지 물어보자. 근데 이 일은 왜 해야 하냐?"
그의 조금 어처구니 없는 원론적인 질문에 멜리장드는 화를 내며 말했다.
"그걸 말이라고 하고 앉아있어요? 당연히 맘루크가 수니파 외의 사람들을 모두 노예로 팔아버리겠다고 선언을 했기 때문에 위기에 빠진 사람들을 구하려고 하는 거잖아요."
"그래? 그럼 좋아, 또 하나 물어보자. 맘루크는 왜 그들에게 있어 이교도들을 노예로 팔아 버리려고 하는거냐?"
"그야, 그 놈들이 대책없는 광신도들이니 그런거잖아요. 그것에 무슨 이유가 있어요?"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냐?"
"그럼 아니라는 건가요?"
그는 멜리장드의 말에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거예요? 말꼬리를 잡거나 생트집을 잡는 시간 낭비를 할 생각이라면 우린 가겠어요. 왕자님, 그만 일어서요. 여기서 더 이상 볼일은 없을 것 같군요."
"미안하지만… 그건 불가능해. 넌 돌아갈수 없어. 왜냐하면 여기서 죽을거거든."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그러나 곧이어 그가 손가락을 튕기자… 방의 벽면에 위치한 발코니에서 히히덕 거리던 여성들이 순식간에 진지한 얼굴로 석궁을 들고 우리를 겨누었다. 순간 당환한 우리는 에스더와 케두스 왕자가 칼을 뽑아 들었으나, 우리 눈앞에 있던 일단의 작부들로 보이는 여성들 역시 어느새 아까전의 흐느적한 얼굴은 간곳 없이, 사나운 표정으로 저마다 특이한 병기들을 쥐고 우리를 포위하듯 둘러싸고 있었다. 멜리장드가 소리쳤다.
"지금 이게 무슨 짓입니까!"
그러나 안젤모가 더 크게 소리 질러 그녀를 위압했다.
"입닥쳐 이 멍청한 애송아. 깐죽거리는게 귀여워서 오냐오냐 했더니, 이제 눈에 뵈는게 없는 모양이구나. 이런 허접하기 짝이 없는 계획을 가지고, 뭐? 수백만명의 백성들을 구하겠다고? 이걸 폐하에게 제출했었어? 하, 나 이것참… 필립 영감, 당신 손녀 교육 잘못시켰구만. 이런 빙충이를 어디다 붙이고선 자랑질을 한거야. 기가 막혀서 말이 안나오네. 왕자님, 미안하지만 계획 여기서 중단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어지간하면 나도 호의적으로 왕자님 일행을 대하려고 했는데… 이건 뭐 개념도 없고 상식도 없는 허접하기 짝이 없는 보고서를 들고 위세를 떨고 있는데… 저 기집애는 지금 이게 무슨 소꿉장난으로 보이나 봅니다.
이딴거 들고선 탈출? 하! 개가 웃겠네. 미안하지만 이건 답이 없는 계획입니다. 유감스럽지만 왕자님은 제가 신변을 구속해서 제국으로 강제 연행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여기 있는 황제 폐하 덕에 뭐라도 한자리 차지하고 자기들이 좀 잘난듯 착각하는 저 멍청이들은 제 손으로 처분하도록 하겠습니다. 그것이 현재로서는 가장 나은 결론입니다. 왕자님을 제외하고 여기 있는 것들 전원 조준하고 사격 준비."
나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조금전만 해도 좀 무례하기는 했을지언정 나쁘지 않은 분위기였는데… 지금은 그 분위기가 급반전해서 당장이라도 눈앞에 나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을 몰살해버릴 흉흉한 기세를 풍기며 안젤모는 우리를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소리쳤다.
"대체 왜 이러는 겁니까? 그 계획에 뭐가 문제가 있길래 이러는 겁니까?"
"문제요? 넘쳐나죠. 이걸 보고서라고 들고오다니… 제가 제국에서 현역 시절에 이런 걸 봤으면 그대로 바다에 집어 던져버렸을 겁니다. 이건 기본도 안된 보고서입니다. 이동에 필요한 물자와 경로와 예상 시나리오? 이게 무슨 소용인데요? 실전에 부딪치면 순식간에 휴지조각이 될 내용들만 가득하군요. 정작 중요한 이 일의 핵심이 무엇인지, 그리고 어떤 관점에서 대응을 해야 하는 지에 대해서는 언급조차도 없이 그저 장황하고 수사적인 문장들로 가득 채워 눈물과 감동의 스토리만 늘어놨군요.
뭐하자는 겁니까? 난민들이랑 서로 같이 끌어안고 울기라도 하자는 겁니까? 서로의 감수성이 밑바닥을 보일때까지 광야를 거닐며 서로의 고통을 나누고 희망의 노래를 부를까요? 하하하… 볼만 하겠군요. 아마추어들의 상상력이란… 미안하지만 이건 프로의 관점에서 보면 그냥 아무런 가치도 없는 잡문에 불과합니다. 정말로 프로라면, 주어진 상황에 대해 근본적인 이유를 인지하고 그것을 오로지 논리와 숫자로만 대답해야 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유감스럽게도 이번 일은 프로라도 성공율이 희박한 일입니다. 근데 이런 허접쓰레기를 들고 다니는 애송이들이 추진을?
하, 그냥 제가 죽여드리죠. 어차피 얼마 안있어 죽여달라고 비명을 지르게 될 지경에 처할 테니 제 손으로 죽여드리는게 프로방스에서의 추억에 대한 마지막 배려일 듯 하군요. 유언따윈 접수 안해. 그냥 다들 닥치고 죽어."
그가 손을 들어올렸다. 그 손을 보자 궁수들이 시위를 쥐고 내려짐과 동시에 쏘려는 듯 조준을 다잡았다. 나는 이 어처구니 없는 상황에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입구에 있는 수많은 핏자국들… 어쩌면 이건 예견되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기대에 어긋나게도 광기가 아닌 지나치게 침착하고 차분한 얼굴로 우리를 주시하며 공격을 지시하려 하였다. 안돼… 누구라도 좋으니 제발… 그때였다.
"대답하겠어요! 뭐가 문제인가요? 당신이 문제라고 생각하는 부분을 내가 답변하겠어요."
아이샤였다. 그녀는 평소와는 다르게 겁에 질린 멜리장드의 앞에 나서며 소리쳤다. 그러나 안젤모는 인상을 찌푸리며 기분이 더 나빠진듯 말했다.
"복장을 보아하니 하레디구만. 난 하레디도 무슬림이랑 별 차이가 없다고 생각하지. 그 꼴통 출신의 애송이가 뭘 대답하겠다는거지?"
아이샤는 떨고 있었다. 손끝의 떨림이 눈에 보일 지경이었다. 열걸음 앞에 상대는 잔혹한 악의로 그녀를 죽이려 하고 그럴 힘과 의지가 있는 자였다. 그녀는 용기를 내려는 듯 치마를 두손으로 꼭 잡으며 소리쳤다.
"그 탈출계획은 모든걸 다 담은건 아니예요. 당신도 궁금해서 조금전 멜리장드에게 질문을 던진거 아닌가요? 멜리장드가 조금 착각해서 내용을 잠시 잊었을뿐 상황은 모두 감안하고 최선을 다해서 그 계획을 만들었어요. 내가 대답하겠어요. 당신이 그곳에 없다고 주장하는 내용에 대해서 내가 대답하겠어요."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데? 난 그럴 이유를 모르겠는데?"
"당신은 우리를 아마추어라고 했어요. 아니라는 것을 숫자와 논리로 증명하겠어요. 우리가 우리 스스로 프로라는 것을 입증하면 당신이 이런 무도한 짓을 할 이유도 없는 것 아닌가요?"
그러나 그의 얼굴은 여전히 찌푸려진 상태였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뻗었다. 그러자 곁에서 조금전까지 교태를 부리던 여자는 어디선가 잘 버려진 창을 들고와 그의 손에 쥐어 주었다. 그가 창을 손에 쥐고 말했다.
"더러운 하레디 계집이 살고 싶어 못하는 소리가 없군. 그래 좋아… 그러면 기회를 주지. 너와 나와의 거리는 열걸음 정도… 나는 너에게 한가지 질문을 할때마다 한걸음씩 다가가겠다. 너는 내 질문에 합당한 대답을 결론을 간단하게 요약해서 제시한 다음 논리적으로 나를 납득시켜야 한다. 그리고 열걸음이 다 지나기 전에 너는 내가 말한 너희가 아마추어가 아니라는 사실을 나에게 인정받아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아마도 내 무기가 네 입술에 키스할 것이다."
그는 조금전 술에 취해 희희덕 거리던 한량이 아닌 백전불패의 흉흉한 전사의 모습으로 창을 아이샤에게 겨누고 말했다. 나는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이건 말려야 한다. 말한마디만 잘못해도 저 창은 잔혹하게 아이샤를 관통할것이 불을 보듯 뻔했다. 나는 한걸음 나서며 그를 제지하려하였다. 그때, 에스더가 나를 잡았다. 그리고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잠시만 더 지켜보도록 하죠."
"하지만 저래서는 아이샤가…"
"왕자님이 나선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을 꺼예요. 지금은 저 아이를 믿고 지켜보는 수 밖에 없어요. 그리고 정말로 최악의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면… 저도 가만있지는 않을 꺼예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무의식적으로 한손을 뒷허리춤에 찬 위스키보틀 같은 물건에 가져갔다. 나는 에스더의 말에 불안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 안젤모를 바라보았다. 그가 한걸음 내딛었다.
"맘루크는 무엇이냐?"
이게 뭐야? 이 무슨 원론적인 질문이야? 이 사람 정말 아이샤를 죽일 셈인가? 아이샤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술탄의 명을 받는 외국인 출신의…"
"요약한 한문장으로 답해라. 부연 설명은 내가 물어볼때만 하는거다! 봐주는건 이번 한번 뿐이다. 다시 묻겠다. 맘루크는 무엇이냐?"
그의 사나운 일갈에 아이샤는 움찔했다. 그리고 열걸음 앞의 살의에 대해 그녀는 필사적으로 생각하려는 듯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녀가 입을 열었다.
"군율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외국의 이교도 출신들, 그들을 술탄의 병사로 키우는 과정에서 그들을 다스린 율법은 군법에서 나왔고, 그 군법은 아이유브의 기조인 수니파의 교리에서 기인합니다. 그들이 수니파를 맹종하는 것은 그것이 이방인에 이교도였던 그들을 묶어주는 유일한 정체성이자 힘이기 때문입니다."
세번째 걸음을 걸으며 질문이 나왔다.
"왜 맘루크는 이교도를 탄압하는가?
"그들이 소수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방인이며 자신들이 가진 무력과 술탄의 권력 외에 자신들을 지켜줄 유일한 수단이 공포 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자신과 다른 자들을 공포로 제압하기 위해 그들을 탄압합니다."
그의 표정이 조금 기묘하게 변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네번째 걸음을 걸으며 물었다.
"노예는 무엇이냐?"
조금 의외의 질문이다. 아니, 네가지 질문이 다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이번 작전에 그런 예상된 질문이 아니었다. 상당히 원론적인 이야기를 그는 우리에게 물어보고 있다. 왜지? 아이샤가 말했다.
"재화이자 동시에 용역입니다. 그들은 주인의 재산인 재화이고 동시에 주인의 일을 하는 용역입니다. 경제적 관점이 아닌 다른 의미로 묻는거라면…"
그러나 안젤모는 다섯번째 걸음을 걸으며 물었다.
"노예는 왜 필요한가?"
"저렴한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서입니다. 노예는 최소한의 의식주만을 보장받고 주인을 위해 대가없는 노동을 합니다. 그런 용역은 사용자의 입장에서 매력적인 조건입니다."
여섯번째 걸음에서는 조금 의견을 구하는 듯한 질문이 나왔다.
"그렇다면 노예는 많으면 많을수록 주인들의 입장에서는 행복하겠군. 그런가?"
"그렇지 않습니다. 노예는 자신의 의지가 없을 경우 생산성이 떨어지고 의지가 있을 경우 처우의 개선을 요구하여 관리의 어려움이 다릅니다. 결국 과다하나 노예는 주인에게도 부담이 될수 있습니다."
일곱번째 걸음을 내딯었다.
"그렇다면 그냥 노예보다는 일반 노동자를 사용하는 것이 좋지 않나?
"상황에 따라 다릅니다. 시장의 경기가 안정적이고 성장하고 있는 상황이라면 그에 따라 임금이 상승하는 노동자보다는 노예가 유용합니다. 하지만 반대의 경우라면 노동자를 쓰는 것이 더 나을수도 있을 겁니다."
그의 표정이 좀 이색적이라는 듯 변했다. 그리고 여덞번째 질문을 던졌다.
"노예가 없어지면 어떤 상황이 발생하는가?
"사회적 변화는 크게 없지만 불만은 발생할것입니다. 노동력으로서 노예의 일은 계약 노동자로 대체가 가능합니다. 노예가 없어져도 사회와 경제가 돌아가는 것은 큰 변화가 없을 겁니다. 그것은 노예제를 금지하는 제국을 비롯한 서방 국가들이 아무런 문제 없이 되려 효율적으로 시장이 돌아간다는 것만 봐도 알수 있습니다. 다만,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무시하는 형태의 용역과 서비스를 제공하는 행위를 제공하는 노예가 없어지는 것은 노동력으로서가 아니라 기호로서 노예를 부리는 자들, 주요 기득권층의 불만을 불러 올것입니다."
그의 표정이 한결 좋아졌다. 그러나, 그의 아홉번째 걸음과 함께 물어진 질문에서 나는 다시 한번 희망이 무너지는 기분을 맛봤다.
"실질적인 마지막 질문을 하겠다. 여기서, 답을 틀린다면 내 무기는 널 향해 날아갈 것이다."
그는 손이 닿을 만큼의 거리에 파르르 입술을 떨면서 그를 바라보고 있는 아이샤에게 창을 높이 들어 내려 찍으려는 자세를 취하고 물었다.
"맘루크들은 왜 노예를 원하는가? 잘 생각해서 대답해라."
그녀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뭔가를 한참을 생각하는 듯한 모습… 그리고 나는 조금 이상한 위화감을 느꼈다. 지금까지 늘어놓은 그의 뭔가 큰 상관이 없어 보이는 질문들… 그건 혹시 이 마지막 질문을 위한 일종의 순서였던걸까? 혹시, 그는… 뭔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그때 잠시 눈을 감고 있던 아이샤가 눈을 떴다. 그리고 나는 그녀의 표정을 보고 조금 당황했다. 그녀는 뭔가 대단히 놀란듯한 표정으로 자신에게 창을 겨눈 남자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설마… 설마 말하고 싶은게 그거였나요?"
"그게 질문의 답변이냐?"
"아니요. 답변하겠습니다. 그들은… 맘루크들은… 노예를 원하지 않아요."
그녀의 말에 사람들이 일순간 멍해지는 표정을 지었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리야? 나는 아이샤의 충격적인 답변에 정신이 아연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그녀의 이어지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노예는 재화이자 용역이예요. 그래서 그들은 재화와 용역의 단점을 모두 가지고 있죠. 그들은 소유주의 인적 재산, 즉 구매한 용역이기에 생산력이 낮아도 최소한의 생존을 보장해야 하는 의무가 필요하죠. 노예가 죽어버리면 주인의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재산이 그대로 사라지는 것이니깐요. 그래서 아무리 경기가 안좋고 할일이 없어도, 해고하면 그만인 노동자와는 달리 노예는 놀아도 밥을 줘야 해요.
그리고 그들은 동시에 재화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가격이 매겨지고 시장에서 거래가 되는 재화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경기 변동에 민감한 반응을 보입니다. 일반적인 재화가 다 그렇듯이 그들은 수요와 공급의 법칙을 따릅니다. 공급이 많아지면 가격이 떨어지고 적어지면 가격이 오르죠. 적정한 수준에서 수요와 공급이 균형을 이룬다면 시장은 안정을 찾지만, 수요가 너무 적거나 공급이 너무 많은 상황이 발생하면… 시장은 혼란에 몰아칩니다.
만약, 그들이 이교도를 전부 노예로 삼는다면… 그들의 손에는 백만명이 넘는 노예가 들어오겠죠. 그리고 그 노예들이 시장에 공급되면… 그야 말로 경제는 파탄나 버릴겁니다. 그 많은 노예들을 한번에 구매할수 있는 수요는 존재할리도 없고, 그들을 확보한 맘루크들은 그들의 자산가치를 줄일수 없기에 최소한의 생계보장을 해줘야 하는데… 그걸 그들은 감당할수 없어요. 차라리 그냥 내버려두고 세금을 무겁게 때리는게 훨씬 이득이지 노예로 삼는 것은 그들에게 있어서도 미친 짓이예요.
그리고 이런 사실을… 원래부터 노예출신들인 그들이 모를리가 없어요. 일부는 그럴수 있어도 지금 주인의 손을 물고 자신들이 주인이 되려는 세력의 고위 장교들은 이러한 상황을 파악하지 못할만큼 멍청할리는 없을꺼예요. 그들이 이런 무리수를 두고 있는건 공포, 국가내에 기득권 세력들이 이방인에 노예 출신들인 그들을 얕볼것이 두려워 공포스러운 방법으로 그들에게 자신의 두려움을 피력하고 굴복시키기 위한 정치적 의도인거예요."
그녀의 설명이 끝나자 사람들이 다들 어안이 벙벙해졌다. 애초부터 우리가 고민하고 있던 문제에 대한 근간을 뒤엎어버리는 이야기에 우리는 적잖이 놀랄수 밖에 없었다. 그러고 보니… 한번도 생각해본적이 없구나. 우리가 적대하는 자들이 왜 이런 짓을 하는 지를… 하지만 그래도 이런 속사정이 있을거라고는 생각할수 없었다. 그리고 아이샤에게 이런 결론이 나오게 한 안젤모에게 감탄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나의 감탄과는 별도로 안젤모는 다음 걸음을 내딯으며 한손으로 아이샤의 턱을 잡고 물었다.
"마지막 질문이다. 너 대체 누구냐?"
그의 표정이 한결 누그러져 있었다. 그러나, 아이샤는 긴장이 풀려 다리를 후들거리면서도 조금 분한 마음이 들었는지 사나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마추어입니다. 숫자 대신 감동을 늘어놓고, 논리 대신 망상을 풀어내는 애송이기도 하구요."
"뭐? 큭… 큭큭큭… 재밌군. 하지만 그건 내 질문에 대한 만족할만 답이 아니었어. 미안하지만 처음 약속대로 진행하는 수 밖에…"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아이샤도 놀라 눈이 동그래지는 것이 보였다. 그의 팔의 근육이 팽팽해지며 한손에 들린 창이 그녀를 향해 사정없이 내질러졌다. 안돼!!! 이제 그만 됐잖아. 그런 어이없는 이유로 잔인한 짓을… 그러나 이어진 상황에 나는 어이를 잃을 수밖에 없었다. 순식간에 피가 튀고 창이 가녀린 아이샤를 관통하리란 끔찍한 예상과는 달리 창은 아이샤의 발치에 땅바닥에 꽂혔고, 당황한 아이샤는 턱을 잡고 있는 손에 끌려가 얼떨결에 안젤모와 입술이 부딪쳤다. 그리고 당황하며 앞으로 뒤쳐나가려던 사람들이 모두 정지했다. 잠시후 완전이 얼어버린 아이샤에게서 살짝 얼굴을 뗀 안젤모는 좀전의 가벼운 말투로 히히덕 거리며 말했다.
"어이쿠, 하레디 아가씨가 완전히 얼어버렸네. 내 장난질에 잘 따라와줘서 기특해서 상을 좀 줬는데 처음이었나 보지? 이거 조만간 미성년자 성희롱도 내 악명에 올라가겠는걸?"
"이… 이게 무슨 짓이예요!!!"
아이샤의 눈물을 글썽이며 하는 하으이에도 그는 여전히 유들유들하게 말했다.
"말했잖아. 대답이 맘에 안들면 내 무기랑 키스할꺼라고. 나는야 낭만을 사랑하는 베니스 남자, 내 무기는 저런 흉측한 창이 아니라 아가씨들을 홀리는 입술이지. 뭐, 농담이 아니더라도 넌 잘했어 칭찬 받아 마땅하겠지. 어이, 다들 놀던거 계속 놀아. 장난은 끝났어."
그의 말이 나오자 주변에서 석궁을 빈틈없이 우리를 겨누고 있던 테라스의 여자들과 우리 앞에서 무기를 꺼내들고 우리를 포위하듯 위협하던 사람들도 언제 그랬냐는 듯 무기들을 어디론가 집어 넣고 다들 술과 먹을걸 먹고 조금전 처럼 시시덕 거리기 시작했다. 안젤모도 다시 자기 자리에 엉거주춤 앉으며 멜리장드와 나를 보며 말했다.
"장난이 좀 심한건 사과하죠. 하지만… 어설픈 내용이라는 건 이제 인정하겠죠? 그 계획에는 이 일에 대한 근본적인 원인에 대한 접근이 없습니다. 상대는 무조건 나쁜 놈이고 광신도에 상종 못할 꼴통이라는 전제를 깔아서는 백전백패일 뿐입니다. 뭐, 그건 왕자님을 나무랄건 아니겠죠. 멜리장드, 네가 좀더 새겨듣도록 해.
리더는 그냥 삽질을 해도 돼. 밖에 나가 술먹고 부도 수표를 끊어주고, 길가던 이쁜 처녀를 업어오고, 홧김에 적국에 선전포고를 해도 돼. 그 일에 책임만 질수 있다면 말이야. 하지만 각료는 그래서는 안돼. 모든 일에 전후 사정을 파악하고 넓은 시야를 가지고 핵심을 짚어서 정확하게 방향성을 제시하고 그것을 이끌어 가야 해. 너처럼 당장 눈앞에 일만 몰두하다가는 교활한 적들에게 항상 뒷통수만 맞을꺼다.
이번 일만 해도 그래. 성지 탈출에 대한 전제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도 없이 대책을 세우려고 하니 답이 없는 내용이 나오는 거야. 다행히 오늘은 네 친구가 머리에 증기가 올라올만큼 고생하며 고찰한 덕에 실마리를 찾았지만, 그런건 오늘이 마지막이어야 할꺼다. 계속 그런 식으로 무대포로 덤비면 너 오래 살지 못한다."
맬리장드는 뭔가 억울한듯 소리쳤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 그런 것까지 감안하라는 건 인간의 한계를 넘어가는 거라구요. 그걸 어떻게 항상 생각할 수가 있어요. 그거 그야말로 인외의 영역…"
"너의 큰조부와 그분의 동료들에게 이건 티타임에 나누는 일상이었다. 내 말 믿어. 난 그분들과 제국을 세우는 대업에 같이 동참하고 뒤에서 지켜본 경험이 있다. 모든 일에는 이면이 존재하고 그 본질을 파악하지 않으면 안돼. 참모는 항상 그것을 놓치지 않고 파악하고 대책을 세워야 해. 만약 그렇지 못한다면 내가 조금전 장난치며 말한 것 처럼 차라리 내 손에 죽는게 더 편했으리란 말을 할 날이 멀지 않았을수도 있다. 유념 하도록 해라."
멜리장드는 못내 억울한 표정이었지만 더는 말하지 않았다. 그는 나를 보며 말했다.
"아까의 이야기를 계속해볼까요? 저 유대인 아가씨가 고찰한 것처럼 맘루크들은 백만이 넘는 노예들이 발생되는 상황을 바라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로 인해 야기될 시장의 혼란과 붕괴를 두려워 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내전 이후 기존 세력들이 아이유브 왕조의 부흥을 꿈꾸며 내란을 일으키는 것을 막기 위해 그들은 그들의 힘을 과시하며 공포를 보여줄수 밖에 없는 현실입니다. 그리고 일부 정말 덜떨어진 장교들이 광신과 재산 증식 및 개인의 영광을 위해 그 정책을 지지하고 있는 현실인거죠.
여기서 조금 머리를 잘 굴려보면 이 어마어마한 계획에 기름을 칠 여지가 좀 있습니다. 이번 일에 대해 이미 언급된 문제점을 감안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있는 그들의 고위층에 접근하여 논리적으로 상황을 인지시키고 그들도 난감해하는 상황을 해소해 줄것을 어떤 방식으로든 동의할수 있게만 한다면… 이 작전을 훨씬 수월하게 진행하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아에 안할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어떠십니까? 한번 해볼만한 일이라 생각되지 않으신가요?"
그의 말에 에라드가 질문했다.
"그렇다고 해도… 말한대로라면 그들이 그렇게 손쉽게 '네 그렇습니까?' 라고 우리의 조정 요청에 긍정적으로 나오지는 않을 듯 한데요. 위협을 위한 허세라고 해도 그 진의를 드러내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특히나 그들의 수장인 바이바르스는 한번 내뱉은 말을 철회하거나 번복하지 않는 사람이라 들었습니다. 그런 사람을 설득하는게 과연 가능하기는 할지 의문인데요."
"뭐… 일단 실망스러운 보고서에 대비해서 나름 쳐줄만한 대응을 했으니 상으로 조언을 한가지 주도록 하지. 현재 맘루크들의 최고 의사결정권자는 그들의 총사령관인 바이바르스가 맞다. 그 고집불통의 괴물을 설득하는 건 그 누가 온다고 해도 무리일지 모르지. 설령 접근할수 있다고 하고, 우리 논리가 타당하다고 해도 그는 승복하지 않고 되려 더 강경하게 나올 가능성이 높지.
하지만… 맘루크들이 모두다 그런건 아니지. 그들에게도 내부의 의견을 조율하는 조정자 입장에 있는 사람이 분명히 있다. 현재 맘루크의 2인자는 칼라운, 오랫동안 바이바르스의 친구이자 조언자이며 군사적 동지이기도 했던 자다. 그리고 그에 못지 않게 출중한 능력의 소유자이며 나름 온화한 성품으로 맘루크의 대외 창구 역할을 하고 있는 자이기도 하지. 거기다 그는 바이바르스와 사돈간이다. 전에 성지에 찾아와 통고를 하고 간 바라카는 그의 사위이다.
들어보니, 현재 맘루크들은 레반트 일대에서는 정말로 최소한의 거점 방어병력과 점령지 유지 병력만 남겨놓고 대부분 이집트에 출전한 상태이고, 현재 그 공백을 관리하기 위해 그는 이집트에 가깝기는 하지만 그나마 이곳과 근접한 시나이 일대에서 바라카를 비롯한 바이바르스의 아들들과 같이 주둔하고 있다고 하더군. 그리고 최근에는 브엘세바 근처에서 나타났다는 소식이 있었다. 여기서 대략 빠른 말로 하루 거리지. 그 말은 바이바르스의 칙령이 떨어지면 그것을 집행할 위치에 있는 것이 칼라운이라고 봐도 무방할 듯 하다.
아직, 이곳의 지배자인 살라딘에게는 비선으로 맘루크와 연결할 라인들이 일부 남아있을꺼야. 그 라인을 통해서 칼라운과의 접견을 요청하면 그는 그리 어렵지 않게 만날수 있을꺼야. 그리고 만나서 어떻게든 그를 잘 구워 삶을수만 있다면 맘루크의 행보에 제동을 걸수도 있을 것이다. 어때 한번 해볼만하지 않은가?"
그의 말에 나는 한가지 질문했다.
"안젤모경은 같이 가주진 않을 생각인가 보군요."
"제가요? 무슬림에게 악마와 동급으로 취급되는 저를 데려가시면 아마도 대형사고만 나게 될텐데요? 그리고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이것은 저 같은 뜨내니가 난입해서 해드릴 일은 아니죠. 데네브 작전의 의사결정에 영향을 미칠 일입니다. 가장 핵심적인 책임자들이 나서서 그를 설득하려하지 않는다면 좋은 결과를 보기 어려울겁니다."
그의 말에 나는 한숨을 쉬며 생각했다. 그리고 그 일을 맡을 사람을 고민했다. 나는 가야 할 듯 하고… 그리고 대외적인 외교적 문제이니 케두스 왕자가 표면에 나서주는 게 좋을 것 같다. 그리고 세부적이면서 실질적인 협의를 위해서는…
"제가… 하겠습니다."
멜리장드가 결연한 표정으로 앞으로 나섰다. 나는 조금 불안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괜찮겠니? 쉬운 일이 될 것 같지는 않은데…"
그녀는 조금 의기소침해 보였지만 입술을 깨물며 안젤모를 한번 노려봤다. 그리고 결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오늘 많은걸 배웠습니다. 제가 아직 부족한게 많더군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도망치지는 않을겁니다. 제 목숨을 걸고라도 그와의 협상에서 최대한의 성과를 얻어내도록 해보겠습니다."
그녀의 사나운 시선에도 안젤모는 어께를 한번 으쓱해보이고 말했다.
"뭐, 왕자님 좋을 대로 하세요. 근데 저 깐죽이 데려가도 별 상관은 없을꺼예요. 이미 말했다 시피 논리적인 공감대는 대충 서있는 상황이니, 저쪽도 그리 부정적이진 않을겁니다. 적당히 기분 맞춰주고 얻을것들 얻어먹으면 되는 다된 밥이나 다름없는 자리입니다. 외교관 지망 햇병아리 에게 좋은 실전 경험이 되겠죠."
멜리장드는 그의 애송이 취급에 다시 한번 발끈하는 듯 하였으나 입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나는 이 정도 타이밍에서 그만 물러나야 겠다고 생각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죠. 오늘 즐거운 재회였다고 말하기는 미묘하지만, 우리에게 중요한 조언을 준것에 대해서는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이만 일어서겠습니다."
"그러시죠. 칼라운과의 협상을 마치시고 결과가 나오면 절 다시 찾아오십시오. 이후에 왕자님에게 협조하는 일은 그때 다시 논의하기로 하죠. 조심해서 돌아가십시오. 에라드와 리엔도 조심해서 돌아가라. 그리고 멜리장드, 앞으로 무슨 일을 할땐 좀더 심사숙고해서 프로답게 일하는 법을 익히도록 해. 조급한 마음과 어설픈 동정은 참모로서 큰 결점이야. 넌 아직 어리니 시간은 충분히 있을것이고 내가 말한 조언 고깝게 듣지 말고 행동으로 옮길수 있도록 노력해."
"그러죠. 말하지 않아도 그 조언 뼛속깊이 새기고 앞으로 당신따위에게 그런 조언을 받지 않도록 절치부심 할겁니다. 가자, 아이샤."
아까전부터 얼굴이 새빨개진 아이샤는 뭔가 홀린듯 멜리장드의 손에 이끌려 가면서 멍하니 뒤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안젤모와 눈이 마주치자 안젤모는 손끝에 키스를 해서 그녀에게 날렸고, 그 모습에 아이샤는 흠칫하며 종종걸음을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나는 이제 볼일은 마쳤다는 듯이 와인을 들이키는 옛 기억 속의 사람을 한번 돌아보았다. 그에게는 어떤 사연이 있기에 이런 모습으로 우리를 들었다 놨다 하는 걸까?
출중한 재능은 여전하지만 그 어두운 눈빛의 아래 말하기 힘든 사연이 보인다. 어쩌면 오늘의 광기는 그런 그의 그늘을 감추기 위한 허세였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언젠가 시간이 되면 알게 될꺼라 생각하며 잠시동안 머물렀지만 엄청나게 긴 시간인 것 처럼 느껴지는 그곳을 서둘러 벗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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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베드보이에 바람둥이,마초이즘이 적절하게 융합된 이탈리안이란 거!
삼치양의 영혼과 육신을 뼈속의 살점 하나 없이 발라버리고 털어버릴 것 같은뎁쇼!
그나저나 삼치양의 연대기는 샤를마뉴 대제가 나올때까지 멈춘 모양이군요.
2등이다!
그런데 백만명을 피난시킬 수 있는 함대라는게 존재할 수 있을지....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탈출계획은 탈출 이외의 뭔가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 되는 느낌이 드네요.
꼴통같으면서도 꼴통같지 않은 맘룩왕조와 어설픈 것처럼 보이면서 어설프지 않은 주인공 일행들의 대결은 언제 시작할까요?
이들이 맘루크 움직임을 막기위해 그럴가능성도...
음 흥미진진하게 돌아가네요. 그런데 맘루크의 바이바로스가 몽골원정군을 박살낸 영웅으로 알고 있는데. 설마 몽골 앞에서 주인공과 맘루크가 동맹을 맺는 이야기로 가나요?
헉헉 11화가 기다려지는군요!
캬 안젤모 멋진남자 ㅜㅜ 왕의 그릇이네요 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