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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s://m.pann.nate.com/talk/324113364
때는 대학교 1학년 첫 방학.
돈은 없고, 놀러가고는 싶고.
부모님께 손을 벌리자니
막 스무살 문턱에 들어선 나이가 부끄러운 그런 때였다.
방학시즌에 들어서자 노동력이 남아도는지,
기본 임금은 내려가도 내려가도 부족함없이 계속 내려갔다.
그나마도 덜 힘든 직종은 포화상태.
남는것은 땀흘리고 먼지마셔야하는 그런 일들.
적절한 시기를 놓친 나는
특별한 구직활동없이 그냥 저냥 집에서 지냈다.
그런데, 아는 친구한테 제의가 왔다.
일명 '신의 알바' 란다.
워낙 허풍이 많은 놈인지라,
우선 찬찬히 놈의 말을 듣어보는데...
교회 선교나, 도를 아십니까?
혹은 다단계 피라미드 마케팅 따위에는
코웃음도 치지 않는 내게도 과연 솔깃한 것이었다.
아니, 솔깃하다기 보다는 흥미로웠달까.
아무튼 놈의 이야기는 이랬다.
광릉 쪽에 천랑 추모공원이라는 공동묘지가 있단다.
그런데, 지금 시즌에(정확히 6~8월)
매년 장마로 인한 수재가 많아서
요 시기 물에 빠져 죽거나 실종되는 사람이 많고,
따라서 납골되거나 묻히는
장례되는 고인이 많댄다.
그런데 천랑 추모공원이라는 이 자리가
추파지(抽波地)라고 해서,
억울하게 객사한 사람들의 원혼을 달래고 천도하는데
특별한 기운을 가진 묫자리라는 것이다.
원래는 아주 옛날 객사한 벼슬아치나
먼 왕친의 핏줄들은 영도하고 묻는 곳이라고 했다.
그런데 그런 곳이다보니-
안치하거나 납골하는데 돈이 장난아니게,
그야말로 천문학적으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때문에 강남이나 서울쪽 빌딩부자들이나
정치계 권력자들만 들어갈수 있을 정도로
명산 뺨치는 안치소라고 했다.
"그래, 그런데 그게 우리랑 돈버는거랑 무슨 상관인데?"
내가 불쑥 끼어들자,
친구는 답답하다는 듯이 가슴을 치고 설명했다.
녀석 말인즉슨,
요 한달동안에 묘지에서 치러지는 안식제가 끝나면,
묘에 놓인 꽃을 수거해서 다시 되파는 일이라고 했다.
원래는 이것도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며,
묘지 관리꾼이 다 따로 있지만,
이번에 아는 연줄을 통해
힘들게 한달만 허락 받은 것이라고.
그게 무슨 돈되는 일이냐며 성질을 내자,
돈이 안되면 자신을 죽여도 좋으니 따라만 오라고
가슴을 떵떵치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한달만 해보자,
속는 심정으로 따라간 그 아르바이트는
그야말로 입이 쩍 벌어지는 알바였다.
우선은 해가 다 지고 열두시 즈음
공동묘지 맨 위 납장소로 걸어 올라갔다.
무섭기도 했지만, 워낙 깜깜해서 무덤도 잘 안보였고
옆에 친구가 있어서 별로 두렵지는 않았다.
오히려 오랜만에 좋은 산내음이 맡아져
기분도 좋고 약간 들떠 있었다.
그렇게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파트를 정하고
내려가며 분묘된 꽃들을 모아오는 것이었다.
그런데 부잣집들이라 그런지
꽃들이 하나같이 장난이 아닌 것이다.
내가 꽃꽃이나 플로리스트같은건 잘몰랐지만,
하나같이
그냥 동네 꽃가게에서 산것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굉장히 예쁘게 꽃꽃이가 되어 있었고,
심한것은 겉포장지에 금두름이 되어 있거나
아주 작은 세공보석이 있는 것들도 있었다.
이름모를 외국 꽃이라거나.
그런데 그런것들이 하루잡아 2~30여개가 되었다.
이것들을 다른 쪽 납골소나 추모당 인근 꽃집에 되팔거나,
아니면 꽃꽃이를 하는 신부수업학원같은 곳에 팔면,
그야말로 스무살 새내기 두명이 나눠갖기엔
두둑한 돈이 되었다.
죽은 사람한테 형식상 주는 꽃에 왜이리 돈을 들일까?
친구에게 물어보니,
원래 돈이 많은 사람들일수록
사후 묫자리나 미신같은것에 잘 연연한다고 했다.
현재 한국에 명당자리는
다 국회의원이나 거부들의 조상이 묻혀 있노라고.
불과 일주일을 했을 무렵인데도
내 수중엔 40만원 가까이하는 돈이 생겨 있었다.
친구와 산중 관리소에서 컴퓨터를 하거나 하며 노닥거리다가,
저녘 끝무렵 무덤에 올라가 꽃을 수거해오면 그만이었다.
어린 나이에 그야말로 신이 났다.
하는 것 없이 돈이 불어나니, 생각없이 신이날 수밖에.
"야 벌써 이정도면 한달이면 골백은 넘겠다. 그제?"
"그리 배포가 작냐. 기다려봐라.
꽃뿐이면 내가 말을 안했다."
무얼 기다리는가해도 말을 안해주며
히죽 히죽 웃는 친구의 속셈을,
대략 십오일여 정도가 지나서 알 수 있었다.
여느때처럼 꽃을 수거해오는데,
정말 쇼킹하게도 빛나는 금속이 수놓아진
금세사 목걸이가 있는 것이었다.
이게 뭔가, 하며 얼이 빠져 있는데-
고인이 평소에 좋아했던 물건을
공양삼아 두고가는 묫주인들이 간혹 있다고.
하나같이 두고가는 물건이 장난이 아니라,
그런거 하나 건지면
정말 산삼캐는 것과 다를바 없다고
입을 째지게 웃으며 친구가 그러는 것이었다.
지금 말하지만,
부자들은 정말 생각하는 돈단위 개념이 다른 것 같았다.
처음엔 좋아라했지만
갈수록 마음이 착잡해지기 시작했다.
저걸 가져도 될까, 고인을 욕보이는게 아닌가.
그렇게 시작된 고민은
결국 아르바이트 전체에 대한 회의를 몰고왔다.
하지만 돈을 많이 버는 것은 확실했고,
이만큼 수입이 좋은 다른 알바를
방학이 반토막난 시점에
다시 찾기는 절대 불가능했음이 자명했다.
또, 나름대로 좋은 일이라고 소개해준 친구한테도
미안해서 아무런 말을 못하고 있었다.
그 금목걸이만은 그냥 두자고 말해봤지만,
친구는 오히려 눈이 휘둥그래져서 미친것 아니냐,
이왕 시작한 일 알량한 자존심때문에
이 목돈을 버리겠다? 마구 비웃었다.
그래, 알량한 자존심때문이었다.
그 와중에 생기는 돈은 나도 군말없이 받아넣었으니.
그러던 와중에, 아버지한테 이 일을 들켰다.
아버지는 엄청나게 화를 냈고,
나는 속시원함 반, 안타까움 반으로 일을 그만두게 되었다.
그래서였을까, 그 일은 친구한테만 일어났다.
잊어버리고 살 무렵, 전화 한통이 걸려왔다.
"야.. 야.. 민수야 너도 보이냐?"
"뭐?"
"여자, 여자 말이다"
이빨까지 사려문 것처럼 떠는 모습이
수화기너머로 보이는거 같았다.
친구새끼는 담이 큰 놈이었다.
애시당초 겁이 많았다면,
공동묘지에 꽃 수거하는 알바 따위를
신의알바라고 추켜세우는 일도 없었으리라.
떠는 놈을 차근 차근 달래 이야기를 들어보니,
등골이 쭈뼛해졌다.
내가 발견해서 친구에게 건네준 금세사 목걸이.
친구 녀석이 그걸 중고 보석점에다 팔아 넘긴 모양이다.
진짜 금이었고, 자잘하게 세공된 것들은 가넷과 마노였다.
90년대에 나온 세공식 디자인으로 조금 구식이지만,
보석 자체가 진짜인지라 값을 삼삼하게 받았노라고 했다.
그런데 그 날부터
꿈에 웬 여자가 나온다는 것이다.
정확히는 7월 22일부터라고 했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 보석상 주인이 그 금목걸이를
중고 도매로 내놔서 팔아버린 날이라고 한다.
꿈에서 친구놈이 여느때처럼 꽃을 수거하면서 내려오는데,
어느 무덤가에선가 걸음이 멈춰지더란다.
고개를 숙여서 분묘된 꽃을 집어들고 허리를 펴면,
그때 앞에 여자가 서있더란거다.
처음 그 꿈을 꿨을땐 무섭지 않았다고 했다.
여자는 피를 흘리거나 끔찍하고 괴기스런 모습이 아니었고,
그냥 지나가면 볼 수 있는 평범한 그런 여자였다고.
하지만 눈이 굉장히 슬퍼보였다고 했다.
하지만 꿈이 연속되면, 정말로 무서워진다.
돌아가신 외할머니가 그네를 태워주는 꿈을
처음 꾸고선 울었던 나지만,
같은 꿈을 연속 네번이나 꾸자
소름이 돋았던 기억이 났다.
녀석은 그날 이후 현재 전화하기까지
스무일가량 그 여자가 꿈에 나왔다고 했다.
아무런 위해도 끼치지않고, 단지 쳐다보는 여자.
그쯤되자, 차라리 무언가 위악이라도 부리면 좋겠다-
라는 게 친구놈의 심정이었다.
처음 전화했던 것도, 목걸이를 발견해낸 것이 나니까
혹시 나도 그 여자가 꿈에 나오진않는가 하고
묻기 위해 전화했던 것이었다.
나는 우선 녀석을 만났다.
만난 녀석은 확실히 불안하고 초조해보였다.
살이 빠지거나, 안색이 좋지않거나한 것은 아니지만
손톱을 물어뜯는 아이처럼
생리적인 공포가 눈에 언뜻 언뜻 드러났다.
무당을 만나보라는 나의 권유에,
애초에 귀신을 믿지않던 녀석은 강한 부정을 나타냈다.
군인 아버지 밑에서 자란 녀석답게
그런 것을 일절 믿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나대로 나만의 경험에 의해
무당에 대한 믿음이란게 있어 강력하게 권유했다.
할머니가 아시는 한 무당분은
뭐랄까, 한마디로 진짜였다.
그 분은 신내림을 받으셨으면서도
따로 점집을 여시거나 하지 않았고
되려 기독교를 믿는 분이었다.
혹간 주변에 어려운 점이 있으면 도와주시는 정도?
한번은 할머니에게 댁의 아드님이 올해로 삼재에 들었으니,
액운에 대비하십시오. 라는 말씀을 하셨더란다.
삼재가 한번끼면 재수가 내리 똥이란다.
할머니는 우스갯소리로 나에게 그 말을 해주셨지만,
그 이후의 일은 소름돋는다.
재수가 내리 똥. 우습게 들린다.
아버지가 젊은 시절 모아두신 자금을 몽땅 털어넣은
가게 두곳이 완전히 망했다.
순전히 재개발 계획이 틀어진 탓이었다.
힘들게 아는 선배의 마권 경매소를 운입하셨는데,
얼마안가 바다 이야기 사건이 터졌다.
모든 유흥업소 규제가 강해지고, 자연스레 가게는 망했다.
여기저기 끌어모은 돈으로 다시 가게를 열었으나,
그 지역 건달들이 가게를 모조리 박살내놨다.
아버지가 오천 보증을 서주셨던
20년지기 친구분이 필리핀으로 해외도피했다.
덕분에 아버지는 주민등록과 의료보험이 말소처리되어
병원에도 못가셨다.
저게, 단순 1년동안 벌어진 일이다.
나는 그 일 이후,
무당이니 삼재는 재수가 없다느니 하는 말에 웃을수가 없었다.
그리고 몇년 뒤, 그 할머니가 다시 입을 여셨다.
이번에는 동생이었다.
동생이 요번년에 삼재가 있으니 유념하시라고.
긴 말 않겠다.
동생은 쌈질을 하다가 콧대가 부러져 뼈대가 틀어졌다.
앞니 두개가 부러져 인공치아를 하게되었다.
학교에서 두번 잘릴 뻔했으며, 다리가 한번 부러졌다.
일산패에서 유명한 폭력서클(흔히들 말하는 일진?)
눈에 띄어 여러번 시달림당했다.
단순 우연일수도 있다.
하지만 난 저 두사건을 겪은 당사자였다.
난 진중하고 진중하게 친구를 설득했고,
할머니에게 부탁해
그 무당분에게 친구를 데려갈 수 있었다.
무당할머니는
한번 보고도 그 친구의 상태가 어떻다거나 알아맞추는
내 상상과 같은 일은 보여주지 않으셨다.
대신, 친구가 겪은 일과 꿈에 대해
정말로 꼬치 꼬치 여러번 캐물으셨다.
그리고 그 일을 당장 그만두라고 하셨다.
그러면 더이상 꿈에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그만두라는 말에 친구는 시큰둥한 기색이었으나,
더 이상 꿈에 나오지 않을거라고 하자
단박에 수긍하는 얼굴이 되었다.
정말 그걸로 된건가?
아니, 아니다.
친구가 돌아가자,
무당 할머니는 나를 앞세워 그곳으로 가자고 하셨다.
강릉 천랑 납골원.
무당할머니는 그 곳에 가서 길쭉하게 생긴
이상한 금속 막대를 주고 땅에 박아넣으라고 하셨다.
정말 긴 막대였다.
나는 애를 먹으며 그걸 박아 넣었다.
총 네개.
납골원 꼭대기 양쪽 옆에서, 가장 아래 양쪽 옆.
거의 내 키만한 금속 막대를 네개나 땅에 때려넣고나자
온통 땀범벅이 되었다.
헐떡이고 있는 내게 무당 할머니가 말씀하셨다.
"이건 임시방편인기라,
이 밖으론 귀신이 못기어나와.
이 쇳대만 멀쩡하믄 니 친구한테 해될일이 없타"
다음날, 친구한테서 흥분된 목소리로
꿈에 여자가 나오지 않았다고,
오랜만에 정말 푹 잠을 잤다고
횡설수설하는 전화가 한통 왔다.
그리고 끝이었다.
아니, 끝인 줄 알았다.
어젯밤 뉴스에
17년만에 폭우로 강릉에 수해가 발생했다는 기사가 보였다.
그리고 토양이 흘러내려 분납된 유골들이 밖으로 드러났다는 기사도.
천랑 분납골이 TV 화면 속으로 보이고,
반쯤 드러나 옆으로 쓰러져있는 금속 막대가 보였다.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무당 할머니는 돌아가셨는데....
#실화괴담
첫댓글 죽은 사람걸 왜 훔쳐가지고ㅡ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