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조선 선비 최부 표해록을 많이 사랑해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으며 특별히 아직 발간 안된 글을 선사합니다... 솔직히 말해 글을 다시 다듬는 중이니 개의치 마시길....
들어가며
(베트남 2천년 시간여행)
목차
1, 2017년 베트남 여행길에
2. 사이공 최후의 날에
3. 베트남 이름 쯔엉
4. 호치민을 향하며
5. Lê Minh Đảo 준장
6. 동코이 거리에서
7. 코친차이나 사이공
8. 베트콩과 호치민 루트
9.여행자 거리에서
10. 호치민 거리 이름은 의미가 다르다.
11. 베트남 역사에서 파생된 이야기
12. ‘꿘안응언’ 음식점에서
13. 벤탄 시장에서
14. 호치민 시내 투어
15. 쩌런이라는 차이나타운
16. 베트남 화교와 중월 전쟁
17. 크메르 루주와 베트남
18. 응우엔주 거리에서
19. 통일궁에 머문 사람들
20. 고 딘 디엠과 티우 대통령
21. 인삼의 효능
22. 달랏의 향기
23. 예르생이 전하는 말
24. 새벽을 여는 베트남 여성
25. 달콤한 고산도시
26. 코친차이나 바지 사장
27. 바오다이 여름별장에서 만난 남풍황후
28. 민족주의자 판 보이 쩌우를 생각하며
29. 베트남 할머니 보쌈집에서
30. 문화는 가꾸는 것이다.
31. 문화로써 피는 꽃
32. 학교밑창에서 소주를 마시며
33. 술 마약 소금 그리고 쌀
34. 1차 인도차이나 전쟁은
35. 보 구엔 지압을 베트남에서 모르면 간첩이다.
36. 베트남의 바가지
37. 나짱 마제스틱에 놀란 사연
38. 나트랑에서의 하루
39. 통킹만 사건과 미국
40. 60~70년대 캄란(깜란) 나트랑 그리고 다낭
41. 구정쯤의 베트남
42. 다낭의 미각
43. 다낭에서 첫날 밤 그리고 기차
44. 후에(Hue)여행, 그리고 월남
45. 응우옌왕조의 왕들
46. 후에 역에서 만난 노인
47. B-52, 철의 삼각 그리고 케산
48. 베트남 전쟁 참전용사 그리고 다낭과 호이안
49. 베트남 전쟁과 미국대통령
50. 참파를 찾아서
51. 참파의 기록
52. 호이안으로 가는 길
53. 다낭에서 남은 여정을
54. 호치민을 어찌 볼 것인가에 대하여
들어가며
베트남 여행길에
가기 전 부터 설레는 마음, 올해만 두 번째고 총 네 번을 다녀왔다. 이제는 우리와 친숙한 베트남이지만 한동안 우리는 베트남을 잊고 살았다. 우리에게 월남으로 기억되는 곳, 내 나이는 오히려 이 말이 더 가깝게 들린다. 어느 때 극장가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영화 "님은 먼 곳에' 처럼 솔직히 내 머릿속에는 전쟁의 포화가 가득 넘쳐나고, 부산항 부두에서 청룡, 맹호부대 군인들을 선박에 태우고, 태극기를 흔들면서 맹호부대를 부르던 그 기억이 여전히 생생한데 엄벙덤벙 앙코르왓에 곁들인 관광 상품으로 어느 참 하롱베이는 두 번이나 다녀왔다.
다들 하노이를 가면 노이바이 국제공항으로 해서 월남 쌀국수를 먹고 바딘광장을 걷고 호안끼엠 호수를 보고 국자감을 관람하고 호치민 영묘도 보고 천혜관광지 하롱베이 선상에서 회도 한사라 먹고 그러고들 돌아온다. 어느 면 싼 값에 다녀왔다고 하는 베트남여행이다. 그 무렵 동승한 나이 70이 다 된 일행 중 한 명은 유달리 뀌년에 관심이 많았다. 나는 그의 조심스런 눈빛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어릴 적 베트남을 다녀온 친구 집은 씨레이션(미군 전투식량)은 물론 들고 다니는 전축 등등 없는 게 없었다. 집도 근사하게 단장을 했다. 남의 나라 전쟁이 우리에게 돈벌이라는 생각을 아마 그 무렵 했을 테다. 요즘 시골에는 베트남여성들이 참 많다. 최근 시골총각들이 신부 감으로 제일 많이 선호하는 나라, 베트남. 월남 파병과 돈벌이, 뀌년, 하노이에서 본 국자감 그리고 공산주의자 호치민의 영묘 등등. 본 글에 두서가 없듯 베트남을 대하는 우리도 매한가지다. 한편으로는 착잡하고 또 한편으로는 K-POP마냥 산뜻 발랄 친근감을 갖고. 그들 또한 그렇지 않을까. 아무튼 잊었다지만 결코 지을 수 없고 현재 또 다시 가깝게 다가서는 베트남을 단순히 한낱 앙코르왓에 낀 여행 정도로 취급한다는 것은 실로 부실한 처사가 아닐까 싶다.
그들 역사를 들춰보았다. 눈물이 났다. 이런 나라도 다 있구나. 어쩌면 이리도 우리를 꼭 빼닮은 것인지. 그들을 이해하고 같이 느끼려 한다면 역사를 좀 알아야한다. 뀌년을 조심스럽게 묻던 맹호부대 용사 그처럼 아직 베트남 상처는 미처 아물지 않았다. 아니 유수처럼 흘러간 세월이지만 그들의 역사 한 편에 우리가 서 있었음을 제대로 알기는 알아야 한다. 당대 박영한의 쏭바강, 황석영의 탑, 안정효의 하얀 전쟁, 이대환의 슬로우 불릿 등등 많은 소설들이 등장했던 그 추억처럼 전쟁참여에 따른 후유증은 기실 여전하다.
들추고 싶지 않지만 이를테면, 고엽제 피해 대상이 76,724명에 이르며 직접적인 후유증을 앓는 사람은 2만 1천명, 후유의증은 5만 5천명에 이르며 혼혈잡종이라는 라이 따이한은 최소 5천명에서 많게는 3만 명 정도 추산을 하고 있다. 그 외에도 전쟁에 따른 우리가 민간에게 입힌 피해도 생각해보지 않을 수는 없다. 거기에 요즘 불거지는 파월장병의 해외근무수당에 대한 이야기(이병은 1.25달러 중장은 10달러를 미국정부로 부터 받았다는 사실)까지 전쟁사는 굴곡 된 역사만큼이나 곡해가 따르며 많은 아픔과 후유증을 지닌다.
뀌년에 대해 묻던 그는 어쩌면 안케패스에 참전한 용사인지도 모른다. 안케패스(Ankhe Pass)는 베트남 빈딘성의 성도 꾸이년(퀴논)에서 크메르 국경지대까지 관통하는 19번 도로 중간지점에 있는 고갯마루를 일컫는다. 이 전투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남겨주는 의미 있는 전투였다. 안케패스 전투는 1972년 4월 11일부터 4월 26일까지 맹호부대(수도사단) 기갑연대가 치룬 전투 중에 가장 치열한 전투로 한국군에겐 몇 안 되는 북베트남 정규군(NVA)과의 전투 중에서 가장 치열했던 전투로 이 전투는 『안케패스 대혈전』이라는 소설로도 나와 있다.
당시 주월 한국군 사령부는 안케패스 전투를 매스컴과 고국에는 승전으로 알렸고 유공 장병이라 하여 태극무공훈장을 비롯하여 많은 훈장이 나누어졌다. 또한 638고지 정상에는 전승비가 건립되었다. 그렇게 나는 변함없는 우리의 용맹함의 대명사로 안케 패스를 기억하고 있었는데 2014.11.02. 일자 ‘돈이 고립된 장병들의 목숨보다 더 중요했나.’ 라는 제목 하에 한겨레신문의 박태균의 베트남전쟁에 대한 글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이를테면 <이 전투의 희생자는 공식적으로 전사 75명, 전상 222명으로 발표되었지만, 그 숫자를 믿는 사람이 많지 않다. 주월 한국 군사령관을 비롯한 지휘선상의 모든 지휘관의 리더십에 결정적인 허점이 있었다. 한국군 베트남 전 참전 전 기간을 통하여 가장 치욕의 패전으로 기록한다. >
이에 덧붙인 글은 또한 나를 경악시켰다. <베트남 전선에서 한국군이 고전하는 동안 전쟁특수와 관련된 소식은 끊임없이 한국 신문을 장식하고 있었다. 청룡부대 철수 계획 이후 육군 사단의 철수 계획은 1972년 6월에서 12월로, 그리고 다시 그다음 해로 계속 연기되었다. 그리고 애그뉴 부통령이 잉여장비 1억 달러를 제공하는 대가로 한국군이 2년간 더 주둔할 가능성이 제기되었다.(<동아일보> 1971년 7월2일치)>
결코 우리에게 월남전쟁은 전투와 더불어 우리의 삶과 무관하지 않다. 거기서 번 돈이 어떻게 쓰였는지는 모르지만 어릴 적 월남에 돈 벌러 갔다는 말은 어디까지나 맞는 말이다. 하지만 단지 기억하자는 것일 뿐, 본문에서는 굳이 월남 전쟁의 면면을 세세히 적지는 않았다. 요즘 베트남과 우리는 아주 친한 사이가 되었다. 이른 바 세일즈 외교라지만 역대 정상은 김영삼 전 대통령 이래로 임기 중 한 차례씩 베트남을 방문한 바 있으며 국빈방문은 김영삼·노무현·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에 이른다. 과거의 아픔을 딛고 이루어지는 만큼 진정한 교류와 협력은 보다 많이 이해하고 제대로 알아야 돈독해진다.
현재 베트남에 가장 많은 투자를 하는 국가는 어디일까? 바로 우리나라다. 한국은 2002년 이후 3년간, 매년 150~180건의 투자를 해오고 있으며 지난해에는 투자 1위 국가로 부상했다. 특히 제조업·건설업·서비스 기업의 베트남 진출이 급증하는 가운데 새로운 사업 기회를 잡기 위해 베트남을 찾는 개인도 크게 늘고 있다. 호치민 시 한인상공인연합회에 따르면, 현재 베트남에 진출해 있는 한국 기업 및 현지 한인들이 설립한 업체 수는 1천100여 개로 추정된다. 하노이를 중심으로 하는 북부 지역에 300여 개, 호치민을 비롯한 남부와 다낭 등 중부 지역을 합쳐 800여 개 정도다. 특히 남부 지역의 경우, 한인 기업이 해마다 약 10%씩 증가하고 있으며 호치민 시에 거주하는 한인만도 5만여 명에 달한다.
진출 기업들은 대체로 투자에 만족하고 있으며 향후 투자환경에 대한 전망도 밝게 보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열악한 인프라 환경(25%), 원·부자재 조달의 어려움(19%), 베트남 정부의 불투명한 행정(17%), 현지 상거래 관행(14%) 등에 대해서는 어려움을 토로했다. 실제로 최근 호치민 시와 인근 동나이 성 및 빈증 성 일대에서는 인력난과 임금 상승이 두드러지고 있다. 베트남은 더 이상 인건비가 싼 나라도 아니고, 저임금 노동력을 활용한 투자를 반기는 나라도 아니다. 이처럼 베트남의 투자환경도 과거와는 많이 달라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새로 베트남에 진출하고자 하는 기업이 유의해야 할 점은 무엇일까. 외국인의 베트남 투자 진출 방식은 경영협력계약, 단독투자, 합작투자 등 세 가지 방식이 있는데, 합작투자의 경우 ‘전원일치제’라는 독소 조항이 있어, 합작 당사자 간에 의견이 다를 경우 경영상의 어려움이 적지 않게 발생한다. 베트남 진출 초기 기업들은 가장 어려운 점으로 정보 부족(35%), 언어소통(19%), 베트남 정부의 인센티브 부족(12%), 투자지역 선택(11%), 투자형태 선택(10%) 등을 꼽고 있다. 나는 무엇보다도 그들을 알려면 그들의 역사적 의식이나 정서를 먼저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들을 바로 알자는 측면에서 그간 벼르다가 올해 2월초 다녀온 베트남 남부의 호치민, 달랏, 나짱(나트랑)과 이어 4월26일에 다녀온 베트남 중부 다낭, 후에, 호이안, 미썬을 중심으로 리드미컬하게 이야기를 꾸렸다. 비록 불과 십여 일의 여정이지만 본고는 단순히 물질적 문명의 잣대로서가 아니라 여행을 하며 느낀 그들의 정서, 역사 문화 사회 등을 솔직하게 고루 표현했다. 읽다보면 독자들은 그들의 교육열, 성실성, 유교사상 등등으로서 우리 정서 그대로 닮았음을 이해하고 그들의 역사를 제대로 알아보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2016년 오바마가 베트남을 다녀갔다. 그가 베트남을 방문한 궁극적인 이유 중 하나는 환태평양경제 동반자 협정(TPP)이었다, 또 한 가지는"무기 수출 금지 해제"라는 카드였다. 한국의 많은 기업들이 중국에서 베트남으로 넘어오는 추세에 이런 TPP체결로 인해 베트남의 한국인 유입은 지속적으로 증가 할 것이다. 많은 베트남 사람들은 한국처럼 한강의 기적처럼 '사이공 강의 기적'을 외치고 있다. 올해 미국 대통령 트럼프가 또 베트남을 가려고 한다. 우리도 달라져야 한다. 아픈 과거를 뒤로하고 우리는 같이 일어서야 한다. 섬유산업은 물론 전자, 자동차까지 물밀듯 베트남으로 향하는 지금, 의식도 닮아 갈수록 협력은 증가일로에 있다. 젊은이들은 한류열품의 땅, 베트남으로 향해야한다. 창출을 이루어야 한다. 성장 동력이 강한 베트남이 바로 우리 눈앞에 있다. 그 정도 경제속도라 한다면 머지않아 풍족한 나라가 될 것임에 틀림이 없다.
이글은 계속 이어질 것이다. 베트남은 길쭉해 수차에 걸쳐 여러 번 다녀와야 한다 싶다. 다낭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됐는데 벌써 또 나는 나갈 궁리다. 메밀꽃이 화창한 고산지대 북부 하장성, 역사적 전장터인 디엔비엔 푸 ,가랑이 논의 싸파,고산족의 박하가 우선 그 대상인데 베트남의 끝에서 끝으로 홍하델타로 부터 갈수록 곡창지대가 사라지고 있다는 메콩델타도 괜찮다. 그렇게 두고두고 이곳저곳 돌아보는 게 내 소망이고 꿈이다. 베트남은 그만한 멋과 맛을 지녔다. 아무쪼록 부족한 글 재미있게 읽어주면 고맙겠다.
대덕연구단지에서 조성원 드림.
사이공 함락 직전, 미국 대사관 옥상을 통해 탈출하는 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