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소한 집안의 표상
근면검소하게 생활하여 가재도구도 열에 예닐곱은 없을 정도였고 한 폭의 비단도 없었다고 합니다. 선조임금의 장인이면서도 가난하게 산 반성부원군 박응순(朴應順), 왕의 사위이고 딸이면서도 지극히 검소하게 살았던 금양위 박미와 정안옹주 등이죠.
이 집안은 심지어 ‘탈속반(脫粟飯)’을 먹었다고 합니다. 탈속반은 첫 번 찧은 쌀로 지은 밥이므로 아주 거칠었는데, 이것도 이 집안의 건강장수 비결의 하나가 됩니다. 이처럼 현미(玄米)로 지은 밥을 먹는 것이 왜 좋을까요? 최근의 조사 보고에 의하면 도정하지 않은 곡물로 지은 밥을 먹는 것은 대사증후군이 올 위험을 크게 줄인다고 합니다. 그리고 기름진 음식도 별로 먹지 않았으니 성인병에 잘 걸리지 않죠.
- 현미
대사증후군은 복부비만, 고혈압, 내당능장애(당뇨병), 고지혈증, 죽상동맥경화증 등 5가지 증상 중 3가지 이상이 한꺼번에 나타난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니 대사증후군은 심·뇌혈관질환, 당뇨병 등 온갖 만성질환의 뿌리가 되는 것이죠.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30세 이상 남성의 33.1%, 여성의 26.1%이 대사증후군을 갖고 있다고 하니 국민 3명 중 1명꼴이므로 거의 ‘국민병’ 수준에 달하고 있습니다. 대사증후군이 있는 경우에는 심혈관질환의 발생 위험이 두 배 이상 높고, 당뇨병이 발생할 확률도 10배 이상 증가합니다.
너무나 청빈하게 생활했던 연암 집안
연암의 조부인 박필균(朴弼均)은 경기도 관찰사를 지냈지만, 청렴결백하고 근검절약을 실천했습니다. 집안에 후손들을 가르칠 때도 이를 철저히 가르쳤다고 합니다. 아들들에게 가르치기를 “너희들이 장차 벼슬하여 녹봉을 받는다 할지라도 넉넉하게 살 생각은 하지 말아라. 우리 집안은 대대로 청빈(淸貧)하였으니, 청빈이 곧 본분이니라”고 하였답니다. 요즘도 고위 공무원이 이렇게 지낸다면 부정부패 없는 나라가 되겠죠. 그래서 연암 집안은 생활이 어느 정도였냐 하면, 연암 부친의 여러 형제들이 사랑방의 좌우에서 조부를 모셨으므로 연암 형제는 책을 펴놓고 공부할 공간조차도 없었다는 것이죠. 심지어 연암이 16세에 혼인했는데, 집이 너무 좁아 그 부인은 거처할 곳이 없어 친정에서 지낼 때가 많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좀 심했다고나 할까요.
연암의 적당한 음주
연암은 젊었을 때 자기 통제를 철저히 해서 술을 마시지 않았으나 과거를 단념하고 산수를 유람할 때부터 술을 즐겼습니다. 그래서 벗들과 어울려 글 짓고 술 마시며 노는 일이 꽤 있었는데, 그렇지만 연암골에서나 가끔 취했을 뿐 평소에는 취하도록 많이 마시지는 않았습니다. 사실 조금씩 마시는 술은 건강에 도움이 될 수 있지요. <동의보감>에서도 술은 ‘혈맥(血脈)을 통하게 하고 장위(腸胃)를 따뜻하게 하며 풍한(風寒)을 물리치고 독(毒)을 풀어주며 근심을 없앤다'고 하였는데, 적당하게 마실 경우에 그렇다는 겁니다. 많이 마시면 백약이 무효인 상태가 되어 버리는 겁니다. 사실 연암은 워낙 가난했기에 술을 마시고 싶어도 제대로 마실 수 없었습니다.
연암의 술에 관한 특별한 이야기
양반 집이라면 술이 없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제사를 지내야 하고 손님이 오면 접대를 해야 하기 때문이죠. 그러나 연암의 집은 워낙 가난했기에 청주 같은 좋은 술이 있지도 않았고, 부인이 탁주를 조금 빚어 두었다가 손님이 와야만 술을 내 오는데 그것도 딱 석 잔만 차려 주었다고 합니다. 한 잔은 주인인 연암이, 두 잔은 손님이 마시도록 한 것이죠. 그러니 연암은 자주 술이 고파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느 해질 무렵 연암은 길 가던 젊은 선비를 불러 세웠습니다.
“자네, 나 좀 따라오게.”
어리둥절한 젊은이를 사랑방으로 데리고 들어오자 뒤이어 초라한 술상이 나왔습니다. 그러자 연암은 손님 잔과 자기의 잔에 술을 채웠습니다. 그리고는 자기 잔을 비웠는데요, 젊은이는 영문을 모르기에 술을 마시지도 못하고 그냥 있었죠. 그러자 연암은 남은 술을 자신의 빈 잔에 따라서 또 마셔버렸습니다. 혼자서 두 잔이나 마신 뒤에는 젊은 선비에게 “자네, 술 마실 줄 아는가?”하고 물었습니다.
“못 마십니다.”
감히 어른 앞에서 술 마신다고 나설 수가 없어서 사양하자 연암이 “그럼 내가 다 마심세”하고는 젊은이의 잔까지 대신 마셔 버렸습니다. 연거푸 석 잔을 달게 마시고 나자 “이젠 자네는 가 보게” 하면서 그도 자리에서 일어섰습니다.
젊은 선비가 집에 돌아와서 조금 전에 겪은 얘기를 하자 부친이 물었습니다.
“그 어른이 누구인 줄 아느냐?”
“점잖으신 분인데 누구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바로 연암 선생이시다. 손님이 와야 부인이 술상을 봐주니, 너를 데려간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또 일어서신 것은 한 사람 더 청해 보려고 그랬을 것이니라.”
그게 바로 유명한 연암 선생의 ‘술낚시’였습니다. 술꾼낚시가 맞을까요? 아마도 지나가는 젊은 선비 가운데 순진하고 어리숙해 보이는 사람을 골랐겠죠. 적당하게 술을 마시는 것은 건강에 해롭지 않을 것 같습니다. 특히 술이 마시고 싶을 때 마시는 것은 배고플 때 밥 먹는 것이랑 별반 차이가 없지 않나 싶군요.
음악을 즐긴 연암
집에 생황, 거문고 등의 여러 악기가 있어 손님이 오면 연주하게 했는데, 홍대용이 사망하자 친한 친구를 잃은 슬픔 때문에 다시는 음악을 듣지 않았고, 악기들을 모두 남들에게 주어 버렸다고 합니다. 그러나 뒤에 경상도 안의(安義, 지금의 함양) 현감이 된 뒤에 황폐하여 퇴락한 지 오래된 창고를 철거하여 평평하고 넓은 수십 보의 땅을 확보하였습니다. 그 곳에 연못을 파고 아래위로 개울물을 끌어들여 물을 채워 고기를 기르고 연꽃을 심으니 은연중 물아일체의 흥취를 즐길 수 있었다고 합니다. 못가에 집을 짓고 벽돌을 구워 담을 쌓고 대나무 숲을 만들고는 친지와 친구, 문하생들을 초대하여 술자리를 마련하고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워 시를 읊었고, 때때로 기악(妓樂)을 베풀기도 했습니다.
연암은 “산수가 빼어나게 아름다운데다 시절도 태평하니 풍악을 울려야 마땅하다”고 하고는 마침 장악원의 늙은 악공 중에 은퇴하여 영남 땅을 떠도는 이가 있어 불러 보수를 줘 가며 음악적 재능이 있는 자에게 몇 달 간 노래와 음악을 가르치게 하고 서울에서 유행하는 음악도 전수하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당시 안의현의 음악이 경상도에서 으뜸이라 일컬어졌다고 합니다. 연암은 그림도 그렸는데, 국죽도(菊竹圖)가 전해옵니다. 음악에다 그림까지, 연암은 풍류를 아는 남자였으니 골방샌님만은 아니었죠. 취미생활을 해야 건강하게 장수할 수 있는 것이죠.
- 연암이 그린 국죽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