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 친구들에게
안녕!
내가 4살 땐가, 태평동에서 할바시와 조모랑 살다 부모 형제가 보고 싶어 한산도 창동으로 혼자 갔던 기억이 난다. 조모는 그 어린 나를 지금 거북선 정박한 그 어디서 정말 작은 통통배를 태워주고 손을 흔들며 가셨다.
한산도 창동, 뱃머리에 내려 가파른 언덕 고개를 올라가니 유자, 탱자 울타리의 학교가 보였다. 텅 빈 운동장 너무 넓어 보였다. 학교 뒤뜰 사택으로 가보니 부모님은 없었다. 때마침 제승당으로 소풍을 갔다는 것이다. 옆집 사택 사모님이 방문을 열어주고 들어가 쉬라한다. 방바닥에 개보따리 보자기를 팽개치고, 이불에 얼굴을 파 뭇고 소리 내 울었다.
거기서 둘째 동생 국재가 태어나고, 창동에서 옷바우로 이사를 가서 아버지는 하소초등학교 1회 졸업생을 배출시켰다. 한산도에서 욕지 도동으로 이사를 가서 욕지재를 넘어 다니며 원량초등학교를 다녔다. 군자께, 자살이, 덕동 친구들이 그 어시시한 골개재를 넘으면 함께 모여들었다. 숙녀인지 정희인지? 한 소녀는 삼촌한테 업혀서 등교하는 것도 보았다. 몸이 어디 불편했던 모양이다.
그 후, 아버지를 따라 남노대 분교를 갔다. 거기서 입양한 누나가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남노대 바닷가의 밤하늘의 별들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남노대에서는 어릴 때지만 소녀 소년이 형식적인 짝짓기 놀이를 했던 기억이 난다. 처음 만난 소녀의 손도 못 잡아 보고 밤하늘의 그 많은 별만 헤아리던 기억이 난다. 남노대 분교를 짓기 전에 웃노대로 배를 타고 학교를 다닐 때, 바람부는 날이면 배가 안 떠 헤엄을 쳐서 귀가했던 기억도 있다. 그 때 섬마을 친구들 해병대처럼 참 용감했다.
그렇게 섬에서만 자라다가 얼굴이 새까맣게 타서 고향 통영시내로 돌아 와 통영초등학교를 다녔다. 세병관의 그 느티나무 위에서 섬마을 동무들이 그리워 하모니카를 불며 외로움을 달래던 기억이 난다.
그 후, 아버지는 용남면 수도분교장으로 갔고 거기서 동생 국병이 국재, 경숙이가 함께 초등학교를 다녔다. 보모님을 따라 통영에 안 가본 섬이 없다. 사량도 금평에서 중학교를 조금 다니던 기억도 난다. 내지 답포로 소풍가서 팝송을 부르며 섬마을 친구들을 놀라케 해 준 기억도 나고, 양리지 앞바다 화도에서 백합을 꺾으며 친구들과 뱃노래를 부르는 날이 엊그제 같구나. .
지금 내 딸이 대학 3학년이니, 대부분 친구들 아이들은 다 컸고 동내 이장이나 혹은 개인사업도 하고 있겠지? 그동안 나는 타국에서 직장생활 한다고 소식 한번 전하지 못했다. 친구들아 다 잘 지내지? 내 이름이 잘 안 까먹는 이름 이국민이란다.
아! 궁미 나 안다! 얼굴은 너무 새까마서 기억이 가물 가물한데 이름은 기억하지 하하 그래 국민이가 소식 전한다. 요즘 경제도 어렵다는데 다들 어떻게 아이들 공부시키고 살아가고 있는지 여간 걱정스럽지가 않네.
이번 참에 이 국민이가 시장에 출마 한단다. 거기 그 섬에서 같은 물마시고 고구마 빼때기 묵고 자라던 섬마을의 실정을 누구 보다 잘 아는 국민이가 시장 나가서 진짜 일자리 만드는 시장으로 사람 사는 재미를 느끼는 동내 만들고 싶다.
친구들아 이제 우리도 오십이 훌쩍 넘었네. 벌써 손자 본 친구도 많아. 이제 우리들은 사람같이 사는 고향, 통영 만들어 우리 후손들에게 넘겨줘야할 책임과 의무가 있네. 타국에서 타향에서 살다보면 고향 통영만한 데가 어디 있니! 우리 다 같이 힘을 모아 잘 사는 토영 섬마을 통영시를 함께 만들어 보세.
동무들아 우리 비바람 불 때 나룻배가 없어 책 보따리 숨겨 놓고 헤엄쳐 섬을 건너던 용기 있지 않은가? 그런 용기로 일자리 많은 고향 통영 만들어 나가자 친구들아 이 국민이와 함께 뭘 못할 일이 있는가? 함께 의론하고 협의해서 무슨 일이든지 잘 처리하고 가족과 동네 그리고 나라에도 덕이 되는 일과 일자리를 만들어 나가자구나.
한 사람 한사람 다 찾아보지 못하더라도 나는 친구들의 사랑과 정의감을 믿는다. 우리는 적어도 섬에서 그렇게 희망차게 자라나지 않았는가? 건강하게 다시 만나 우리 고향 통영의 앞날을 위해
함께 의론하고 힘을 모우자.
2010년 5월 11일.
58년 개띠 친구 국민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