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연재 '광화문 연가'③
운동장 캠핑때 울려 퍼진 ‘캘리포니아 드리밍’
최성철(26회, 62세) 시인
시인인 최성철(26) 동문이 1970년 즈음의 경희궁 시절을 추억하는 글을 보내왔다.
책
한 권 분량 중 일부를 발췌해 5회에 걸쳐 싣는다.
경희궁 캠퍼스엔 운동장이 셋 있었다. 운동장 캠핑이 열린 곳은 제3 운동장이었다. 제3 운동장은 학교 뒤편에 있었는데 가장 작았다. 주로 중학교가 사용했다. 대부분의 중학교 행사가 여기서 치러졌다.
가을에 접어들면 운동장에서 1박2일 캠핑을 했다(요즘도 이것을 하는 학교가 있다고 들었다). 제3 운동장에 4인용텐트를 치고, 전교생이 학년별로 하룻밤 자면서 야영생활을 하는 것이었다.
운동장 캠핑 날은 수업을 일찍 마쳤다. 캠핑은 네 명이 한 조가 되어 수십 개의 텐트를 운동장에 치는 것으로 시작됐다. A텐트라고 부르던 2인용 소형텐트를 많이 사용했다. 그 안에 네명씩 들어갔다. 운동장 캠핑이 있는 날이면 운동장 한구석에서 등산반 아이들이 주관하는 등산장비 전시회도 같이 열리곤 했다.
갖가지 종류와 색깔의 로프, 험악하게 생긴 쇠고리들, 작은 곡괭이, 이상하게 생긴 코펠, 안경, 모자, 투박하게 생긴 등산화, 얼음 위를 걸을 수 있다는 아이젠 등 이름도 생소한 처음 보는 물건들이 이름표를 달고 한바탕 늘어져 있곤 했다. 전시회를 주관하는 등산반 아이들은 그날의 주인공이었다. 어깨에 잔뜩 힘을 주고 왔다갔다했다.
그러다 전시된 물건을 우리가 만지거나 들어보려고 하면“ 어어, 조심해. 이거 알파인 거야, 알파인”하면서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거드름을 피웠다.
운동장 캠핑 시즌이 되면 며칠 전 종례시간에 운동장 캠핑 계획이 공지됐다. 조가 편성됐고 우리는 1박2일 동안의 식사준비를 미리미리 했다. 코펠, 버너, 쌀, 고추장, 감자, 꽁치통조림, 식기, 도마, 그릇, 숟가락, 젓가락. 야외생활에 필요한 용품 준비를 분담했다. 쉬는 시간 조원들과 만나 상의하는 것도 즐거운 일이었다. 조장을 중심으로 자주 만나 얘기를 나누곤 했다.
준비물은 대부분 엄마들이 챙겨줬다. 학교에서는 부모님과 상의하지 말고 스스로 준비하라고 했지만 텐트 등의 장비를 빌려야 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팩을 박아 텐트를 쳤다. 열심히 펌프질 해 버너에 불을 붙이고, 쌀을 씻어 밥을 지었다. 꽁치통조림을
따고, 감자를 깎고, 고추장을 풀어 찌개도 만들었다. 밥을 먹고 나면 설거지를 했다.
1박2일 야영생활은 시작 전부터 매우 기대되는 일이었다. 전학생이 텐트촌을 만들어서 보는 건 자체가 또 색다른 즐거움을 안겨줬다. 가장 흥분되는 건 저녁때 하는 캠프파이어였다. 운동장 한복판에 장작더미를 하늘높이 쌓았다. 집채만한 불 더미 주변에 둘러앉아 오락시간을 열면 모두가 기다리던 장기자랑이 시작됐다.
출전하는 아이들은 며칠 전부터 제일 잘하는 노래를 골라 기타반주에 맞춰 수십 번씩 연습을 했다. 통기타를 치면서 팝송이나 유행가를 부르는 건 그 시절 우리의 중요한 일과였다. 쉬는 시간이면 교실에서, 방과후엔 교정에서 불렀다. 일주일에 한번 모이는 문학서클에서도 우리는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곤 했다. 영어가사를 외워 미국가수를 흉내를 냈다. 팝송을 많이 불렀지만, 유행하던 가요도 죄다 불러보곤 했다.
거의 매일 기타를 들고 등교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세고비아, 다이아몬드 등 유명브랜드의 기타가 있는 아이들이 한 반에 열댓 명은 됐다. 기타를 들고 교문을 통과할 때면 공연히 규율 반 형들의 눈치를 슬금슬금 봤다. 기타 줄을 튕길 때 사용하는 삐꾸와카포는 누구나 가지고 있었다. 드디어 캠프파이어 시간. 서로 다른 조였지만, 가까이에 상우와 정태가 있었다. 좀 떨어진 곳에서 영선이가 텐트를 치고 있었다.
캠프파이어 시간을 알리는 안내방송을 했다. 어디선가 호각소리도 들렸다. 아이들이 장작더미를 향해 모여들기 시작했다. 곧 장기자랑이 시작될 것이다. 생각만해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나는 반대표로 노래자랑에 나가게 돼있었다.
장작더미에 불이 붙었다. 우리들은 ‘와 와’소리를 질러댔다. 장기자랑시간 통기타를 든 가수들이 등장해 기타를 치며 유행가를 불렀다. 대부분 솔로였지만 트윈·트리오도 있었다. 하얀 손수건, 조개 껍질 묶어, 프라우드 메리, 스카보로의 추억 등 유행의 첨단에 있던 포크송과 팝송을 불렀다. 우리는 손뼉을 치며 따라 불렀다.
드디어 내 차례가 됐다. 나는 밴드 반 경수와 캘리포니아 드리밍을 부르기로 했었다. 야심 찬 선곡이었다. 기타를 들고 캠프파이어 앞으로 나갔다. 타오르는 불길 탓인지 얼굴이 훅하고 달아올랐다. 나와 경수는 쉬는 시간에 기타를 치며 이 노래를 자주 불렀기에 큰 두려움은 없었다. 캘리포니아 드리밍은 미국의 마마스앤파파스라는 보컬그룹이 불렀다. 돌림 노래식으로 화음을 넣으면 멋진 노래였다. 내가 앞부분을, 경수가 뒷부분을 맡았다. 우리는 불 앞에 쭈그리고 앉아 기타 줄을 튕기기 시작했다.
“얼더리브즈아브라운~ 얼더리브즈아브라운~” 아이들이 박수를 쳤다.
“앤더스카이이즈그레이~ 앤더스카이이즈그레이~”
경수와 나는 마음껏 실력발휘를 했다. 사진 반 영호가 가까이 다가와 셔터를 눌러댔다. 노래를 마쳤고, 누군가 앵콜을 외쳤다. 우리는 인사를 하고 자리로 돌아왔다.
나는 여러 번 기타코드를 잘못 잡았다. 가사도 두어 번 대충 넘어갔다. 경수도 몇 군데서 입을 다문 채 그냥 넘어갔다. 야외인데다가 아이들의 환호성, 합창소리, 웃음소리 등으로 남들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노래를 부른 우리는 분명히 알고 있었다.
즐거운 장기자랑이 끝났다. 선생님으로 구성된 심사위원들이
심사를 진행하는 동안 여기 저기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과연 누가 상을 받을 것인가? 심사결과가 발표됐다. 인기상, 장려상, 3등, 2등, 1등순이었다. 아쉽게도 우리는 입상 권에 들지 못했다. 시상은 교감선생님이 했다. 상장과 상품을 받은 아이들의 얼굴에 함박꽃이 피었다. 상을 받지는 못했지만 뿌듯했다. 운동장 캠핑 덕에 나와 경수는 기타 잘 치고 노래 잘 부르는 아이로 소문이 났다. 그 후로도 나는 쉬는 시간마다 교실에서 기타를 치며 우리의 우상이었던 통기타 가수들의 흉내를 냈다. 그들의 히트 송을 열심히 부르곤 했다. 우리 반엔 실은 나만큼 기타 잘 치고 노래 잘하는 아이가 많았다. 부분 쉬는 시간을 그렇게 보냈다.
팝송과 국내 포크송을 부를 때면 우리는 가수들의 모습을 그대로 흉내 내려 애썼다. 실력은 나날이 일취월장했다. 다른 반도 마찬가지였다. 어떤 선생님은 공부를 시작하기 전 이런 우리들을 앞으로 나오게 했다. 교단 앞에서 즉석장기자랑이 열렸다.
“아빈포러워~, 언어윈터스데이~”
지금도 캘리포니아 드리밍은 가사를 보지 않고 따라 부를 수 있다. 그때처럼 기타를 못치는 것이 마냥 아쉬울 뿐이다.
★최성철(26회)
- 서울 출생, 홍익대 졸업
- 1975년 『시문학』에 「자정의 도시」, 「바람」, 「새의 죽음」 등이 추천되어 등단
- 시집: 『간이역에 머무는 아픔』(‘02), 『도시의 북쪽』(‘11), 『어느 경주氏의 낯선 귀가』(‘16)
-
에세이 집: 『놀이의
천국』(‘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