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암, 소파에 몸을 기댄 채 꾸벅꾸벅 졸고 있던 아르메가 입을 크게 벌리며 하품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며 반대편 소파에 앉은 리르가 흐뭇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셋 다 피곤할 텐데 그만 들어가서 쉬어."
아르메의 하품 소리에 서류에만 꽂혀있던 시선을 올린 엘리시스가 펜을 손가락으로 빙글- 돌리며 잔잔한 목소리로 운을 뗐다. 아르메는 손가락으로 눈가를 비비고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안 돼."
"왜?"
"아직 생각할 게 남았단 말이야."
계속 졸더니 무슨 생각? 엘리시스가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너 생일 얼마 안 남았잖아."
"아, 그래?"
"........"
저거 또 까먹고 앉았네, 어떻게 매년 빠짐없이 잊어 먹을 수 있을까. 너 이런 중요한 행사 자꾸 까먹으면 아무도 안 챙겨줘!
"굳이 챙길 필요 있냐."
"당근이지!"
다른 대원들도 다 챙기는데 리더 생일을 안 챙길 수 있겠어?
"네가 나중에 꼬부랑 할머니가 돼도 이 천재 마법사가 꼬박꼬박 챙겨줄 테니까 기대하고 있어!"
".. 음.."
필요 없는데, 심드렁하게 대꾸한 엘리시스는 그저 고개만 작게 끄덕였다.
"그런데."
"응?"
엘리시스는 주먹으로 얼굴을 괴며 다음 일정을 상기해 보았다. 내 생일이 4일이었나?
"5일!"
이 바보야!
"5일이었구나."
"어휴!"
정말 속 터져!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피어오르는 아르메의 등을 토닥여준 리르가 문득 휘둥그레한 눈으로 엘리시스를 보았다. 엘리시스 님, 바보라는 말에 성내지 않으시다니..
"그런데 너 왜 자꾸 나를 바보라고 하냐?"
"지 생일도 모르는데 바보지 그럼."
'··· ···.'
그럼 그렇지, 남모를 한숨을 푹- 내쉬며 리르가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두 분 다 그만하시고, 엘리시스 님 생일날에 저희끼리 맛있는 거 먹으러 갈까요?"
"그래! 저번처럼 생일 파티는 아지트에서 하고 저녁은 우리랑 먹자!"
그게 되려나? 또 먹고 놀기 바빠서 못 나갈 게 뻔했다. 아, 근데 잠깐만. 8월 5일? 8월 5일이면.
"나 그날에 다른 일 보러 가야 되는데."
".... 잉?"
".... 예?"
하하.. 잠자코 세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라이언이 사뭇 허탈한 웃음소리를 내보내며 조심스레 물었다.
"무슨 일?"
혹시 취소는.. 역시 안 되겠지? 라이언이 흘린 질문에 엘리시스가 무심히 고개만 끄덕였다. 이런, 리르와 라이언의 눈이 동시에 보라 머리 마법사에게로 향했다.
"..... 야아!! 이 바보야! 멍청이야!!"
"그러게 왜 설레발부터 쳐."
"누구 때문인데!"
하여간 시끄러워, 저 녀석은 어쩜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릴까, 집무실 안에 가득 울리는 고성을 무시하며 엘리시스는 마냥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누가! 자기 생일에 일정을 잡아!"
시끄럽다니까, 매년 있는 생일 한 번 못 챙긴다고 큰일 나는 것도 아니고.
"큰일이지! 아주 큰일이야!"
"아르메 님, 진정하셔요."
두 사람의 실랑이 사이에서 점차 표정이 굳어가던 리르가 결국 제재에 나섰다. 리르 또 화내겠다, 라이언이 안절부절 녹안을 굴렸다.
"그럼 파티는 다른 날에 하는 게 어떨까요?"
"..... 그래, 그러자."
리르의 미소에 가려진 악마를 발견한 아르메가 숨을 헉- 들이키며 순순히 수긍했다. 날짜는 언제로 잡는 편이 좋으려나, 헤헤, 멋쩍게 웃으며 스리슬쩍 눈길을 피해 보았다. 꼭 찬물을 끼얹은 거 같네, 리르의 개입으로 단숨에 정리된 상황에 한숨 돌린 라이언이 입을 열었다.
"4일은 어때, 대장?"
"그날은 카나반에 갈 준비를 해야 해."
"아하, 5일은 내내 거기 있고?"
"아무래도."
능구렁이 할배랑 카나반에 가봐야 한다더니 그날이었어? 아르메가 한탄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선조면서 자기 후손 생일도 몰라."
"선조는 본인 생일이 언제인지도 모를걸."
하여튼 선조나 후손이나 참 무심하다니까.
".... 모두 엘리시스 생일 준비 중일 텐데."
"파티 못 연다고 일러줘야지, 뭐."
유감스런 미소를 지우지 못하며 라이언이 중얼거리자 아르메가 대꾸했다.
아쉽네요, 하지만 어쩔 수 없죠.
그럼 선물이라도 준비를 해놔야.
쟤는 선물도 실용적인 걸 줘야 돼.
맛있는 건 어때?
먹을 건 또 엄청 좋아할 걸?
악세서리도 좋아하셨으면 좀 좋을 텐데요.
능력치 옵션 안 달린 건 죽어도 안 할 거야.
"......."
예년, 누군가의 생일을 준비하는 것과 생일을 축하받는 것. 생일이라는 행사는 예삿일이다, 적어도 그랜드체이스 내에서는. 일 년의 한 번은 반드시 존재하는 당연한 날, 하지만 소중하고 특별히 여기는 날. 그날의 주인공이 감사 인사를 전하며 행복하게 웃으면 덩달아 기뻐지는 날. 물론, 그랜드체이스 내에서 말이다.
엘리시스에게 생일이란 단지 여느 날과 다름없는 하루에 불과했다. 굳이 챙겨야 하나, 왜 굳이 축하를 해줘야 하나. 그도 그럴 게 엘리시스는 어려서부터 단 한 번도 가족에게 생일 축하를 받은 적이 없었다. 그나마도 어린 시절에 딱 한 번, 다른 이에게 축하를 받은 적은 있었다.
엘리시스의 유일한 친구였던 아서가 그녀의 생일을 어떻게 알았는지 케이크와 선물을 사들고 훈련장으로 찾아와 준 것이다. 그리고 지금도 생생히 들려오는 불호령이 떨어졌다. 훈련하랬더니 놀 궁리를 하고 있었느냐며, 하필 아서가 초에 불을 켤 때 훈련장으로 들어온 엘스커드가 초코 시럽으로 '엘리 생일 축하해!' 가 그려진 케이크를 앗아 들며 엘리시스와 아서를 나무랐다.
결과야 어떻든 엘리시스는 그날 처음으로 생일 축하를 받았었고, 아버지로 인해 그 기억이 참 강렬하게 남았다. 아서 덕분에 여타 가족들은 생일이라는 날을 어떻게 챙기는지 알게 되었지만 크게 와닿지는 않았다. 엘리시스에게 생일이란 평소처럼 훈련을 하고 아버지에게 꾸중을 들으며 검술을 연마하는 날, 그러니까 다른 날과 다를 바 없는 하루이다.
그 생각은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평소처럼 일을 하고, 훈련을 하고, 임무를 수행하고. 그래서 누군가 자신의 생일을 입에 담으며 축하 인사라든지 선물이라든지 생경하게만 다가오는 풍경이었다. 처음에는 누군가 생일이라며 들뜨던 모습도 낯설었고 선물을 준비하는 일도 서툴러 다른 대원에게 도움도 받았다. 현재는 뭐.. 그저 그렇다.
다른 대원의 생일은 저도 모르게 최선을 다해 챙긴다. 하지만 저의 생일은 왠지 꺼려졌다. 누군가를 축하해주는 일이 생각보다 썩 불편하지는 않았다. 그에 반해 누군가 제 생일을 챙겨주면 기분이 달갑지만은 않다. 이유는 잘 모른다. 부담스러운 건지 쑥스러운 건지. 화려하든 단출하든 결국 그날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지나가는 날이니까 그저 평소처럼 지내고 싶은 것인지.
"고기 케이크는 어때?"
"오, 맛있겠다."
"생크림도 듬뿍 얹어서요?"
제발 평범하게 해 이놈들아.
어쩌면 저 녀석들 호들갑을 들어주기 귀찮아서라는 이유일 수도.
[대장님엘리시스님 엘리님 생일 축하드려요!]
w.rainruy
"히얍!"
두 손을 정면으로 뻗어 마법진을 그려낸 아르메가 기합을 내지르며 두 팔을 반대로 휘둘렀다. 옅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잠시 뒤 마법진 위로 앙증맞은 케이크가 솟아났다.
"특별히 주문해 놨던 거지롱~ 맛있겠지?"
시간이 얼마 없으니까 서두르자! 붉은색과 하얀색이 꽈배기처럼 배배 꼬인 길다란 초를 케이크 중심에 꽂고 심지를 향해 딱! 손가락을 튕겼다. 화륵- 아지랑이가 너울거리며 작은 불꽃이 일렁였다.
"자, 노래 시작!"
응? 노래?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
엘리시스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리르를 힐끗 보았으나 리르는 상냥히 눈웃음만 지을 뿐 아르메와 함께 난생 처음 들어보는 노래를 따라부르고 있었다. 게다가 박수도 친다. 일정한 리듬을 따라 박수를 치는 두 사람 중간에서 엘리시스 또한 엉겁결에 똑같이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사랑하는 엘리시스~"
"생일 축하합니다~"
짝짝짝짝! 노래가 끝난 뒤에도 어벙한 엘리시스의 표정을 보며 아르메는 웃음을 삼켰다. 하긴, 못 들어볼 만도 하지, 아지트에서도 이런 노래는 불러본 적이 없으니까. 공중에 둥실둥실 띄운 케이크를 두 손으로 받쳐 엘리시스에게 들이댔다.
다행히 마지막은 제가 알고 있는 단계이다, 두 사람이 부른 노래의 정체를 끝내 밝혀내지 못한 엘리시스는 아르메가 내민 케이크의 초를 입김으로 불어 꺼트렸다. 그 순간 무방비한 볼을 향해 기습 공격이 들어왔다.
"...??"
아르메의 손가락이 다녀간 볼을 손등으로 문대었다. 미끌한 무언가가 손등을 핥고 지나가 확인해보니 새하얀 크림이 잔뜩 묻어났다. 이게 뭐 하는 짓이냐, 황당한 눈길을 주니 엘리시스의 볼에 크림을 묻힌 범인은 손으로 입가를 가린 채 키득거렸다.
"이리 와, 너."
"꺅! 싫어! 원래는 주인공만 하는 거란 말이야!"
손가락에 크림을 왕창 장착한 엘리시스가 소파 뒤로 숨은 아르메를 뒤쫓았다. 케이크 엎어지겠어요, 가만히 지켜보니 두 사람 다 다투기보단 즐거워 보이니 굳이 중재하지 않는 리르가 공중에서 휘청이는 케이크를 급히 엘리시스의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기어코 아르메의 볼에는 크림 세 줄기가 그어졌다.
"심술쟁이."
흥흥, 아르메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두 볼을 부풀리곤 팔짱도 끼더니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과 엘리시스의 얼굴을 번갈아 보다 이내 리르를 보았다.
"리르만 볼이 깨끗하네."
"...... 네?"
무섭게 왜 그러세요 아르메 님, 주춤주춤 엘리시스의 책상 뒤로 물러났다.
"이제 그만해."
케이크 안 먹을 거야? 어느새 빵칼을 챙겨 온 엘리시스가 아르메의 뒷목을 잡아끌었다. 칫 아쉬워라, 혀를 차며 고분고분 손가락에 묻은 크림을 닦아냈다.
"이거 먹고 바로 가?"
"맞아."
정확히 세 토막으로 분리된 케이크를 리르가 가져온 꽃무늬 접시 위에 하나씩 옮겨 담았다. 보라색 꽃무늬 접시에 담긴 케이크, 노란색 꽃무늬 접시에 담긴 케이크, 각각 두 사람에게 전해준 뒤 붉은색 꽃무늬 접시에 담긴 제 몫도 챙겨 포크로 큼지막하게 한 조각 떼어내 입 안으로 집어넣었다.
맛있군, 좀 여유롭게 먹고 싶지만 그럴 시간이 없음에 아쉽다. 맛있지? 응, 맛있네. 달콤하네요, 케이크 단면이 참 예뻐요. 당근이지, 특별히 주문한 거라니까~
간만에 들떠 보이네, 그리고 간만에 한가하고. 조금만 더 이 기분을 만끽하다 이동할까.
그러나 크림을 묻히는 장난을 포기하지 못한 아르메가 리르의 볼에 기어이 크림을 묻히는 사태가 발생하게 되고 결국 리르의 입에서 '익사이팅하게-'가 튀어나옴과 동시에 집무실이 난장판이 되는 사건이란 아주 조금 뒤에 일어난 일.
─
엘리시스는 참으로 당연한 사실 한 가지를 망각했다. 제 선조는 절대 가만히 기다릴 위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 이 인간 아니, 이 하이랜더가 또 어디로 사라진 거야. 바로 이동할 거라고 그렇게 언질을 주었건만 이 선조는 도통 사람의 말을 듣는 법이 없었다.
혹시 마리의 연구실에 있나,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을 향해 발걸음을 서둘렀다.
"마리!"
마침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어 휴식을 취하고 있던 마리는 느닷없이 방문한 손님을 맞이했다. 엘리시스는 연구실로 내려와 곧장 내부를 살폈다.
"마리, 혹시 선조 못 봤어?"
"안타깝게도 아침부터 보이질 않아 연구에 진척이 없습니다."
그렇구나, 쉬는 데 방해해서 미안해. 엘리시스는 이내 다시 몸을 돌렸으나 길목을 티콘이 차지했다. 티콘의 몸체 위에는 붉은색 리본으로 묶인 상자 하나가 올려져 있었다.
"생일이시죠. 하마터면 전해드리지 못 할 뻔했군요."
"아.. 고마워, 마리."
선물 상자를 집어 들자 티콘의 표정이 시시각각으로 변했다. 느낌표를 나타내기도 하고 마치 고양이처럼 바뀌기도 하고, 아무래도 축하한다는 의미인 듯하다. 한 번 더 감사의 인사를 표하고 연구실을 뒤로했다.
위층으로 올라오니 복도를 서성이던 디오와 마주치게 되었다. 디오와 선조가 앙숙인 건 그랜드체이스 대원이 아닌 이상 모를 수 없었다. 선조의 행방은 물어보지 않는 편이 좋겠지, 간단히 인사만 건네고 지나치려니 돌연 디오의 오른손이 엘리시스의 어깨를 붙잡았다.
"볼일이라도 있어?"
"레이만 찾고 바로 돌아가려 했다만."
"......?"
디오는 특유의 무덤덤한 표정으로 웬 상자 하나를 내밀었다. 척 보기에도 고풍스럽고 거추장스러운 외관이 레이가 준비한 선물이다 말해 주는 듯하다. 근데 레이는 어디 가고 네가 이걸 대신 전해줘, 생각해보니 따로 답이 필요치 않았다. 분명 레이가 협박했거나 명령 비스무리한 걸 무작정 가했겠지.
"고마워, 레이한테도 고맙다고....?"
레이의 선물에만 집중돼 있던 엘리시스의 눈앞에 또 다른 선물 상자가 드리웠다. 이건 누구 거야, 채 물어보기도 전에 디오는 냅다 뒤돌아 발걸음을 옮겨갔다. 포장지로만 마감된 상자, 아무래도 이건 디오의 선물인 것으로 예상된다. 감사 인사도 안 듣고 갔네, 어지간히 쑥스러웠던 모양이었다. 그래도 고마워 디오.
-
"어제 맛있는 거라도 잔뜩 줄걸."
라이언이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먹을 게 최고지, 제 손에 들린 찹쌀떡 한 봉지를 흘겼다.
"언제 출발하냐고 물어봤어야 했는데."
그러게, 라스가 맞장구쳤다.
"라스는 엘리시스 선물 어떻게 했어?"
"나는 이미 카나반으로 보내놨지."
그런 방법이, 난 왜 그런 간단한 방법도 생각 못 했을까.
"솔직히 선물이란 건 얼굴 보면서 직접 줘야 서로서로 보기 좋잖아."
"그런가.."
라스는 나름 위로의 의미로 건낸 말이었으나 라이언은 우울한 얼굴을 도통 풀지 못했다. 직접 주는 게 의미가 더 좋으면 뭐 하나 그조차 못했는데, 라이언이 답지 않게 거듭 한숨을 내쉬었다.
"어쩔 수 없지. 아르메한테 부탁해야겠다."
그러든가, 응?
"저기 엘리시스 아냐?"
"뭐?"
라스가 손가락으로 아지트 입구를 가리켰다. 아직 출발 안 했네?
"대장~!"
반대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 엘리시스는 자신을 향해 무척이나 반가운 얼굴로 뛰어오는 라이언을 발견했다. 그의 옆에는 라스도 있었다.
"라스, 라이언?"
"왜 아직 출발 안 했어?"
아직도 아지트에 있는 엘리시스가 의아했던 라스가 물었다.
"지크하트 찾느라고 좀 늦었어."
"그래서 찾았어?"
"아니. 대체 어디로 사라진 건지."
골머리를 삭히려는 듯 이마를 짚은 엘리시스를 보며 라이언이 서둘러 제 손에 걸린 것을 드밀었다. 얼떨결에 그것을 받아 든 엘리시스가 어리둥절한 눈빛으로 라이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예쁘게 포장은 못 했지만 엘리시스가 좋아하는 찹쌀떡이야!"
"아."
그제야 봉지 안을 살펴보며 엘리시스가 탄성을 뱉었다.
"고마워, 맛있겠다."
"천만에!"
전해주지 못해서 얼마나 걱정했는데, 그리고.
"지크하트는 너무 걱정하지 마, 엘리시스."
"걱정 안 했어."
누가 누굴 걱정해.
"맞다. 라스는 따로 보내놨대, 엘리시스 선물."
".........!"
그걸 왜 네가 얘기하냐, 얼핏 볼을 붉게 물들이며 라스가 라이언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보니 라스는 무슨 선물 준비했어?"
윽, 몰래 신음을 삼킨 라스가 눈동자만 살짝 굴려 엘리시스의 낯빛을 살폈다. 혹시 제 대답을 기다리고 있을까, 오늘따라 그녀의 표정을 읽기 힘들다.
".... 나도 너와 비슷해."
"하하하, 역시 그렇구나."
지금으로부터 대략 일주일 전, 엘리시스와 라스가 단둘이 임무를 다녀온 마을에서 유독 두 사람의 눈길을 끈 음식이 있었다. 급하게 다녀오느라 차마 음식의 이름과 맛을 확인하지 못했으나 그 순간 라스는 엘리시스의 생일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
임무를 마친 직후 다시 그 마을을 방문한 라스는 직접 그 음식을 맛보며 이 음식을 취급하는 모든 음식점을 닥치는 대로 탐문했다. 그 결과 엘리시스 입맛에 명확히 들어맞는 곳을 찾아내는 것에 성공했다. 처음엔 그 식당을 대관할 계획이었으나 정작 주인공인 엘리시스가 시간이 나지 않아 기각되었고, 그 다음으로 구상한 것은 아예 그 음식을 카나반까지 배달시키는 것이었으나 거리가 먼 만큼 변질될 가능성이 커 이 방법 또한 좌절되었다.
뒤늦게 마법의 힘을 빌린다는 해법이 떠올랐으나 그땐 이미 그 음식을 엘리시스에게 선물할 방안을 세운 후였다. 여러가지의 방도를 찾으며 골머리를 앓던 라스가 마지막으로 생각해낸 계획이 바로, 요리사를 고용하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현재 엘리시스에게 줄 선물로 보내 놓은 것이 그 음식을 요리할 요리사들이다.
카나반 왕국으로 돌아가면 아주 깜짝 놀랄 거다, 음식을 맛보는 엘리시스가 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으나 지크하트가 함께 돌아간다는 이야기를 들은 이후로는 그 놈이 음식을 다 해치울까 염려되기도 했다.
"생일 축하해!"
오늘도 즐거운 하루가 되기를, 이라는 축복도 함께 전하고팠으나 지크하트를 찾아다니며 이를 가는 엘리시스를 보니 이미 즐거운 하루를 보내기란 물 건너 갔으려니, 결국 라이언은 말을 아꼈다.
".... 축하해."
본래 선물이란 내용물을 모른 채 뚜껑을 열어야 더욱 환희에 잠기는 것, 그러니까 무슨 선물인지 말하지 않은 거야. 절대 쑥스럽거나 부끄러워서가 아니란 말이지. 그냥 그렇다고.
-
꼬맹이 대장님 생일 축하드려요, 라며 능글맞은 미소로 저의 손에 아무렇게나 쥐여준 선물 상자를 뚫어질 듯 쏘아보았다. 언젠가 그 녀석이 준 선물을 열었다 집무실이 난장판이 됐던 전적이 있어 엘리시스는 함부로 이 선물 상자를 개봉하지도 못하고 우두커니 서 있을 뿐인 것이다.
"선배님!"
때마침 엘리시스의 옆을 지나치던 라임이 반가운 얼굴로 다가왔다. 그럼과 동시에 그녀의 손에 올려진 선물 상자를 보며 '오호라' 마치 탐정 놀이하는 아이인 양 엄지와 검지를 턱 밑에 가져다 대었다.
"아신 선배님께서 준비한 선물이군요!"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영웅 사전이랍시고 대원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하더니 예지 능력이라도 얻은 건가.
"어제 아지트로 돌아오기 위해 상가를 가로질렀더니 웬 가게 앞에서 뭔가를 골똘히 고민하는 아신 선배님을 발견했답니다! 조금 뒤엔 그 가게에서 선물 상자도 들고나오시더라고요. 분명 엘리시스 선배님의 생일 선물일 거라 생각했죠!"
상가의 웬 가게라, 그럼 이번엔 괜한 걱정 안 해도 되겠다. 내심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
이제 보니 리본에 문구가 적혀있다. '당신의 생일을 진심으로 축하하는 이와 함께하길'
".........."
괜스레 목덜미를 쓸었다.
"힝, 전 루즈 성국을 다녀오느라 선배님의 선물을 준비하지 못했어요. 어쩌죠..?"
몹시 속상한 듯 라임이 울음보를 터트리기 직전인 얼굴로 안절부절못했다. 엘리시스가 다급히 손사래를 쳤다.
"기억해준 것만으로 정말 감사한 일인걸, 고마워."
"역시 선배님! 여신님의 상냥한 손길만큼 마음도 어쩜 이리 넓으신지!"
울적해 할 땐 언제고 금세 격양된 표정으로 낯부끄러운 말들을 거침없이 쏟아내는 라임이다. 그래, 기운 없어 보이는 것보다야 낫지. 이런 일상이 익숙한 엘리시스는 반쯤 해탈한 기분으로 능숙하게 응해주었다.
"그러니 이 특별한 날, 여신님께 감사 기도를 올려드리겠어요!"
"..... 응?"
사양의 의사를 드러낼 새도 없이 다짜고짜 저의 두 손을 잡아 올린 라임은.
정의로운 희망이 찬란한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또 이 세상에서 살아갈 자비를 주신 여신이시여─
"....."
당신의 성스러운 기사가 소중한 가족을 위해 지금 이 자리에서 기도를 드리나니─
"........"
행복과 기쁨이 충만한 하루가 될 수 있도록 부디 축복과 은혜를 배풀어 주시옵고─
"............"
.... 그렇게 한 30분 동안 겸허한 목소리로 기도문을 읊었을 것이다.
-
이제 남은 곳은 주방인가, 이쯤 되면 알아서 나타날 법도 한데 결코 먼저 나타나는 법이 없다, 이 하이랜더는.
달칵-
".......!"
주방에서 웬 소리가, 설마 여태 여기에 있었나. 정말 누구 덕에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 뭔지 깨닫는다. 신경질적으로 주방문을 열어제꼈다.
"지크..!"
"응?"
"엘리시스?"
그러나 주방 안에는 기장이 긴 앞치마를 입은 레이와 린 뿐이었다. 그래도 모르니까, 빠르게 주방 안을 탐색했다.
"마침 잘 왔어, 엘리시스!"
".....?"
"짠!"
린은 세상 해맑은 얼굴로 두 손에 얹은 무언가를 엘리시스에게 내보였다.
'··· ···?'
뭐야 저거, 또 레이가 멋대로 불러온 소환체인가. 언뜻 보이엔 슬라임같이 생긴 것이 불투명하고 붉은색을 띤다. 근데 저런 걸 왜 접시 위에 올려놓은 것인가.
"맛있겠지?"
"맛.. 뭐?"
맛있겠냐고?
"뭔데 이게?"
정신 머리가 똑바로 박혔다면 이게 맛있어 보일 리가 없을 텐데.
"뭐긴."
"케이크지."
"뭐라고?"
엘리시스는 제 눈과 귀를 의심해야만 했다. 이리보고 저리봐도 액체 괴물의 형태를 닮은 이것이 케이크라고 한다. 옆구리를 툭- 치면 탱글탱글 탄성 있게 튀어 오를 것만 같은 물체를 한참 동안 응시하니 돌연 그것을 탁자 위에 올려놓은 린이 포크로 그것의 일부를 떼어냈다.
"자, 엘리시스."
이걸 먹으라고? 어느새 제 입까지 다가온 케이크라는 것의 일부를 린과 레이의 성화에 못 이겨 조심스레 입 안에 담았다. 혓바닥이 따끔따끔하다, 대체 뭘 넣은 거야.
"걱정 마. 몸에 해로운 건 안 넣었어."
부디 사람이 먹을 수 있는 걸 넣었길 빈다, 도무지 맛보기가 두려워 참고 있던 호흡을 들이시며 케이크 조각을 어금니로 물었다.
... 음? 생각보다 먹을만 하다.
쫀득쫀득하고 식감도 의외로 괜찮다. 꿀꺽- 한창 입 안에서 퍼지던 이 미스터리한 맛은 도통 케이크 같지 않지만..
"맛있지?"
".... 그래."
무슨 맛인지 당최 모르겠지만, 저의 생일이라고 기껏 만들어 줬는데 짠소리하고 싶진 않다.
"내가 친히 만든 케이크인데 감사해야지, 엘리시스?"
레이가 고상한 손길로 스스로를 가리켰다. 그리고 보니 디오에게 선물 셔틀 시키고 본인은 어디에 있나 싶었다.
"고마워 레이, 린."
"이 정도야 당연하지~"
힐끗- 레이와 린으로 인해 가려진 주방 상태를 엿보았다. 케이크를 만드는 데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걸까, 폭탄이라도 터졌던가. 아주 난장판이 따로 없는 주방꼴이 나중에 로난경이 돌아오면 대성통곡을 하겠군.
"... 나중에 다 정리할 거야."
엘리시스의 생각을 읽은 것인지 린은 시인하며 겸연쩍게 웃어 보였다. 그래, 제발 부탁한다.
"그럼 이제.."
"더 안 먹어?"
"....?"
"내가 친히 만들었다니까."
"그래, 고마워."
고맙고 내가 지금 시간이 없어서..
"나의 소중한 티타임까지 쪼개서 네 생일을 축하하겠다고 친절히 케이크까지 만들어 주었더니, 엘리시스 그렇게 안 봤는데 배은망덕하구나."
그런 뜻이 아니라 내가 진짜 시간이..
"... 아까 다른 녀석들과 케이크를 먹은 상태라 그런 거야."
"그래서 안 먹겠다?"
"포장해서 가져갈게."
"흠, 그렇다면야."
휴우, 속으로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한 조각 정도는 먹고 갈 수 있지?"
"......."
"굉장히 피곤해 보이십니다, 리더."
"... 그런 일이 좀, 있었어."
"헌데 생일이라면서요."
얼핏 들은 바로는 오늘이라고 하더군요, 말을 마친 루퍼스가 서류 한 장을 내밀었다. 그 종이를 받아들이며 엘리시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겠지만 선물 같은 건 준비해 놓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선물을 받는 걸 썩 기꺼워하지 않는 듯 했으니, 그렇다고 축하의 말을 건네기엔 적절한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대신 당신이 죽으면 망자의 날을 성대하게 치러드리겠습니다."
"아니, 선물도 됐고 망자의 날인지 뭔지도 안 챙겨줘도 돼."
망자의 날은 또 뭐 하는 날인가, 명계에서만 존재하는 축제인가. 여하튼 망자라는 단어가 붙은 날이라니 여간 꺼림칙한 게 궁금하지도 않아. 저가 무엇을 무서워하는지 버젓이 알고 있으면서.
"의뢰인이니, 적어도 예의상 축하는 해드리죠."
"..... 됐다고."
무뚝뚝한 입술이 희미하게 휘어졌다. 가면이라도 쓴 듯 한치의 변함이 없던 얼굴이 저를 향해 짖궂은 미소를 떠올리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가만 보면 루퍼스 이 하로스도 사람 놀리는 걸 은근히 즐긴다니까.
-
허공에 둥둥- 몸을 띄운 채 새하얀 천장을 올려다보며 무료한 손짓으로 데우스를 툭툭- 가만 못 두던 베이가스는 문득 창밖으로 눈길을 돌렸다. 붉은 머리카락을 한 줄기로 묶은 여인이 아지트 밖으로 나서고 있었다.
저 인간 아니, 저 벌레, 오늘 생일이라고 했던가. 온건파의 수장이 준비하던 선물도 저 벌레의 것이로군. 인간계에서는 생일이라는 날을 어떻게 기념했던가. 아, 좋은 수가 떠올랐다. 악동처럼 얄궂은 미소가 베이가스의 얼굴에 떠올랐다.
"이봐, 빨간 벌레."
빨간 벌레라, 익숙한 호칭에 뒤를 돌아보니 예상대로 반갑지만은 않은 앳된 얼굴이 공중에 몸을 띄운 채 당도에 임했다.
"무슨 용건이지?"
"짧은 다리로 애쓰며 달려가는 꼴이 안쓰러워 불러봤을 뿐이다."
짧은 다리라는 말에 찰나 목구멍까지 무언가가 들끓어 오른 엘리시스였으나, 상기해보면 이 놈은 하루에도 몇 번 그 키라는 것 때문에 여러 대원들에게 놀림감이 되지 않았던가. 그 광경을 지켜보며 예전부터 선조에게 키에 대한 신경을 긁혔었던 빡침을 떠올린 그녀는 왠지 모를 동질감을 느꼈고 또 다짐하게 되었다.
적어도 나는 그 주제(키)를 요깃거리로 삼는 짓은 말자, 가까스로 그 다짐을 떠올린 엘리시스는 베이가스의 어깨를 손으로 토닥여 준 뒤 지체없이 제 갈 길을 돌아보았다.
"......?"
뭐지, 벌레의 더러운 손이 이 몸의 어깨를. 아니, 그것도 그렇다만 이상하게 기분이 뒤숭숭해 베이가스는 혼란스러운 기분을 감출 수 없었다. 흥, 상관은 없다. 저기서 몇 발자국만 더 움직이면, 곧바로 제가 설치해둔 마법진이..
"대장!"
어디선가 쏜살처럼 달려온 진이 다급히 엘리시스의 팔을 잡아당겼다. 느닷없이 몸이 끌려간 엘리시스가 의아한 표정으로 진을 올려다보았다.
"휴우, 안 늦었다."
참으로 우연히, 방 안에서 창밖을 구경하던 진은 텔레포트를 발동한 것인지 돌연 모습을 나타낸 베이가스가 엘리시스가 향하던 길목에 마법진을 설치해둔 후 은신 마법으로 그 마법진을 감추는 장면을 목격하고 서둘러 아지트 밖으로 뛰쳐나온 것이었다.
"베이가스, 이곳에 머물 때만큼은 얌전히 있어 달라 당부했을 텐데!"
엘리시스는 목에 힘을 주며 호통을 쳤다. 그새를 못 참고 또 장난질이라니.
"장난질이라니, 이 몸의 하해와 같은 뜻을 이해하지 못 하다니."
하지만 베이가스는 진정 억울한 듯 어깨를 들썩였다.
"이 몸은 단지 너의 생일을 기념하려 했던 것 뿐이다."
"기념?"
"이 세상에는 생일빵이라는 개념이 있더군."
베이가스가 설치했다는 마법진이 어떤 마법이었을지 대강 감이 왔다. 그 많은 축하 방법 중에 하필 이런 방식이라, 베이가스도 참 어쩔 수 없이 파괴적인 종족이다.
"다른 벌레들은 몰라도 넌 이 몸이 잠시 몸담고 있는 집단의 리더이니 특별히 우대해주려 했다만, 이런 식으로 감사를 표하다니."
선물이든 축하든 제아무리 당사자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전달하는 것이라지만, 엘리시스는 가늘어진 눈빛으로 마법진이 설치되어 있을 것이라 예상되는 위치를 흘겼다.
"축하도 정도껏 해야 하는 법이지. 폭력을 축하의 의미로 정당화할 순 없어. 이렇게 소란을 피우면 대장의 입장만 곤란해진다고."
진이 단호한 목소리로 제재를 가했다. 그러나 베이가스는 혀를 한 번 차고는 곧 몸을 돌려버렸다. 이런, 진이 탄식했다. 그런데 베이가스가 다시 두 사람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딱- 손가락을 튕겼다.
".......?"
뭘 한 거야, 진과 엘리시스는 연신 주변을 살폈다.
콩!
".....!"
"앗, 엘리시스!"
그 때 엘리시스의 머리 위로 무언가가 추락했다. 엘리시스가 정수리를 부여잡는 모습을 지켜보며 입꼬리를 올린 베이가스가 재빨리 모습을 감췄다.
"괜찮아, 엘리시스?"
"괜찮으니까 걱정 마."
하여간 그놈, 어쩐지 조용히 물러난다 했지. 콩- 이라는 효과음과 달리 은근히 정수리가 얼얼했다. 그래도 그 무자비한 성격에 이 정도면 나름 유하게 넘어간 편이다. 한편 엘리시스의 뇌천을 갈기고 떨어진 무언가를 진이 주워들었다.
"....? 이거 사과야?"
정체불명의 열매를 이리저리 돌려보며 진이 질문해왔다.
"그런 거 같은데."
색이 보라색이라 헷갈리지만.
"정제된 거겠지?"
글쎄.
"어쨌든 엘리시스도 베이가스를 설득하느라 그렇게 고생을 했었는데, 내 말까지 들어주길 기대하는 건 힘든 걸까."
"인정을 바라기보단 규칙을 세웠지. 애당초 마족과 우리는 사고방식이 천지차이라 그들에게 우리의 생각을 강요할 순 없는 노릇이라."
우리도 마족도 일단은 공통된 목적이 있으니까.
"어디까지나 동맹의 입장으로써 말이지."
"그렇구나."
근데 지금껏 그 규칙을 성실히 지켜왔다니 좀 놀라운데, 진이 볼을 긁적였다. 일단 마법진부터 없애자, 엘리시스가 검기를 불어넣은 검을 땅 위에 내리쳤다. 은신 마법이 풀린 마법진은 엘리시스의 검이 가로지른 흔적을 고스란히 드러내며 균열을 일으키고는 이윽고 산산이 깨어졌다.
"아, 난 대장이 이미 카나반 왕국으로 간 줄 알고 진작에 선물 보내놨는데.."
"고마워, 진. 꼭 확인해볼게. 참, 혹시 지크하트 못 봤어?"
"지크하트? 아침에 계단 내려가다가 마주쳐서 언제 카나반 왕국에 가냐고 물었더니 "지금." 간다며 바로 나가던데..? 설마 지크하트가 아무 말도 안 한 거야?"
"........."
진짜 이 능구렁이가, 엘리시스의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헉, 진이 숨을 들이켰다.
"아, 아! 맞다, 그리고!"
"......?"
아까 저잣거리에 내려갔다가 들은 이야기인데.
"눈만 가리는 가면을 쓰고 흉측하게 생긴 커다란 검을 등에 진 남자가 세르딘 숲속을 거닐고 있다는 소문이 나도는 모양이야."
".......!"
"아닐 수도 있지만, 맞는 것 같아서."
"... 그래. 나도 이만 카나반으로 가볼게."
"알았어, 조심히 다녀와. 대장!"
간단히 손을 흔들어 준 뒤 엘리시스는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직행한 곳은 바로 세르딘 숲, 소문이 맞는 걸까 만약 그 소문이 확실하다면 아직 있을까, 소문에 대한 의문과 걱정이 교차하며 샛길에 접어들었다.
"..... 아."
다행이다. 아니, 과연 다행인가. 만약 진이 그 소문을 듣지 못했다면 그리고 궁극적으로 제가 진에게 그 소문을 전달받지 못했다면.
"제로."
"엘리시스 님, 오랜만입니다."
제로.
"만약 내가 이곳에 오지 않았다면, 내가 올 때까지 계속 여기서 기다릴 셈이었어?"
"오늘 만나지 못했다면 편지라도 쓰고 다시 떠나려 했습니다."
"차라리 아지트에라도 들어와 있지 그랬어."
아니, 아니. 내가 하려던 말은 이런 말들이 아니었다. 늘 그랬다. 걱정이 앞서면 생각이 머릿속을 거치지 않고 잔소리로 변질되어 정제되지 않은 채 튀어 나갔다.
".... 혹, 제가 엘리시스 님께 실례를 범했습니까."
그런 게 아니잖아, 엘리시스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말을 골랐다.
"내 생일 때문에 누군가 기약 없이 기다리는 일은 없었으면 하는 것뿐이야."
말을 고른 것 치고는 또 이성적이지 못한 말이 입력되고 말았다. 사실, 제가 한 말은 경험담이었다. 누군가에게 태어났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축하를 받는 날이 있다는 사실을 아서로부터 알게 된 날부로 엘리시스는 아버지의 생일날짜를 찾느라 곤혹을 좀 겪었었다.
어찌어찌 아버지의 생일날을 찾은 이후 어린 날의 엘리시스는 그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냥, 너무도 순수하게 아버지의 생일을 축하해보고 싶어서. 그 아버지에게 고작 생일 축하를 받았다는 이유 하나로 혼꾸멍이 났음에도, 그저 순수하디 순수한 어린 마음에서 비롯된 행동이었을 것이다.
아버지의 생일날, 아서의 도움을 받아 케이크와 선물을 준비해두고서 아버지가 집에 돌아오기만을 기다렸으나 결국 아버지는 그날 집에 돌아오지 않으셨다. 참 희한하게도 그때 엘리시스가 느꼈던 감정이란 조급함과 두려움이었다. 아버지의 생일날이 5시간 정도 지난 후 엘리시스는 또 아버지에게 훈련에 임하지 않았다며 꾸지람을 듣게 될까 급히 케이크를 치우고 선물도 자신의 방에 숨긴 후 곧장 훈련장으로 향했다.
지금 그 기억을 다시 떠올려보면 슬퍼야 할 게 정상인데도, 제 생일도 챙기지 않고 자신의 역할에 충실이 임하는 그 모습이 아버지다워서일까. 하지만 아버지의 생일이 지나버릴까 자정이 될 때까지 아버지만을 기다렸던 그 억겁과 같은 순간이란 진심으로 괴로웠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제로."
"네? 아니, 그게.."
제로는 느닷없이 자신에게 사과를 전하는 엘리시스에게 답할 말을 최선을 다해 정리했다. 그러나 왜 그녀가 자신에게 사과를 하는 것인지 그 이유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생일은 분명 기뻐야 하는 날일 텐데. 마스터가 자신을 깨우고 처음으로 눈을 뜬 날, 잠들어 있던 나날 은은하게만 들려왔던 목소리의 주인을 그날 처음으로 제 시야에 담았던 그 순간을 제로는 영영 잊지 못한다. 깨어난 이후 스스로에 대한 의구심과 끝없는 방랑길의 목적을 한 걸음 전진할 때마다 방황하며 혼란스러워했었으나 그럼에도 처음이라는 것은 결코 쉽게 잊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마스터에게는 나와 같은 제로가 수없이 많았을 테니 그 제로들이 깨어나도 그저 무심한 손길로 가치만을 따지셨을 테지만, 그래도 그 하나하나가 깨어나기를 오랫동안 기다리셨지 않았을까.
아, 제로는 무언가를 깨달았다. 설마 제가 당신을 기다리느라 힘들었을 거라 여기셨나요. 자신 있게 답할 자신이 있다. 절대 아니다, 결코 그렇지 않다.
"엘리시스 님, 생일을 축하드립니다."
품에 고이 품고 있던 장미 다발을 겸허한 마음으로, 정중히 그녀에게 선사했다.
"며칠간 선물에 관한 고민을 참 많이 했습니다. 비교.. 를 하고 싶진 않았지만 다른 분들의 선물에 비해 제가 생각하는 선물들은 빈약해 보이기만 해서 계속 헤매기만 하다 결국 결정하지 못하고 그란의 조언을 듣게 되었습니다."
"늘 하는 이야기지만 굳이 선물까지 준비하지 않아도 괜찮아."
"엘리시스 님께서는 다른 분들이 엘리시스 님의 선물을 결정하며 시간을 허비하는 일이 안타까우신가요."
"글쎄..."
나도 그런 건 잘 모르겠는데..
"선물을 고를 시간에 더 의미 있는 일을 했으면 하는 그런 마음이신가요."
"음..."
"엘리시스 님은 다른 분들의 생일 선물을 고를 때 어떤 기분으로 고민하시나요."
"무엇을 주면 기뻐해할까 라든지."
"선물을 고르는 시간이 쓸모없다고 여겨지시던가요."
"설마."
"다른 분들도 다 같은 마음이지 않을까요."
"아마 그렇겠지."
"그런데도 정작 엘리시스 님의 생일은 크게 와닿지 않는 모양이군요."
"그런 건가..?"
제로가 선물한 꽃다발을 소중히 끌어안았다. 꽃향기 중에서도 유독 마음에 들었던 장미향이 한가득 풍겨왔다.
"장미, 고마워 제로."
"기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그래."
저의 인사에 화답하기 위해 최대한 크게 미소를 그리려는 테가 근근해 괜스레 마음이 쓰이건만, 제로는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따라 미소를 지었다.
"제로, 오늘 일정 더 없으면 같이 카나반 왕국으로 가는 건 어때?"
"제가 따라가도 괜찮을까요?"
"당연하지. 지금 바로 출발하자."
네, 눈앞에서 하늘거리는 붉은 머리카락을 흔쾌히 뒤따랐다. 엘리시스와 함께 숲길을 따르며 제로는 자신의 첫탄생을 상기해 보았다. 보이는 모든 것이 낯설었으나 아직 감정이라는 것이 정상적으로 기능하지 않았던 그땐 마냥 마스터가 자신을 손보고 명령을 내리는 것을 기다리기만 했었다.
저가 답답해 보였을까 아님 저가 그런 것들을 느끼길 원했던 걸까, 그란은 저에게 감정과 마음이라는 것을 끈질기게 설교했었다. 그것들을 이해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것들에 대한 의문을 느끼며 시간이 흘렀고 결국 그란의 바람대로 감정이라는 것이 점차 발현되었으나 정작 마스터의 입에서는 실패작이라는 단어가 마치 우레처럼 내리쳤다. 본래 슬픔을 느끼다 라는 개념이 허락지 않았던 기체는 어느 순간부터 마스터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로 인해 균열을 일으켰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저와 그란은 마스터와 헤어지게 되었고, 저의 목표를 아니 그란과 마스터의 목표를 이루기 위한 여행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럼과 동시에 자신의 존재 의의를 증명하기 위해 방랑하고 또한 갈망했으나 몇 번이고 절망하며 한때는 그저 모든 사고를 그란에게 맡긴 적도 있었다.
이 세상에 탄생한 이후 한 번도 무언가 만족스러웠던 적은 없었다. 그런 것을 느낄 겨를도 없었다. 하지만 자신을 이 세상에 탄생시킨 누군가를 단 한 번도 원망한 적은 없었다. 단 하나뿐인 동반자로부터 시도 때도 없이 잔소리를 들으며 현재는 그저 저의 자아가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인 상태다. 이유는 모르겠으나 더 넓은 세상으로 떠나고 싶었고 결국 마스터에게서 벗어나 아무런 목적없는 순수한 여행길에 올랐다.
여행을 하며 여러가지 풍경을 시각에 담았고 처음으로 환희라는 것을 느껴보았다. 역시, 처음이라는 것은 결코 잊기 쉽지 않다. 목표는 없지만 그럼 뭐 어떤가, 저 스스로가 이토록 주동적으로 변해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놀라웠다. 그렇기에 처음으로 눈을 뜬 그 날을 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처음 이 세상에 탄생했을 적엔 결코 상상할 수 없었던 모든 감정을 느끼며 충족되어 간다는 경험. 그래, 그것만으로도 저의 탄생에는 의미가 있다. 그러니, 절대 마스터에게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마스터의 곁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것들이 연구실 밖에 존재하고 있으니까.
"엘리시스 님이 처음으로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된 날을 기뻐하셨으면 좋겠습니다."
"......?"
갑자기?
"제로 너는 참 그런 말을 서슴없이 하는구나."
"그런가요."
엘리시스 님은 이미 너무도 막중한 일들을 하고 계셔서, 그 일과 동료들이 우선이 되고 목표가 되어 한때의 저처럼 스스로의 존재를 확신하지 못해 방랑하는 중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막연하게 지나치게 되는 걸까요. 하지만 언젠가는 그런 날이, 이 세상에 태어나신 날을 순수히 기뻐하는 날이 하루 빨리 오길 기원합니다. 진심으로, 그날이 어서 오기를. 그래서 기쁘게 웃을 수 있는 날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엘리시스 님.
─
"어머나, 엘리시스 님!"
특유의 새된 목소리가 광장의 중심에서부터 울렸다. 간만에 머리카락을 자연스럽게 풀어 헤친 에이미가 만면에 웃음꽃을 활짝 피우며 달음박질해왔다.
"카나반 왕국엔 어쩐 일이야, 에이미?"
"공연 제의가 들어와서 잠시 들렀답니다!"
아직 확실하게 결정되진 않았지만요, 가느다란 손가락이 선글라스를 들썩였다.
"지금은 잠시 휴식 중이었어요!"
"그랬구나."
어머, 그리고 보니.
"엘리시스 님, 오늘 생일이셨군요!"
세상에, 내 정신 좀 봐.
"이럴 게 아니라 공연 준비를 해야겠어요!"
".....? 아직 결정 안 됐다며."
"그거야 제 마음이지요, 후후."
".....?"
서둘러야겠네요!
"엘리시스 님을 특별 게스트로 초대하겠어요!"
"뭐?"
"안타깝게도 생일날이 지나가 버리겠지만 분명 엘리시스 님께 잊지 못할 추억이 될 수 있겠죠?"
"잠깐ㅁ..."
"기대하고 계셔요, 엘리시스 님! 그럼 에이미는 이만!"
"......."
진심은 아니겠지, 저 멀리 이미 하나의 점이 되어버린 에이미의 뒷모습을 좇는 엘리시스의 눈빛 속에는 황당함만이 가득했다. 넋이 나간 듯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하는 엘리시스에게 장미 한 다발이 천천히 다가왔다.
"엘리시스 님."
"아, 로난."
다행히 늦지 않았네요, 로난은 멀끔한 미소를 그리며 꽃다발을 건넸다.
"고마워."
엘리시스는 그 꽃다발을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던 중 문득 솟아난 의문점의 답을 듣기 위해 입을 열었다.
"로난은 무슨 일로 여기에 있었어?"
"그냥... 볼일이 좀 있었습니다."
그녀가 카나반 왕국으로 온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곧장 꽃다발부터 준비한 보람이 있다. 하필 그 소식을 전해 들은 때가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한 시간 전이었던 탓에 하마터면 때를 놓쳐 전해주지 못할 뻔했지만 말이다. 카나반 왕국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일정을 따랐을 엘리시스에게 축하 인사와 선물을 전해줄 짬 따위는 주어지지 않았을 터였다. 세르딘에서 카나반으로 통하는 길이 하나라서 대기하는 데에 무리가 없었으니 망정이었지 진정 조금만 더 늦었더라면 이렇게 담소를 나눌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미 장미꽃을 받으셨군요."
역시, 다른 종류의 꽃을 준비할 걸 그랬다. 사실 누군가 장미꽃을 선물하리라 예상은 가졌었다. 그에 로난은 생일이라는 기념일에 걸맞게 탄생화를 준비하려 엘리시스의 생일날짜에 맞는 탄생화를 찾았으나.
"곧바로 이동하시겠군요."
"아무래도."
우선 엘리시스의 생일인 8월 5일의 탄생화는 엘리카라는 이름을 가진 꽃이었다. 눈길을 사로잡는 다채로운 빛깔과 앙증맞은 꽃봉오리를 가진 사랑스러운 꽃, 조금 늦더라도 오늘 안에 배달이 가능하여 망설임 없이 그 꽃을 주문하기로 결정했지만 우연이었는지 필연이었는지 로난의 눈에 들어온 것은 엘리카의 꽃말이었다.
엘리카의 꽃말은 바로 고독, 축하받아야 할 생일날에 하필이면 고독이라는 의미를 가진 꽃이라니. 좌절하고 있을 시간도 부족했던 로난이 선물로 정할 꽃을 직접 찾아다닌 것은 아무래도 불가피한 일이었다. 결론적으로 로난이 택한 꽃은 엘리시스가 좋아하는 장미였다.
"생일 축하드립니다, 엘리시스 님."
"고마워."
기뻐하셔서 참 다행이다, 남모르게 애태웠던 마음이 점점 편안해지는 것을 느끼며 나지막이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
"오늘은 드디어 엘리시스 단장님께서 돌아오시는 날입니다!"
"드디어!!"
"오늘이구나!!!"
왁자지껄 제각각 다른 주제로 떠들어 대던 것들이 갑자기 환호성을 질러대며 공기를 더욱 소란스럽게 달구었다.
'.... 시끄러운 놈들.'
그래도 그 기분이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니 넘어가 주마, 엘리시스와 오랜 시간을 함께해왔던 잔뼈 굵은 놈들이니까. 그래도 눈물까지 보이는 건 좀 오버하는 거 아닌가, 손등과 팔로 눈물을 훔쳐내는 부하들을 흘기며 제라드가 혀를 찼다.
새삼 저런 풍경이 감회가 새로웠다. 오래전, 붉은 기사단의 단장이셨던 엘스커드 님의 딸이라는 수식어를 단 채 기사단에 들어온 엘리시스. 검술만큼은 그 누구도 함부로 헐뜯을 자가 없었으나 여자라는 이유로 숱한 고초를 겪었어야 했지.
하지만 그 당시 그녀를 갈구는데에 가장 일조한 저를 첫번째로 변화시키고 점차 그 주변도 변화시켜 전장에서는 신임을 그리고 기사단 내에서는 선망과 존경을 얻은 그녀는 라이벌이었던 저와 경합을 치르고 결국 승리를 쟁취하여 차기 단장으로 추대받게 된다.
그리고 제 앞에서 단장님이 돌아오신다며 호들갑이나 떨고 자빠진 저 시끄러운 놈들은 그 옛날에 그녀를 엄-청 시기했던 놈들이렸다. 엘리시스 그 녀석도 정말이지 대단하다.
"단장님께서 내 선물을 기쁘게 받아주실까?"
"근데 단장님은 예쁜 거 별로 안 좋아하시지 않았냐?"
"그래서 난 단장님이 좋아하실 만한 걸로 준비해놨지!"
"단장님은 아마 먹는 걸 더 좋아하실 거야."
선물이라고 하니 제라드는 얼마 전 크나큰 곤경에 빠졌던 날을 떠올렸다. 다름이 아니라 엘리시스의 생일 때문이었다.
붉은 기사단에서 단장의 생일을 제대로 기념하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이유는 엘스커드와 엘리시스 이 두 단장 다 본인의 생일에 무심해서였다.
전단장이었던 엘스커드가 자신의 생일날 깜짝 축하 파티를 열었던 부하들에게 기강이 해이해졌다고 불호령을 떨구며 평소의 훈련 강도의 배를 굴렸다는 일화는 꽤 유명하다. 그 이후 엘스커드 단장의 생일을 챙기는 간 부운 놈은 없었더랬다.
현단장인 엘리시스는 좀 다른 이유에서였다. 이상하게도 엘리시스의 생일날은 여러가지의 원인으로 인해 늘 비껴갔던 것이다. 전장에서 생사를 다투었던가, 엘리시스가 다른 일정을 따르느라 겨를이 없었던가, 엘리시스가 그랜드체이스의 일로 세르딘에 머무는 탓이었던가 여튼 이 외에도 등등.
엘리시스가 카나반에 돌아오는 날도 어째 매번 생일날 한참 전이거나 지난 이후였다. 그러다 이번에는 딱! 엘리시스의 생일날에 주인공이 돌아온다는 소식이 전해진 것이다. 드디어 엘리시스 단장님의 생일을 기념할 날이 왔다, 심지어 처음이다, 라고 제일 먼저 떠벌리던 놈이 눈 깜짝할 새에 생일 축하 파티를 열 계획을 강구해오며 다른 단원들도 차차 참여하게 된 건데..
"부단장님도 선물 준비하실 거라 믿습니다!"
젠장, 욕설이 자연스레 튀어 나갔었다. 엘리시스에게 줄 선물이라니, 하루에 몇 번이나 한숨을 내쉬었는지 모른다. 부하들은 이미 선물을 준비해놨다고 자랑질이나 해대고 하루가 지날수록 초조해져 가고 밤낮을 고민하고 매일 가게를 돌아봤음에도 선물을 고르지 못해 절망에 빠졌었지.
말 그대로 진정 곤경에 처해 한창 좌절 따위에나 빠져 있을 즈음 제라드는 참으로 의외의 곳에서 고민을 해결할 수 있었다. 바로 어제도 엘리시스의 선물을 고르기 위해 무거운 발걸음으로 하염없이 이곳저곳을 들쑤시던 중 누군가 자신을 불러 세웠다.
"제라드!"
목소리의 주인은 엘리시스의 오랜 친구인 아서였다.
"여긴 웬일이야?"
아서는 천진한 목소리로 제라드를 추궁하기 시작했다. 별일 아니라는 제라드의 대답에 아서는.
"엘리의 생일 선물 고르러 왔구나?"
대체 어떻게 알았지, 속마음을 들켜 표정 관리를 채 하지 못하는 제라드에게 아서는 우연히 엘리시스의 생일 파티 준비로 분주한 단원들을 목격했다며 키득거렸다.
"나도 껴도 돼?"
제라드의 대답도 듣지 않고 아서는 얼렁뚱땅 엘리시스의 생일 파티 준비 대열에 합류하기로 결정하고는 끼워주었다는 답례로 제라드가 엘리시스의 선물을 고르는 것을 도와주기로 했다.
어제 준비한 선물이 지금 제라드의 오른쪽 무릎 위에 고이 놓여져있다. 그리고 보니 이거 얼굴 보면서 직접 줘야 하는 거 아니었던가, 겨우 고민 하나 해결했더니 또 다른 문제가 밀려들어 온다. 장담하건대 절대 쑥스러워서가 아니다. 음, 그렇다면 그런 거야.
그 녀석은 도착을 했나, 바람도 쐴 겸 오른손 안에 선물을 숨긴 채 실을 나섰다.
"어? 제라드!"
저 놈 목소리를 듣는 것도 이젠 지긋지긋하다. 한숨을 내쉬며 뒤를 돌아본 제라드는 무심코 제 손에 들린 선물 상자를 등 뒤로 숨겼다.
"... 언제 왔냐?"
"이제 막."
근데 어쩌다 둘이 같이 왔냐.
아서한테 검을 맡기는 김에 겸사겸사. 너한테 볼일이 있다고 하길래.
"볼일?"
"일단 들어가서 얘기하자!"
아서는 사인을 보내려는 듯 단원들이 모여있는 실을 향해 고갯짓을 해 보였다. 제라드는 대강 알아듣고는 작게 끄덕였다.
"근데 등 뒤에 숨긴 건 뭐야."
"........"
못 본 줄 알았더니, 다른 놈들이 전해줄 때 같이 주려고 했는데. 식은땀이 등 뒤로 흐르는 듯했다.
"..... 자."
"....?"
제라드는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며 무심한 척 선물을 보여주었다. 귓등까지 벌게지고도 퉁명스러운 표정을 유지하려는 제라드의 심리를 꿰뚫어 본 아서가 조용히 웃음을 삼켰다.
이윽고 엘리시스가 선물을 받아들이니 제라드는 서둘러 그 장소를 벗어나 버렸다. 왜 저러냐 쟤, 엘리시스의 중얼거림을 들은 아서는 기어이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쑥스러워서 그러는 거야."
뭐가? 설마 선물 주는 거? 하긴, 그 마음 이해 가지.
"어쨌든 이제 들어가자, 엘리!"
"제라드한테 볼일 있는 거 아니었어?"
"이미 해결됐어!"
"그래....?"
자 빨리, 아서가 엘리시스의 손을 잡고 이끌며 맑게 웃어 보였다.
─
"먼저 와있겠다 이 말 하나 하는 게 그렇게 힘드십니까."
엘리시스의 얼굴에 돋아난 혈관을 손가락으로 꾹- 짓누르며 지크하트가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나야 당연히 텔레파시가 통할 줄 알았지~"
능글맞게 대꾸하는 저 천연덕스러운 얼굴에 주먹이라도 한 방 먹여주고 싶은 마음을 가까스로 접으며 제 성질머리부터 식히기 위해 심호흡을 시도했다.
"그 텔레파시라는 걸 보낸 적은 있고요?"
"아무렴."
아르메야 그 밤톨만한 머리통에 한 대만 쥐어박으면 궁시렁대긴 해도 알아서 입을 다무는데 대체 이 하이랜더란. 아니, 애초에 고이 맞아주길 기대할 만한 위인도 아니다.
매번 저 혼자 불타고 저 혼자 삭히는 게 일상인데 뭐, 진정하자 진정.
"늦겠습니다. 어서 출발하시죠."
"귀찮구만."
대꾸질을 하긴 해도 따라 움직여주는 제 선조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 돌연히, 마치 무언가에 홀린 듯 어딘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오늘 받은 선물들을 보관해둔 제 방 쪽이었다. 급히 채비하느라 아직 어느 하나도 열어보지 못했다.
"......."
아무리 생각하고 고뇌해봐도 사람들이 왜 굳이 생일날을 챙기는지 그 이유에 대한 답을 내놓을 수 없었다. 역시, 굳이 생일을 챙기지 않아도 평소처럼 일을 하고 임무를 다녀오고. 그래, 그저. 그렇게 흘러가는 하루.
생일을 기념하는 문화는 대체 언제부터 이어진 걸까, 나중에 세르딘으로 돌아가면 그에 관련된 서적이라도 찾아봐야 하나.
선물을 받는 건 진심으로 감사하다. 그러나 또한 와닿는 것이 없다. 그냥 끝없이 애매하고 왜인지 겉도는 기분이 감도는 것이다.
"......."
생일날만 되면 이런 기분과 생각에 휩싸이게 된다. 선물 받고 축하 받으면 오롯이 감사나 하면 되지 왜 저는 세상만사 복잡한 게 이토록 많은 건가. 직업병이려나, 버릇이라면 버릇이었던가. 찌푸려진 미간을 곧게 피며, 문득 지크하트를 올려다보았다.
"저 오늘 생일인데 뭐 하실 말씀 없습니까."
".... 뭐?"
제가 내뱉고도 황당한 말인데 정작 이 말을 듣게 된 선조는 오죽할까, 답지 않게 얼굴을 당황스러움으로 물들인 지크하트가 헛웃음인지 뭔지를 터트렸다.
"별걸 다 요구하네."
저도 압니다, 이내 시선을 정면으로 돌렸다. 사실 축하 인사나 들으려고 했던 말은 아니었다. 선조 또한 저처럼 생일을 중하게 여기지 않는 주변인 중 하나였기에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 궁금했을 뿐이다. 근데 기대 이상의 반응에 되려 저가 당황스럽다. 무시하고 말 줄 알았더니, 꼬투리 잡히지 않게 조용히 입을..
"생일 축하해, 꼬마 아가씨."
저도 모르는 새 눈을 치켜떴다. 지크하트는 본인이 대답하고 계면쩍은 듯 눈길을 돌리며 괜히 목덜미만 쓸어넘겼다.
..... 남사스러운 말이긴 하지.
초가 꽂힌 케이크와 그 뒤에서 온 세상을 다 가진 듯 마음껏 기뻐하며 웃던 이들의 얼굴이 눈앞에 새록새록 떠오른다.
나 또한, 정말 많은 이들에게, 정말 소중한 이들에게 분에 넘치는 축하를 받아서.
"고마워요."
엘리시스생일 축하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