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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사영묘 → 삼성산성지 → 절두산성지 → 새남터순교성지
55.6Km 16.5Km 6.5Km
37. 삼성산성지
삼성산은 1839년 기해박해 때 새남터에서 군문효수(軍門梟首)의 형을 받고 순교한
앵베르 주교와 모방 · 샤스탕 신부가 1843년부터 1901년 11월 2일
명동 성당 지하 묘소로 모셔질 때까지 묻혀 있던 묏자리이다.
본래부터 삼성산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었던 이곳은 세 분의 순교성인이 묻힘으로써
명실 공히 삼성산(三聖山)의 품위를 갖추게 되었다.
이것은 결코 우연이 아닌 듯하다.
한국 천주교회사상 처음으로 이 땅에 발을 디딘 외국인 성직자인
중국인 주문모 신부가 1801년 신유박해로 순교한 후 30년만인
1831년 조선의 천주교회는 중국 북경 교구에서 독립해 '조선 교구'로 설정된다.
이어서 1836년과 1837년 사이에 프랑스 선교사인 모방, 샤스탕 신부와
앵베르 주교가 입국함으로써 조선의 교우들은 주문모 신부 이후
한 세대가 훨씬 지나서야 목자에 대한 갈증을 풀게 된다.
이들 세 성직자는 상복(喪服)으로 얼굴을 가리고 각 지방에 흩어져 있는 교우들을 찾아
밤낮으로 험한 산길을 걸으며 복음 전파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그 결과 불과 1년 사이에 신자수가 9천 명으로 늘어났다.
그러던 중 외국 선교사의 입국 사실이 알려짐에 따라 교우들에 대한 탄압이 가열되고
가엾은 어린양들의 희생이 늘어나자 목자들은 가슴 깊이 피눈물을 흘린다.
앵베르 주교는 수원의 한 교우집에 피신하던 중 모방, 샤스탕 두 신부를 불러
중국으로 피신할 것을 권하였으나 사정이 여의치 않아 단념하고
몸조심을 당부한 다음 각자 소임지로 돌려보냈다.
바로 이즈음 한 배교자의 책략으로 인해 거처가 알려져 포졸들이 들이닥친다.
그는 화(禍)가 여러 교우들에게 미칠 것을 염려해 스스로 잡힌 몸이 되고
두 신부에게도 자헌치명(自獻致命),
곧 스스로 관헌에 나아가 신앙을 고백한 후 순교하기를 권했다.
기해박해(1839년)가 시작되고 세 명의 외국인 사제는 38년 전,
주문모 신부가 그랬던 것처럼 새남터에서 희광이의 칼끝에 이슬이 되고 만다.
이 때 앵베르 주교의 나이 43세,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는 35세로 동갑이었다.
이들의 시체는 사흘 동안 버려져 있다가 한강변 모래톱에 묻힌다.
교우들이 유해를 거두고자 애쓴 지 나흘째 되는 날
세 명의 교우가 시체를 훔쳐내려다 그중 한 명이 붙잡혀 옥에 갇히고 만다.
그 후 스무 날 가량 지난 뒤 7-8명의 교우가
죽음을 무릅쓰고 감시의 눈을 피해 유해를 거두는 데 성공한다.
교우들은 유해를 큰 궤에 넣어 노고산(老姑山)에 임시로 매장했다.
그리고 4년 후, 당시 파수를 피해 유해를 훔쳐 낸 교우 중 하나인 박 바오로가
가문의 선산인 관악산 줄기 삼성산에 유해를 이장한다.
박 바오로는 이 사실을 아들인 박순집에게 알려 주고 그 자신도 일가들과 함께
병인박해의 와중에서 순교하게 되니 1868년 3월 절두산에서의 일이다.
이 때 가까스로 화를 면한 박순집은 신앙의 자유를 얻은 후 이 묘소를 고증해
명동 성당 지하묘소로 옮길 수 있도록 하는 산 증인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순교한 가족들의 시신을 찾고 베르뇌 주교를 비롯해
브르트니에르, 볼리외, 도리 신부 등의 시신을 새남터에서 찾아내
용산 왜고개에 이장하는 데 주요한 역할을 하기도 했다.
1866년 병인박해 때부터 4년간 박순집의 가문은 16명의 순교자를 배출했고,
자신은 1911년 6월 27일 82세를 일기로 선종하기까지
인천 교회의 창설에 여생을 바쳤다.
16세 때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원에 들어가 우리나라 최초의 수녀가 된
박 사베리오(1872-1966년)는 박순집의 막내딸이기도 하다.
한편 박순집 일가를 기념하기 위한 비가 절두산 순교 기념관 정원에 세워져 있어
순례자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삼성산에 1843년부터 1901년까지 58년간 묻혀 있던 세 성직자는
1925년 7월 25일 시복되었다.
1970년 5월 김수환 추기경과 고(故) 노기남 대주교, 오기선 신부는
이곳에 세 분의 매장지임을 확인하고 이를 기념하는 소형 비석을 그 자리에 세웠다.
또 1981년 9월에는 신림동 본당 교우들에 의해
구상 시인의 헌시와 비문이 새겨진 현재의 비석이 세워졌다.
1984년에는 한국 천주교 2백주년을 기해 세 성직자가 시성의 영광에 오른다.
이를 기념해 사적지 부근의 땅 1만 6천여 평을 매입,
1989년에 그 유해를 다시 천묘해 축성식을 가졌다.
그리고 1992년에는 신림동(현 서원동) 본당에서 분리,
삼성산 본당이 신설됐다.
삼성산 본당은 성지 녹화사업을 추진하고 매주일 성지에서
순례객들을 위한 미사를 봉헌하고 있다.
2001년 11월 성지에 설치된 성모상이 훼손되는 사건이 발생해
다음해 3월에 새로운 성모상을 봉헌했고, 2001년 12월에는 성지 입구에 건립된
삼성산 성령수녀회 본원과 청소년 수련관 및 피정의 집 축복식을 가졌다.
2012년 10월 12일에는 삼성산 본당 설립 20주년 기념행사의 일환으로
성지에 표지석을 설치하고 축복식을 거행했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최종수정 2013년 3월 24일)]
■ 순교자
◆ 성 범 라우렌시오 앵베르(Imbert) 주교(1796∼1839)
한국 이름은 범세형(范世亨), 조선교구 제2대 교구장이며
주교로는 처음 한국 땅을 밟았다.
조선교구 초대 교구장인 소 브뤼기에르 주교가 입국도 못한 채 병사하자
제2대 조선교구장으로 임명되어 1837년 5월 주교 품을 받았으며
같은 해 말 조선 입국에 성공하였다.
그의 입국으로 조선 교구는 그보다 앞서 입국한
나 모방, 정 샤스탕 두 신부와 더불어
교구 설정 6년, 교회 설립 53년 만에 비로소 선교 체제를 갖추었으며,
1839년 초 신자 수는 9천 명을 넘게 되었다.
그는 또한 한국인 성직자 양성에도 뜻을 두어
정하상 등 네 명의 열심한 신자들을 뽑아 사제로 키우고자 하였으나
때마침 불어닥친 박해로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났을 때 자신의 거처가 알려지게 되자
교우들에게 화가 미칠 것을 염려하여 스스로 포졸들에게 잡히는 몸이 되었다.
나, 정 두 신부에게도 인편으로 자수할 것을 권유하여
다같이 1839년 9월 21일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받았다.
이 때 그의 나이는 43세였으며 조선에 입국한 지 불과 2년 만이었다.
◆ 성 나 베드로 모방(Maubant) 신부(1804∼1839)
한국 이름은 나 백다록(羅伯多祿),
서양인으로는 최초로 조선에 입국하여 순교한 신부로
1836년 1월 입국하여 서울 정하상의 집에 머물며
제2대 교구장인 범 주교를 도와 경기 충청 등 지방까지 선교하였다.
그는 한국인 성직자 양성에 마음을 두고
1836년 2월에 최양업을, 3월에는 최방제를,
7월에는 김대건을 서울로 불러 직접 라틴어를 가르치고
성직자가 되는 데 필요한 덕행을 쌓게 하다가, 때마침 귀국하는 중국인
유방제 신부와 함께 이들을 비밀리에 마카오로 유학 보냈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고
성직자가 3명이나 입국한 사실이 당국에 알려지게 되자
범 주교에 이어 자수하였다.
1839년 9월, 홍주에서 정(샤스탕) 신부와 함께 서울로 압송되어
모진 형벌을 받은 끝에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으로 순교하였다.
그의 나이는 35세, 한국에 입국한 지 3년 9개월 만이었다.
◆ 성 정 야고보 샤스탕(Chastan) 신부(1804∼1839)
한국 이름은 정 아각백(鄭牙各伯),
두 번째로 조선에 입국한 서양인 선교사이다.
1827년 1월 파리외방전교회 사제가 된 정 샤스탕 신부는
1836년 12월 조선 입국에 성공하여 곧 한국말을 배우는 한편
나 신부와 함께 각 지방에 퍼져 있는 교우들을 찾아 성사를 거행하였다.
당시의 서양인 성직자들은 상제 옷으로 변장하고 험한 산길을 헤매야 했고,
소금에 절인 야채 따위로 주린 배를 채워야 했으며,
밤새도록 고해성사를 주고 미사를 드린 다음 날 새벽에는
또 다른 마을로 길을 재촉해야만 했다.
그들은 이러한 고난을 감수해 가며 오직 복음 전파에만 힘썼던 것이다.
1839년에 일어난 기해박해는 이 땅을 수많은 천주교인들의 피로 물들였고
정 신부도 범 주교, 나 신부와 함께
그 해 9월 새남터에서 순교의 월계관을 쓰게 되었다.
그의 나이는 35세, 이 땅에 들어온 지 2년 9개월 만이었다.
○ 성 범 라우렌시오 앵베르, 성 나 베드로 모방,
성 정 야고보 샤스탕과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시여,
●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 성 범 라우렌시오 앵베르와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시여,
● 우리 나라의 모든 주교들을 위하여 빌어 주소서.
○ 성 나 베드로 모방과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시여,
● 우리 나라의 모든 외국인 성직자들을 위하여 빌어 주소서.
○ 성 정 야고보 샤스탕과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시여,,
● 우리 나라의 모든 성직자들의 정결과 순명정신을 위하여 빌어 주소서.
38. 절두산순교성지(切頭山殉敎聖地)
한국 천주교회의 순교 사적지.
절두산은 서울시 마포구 합정동 한강변에 우뚝 솟은 암벽 봉우리로
1866년 병인박해(丙寅迫害) 이후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이곳에서 순교하였다.
순교자 기념탑은 절두산에서 순교한 것으로 확인되는
이의송 가족을 비롯한 28위의 순교자와 수많은 무명 순교자들을 기리기 위해
2000년 9월 20일 세워졌으며, 순교기념비 주탑에는
형틀을 상징하는 조형물 아래 16명의 순교자들 모습이 새겨져 있다.
이 바위는 처음에는 복자바위라 불렸다.
병인박해(1866)때 순교한 다블뤼 안주교, 오매트리 오신부, 위앵 민신부,
황석두 루가, 장주기 요셉의 사연이 깃든 바위로
다섯 분의 성인을 기리는 뜻으로 오성바위라고 이름을 붙여주었다.
병인박해 때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 될 때와 충남 보령 갈매못 형장으로 끌려갈 때
쉬었다 간 바위로 이 다섯 성인들이 여기서 쉬는 동안 포졸들이 포승을 풀어 주어서
안주교는 교우들을 만나 격려하고 함께 기도한 후 막걸리로 목을 축였다고 한다.
그 앞의 돌은 김대건 신부와 함께 입국한 다블뤼 안주교가
21년간 숨어 살던 방을 드나들 때마다 밟고 다니던 문지방돌이다.
우뚝 솟은 벼랑 위에 3층으로 세워진 기념관은
우리 전통 문화와 순교자들의 고난을 대변해 준다.
접시 모양의 지붕은 옛날 선비들이 전통적으로 의관을 갖출 때 머리에 쓰는 갓을,
구멍을 갖고 지붕 위에 서있는 수직의 벽은 순교자들의 목에 채워졌던 목칼을,
그리고 지붕 위에서 내려뜨려진 사슬은 족쇄를 상징한다.
[절두산의 유래]
절두산은 조선 시대 교통의 요지이자 병선의 훈련장이며
처형·제사·진휼을 하던 곳이던 양화진의 동쪽에 있는 봉우리로
원래 가을두(加乙頭), 혹은 잠두봉(蠶頭峰)이라 하였다.
중국 사신들이 칭송할 만큼 주변 경관이 뛰어난 이곳이 수많은 천주교인들이
참수형으로 목잘려 죽은 곳이라는 의미의 ‘절두산’으로 불리게 된 것은
1866년 병인박해 때 이곳에서 많은 신자들을 처형한 것과 관련이 있다.
흥선 대원군(興宣大院君)은 천주교에 대한 박해령을 내렸는데 이때 살아남은 프랑스 선교사
리델(Ridel, 李福明) 신부가 조선을 탈출하여 청나라로 건너가 조선 교회의 상황을 알린 후
로즈(P. Roze, 魯勢) 제독의 함대가 1866년 9월과 10월 두 차례에 걸쳐 조선을 침입하였다.
조선 정부는 프랑스 함대와의 교전 후 1866년 10월 23일(음 9월 15일)부터 천주교 신자들을
새남터나 서소문 밖이 아닌 절두산에서 주로 처형하였는데 그 이유는
9월에 프랑스 함대가 침략하여 양화진까지 거슬러 올라온 것이나 10월에 다시 강화도를 침략한 것은
박해를 피해 중국으로 망명한 천주교 신자들이 도움을 주었기 때문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대원군을 비롯한 당국자들은 천주교 신자들을 체포하여 심문하면서
그들의 도움으로 프랑스 함대가 침략해 올 수 있었음을 분명하게 확인하였다.
따라서 프랑스 함대가 정박했던 양화진에서 천주교 신자들을 처형함으로써
천주교 신자들의 책임을 확실히 묻고 본보기를 보임으로써
백성들이 프랑스 함대와 내통하는 것을 막고자 하였다.
이렇듯 천주교 신자들의 처형지를 절두산으로 옮긴 이유가
프랑스 함대의 침략에 대한 책임을 천주교 신자들에게 묻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절두산에서는 프랑스 함대를 불러들인 혐의가 있는 신자들만을 골라서 처형하였다.
그 결과 병인박해 당시 김한여(베드로), 최경원(야고보), 이의송(李義松, 프란치스코),
김이쁜(마리아), 이붕익(李鵬翼, 배드로), 김중은(金重殷, 베드로), 박영래(朴永來),
김진구(金鎭九, 안드레아), 최수(崔燧, 베드로), 김큰아기(金大阿只, 마리아), 강명흠(姜命欽, 베드로),
이기주(李基柱, 바오로), 황기원(黃基元, 안드레아), 이용래(李龍來, 아우구스티노),
원후정(元厚正, 사도 요한), 박내호(朴來浩, 사도 요한), 유 바오로, 강 요한, 조 타대오와
이름조차 알 수 없는 순교자 5명을 합하여 29명이 처형되었다.
절두산 처형자들 중에서 단지 이름만 알려진 최경원과 박영래를 제외한
나머지 22명은 이름과 행적을 알 수 있다.
이 22명 가운데 최수, 김인길, 김진, 원후정, 성연순은 심문 과정에서 배교하였지만
나머지 19명은 끝까지 신앙을 증거하다가 순교하였다.
절두산에서 많은 천주교자들이 순교하였지만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는 달리
절두산에서 신자들을 처형한 일은 병인박해 내내 계속된 것은 아니었다.
1867년 음력 8월 2일 이후의 기록에서는 절두산에서 참수당한 신자들의 예를
더 이상 찾아볼 수 없고, 1868년 음력 윤 4월 7일부터는
다시 서소문 밖에서 천주교 신자들이 처형되었던 것으로 보아서
절두산에서 천주교 신자들을 처형한 기간은 1866년 10월 23일부터
1867년 7월 30일까지 한시적으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실제로 순교 장소 또한 절두산 꼭대기가 아닌 양화 나루터의 평지였던 것 같다.
왜냐하면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이나 《치명일기》 등의 자료에
순교 장소가 ‘절두산 꼭대기’라는 언급이 없고,
대신 신자들의 처형지가 ‘양화진터’, ‘양화진두’ 등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한 대대로 절두산 근처 동리에 살아온 노인들의 증언과
절두산 꼭대기가 사형을 집행하기에는 너무 협소하다는 점 등을 통해서 추론해 볼 때
병인박해 당시 천주교 신자들의 순교 장소는 양화 나루터의 약간 언덕진 평지로
오늘날 절두산과 꾸르실료 건물 사이의 한 지점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을 것 같다.
39. 새남터순교성지
조선교회 첫 미사 봉헌한 주문모 신부 순교터
서소문이 ‘평신도의 성지’라면, 새남터는 ‘성직자의 성지’다.
조선의 공식 처형장이던 두 곳의 성격은 천주교와 관련해서는 판이하다.
103위 성인 가운데 서소문 밖 네거리 형장에선 1839년 기해박해 순교자 41위와
1866년 병인박해 순교자 3위 등 44위가 순교했는데
정하상(바오로, 1795∼1839) 등 모두가 평신도였다.
44위 중에서는 1801년 신유박해 순교자 25위와 1819년 기묘박해 순교자 2위
(조숙ㆍ권천례 동정부부는 공식 순교지가 서울로 기록돼 있지만
서소문 순교자로 추정) 등 27위에 이른다.
반면 새남터 형장에서 순교한 14위 가운데 11위가 앵베르(1797∼1839) 주교와
김대건(안드레아, 1821∼1846) 신부 등 성직자이고, 11위 중 성인이 8위나 된다.
주문모(야고보) 신부
이번에 유일한 외국인이자 선교사제로 새남터에서 피를 흘린
주문모(야고보, 1752∼1801) 신부가 복자로 결정돼
새남터에서 순교한 성직자 가운데 9위가 시복ㆍ시성의 영예를 안게 됐다.
박해 시대에 ‘사남기(沙南基)’ 혹은 ‘노들’이라고 불렸던 새남터는
원래 조선 초부터 군사들의 연무장으로 쓰거나 중죄인들의 처형장으로 쓰던 곳으로,
한양성 밖 남쪽 한강변 모래사장이었다.
죽은 사람의 혼령을 천도시키기 위해 지노귀새남을 하던 터이기도 했다.
지금의 서울 용산구 이촌동, 한강로3가동 일대다.
그러던 곳이 그 많은 사제와 정의배(마르코, 1794∼1866), 현석문(가롤로, 1799∼1846) 회장 등
평신도 지도자 3위의 신앙 증거와 순교로 ‘영광의 땅’이 됐다.
그러나 새남터 형장의 정확한 위치는 밝혀져 있지 않다.
다만 현재 3966.9㎡(1200평) 부지에 세워져 있는 새남터 순교기념성당 옆
고가도로 건너편 용산역 철도기지창이 그 자리였을 것이라고 추정할 뿐이다.
새남터의 순교자 가운데 ‘조선교회의 초석’이 된 주 신부의 삶은 아주 극적이다.
17세기 초부터 천주교가 융성했던 중국 쑤저우 태생인 주문모는
어려서 부모를 잃고 고모 슬하에서 자랐다.
그런 가운데 20세가 돼 혼인했지만 3년 만에 상처하고 과거 준비를 하다가
30대가 돼서야 베이징으로 가서 대신학교를 졸업하고
1791년에서 1794년 사이에 사제품을 받았다.
조선에 파견될 선교사도 원래는 그가 아니었다.
최초로 선발된 조선 선교사는 오요한 신부였다.
그러나 1791년 베이징을 떠나 조선으로 향했던 그가 조선 신자들을 만나지 못해
베이징으로 돌아왔다가 2년 뒤 사망하면서 주 신부가 조선에 파견된 것이다.
1794년 말 입국 이후 주 신부의 사목활동은 눈부시다.
1795년 4월 5일 예수 부활 대축일에 조선교회 사상 첫 미사를 집전한 것을 시작으로
서울과 경기, 충청, 전라 등 전국 각지를 다니며 ‘발로’ 사목했다.
조선교회에 ‘회장제’를 도입해 조선교회를 발전시키기 위한 장기적 사목 방안을 세운 것도 그였고,
1797년께 베이징 비밀결사단체에서 유래한 명도회를 설립해
교리교육과 전교를 가능하게 했던 것도 그였다.
주 신부가 집필한 「사순절과 부활절을 위한 안내서」는 당시 신자들에게 큰 도움이 됐다.
특히 베이징에 황심(토마스, 1756∼1801)을 파견,
보편교회와 조선교회 신자들의 통교를 이어준 것도 주 신부였다.
이처럼 뜻깊은 새남터가 순교성지로 조성된 것은 생각보다 오래지 않다.
1950년에서야 한국천주교회의 순교사적지로 지정됐고,
전쟁 뒤 1956년에 ‘가톨릭 순교성지’라는 순교자현양비가 세워졌다.
이듬해인 1957년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가 사적지를 관리하면서
본격적으로 개발이 이뤄졌다.
1981년 서울대교구에서 새남터본당을 설립했고,
1987년 한국 전통 양식의 현 기념성당이 완공됐다.
순교성지 새남터성당에는 새남터에서 순교한 9위 등
모두 14위의 성인 유해가 모셔져 있다.
2006년에는 순교자 기념관도 세워 성인 유해실과 한국천주교회 설립과 박해사,
박해 형구와 형틀 등 전시물을 갖추고 있으며,
영상실도 설치해 순교자들의 발자취와 순교 신심을 전해 주고 있다.
[박해와 새남터]
새남터가 천주교 신자들의 처형지로 이용되기 시작한 것은
1801년의 신유박해(辛酉迫害) 때부터였다.
즉 중국인 주문모(周文謨, 야고보) 신부가 의금부에서 군문 효수형을 받고 이곳으로 옮겨져
4월 19일(양 5월 31일) 처형당함으로써 이곳의 첫 순교자가 된 것이다.
당시 주문모 신부의 머리는 장대에 매달렸고, 그 시신은 닷새동안 백사장에 버려졌다가
군사들에 의해 몰래 이장됨으로써 찾을 길이 없게 되었다.
이후 새남터는 성직자들을 비롯하여
교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신자들의 처형장이 되었다.
우선 1839년 1839년의 기해박해(己亥迫害) 때는
제2대 조선교구장 앵베르(Imbert, 范世亨) 주교, 모방(Maubant, 羅伯多錄) 신부와
샤스탕(Chastant, 鄭牙各伯) 신부가 8월 14일(양 9월 21일)에
주문모 신부처럼 군문 효수형을 받아 순교하였고,
이어 1846년의 병오박해(丙午迫害) 때에는 한국인 최초의 성직자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 신부가
7월 26일(양 9월 16일), 현석문(玄錫文, 가롤로)이 7월 29일에 역시 군문 효수형으로 순교했다.
그리고 1866년의 병인박해(丙寅迫害) 때에는
제4대 조선교구장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를 비롯하여
브르느니에르(de Breteni res, 白), 볼리외(Beaulieu, 徐沒禮), 도리(Dorie, 金),
프티니콜라(Pentitnicolas, 朴), 푸르티에(Pourthi , 申妖案) 신부 등이 1월 21일(양 3월 7일)에,
정의배(鄭義培, 마르코)와 우세영(禹世英, 알렉시오)이 3월 11일에 군문 효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이 중에서 기해박해 순교자들의 시신은 신자들에 의해 노고산(老故山, 마포구 노고산동)으로 옮겨졌다가
1843년에 삼성산(三聖山, 관악구 신림동 57-1번지)으로 이장되었다.
그리고 김대건 신부의 시신은 와서(瓦署, 용산구 한강로 3가의 왜고개 남쪽)에 일시 안장되었다가
안성 미리내로 이장된 반면에 현석문의 시신은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다.
다음으로 병인박해의 순교자들 중에서 가족들에 의해 시신이 거두어진 정의배를 제외하고,
베르뇌 주교를 비롯하여 7명의 시신은 신자들에 의해 거두어져 와서에 안장되었다.
새남터 대성전은 한국천주교회 창립 200주년 기념해인
1984년에 공사를 시작해서 1987년에 완공되었습니다.
성당의 전체적인 외형은 한복의 도련선을 본 따 치마를 겹쳐이은
겹치마를 두른 형태를 구현하였습니다.
새남터성지는 모래땅 위의 군사훈련장이자 사형집행장이었습니다.
역사를 눈으로 확인하고, 기쁘게 모래알로 승화하였던 순교자들의 신앙을 본받고자
이 자리에 모래터와 조형물을 설치하였다고 합니다.
제단의 103위 성인벽화(방오석 말가리다 화백 작품)는
예수를 조선시대 임금의 모습으로 나타냈습니다.
감실은 사람의 심장 모형을 본떠 제작되었고,
대성당 내부 십자가의 길은 조선시대의 모습으로 형상화하였습니다.
대성전 안에는 새남터 성지에서 순교하신 9위의 유해가 모셔져 있습니다.
제대 왼쪽은 8위 성인의 유해가
오른쪽에는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유해가 모셔져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