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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포르투칼.모로코 문학기행
일시:2010.3.1.월~12.금 11박 12일
여행국가:스페인, 포르투칼, 모로코
2010년 3월 1일 월요일 인천출발, 네덜란드 암스텔담 경유, 포르투칼 리스본
* 인천공항 출발
포르투칼 리스본을 가는데, 네덜란드 암스텔담을 거쳐 간다. KLM 866항공 14:40분 비행기로 간다. 공항에는 우리의 명절인 정월 대보름 민속놀이가 소개되고 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우리의 공항이 자랑스럽다. 지하철 타고 110번 게이트로 이동하여 우리 부부는 24B, 23C 좌석에 탑승했다. 구름층을 뚫고 오른 비행기는 힘차게 날고 있다.
* 시베리아 툰드라 설원
비행기는 시베리아 툰드라 동토 위를 날고 있다. 3월의 시베리아는 눈과 얼음으로 덮혀 있다. 차가운 땅이다. 이곳을 수없이 지났는데, 저런 풍경도 여러번 보았는데 나는 여전히 가슴이 전율한다. 저 언 땅을 독수리의 고뇌로 걸으며 고행하던 졸시 [설원을 걷는 독수리]가 눈앞에 전개되어서다. 와 보지도 않았던 시베리아 동토를 백과사전에 의지하며 시적자아가 여기까지 왔던 그날의 기억이 생생히 살아있다. 유럽을 여행한다는 설레임도 크지만, 봄에 지나는 시베리아 툰드라 설원은 항상 큰 선물을 선사한다.
* 네덜란드 암스텔담 공항에서 환승
네덜란드 암스텔담 공항에는 현지시각 오후 6시, 한국시각으로는 3월 2일 새벽 2시에 도착했다. 스치폴공항에 온 것은 세번째다. C9게이트에서 포르투칼 리스본행 20:30분 비행기로 환승한다. 금새 주변이 어두워졌다. 네덜란드의 여행은 몇년 전에 이미 하였고 서유럽을 여행할 때 이곳을 경유하던 기억이 떠오른다. 언제 와도 아름다운 공항이다.
* 포르투칼 리스본공항 도착
밤 11:20분에 도착했다. 참으로 먼 나라에 왔다. 한국을 떠난지 24시간만에 여기 온 것이다. 고단함도 잊고 새로운 나라에 대한 신비로 행복하다. 한국과의 시차는 9시간이다. 포르투칼이 늦다. 한국시각으로는 3월 2일 오전 8:20분이다. 스페인은 7시간 시차다. 리스본공항은 어둠에 싸여있다. 공항 외벽에 리스보아 공항이라고 있다. 현지어로는 리스본이 리스보아다. 현지 교포 가이드를 만나 버스를 타고 호텔로 이동하며 포르투칼에 대하여 간단한 설명을 들었다.
리스본은 포르투칼의 수도다. 포르투칼은 남한과 면적은 비슷하지만 인구는 1/4로 1천만명이다. 그중 270만명이 리스본에 살고 있다. 바람이 많은 해변국이다. 11월~4월은 우기가. 겨울 온도가 춤춘다. 춥다가도 덥다. 우산은 꼭 챙겨야 한다. 두터운 잠바도 준비하고 다녀야 한다. 리베리아 반도의 나라, 태양의 나라다. 대서양과 접하여 자외선이 강한 나라다. 내일보터 본격적으로 여행하며 많은 것을 배우고 갈 것이다. 어둠 속에서 잘 보이지는 않지만 리스본 시가지를 달려 유명한 축구장을 지나 호텔로 갔다.
2010년 3월 2일 화요일 포르투칼 리스본, 까보다로까, 신트라, 파티마
* 포르투칼 리스본 호텔
해변가에 위치한 프라이야말 호텔이다. 바닷가 마을 호텔이란 뜻이다. 가장 서쪽 반도, 서쪽 나라다. 한국은 최동땅이고, 포르투칼은 최서땅이다. 리스본시는 큰 지진의 역사가 있어 그때 반이 물속에 잠겼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바닷가로 갔다. 바람이 심하게 분다. 나는 지금 대서양 최서단에 서 있다. 울창한 마을길도, 우람한 야자수도 이국의 향수를 자아낸다.
이곳 사람들은 조식은 빵과 커피 정도로 아주 간단히 먹는다. 점심, 저녁은 잘 먹는다. 육식을 하여 추위를 안 탄다. 모든 것이 느리다. TV 리모콘도, 엘리베이터도 서행이다. 유럽의 물은 석회질이 많이 함유되어 있어서 식수는 꼭 사 먹어야 한다. 작은 물 한병에 1유로다. 비싸다. 바다가 보이는 호텔 8층 식당에서 아침식사를 했다. 바다와 해안마을 비경이다. 주택의 지붕이 모두 적색이다. 푸른 나무와 바다와 절창이다. 음식을 먹는 것보다 바다 비경에 더 영혼이 다가간다.
* 포르투칼 리스본 돈까를로스 동상
까보다로까 언덕으로 가는 길에 잠시 내려서 보았다. 리스본 해변에 바다를 응시하며 거대한 모습으로 서 있다. '돈'은 포르투칼 말로 '왕'이란 뜻이고, '까를로스'는 영어로 '찰스'다. 그러니까 까를로스 왕의 동상이다. 1908년에 사살된 왕이다. 작은 나라에서 15세기~17세기에 식민지 지배국이었다. 인구의 1/4이 스위스, 독일로 이민 갔던 나라다. 12세기까지는 스페인과 지내다가 12세기에 포르투칼이 독립했다. 1910년부터 공화국으로 마지막 왕은 필립이다. 1931년 왕은 망명 갔다가 1972년에 귀국했다. 스페인 여인 소피아를 만나 결혼했다. 바다로 둘러싸인 섬나라로 산다. 15세기부터는 아프리카 남쪽 희망봉까지 진출했고 1500년 브라질을 식민지로 소유했다. 그때 아프리카 노예를 데리고 가서 사탕수수밭, 탄광에서 일 시켰다. 해마다 5천명을 배 10척에 5백명씩 태워 노예를 데리고 았다. 어쩌면 그로 인해 브라질 사람들의 얼굴색이 까만 것 같다고 한다. 포르투칼 국기에도 녹색과 적색이 있는데 녹색은 희망을, 적색은 여러 민족의 피를 상징한다. 이웃 나라 모로코는 비참하도록 가난하여 국민들이 바다를 건너 탈출을 시도한다고 한다. 역사적으로 조국을 위해 공이 큰 카를로스 왕이 그날의 비장한 각오로 바다를 지키며 서 있다.
* 포르투칼 리스본 대서양 해변도시 비경
리스본은 대서양과 접한 도시라서 바다와 해변도시가 비경이다. 이민 30년된 교포 가이드 권미혜와 포르투칼 운전기사 빅도르가 우리 일행의 여정을 행복하게 이끌어준다. 빅도르는 포르투칼 말로 빅토리, 즉 '성공'이란 뜻이다. 41세인 남자 운전사는 까보다로까를 향해 해변가로 달리며 고운 풍경을 선사한다. 요트도 정박해 있고, 항구도 보이고, 빨간 지붕들이 참으로 아름답다. 돈까를로스 동상 곁의 바닷가에서 보니 멀리 양로원 건물도 보인다. 바람이 세차게 분다.
포르투칼 말을 몇마디 배웠다. '올라'는 스페인과 포르투칼 공동 인사로 만날 때나 헤어질 때 하는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 그런 뜻이다. 가게에서 물건을 사고도 '올라'하면 된다. '아디오스'는 '하나민과 곁에'라는 뜻이다. 좀더 진한 인사말이다. 이제부터 버스에 오를 때 '올라, 빅도르'하기로 했다. 장거리 운전에 고맙다는 인사다. 우리의 이번 여행은 총 4000Km를 버스로 달린다. 가장 많이 타는 곳은 모로코로 10시간~13시간을 달린다. 자꾸 서쪽으로 가고 있다. 리스본은 270만명 중 시내중심에는 100만명이 살고 있다. 기차와 전철을 이용하며 산다. 이곳은 카스텔로 마을의 휴양지로 더욱 고운 정경이다.
* 포르투칼 리스본 사막화 되는 해변
대서양 가까이로 다가가자 모래언덕이 보이더니 점점 확산된 황막한 땅이 즐비하다. 강수량이 적어 사막화 되고 잇다. 주변에 빈 땅이 많다. 인구가 적어서 그냥 둔다. 아파트를 지어도 살 사람이 없다. 포르투칼은 EU국 중 하다. 그래서 네덜란드에서 포르투칼 올 때도 여권 검사를 하지 않았다.
스페인과 포르투칼은 같은 이베리아 반도인데 전혀 다르게 산다. 포르투칼은 12시~1시에 중식을 하고 , 6시~7시 석식을 한다. 스페인은 2~4시에 중식, 9시~11시에 석식한다. 늦은 저녁식사로 뚱뚱한 사람이 많다. 포르투칼은 대서양과 접하며, 국경이라고는 유일하게 스페인 밖에 없다. 바다 바람이 강하게 부는 나라다. 소극적이며 건물도 거의 미색이다. 영국과 교역하고 영국의 도움을 받는다. 나폴레옹 침입 때도 영국이 도와줬다. 정열의 나라다. 스페인은 지중해와 접해 있고 투우와 플라멩고의 나라다. 적극적이며 원색 건물이 많다. 태양의 나라다. 여행을 통해 얻는 세계 여러 나라에 대한 지식은 언제나 신비롭고 큰 감동을 준다.
사막화 되는 땅을 우리에게 주면 저렇게 그냥둘까, 라는 의문이 든다. 물을 끌어올려서라도 쓸모있는 땅으로 개척하여 농작물을 심을 거라는 생각이 들며 내 조국의 근면과 성실함이 큰 자부심으로 떠오르며, 한편으로는 인구에 비하여 넘치는 이 나라의 땅이 부럽기도 하다. 조금 더 달리자 짙푸른 해변의 나무 숲이 보이고 푸른 들녘의 마을도 보인다. 점점 까보다로까 언덕에 가까이 가고 있다.
* 포르투칼 까보다로까 유럽 최서단 땅끝
리스본에서 35Km, 30분 소요되는 곳이다. 점점 서쪽으로 가고 있다. 산길을 오르면서 포르투칼의 전통예술인 '화두' 즉 슬픈 노래를 들었다. 스페인의 전통예술이 플라멩고라면 포르투칼은 화두가 전통예술이다. 아마리라 로데스 가수의 노래다. 기본 정서가 '사오다데'로 이룰 수 없는 사랑, 그리움이다. 바다만 바라보고 살아서 슬픔이 배어 있다. 스페인은 서쪽으로, 포르투칼은 동쪽으로 인도에 가서 향신료를 구해왔다. 포르투칼은 거주지 중심인 리스본, 상업지역인 포르토, 대학도시인 코인브라, 카톨릭도시인 브라가, 이 네개의 주요도시로 구성되어 있다. 그 중에서 가장 살기 좋은 곳은 리스본이며 이곳에서는 서민적 화두를 부른다. 지적인 도시는 코인브라이며 이곳에서는 지적인 화두를 부른다. 애절한 화두가 슬픈 낭만을 자아낸다. 주택의 지붕이 모두 적색이다. 더운지방의 기와는 적색이고, 추운지방의 기와는 흑색인데 포르투칼은 영하온도가 없어 모두 적색이다.
까보다로까는 해발 40m 해변 절벽 위 언덕으로 바람을 막아주는 곳이 없다. 여기서 육지가 끝나고 바다가 시작된다는 민족시인 루이 키보이스의 시비도 있다. 까보다로까는 미래로 간다는 뜻이다. 위도 38도인데 한국보다 포근하다. 유일하게 콜롬버스가 바다로 진출했다. 유럽에서 세번째 등대인 18세기의 빨간 등대도 있다. 정말 바람은 우리의 옷깃을, 온몸을 심히도 흔든다. 대서양을 바라보며 유럽 최서단 땅끝에 섰다는 황홀함으로 곳곳을 둘러보았다. 절벽도 우람하고, 낭만적인 카페도 있고, 언덕 마을에는 민가도 보이고 무엇보다 포르투칼 민족시인의 십자가 표상의 시비가 돋보인다. 3월인데 파란 식물들이 정반대의 최동쪽 나라에서 온 먼먼 외인을 반기며 웃기 있다. 행복한 정경이다.
* 포르투칼 신트라 왕궁
까보다로까에서 30분 걸리는 신트라 마을로 간다. 포르투칼 민속음악인 화두 두 곡을 들으며 간다. 여가수가 애절하게 부르는 구슬픈 노래다. 눈시울을 적신다. 한국에서도 2회 공연했다. 현재는 사망한 둘세 핀드 가수였다. 바다의 노래, 눈물의 노래다. 브라질 노예 때, 13세기까지 이슬람 정복 때 탄생한 노래다. 한국의 드라마 '사랑과 야망' OST곡이었다. 포르투칼에서는 훗볼(축구), 파두(노래), 파티마(성모마리아 발현지), 이렇게 3F 정책을 썼다.
발셀루스의 닭 전설도 들으며 갔다. 발셀루스 마을에서 하룻밤을 유숙하던 순례자가 그 마을의 살인 누명을 쓰고 밧줄에 목을 매여 죽게 되었을 때 재판관에게 사형 직전에 '내가 살인자가 아니면 저 파티장 식탁 위의 목 없는 치킨이 일어나 울며 일어날 것이다'라고 했는데 정말 목을 줄에 매달아 사형 집행 순간에 목이 잘린 튀김닭이 울며 일어나 날았다는 것이다. 그 닭의 울음으로 살인 모함을 벗게 되었다는 그 전설로 포르투칼에서는 닭을 정직, 믿음의 상징이 되어 곳곳에 닭의 동상을 세운다. 세계적으로 닭울움이 조금 다른데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닭은 '꼬끼리끼'하고 운단다.
포르투칼 커피는 진하며 맛있다는 얘기도 들었다. 에스프레소는 유명하다. 진해서 오후에는 먹지 말란다. 잠이 안온다는 것이다. 포르투칼은 스페인보다 영어를 많이 사용하여 통용된다. 사방이 울창하다. 올해는 눈이 많이 내렸고, 비도 많이 내렸단다.
신트라는 영국 바이런 시인이 말하기를 '에덴의 동산'이라 했다. 바닷가 인근의 마을로 세계골프 대회가 열리는 골프장도 있다. 8세기부터 무오인이 정착했다. 산이 많은 곳으로 15세기에 사냥을 즐기던 왕이 이 아름다운 마을에 궁전을 지었다. 마누엘 양식으로 지었다. 마누엘 왕 때 발견 되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스페인과는 떨어질 수 없는 나라다. 스페인의 주유소, 백화점 등 큰 회사가 항해시대 때부터 포르투칼에 있었다.
아랍으로부터 800년 동안 지배 받았다. 그래서 아랍 문화가 많다. 우상 숭배 금지다. 벽면에 기하무늬 예술이고, 꽃, 등 자연 소재가 많다. 조개, 열대과일, 배, 밧줄무늬 등을 그려 넣었다. 인도쪽에서 도입된 것들이다. 1995년부터 인류문화지역 자료로 지정되었다. 500m 고지의 정원이 많은 도시다. 돌이 많이 생산되어 수출한다. 이태리의 대리석은 흰색이고, 스페인의 대리석은 청색이고, 포르투칼의 대리석은 검은 색이다. 콜크나무도 수출한다. 전세계의 80%가 리베리아 반도에서 생산 되는데 포르투칼에서 50%, 스페인에서 30%다.
신트라에는 궁전이 많다. 신트라성, 페니성, 수오성 등 19세기에도 사용되었다. 굴뚝 2개가 오롯하다. 대표적 왕궁인 신트라성에 들어가 보았다. 72개 귀족의 문장 방이 있다. 까치의 방, 백조의 방 등이다. 백조의 방은 왕의 딸이 27세에 결혼했는데 27개의 백조를 그렸다. 신트라성에서 아치형 문으로 본 마을은 정말 에덴의 동산처럼 아름다웠다.
* 포르투칼 신트라 구시가지
신트라성을 나와 언덕을 타고 오르며 아기자기한 골목을 구경하였다. 고풍스런 구시가지 골목들이 갈래갈래 나뉘어지며 그 옛날의 풍습을 재현하고 있다. 기념품 가게도 많고, 커피가게도 있고, 마누엘 양식으로 꾸며놓은 집도 있고, 산과 마을의 조화가 참으로 아름답다. 3천 종류의 나무들이 곳곳에 울창하고 집의 색상도 고와서 에덴의 동산이라고 칭한 바이런의 말은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어느 곳을 걸어도 절경이다. 카메리를 대기만 하면 모두 명화로 찍힌다. 바셀루스의 닭, 전설을 떠올리며 닭이 들어있는 기념품을 세개를 샀다. 얼마전 결혼한 두 아들네와 우리집 것이다. 비록 남의 나라 전설이지만 정직, 믿음을 상징한다는 것이 참으로 마음에 들어, 살면서 두고두고 기억하자고 사 가는 것이다. 신트라 구시가지 마을에서 보낸 시간들은 행복한 여정이었다.
* 포르투칼 국기와 약국
포르투칼의 국기가 가게 위에 꽂혀 있다. 녹색과 적색이다. 즉 녹색은 희망이고, 적색은 여러 민족의 피를 상징한다. 상가에는 약국도 있다. 유럽식 표기로 상호가 우리나라와는 다르다. 둘째 아들이 약사라서, 나는 세계여행할 때마다 약국도 눈여겨 본다.
* 포르투칼 리스본 시가지
현지식으로 바칼라오 메뉴다. 생선 대구를 소금 저장해두었다가 말려서 찢어서 감자와 계란을 넣어 만든 볶음밥이다. 야채 크림스프와 빵도 나왔다. 이 나라의 빵은 한국의 흰밥과 같다. 아이스크림도 후식으로 나왔다. 맛있게 먹고 건물 앞 낭만적인 의자에서 휴식하며 오가는 사람과 시가지 풍경을 담았다.
리스본의 명칭이 포르투칼어로는 리스보아(Lisboa)다. 처음에는 몰랐지만 점점 리스보아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온다. 스페인도 영어표기고, 현지어로는 에스파니아다. 스페인은 낮잠 시간이 있다. 지배유럽국도 낮잠 문화다. 오후 2시에서 5시 사이에 점심, 휴식시간을 갖는다. 퐁발후작 지배시부터 시작되었다. 여름에는 45도로 더워서 생긴 풍습이다.
리스본은 7개 언덕과 4개 지구로 구성되었다. 알파마, 바이샤, 바이말, 벨렘 등인데 우리는 바이샤 지구로 간다. 지진 피해 지역이다. 지진 후 조지 1세가 바둑판 도시로 구성했다. GNP가 2만 달러다. 대리석, 포도주 생산국이다. 리스본 신시가지에는 아치형 수로였던 곳이 있다. 샹제리제 모방 거리도 거리 공원도 있다. 왕의 동상도 있다. 바닥의 조각이 고풍스럽다. 나무가 울창하다. 리스본 시가지는 참 아름답다.
* 포르투칼 리스본 로시우 광장
리스본의 가장 중심으로 광장 주변은 한국의 명동 거리다. 금의 거리, 은의 거리 등 모두가 웅장하다. 테조강 1800Km가 스페인에서부터 시작하여 여기가 끝나는 곳이다. 13세기부터 종교재판을 비롯한 모든 행사가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대부분 퐁발후작의 계획으로 지어진 18세기의 건물이다. 초대 총독 페드로4세의 동상과 분수, 꽃을 파는 아담한 가게, 대리석 의자, 물결 모양 바닥 등 넓은 로시우 광장은 그야말로 장엄하다. 비둘기에게 모이를 주는 사람도 있다. 주변도로에는 차도 많고, 사람도 많다. 식민지를 많이 소유했던 나라여서 인종도 다양하다. 자유시간을 많이 갖게 되어서 주변의 거리와 광장의 곳곳을 둘러보며 리스본의 문화를 접했다.
* 포르투칼 리스본 샹제리제 모방 거리
유럽의 문화가 곳곳에서 보인다. 프랑스 파리에서 보았던 개선문 앞의 샹제리제 거리를 모방하여 만들었다는 거리가 아름답다. 서로 침공하고, 침공 당하며 서로 좋은 문화는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거리 주변이 울창하며 도로가 넓고 주변의 건물들도 웅장하다.
* 포르투칼 리스본 퐁발 후작 광장
리스본 중심부에 우람하게 솟구친 동상이다. 아래에는 말과 양, 병사들 그리고, 천사 동상이 있다. 로터리 길을 만들었고, 그 안은 광장이다. 주변에는 고급 호텔 등 고층 건축들이 즐비하여 시선을 끌어 올린다. 길도 아름답고, 동상 조각상도 아름답고다. 퐁발후작은 포르투칼의 정치 개혁가이며, 대지진을 복구한 영웅이다. 에드와르도 7세 공원과 나란히 위치하며 리스본의 훌륭한 명소다.
* 포르투칼 리스본 에드와르도7세 공원
영국 에드워드7세가 1902년 리스을 다녀간 기념으로 세운 공원이다. 프랑스 공원문화로 조성되었다. 잔디와 잘 정돈된 나무, 조각상들이 빼어난 비경이다. 리스본 시내의 전경이 보이는 조망 언덕에 올라서 바라보니 저 아래로 흐르는 처연한 테조강과 오롯하게 솟은 퐁발후작의 동상이 포르투칼의 시린 역사의 마디를 속삭이는 듯하여 오늘의 평화는 포근하지만 내 조국의 역사를 떠올리며 가슴이 서늘했다. 우산 소나무 가로수도 이색풍경이다. 우산 소나무는 스페인이 포르투칼을 침공했을 때 자국의 병사들에게 그늘을 제공해주기 위해 우산 같은 역할을 하라고 옮겨 심은 것이다. 이것도 겉으로 보기는 아름답지만 속으로는 슬픔이 배어 있는 정경이다. 질곡의 역사는 흘러가고, 평온한 공원이 시민들의 쉼터로 사랑받고 있으니 덩달아 흐뭇하다.
* 포르투칼 리스본의 아름다운 축구장
어느 나라를 가도 축구를 사랑한다. 그건 세계 공통이다. 포르투칼도 축구를 많이 사랑한다. 지난 밤에 어둠 속에서도 보았고, 오늘 또 다른 축구장을 보았다. 건축 양식도 외형 색상도 아름답다. 진한 예술 향기가 배어있다. 분홍색 스페인 대사관 건물도 크고 아름답다. 이런 유럽의 건축물은 그 자체만으로도 큰 의미를 부여한다. 고풍스럽고, 잘 보존된 풍경이 부러움을 자아낸다.
* 포르투칼 리스본에서 파티마 가는 길
리스본에서 파티마까지는 1시간 30분~2시간 소요된다. 고속도로를 타고 버스가 달린다. 고속도로 중앙 분리대가 녹색 봉으로 세운 것이 특이하다. 농촌 들녘, 넓은 땅에 경작한 곳도 있고, 산도 있고, 초지도 많다. 동물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다. 올리브 농장과 포도 농장도 보인다. 점점 북쪽으로 가는데도 포르투칼의 포근한 기후를 대변하듯 온 들녘이 파랗다. 날씨는 비가 오다가도 맑고, 또 다시 비가 내리고, 검은 구름이 드리우고, 수시로 변한다.
파티마는 모하메드의 딸 이름으로 훌륭한 일을 많이 한 여성이다. 영화 [파티마 Fatima]도 보며 갔다. 파티마의 성모 마리아 발현지에서 양치기하던 세 아이들이 성모 마리아의 6번 출현을 목격한 이야기다. 5월에서 11월까지 매월 13일에 1번씩 나타났다는 것이다. 8월에 아이들을 감옥에 가두었고 감옥인까지 가두었다. 죄인들을 위해 기도하라, 고행하라는 계시를 받고 붉은 밧줄을 몸에 감고 물도 안 먹고 고행한 이 세 어린이에게만 성모 마리가가 보였다. 어른들은 믿지 않았지만 후일에 모두 사실로 확인된 사실적 이야기를 영화로 제작한 것이다. 영화도 보다가, 포르투칼의 초지 들녘을 보다가, 웅장한 검은 구름을 보다가 지루하지 않게 파티마로 갔다.
* 포르투칼 파티마 호텔 도착
저녁 무렵 파티마 도시에 도착하여 에스트라 파티마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내일은 6시 모닝콜, 7시 조식, 8시 호텔 출발이다. 호텔 바로 앞에 성모 마리아 발현지가 있어 그 곳을 관람하기 위해 다시 5시에 호텔 로비로 나왔다. 도로변 담장 너머 울창한 나무들 사이로 벌써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의 조각품이 보인다. 점점 어둠이 내리고 우리는 서둘러 바실리카 성당과 성모마리아 발현 예배당 등을 보기 위해 호텔을 나섰다.
* 포르투칼 파티마 성모 마리아 발현지
예수의 어머니 성모 마리아가 6번 발현했다는 성지다. 1917년 5월부터 11월까지 출현했던다는 곳이다. 리스본에서 120Km 떨어진 이곳 도시 파티마에 올 때 영화 [파티마]를 보며 왔는데 그 내용이 바로 이곳의 이야기였다. 구름을 가르고 해가 뜨더니, 해가 돌더니 성모 마리아가 발현된10월 13일의 기적을 40Km의 거리에서까지 7명이 보았다. 13년 세월을 거쳐 1930년에 교황청으로부터 발현을 인정한다는 공정을 받았다. 성모 마리아의 발현을 목격한 어린이들은 더운데 물도 안 먹고 고행을 실천했다. 그때 어린이들에게 1917년의 러시아 혁명과 1914년부터 1918년까지의 1차 세계대전의 종말을 예고했다는 것이다. 또한 여러가지 기적이 나타났는데 1981년 5월 13일 행사 때 참석했던 요한 바우로에게 총알이 날아올 때 성모 마리아의 빛으로 고개를 숙였는데 총알이 그냥 지나감으로 그 빛이 살려줬다. 태양의 기적이 일어 났는데 태양이 빙글빙글 돌자 장애자들이 일어났다. 매년 5월 13일이면 여러 사람들이 이곳에 모인다.
넓은 광장이 있고 양쪽 끝에는 성당이 있다. 가장자리에는 울창한 나무들이 서 있다. 장엄한 바실리카 성당이 있고, 바로 앞에 성모 마리아가 발현했다는 그 지점에 세운 조그만 유리벽의 예배당도 있다. 1917년에 발현하고 1919년에 예배당 짓고, 1928년에 바실리카 성당을 크게 지었다. 하얀 대리석 길 150m를 카톨릭 신자들이 무릎 꿇고 걸어서 내려와서 예배드린다. 맞은 편에는 성부, 성자, 성신 성삼위 일체라는 뜻이 담긴 트리달 돔식 건물의 성당이 있다. 2004년에 지은 현대식 건물의 성당이다. 저격으로 죽을 뻔 했던 요한 바울 동상도 있다. 그 후 로마 교황청은 방탄차를 승차한다. 독일인이 조각했다는 가로 170m, 세로 340m의 거대한 예수 십자가상이 하늘 높이 솟아 있다.
성모 마리아 발현 예배당에서는 신도들이 모여 예배드리고 있었다. 바실리카 성당은 거대하다.예배당을 찾는 이가 너무 많아서 지은 성당이다. 내부도 웅장하고 근엄하다. 성모 마리아의 발현을 보았던 세 아이인 루시아, 하신다, 프란체스코 중 두 명, 하신다와 프란체스코의 무덤도 성당 안에 있다. 시신이 그대로 성당 안에 안치 되어 있었다. 스페인 독감으로 발현 2년 뒤 성모마리아의 발현을 본 두명의 아이가 사망했다. 스페인 인구 30만명이 죽었고, 세계적으로는 1억명이 사망한 무서운 독감이었다. 한참 후인 1989년 두 아이, 하신다와 프란체스코는 바울에 의해 가경자로 공식 선언 되었고 루시아는 21세기까지 살다가 나이 들어 얼마 전에 사망했다. 내부를 둘러보고 나왔을 때 비가 많이 오고 있었다. 로마의 바티칸 시국에 있는 바울 성당을 본받아 지었다는데 규모만 조금 작을뿐 외형의 건축모양은 바울 성당과 아주 동일하다. 차츰 어두워지고 비가 흥건히 고인 파티마의 성지를 조심스런 발걸음으로 떠나왔다.
* 포르투칼 파티마 성모 마리아 발현지의 코르크 나무
성모 마리아의 발현지 울타리에 커다란 코르크 나무가 있다. 포르투칼의 주 수출 품목인 코르크가 이 나무에서 생산되는 것이다. 병마개를 생산하는 코르크 나무가 신기하여 바싹 다가가 살펴 보았다. 코르크 나무 껍질을 벗겼는데 그 자리에 숫자 7를 적어 놓았다. 그것은 2007년에 코르크 껍질을 생산했다는 표시고, 9년마다 자르므로 다음은 2016년에 생산한다는 뜻이다. 다시 재생되는 나무의 껍질이 대견하고 아름답다.
2010년 3월 3일 수요일 포르투칼 파티마, 리스본, 스페인 세비야
* 포르투칼 파티마 호텔 출발
오늘은 파티마를 출발하여 리스본을 거쳐 스페인 세비야까지 간다. 새벽 일찍 일어나 성모 마리아 발현지를 한번 더 보기 위해 그곳으로 갔다. 어제 못 둘러본 트리달 성당도 가까이 가 보고, 바울 6세 동상도 보며 쌀쌀한 새벽을 가르고 산책했다. 한국보다 늦게 밝아온다. 호텔로 돌아와 파티마를 출발했다.
리스본 벨렌지구로 이동한다. 테조강의 벨렘탑, 발견의 기념비, 제로니모스 수도원을 보고 중식 후 스페인 세비야로 넘어간다. 비는 그쳤으나 쌀쌀하고 구름이 많이 끼었다.
* 포르투칼 파티마에서 리스본 가는 고속도로의 방음벽
파티마에서 리스본으로 가는 고속도로의 방음벽 색상은 참으로 아름답다. 연두색과 노랑색으로 만들어 세운 것도 있고, 주황색과 살색으로 만들어 세운 것도 있다. 방음벽이 예술이다. 도로변 들녘 가장자리에 세웠는데 파란 초지와 어울려 더욱 고운 색상으로 발한다. 소를 방목하는 목장, 고운 색상의 농가주택, 비닐하우스의 큰 농토, 올리브 농장, 분홍과 미색, 녹색으로 장식한 아파트 등 포르투칼의 고속도로변은 정겨운 풍경이다.
프랑스, 스페인, 미국은 세계 여행지 3위국이다. 유럽의 모든 관광은 프랑크푸르트, 파리, 암스텔담을 경유하여 간다. 스페인은 태양의 나라로 유명하며 성지의 나라다. 오늘 가고자 하는 스페인 세비야는 코르도바, 그라나다와 함께 스페인 남부의 안달루시아 지방이다. 스페인의 정치는 대통령 5년제, 총리 4년제로 이원 집권제다. 실권은 총리가 쥐고 있다. 리베리아 반도의 스페인은 유럽에서 탐내는 땅이다. 1년 농사 지으면 4년을 먹고 산다. 그 만큼 옥토다. 그래서 로마가 500년 동안 정착했다. 아랍인이 711년에 와서 1250년에 퇴출함으로 500년 머문 것이다. 아이 때 머리가 금발로 태어나면 어른이 되어 검은발이 되고, 은발로 태어나면 어른이 되어 금발로 되는 특이한 현상이다.
포르투칼에는 한인 교민이 150명 살고 있는데 교민 60명, 체류자 90명이다. 교민이 적어 한식 식당이 없다. 최초의 이민자는 병아리 감정사다. 대우 기사, 태권도 사범, 쌍용자동차 직원 등이 있다. LG, 삼성의 컴퓨터나 TV 등 가전제품은 대인기다. 한국과의 관계는 1913년 프란시스코에 의해 처음으로 알려졌다. 포르투칼 언어는 예뻐서 전 세계 1억 9천만 명이 사용하고 있다. 포르투칼의 바스코다가마는 동쪽으로 가서 아프리카와 인도양을 발견한 개척자다. 콜롬버스는 서쪽으로 가서 스페인을 개척했다. 콜롬버스는 이사벨 여왕의 도움으로 항해했다. 지구의 서편으로는 포르투칼, 동편으로는 스페인이 지구를 반씩 나누어 갖자고 하던 시대가 있었다. 이런 저런 남유럽의 역사를 들으며 리스본으로 달리고 있다.
* 포르투칼 리스본 휴게소
리스본에 가까이 오자 다시 비가 온다. 차창에 비가 많이 뿌린다. 3월의 리베리아 반도는 푸르다. 여행하기 좋다. 나무의 잎사귀들이 울창하고, 푸들도 파랗다. 들꽃이 많고 곱다. 이곳의 겨울이라지만 한국의 4월~5월쯤 되는 풍경이다. 휴게소에 잠시 들러 화장실에 다녀온 후 다시 리스본을 향해 달린다.
포르투칼의 빵은 맛있기로 유명하다. 브레드라는 빵의 영어말은 미국어인데 포르투칼에서 시작되었다. 우리가 내린 리스본 공항을 지나고 있다. 공항은 리스본 시내에서 7Km 떨어진 곳에 있다. 대항애 시대에 금은보화가 많이 들어왔다. 그때는 노동이란 것을 몰랐다. 미래의 나라이며 생산하는 것도 모르는 나라라고 했다. 어제 보앗던 스포르팀틱의 축구장도 지난다. 큰 회사가 모두 시내 밖에 있어서 차량이 시외로 많이 이동하고 있다. 시내엔 상가가 많다. 그래서 왕복 차선이 모두 복잡하다. 나라는 부자이나 국민은 가난하고, 결국 생산 없이 생활하다가 몰락했다. 1560년~1640년까지 스페인이 80년간 지배했다. 그러다가 다시 포루투칼은 독립했다. 퐁발후작은 대사로 활약했다. 사냥과 오락만 즐겼지만 포르투칼의 대지진을 잘 수습했다. 영국과의 교역도 잘 했다. 1910년부터는 포르투칼 제1공화국이 시작되었다. 파티마를 떠나 줄기차게 달려온 버스는 점점 리스본 시내에 가까이 다다르고 있다.
* 포르투칼 리스본 아치형 수로
리스본에 가까이 들어오자 커다란 아치형 수로가 보인다. 이런 수로 곳곳에 많다고 한다. 언덕과 언덕 사이, 산과 산 사이를 다리로 이어 놓고 물길을 뚫었던 것이다. 수로 너머로 리스본의 신시가지도 보인다. 건물 색상이 분홍, 미색, 살색이다. 스페인은 진한 색상인데 그것은 성격이 강해서다. 반대로 포르투칼은 성격이 소극적이어서 색상도 강하지 않은 것이다. 포르투칼 국민은 이혼이 많다. 운전기사 같은 직업은 90%가 이혼한다. 우리 버스의 운전기사도 이혼하고 혼자 산다. 이혼이 많은 이유로는 항해시대부터 혼자 살이온 포르투칼 여인들이 강해서다.
포르투칼은 1974년에 독재가 종식되었고, 1986년에는 EU에 가입했다. 그 후 급속으로 성장했다. 2002년부터는 유로화를 통용한다. 관광이 쉬워졌다. 유로화는 현재 1유로에 한화1600원 정도로 계속 하락 중이다. 포르투칼은 세금을 많이 거둔다. 스페인은 50%가 세금으로 낸다. 스페인을 부도 직전국이라고 보도하지만 그 정도는 아니다. 스페인은 선진국으로 시민은 가난해도 나라는 부자다. 버블건축 파동이 나서 그렇다. 버블건축 공사할 때 노동자가 많았다가 회사가 부도나자 실직자가 많아지고 그래서 상당히 불안한 사회가 되었다. 현지 가이드가 스페인 에 사는 한인 교민이어서 스페인과 포르투칼의 역사와 정보를 많이 알려주어 여행에 큰 도움이 되고 있다. 어느새 버스는 아치형 수로를 지나 리스본 시가지에 접어 들었다.
* 포르투칼 리스본 사기지 거리의 행상 여인
비가 오는데 차창 밖에서 중년 여인이 이슬람교인의 검은 옷을 두르고 행상을 하고 있다. 차도변에서 물건을 들고 행인을 대상으로 판다. 우리에게도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사달라고 하는데 애처럽다. 눈을 마주치면 끝까지 집요하게 팔아주길 강요하는 경우를 세계여행 중에 여러번 보았기에 사주지 않을 거면 아예 눈을 피해야 한다. 안쓰럽지만 외면했다. 가난하지 않은 나라에서 보는 조금은 서늘한 풍경이다.
* 포르투칼 리스본 테조강변 풍경
리스본의 중심을 흐르는 크고 아름다운 강이다. 그 주변에 벨렘의 탑, 발견의 기념비, 제로니모스 수녀원 등 관광명소도 많이 있다. 테조강 다리는 장관이다. 전철과 1950년에 탄생한 지하철이 리스본의 큰 이동수단으로 테조강변을 지나고 있다. 스페인은 1919년에 지하철이 개통되어 오랜 역사인데 포르투칼은 지진으로 좀 늦게 건설되었다. 철로와 전선이 많이 설치되어 있다. 테조강은 깊어서 대형 선박의 이동도 가능하다. 비가 오다 그치다를 반복하며 낭만을 자아낸다.
* 포르투칼 리스본 테조강변 벨렘탑
테조 강가에 귀부인이 치마를 펼치고 앉은 모양이다. 나비가 앉은 것 같기도 하다. 밧줄 등 자연물도 건축했다. 1515년부터 1518년까지 지었는데 마누엘 양식의 3층 건물이다. 아름다운 3층은 왕족의 거처로 사용되기오 했고, 2층은 포대로, 1층은 감옥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원래는 강물 속에 세웠는데 물이 빠지면서 형상을 드러내고 있다. 1983년에 제로니모스 수도원과 함께 문하유산으로 지정 되었다. 테조강을 바라보며 앉은 벨렘탑은 정말 아름다운 예술의 건축물이다.
* 포르투칼 리스본 테조강변 발견의 탑
테조강변에 범선 모양으로 세워졌다. 1960년에 항해 성공 기념으로 세운 건축물이다. 포르투칼 왕자인 마젤란과 바스코다마 등에 대한 기록이 있다. 탑의 아래 양 옆에는 항해시대 때 바로 진출하던 사람들의 용감한 동상이 있다. 금방이라도 바다로 뛰어들 듯하다. 대리석 바닥의 조각 문양 하나하나도 항해에 대한 깊은 의미가 부여된 것 같다. 바로 길 건너편에는 제로니모스 수도원이 우람하게 마주하고 있다.
* 포르투칼 리스본 제로니모스 수도원
대단히 크고 웅장하다. 300m의 폭으로 건물 끝에서 끝이 아득하다. 1502년에 건설 되었다. 원래는 항해사들이 출발하기 전 무사하기를 기원하던 기도원이었는데 그후 왕의 거처로 씌이다가 현재는 박물관이다. 마누엘 왕이 유명하여서 그의 이름을 딴 마누엘 양식으로 지어졌다. 16세기에 발달한 건축양식으로 포르투칼에만 있다. 나뭇잎, 꽃, 밧줄,조개, 노끈 등을 조각한 자연물 중심의 장식이다. 안에는 포르투칼의 대서사 시인 까몽이스와 바스코다가마의 무덤이 안치되어 있다. 수도원의 내부를 돌아보고 나오니 비가 더 많이 내린다. 수도원 건물의 외벽에 붙은 조개와 밧줄 문양이 아름답다. 잘 가꾸어 놓은 정원의 푸른 잔디와 나무도 향기롭다.
* 포르투칼 리스본 제로니모스 수도원의 바스코다가마 무덤
제로니모스 수도원에 들어서니 입구에 두 시신이 안치되어 있다. 첫번째는 시인 까몽이스의 무덤이고, 그 오른편으로 바스코다가마의 무덤이 있다. 원래 이 수도원은 1498년 바스코다가마의 인도항로 발견을 기념하기 위해 건축된 것이다. 바스코다가마는 반듯이 석관에 위에 누워 항해의 무사귀환을 빌던 그날의 모습으로 아직도 두손 모아 기도하고 있다. 포르투칼인의 거룩한 주검 앞에서 한참 동안 머물렀다.
* 포르투칼 리스본 제로니모스 수도원의 민족시인 무덤
수도원 안의 입구에 포르투칼의 대서사 시인이며 민족시인였던 까몽이스의 무덤이 있다. 무덤이라기 보다 아직도 살아있는 모습을 그대로 재현해 두었다. 그의 손에는 칼이 들려있는데 포르투칼에서는 칼이 정의의 표상이다. 시인은 정의의 칼을 죽어서도 놓지 않고 있다. 아래 부분에 그의 육신이 누워 있어 창살만 열면 정담을 나눌 것 같은 착각이 든다. 나도 대한민국 코리아의시인이다. 나도 내 조국을 많이 사랑한다. 세계여행을 하며 기행시를 써도 어느 한순간 내 조국 대한민국을 잊는 적이 없다. 나의 시속에도 그런 조국애가 많이 담겨 있다. 나의 시를 사랑하는 한 독자는 이은상 시인님의 시를 보는 것 같다며 조국애가 담겼다고 했다. 포르투칼 민족시인 까몽이스와 창살을 마주하고 산자와 죽은자의 대면이지만, 한동안 그런 동일한 상념으로 마음을 교류했다.
* 포르투칼 리스본 테조강 다리와 예수상
리스본의 테조강은 1800Km로 상당히 길고 폭도 큰 강이다. 주변에는 명소와 주요건물들이 많다. 이 큰 테조강에 다리가 단 두개뿐이다. 바스코다가마 다리와 사이오 다리다. 지금 바라보고 있는 다리는 사이오 다리다. 에펠탑 설계자가 설계한 다리다. 아래로는 기차가 다니고, 위로는 차량이 다닌다.
제로니모스 수도원까지 돌아보고 우리의 버스는 사이오 다리를 건너 갔다. 비가 많이 와서 창밖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이곳의 운전면허는 맨처음에 12점을 준다. 그리고나서 교통법을 어길 때마다 벌점으로 점수를 빼앗아 간다. 운전 중 핸드폰 사용시 4점, 벨트 미착용시 4점, 과속시 4점, 그렇게 하여 2년 후쯤이면 점수가 다 소진되고 다시 면허증를 따야 한다. 2시간마다 15분~30분 휴식하는 것이 운전수칙의 의무다. 버스 값이 4억원이다. 개인이 사서 운행하거나 회사 소속의 버스를 운행하기도 한다.
저 건너편 산 위에 예수상이 높이 서 있다. 포르투칼을 지켜주는 의미의 예수상이다. 28m의 거대한 석상으로 브라질 리오데자네이루의 예수상을 모방한 것이다. 정말 리오의 예수상을 많이 닮았다. 다리도 아득하게 길고, 두 팔을 버리며 리스본을 보듬고 있는 예수도 높은 산 위에서 거룩한 형상이다.
* 포르투칼의 우산 소나무
우산 소나무는 그늘이 많이 샌긴다. 나무 생김새가 한국의 소나무와는 다르다. 꼭 우산처럼 생겼다. 원래 스페인에서 자라던 소나무안데 스페인이 포르투칼을 지배할 때 자국의 병사들에게 그늘을 제공하기 위하여 포르투칼에 옮겨 심었다는 것이다. 에드와르도7세 공원 부근의 도로변 가로수가 우산 소나무로 짙푸르다. 포르투칼에서 스페인으로 갈 때도 들녘 곳곳에 줄지어 서 있었다. 이탈리아 여행에서도 보았던 기억이 난다. 유럽의 소나무는 아시아의 소나무와는 모양이 좀 다른 것 같다.
* 포르투칼 코르크 나무 농장
포르투칼의 남부로 갈수록 코르크 나무가 많았다. 스페인 세비야로 가는 길에 도로변에 코르크 나무 농장이 많았다. 전 세계의 코르크, 70%가 리베리아 반도에서 생산되고 그 중에서 50%가 포르투칼에서, 나머지 20%는 스페인에서 생산된다고 하니 포르투칼 들녘 곳곳의 코르크 농장은 당연한 풍경이다. 병마개로 사용되는 그 코르크가 저 나무에서 나온다. 그 말랑말랑한 껍질의 나무가 신기하여서 맑다가도 갑자기 비가 내려 유리창을 가려도, 나는 물방울 사이로 자세히 보곤 했다.
* 포르투칼 리스본에서 스페인 가는 길의 목장
리스본에서 중화요리로 중식을 하고 스페인 세비야로 간다. 365일 중 200일은 해가 뜨고, 80일은 구름 끼고, 80일은 비가 온다. 그런데 금년은 기록을 깨고 있다. 올 겨울에는 눈과 비가 많이 내렸다. 오늘부터 장거리 여행이다. 오늘만도 5시간을 버스로 이동한다. 모로코에서는 13시간, 바르셀로나 갈 때는 10시간 버스 타야 한다. 지금 버스는 스페인 남부 도시 세비야로 달린다. 그곳에서 숙박하고 오늘밤 플라멩고 공연을 볼 예정이다. 플라멩고와 투우는 스페인의 대표 볼거리다. 기타 악기도 스페인에서 시작되었다.
우산 소나무가 들녘에 많다가, 온 들녘과 산이 코르크 나무 군락이다가 초지의 드넓은 목장이 전개된다. 목장 곳곳에 그늘용으로 서 있는 나무도 코르크 나무다. 소, 양, 말 등의 동물들이 평화롭게 풀을 뜯고 있다. 광활한 땅, 산이 없는 끝없는 들녘이 다 목장이다. 민가도 없다. 더러 들녘에 축사가 있다. 도로변에 울타리도 있고 소떼들이 무리지어 뭉쳐 있다. 완전 방목이다. 가끔씩 양떼도 무리지어 뭉쳐 있다. 미국 서부여행에서 진저리나게 본 것이 모하비 사막이었다면 여기서는 진저리나게 보는 것이 코르크 나무와 목장이다. 고
속도로에 차가 없어 우리의 버스만 질주하고 있다. 우중 도로를 잘 달린다. 기후 변동이 심하여 비가 오다가, 해가 나오다가, 구름이 끼다가를 반복한다. 노변에 개나리가 노랗게 피었다. 나는 차를 타고 지나며 그 나라의 바깥 풍경을 보는 것도 세계여행에서 큰 의미를 부여하기에 지금 이 순간이 참으로 유익하고 보람된 여정이다.
* 포르투칼에서 스페인 가는 휴게소
이곳 휴게소는 아직도 포르투칼 영토다. 여기서 40분 정도 가면 스페인이다. 국경지를 그냥 넘어가면 된다. 잠시 내려 휴식하는 동안 주변을 살펴보았다. 온 산이 다 올리브 나무다. 우리나라의 소나무처럼 올리브 나무가 산에 자생하고 있다. 한국의 계절보다 빨라서 벌써 노란 봄꽃이 피었다. 개나리 종류 같은 꽃이다. 언제 또 포르투칼의 땅을 밟아 보겠는가. 내가 다시 포르투칼을 오겠는가. 새로운 나라를 찾아 떠나겠지. 순간순간이 아쉬워서 포르투칼 마지막 여정의 행복을 가슴에 꼭꼭 담았다.
* 포르투칼과 스페인의 국경선
유럽의 국경선은 언제나 환상적이다. EU국으로 통합되면서 아주 쉽게 국경을 넘어간다. 포르투칼과 스페인 국경도 그렇다. EU국기가 걸린 곳이 국경선이고 국경다리를 건너면 된다. 강을 사이에 반씩 나누어 소유하고 있다. 강의 왼편이 포르투칼이고, 오른 편이 스페인이다. 스페인은 남한의 5배, 한반도의 2.4배고 인구는 4600만 명이다. 국경은 4개국인데 영국, 포르투칼, 프랑스, 피레네산맥의 작은 나라 안도라다. 포르투칼과 스페인 사이가 나쁘다. 프랑스와 스페인도 사이가 나쁘다. 가까이 나라끼리는 대개 사이가 나쁘고 먼나라끼리는 사이가 좋다. 그런데 스위스와 이태리는 접경국인데도 오히려 사이가 좋다.
포르투칼과 스페인은 1시간 시차로 스페인이 1시간 빠르다. 스페인어 사용 인구는 세계적으로 4억 5천만 명이다. 중남미에 많다. 스페인 공식언어는 4개로 라틴어 방언 3개, 아프리카식 스페인어 1개다. 스페인어 인사말은 세가지가 있는데 '그라시아'는 '감사합니다', '노그라시아'는 '필요없다', '아디오스 아미고'는 '친구야 안녕'이다. '아세요'는 '화장실'이다. 스페인에 가서 '화장실 아세요?' 우리말로 하면 쉽게 화장실을 알려줄 것이란다. 그말에 우리는 웃었다. '뽀르파볼'은 '부탁합니다'로 교양있는 말이다. '쎄르돈'은 '미안합니다', '아이새끼야'는 꼭 한국의 욕 같은데 '물도랑'이다. 이제 스페인 영토를 달리고 있다.
* 스페인 세비야 올리브 농장
스페인에 오니 들녘 풍경이 다르다. 코르크 나무는 없고 올리브와 오렌지 농장이 많다. 오렌지가 노랗게 열렸다. 집도 하얀 벽에 검은 지붕이 많다. 포르투칼과는 다르다. 스페인 하면 투우, 플라멩고, 태양의 나라, 그리고 피카소의 나라다. 하얀 마을의 미하스도 대표다. 스페인은 건조국인데, 지금 3월인데 비가 많이 온다. 이상 기후란다. 산에 가서 불 켜면 불법이란다. 강우량이 북쪽은 1500mm~2000mm로 푸르고 산맥이 많고, 남쪽은 400mm로 건조하여 평야지와 황토들녘이 많으며 덥다. 비가 온후 무지개가 선명하다. 고운 풍경이다. 검은 구름도 낭만이다. 스페인 세비야에 들어오자 또 비가 온다. 호텔에 잠시 들러 플라멩고 전통예술을 관람하기로 했는데 그만 교통이 막혀서 잠시 정체로 오후 7시의 공연을 보지 못하고 그냥 돌아왔다. 세비야 시가지에도 올리브 나무 농장이 인상적이다.
플라멩고는 집시춤이다. 인도의 어느 북서쪽 지방에서 시작된 방랑민족의 춤이다. 세비야가 따뜻해서 집시들이 정착했다. 한없이 서쪽으로 도망가다가 안달루시아에서 살았다. 라틴어로 '도망 다니는 농부'라는 뜻이다. 다양한 혼합의 춤이다. 탭댄스, 나무 바닥의 춤이다. 사과나무에서 사과 따 먹는 손 동작의 춤도 있다. 오페라 카르멘이 나와 음악에 맞춰 춤춘다. 담배공장(현재는 대학교) 다니던 여자가 투우사를 사랑한다. 돈조앙은 스페인의 바람둥이다. 카사노바는 이태리의 바람둥이다. 바람둥이를 만나 사랑한다. 사랑의 노래를 부른다. 투우 시즌이 아니어서 플라멩고 춤만 보기로 했던 것이다. 9세기부터 온 무리들이 로마에서 왔다고 말했다. 집시가 온다고 하면 그 지역이 쑥대밭이 되므로 거부했기 때문이다. 9세기~14세기까지 500년간 스페인에 거주했다. 집시춤으로 돈 받거나, 농사 도와주고 돈 받아 생활했다. 스페인에서 방랑민족을 불러 행사시에 춤추게 한 것이 플라멩고다. '당신은 빠요다'는 '너는 집시다'로 큰 욕이다. 집시는 떼지어, 가족끼리 떼지어 아파트 밑에 둥지를 틀고 살아서 집값이 떨어져 아주 싫어 한다. 세비야에서 공연하는 1시간 30분의 플라멩고가 정통이라는데 못 본 것이 내내 아쉽다. 호텔로 다시 돌아가는 길목의 도로변에 올리브 나무 농장이 아주 넓게 자리하고 있다.
2010년 3월 4일 목요일 스페인 세비야, 코르도바, 그라나다
* 스페인 세비야 호텔
참 아름다운 호텔이다. 세비야의 온도는 오늘 13도~18도란다. 1992년에 만국박람회가 열렸던 곳으로 유명한 지역이다. 여기서 코르도바까지는 140Km다. 오늘 우리는 코르도바를 거쳐 그라나다까지 간다. 코르도바에는 모스크, 독특한 회교사원이 있다. 세비야에서는 성당을 많이 본다. 세비야 대성당은 세계최고로 크다. 기네스북에 등재되어 있다. 스페인의 도시 중 큰 순서로는 마드리드, 바르셀로나, 바렌시아, 세비야로 세비야는 4번째 큰 도시다. 마드리드 인구는 600만 명이고, 세비야의 인구는 80만 명이다. 세비야와 코르도바는 마드리드보다 기온이 10도 높다. 오늘 황금의 탑, 스페인 광장, 마리아루이사 공원, 세비야 성당을 본다.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까지는 540Km다. 1992년부터 아베AVE, (떼제베) 고속열차가 운행을 시작하여 2시간 30분 걸린다. 아베는 새(bird)라는 뜻의 이름이다. 스페인의 심볼이다.
스페인은 그래도 교민이 많이 산다. 마드리드에 1200명, 바르셀로나에 1200명, 그외 지역에 1200명 산다. 원양어선사업가, 태권도 사범, 병아리 감정사, 유학생들이다. 하누국인부호 권명호씨(원양업)는 지금도 가난한 시절을 기억하며 구리 반지를 끼고 다닌다. 안익태 선생님도 스페인 동쪽 마요르까 섬에서 거주하였다. 로리따 부인이 얼마전 사망했다. 바르셀로나와 한국의 부산이 자매결연 맺었다. 팝오페라 가수 키메라, 화장 진하게 하는 여가수도 한국을 다녀왔다. 나도 TV에서 본 기억이 난다. 스페인은 한국을 소개할 때 '한국은 24시간 안에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진다. 한국은 안전한 나라다'라고 한다. 스페인은 도둑이 많다. 또 이곳은 낙지를 안 먹는데 한국은 보신탕을 먹는다고 이상한 나라라고 한다. 스페인에 대하여 배우며 이제 스페인 여행의 첫 출발이다.
* 스페인 세비야 주택단지
적색 주택이 많다. 요즈음 저렇게 4층 집을 짓는 것이 유행이란다. 연립처럼 이어져 있다. 시내는 구시가지니까 외곽으로 나와서 예쁜 집을 짓고 산다. 스페인 외곽의 고급주택은 10억원 정도다. 그렇게 비싸도 꿈꾸는 이상적인 집이다. 지하에는 주차장, 서재, 주방, 침실 등 4층 집을 짓고 산다. 젊은이들이 돈 벌어 갖고 싶어하는 희망의 집이다. 우리가 유숙한 호텔이 있는 이곳은 도심에서 16Km떨어진 곳이다. 저런 집을 관리하려면 가스비, 보험료 등 유지비가 많이 든다. 겨울에는 도시가스료가 한달에 300유로, 한화로 50만원 든다. 그러나 스페인은 알거지가 되도 노후가 보장되어 걱정없다.
스페인의 결혼 풍습은 백화점에 가서 200유로를 쓰겠다고 하면 선택한 물건이 집으로 배달된다. 옛날에는 가구, 시계가 거래되었는데 지금은 현금으로 거래한다. 피로연 비용도 200명을 초대한다면 신부 100명, 신랑 100명으로 하여 각자 비용을 부모가 지불한다. 신혼여행은 신랑 넥타이를 잘게 잘라 쟁반에 담아서 돌리는 그때 넥타이 조각을 갖고 돈을 준다. 300만원 정도 여행비를 마련한다. 성당에 가서 결혼한다. 주고 받는 반지는 없다. 결혼 휴가는 15일이다. 좋은 결혼 풍습이다. 우는 부모는 신랑측 부모다. 아들을 신부에게 빼앗겼다고 운다. 신부측 부모는 한국 반대로 웃는다. 이혼시 여자가 유리하다. 결혼하면 자동으로 재산을 반씩 소유하게 된다. 이혼시는 재산을 반씩 나누며, 남자는 아내와 아이를 잃고도 자녀양육비를 지불해야 한다. 집도 여자가 소유하게 된다. 유산은 불가다. 특이한 경우만 허락한다. 유럽은 동성연애 허락국은 3개 나라로 벨기에, 폴란드, 스페인이다. 남자끼리 손잡고 다니면 게이다. 주택 모양도 다르고, 결홍 풍속도 다르고, 내 조국의 문화와 다른 여러 문화를 접하며 세상을 배운다.
* 스페인 세비야 과달기비르강이 흐르는 정경
스페인 세비야의 도심을 흐르는 강이다. 강변에 엑스포관람장도 있고 여러 건물들이 아름답게 들어서 있다. 강폭도 상당히 넓다. 이 강변에 황금의 탑도 있다. 아기자기한 시가지 사이로 흐르기도 하고 웅장한 물살로 흐르기도 한다. 강다리를 놓아 시가지를 연결하여 더욱 낭만을 선사한다. 햇살에 반짝이며 도란거리는 물결이 생기차고 도시를 곱게 그려낸다.
* 스페인 세비야 황금의 탑
과달기비르강 강가에 세워진 정 12각형 건축물이다. 1220년대에 강을 타고 들어오는 적군을 지키기 위해 세워졌다. 즉 13세기, 강의 통행 기념으로 세운 탑이다. 처음에는 지붕 위가 황금이었는데 오늘날에는 오랜 역사로 벗겨져서 잘 안보인다. 지금은 스페인 항해 역사를 담아놓은 해군 박물관이다. 도로변에 있는 탑은 웅장했다. 바로 마주 보는 과달기비르강에는 큰 배가 떠 있다. 야자수를 비롯한 여러 열대 식물들이 울창하여 깊은 향수를 더해준다.
* 스페인 세비야 스페인 광장
광장에 들어서는 순간 그 장엄함이 온 시선을 당겼다. 높은 첨탑은 하늘를 찌르고, 아치형의 건축물에 아치형의 문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그 아래 스페인의 각 도시들의 지도와 대표 그림, 문장들이 천연색상으로 그려져 있다. 무엇을 먼저 보아야 할지 걸어도 걸어도 긴 스페인 광장을 분주한 걸음으로 이곳저곳을 살펴 보았다. 세비야가 플라멩고 발생지여서일까, 광장 곳곳에 집시들의 행상 장면이 목격된다. 정원의 찔레꽃이 하얗게 피어 향기롭다. 안에도 들어가 긴복도를 걸어 보았다.
스페인 광장은 마드리드를 비롯하여 스페인의 다른 도시에도 몇군데 있지만 이곳 세비야 스페인 광장이 가장 크고 아름답다. 사람의 손으로 제작된 것 같지 않을만큼 섬세하고 웅장하다. 이슬람 건물의 예술양식이다. 1929년 엑스포개장을 기념하며 조성되었다. 다리가 4개 있는데 스페인이 하나로 통합되기 전 나위어졌던 4개의 왕조를 뜻한다. 다리 아래로 연못의 물이 흐르고 분수가 있던 앞면은 공사관계로 좀 엉성하지만 고전의 엄숙함과 미술작품의 향기에 발길이 돌라서지지 않는다. 마리아 루이사 공원이 바로 곁에 있어 걸어서 그곳으로 이동했다.
* 스페인 세비야 마리아 루이사 공원
이사벨 여왕의 동생인 마리아 루이사를 위해 지은 공원이다. 스페인 광장의 바로 앞에 있어 오롯한 첨탑이 담장의 무성한 식물줄기 사이로 보인다. 상당히 넓고 울창한 나무들이 가득차 있어 걷는 걸음이 상큼했다. 산책하는 세비야 시민들과 인어 여인상과 세여자 조각상도 보았는데 그 세여인은 사랑의 표정을 머금고 있어 애절했다. 희망, 기다림, 절망을 상징한 조각상인데 그 표정이 잘 드러나 있다. 우리 인생의 한 단면을 잘 조각한 작품 앞에서 흘러간 날과, 오늘과, 미래를 보며 상념에 젖었다. 한참을 다시 걷다보니 대서양을 항해하던 범선조각상도 높이 솟구쳐 있다.
스페인은 오렌지 세계 4위, 포도 4위 올리브 1위 생산국이다. 공원 곳곳에 오렌지 나무가 있는데 처음에는 신기하여 한 나무 곁에 멈춰 노랗게 매달린오렌지를 바라보았으나, 차츰 더 풍성하게 열린 오렌지 나무를 만났고, 수확하는 사람들이 털어 떨어뜨린 오렌지를 몇개씩 얻어 가지고 왔다. 그 오렌지는 너무 시어서 이 나라에서는 먹지 않는 종류라 하는데, 나는 상큼한 오렌지를 맛있게 잘 먹었다. 많은 시간을 산책하며 스페인의 역사와 문화, 자연 풍경까지 음미한 행복한 여정이었다.
* 스페인 세비야 유태인 마을 거리
오랫 동안 머물러 살았던 아랍인의 잔재다. 좁은 키스 골목과 꽃과 줄기 식물들이 살아서 창문으로 집의 벽면으로 타고 흐르는 생물의 거리다. 산타크루즈 유태인 거리는 사람이 사는 마을이라기보다 요정이 사는 것 같은 고운 마을의 거리다. 이사벨 여왕이 아랍인을 쫒겨내었다. 모두 모로코로 이주했다. 그래도 유태인 마을은 그 옛 정취로 살아서 스페인의 한 골목을 지키고 있다.
* 스페인 세비야 경찰과 말
세비야는 축제의 도시다. 그래서 행사 때는 전통의상도 볼 수 있다. 마차도 볼 수 있다. 나는 마리아 루이사 공원을 돌다가 경찰과 말을 보았다. 정말로 말을 타고 순찰하는 경찰이다. 가끔씩 세계여행 중에 만나는 풍경이지만 오늘 스페인에서 만나는 말과 경찰도 나의 눈에는 신비로게 다가온다. 전시용이 아니라 순찰용인 것 같아 그렇다. 공원을 돌며 관리하는 고풍스런 풍경이다.
* 스페인 세비야 대성당
세게에서 가장 큰 고딕 양식의 건축물로 유럽에서 세번째로 큰 성당이다. 성당의 맨 꼭대기 첨탑인 히랄다 탑은 2000Kg의 청동으로 이루어졌다. 성당의 내부에서도 사진촬영이 가능하여 곳곳을 담아왔다. 콜롬버스의 무덤관, 대성당의 그림들, 조각품들, 스테인드 글라스 유라창 등 돌고 돌아도 멈추지 않는 성당의 역사적 정취가 장엄하다. 1401년부터 1519년까지 120년 동안 건축되었다. 26명의 장인들이 1천명이 넘는 목재 동상을 만들어 금을 입혀 세웠다. 높은 천정의 문양을 보는 거울도 있다. 진품인 보물 왕관도 보고, 안토니오 그림도 보았다. 44개 소성당이 있어 실제로 예배도 드리고 있었다. 우리도 잠시 앉아 종교의식을 보았다. 스러지지 않고 21세기에 옛 모습 그대로 존재하는 대성당은 비록 타국의 유물이지만 세계적 보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스페인 세비야 대성당 히랄다 탑
세비야 대성당의 높은 첨탑이다. 세비야에서 가장 높은 98m의 탑으로 시내 어느 곳에서나 보인다. 로마의 돌을 기초로 만든 전망탑이다. 했다. 상단에는 2천Kg의 청동 조각상이 있다. 34층의 오르막 길을 숨막히도록 돌고돌아 올랐다. 한층마다 오른 단계의 숫자를 벽면에 써놓았다. 처음에는 곧 끝이겠지, 20이란 숫자가 다가오자 또 이제는 끝이겠구나, 했는데 결국 34란 벽면의 숫자가 마지막이었다. 정상에 오르고 보니 세비야의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아름다운 스페인 4위 도시 풍경이 비경이다. 태양의 나라에서 해맑은 태양과 구름의 조화, 싱그런 하늘, 색색의 고운 주택과 건물들, 하나의 예술적 명화다. 천정에는 르네상스식의 거대한 종이 매달려 있다. 12세기에 이슬람의 영향력으로 건축되었는데 세원이 흐르면서 기독교 양식으로 바뀌어 풍향계를 설치한 종탑으로 개조되었다. '히랄다'는 스페인어로 '바람개비'란 뜻이다. 너무 높아서 바라보기조차 아득한 첨탑이다.
* 스페인 세비야 대성당 오렌지 정원
스페인 어디서나 오렌지 나무는 외인을 반긴다. 호텔에서나 식당에서도 오렌지는 마음껏 먹을 수 있도록 풍성하게 베풀어준다. 그 맛은 달고 상큼하여 우리나라에서 먹던 맛과는 차이가 난다. 싱싱하고 당가 높다. 이곳 세비야 대성당에서는 오렌지 나무로 꾸민 정원을 보았다. 줄지어 늘어선 오렌지 나무가 한국의 감나무 농장, 또는 사과나무 농장 같다. 덩실덩실 맺힌 열매와 땅에 떨어져 뒹구는 오렌지들, 내 조국에서는 볼 수 없는 진풍경이기에 두손으로 가득 주워 오렌지의 숨결을 느끼며 이국의 과일향기에 물씬 젖어본다.
* 스페인 세비야 시가지
세비야는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 지방, 집시들이 살던 낭만의 도시다. 명소를 돌아보고 시내에서 점심식사를 했다. 횡단보도를 건너 인도를 걷는데 당나귀 똥이 있었다. 현지 가이드는 그 자리에 지켜 서서 일행들이 밟지 않도록 도와줬다. 당나귀나 노새가 자가용처럼 이용된다는 말이 입증되는 분비물이었다. 시가지의 건물은 유럽풍이다. 웅장하고 조각미가 흐른다. 아름다운 왕궁이 그렇고, 주상복합 상가들이 그렇다. 오렌지 나무는 가로수로 거리에서도 열매를 노랗게 맺고 있다. 남국의 정취를 멋스럽게 드러낸다. 다음의 여행지 코르도바로 가기 위해 버스에 올랐다.
* 스페인 세비야에서 코르도바 가는 길 물에 잠긴 들녘
일정을 변경했다. 세비야에서 코르도바를 거쳐 그라나다로 먼저 간다. 원래 일정은 세비야에서 타리파로 가서 모로코를 먼저 보고 그라나다로 가게 되어 있다. 그렇게 바꾼 이유는 3월 7일~8일 양일간 그라나다 알함브라 궁전에서 G7 정상 회담이 있다는 것이다. 그때는 궁전의 문을 닫아 일반 입장 불가여서 알함브라 궁전을 보기 위해 세비야에서 코르도바에 가서 여행하고 그라나다까지 먼저 가기로 한 것이다. 세비야에서 코르도바까지는 140Km, 코르도바에서 그라나다까지는 170Km다.
세비야에서 코르도바까지는 2시간 소요된다. 시가지를 벗어나자 광활한 대지가 전개된다. 부러운 대륙이다. 초지의 목장, 농촌마을의 붉은 집이 보인다. 기름진 스페인 남부의 땅이다. 하늘의 구름도 예술이다. 아름다운 풍경이 절창이다. 음악을 들으며 달린다. 올리브 나무 농장도 보인다. 비가 많이 와서 잠긴 들녘도 보인다. 나무와 농작물이 물에 잠겨있다. 밭에 심은 것은 대부분 밀이다. 평원의 농토와 녹색 언덕의 농토가 대작이다. 소작은 없다. 저 드넓은 농토가 모두 개인 소유의 경작지다. 개인이 농사 짓는다. 멀리 산이 보인다. 스페인의 상징인 소를 세운 것도 이색 풍경이다. 커다란 나무들도 물속에 발목을 담그고 있다. 지난 겨울,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눈과 비가 많이 온 흔적을 먼 타국에서 느끼고 있다.
* 스페인 코르도바 아몬드 농장의 개화
들녘에, 산녘에 한구으로 치면 복숭아꽃 같은 꽃을 피우고 선 나무들이 보인다. 알고보니 아몬드 나무다. 스페인에서도 아몬드가 생산된다. 아몬드 농장에 줄지어 서서 분홍빛 꽃을 피운 풍경이 아름답다. 지구의 위치에 따라서 재배되는 농작물이 다르고, 자라는 나무와 풀, 꽃도 다름을 볼 때마다 정녕 여행의 보람을 깨닫는다. 이것도 하나의 큰 가르침이 아닌가. 기름진 땅에서 자라는 아몬드 농장의 개화를 보며 작년 미국 여행 중 캘리포니아주에서 보았던 아몬드 나무의 복숭아 같던 풋열매가 떠올랐다.
* 스페인 코르도바 태양열 발전소
세비야와 코르도바가 스페인에서 가장 더운 곳이다. 여름에는 물을 달고 다녀야 한다. 50도가 넘는다. 그 뜨거운 태양열을 에너지로 바꾸는 태영열 발전소가 들녘에 설치되어 있다. 바람부는 곳에서는 풍력 발전소를, 태양의 나라에서는 태양열 발전소를, 인간은 여러가지 뛰어난 지혜로 자연을 잘 활용하며 산다. 그냥 흘러갈 수 있는 자연을 에너지로 바꾸는 저 풍경이 위대하다.
* 스페인 코르도바 신시가지
코르도바는 인구 33만명의 아담한 도시다. 다리를 사이에 두고 구시가지와 신시가지로 나누어져 있다. 앞트가 현대식이고 깨끗하다. 도시 입구에 스페인에서는 단 하나의 백화점, 그것도 국영으로 운영된다는 엘고르떼 잉글리쉬 백화점의 광고간판이 서 있다. 야자수 가로수 풍경이 아름답다.
* 스페인 코르도바 과달기비르 강변 라깔라오라 탑
과달기비르강의 다리 끝에 있는 라깔라오라 탑은 망루였다. 유사시 경보 초소용 건물이었다. 강물은 흙을 풀어놓은 것 같은 황토물이다. 비가 많이 와서 그렇다. 2000년의 역사를 지닌 도시다. 한 도시를 지키기 위해 세웠던 작은 성을 보는 것이다. 시민들은 여유롭게 강변을 걷고 있다.
* 스페인 코르도바 과달기비르강 다리
과달기비르강은 세비야에서도 보았다. 길이도 130Km로 길고 광폭의 강이다. 여기서 만난 강도 우람하다. 이 다리를 경계로 저 건너는 구시가지다. 2100년 전의 다리를 건너고 있다. 코르도바에서는 '라파엘'이라는 이름의 소유자가 70%다. 수호천사라서 그렇다. 다리의 중앙에도 라파엘 천사 동상이 서 있다. 지진 났을 때 도와 줬다고 운 것이다. 이것 말고도 곳곳에 수호천사 라파엘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다리 아래 강물은 홍수난 풍경으로 세차게 흐르고 있다.
* 스페인 코르도바 구시가지
이 도시는 이슬람 왕국의 수도였던 곳이다. 그후 기독교 세력으로 쇠퇴하였지만 도시 전체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또한 로마 유적지가 많은 나라가 스페인이다. 이태리와 별 차이가 없다. 땅을 파다가 로마 유적이 나오면 공사를 중단한다. 그런 곳이 많다.과달기비르강 다리를 건너 구시가지에 들어서자 육중한 건축물이 오랜 역사의 향취를 풍긴다. 마차도 달리고 시대를 거슬러 역사를 재현하고 있다.
* 스페인 코르도바 메스키타 회교사원
이슬람교와 기독교가 접목된 사원이다. 그래서 이름도 회교사원과 대성당 두가지로 부른다. 현재는 성당으로 아랍인의 입장을 불허한다. 그 옛날 2000여년 전, 코르도바의 전성기를 그대로 품고 있다. 정원에는 아랍인 상징인 오렌지, 사이플러스, 올리브, 종려나무(야자나무)가 골고루 심겨져 있다. 예배 드리기 전에 모인 곳이다. 사원 안에는 야자나무를 상징하는 야자나무 모양의 가둥이 850개 있다. 기둥 숲이다. 코르도바 번성기 때의 무늬가 곳곳에 남아 있다. 이런 역사 유적지에는 스페인 가이드가 동반되야 입장이 허락되어서 스페인 여인 가이드와 함께 들어왔다. 회교사원 안에 기독교 성당이 있어 두 종교의 조화를 이룬 모습이 아름답다.
* 스페인 코르도바 유태인 마을 거리
세비야의 유태인 거리와 유사하다. 세비야 대성당 주변이 모두 유태인 마을 거리였듯이, 이곳 코르도바 메스키다 사원 주변 모두 유태인 마을 지구다. 그런데 코르도바는 세비야 때문에 피해 본다고 여긴다. 세비야의 유태인 거리는 너무 치장하였다는 것이다. 사실 세비야는 너무 꾸며서, 코르도바의 유태인 거리가 진짜로 인정받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이곳 거리는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는 자부심이 대단하다. 여기가 정통 유태인 마을의 거리란다. 좁은 골목과 건물 외벽에 매단 꽃화분이 아기자기 하면서 참으로 아름답다.
* 스페인 코르도바 대학
코르도바 구시가지에서 코르도바 대학 건물을 보았다. 처음에는 음악학원이었다가 병원이었다가 현재는 대학이다. 정원에는 최초의 백내장 의사인 알가뻬끼의 동상이 있다. 네로 황제의 스승인 세네까라는 사람이 코르도바인이다. 그는 '사랑 받기를 원하면 사랑을 나눠라'는 명언을 남겼다. 또한 그는 네로 황제에게 자살을 유도했다. 스페인에서 로마의 역사를 듣는다. 그 만큼 스페인과 로마 깊은 고리가 이어져 있다. 코르도바 대학 건물 앞 좁은 도로에는 고전적인 마차가 관광객을 싣고 달린다.
* 스페인 코르도바 과달기비르 강변 풍경
오랜 역사를 품은 도시 코르도바, 모두 둘러보고 버스를 타기 위해 과달기비르 다시 강변에 왔다. 자전거 전용도로가 따로이 구분되어 있고 자전거 마크가 선명하다. 강변 높은 둑에는 코르도바 시민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다. 나이가 지긋한 퇴직자들의 여유로운 모습도 보인다. 내 조국 서울의 아름다운 한강변 풍경과 유사하다.
스페인의 경제규모가 2008년에 세계 8위였다. 그래도 참 검소한 나라다. 사회보장 제도가 잘 되어 있다. 세금을 월급의 20%~50% 거둔다. 부조금이 없는 나라다. 보험제도가 잘 되어 있어서 장례식도 모두 보험으로 치른다. 죽을 때까지도 모두 보험으로 생활한다. 집을 사기 쉽다. 장기대출 50년 융자로 돈을 빌려준다. 퇴직 해도 갚는다. 매달 70~80유로씩 집에 대한 보험료를 낸다. 한인교포 가이드는 집에 대한 보험료를 500유로 낸다고 한다. 그랬더니 우박이와서 유창문을 깨면 3천 유로 받고, 여름에 냉장고 음식이 상해도 모두 보상이 나온단다. 집안 물품 모두 고장시 보상해준다는 것이다. 열쇠를 분실했는데 100유로가 나왔단다. 집보험료가 결코 비싸지 않다고, 걱정없이 산다고, 한국보다 보험제도가 확실히 잘 되어 있다고 말한다.
스페인의 병원은 모두 나라 소유다. 개인소유는 없다. 한국인이 다쳐도 스페인 보험으로 치료해준다. 수술, 감기 등 모두 100% 공짜다. 보험료는 월급의 20%를 지불한다. 400만명 실업자 사회다. 4600만명 인구 중에서 10%가 실업자다. 현재 스페인이 위태롭다고 TV세계뉴스에서 보도해도 나라는 부강하여 걱정없다고 한다.
가장 선호하는 직업은 공무원이다. 오전 8시에 출근하여 오후 3시까지만 근무한다. 근무 시간도 좋아서 더욱 선호한다. 회사는 오전 8시부터 오후 9시까지 근무다. 1일 근무시간은 대개 8시간이다. 회사원도 국가에서 월급을 지불한다. 의사도 공무원이다. 오전에 국가병원애 근무하고 오후엔 개인 벼원에 근무한다. 공무원도 투잡(Two Job)을 갖는다. 3시 이후는 개인일을 한다. 정년은 55세~65세다. 부과세는 공산품이 16%, 농산품은 7%다.
한국인이 살고 싶어 하는 나라는 1위가 자국으로 한국이고, 다음은 노력만 하면 잘 사는 미국이며, 세번째 나라는 날씨와 환경이 좋고 살기좋은 스페인이란다. 중국인 불법체류자가 많다. 그런 사람과 차별하여 보이기 구이해 시민들은 치장을 하고 다닌다. 세계 월드컵 축구시합에서 스페인과 한국이 대결하여 한국이 이겼을 때 교포들은 그 아무도 코리안이라고 하지 않았단다. 이제는 괜찮다는 말에 안심했다. 스페인에 대하여 많은 것을 배우는 보람된 여정이다.
* 스페인 코르도바에서 그라나다 가는 길
그라나다는 해발 770m 지역으로 아름다운 안달루시아 지역이다. 그래서일까. 코르도바를 떠나 그라나다로 가는 길은 산을 자주 만난다. 석회암 뽀얀 살이 드러나고 있는 산봉우리가 진퐁경이다. 그런 산자락 아래는 온통 올리브 나무 농장이다. 크고 작은 올리브 나무가 줄맞춰서 심겨져 있다. 올리브 나무는 심은 후 25년 후에야 수확한다. 자손을 위한 나무다. 도로 양옆에 잇는 키가 작고 굵은 올리브 나무들이 보통 250년 수령의 올리브 나무란다. 전 들녘이 올리브 나무다. 나무가 죽고 나면 그릇을 만든다. 그래서 효자나무다. 올리브유 1리터에 5~10유로다. 어렸을 때 밑가지를 잘라서 키를 작게 기른다. 열매를 털기 쉽게 하기 위해서다. 올리브 세계1위 생산국이다. 기계가 들어가서 흔들면 다 쏟아진다. 그래서 일렬로 넓게 심는다. 스페인의 주요 농작물이다. 비가 가끔씩 내린다. 해, 구름, 비가 반복되는 신기한 나라다.
2010년 3월 5일 금요일 스페인 그라나다, 론다, 타리파, 모로코 탕헤르
* 스페인 그라나다 호텔
지난 밤, 코르도바에서 170Km의 거리를 2시간 동안 달려 오후 7시 30분에 그라나다 호텔에 도착하여 유숙했다. 아침 6시에 모닝콜, 7시 식사, 8시 출발한다. 오늘 일정은 바쁘다. 배를 타야 해서 그렇다. 배에 버스가 단 2대만 승선 가능하다. 오후 7시 페리를 예약했다. 그라나다의 알함브라 궁전(나사렛 궁전)은 9시 30분까지 입장해야 한다. 그리고 중식 후 언덕 위 마을인 론다로 간다. 그라나다에서 론다까지는 2시간 소요된다. 론다에서 또 30분 정도 소요되는 타리파로 간다. 타리파에서 탕헤르로 건너 가서 호텔에 투숙한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호텔 밖으로 나가보았다. 어둠 속에서 주변을 돌아보며 아침 운동을 했다.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까지는 409Km라는 교통 표지판이 서 있다. 도로변이어서 차들이 새벽의 가르며 달린디. 호텔은 아담하고 예쁘다. 호텔 복도에서 보이는 산은 우람하다. 평균 고도가 높다는 그라나다 도시임을 나타내고 있다.
* 스페인 그라나다 새벽 풍경
그라나다 주 전체의 인구는 100만명이고 도심의 인구는 23만 4천명으로 안달루시아 17개주의 수도 역할 하는 도시다. 그라나다에서 마드리드까지는 409Km다.시에라네바다 산맥의 일출이 비경이다. 산정 설경도 장관이다. 산 아래는 마을이다. 5층 이상은 못짓는다. 보통 4층이다. 눈 덮인 시에라네바다 산맥 기슭에 위치한 그라나다(Granada)는 700년경부터 스페인을 8세기 동안 다스렸던 이슬람 왕국의 최후 거점지였다. 그때의 역사 유적이 도시를 빛내고 있다. 시내에는 3개의 언덕이 있다. 평균고도가 해발 780m로 높은 도시다. 여기서 바르셀로나는 900Km의 거리다. 그라나다는 '석류'란 뜻의 이름으로 선택받은 도시다. 석류가 많이 생산된다. 480m의 높은 산이 있다. 얼음이 녹지 않는 산정이다. 지중해도 50Km의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다. 산과 바다를 공유하여 스키도 타고 배도 탄다.
스페인의 원주민은 겔트족이다. 침략을 잦아서 여러 민족이 섞여 있어 복잡한 국가다. 로마가 500년~600년 지배하여 그 영향이 크다. 한때는 로마 시민이 되어 로마어를 시용했다. 스페인 하이웨이는 로마시대 때 건설된 것이고, 로마 유적지도 많다. 모든 학교에서 카톨릭 교리를 배운다. 로마가 쇠퇴하면서 게르만족이 들어왔다. 585년에 스페인 수도가 똘레도로 지정되었다가 아랍인들이 코르도바로 수도를 이동시켰다. 세비야의 스페인 광장은 아랍문화의 영향으로 건축되었다. 예쁜 타일, 문양 등이 그렇다. 사자의 나라, 성의 나라의 여왕은 이사벨이다. 스페인 국경일은 10월 12일이다.
안달루시아 주요 8개 도시 중에서 우리는 세비야, 코르도바, 그라나다, 말라가, 4개 지구를 본다. 닥터지바고 촬영지가 스페인이 80%다. 아라비아 로렌스도 스페인 광장과 그 주변 공원에서 촬영했다. 영화에 나오는 칼은 거의 철이 많은 똘레도에서 생산한다. 아침 일찍 알함브라 궁전으로 가고 있다. 멀리 보이는 산이 우람하고, 구름도 우람하다. 그라나다의 새벽 풍경은 그렇게 열리고 있었다.
* 스페인 그라나다 알함브라 궁전
그라나다는 세계인이 많이 찾아오는 관계로 예약제도다. 알함브라 궁전 관람을 예약하지 않으면 입장불가다. 우리는 미리 예약된 상태다. 오전 9시부터 입장이다. 오늘 알함브라 궁전을 보고 론다로 이동하여 투우장으로 본 후 타리파로 가서 페리를 타고 모로코로 간다. 알함브라 궁전은 스페인을 지배하던 최후의 이슬람 왕조가 스페인 국민들에게 1492년 1월 콜롬버스의 신대륙 발견이 있던 해, 카톨릭 왕에게 넘겨준 궁전이다. 1200년대부터 8세기 동안 지배당한 이슬람에서 벗어나 기독교를 국교로 하는 스페인이 탄생 된것이다.
알함브라 궁전은 아랍어로 '붉은 성', '빨간 궁전'이란 뜻이다. 이라는 뜻이다. 석벽이 붉은 철을 포함하고 있어서 그렇다. 14세기에 지어진 이 건물은 세 개의 정원을 중심으로 정원 형식의 건축물이다. 1800m의 높이 망루 탑이 32개가 있고 알카사바 성채, 왕궁, 카를로스5세 궁전, 나사렛 궁전으로 구성되어 있고 헤네랄리페 정원, 천국의 정원, 흰색 여름궁전이 주변에 있다. 그라나다의 상징이자 이슬람 문화의 최고 걸작품이다. 1492년 이사벨 여왕과 그 남편 페르난도가 그라나다를 정벌했다. 그 당시의 수도는 똘레도였다. 콜롬버스가 왔을 때 항해 지원을 중시했기 때문에 이사벨 여왕은 자신의 보석함을 주었다. 콜롬버스는 이탈리아 제노바 사람이다. 직물을 짜던 가장이었다. 20세 때 항해를 시작하였는데 편지를 쓸 때 로마 글이 아니라, 스페인 글씨로 바르셀로나 언어를 사용했다. 포르투칼 귀족처녀와 결혼했다. 콜럼버스가 이사벨라 여왕의 후원으로 신대륙을 발견한 시점과 맞물려 있고 이때부터 ‘무적함대’로 불리는 근대 스페인이 시작되었다.
알함브라 궁전은 30분 동안 400명 이상 입장금지다. 오전 8시 30분~밤 8시 30분까지만 오픈하다. 하루에 6000명만 입장 시킨다. 한국인의 입장료는 16유로다. 예약을 못하고 와서 헤네랄리페 정원만 보고 가는 사람도 많다. 드넓은 궁전의 곳곳을 둘러보았다. 알함브라 궁전은 여러개의 방이 있다.이사벨 여왕이 지은 방도 있다. 옛생활 유적지, 왕가의 집기들, 왕이 사용하던 방, 아름다운 이슬람의 벽면 문양, 물이 고인 정원 등등 잘 보존된 궁전이다. 돌고 돌아 궁전에 들어갔다. 미로를 만들어 적군이 들어올 때 분산시켰다. 할렘과 사랑했다하여 36명을 죽인 방도 있다. 할렘 궁전은 여자만 출입이 가능했으며 24개의 기둥이 있다. 목욕탕, 귀대고 속삭이던 비밀의 방도 있다.
현재는 알카사바 성채에는 병사들이 지키고 있고 망루에 올라가 그라나다의 전경을 본다. 이슬함인들은 돈이 있어도 없는 듯한다. 겉은 허술해도 속은 화려하다. 문양이 곱다. 대리석 가루와 석회 가루를 섞어서 벽면의 무늬를 조각했다. 궁전 주변은 국가 땅으로 사는 것은 가능하나 집을 팔 수는 없다. 그래서 자손 대대로 산다. 그라나다에서 알함브라 궁전을 보지 않으면 안된다며 일정을 바꾸어 이곳을 먼저 온 이유를 알게 되었다. 이슬람 역사의 산실이며 스페인의 기름진 명소다.
* 스페인 그라나다 알바이신 지구
그라나다 도시의 산자락 아래 알함브라 궁전과 여름 궁전 사이 하얀 마을이 알바이신 유태인 지구다. 알함브라 궁전과 마주보는 언덕에 위치하고 있는 알바이신 지구는 13세기에 처음 지어졌으며 30여개의 회교사원이 있다. 도시의 교회 대부분은 이곳에 만들어졌다. 자갈이 깔린 골목에는 집시들이 있다. 바깥 세상으로부터 은둔시키는 높은 벽들은 이곳의 특징이다. 알함브라 궁전에서 바라본 마을은 청초하고 아름다웠다. 곳곳에 우람한 사이플러스 나무가 솟구쳐 있어 더욱 고운 풍경이다.
* 스페인 그라나다 헤네랄리페 정원
헤네랄리페 정원은 14세기 초 그라나다 성주의 여름궁전이 있는 곳이다. 알함브라 궁전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있는고 입구에서부터 사이프러스 나무의 길이 웅장하게 뻗어있다. 작은 운하 주위에서 뿜어내는 크고 작은 분수와 흐르는 물이 한결 시원함을 느끼게 한다. 계절에 따라 아름다운 꽃들이 번갈아 핀다. 매일 아침이면 신선한 생선 시장이 열리고 있다. 높은 언덛 위에 있어 그라나다 시내가 다 내려다 보였다. 저 건너 알함브라 궁전도 비경으로 보인다. 여행의 여독을 풀어주기에 충분한 명소였다.
* 스페인 그라나다 헤네랄리페 정원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 분수
여름궁전과 헤네랄리페 정원, 알함브라의 궁전 분수는 대단하다.시에라네바다 산맥의 물줄기가 우물을 많이 형성하고 분수대의 물을 대준다. 알함브라 궁전은 오아시스처럼 물과 뗄 수 없다. 왕이 산책하던 정원이다. 직사각형의 연못에서 분무하는 분수는 헤네랄리페 정원의 백미다. 타레가는 아름다운 이 분수 앞에서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을 작곡했다. 사랑을 속삭이는 애절한 곡이다. 이 분수에서 또르르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에서 영감으로 탄생시킨 명곡이다. 아직도 멈추지 않는 사랑의 물방울은 이곳을 찾아오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평화와 행복을 선사한다. 버스로 이동할 때 귀에 낮은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을 들으며 갔다. 분수의 물방울 소리를 상징하는 아름다운 선율이 환상적이었다.
* 스페인 그라나다 헤네랄리페 정원에서 본 알함브라 궁전
알함브라 궁전과 헤네랄리페 정원은 서로 마주보며 비경을 선사한다. 언덕에 위치하여 저 아래로는 그라나다 시가지가 또한 비경으로 다가온다. 헤네랄리페 정원에서 본 알함브라 궁전은 상당히 큰 면적의 성으로 둘러싸여 있다. 건축물도 웅장하고 앉은 폭도 넓다. 세월을 거슬러 이슬람 왕조의 전성기를 바라보고 있다.
* 스페인 그라나다 들녘 풍경
시에라네바다 산맥의 줄기가 걸쳐 있는 그라나다의 들녘은 비경이다. 구름 드리운 산정의 얼음과 빙원도 멀리서 한껏 명화를 그려낸다. 산과 마을의 조화가 정겹고 아름답다. 그라나다에서 론다로 떠나고 있다. 그라나다 도심을 벗어나자 잘 가꾸어 놓은 농토와 아몬드 나무 울타리, 거대한 올리브 농장이 전개된다. 또한 종이를 만든다는 올곧은 나무가 아직 잎을 피우지 않은 채 농장에서 군락을 이루며 하늘로 솟구쳐 있다. 스페인은 각 지역마다 들녘에 심은 나무 종류가 다양하다. 산을 떠나지 않는 풍경이 어쩌면 내 조국의 어느 산촌 마을과 유사하여서, 참으로 사랑스런 그라나다의 들녘이다.
* 스페인 그라나다 휴게소 중식
그라나다에서 론다로 이동할 때, 그라나다 시가지를 조금 벗어나자 아름다운 언덕에 로아 휴게소가 있었다. 우리는 그곳에서 중식으로 스페인 전통요리인 먹물 꼴두기 요리를 먹었다. 검은 먹물을 제거하지 않은 채 그대로 까맣게 삶은 음식인데 모양은 좀 이상해도 구수하며 맛있다. 로비에는 스페인의 그라나다 도시를 중심으로 풍물을 이어 만든 대형사진 안내도가 있다. 바깥 풍경은 여전히 우람한 시에라네바다 산맥이 그라나다 도시를 감싸 안으며 절경을 자아낸다. 여기서 론다까지는 꼬불거리는 국도다.
* 스페인 론다 올리브 농장
그라나다를 떠나 론다에 가까이 다가오자 산은 점점 낮아지고 예쁜 대지가 보인다. 낮은 산녘에도 평원에도 온통 올리브 나무 농장이다. 스페인 여행 중 눈이 저리도록 보는 올리브 나무들이다. 미국서부 여행에서 캘리포니아주, 아리조나주, 네바다주를 거치며 눈이 저리도록 보았던 모하비 사막이 이곳 스페인에서는 올리브 나무도 대치 된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눈만 유리창 밖으로 돌리면 올리브 나무가 지천이다. 지구의 토양은 결코 동일하지지 않으며 골고루 특색있는 토양을 각 국가에 선사하여 서로 도우며 살고 있다는 감사함이 스친다.
안달루시아의 코르도바, 세비야, 말라가, 론도 지역에 폭우가 내렸다. 요즘 세계 TV뉴스에서 나오는 폭우의 수해지역이 이곳 지방이다. 스페인의 산업은 관광업이며 그것이 주요 수입원이다. 1년에 1만 6천명의 관광객이 온다. 스페인의 특산품은 대리석과 수은이다. 수은 생산은 세계 1위다. 코르크 나무 수출도 포르투칼이 70%, 스페인이 30%다. 가죽신발(캔퍼), 향수, 그외 가죽제품, 마요르까 섬에서 생산하는 진주도 특산품이다. LG, 삼성기업은 없다. 모든 가정에는 차가 2~3대씩 있다. 대개 대형차를 소유하는데, 주중에는 소형치로 근무하고 주말에는 가족여행을 대형차로 간다.
올리브 농장이 없는 들녘에는 구릉의 초지와 태양열 발전소, 풍력 발전소가 고운 풍경을 선사한다. 이런저런 이야기로 , 들녘 풍경으로, 스페인에 대하여 배우며 지루하지 않은 버스 여정이다.
* 스페인 론다 시가지
론다는 인구 3만 7천명, 해발 740m에 위치한 말라가주의 작은 도시다. 협곡 사이의 절벽 도시다. 로마가 지어줬다. 1485년에 이사벨이 정복했다. 길이 험해서 잘 찾아 오지 않는 도시다. 누에보 다리를 경계로 신시가지와 구시가지로 나뉘어져 있다. 시가지의 도로는 좁아서 차를 주차할 곳이 지정되어 있어 15분을 도보로 걸어서 누에보 다리에 가야 가야 된다. 왕복 30분을 걸어야 한다. 그래서 이곳에서 시간이 좀 걸린다. 론다에서 1시간 정도 머물 예정이다. 다음의 여행지 타리파까지는 여기2시간 30분 소용된다. 가로수로 선 올리브 나무가 싱그럽다. 노란 열매가 곱다. 도시의 규모는 작아도 건물 하나하나는 다부지고 거리 표정도 활기차다.
* 스페인 론다 따호강 누에보 다리
론다 시가지를 한동안 걸어 내려갔을 때 절벽 위에 함성 같은 다리가 있었다. 협곡을 다리로 이어서 신시가지와 구시가지를 이었다. 다리 건너가 신시가지다. 누에보 다리의 높이는 98m로 아득하다. 18세기 말 40년 동안 건축했다. 보기만 해도 두려운 아치형의 수로 기둥이 서 있고 주변에 깊은 연륜을 말해주는 늙은 절벽의 살점과 절벽을 타고 오르는 이끼와 풀들, 선인장이 새로운 세계를 이루고 있다. 따호강은 그리 크진 않지만 계곡 사이로 도란도란 흐른다. 강 건너 보이는 마을 풍경이 아름다운 전원의 향기다.
* 스페인 론다 투우장
스페인은 투우로 유명한데 그 유래는 농사 풍년 기원에서다. 이곳 론다 투우장은 18세기 말에 건축한 스페인에서 가장 오래된 스페인 최초의 투우장이다. 1572년에 필립이 기마학교를 세운 것이 투우장의 탄생 동기다. 3월에서~10월까지 매주 일요일에만 투우장을 개장한다. 론다 투우장이 마드리드에 가장 큰 투우장이 있는데 24000명을 수용한다. 스페인, 포르투칼, 중남미에서 투우를 즐긴다. 리베리아 반도 모양도 소가죽 모양이다. 소에서 머리와 꼬리를 떼면 똑같다.
스페인에서 투우는 스포츠가 아니라 문화예술로 취급한다. 투우사 3명이 20분 동안 6마리를 사망 시킨다. 소 한마리가 500~600Kg이다. 60Kg의 인간이 거대한 소와 대결한다. 말이 소를 무서워 하므로 눈을 가리고 갑옷을 입혀서 타고 들어가 소에게 접근한다.첫번째 투우사가 투창을 하면 다음 투우사가 나와 투창하고 이런 식으로 소를 쓰러지게 한다. 가장 빠른 시간에 죽여 주는 게 투우의 예술이다. 누에보 다리를 돌아보고 투우장의 정문과 후문 등을 자세히 들러보았다. 커다른 소동상이 금방이라도 투우장으로 뛰어들어갈 기세로 서 있다.
* 스페인 론다에서 타리파 가는 산길
론다에서 타리파까지는 140Km로 2시간 30분 소요된다. 구불거리는 산길을 따라서 간다. 점점 깊은 산길로 접어든다. 론다에서 타리파 가는 산길은 험악하다. 처음에는 산이 참 많구나, 했는데 한국의 강원도를 여행하는 느낌이다. 크고 작은 산들이 계속 연결된다. 도로는 모두 산에 있어서 높은 산꼭대기에 오를 때는 두렵기도 하다. 우리의 버스 기사, 포르투칼인 41세 빅도르는 정말 운전을 안전하게 잘한다. 참으로 고맙다. 유로버스는 값도 비싸고, 운전기사도 아주 능숙하다. 계속 깊은 산을 넘어서 간다. 내 조국 강원도의 첩첩산중 비경을 타국에서 본다. 더러는 석회석으로 하얀 눈 같은 산도 있다. 구불거리는 산길도로는 한시도 멈추지 않고 이어진다. 스페인 음악을 들으며 간다. 아름다운 여정이다. 끝없는 신길, 스페인의 산이란 산은 다 이곳에 몰아 놓은 것 같다. 스페인은 원래 산은 산끼리 모여 있고, 들은 들끼리 모여 있단다. 산녘에도 올리브 나무가 있다. 유럽 여행에서 보기 드물게 산을 많이 본 여정이다. 먼 후일에도 잊지 못할 아름다운 시간으로 각인되고 있다.
* 스페인 타리파 오렌지 농장
산 사이로 평지가 나올 때는 오렌지 농장이 보였다. 여기는 스페인 남부다. 그래서일까. 올리브보다 오렌지 농장이 자주 보인다. 포르투칼과 스페인 여행에서, 특히 스페인 여행에서 오렌지를 참 많이 먹는다. 맛도 달고 새콤해서 입안에서 그윽한 향과 함께 살살 녹는다. 두고두고 잊지 못할 오렌지다. 밭 가득 전개되는 오렌지 나무에는 노랗게 오렌지가 달렸다. 내 고향 충남 대천에 갈 때, 충남 예산쯤 지날 때면 보이던 사과 과수원 같은 향수다. 아름답고 풍요로운 정경이다.
* 스페인 타리파 초지의 목장
산길을 넘어 타리파 근처의 마을에 들어오니 초지의 목장이 있다. 깊고 높은 산중에서는 우람한 산뿐, 아무 것도 없더니 얕으막한 산마을에서는 초지 위의 소와 말, 양떼들의 한가로운 정경이 평화를 선사한다. 하얀 주택단지와 파란 초지의 조화가 비경이다.
* 스페인 타리파 휴게소
아직도 산은 끝나지 않았다. 그러나 산은 서서히 시야에서 멀어지고 있다. 긴 도로가 열려 있다. 이곳 휴게소에서 모로코의 탕헤르 페리호와 낙타 투어를 선전하는광고판을 보았다.아프리카에 가까이 왔음이다. 타리파에서 지브롤터 해협 짧은 바닷길만 건너면 아프리카 모로코다. 또 주유소의 간판에 'elf'라고 씌여진 것이 인상적이다. 휴게소 주유소에서 자주 보는 글씨다. 스페인의 석유회사 그룹 elf를 표기한 것이다. 화장실을 들러 상점도 둘러보고, 밖에 나와 심호흡하며 이국의 정취를 한가득 보듬었다. 모두가 감사하고, 아름다운 순간순간들이다. 우리 부부의 세계여행을 허락하는 주변 환경들에 대하여 항상 깊은 감사드린다. 두 아들에게 감사하고, 시간에게 감사하고, 어디 감사한 것이 한,두가지인가. 이번 여행은 특히 두 아들이 아빠의 환갑 기념으로 보내준 여행이어서 더욱 흐뭇하고 감사가 깊다. 이제 모로코행 페리호를 타기 위해 스페인 항구도시 타리파로 힘차게 달린다.
* 스페인 타리파 산녘 풍력발전소
산 위에 풍력 발전소 대형 바람개비들이 줄지어 서서 돌아가고 있다. 바람부는 곳이면 세워둔 모습이 풍요롭다. 구불러진 산능선을 따라 연결된 행렬이 장관이다. 멈춰 있는 것은 고장났거나 점검 중이란다. 지브롤터 해협의 바다 바람이 불 때, 한올마저 잡아 에너지로 생산하고 있는 것이다. 푸른 산과 하얀 풍력계가 한폭의 고운 수채화다.
* 스페인 타리파 해변 정경
론다에서그토록 길고 장엄한 산을 넘어온 타리파, 아직도 끝나지 않은 산자락 아래로 바다가 보인다. 그 길고 험한 산길들은 스페인과 모로코를 잇기 위한 끈이 아닌가 싶다. 날이 맑으면 스페인에서 모로코가 보인다. 타리파에서 탕헤르까지는 24Km, 아주 가까운 거리다. 더 가까운 곳은 12Km 거리다. 아프리카는 희망의 땅인 스페인을 바라보며 산다. 모로코를 탈출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아이는 되돌려 보내지 않는다. 탕헤르에서 투숙하고, 타임머신을 타고 보는 것 같은 미로의 도시 페스를 거쳐, 행정수도인 라바트를 보고, 경제도시 카사블랑카까지 간다. 모로코에서는 한국인 현지 가이드가 나와서 끝까지 우리를 인도한다. 모로코의 화장실은 1회 사용에 50센트씩이다. 짐꾼도 1유로씩 주어야 한다. 그래서 2일간 사용할 그런 비용으로 5유로씩 거두었다. 자꾸 바다가 보일 때 마음은 벌써 아프리카로 다가간다.
* 스페인 타리파 해변도시
타리파 시가지에 들어왔다. 해변도시는 아담하고 곧곧의 야자수가 아름답다. 스페인 타리파에서 모로코 갈 때는 14Km의 바다를 쾌속선으로 1시간 간다. 타리파에서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서 아프리카 북부 도시 탕헤르로 간다. 일반선은 3시간 간다. 날씨가 좋지 않으면 못간다. 일정을 바꾸기도 하는데 가다가 배가 고장 나기도 하고, 파도가 심하게 치면 못나오기도 한다. 그래서 모로코는 긴장하며 간다. 모로코는 한국의 60년대다. 차량이 적고 횡단보도도 적다. 그래서 사람들이 하이웨이를 대화하며 걸어다닌다. 모로코는 화장실, 음식 등 모든 것이 열악한 환경의 나라다. 모든 생활을 '인샬라', 즉'하나님의 뜻대로' 그렇게 한다. 그런 사고방식으로 사는 나라가 모로코다.
아프리카에 속한 나라지만 피부가 완전히 검은 것은 아니다. 아랍민족이 섞여서 거무스름한 인종이다. 외적 침입이 잦았던 나라여서 적응을 잘 한다. 그래도 스페인과는 나쁜 감정 없이 산다. 스페인도 이웃사촌으로 생각한다. 페리표를 잘 보관해야 한다. 왕복표다. 모로코에서 올 때는 낮 2시 페리호를 탄다. 모로코는 벽에 바퀴벌레가 기어다니기도 하고, 도마뱀이 들어오기도 한다고 놀라지 말란다. 비가 많이 와서 도로를 돌아서 갈 수도 있단다. 그러면 시간이 많이 걸린단다.
모로코는 어떤 나라일까. 아프리카의 북동부 이집트는 가 보았는데, 아프리카의 북서부 모로코는 어떤 나라일까, 호기심이 한가득 출렁인다. 많이 배우고 가야지. 작고 열악한 나라라고 하지만 그런 속에서도 힘차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가슴에 담아와야지. 여행은 가장 작은 투자로 가장 큰 효과를 얻는 교육이라 했다. 책에서 백번 보는 것보다, 한번이라도 눈으로 보는 것이 낫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끝없이 세계로 세계로 달려가고 있다.
* 스페인 타리파에서 모로코 탕헤르행 페리호
스페인에서 모로코를 가는 대형 선박이 항구에 들어와 있다. 탕헤르에서 모로코까지 35분 걸린다는 문구와 파랗고 빨간 색상의 디자인이 아름답다. 모로코 회사에서 운영하는 페리호다. 비가 오거나 파도가 치거나하면 운항 시간이 불규칙하다. 아직은 어두워가는 저녁이지만 비가 오지는 않는다. 여객선 터미널에서 배표를 받고, 여권을 가이드에게 주었다. 나라에서 나라로 넘어가는 여정이라서 비행기 탑승 때처럼 짐 수색과 함께 여권수속을 밟아야 한다. 오후 7시, 어둑어둑할 때 배에 승선했다. 우리들의 직업을 모두 '박사', 혹은 '교사'로 적었단다. 만일 배 안에서 검열할 때 직업을 물어보면 그렇게 대답하란다. 그렇게 중요한 건 아니지만 하나의 통과의례란다. 유럽주에서 아프리카주로 넘어가는데, 아무리 사이가 좋은 두 나라라 하지만 어디 쉬운 마디겠는가. 나는 먼먼 나라 아시아인이다. 탕헤르를 향한 걸음으로 배에게로 갔다.
* 스페인 타리파에서 모로코 탕헤르행 배 승선
타리파에서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서 아프리카 북부 도시 탕헤르로 간다. 페리호에 승선했다. 버스도 통채로 배 안으로 들어간다. 2층으로 올라갔다. 드넓은 선실 내부에는 매점과 의자들이 승객을 기다린다. 중앙에는 갑판으로 나가는 계단도 있다. 줄을 서서 검색을 받았다. 검색원의 동작이 느려서 시간이 많이 걸렸다. 40분 정도 걸리는 승선시간을 검색대열에서 기다리다가 거의 다 보냈다.
지브롤터 해볍의 바다에 비가 내린다. 비가 내린다. 어둠의 바다, 선창에는 빗물이 흐르고 바깥 풍경을 볼 수 없다. 다시 스페인으로 돌아올 때는 낮 2시 배를 탄다하니 그때 풍경을 보면 되리라. 호기심 많은 나는 배의 곳곳을 다니며 둘러보았다. 꽉찬 의자들, 화장실, 음식을 파는 가게 등 세련된 선실의 정경이다. 모로코에도 삼성, LG 등 한국제품이 들어와 있단다. 저 멀리 아프리카 땅의 항구도시 불빛이 눈에 들어온다.
* 모로코 탕헤르 항구 하선
어둠 속에서 아프리카 모로코 땅에 발걸음을 내딛었다. 비가 와서 바닥이 축축하다. 모로코는 스페인보다 1시간, 한국보다는 9시간이 늦다. 타리파에서 7시가 모로코 시각으로는 6시다. 입국수속을 밟고 여객터미널을 나왔다. 아프리카 모로코의 교포 가이드 김이랑을 만나, 버스가 사람보다 늦게 나오는 관계로 한동안 밖에서 기다렸다. 여기는 북서 아프리카 나라 모로코다. 이슬람교인의 전통 옷인 히잡을 두른 여인들이 많다. 남자는 꼴두기 모양의 질라바 옷을 입은 사람도 있다. 가장 많은 사람들이 드나드는 항구도시다.
모로코 사람들은 스페인에 와서 1년을 벌면 10년을 살기 때문에 아이들은 버스의 타이어에 끼어서 목숨 건 탈출을 시도한다. 비참한 현실이다. 한국의 7배, 사하라 분쟁지역까지 합하면 9배의 나라다. 이동거리가 많다. 아랍국가로 아랍어를 쓴다. 이곳은 방언을 사용한다. 프랑스 식민지여서 프랑스어도 쓰고, 스페인어도 쓴다. 호텔로 이동하며 모로코에 대하여 들었다. 내일은 모닝콜을 5시 30분, 그리고 6시까지는 짐을 싸서 방문 앞에 내놓으란다. 포터 가이드가 버스로 이동해준단다.
탕헤르 호텔레 도착하여 전통식 고기에 올리브유를 뿌려서 먹는 '따진'을 먹었다. 한국의 뚝배기 개념인데, 고기를 많이 담아다 주었다. 따진은 그릇 이름이다. 우리의 메뉴는 비프따진이었다. 쇠고기의 육질이 단단한데, 참 맛있었다. 지금까지 먹은 쇠고기 식사 중에서 가장 맛있었다고, 모로코의 음식문화를 칭찬했다. 치킨따진도 있다. 호텔 직원들도 상당히 친절했다. 우리 곁을 맴돌며 더 달라고 하는 음식을 즉시 갖다 주었다. 모든 것이 열악하다고 들었던 모로코, 오늘 본 바로는 아니다. 인간적인 아주 정겨운 나라다.
2010년 3월 6일 토요일 모로코 탕헤르, 페스, 라바트, 카사블랑카
* 모로코 탕헤르 호텔
아침 일찍 일어났다. 창밖은 아직 어둡다. 호텔 룸에서 어젯밤 골목에 보이던 슈퍼도 문이 닫혀있다. 로비의 나무 인테리어가 아프리카의 향기를 발한다. 육중한 분위기다. 비가 줄줄 내린다. 지난밤 심히 내렸다는데, 나는 곤한 잠으로 몰랐다. 아프리카 모로코, 호텔문을 함부로 나가지 말라던 선여행자의 말이 떠올라 현관문 앞까지만 나가서 둘러보았다. 시가지의 주택들은 다부져 보인다. 아침식사는 호텔식이라서 음식은 빵과 과일로 무리없이 잘 먹었다. 오늘은 페스, 라바트, 카사블랑카까지 간다. 페스에서 좁은 골목을 많이 걷는데 당나귀 똥을 밟을 수 있다고 끌리지 않는 바지를 입으라하여 가볍고, 기장이 짧은 바지를 입었다. 기대되는 아프리카 여행의 시작이다.
* 모로코 탕헤르 들녘
비가 계속 온다. 모로코의 애절한 빗방울들이 차창을 때린다. 따닥따닥, 따닥따닥, 빗소리가 크다. 강이 아닌 곳이 잠겨 있다. 탕헤르는 낮은 지대라서 더욱 그렇다. 오늘이 모로코 최악의 날이란다. 우리는 어제 배 타고 잘 들어왔단다. 오늘은 폭풍우친다는 일기예보란다. 포르투칼도, 스페인도, 모로코도 한국방송은 커녕, CNN 방송도 안나와 우리는 전혀 세상 소식을 모른다. 영어로 말을 해도 유럽식 영어라서 아메리칸 영어를 배운 우리는 못 알아 듣는다. TV를 켜도 잘 이해를 못 한다. 온도는 15도~24도라는데 조금 쌀쌀하다. 오늘이 절반 여행이다. 스페인 간다는 희망을 갖고 여행하란다. 오늘은 최장거리 투어다. 페스를 거쳐, 라바트를 거쳐, 카사블랑카까지 차를 타야 한다. 차 타는 시간만 10~13시간이다. 탕헤르에서 페스까지는 6시간 걸린다. 모로코는 한국의 7배 국가다. 서부 사하라까지 포함하면 9배 국가다. 남북 끝과 끝이 2700Km의 길이다.
들녘은 비가 많이 와서 물에 잠긴 곳이 많다. 소박한 농촌 풍경이 정겹다. 한국의 60~70년대의 삶 모습이다. 사람들은 일찍 나와서 일을 하기도 하고, 집 주변 목장에서 양을 돌보기도 한다. 드넓은 땅의 농작물과 얕으막한 집들, 긴 옷을 입은 사람들, 도로변에서도 한가로이 풀을 뜯는 동물들, 모두 이색풍경이다.
* 모로코 탕헤르 휴게소
싱그러운 아프리카 땅을 밟는다는 기쁨에 이곳 저곳을 걸어다니며 가슴에 정경을 담았다. 야자수가 아시아의 외인을 반긴다. 들에는 무성한 초지 위에서 소들이 풀을 뜯고 있다. 끝없는 광활한 땅이다. 모로코는 인구가 3300만명이다. 수도는 라바트다. 1달라는 이곳 화폐단위로 8디람이다. 가장 큰 도시는 카사블랑카다. 오늘 점심은 페스에서 전통식 '꾸수꾸수'를 먹는다. 양고기와 생강가루, 견과류, 밀알갱이를 섞어 만든 찜이란다. 모로코는 아랍국이고, 프랑스어를 공용으로 사용한다. 이베리아 반도와 맞닿는 북부는 스페인어도 쓴다. 내 조국은 아직 봄이 일어서지 않은 건조한 들녘인데 파란 풍경들이 평화롭다.
* 모로코 탕헤르에서 페스 가는 고속도로
아프리카의 도로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고속도로가 쭉 뻗어 있다. 얼마 전에 개통된 유일한 고속도로다. 울창한 나무들이 스쳐 지나가고, 들녘은 푸르고 참으로 아름다운 여정길이다. 모로코의 원주민은 베르베르 민족이다. 7~8세기 이슬람포교 활동으로 중동 아랍민족이 들어왔다. 그래서 베르베르인과 아랍인, 베두인까지 섞여 있다. 혼합인종이 많다. 순수 베르베르인은 그들의 언어를 사용한다. 1920년대 식민지시절의 오래된 집들이 많다. 와곽은 1950년대에 지었다. 모로코는 교통사고 최다국이다. 반드시 가이드의 지시를 따라야 한다. 1년 사계절 있지만 현재는 우기다. 올해는 특히 비가 많이 왔다. 탕헤르에서 카사블랑카까지의 철도가 끊겼다. 택시는 두 종류인데 아이보리 색의 그랑택시 7인승과 쁘랑택시 소형이 있다. 끝없이 열린 고속도로를 힘차게 달린다.
* 모로코 페스 가는 도로변 코르크 나무숲
포르투칼에서 많이 보았던 코르크 나무를 모로코에서 본다. 이제 코르크 나무를 완전히 알게 되었다. 울창한 고속도로변에 코르크 나무 군락이 광범위하게 있다. 모로코에는 가죽공장이 많다. 특히 페스에 가면 유명한 가죽 염색공장을 볼 수 있다. 지금 그곳으로 가고 있다. 아프리카의 3월은 한국의 여름처럼 녹음이 짙푸르다.
* 모로코 페스 가는 길의 농촌 풍경
아무리 보아도 넓은 땅이다. 간간이 보이는 집은 한국의 60년대 수준이다. 허름하고 낡은 벽과 지붕이다. 우리나라의 눈부신 발전에 감사한다. 폐허 속에서 일어선 내 조국이 아닌가. 우리 국민 모두는 산업 역군이었다. 모로코의 농촌에도 빛이 보인다. 부지런히 일구는 농작물과 목장이 풍요롭다.
감자를 심은 밭도 있다. 비닐하우스도 있다. 하얀 새들도 있다. 비닐하우스 큰 것은 바나나 재배하는 것이고, 작은 것은 감자 재배하는 것이다. 지중해성 기후라서 올리브 나무도 많다. 로마 식민지 때 올리브유와 밀이 필요해서 경작이 시작되었다. 올리브 숲 농가가 비경이다. 해, 구름, 비가 반복된다. 먹구름이 우람할 때도 있다. 농촌마을에 말이나 당나귀를 타고 다니는 사람이 보인다. 마차도 보인다. 선인장과 올리브 나무가 밭의 경계선 울타리로 사용되고 있다, 선인장 열매는 먹는다. 들녘 풍경이 스페인과 유사하다.
농가주택은 중산층이 살고, 천막은 빈민층이 산다. 교육은 초등은 의무교육인데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 거의 카사블랑카에서만 가능하다. 부유층은 캐나다, 프랑스로 유학 보낸다. 모하메드 대학에 진학하기도 한다. 주식은 밀가루 빵, 홉스다. 밀가루, 물 , 소금만 넣고 천연으로 구운 빵이다. 한국의 '너 밥 먹어야지'가 모로코에서는 '너 빵 먹어야지'다. 이곳의 빵은 한국의 밥과 같은 개념이다. 초지의 양떼들, 목부, 멀리 산이 보인다. 모로코에 대하여 배우며 농촌 풍경을 보며 보람된 여행이다.
* 모로코 페스 가는 길 들녘의 천막집
들녘에 막사가 있다 사람이 사는 집이다. 가난한 현장을 본다. 초지나 밭 가운데 천막을 두르고 산다. 사람들은 소를 몰고 다니거나 밭일을 한다. 쇠고기 1Kg에 7유로, 비싼 편이다. 유목민족이어서 고기도 먹는다. 향신료를 다량 사용한다. GNP는 3천불, 가난한 나라다. 서민은 고기 먹기 힘든다. 모로코의 주요산업은 관광업, 광업, 어업, 농업, 상업이다. 원양어선 어업에 종사하는 한국인이 300명만 남고 어려워서 다 돌아갔다. LG, 삼성 주재원, 대사관 가족, 선교사, 원단장사 등 한국인이 약간 있다. 한국인이 적어서 한인식당이 한군데 밖에 없다. 드라마 '대장금'을 번역하여 방영한 후 한국음식을 조금 이해하나 잘 모른다. 생활수준이 낮아서 외식을 못한다.
인구는 부자와 가난한 자로 양분화되어 빈부차가 크다. 부자는 3억짜리 집에서 살고, 벤츠차 2~3대 소유하고 산다. 가난한 자는 한달에 소득이 100유로, 전기와 수도 없이 산다. 농촌일수록 학교가 멀어서 차가 없으니 도보나 나귀 타고 학교에 가야하는데 거의 못 간다. 특히 여자는 집 밖에 못나가서 문맹이다. 작당한 나이 18세쯤 되면 가정부 노릇한다. 1개월에 100유로 소득이다. 이 가난한 나라의 고리를 어찌 끊을까. 무심히 보면 낭만일 저 막사가 생의 아픈 현실이기에 어서 툭툭 털고 일어서길 빈다.
* 모로코 페스 휴게소
휴게소에서 잠시 휴식했다. 버스의 열을 식히려면 30분은 쉬어야 한다. 11시 20분에 출발한다. 여기서 50분만 가면 페스다. 페스에는 12시경 도착할 것이다. 참 많이도 달려왔다. 아름다운 휴게소다. 의자도 멋있게 정리해 놓았고, 색상도 곱다. 쉬는 동안 물과 오렌지를 먹었다. 올리브 나무와 알로에 나무가 인상적이다. 그 귀한 알로에 나무가 들녘에 자생하고 있으니 말이다. 온통 푸른 들녘이 진정 아프리카다. 모든 식물이 크고 우람하다. 모로코의 멋진 휴게소는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다.
* 모로코 페스 들녘 목장
푸른 초지가 많다. 끝없는 초지 지평선이다. 소, 말, 양, 목장이 매우 많다. 그래서 가죽제품이 많은 것이다. 페스는 양가죽 제품이 많다. 페스에서 가공된다. 페스산 가죽의 질이 제일 좋다. 한국의 한복처럼 페스산의 가죽옷을 입는다. 아득한 초지의 목장이다.도로변에 동물이 많아 뛰어들 때는 급제동을 하게 되고 상당히 위험하다. 벨트를 꼭 매야 한다. 끝없는 평원에 초지와 목동 그리고 양떼들이 고운 수를 놓는다. 수려한 작품이다. 올리브 나무와 알로에로 경계선 울타리를 만들은 곳도 있다. 도로변인데도 차소리에 길들여진 것일까. 동물도 목동도 눈길을 돌리지 않는다. 그들만의 고요하고 평화로운 정적에 행복이 깃들어 있다. 다른 세상을 모르는 천진한 사람들, 그러나 어깨에 행복을 지고 산다면 축복의 삶이다.
* 모로코 페스 톨게이트 자가용
모로코 페스로 진입하는 톨게이트에서 통과하기 위해 멈춘 자가용을 보았다. 엄마인듯한 여자가 운전하고 뒤에는 어린 남자 아이가 앉아 있다. 자가용은 한국의 대우 마티즈 같은 소형인데 모로코에서는 부자만이 탈 수 있다는 차다. 내 조국에서라면 흔히 보는 풍경인데 저 아이가 참 행복한 삶을 산다고 생각되었다.아이가 낯선 이방인이 탄 버스를 올려다 본다. 이곳은 도로 표지판이 영어와 아랍어로 가재한다. 이 나라는 이름이 '모하메드'가 많다. 톨게이트를 지날 때마다 동일한 글이 쓰여진 사무실이 있다. 영어로 표기되어서 읽을 수도 있다.
* 모로코 페스 왕궁
모로코 최초의 왕조인 페스 왕궁을 보았다. 유태인 거리, 무슬림 거리를 지나서 왕궁에 갔다. 왕궁은 외부만 보는데 무늬가 모두 이슬람 전통방식이다. 구멍 뚫린 성벽이다. 지푸라기를 섞어서 흙을 버무려 성벽을 만들 때 일부러 통풍이 잘 되도록, 또 그곳을 밟고 올라길 수 있도록 구멍을 뚫어 놓은 것이다. 왕궁은 외부만 보았다. 모로코의 모자이크 양식의 문양이다. 참으로 곱다. 성문 양쪽에는 모로코의 국기를 걸어두고 성문은 잠겨 있다. 모로코 국기는 빨간색 바탕에 별 하나가 있다.
모로코는 왕권제 있다. 왕이 있고, 수상, 상하 양원 내각제다. 현재 왕은 모하메드6세다. 왕의 아버지는 핫산이다. 공공 장소에서는 반드시 왕의 사진을 걸어야 한다. 모하메드6세왕은 문화사업에 주력한다. 각종 리조트, 아파트를 계속 외곽에 건립 중이다. 기반 산업을 프랑스 식민지 때 건설했다.
핫산은 1952년부터 시작된 독재자다. 왕은 핫산 1세-모하메드1세-핫산2세-모하메드2세-핫산3세-모하메드3세......이런 식으로 이어진다. 아버지와 할아버지 이름이 반복된다. 현재는 모하메드6세가 왕이다. 다음 왕은 핫산6세다. 다음 왕은 반드시 조부 이름을 써야 한다.
* 모로코 페스 도심 풍경
페스 도시에 들어왔다. 중앙분리대가 야자나무다. 프랑스 식민지 시절의 도로구조다. 이곳은 지금 초봄이다. 시람들이 아직 춥다고 가죽옷을 입고 다닌다. 학교 시간인가보다. 도로변 중고생쯤 되어 보이는 청소년 학생들이 많다. 기아 프라이드, 현대 자동차가 이곳에도 있다. 톨게이트에서도 보았다. 버스에서 내리는데 우리에게 몰려와 신기한 눈으로 영어로 일본인이냐고 묻는다.
도심 식당에서 전통식 음식으로 점심식사를 했다. 식사가 끝 무렵 비가 많이 온다. 식당의 천정에 따닥따닥 세차게 내린다. 밖에 나가보려고 하니 문입구에서 두 남자가 손에 물건을 들고 사라고 한다. 가난한 나라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한 방법이다. 식사 후 가죽 공장에 간다.
결혼 할 때 여자는 옷7벌, 남자는 옷2벌을 갈아 입고 예식을 치른다. 여자는 금반지 2개(큐빅,그냥), 남자는 은반지를 주고 받는다. 여자는 결혼식에서만 공주 대접을 받는다. 전에는 일부다처제가 가능했으나 2004년 개정법으로 지금은 불허다. 예외는 있다. 첫째 부인이 생산 못할 때, 그 부인한테 허락 받으면 새 부인을 맞을 수 있다. 모하메드왕은 부인이 10명이다. 한 남자에게 4명의 부인까지 허락했는데 그때는 똑 같은 사랑을 해주고, 똑같은 물건을 사주어야 했다. 코란에 명시되어 있다. 정신적 육체적으로 공평한 사랑을 해줘야 한다. 다처제 허용 이유는 여자가 생활능력이 없어서였다.
지금은 자녀교육이 힘들어서 1명의 부인만 얻는다. 대학은 다 국립이지만 부자는 프랑스나 캐나다로 유학 보낸다. 이곳 여자들은 뚱뚱하다. 출산하면 우대하여 잘 먹어서 그렇다. 닭고기, 기름빵(우리가 아침에 먹은 사각빵) 을 주로 먹는다. 모로코 남자는 여자의 엉덩이를 많이 본다. 엉덩이이가 큰 여자를 좋아한다. 그것은 항상 긴 옷을 입고 있어서 엉덩이의 움직임 밖에 볼 수 없어서다. 다른 나라에서 남자들이 여자의 긱선미에 관심을 갖는 그런 격이다. 페스의 보수적 가정은 여자들이 검은 옷을 씌워 집에서만 살게 한다. 더러는 서양식 의상을 입는 여인도 있다. 여기는 페스의 번화가다. 넓은 로터리 거리다. 사람도 많고 차도 많다.
* 모로코 페스 금속공예 공장
중식 후, 메디나 신,구 시가지 구경하며 미로를 따라 염색공장에 갔다가 라바트로 이동한다. 그 과정에서 미로 안에 있는 왕의 무덤과 회교성당도 본다. '하만'이라는 모로코 현지 가이드를 따라 갔다. 비가 와서 우산을 들고 다니느라 좀 질척거린다. 나는 우비를 입었다. 먼저 금속공예 가게에 들렀다. 가게의 문 입구 위 벽면에 현재 왕과 그 아버지 사진을 걸어 두었다. 현재 왕은 모하메드6세다. 모로코에서는 저렇게 공공장소에는 반드시 왕의 시진을 걸어 두어야 한다. 금속공예가 발달된 나라. 금속판에 눌러 문양을 새기고 색상을 입힌 제품들이 황홀하게 아름답다. 값은 비싸다. 견학만 하고 나왔다.
* 모로코 페스 미로도시 메디나
페스는 1200년 전 건설되었고, 아랍권 나라 중 가장 오래된 도시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페스의 도시 메디나는 두 군데로 분리되는데, 오래된 페스와 새로운 페스다. 오래된 구시가지를 뜻하는 메디나는 1200년 전에 성벽을 세우고 거주지로 구성된 도시로 유네스코에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새로운 페스 도시는 1300년 이후 다시 수도를 재건한 도시다. 하지만 이곳도 고전 도시다.
페스 메디나는 허술하고 좁은 길이 많다. 1~2m의 좁은 도로에는 차량 통행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당나귀로 물건을 운반한다. 페스에는 미로 전문 가이드가 있다. 그 사람을 잘 따라 다녀야 한다. 당나귀 똥과 오물을 조심해야 한다. 바닥에 끌리지 않는 옷을 입어야 한다. 미로의 길이 많은데 조금 큰 골목이 300~400개, 소로의 좁은 골목이 1000개가 넘는다. 정말 잘 따라다니지 않으면 길을 찾을 수가 없다. 미아가 되면 언어가 아랍권이어서 언어소통이 안되어 위험하다. 벽이 높은 도시로 바람을 잘 막아준다.
메디나는 시장을 형성했다. 원래는 도시인데 요즈음은 옷, 때밀이 타올, 향신료, 생강가루, 오렌지(지금은 끝물) 등을 파는 장터다. 모로코의 대중교통은 버스, 택시, 자가용이다. 택시는 요금이 비싸다. 버스 사정이 열악하다. 봉급은 800디락, 한화 40만원 정도다. 그래서 도시락을 지참하고 출근한다. 부잣집은 엄마차, 아들차가 있다. 그래서 교통체증이다. 그래서 지금 전철공사 중이다. 이태리 전철처럼 트램을 구상 중이다. 공사비가 많아서 6년 뒤에나 개통될 예정이다. 돌고 돌아도 끝나지 않는 미로는 대단했다. 두팔을 벌리면 닿는 협소한 골목에서부터, 구불거리는 골목길이 계속 이어진다. 상가의 지붕이나 창문 장식을 옛정취 그대로 둔 곳도 있어 역사를 배우며 걷는다. 비가 와서 우의를 비고, 우산을 받고 페스의 구시가지를 현지 가이드를 따라 걸었다.
* 모로코 페스 왕의 무덤
메디나 구시가지 미로에서 왕의 무덤이 있는 건물을 만났다. 저 안에 실제 무덤이 있다. 관리하는 사람이 있다. 현재 왕의 아버지인 핫산 왕 때까지는 독재였다. 닫힌 사회로 가택연금과 숙청도 했다. 그런 일 없애고 뿌리 뽑자고 숙청 풀어주고 망명자들을 회복시켰다. 외화유치 노력으로 영화사업을 육성한다. 키가 큰 모로코 현지 가이드는 영화배우였다고 자부심이 대단하다. 왕궁에서 그와 함께 사진을 찍었는데 상당히 키가 컸다. 왕의 무덤을 도심에서, 그것도 건물 속에 있는 현장을 본 것은 우리에게는 낯설지만 모로코의 면면히 이어오는 역사의 탄탄한 끈이라 여겨졌다.
* 모로코 페스 회교 성당
페스의 메디나 미로에 2만명 수용하는 사원이다. 당시의 이슬람의 센 영향력을 본다. 비무슬림인은 사원 안에 못 들어온다. 문이 열려 있으면 볼 수 있으나, 닫혀 있으면 우리도 못 본다고 알고 왔는데 역시 문은 닫혀 있었다. 정오의 기도시간이 끝난 것이다. 아쉽지만 이슬람 문양의 아름다운 아치형 사원의 문만 보았다.
이슬람의 5주가 있다. 5가지를 지켜야 한다. 첫째, 신앙고백이다. 알라신만 있다고 기도하며 고백한다. 둘째, 하루 5번 기도해야 한다. 동틀 때, 정오, 오후 3시, 해질녘 6시, 잠자기 전, 이렇게 5번 기도한다. 셋째, 빈민구제로 조세제도 자카트다. 25%를 세금으로 낸다. 넷째, 라마단 단식이다. 이슬람 특유의 음력을 사용하는데 1년이 359일이다. 9번째 달에 하는 단식이다. 이때 모하멧이 계시를 받았다고 믿는다. 라마단은 동틀녘(흰실과 검은 실이 구분될 때)에서 해질녘까지 금식이다. 침도 뱉으면 안된다. 금연이다. 일몰 후 식사가 가능하다는 방송이 나온다. 97%가 무슬림이다. 2~3%만 카톨릭, 기타 종교다. 임산부, 노약자는 금식에서 제외다. 여행자도 제외하므로 그 기간에 여행하는 사람도 많다. 싸움, 교통사고가 많은 나라다. 오히려 살이 더 찐다. 낮에 못 먹은 것르로 저녁에 더 먹어서다. 다섯번째, 성지순례다. 이슬람역으로 12번째 달에 사우디아라비아 메카성지 순례를 떠난다. 일생에 한번은 꼭 가야 한다. 40일간 손톱, 발톱, 머리, 수염 안 깎고 고행한다. 천연모습으로 신전을 7번 돈다. 우물에 돈 던지며 재물을 바치고 온다. 유대교나 이슬람교의 교리는 같다. 아브라함과 사라 부부의 두 자손 이스마엘(첩소생)과 이삭(본처소생)을 함께 믿는다. 40일간의 고행은 이스마엘을 살리려고 했던 그의 어머니(첩)하갈이 노력한데서 유래했다. 녹색이 이슬람 색깔로 중동사막에서는 생명을 상징한다. 종교의 힘은 참으로 위대하다.
* 모로코 페스 가죽염색 작업장
페스는 모로코의 도시 중 세번째 큰 도시다. 카사블랑카가 제일 크고 다음은 라바트다. 페스의 인구는 100만 명이다. 1200전 년의 도시로 이슬람 왕조의 역사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서 도시 전체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이런 도시에 가죽염색 공장이 있어서 여행객들이 많이 찾는다.
페스의 구시가지 미로를 수없이 돌고 돌아 찾아왔다. 앞에서 페스 미로 전문 현지 가이드, 아주 키가 작은 할아버지를 따라 열심히 따라 갔는데 도중에 일행 8명이 떨어져 길을 잃어서 고생했다. 나는 그래도 앞부분에서 잘 따라가서 문제가 없었는데 낙오되었던 일행은 어떤 모로코의 아이가 간신히 가죽염색공장을 찾아주었단다. 한국에서 따라간 가이드도 페스 메디나의 미로에서 길을 잃으면 대책이 없다.
한동안 걸어서 갔다. 골목의 짐승 분유물 악취도 역겨웠고, 수많은 상점들의 호객행위도 체험했고, 그리고 높은 2층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서 가죽염색 작업장을 볼 수 있었다. 주변은 온통 가죽제품을 파는 상가들이다. 상가의 난간에서 아래로 염색장을 내려다 본다. 염색장은 화려한 색상을 풀어놓은 그릇들이 많다. 처음에 가죽을 담그는 비둘기 뽀얀 똥물도 있었다. 모로코의 광활한 들녘 초지에서 자라는 양, 소, 말 등의 동물이 많아서 발달한 산업이다. 맞은 편으로 페스의 허름한 가옥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지붕마다 TV위성 안테나가 설치되어 있다. 맑은 하늘 아래 모두가 정겨운 풍경이다.
* 모로코 페스 가죽을 지고 가는 사람
가죽 원단을 어깨에 메고 가는 사람을 보았다. 무거운 가죽을 메고, 또 곁에서 부축하고 가는 모습이 안타까운데 저것은 이곳 사람들의 행복한 일상이다. 미로여서 차가 들어오지 못해 저렇게 물건을 운반한다. 상가마다 가죽제품이 많다. 신발, 가방, 옷 등 다양한 물건들이 즐비한 상가에 진열해 놓고 판다. 견과류 생산지라서 그런 상품도 많다. 완전히 상가 거리다. 그 옛날의 건물 그대로 모습으로 역사가 배인 메디나의시장이다.
* 모로코 페스 시가지
페스를 떠나 라바트로 간다. 조금은 어수선하고, 불편하고, 지저분한 여정이었지만 이 시대에는 볼 수 없는 연민의 도시를 떠난다. 참 많이도 걸었다. 차량진입이 불가능한 좁은 골목이어서 페스의 메디나를 걸어다녔다. 모로코에서 역사가 잘 보존된 도시기에 그 만큼 많은 것을 배운 소중한 체험이다. 여기도 부동산 폭등이 일고 있다. 외곽으로 가면 잘 지어놓은 주택단지도 있다. 버스 안에서 뒤를 돌아보니 모로코형 붉은 소형 택시가 따라 온다. 페스의 허름한 아파트가 외객을 배웅한다.
* 모로코 페스 회교 공동묘지
무덤은 회교적으로 한군데를 향해 바라보도록 한다. 죽어서도 그들의 신을 향해 있다. 이런 풍경은 스페인에서 보았다. 산비탈에 무덤이 질서있게 나란히 놓여 있다. 그런데 정말 모두 한곳을 향하고 있다. 무덤의 문화도 신기하고, 그들의 종교에 사후에도 충실한 모습이 신기하다.
* 모로코 페스 왕궁 성벽
성벽이 뾰족하다. 페스를 둘러싼 유적이다. 페스는 정신적인 도시로서 종교행사가 많다. 한국의 안동 같은 도시다. 페스는 중산층의 사람이 사는 도시다. 유서 깊은 가문, 자수를 잘 놓는 여인 등 덕망 높은 사람들이 많다. 모로코에서는 페스 출신의 '벤' 성을 갖은 사람이 최고 신분이다. 페스에서 라바트로 가는 중에 가까이서 성벽을 보았다. 여기서 라바트까지는 3시간시간 소요된다. 라바트에서 모하메드5세 왕릉을 볼 것이다. 이슬람 왕조의 뾰족한 성벽을 따라 버스는 달리고 있다.
* 모로코 페스에서 라바트 가는 길
들녘에 밭의 경계선으로 선인장 울타리를 한 곳이 많다. 올리브 나무 울타리 들녘이 보인다. 날씨가 변덕이 심하다. 해가 나왔다가 비, 구름, 해, 비, 우박을 반복한다. 하루에 사계절을 보는 나라다. 잠시 휴게소에서 우박을 맞으며 화장실에 갔다. 초지 위의 빨간 벽돌 주택마을이 아름답다. 나무가 있는 곳은 나무가 아주 크고, 초지가 있는 곳은 평화로운 목장, 또는 기름진 농토다. 전원의 향수가 물씬 배인 땅이다.
* 모로코 라바트 가는 길 무지개
비가 억수로 로더니, 유리창에 물결치며 한치 앞도 분간 못하게 하더니 비가 그치고 개인 하늘에 고운 무지개가 떴다. 이것이 모로코의 전형적인 날씨다. 무지개가 어린 시절 고향에서 보았던 것과 똑같다. 하늘에 반원을 커다랗게 그리며 마음껏 칠보 색상을 분무하고 있다. 들녘에느 밭의 경계선으로 선인장 울타리를 한 곳이 많다. 내 조국에서는 화분용으로나 기르는 화초가 아프리카에서는 들녘 야생 식물이다. 신비롭다.
* 모로코 라바트 들녘의 농부와 당나귀
초지 사이로 당나귀를 타고 가는 사람이 있다. 들녘의 교통수단이다. 목장을 돌아보고 집으로 돌아가는 걸까. 아니면 이웃 마을에 다녀오는 걸까.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오직 좁은 길만 빠끔히 뚫린 드넓은 초지 위를 영화의 한 장면처럼 멋진 풍경을 그려내고 있다. 저 멀리 집을 향해 가는 모습이 참으로 평화롭다.
* 모로코 라바트 들녘의 농부와 마차
들녘에 마차를 타고 가는 사람이 있다. 농사를 짓는 사람이 물건을 싣고 운반하는 것일까. 아니면 장을 보러 가는 것일까. 나무와 식물들이 울창한 농촌이다. 모로코의 전통 빵을 먹으며 간다. 아직도 마차를 볼 수 있다니, 40여년 전의 내 조국 시골 풍경이다. 아버지를 따라 장에 갈 때 보았던 유년의 회억이 가슴을 설레게 한다.
* 모로코 라바트 시가지 거리 풍경
라바트는 왕이 사는 도시다. 라바트 인구는 120만 명이다. 초대의 왕에서 현대의 왕까지 수도로 지정한 도시다. 무역항 역할을 했다. 로마 식민지 때부터 포도주 등을 수출했다. 수도로서 큰 역할은 못했으나 무역 도시로 기여했다. 도시에 큰 강이 있는데 대서양과 만난다. 그 강이 도시를 이등분한다. 나무도 많고, 시가지와 대형 마트, 자동차들, 도로 등 잘 가꾸어진 모로코의 수도 라바트다. 현대적 향기가 감돈다.
* 모로코 라바트 모하메드5세 왕릉
라바트에 도착하여 맨처음 간 곳이다. 길 이름에도 '모하메드'가 있다. 모하메드5세가 1962년에 사망했는데 우리는 그 무덤에 간다. 아들이 건설했다. 현재 왕의 할아버지다. 현재 왕의 아버지는 핫산2세다. 왕릉 내부와 외부를 모두 보았다. 천정과 벽면의 예술장식이 대단히 아름답다. 내부의 사진촬영도 가능하여 무덤과 벽면과 지키는 병사와도 함께 사진을 찍었다. 실내 정경이 엄숙하고 웅장하다. 저 아래에 놓인 왕의 무덤관을 사방으로 돌면서 보았다.
외경도 왕의 무덤이라기보다 수려한 예술 건축물처럼 곱다. 이슬람 상징의 초록색 지붕이 인상적이다. 1912년부터 프랑스 식민지였던 모로코를 1956년에 독립시킨, 독립의 아버지다.왕위 계승이 장자 상속인데 모하메드5세는 셋째 아들인데 왕이 되었다. 프랑스에서 고의로 무능할 것 같은 셋째 아들 모하메드5세를 왕으로 세웠다. 그런데 그 모하메드5세 왕이 독립운동하여 모로코를 해방시켰다. 그 왕릉 앞 광장에는 핫산의 탑이 높이 서 있다.
* 모로코 라바트 왕릉에서 바라본 시가지
페스는 외곽은 신도시, 안쪽은 구도시인데 라바트는 수도라서 잘 정리된 도시다. 프랑스 식민지 때부터 현대까지 수도다. 카사블랑카는 정신 없는 도시다. 왕이 있는 라바트와는 전혀 다르다. 라바트에서만 보는 풍경은 공원에서 운동하는 시민들 모습이다. 현대와 과거의 풍경이 함께 있는 도시가 라바트다. 라바트를 양분하는 강이 멀리 보인다. 해적이 많다. 1700년대 중반부터 해적을 적출했다. 1956년에 모로코가 독립했다. 바라만 보아도 아름답다. 나무와 도시의 조화가 환상이다. 넓은 들녘도 평화롭다.
* 모로코 라바트 하산 탑
하산 탑은 66m높이인데 미완의 탑이다. 쌓다 멈춘 탑이 오롯하다. 뚜르 하산 왕이 사원을 짓다가 죽어서 그냥 멈춘 것이다. 하산 왕이 성벽을 쌓고 백성을 이주시키고 독립하려 했는데 소원을 이루지 못하고 사망했다. 기둥이 서 있는 곳도 모스크 부지다. 수많은 기둥들이 열을 지어 올곧게 서서 하산 타워를 받들고 있다. 하산 탑 맞은 편에는 모하메드5세 왕를이 있다. 같은 광장 안에 두 명소를 동시에 본다. 우리는 축복받은 여행단이다. 우리가 다 구경한 후 버스에 탔을 때 비가 많이 왔다. 빗속에서 라바트를 떠나왔다.
* 모로코 라바트 하산 탑 성벽
모하메드5세 왕릉과 하산 탑이 있는 광장의 울타리차럼 도로변에 성벽이 높이 있다. 하산 탑이 마완의 탑인 것 처럼 이 성벽도 미완이다. 어설픈 모습이다. 성벽에는 구멍이 숭숭 뚫려 있다. 그 이유는 진흙과 석회로 벽들을 만들어 쌓았는데 통풍이 잘 되도록 하기 위해서다. 또 사람이 올라가도록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 성벽 위에는 비둘기들이 많이 앉았다. 페스에서 가죽염색 작업장에서 처음에는 가죽을 비둘기 똥물에 담갔다가 염색한다는데 저 비둘기들이 모로코에서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 모로코 라바트에서 카사블랑카 가는 길
라바트에서 카사블랑카까지는 1시간 30분 소요된다. 두 도시는 모두 해변에 있다. 카사블랑카는 라바트에서 더 남쪽으로 내려간다. 라바트를 이등분하는 강이 들녘을 가르며 흐르고 있다. 라바트에서 왕릉과 하산 탑을 볼 때만 해도 비가 오지 않았는데, 출발하지마자 비가 주룩주룩 세차게 온다. 유리창문에 빗물로이 무섭도록 세차게 흘러내린다. 이런 날씨는 모로코뿐만 아니라 포르투칼과 스페인에서도 수없이 보아온 날씨다.
* 모로코 카사블랑카 가는 길 일몰 비경
모로코의 날씨는 변화가 심하다. 비가 오더니 그치고 하늘이 개이고 구름이 한가득이다. 해는 석양을 구름 사이로 내뿜는다. 검은 구름 사이로 붉은 빛이 분무한다. 잠들지 않는 푸른 하늘도 웅장하다. 아프리카의 일몰이 장관이다. 버스가 빠른 속도로 가서 카메라에 담기가 힘들었지만 잘 포착하여 사진으로 담아왔다. 모로코는 황홀한 밤으로 접어들고 있다. 서서히 어둠이 깔리고 버스는 모로코의 남쪽 도시 카사블랑카로 달리고 있다. 카사블랑카 영화를보면서 간다. 오늘의 저 장엄한 하늘은, 아프리카의 비경으로 오래도록 내 가슴에 저장 되리라.
* 모로코 카사블랑카 도착
모로코 카사블랑카에는 캄캄한 밤에 도착했다. 사위가 어두워 잘 보이지 않는다. 아프리카 서부 도시의 밤은 그렇게 깊어가고 있었다. 여행지 중 가장 온도가 높은 지역이다. 밤인데도 기온이 포근하다. 카사블랑카는 인구가 500만 명으로 모로코 최대의 도시다. 호텔에 바로 투숙했다. 내일은 모인콜 5시, 호텔조식5시 30분, 출발 6시 30분이다.
2010년 3월 7일 일요일 모로코 카사블랑카, 탕헤르, 스페인 타리파, 미하스, 말라가
* 모로코 카사블랑카 호텔
아침 일찍 일어나 어젯밤 늦게 도착하여 잘 보지 못했던 호텔을 둘러보았다. 모로코는 치안이 잘 안되어 있어 호텔 밖에 나가면 안된다는 말을 선여행자로부터 들어왔기에 조심스레 호텔 입구에서만 바깥을 바라보았다. 아직 어둠이 가시지 않아 선명하지는 않지만 이곳은 경제도시로서 골목이 잘 정돈되어 있고 건물들이 다부져 보인다. 차령도 많이 주차해 있다.
호텔의 내부는 옛날의 풍물을 전시해두었다. 금빛 큰 주전자와 대형그릇이 로비에 있다. 식당에서는 한사람이 분주한 손길로 우리의 아침 식탁을 차리고 있다. 영어로 소통되어 좋았다. 고맙다는 아침 인사를 하고 카사블랑카의 아침식사를 했다.
* 모로코 카사블랑카 모하메드5세 광장
오늘은 카사블랑카에서 탕헤르로 가서 페리호 타고 스페인으로 건너가야 하고, 또한 미하스까지 올라가야 한다. 배 승선 예약시간 때문에 일정이 바쁜 날이다. 그래서 새벽 어스름부터 관광을 시작했다. 모하메드5세 광장은 1925년 건설되었다. 모하메드는 모로코 독립의 아버지여서, 라바트에 그의 무덤 건물이 크게 있더니, 이곳에는 그의 광장까지 잘 가꾸어 놓았다. 그가 생전에 얼마나 모로코의 큰 존재였는지 말해주는 대목이다. 프랑스 식민지 시절의 초대 총독의 동상도 있다. 주변에 유엔광장 등 주요 건물이 많다.
카사블랑카는 인구 500만 명의 모로코에서 가장 큰 도시로 경제중심지다. 카사블랑카의 대부분 건물은 식민지 시절에 건설된 것들이다. 이곳이 가장 붐비는 장소다. 바로 앞의 도로가 모하메드5세 거리인데 가장 붐비는 곳이다. 그 이유는 핫산2세(모하메드6세의 아버지) 거리가 만나는 곳이어서 그렇다. 아주 웅장한 카사블랑카의 도심에, 모하메드5세는 죽어서도 아름다운 기념광장을 소유하고 있다.
* 모로코 카사블랑카 유엔광장
지금의 유엔과는 다르다. 1930년에 건설한 국제회의장 건물이다. UN광장은 대단히 웅장하다. 양쪽으로 카다란 건물이 둘이 서 있고 중앙의 광장도 상당히 넓다. 바로 도로 건너편에는 모하메드5세 광장이 있어 더욱 빛난다. 카사블랑카에서 가장 번화가이며 주요 건물이 많은 곳이다. 비둘기가 새벽부터 광장을 메우며 모로코 평화의 아침을 열고 있다.
* 모로코 카사블랑카 하산2세 모스크
카사블랑카 항구도시의 바닷가에 비경으로 솟아 있다. 10만 명을 수용하는 모스크다. 세계에서 세번째 큰 모스크다. 하산2세 타워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210m의 거대한 첨탑이다. 그곳은 이슬람 교인이 올라가서 기도의 부름을 외치는 곳이다. 15번 외친다. 모스크 탑이 높은 것은 바로 이런 이슬람 사원의 전통적인 특징 때문이다. 모든 문이 아치형이고 건물 또한 아치형으로 둘러서 있다. 해안의 타워와 모스크, 광장의 비둘기 등이 고운 정경이다. 하산2세는 현재 왕의 아버지인데 독재자였다.
주변주택단지에 TV 위성안테나를 설치한 가정집이 300~400가구다. 부유한 환경임을 알게 하는 대목이다. 이곳은 은퇴자들이 많이 산다. 대서양 해변가의 오롯한 첨탑이 예술적인 시각만으로도 비경이다.
* 모로코 카사블랑카 해변 비경
대서양 끝 해변이다. 곧장 나가면 아메리카 대륙이다. 나는 이 바다를 건너 남아공에서 브라질로 간 적이 있다. 태평양을 보고 살아온 아시아인, 나는 참으로 만나기 어려운 바다 앞에 서 있다. 하산2세의 모스크와 그 첨탑이 비경이고, 카사블랑카의 항구도시 풍경이 비경이다. 이곳 주택단지는 은퇴자들의 부촌이어서 참으로 깨끗하고 아름답다.
남편과 나는 문인이다. 나는 김윤자 시인이고, 남편은 유기섭 수필가다. 그래서 동일한 시각으로 세계를 여행하며 함께 문학의 길에서도 보람을 찾는다. 바라만 보아도 가슴 설레이는 저 풍경을 어떻게 시로 그릴까. 시로, 수필로 세계를 담을 수 있는 우리 부부는 참으로 행복하다.
* 모로코 카사블랑카 현대식 항구도시
스페인, 포르투칼인들이 와서 보고 하얀 집들이 많더라, 하여 '하얀 집'이란 뜻으로 '카사블랑카'란 도시로 이름을 지었다. 정원이 고운 집들이다. 한국의 압구정 거리를 지나간다. 주차료가 비싸 곳이다. 해변 부촌도시다. 7세기까지 베르베르 민족이 살던 곳이다. 이슬함의 반대로 전쟁도 치렀다. 은행 건물이 현대식이다. 유럽식 건물이다. 항구도시의 구도로 복잡한 곳에는 지하를 뚫어 지하도로를 만들어 놓았다.
카사블랑카에 성당이 8개다. 모로코인들은 아프리카의 유럽인이라고 자칭한다. 실제로도 잘 산다. 나이지리아인들이 여기 왔다가 유럽으로 들어간다. 모로코는 중산층이 없다. 극부자 아니면 극가난자로 양분되어 있다. 어업으로 통조림을 수출한다. 모로코 약국 상호가 신기하게도 첫글자가 'P'로 시작된다. 스페인과 포르투칼에서는 'F'로 시작되었었다. 모로코는 유럽형 도시인데 미국식의 상호를 쓰고 있다. 카사블랑카 도심의 높고 웅장한 빌딩들을 보며 이곳이 아프리카냐고, 그 가난한 나라 모로코냐고, 물을말큼 눈과 가슴이 놀라고 있었다.
* 모로코 카사블랑카 하얀 집
카사블랑카를 서서히 벗어나고 있다. 고속도로변 아파트가 흰색이다. 카사블랑카, 하얀 집이라는 말이 실감난다. 푸른 초지 위의 하얀 집이 참으로 곱다. 유럽의 가까운 나라 스페인에서, 포르투칼에서 이곳에 들어올 때 하얀 집들이 많아 그렇게 이름이 탄생된 도시다. 영화 '카사블랑카'도 이곳 도시를 배경으로 만든 영화다. 버스에서 상영해 주었으나 흑백화면에 화질과 글씨의 상태가 좋지 않아서 제대로 보지는 못했다. 나중에 한국에 돌아가서 기회가 되면 그 영화를 볼 것이다. 예쁜 이름의 도시를 이제 떠나가고 있다.
* 모로코 카사블랑카 들녘 선인장 울타리
선인장 무리들이 들녘에 한가득 자라고 있다. 울타리용으로 밭 가장자리에 울을 쳐서 심어 놓았다. 고속도로에 진입했다. 온통 푸른 초지다. 푸른 나무와 푸른 들녘을 보며 탕헤르로 달리고 있다.
모로코의 결혼문화에 대하여 들었다. 보통 2~3주 걸려서 전통예식으로 치른다. 결혼 전 남자가 여자 집에 청혼하러 간다. 쌍방합의가 되면 신부 집에 친척들이 모여 신부를 상석에 앉혀놓고 봉숭아와 같은 헤나라는 식물의 물을 들여준다. 헤나가루와 레몬즙을 섞어 손등과 손바닥 피부에 주입하여 침투시킨다. 미혼은 손만, 기혼은 발까지 그렇게 한다. 신랑은 친척집을 빌려 꾸민다. 신부화장은 하객과 드레스 도우미를 초대하여 저녁 9시에 한다. 결혼비용이 한화로 1천만원~7천만원 정도 든다. 테이블, 웨이터 모두 대여한다. 친척 위주로만 초청한다. 꽹과리와 현악기로 구성된 모로코식 밴드도 초청한다. 비디오도 촬영한다. 신부신랑 입장할 때 알라신이 당신을 축복해주라고 축하의 말로 반긴다. 축의금, 꽃 등을 증정한다. 연회복 입고 음식 먹고 춤춘다. 장신구, 옷 등 빌려서 치장한다. 화려한 결혼식이다. 모로코는 가난하지만 카사블랑카나 라바트는 무유한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어서 충분히 그런 결혼식을 치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짙푸른 선인장과 나무 숲이 남국의 풍경으로 싱그럽다.
* 모로코 카사블랑카 방대한 수풀림
카사블랑카에서 라바트 사이의 고속도로변에 거대한 숲이 있다. 13만ha의 방대한 스풀림이다. 올리브 나무, 유칼립투스 나무, 코르크 나무 등 키도 크고 울창하다. 방목사여 가측을 기르기도 하는 곳이다. 나라에서 자연 그대로 보존하는 나무 숲이다. 드넓은 대륙에서 작은 풀들의 초지 평원만 보다가 전혀 다른 밀림지대를 만난다. 이곳 구간만 그렇다. 나무도, 초지도 아프리카는 우람하다.
* 모로코 카사블랑카 휴게소
휴게소에 들러 잠시 휴식시간을 갖었다. 바나나 나무에 바나나 열매가 맺히는 모습을 보았다. 줄기 사이로 바나나 꽃이 핀다. 올리브 숲속도 잇고, 한국의 코스모스 비슷한 노랑색과 분홍색의 꽃이 예쁘게 피었다. 울창한 숲의 향기 속에서 참으로 행복한 시간이었다.
* 모로코 카사블랑카에서 탕헤르 가는 길 농촌풍경
끝없이 이어지는 고속도로다. 차가 없어서 빠른 속도가 가능하다. 고속도로변에 양몰리 가는 두 아이가 있다. 공부를 해야하는 시간에 모로코 아이는 목장에서 양을 몰며 살아가는 현실적인 방법을 배운다. 저것이 이곳에서는 이론보다 더 큰 학습이리라. 비닐하우스 농사도 있고, 대형 농경지에는 스프링쿨러로 물을 주기도 한다. 차를 타고 다니기도 한다. 부농이다. 감자농사가 많다. 들에서 농사일을 하는 사람도 많다. 비가 오더니 그쳐서 맑다.
* 모로코 카사블랑카에서 탕헤르 가는 길 휴게소
페리호 승선 시간 관계로 점심을 도시락으로 준비하여 이곳 휴게소에서 먹었다. 한식이어서 김치도 맛있고 반찬이 우리들 입맛에 맛아 잘 었다. 아름다운 후게소다. 하와이무궁화라 불리는 빨간 무궁화꽃이 함박웃음으로 외인을 반긴다. 우리 일행 외에 세계 여러나라에서 온 길손이 많이 모여서 정오의 휴식을 취고 있다.
* 모로코 카사블랑카 휴게소 언덕 양떼들
휴게소 언덕 위에 양떼들이 있다. 곁에는 두 소년이 목동으로 지키고 있다. 학교에 가서 공부해야 할 아이들이 양을 키우고 있다. 그 아이들은 우리를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환경에 따라서 살아가는 방법이 다름을 본다. 나무 사이로 소도 보인다. 아름다운 정경이다.
* 모로코 탕헤르 들녘
아프리카의 기름진 강이 흐르고 강가의 풀밭에는 동물들이 많다. 농토의 토지도 드넓게 전개되고, 민가 주변에는 목장도 많다. 탕헤르에 가까이 온 듯하다. 멀리 바다와 항구도 보인다. 모로코의 북부도시 탕헤르 들녘은 푸른 초지는 아니다. 농토와 크고 작은 나무들이, 또 집들이 골고루 있다. 비가 많이 와서 물에 잠긴 들녘이 많다. 그래도 물가에서 소떼들은 풀을 뜯고 목동은 그 곁을 맴돈다. 지난번에는 탕헤를를 저녁에 도착해서, 다음 날 새벽에 나오느라 어둠에서 잘못 보았는데 오늘은 정오의 한낮이어서 잘 보인다.
* 모로코 탕헤르 항구도시
모로코 항구도시 타리파에 들어왔다. 카사블랑카 그 먼 남부 도시에서 줄기차게 달려왔다. 탕헤르는 지브롤터 해협을 바라보고 있는 모로코 북쪽의 해안도시다. 유럽 스페인 땅에서 아프리카 모로코 땅에 올 때 지브롤터 해협 바다를 건너 첫번째 발을 딛는 아프리카의 관문이다. 도심을 관통하여 항구로 간다. 어느 유럽의 거리처럼 잘 가꾸어져 있다. 건물도 아름답고, 주변 풍경도 깔끔하다. 누가 이곳을 아프리카라고 할까.
바다가 보이는 도시에서 시민들은 한가로이 쉬기도 하고, 전통의상으로 온 몸을 감싼 채 걸어다니기도 한다. 약국의 상호가 'PHARMCIE'라고 씌여 있다. 그리고 아랍어로도 병행하여 써 있다. 나의 작은 아들은 약사다. 그래서 나는 세계여행할 때마다 약국의 상호 표기를 꼭 담아간다. 유럽은 거의 'F'로 시작하는 상호가 아메리카 식의 'P'로 시작하는 것이 신기하다. 야자수 고운 풍경을 보며 탕헤르 항구로 간다.
* 모로코 탕헤르 여객터미널 주변풍경
2시 페리로 스페인 간다. 여객터미널에서 기다렸다. 여객터미널 주변의 탕헤르 도시는 하얀 빛으로 바다를 바라보며 곱게 자리잡아 앉아 있다. 아주 커다란 집단의 도시 군락이다. 항구도시가 이렇게 클까. 촉촉한 풍요다. 한자으이 밝은 태양빛이 모로코를 축복하고 있다.
아프리카 모로코는 애완견 개는 기르지 않는다. 더럽다는 생각을 갖고 않는다. 그 대신 고양이를 기른다. 고양이는 대접받는 나라다. 고양이 7마리를 기르면 행운이 온다고 믿는다. 그러나 먹이 비용 때문에 못 기른다. 여객터미널에 고양이 한마리가 돌아다닌다. 아무도 쫓아내지 않는다. 더불어 함께 지낸다. 낯선 이방인엑도 따라 다닌다. 우리 부부에게도 와서 고개 들고 바라보고 있다. 만져도, 꼬리를 잡아도 가만히 있다. 해변에는 배들이 많이 정박해 있다. 투명한 터널의 긴 복도가 승객을 태우기 위해 쭉 뻗어 있다.
* 모로코 탕헤르와 스페인 타리파 왕복운항 페리호
모로코 탕헤르에서 스페인 타리파로 가는 배는 벌써 항구에 들어와 승객을 기다리고 있다. 페리호는 거대한 배다. 아랫층에는 버스, 자가용 등 차량이 들어가고 위층 2,3층에는 계단으로 사람이 들어간다. 맨 위는 갑판이다. 아프리카의 배라고는 믿기지 않을만큼 웅장하고 시설도 좋다. 솔직히 한국에서 여행 출발하기 전에는 이 배에 대하여 조금 두려운 생각도 갖었었다. 그러나 2일 전 스페인에서 모로코로 이 배를 타고 들어오면서 기우였다는 확신이 섰다. 지난번에는 밤에 들어와 야경을 보았으나 오늘은 낮에 가니 아프리카와 스페인의 국경을 이루는 지브롤터 해협의 비경을 제대로 보리라.
* 모로코 탕헤르에서 스페인 타리파행 배 승선
배는 한동안 정박하고 있었다. 그 동안 배의 내부에서 외부까지 돌아보았다. 내부는 곳곳에 편리한 시설을 해놓았다. 안내책자가 있는 테이블에서 책도 보았다. 화장실도 상당히 깨끗하다. 아늑한 페리호의 실내 계단을 올라 갑판 위로 갔다. 바다 위로 보이는 탕헤르 항구도시를 보았다. 비스듬한 언덕을 타고 집들이 있고 멀리 산줄기에도 집들이 보인다. 이제 아프리카를 떠난다.
* 모로코 탕헤르 배에서 본 비경
페리호는 아프리카 모로코를 뒤로 하고 스페인 타리파로 출발했다. 서시히 배가 움직이자 탕헤르 도시가 더 선명하게 큰 폭으로 보인다. 안온한 바다에 커다란 함선도 떠 있다. 해안의 건물들이 비경이다. 높은 건물 숲이 아프리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다. 수많은 빌딩과 주택들이 외객을 놀라게 한다. 구름도 웅장하다. 기름진 항구 도시다.
* 모로코와 스페인 사이 지브롤터해협 비경
푸른 하늘과 하얀 구름, 옥빛 바다가 정녕 비경이다. 아프리카 모로코가 점점 멀어지면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지브롤터 해협이 이어졌다. 광활한 바다를 페리호 홀로 쾌속 질주한다. 이 바다는 14Km 정도로 그리 긴 항로는 아니다. 잠시 보는 망망대해다. 나는 주로 갑판에서 지브롤터해협의 풍경을 보았다. 미국에서 온 청년들과도 대화를 나누고, 아프리카쪽과 스페인쪽을 번갈아 보며 눈에, 가슴에 그 정경을 담았다. 어느새 스페인 영토가 보인다. 산줄기가 차음에 드러나더니 곧 타리파 항구에 다달았다. 날이 맑으면 타리파에서 모로코가 보인다고 하더니, 오늘 같은 쾌청한 날에는 가능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스페인 타리파 항구 도착
아프리카 모로코를 떠난 페리호는 스페인 타리파에 안전하게 우리를 데려다 주었다. 웅장한 배에서 나와 타리파 여객터미널로 향했다. 지난번 아프리카로 갈 때도 이곳에서 배를 승선했다. 이곳은 공항 같은 곳이다. 국경을 넘어가는 여객터미널이어서 입출국 수속 절차를 밟아야 한다. 입국수속을 밟으려 안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우리의 버스가 모로코에서 승선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았다. 함께 와야할 버스가 모로코에서 떠어지고 우리만 승선한 것이었다. 연락해보니 우리의 버스가 문제는 아니고, 모로코항에서 승선하는 차량들의 철저한 검색과정에서 출항시간을 넘겨 뒤에 줄서 있던 죄없는 차량까지 타지 못한 것이다. 우리 일행은 버스가 다음 배로 온다하여 안심했다. 여기는 유럽 스페인 영토 타리파 항구다.
* 스페인 타리파 항구 공원
스페인 타리파에서 2시간의 여유시간이 생겨 주변에 있는 공원으로 갔다. 아프리카에서 우리와 같이 타야할 배가 낙오되어 다음의 페리호로 오는 관계로 이런 시간이 탄생된 것이다. 다음 여행일정에 차질을 주지만 스페인 항구 공원에서 자유로이 보내는 시간도 좋았다. 공원 의자에 앉아 야자수의 낭만 속에서 오가는 스페인 사람들의 생활상을 눈여겨 보았다. 가정적인 사회다. 가족단위로 행복한 걸음을 하는 시민들 표정이 밝다. 타리파의 장군 동상도 높이 서 있다. 먼 훗날까지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을 고운 풍경들이다.
* 스페인 타리파 페리호에서 내리는 유로버스
다음 페리호가 올 시간에 맞춰 다시 타리파항으로 갔다. 우리의 배를 함께 타지 못하고 다음 배로 오는 버스를 맞이하기 위해서다. 배가 항구에 입항하고 드디어 커다란 버스가 후진으로 나오고 있다. 참으로 반갑고 안심이 되었다. 모로코에서 여객터미널에 1시간 일찍 와서 승선 수속을 밟았는데도 왜 버스가 승선하지 못했을까, 교포 가이드는 이상하다고 했다.
모로코는 차들이 승선할 때 통관을 거치는데 검색대가 고장나서 일일이 사람이 검색하느라 시간 지연되었고, 몇 대만 타고는 그만 뒤의 차들은 배에 오르지 못했던다고 버스 운전기사가 말했다. 이색체험, 이것도 후일에는 아름다운 추억이 되리라.
* 스페인 타리파에서 미하스 가는 길
스페인 타리파에서 오후 6시에 미하스로 출발했다. 한국시간으로는 지금 3월 8일 월요일 새벽 3시다. 안달루시아 7개 지구 중에서 6개 지구를 다 보고 가는 것이다. 말베리아 지방만 안 보고 간다. 스페인은 국경이 4개다. 모로코, 유럽 자중해, 대서양, 지브롤터 해협를 접하고 있다. 모로코은 침략을 많이 받았으나 스페인은 침략을 받지 않았다. 스페인은 프랑스에 우호적이어서 오히려 프랑스 총독 동상이 있다. 스페인 속 영국이 있다. 영국 영토다. 인구 3만 8천 명이 산다. 1평방 미터에 4300명 꼴이다. 지브롤터 지역 바위산으로 군사기지다. 신기한 영토에 대하여 들으며 밤길을 달려 미하스로 간다.
톨게이트를 통과하며 스페인의 어둠을 헤집고 달린다. 계속 산길이다. 미하스는 특이한 명소는 없지만 하얀 마을을 보러 가는 곳이다. 비, 안개, 해 그 어떤 날씨에도 아름다운 곳이다. 점점 짙은 어둠이다. 모로코에서 버스가 늦게 온 관계로 2시간이 지연되어 미하스의 야경을 보게 된다. 어둠 속에서도 산 중턱의 집들이 선명한 불빛 아래 하얀 색으로 아름답다.
* 스페인 미하스 성녀성당
미하스는 해발 450m의 도시다. 유럽의 발코니, 하얀 마을, 좁은 골목, 당나귀 택시 관광, 페냐 성녀 성당 등이 있다. 어둠 속에 버스가 언덕 위에 주차하고 먼저 간 곳은 페냐 성녀 성당이다. 페냐 성녀 동상을 땅에 묻었는데 농부가 발견해서 그곳에 성녀 성당을 세웠다. 성녀 동상을 세운 조그만 성당은 어둠 속에서 성스러움이 드리워 있었다. 주변은 공원이다. 저 아래가 바닷가 마을, 그 아름다운 하얀 미하스 마을이라는데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다. 야경 불빛만 찬란하다. 의자가 돌로 만들어 천연 향기다.
* 스페인 미하스 예쁜 마을 야경
미하스의 예쁜 마을의 낮을 보지는 못했지만 밤 풍경은 참으로 그윽하다. 건물 하나 하나가 모두 아기자기하고 곱다. 언덕 위 마을이라서 호텔은 없다. 그래서 우리는 말라가에 가서 잔다. 발코니가 모두 바다를 향하고 있다. 페냐 성녀 성당이 있는 공원을 나와서 주택가 골목을 걸었다. 당나귀 택시가 정차하고 있다. 미하스는 일본인이 와서 당나귀를 데리고 농사 짓는 모습이 신기해서 사진을 찍어 가서 알려줘서 관광지로 발전한 도시다. 당나귀 그림을 세워 두었다. 잠시 머물렀지만, 야경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웠다.
* 스페인 말라가 호텔 도착
말라가 호텔에 도착했다. 말라가는 휴양지다. 유럽의 부호들이 많이 온다. 피카소의 고향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아오기도 한다. 홀리데이 인 호텔이다. 깨끗하고 좋다. 모로코보다 좋은 환경이 느껴진다. 저녁을 호텔에서 먹었다. 내일은 버스를 미하스에서부터 5시간 탄다. 마드리드까지 간다. 피카소의 나라, 그의 고향에서 유숙하는 것은 행복한 여정이다.
2010년 3월 8일 월요일 스페인 말라가, 콘수에그라, 똘레도, 마드리드
* 스페인 말라가 호텔 출발
오전 7시에 호텔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둡다. 쌀쌀하다. 남부에서 북부내륙으로 올라고 있다. 말라가는 인구 85만 명의 작은 도시다. 고속철 아베가 있어서 마드리드까지 2시간 걸리는데 출퇴근이 가능하다. 휴양지라서 영어, 불어까지 소통이 잘 된다. 골프장, 카지노장, 리조트, 요트장이 있다. 이제 풍차 마을이 있는 콘수에그라를 거쳐, 똘레도를 거쳐 스페인의 수도인 마드리드까지의 오늘 여행을 위해 말라가를 출발한다.
* 스페인 말라가 산언덕 예쁜 마을
피카소의 고향인 스페인 말라가는 예쁜 도시다. 산언덕 예쁜 마을이 더욱 화가의 정취를 느끼게 한다. 피카소는 1885년에 탄생하여 91살까지 살았다. 말라가 중산층의 자식으로 말라가에서는 10년 살고 떠났다. 프랑스 파리에도 거주하였다. 아버지가 미술교사였다. 파블로 피카소는 '아버지 그림을 죽은 거다' 라고 했다. 어려서부터 특이한 기법으로 그림을 그렸다. 피카소가 8세 때 투우장에 갔다가 소에 칼이 찍히는 투우 장면을 그림으로 그렸는데 너무 잘 그려서 아버지는 피카소를 미술교육 시켰다. 이름이 '파블로 루이 피카소'인데 다 떼어내고 어머니 성인 '피키소'만 사용했다. 어머니 성을 썼다. 공산주의자 거부였다.
피카소는 살아서부터 유명해져서 생시에 돈을 많이 벌었다. 바르셀로나에서도 살았다. 피카소의 가장 유명한 그림은 '게르니카'다. 거대하게 큰 그림이다. 프라도 미술관 피카소 그림 전시장에 있다. 게르니카 작은 마을에 장이 섰는데 프랑코 총독이 폭격한 마을이다. 2쳔 명이 부상당했다. 이 분노를 '게르니카'라는 마을 이름을 붙여서 그렸다. 말, 남자, 병사, 도망가는 여자, 소(스페인 상징), 꽃, 칼이 그림 속에 있다. 프랑스 전시에서 유명해지자 현재는 마드리드 미술관에 전시하고 있다. 영국, 미국을 거쳐서 본국에 온 것이다. 흑색과 백색만 사용해서 그렸다. 스페인 작은 마을 말라가, 피카소가 나고 자란 마을을 밟고 떠난다. 줄기차게 늘어선 산언덕의 하얗고 예쁜 마을이 가슴에 꽃처럼 들어앉아 기억되고 있다.
* 말라가에서 콘수에그라 가는 길 휴게소
내 조국 한국과는 상당히 다른 풍경이다. 세계를 돌아볼 때마다 이런 신비에 수없이 매료되곤 하는데, 오늘도 스페인 땅에서 십로운 풍경을 본다. 오렌지 나무에서 비바람 맞은 오렌지가 데굴데굴 굴러 떨어져 바닥에 지천이다. 양손에 주워 쥐어보고 향기를 맡아보고, 이국의 낭만에 젖어본다. 마을 보건소 같은 진료 건물도 있다.
* 말라가에서 콘수에그라 가는 길
계속 산길을 달린다. 산 사이 마을이 가끔씩 보인다. 그래서 산이 많은 우리나라와 같은 느낌이 든다. 종이 재료로 쓰이는 나무 농장이 많다. 산자락과 평지마다 온통 올리브 나무가 줄맞춰 심겨져 있다. 온 천지가 올리브 나무다. 석회질 토양으로 그런 것 같다. 산언덕의 붉은 집들이 줄지어 성처럼 보인다. 그렇게 살며 주변엔 올리브 농장을 가꾼다. 콘수에그라까지는 200Km다.
말라가에서 콘수에그라 가는 길은 멀어서 스페인 교육제도 등 여러가지에 대하여 들으며 갔다. 한국은 대단한 교육열의 국가다. 이 나라에서는 공부에 대한 애착심은 없다. 그러나 방과 후 수업이 잘 되어 있다. 교육 시스템이 좋다. 외국에서 학교에 방문 온다. 600명이 묻힌 유럽 최대 공동묘지를도 방문한다. 부모가 모두 일하니까 초등학교6학년까지 부모가 학교 데리고 감다. 치안이 불안해서다. 교표 가이드도 아들이 4학년인데 등교시 데려다 준다고 했다. 9시~2시까지 오전 공부하고 2시~4시까지는 점심 식사와 운동, 그리고 마치는 시간은 오후 5시다. 또 4시~7시까지는 방과후 수업이 가능하다. 2시간 학교생활이 가능하다.
학교에서 아침 식사 주고, 밖에 못 나가게 돌봐준다. 학교에 하교 후 데리러 갈 사람의 이름을 적어 주어야 하한다. 그 사람한테만 아이를 내어준다. 전교생이 600명이다. 유치원 3년을 포함해서 9학년제다. 방과 후 보충수업은 영어, 컴퓨터, 태권도 등이다. 여기는 부모가 전혀 걱정 안해도 되는 안전교육제도다. 방학이 6월 15일~9월 15일까지 3개월이다. 그리고 다음해 6월이 새학기 시작이다. 여름방학 2개월 동안은 캠프 간다. 1개월은 부모님과 함께 보낸다. 단체 캠프가 부모보다 더 좋은 캠프다.
한반에 20명이다. 3세부터 학교에 간다. 3세~6세는 유치교육이다. 의무교육은 6세부터다. 유치원 1,2,3학년 마칠 때까지는 글과 수를 터득해야 한다. 3세부터 고등학교까지 무상교육이다. 유치원 3년, 초등 6년, 증등 4년, 전문대 2년이다. 약대와 사범대만 3년제다. 대학등록금은 1천유로다. 입학은 쉬운데 졸업은 어렵다. 공부하려는 자는 많은 지원을 해준다.
말라가에서 콘수에그라 가는 들녘은 구름 덮힌 산자락에도 평지에도 올리브 농장이 많다. 산이 많다. 북으로 갈 수록 초지는 적어지고 석회산이 많다. 수종만 다르지 한국의 풍경와 유사하다. 계속 산길로 달린다. 스페인에는 댐이 많다. 그런데 워낙 비가 많이 와서 계속 수문을 열어 조정하고 있다. 그래서 남부인 안달루시아 지방은 물난리다. 7번 잠긴 마을도 있다. 집이 잠긴 풍경도 있고 나무, 전봇대 등이 물에 잠겨 있다. 우리 버스도 원래의 길로 안 가고 동부쪽으로 약간 돌아서 파손되지 않은 길로 가고 있다.
언덕 위에 소동상을 또 만난다. 스페인 상징 동물이다. 중부에 들어오니 점점 산이 없다. 초지와 농토의 평원이 이어진다. 올리브 나무는 적다. 마을 사이로 철로가 보인다. 날씨는 점점 추워진다. 우리가 달려온 고속도로의 노변에 소동상이 스페인을 상기시키며 서 있다.
* 스페인 콘수에그라 휴게소
비가 내려서 촉촉한 땅이다. 하늘도 구름을 품고 있다. 휴게소에서 30분 쉬었다. 주변 풍경이 아름답다. 초지에 한번 밟아보고 싶었는데 휴게소 곁에 드넓은 초지가 있어서 그곳에 들어가 서 보았다. 스페인의 땅, 초지의 푸르름을 만끽하는 순간이다. 잘 다듬어진 초지의 끝부분에는 나무들이 울타리 쳐져 있다. 평야지대 초지 위에서, 날개를 펴고 비상하는 새처럼 환희의 몸짓으로 나는 한동안 거기 서 있었다. 콘수에그라에는 30분 후에 도착한다. 언덕 위 풍차 보러 간다.
* 스페인 콘수에그라 돈키호테 풍차
스페인은 소설 돈키호테의 작가 세르반테스의 나라다. 나는 학창시절에 읽으며 참 많이 웃었다. 지금 그 소설을 탄생시킨 배경의 풍차 마을 콘스에그라에 왔다. 버스가 마을 입구에 들어서자 멀리 얕으막한 산능선에 풍차가 줄지어 서 있다. 풍차 한 대가 아니고 여러 대가 거대한 모습이다. 세계여행은 책 속에서 간접체험했던 것들을 실제로 눈앞에서 보는 산교육을 체험시킨다. 돈키호테를 만나는 가슴 벅찬 순간이다.
세르반테스는 마드리드에서 30Km 떨어진 곳에서 태어났다. 가난하고 계급이 낮은 선비 가문이다. 기사에 대한 책을 많이 읽다가 하인 기사를 데리고 나가서 돈을 벌자고 했다. 돈키호테에는 600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세르반테가 사랑했다는,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돌시니아 여인(귀족부인)이 있다. 그 여인상이 마드리드 스페인 광장의 돈키호테 동상 곁에 있다. 책 속에서 가장 인상 깊은 것은 콘수에그라의 풍차 마을이다. 그래서 이곳에 오는 것이다. 풍차를 보고 괴물이라고, 풍차에게 '네가 마법에 걸려서 풍차로 보이는 거야'라고 달려가서 풍차에 부딪히는 장면이 나온다. 농사꾼 하인 산쵸 판사의 판사는 멧돼지라는 뜻의 성이다. 세르반테스는 왼손을 잃는다. 그의 동상마다 반드시 망또로 손을 가려 손이 오그라 들어 있다.
버스가 산언덕까지 올라와 우리를 내려주었다. 바람이 심하게 분다. 풍차는 상당히 크다. 날개가 부러진 것도 있다. 풍차가 옛날에는 밀을 찧는 방아 역할을 했는데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다. 이곳은 관광지로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 풍차 앞에서 명작 소설을 다시 음미한다. 한사람의 작가가 남긴 작품으로 콘수에그라의 풍차는 세계인으로부터 사랑받고 있다.
* 스페인 콘수에그라 돈키호테 풍차마을
콘수에그라 마을에는 산이 없다. 산이 없는 지역이어서 들녘은 광야다. 돈키호테가 이 마을을 지날 때는 매우 더웠을 것이다. 그러니 풍차가 괴물로 보이기도 했을 것이다. 괴물이라고 달려들어 부딪쳐 넘어졌다는 풍차들이 산능선에 그날을 전시하고 있다. 돈키호테가 로시난테 말을 타고, 산쵸를 당나귀에 태우고 우스꽝스럽게 걸었을 마을 전경을 바라본다. 이곳에서는 사방이 다 보인다. 기름진 땅의 농토와 군락을 이루고 사는 붉은 지붕의 마을, 뽀얀 길, 저 멀리 우람하게 앉은 산 등등 탁 트인 정경이 풍요롭다.
* 스페인 똘레도 신시가지
똘레도 시가지에 들어왔다. 초고속열차역이 보인다. 여기서 마드리드까지는고속열차로 30분 소요된다. 똘레도에서 중식을 하고 구시가지와 성당을 보았다. 1975년 11월 20일 프랑코 총독이 사망했다. 그 후 선진국으로 도입했다. 2002년 EU 가입 후 보조받아 성장했다.2002년 1월 1일부터 유로화 사용했다. 스페인화 페세타 166.3이 1유로였는데, 66% 인상하여 100페세타였던 물건이 1유로, 그러니까 물가가 66.3이 오른 섬이다. IMF에서 2007년 발표에 의하면 경제규모 8위였는데 현재는 많이 떨어져 마이너스 국가다. 현 수상이 욕심이 많아 건축업, 중소기업이 망했다. 400만 명이 실업자이며 계속 늘어나고 있다. 동계올림픽이 30회 열린 도시다.
똘레도는 450m 고도의 도시다. 마드리드는 650m 고도의 도시다. 똘레도에서 마드리드까지는 70Km다. 가장 중부지방으로 동에서 500Km 지점이다. 스페인은 남과 북의 거리가 1000Km다. 필립2세가 수도를 똘레도에서 마드리드로 이동시켰다. 똘레도는 언덕 위 성을 쌓은 곳은 구시가지고 그 밖은 신시가지다. 눈으로 보아도 신시가지와 구시가지는 구분된다. 따호강을 경계로 보아도 강 밖은 신시가지다. 건물들이 모두 밝은 색상의 현대식 건물이다.
* 스페인 똘레도 구시가지
똘레도는 경주 같은 도시다. 알폰세6세 흰색 동상이 똘레도성 입구에 있다. 버스가 높은 고지의 구시가지 중턱에 내려주고 우리는 에스컬레이터로 성을 오르고 내렸다. 성벽을 경계로 하여 성 안은 구시가지, 성 밖은 신시가지다. 똘레도 전체 인구는 8만 명인데 신시가지에 1만 5천명, 구시가지에 6만 5천명 산다. 1천년, 백년된 건물이 많다. 똘레도는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도시다. 보수시 정부 허가 받아야 된다. 외부는 손을 못 대고 내부 수리만 가능하다. 차량도 진입 유무를 검사 후 도시 진입이 가능하다. 그런 역사적인 도시를 우리는 걷고 있다. 똘레도는 칼 만드는 기술이 발달된 도시다. 스페인은 사람 이름이 길다. 엄마 아빠 성을 모두 넣어서 그렇다.
건물 하나 하나에 역사의 향기가 물씬 배어 있다. 상가도 화사한 기념 물건들로 거리를 밝힌다. 이 곳은 도로가 좁아서 차량진입이 불가능하여 구석 구석 많이 걸으며 보았다. 스페인의 한 영토를 마음껏 걷는다는 것도 뜻깊은 여정이다.
* 똘레도 구시가지 소코도베르(시장) 광장
구시가지 광장은 시장이 열리던 곳이다. 그래서 '시장 광장'이라 불렀다. 현재는 여러가지 행사를 하는 곳이다. 거리의 악사들도 흥에 겨워 연주하고 있고, 돈키호테의 명장면을 그림으로 대리석 의자에 그려 놓았다. 복권의 나라 스페인을 상징하듯 상가 앞에서 복권을 몸에 주렁주렁 붙이고 마네킹처럼 서 있는 남자도 있고, 산책나온 시민들도 있고, 이 광장은 아름다운 풍경이 이어진다. 주상복합상가 건물이 중세의 육중한 자태를 드러내며 시선을 이끈다. 주변에는 상가가 많이 밀집해 있어 쇼핑하기에 좋다. 나도 여러 가게를 들러 구경했다. 똘레도의 정감어린 광장이다.
* 스페인 똘레도 산토토메 교회
똘레도는 화가 엘 그레꼬의 고향이다. 그는 돈은 못 벌었다. 그러나 산토토메 교회에서 보관하는 '오르가스 백작의 장례'는 그의 대표 명작으로 그레꼬 그림의 진품이다. '천지창조', '최후의 만찬'과 함께 세계3대 성화인 이 그림은 1586년 작품으로 5백년이 넘었는데도 색상이 그대로다. 상하 2단의 그림으로 윗부분은 천상계, 아랫부분은 지상계를 상징하여 그렸다. 중앙에는 천사가 팔을 감싸 안은 것이 있는데 이것은 오르가스 백작의 영혼을 상징한다. 세계인들이 이 그림을 보기 위해서 모여든다.
* 스페인 똘레도 대성당
똘레도 대성당은 프랑스 고딕양식으로 1226년~1493년까지 267년 동안 건설된 가장 큰 성당이다. 1493년에 왕공된 스페인 카톨릭의 산실이다. 화려하면서도 장엄한 아름다움이다. 길이 113m, 폭 57m, 높이 45m의 거대한 성당이다. 내부는 18세기까지도 계속 건설되었다. 대성당과 소성당이 28개다. 대성당은 종탑 아래 보물실로 성직자 회의실이다. 똘레도 대성당도 산토토메 교회와 같이 실내는 사진촬영 금지다. 똘레도 대성당 내부에 똘레도 역대 추기경들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스테인드 글라스와 큰 기둥들이 웅장하다. 내전 때 스테인드 글라스의 유리창이 일부 파손되었는데도 투명유리창으로 달아 놓았을뿐 보수를 안 하고 그대로 두었다. 성모 마리아는 예수의 운명을 예견한듯 모두 슬픈 표정인데, 여기는 웃으며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 마리아가 있다. 성녀가 사제실에서 사제복을 선사하는 부조상도 있다. 왼쪽은 시계의 문, 중앙은 면죄의 문, 오른쪽은 사자의 문으로 입구에서부터 독특하다. 높은 구시가지의 중앙에서 빛나는 건축물로 깊은 역사를 품고 있다.
* 스페인 똘레도 구시가지 성벽
똘레도에 들어오자 높은 성벽이 예사롭지 않은 도시임을 암시한다. 윗부분은 뾰족하게 스페인 곳곳 성벽에서 본 것과 같다. 똘레도성 곁을 버스가 지날 때 입구에 알폰소6세가 하얀 옷을 입은 동상으로 서서 성을 지키고 있다. 성문을 들어설 때, 수백년 세월을 거슬러 오르는 환희였다. 성을 좀더 쉽게 오르고자 성벽 밖에 에스컬레이터를 세웠는데 홍수로 벽이 무너져 훼손된 모습을 보았다. 스페인의 홍수가 얼마나 심했는지 말해주고 있다. 성벽을 따라 차들이 달리는 현대적인 모습과 함께 비경이다.
* 전망대에서 본 똘레도 구시가지 비경
똘레도 성 전망대에 가서 성의 전경을 모았다. 따호강 물줄기가 성을 휘감아 흐른다. 따호강과 함께 요새의 도시 똘레도는 비경이다. 구가지에서는 전경이 다 보이지 못했던 똘레도 성당이 넓은 폭으로 높은 첨탑으로 자리하고, 멀리 산토토메 교회도 보이고 단단하게 성을 지키며 모여사는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버스가 이곳에 한동안 정차하여 내려서 세계문화유산의 도시 똘레도 구시가지를 가슴 깊이 담아왔다. 고스란히 보존하고 있는 역사의 도시 스페인 똘레도 , 그 안과 밖을 다 보았으니 참 행복한 순간이다.
* 스페인 똘레도 따호강 알깐다라 다리
똘레도 구시가지와 신시가지를 연결하며, 구시가지로 들어가는 관문이다. 따호강이 똘레도 구시가지를 휘감고 도는데 다리가 곳곳에 여러개 있다. 그 중에서 아치형 알깐다라 다리는 가장 아름답다. 따호강은 1008Km다. 다리를 건널 때에야 똘레도 대성당 전경을 보는 것이 가능하다. 구시가지에서는 대성당 전체를 절대로 사진기에 담을 수 없다. 아몽드 다리도 따호강 다리 중의 하나다. 이곳에서 한국 배우 이영애가 광고사진을 찍어 이영애 다리라고도 부른다. 다음으로 만난 알깐다라 다리는 아름다움이 예술이다. 우리는 아몽드 다리를 건너, 알깐다라 다리를 건너 구시가지 전망대에 갔다. 다리와 강이 비경이다.
* 스페인의 우산 소나무와 아몬드 꽃
똘레도에서 마드리드로 가는 길에 잠시 기념품 상가에 들렀을 때 스페인의 우산 소나무와 아몬드 나무의 꽃을 보았다. 소나무가 우리나라와는 다르다. 윗부분이 우산처럼 넓다. 또 우리나라의 봄에 곳곳에서 보는 벚꽃 같은 꽃나무가 스페인에서는 아몬드 나무다. 가까이 가서 보니 벚꽃이나 복숭아꽃과는 조금 다랐다. 꽃잎이 도툼하고 컸다. 저녁 무렵 똘레도를 떠나 서둘러 마드리도로 향했다. 내일은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19세기 대표 거리, 돈키호테 동싱이 있는 스페인 광장, 왕궁, 마요르 광장, 태양의 문을 보고 중식 후 사라고사로 간다.
* 스페인 마드리드 도착
똘레도를 떠나 어둠이 내리는 들녘을, 석양이 곱게 물든 하늘을 보며 달려서 마드리드에 도착했다. 마드리드에 진입하자 주택단지가 보이고, 스페인에 오로지 1개뿐인 엘꼬트레 국영백화점의 초록색 광고판이 보인다. 서울의 한강격인 만사다레스강을 지난다. 강의 폭이 좁고 작다. 마드리드는 스페인의 수도다. 마드리드 7개주의 인구가 600만 명이다. 수도권에는 350만 명이다. 스페인에서 가장 큰 도시다. 카를로스2세가 똘레도에서 마드리드로 수도를 이전했다. 스페인 여자는 입김이 세어서 친정에 3번 갈 때, 시댁에 1번 간다.
한인교포의 식당에 가서 저녁식사를 하려고 버스가 식당 가는 길로 접어들려하니 진입로를 차단했다. 그래서 돌아가서 내려주어 한참을 걸어서 갔다. 나중에 알아보니 그 주변 기차역에서 알케에다 폭발사고가 났는데 자주 그곳에서 데모를 한단다. 경찰이 통제하느라 분주했다. 날씨가 쌀쌀하다. 스페인은 1962년 3월에 눈이 온 이후, 오늘 처음으로 눈이 많이 왔단다. 마드리드와 바로셀로나에 눈이 많이 왔단다. 차가운 기온으로 옷깃을 여미고 식당에 가서 다 마치고 나오니 도심이 캄캄하다. 야경을 보며 호텔로 갔다.
2010년 3월 9일 화요일 스페인 마드리드, 사라고사
* 스페인 마드리드 호텔
모닝콜 6시30분, 조식 7시, 출발 8시 15분이다. 호텔 밖에 나가보니 붉은 일출의 동녘이 곱다. 날씨는 쾌청한데 한기가 파고 든다. 스페인 남부의 도시와는 확연히 기온 차이를 느낀다. 초겨울 옷을 꺼내 입었다. 오늘 마드리드 최저 기온이 0도란다.이상 저온이란다. 내 조국 한국도 이상 저온이었는데 스페인도 그렇다. 그래도 산뜻한 하늘이다. 오늘은 마드리드의 프라도 미술관, 스페인 광장, 마요르 광장, 왕궁주변, 태양의 문을 보고 사라고사로 간다.
* 스페인 마드리드 도심 순환도로
아침 일찍 서둘러 여정에 나섰다. 마드리드 외곽의 홀리데이인 호텔에서 마드리드 도심으로 들어가고 있다. 스페인은 하늘이 높다. 공해로 지상 가까이는 뿌옇다. 날이 건조해서 꽃이 만발하면 알레르기가 심하다. 마드리드는 도심과 연결되는 순환도로가 3개 있다. M30, M40, M50 도로다. 우리는 지금 M30 순환도로를 타고 시내로 들어가고 있다.
* 스페인 마드리드 폭탄테러 기차역
우리가 저녁 먹은 교민의 한식식당(상호:한강), 그 부근이 2004년 알카에다 폭탄테러 사건이 났던 기차역이 있는 곳이다. 기차 폭발로 1민간인 198명이 사망했고 1200여명이 부상당한 큰 사건이었다. 이라크 전쟁에 동조하거나 미국을 협조하는 전 세계국가에 대한 무슬림의 보복 사건으로 보고 있다. 이곳에서 스페인 사람들은 자주 데모한다. 그래서 차량진입 금지로 걸어서 식당에 갔던 것이다. 기차역을 지나며 소슬했다. 지구상에 다시는 이런 처참한 사건이 일어나지 않길 빌었다.
*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프라도 미술관은 관람이 까다로와서 배낭이나 긴 우산은 입장 불가다. 2004년 알카에다 폭발사고가 마드리드에서 일어나서 200여명이 사망했고, 그 후부터 사진촬영 금지구역이 많아졌다. 미술관 입구에 스페인의 대표화가 고야 동상이 있다. 외부는 사진촬영이 가능하여 고야 동상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은 후 카메라는 깊이 넣고 입장했다.
프라도 미술관에는 소장한 그림이 많다. 찰스3세가 자연 미술관으로 하려고 했는데 왕의 그림을 전시했다. 현대와 고전 2관으로 19세기에 개관했다. 유럽의 대영박물관과 프랑스의 루브르 박물관과 함께 세계3대 미슬관이다. 대영과 루브르는 자국의 작품이 아닌 것이 많은데 프라도는 자국의 작품들을 전시하고 있어 가치가 크다고 자부심이 대단하다. 그레꼬, 고야 등 유명화가 그림을 수집해서 5천점의 그림과 2천점의 판화, 7백개의 조각상을 소장하고 있다.
귀에 이어폼을 꽂고 현지 가이드 카르멘 여인과 함께 관람했다. 그림들과 조각상들이 참 많다. 성부, 성자, 성신(비둘기)의 그림도 있다. 이 나라 사람들의 머리는 어려서는 금발이다가 은발, 흑발로 변화하는데 그런 모습이 그림에 잘 나타나 있다. 동일한 사람의 그림이 어린 시절의 그림에는 금발로 그렸고 성장한 시절에는 은발, 흑발로 변화 모습을 잘 묘사해 놓았다. 그 당시의 가난한 아이들의 모습 그림도 있다.
고야 그림이 많다. 까를로소4세 가족 초상화도 있다. 화려한 궁중생활상, 그것을 지켜보는 증인격의 고야 자신도 그림 속에 항상 있다. 나폴레옹 살해장면도 있다. 고야의 초기 그림은 흐리고, 말기 그림은 어둡다. 예수님 십자가에 못 박히는 그림이 있는데 피를 그대로 재현했다. 그 당시에는 혼혈결혼으로 난쟁이들이 많았는데 그런 그림도 있다. 역대왕 그림, 카드놀이, 하층계급의 직녀들, 상층계급의 예술가의 그림도 있다. 프라도는 '푸른 잔디의 정원', '푸른 대지'란 뜻이다. 옛날 궁중정원으로 프라도의 귀족들이 산책하던 곳이다. 역사적으로 뜻깊은 장소에 지은 훌륭한 미술관이다.
* 스페인 마드리드 시가지 풍경
여기는 강북이 부자, 강남이 가난하다. 스페인은 다 그렇다. 서울과 반대다. 도심의 건물들이 높고 좋다. 마드리드의 건물은 고풍스럽다. 내부만 수리한다. 약국 전광판에 '12' 또는 '24'의 글씨는 12시간 또는 24시간 영업을 한다는 뜻이다.
마드리드는 어머니와 물이란 뜻이다. 물이 그만큼 많다. 카를로스3세 전에는 초라했던 도시였는데 그후 도시계획으로 도시가 성장했다. 지하철이 무조건 1유로다. 공항만 2유로다. 눈이 오면 아이들은 학교에 안 간다. 바르셀로나는 눈이 와서 오늘 학교에 안 간다. 마드리드 역사가 담긴 풍요의 여신상 분수대를 지나고 데모광장도 지났다. 19세기에 만든 도시로 갑부동네다. 마드리드 도심의 세르반테스 어학원도 보고, 마드리드 상징의 문도 보고, 방송타워도 보았다.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는 장엄한 도시였다.
* 마드리드 스페인 광장의 세르반테스 기념상
마드리드의 스페인 광장는 1916년 세르반테스(1547년~1616년) 사후 300주년을 기념하여 만든 광장이다. 스페인 역사 기념광장인 셈이다. 직사각형의 큰 연못 앞에 말을 타고 있는 돈키호테 동상과 당나귀를 타고 있는 그의 하인 산쵸판사 동상이 있다. 그들 곁 조금 떨어진 곳에 돈키호테의 가장 이상적인 여인 돌시니아 동상도 있다. 그녀는 알려지지도 않았고, 소설에도 없지만 세르반테스가 사랑했던 여인이다.
스페인 광장은 스페인 곳곳에 있다. 우리는 세비야의 스페인 광장을 보았고, 지금은 마드리드의 스페인 광장을 보고 있다. 이곳은 이 동상이 유명하여 찾는 곳이다. 주변에는 아파트로 둘러싸여 있다. 날씨가 쾌청하여 좋다. 우스꽝스런 장면을 수없이 연출하는 소설 돈키호테는 그 당시 기사사회에 대한 시대풍자 소설로 수백년이 지났어도 세계인의 가슴에 살아있다.
* 스페인 마드리드 왕궁
스페인은 18세기부터 왕조였다. 스페인 국왕 알폰스 13세가 1931년에 추방당하여 망명 갔다. 1936년~1939년까지 내전이 일어났다. 프랑코 독재정치가 1939년~1975년까지 36년간 이어졌다. 스페인을 가난하게 몰아부친 자다. 사후에는 멋있는 계곡에 왕 같은 무덤을 썼다. 전사자들의 계곡을 마련하고 마지막으로 프랑코 총독의 모덤이 들어갔다. 2천Kg의 돌을 덮어두었다. 다시는 일어나지 말라는 뚯이다. 1,2차대전에 스페인은 불참했다. 그래서 버려진 나라, 고립된 나라였다. 포르투칼, 중남미 정도만 교류했다. 1969년 왕위를 조치하여 아버지 돈까를로스 백작으로 끝냈다. 프랑코가 죽고 안정되기 시작했다.
유럽에서 가장 가난한 왕이 스페인 왕이다. 현재 마드리드 왕궁에서만 살고 다른 왕궁은 국가소유다. 오황 까를로스가 현재 왕인데 지금 70세 정도다. 큰 지진이 났을 때 직접 가서 도움으로 큰 인기다. 부인은 그리스 왕족으로 소피아다. 1남 2녀를 두었는데 큰 딸이 올해 이혼했다. 황태자도 결혼해서 딸만 둘 낳았다. 다음은 여왕이다. 이곳은 첫째가 왕이 되기 때문이다.
합스부르크 왕조시 찰스1세가 처음 왕이고 찰스(까를로스)3세가 마지막 왕이다. 왕궁 주변에는 시민공원이 있는데 식물이 많다. 왕궁 식물원 정문을 지날 때 잘 가꾸어 놓은 식물조경이 비경이다.
* 스페인 마드리드 마요르 광장
광장의 규모가 장엄하고, 건축물이 빼어난 아름다움이다. 펠리페2세가 스페인의 수도인 마드리드의 중앙에 광장을 짓도록 하였으나 그의 아버지인 펠리페3세 때 지어졌다. 1602년에 스페인의 다섯 성인을 기리는 행사를 하면서 마요르 광장을 세상에 알렸다. 이곳은 17세기~19세기까지 사형집행, 왕가결혼, 투우장 등의 행사장이었다. 1970년부터 차량통행 금지다. 광장 중앙에는 페리페3게 기마동상이 있다. 시민들이 모여 휴식하고 있다. 주변에 아름다운 아파트 건물이 많다. 상가에서 기념 모자와 스페인 마크를 새긴 손톱깎이 기념품을 샀다. 두 아들과 두 며느리에게 주려고 많이 샀다. 이곳에서 자유시간을 많이 가져 주변을 돌며 여러가지를 보았다. 주변 아파트가 예술적으로 아름답다. 바로 앞에는 왕궁이 있어 문 앞에서 내려다 보인다.
* 마드리드 프에르타 델 솔(태양의 문)
마요르 광장에서 걸어서 갔다. 경찰도 많이 배치되어 시민의 안전을 지켜주고, 무질서 속에서도 질서가 아름답게 흐르고 있다. 반원을 그리며 건물이 빼어난 건축미로 늘어서 있다. 건물 사이로 문이 7개다. 건물 사이로 열린 골목길이 상당히 크다. 한국의 명동격인 거리로 길도 12개다. 명동처럼 사람들의 행렬이 빼곡하다. 스페인 도로기점의 표식이 있다. 카를로스3세 동상이 광장 중앙에 있다. 가장 인상적은 것은 거리의 예술가들이 자신의 행위예술 등을 전시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몸에 진흙을 칠하여 조각상처럼 앉아있는 두사람이 시선을 끈다.
* 마드리드 유럽 제1의 투우장
마드리드에 가장 큰 투우장이 있는데 24000명을 수용한다. 매우 웅장하다. 유럽 제1의 투우장이다. 론다에서 보았던 투우장과는 다르다. 훨씬 건물의 미적 감각도 뛰어나고, 웅장하다. 도로의 한 블럭을 다 차지한 것 같다. 투우시즌이 아직 아니어서 내부에 들어가진 못했지만, 그 곁을 지나는 것만으로도 스페인의 투우가 얼마나 사랑받는 게임인지 알 수 있었다. 소들은 어차피 한번은 죽어야 하는 운명이기에 장렬히 사람의 손에 죽는 것을 명예로운 죽음으로 여기고, 사람은 가장 짧은 시간 안에 소를 죽여주는 것이 소의 마지막 고통을 덜어준다고 여긴다. 스페인에서는 투우장에서 소가 죽는 것을 결코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일종의 재미난 경기로 여긴다. 중식을 한식으로 하고 이제 마드리드를 떠나 사라고사로 간다.
*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사라고사 가는 길
저 멀리 설산이 보인다. 이곳 사람들이 스키 타러 가는 산이다. 마드리드르 떠나 사라고사로 간다. 4시간 30분 정도 소요된다. 현지 교민 가이드 권미혜와는 이별했다. 그녀의 집이 마드리드여서 그렇다. 바르셀로나에 가면 그곳 가이드가 나온다.
스페인 북부로 가는 길은 멀리 설산이 보이고 너른 평원, 초지, 올리브 나무가 많고, 고속도로변에 여전히 소동상이 있고, 화창한 날이다. 풍력계도 많다. 산위에 눈 풍경, 들녘에도, 산녘에도 눈내린 모습을 계속 보며 간다. 소동상도 또 지나가고, 눈발서린 땅이다. 점점 우리나라와 땅 모습이 유사하다. 아직 눈뜨지 않은 봄들녘이다. 마른 들판이다. 건조한 석회석 암산이다.
스페인은 유럽의 동양이다. 지붕의 기와형태, 생활모습 등 묘한 나라다.도로가 구도로여서 좁다. 주택, 건물을 그대로 두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차도 작은 차를 선호한다. 차의 기름이 1리터에 1유로다. 우리가 타고 가는 이 버스는 400리터를 주유하는데 400유로, 한화로 70만원이다. 여행기간 동안 그렇게 2번 주유한다. 즉, 기름값만 140만원이다. 엄청난 장거리 여행이다. 스페인, 포르투칼, 모로코 4천 Km를 버스로 달렸다. 포르투칼의 운전기사 빅도르에게 포르투칼어로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오브리가도 빅도르', 오브리가도는 '감사합니다', 그러니까 '빅도르기사님, 감사합니다.라고 말을 한 것이다. 우리는 최선을 다 하는 기사에게 박수도 쳐주었다.
한국과 유사한 산줄기, 산능선이 계속 이어진다. 한국은 대단한 나라다. 그 작은 나라에서 경제가 세계12위다. 여행 중에 버스 안에서 그 나라의 풍경을 보는 것은 그 나라의 풍습을 문화까지도 알게하는 것이라서 소중한 시간이다. 나는 지금 마드리드에서 사라고사로 가며 남유럽의 스페인을 눈으로 배우고 있다.
* 스페인 상징의 소동상들
스페인에는 검은 소 동상이 많다. 모두 92마리가 있는데 대부분 안달루시아 지방에 광고용으로 세워져 있다. 맨 처음 본 것은 말라가 휴게소 언덕의 맥주 광고용 소였다. 관광객에게는 투우 광고, 자국민에게는 술 광고가 많다. 기타를 든 소동상도 있다. 포르투칼은 닭동상이 많은 것과 스페인은 소동상이 많은 것이 인상적이다. 버스를 타고 가다보면 도로변에 커다랗게 우직한 소 모습으로 서 있다. 말라가에서 마드리드까지만의 거리에서도 많은 소동상을 보았다. 이색풍경이다.
* 스페인 마드리드 휴게소
스페인의 마드리드에 가까이 다달았다. 휴게소에서 잠시 쉬었다. 건조한 산풍경이 보이고 태양열 발전소와 올리브 나무가 있다. 이제 날씨가 남부와는 전혀 다르게 싸늘한 날씨라서 옷을 도툼하게 입어야 한다. 올리브 나무 아래에서 스페인의 정취를 느꼈다. 또 그 곁에 있는 질그릇 항아리가 한국의 정취를 느끼게 한다. 스페인의 주유소는 항상 elf라는 상호가 있다. 그것은 스페인의 석유회사 이름이다. 모두가 신비롭고 아름다운 풍경이다. 푸른 하늘과 고운 햇살도 우리의 여행을 눈부시게 축복하고 있다.
* 스페인 사라고사의 풍력발전소
스페인에서 풍력발전소를 처음 본 것도 아닌데, 보는 순간마다 새로운 비경으로 다가온다. 바람을 잡고, 햇살을 잡아 에너지를 생산하는 모습이 부러우면서도 노력하는 손길이 눈앞에 보여 가슴이 뭉클해진다. 지금 눈앞에 아라곤 마을의 풍력 발전소 풍력계가 많이 서 있다. 대단위여서 아득한 정경이 눈부시다. 온 들녘이 풍력계로 가득차 있다. 풍력계 1대에 3억원이라는데 저 많은 풍력계의 값만도 엄청난 것이다. 스페인의 풍요를 본다.
* 스페인 사라고사 필라르 대성모성당
사라고사는 화가 고야의 고향이다. 바실리카 필라르 대성모성당이 사라고사에 있다. 다른 성당은 그 지역 대표성당인데 이 성당은 스페인 대표성당이다. 세계3대 성당이다. 그리스 로마시대 성벽 잔재도 있다. 로마가 711년부터 1400년대까지 스페인을 700년간 지배했다.
에브로 강변에서 성모 마리아가 발현했다. '내가 세상 끝날 때까지 여기 있겠노라, 성당을 지으라'는 뜻을 받들어 예수 사후, 야보고가 이 성전을 에브로 강변에 지었다. 사라고사에 들어서자 에브로강과 함께 성당은 비경이다. 첨탑이 오롯하고, 성당도 상당히 아름답다. 고야 그림인 천청 벽화가 유명하다. 포탄 2개가 성당을 뚫고 들어 왔는데도 천정 벽화는 무사했다. 필라르는 기둥이란 뜻이다. 17세기~19세기까지 고딕양식으로 웅장하게 건축했다.
내부를 둘러보고 나왔을 때, 저녁 어스름이 내리기 시작했다. 성당 앞에는 너른 광장인데 규모가 대단히 크다. 그것은 필라르 대성당의 크기를 나타내기도 한다. 광장의 끝에서 끝이 성당 건물이기 때문이다.
* 스페인 사라고사 조각상과 꽃의 거리
사라고사의 거리에 동상들과 꽃 웅장한 건물들이 유럽의 향기를 마음껏 발하고 있다. 자유시간 40분 동안 바실리카 필라르 성당 주변 사라고사 도심의 상가에 다니며 물건들을 둘러보았다. 수많은 상가에는 여러가지 물건들이 많다. 우리 부부는 다 본 후에 필라르 성당을 찍어 만든 통에 담겨진 쵸콜릿 3통을 기념품으로 샀다. 옆면에는 여행한 스페인 곳곳의 그림이 있다. 두 아들 내외와 우리 부부 것이다. 가격은 좀 비싸지만 그만한 가치가 있다.
'올라?'는 '안녕하세요?'다. 아무에게나 '올라?' 해보란다. 스페인 사람들과 대화해보란다. 그것도 여행이란다. 사라고사는 아름다운 도시다. 사라고사는 여행 코스에 잘 들어가지 않는 곳이다. 우리는 좋은 도시에서 스페인 최고의 바실리카 필라르 대성당을 보고, 로댕 등 수많은 조각상 거리를 활보하고, 커페 숖에도 들어가 보고, 성당 광장의 물 폭포도 보고, 동그란 조각품 등등 행복한 구경을 했다.
상당히 쌀쌀한 날씨다. 이곳 사람들은 영어는 못 알아 듣고 하지도 못한다. 슈퍼를 찾는데 영어로 물었더니 못 알아 듣는다.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그냥 간다. 또 우리는 가게에서 물건을 살 때 주인의 말을 못 알아 듣는다. 그냥 손으로, 표정으로 말하고 느끼며 소통한다. TV방송을 켜도 이해하기 힘든다. 영어방송은 없다. 스페인은 CNN, BBC 방송도 모두 우리가 알아 들을 수 없는 영어다. 스페인어에 가깝다. 세상에는 참 언어라는 그 나라의 특징이 있어 아름답다. 이질감이 있지만 그래도 다 통한다. 느낌과 감정은 동일하다.
사라고사 도심 거리를 잊지 못하리라. 조각상이 수없이 늘어서서 중세 유럽으로 이끌던 고풍스런 환상의 거리, 꽃화분이 총총 걸려 저녁 무렵 짙은 낭만을 가슴 절절히 안겨주던 거리를 내 늙어 감성이 시들어질 때, 나는 오늘을 회억하며 행복하리라.
* 스페인 사라고사 필라르 광장
조각상이 즐비한 사라고사의 도심 거리를 활보하며 둘러보고, 상가마다 들어가 스페인의 물건들을 보고, 다시 필라르 광장에 왔다. 필라르 광장은 필라르 성당 바로 앞의 드넓은 광장이다. 사라고사가 그리 큰 도시가 아닌데 성당도, 광장도 상당히 크다. 사라고사는 이 성당 하나만으로도 세계인을 다 부른다. 광장도 대단히 아름답다. 물 폭포도 조성해 놓고, 곳곳에 조각품도 전시해 놓아 그윽한 정경이다. 로댕의 조각전 안내문과 생각하는 사람 조각상이 광장 앞 상가 거리에 있어 예술 향기를 더욱 짙게 발한다. 7시 20분에 광장에서 모여 중국식당에 가서 중국요리를 맛있게 먹었다. 깐새우, 돼지고기, 닭고기, 스프 등 푸짐한 메뉴다. 모두가 흐뭇하고 아름다운 여정이다.
2010년 3월 10일 수요일 스페인 사라고사, 바르셀로나
* 스페인 사라고사 호텔 출발
호텔은 여전히 홀리데이 인이다. 모로코의 호텔이 좋지 않았음을 느끼게 해준다. 27도로 실내온도를 조절하여 히타를 틀고 잘 잤다. 오늘은 6시 30분 기상, 7시 30분 조식, 8시 30분 출발이다. 사라고사에서 바르셀로나까지 3시간 30분 걸린다. 바람이 시속 80Km로 분다. 호텔 밖에 나갔더니 모자를 잡고 있지 않으면 날라간다. 마드리드의 기온이 오늘 영하1도에서 영상8도다. 매우 쌀쌀한 아침이라고 CNN 아침뉴스에서 나왔다. 하지만 청명한 하늘에서 스페인의 새벽이 열린다.
* 스페인 사라고사에서 바르셀로나 가는 들녘풍경
바르셀로나에 가서는 몬주익언덕, 구엘공원, 상가족성당, 람블라스 거리, 카사밀라를 보고 시내 관광을 한다. 영화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보면서 간다. [미션], [파티마] 등 긴거리를 이동할 때마다 본 영화들이다. 아침 하늘 아래 오롯이 서서 스페인을 알리는 소동상이 지나간다. 스페인 북부의 건조한 산과 도로다. 마른 산이 갈수록 점점 늘어난다. 산 위의 찻길, 산속 마을이 많다. 그래도 어떤 들녘엔 파란 식물들도 있다. 밀밭이다. 드넓은 벌판에 외딴집 한채가 나무 울타리에 의자하여 산다. 고독해서 어찌 살까 싶다. 얕으막한 석회산 능선의 찻길이 이동 통로다. 건조한 갈색 땅이다가, 푸른 빛이 돌 때는 민가 한채씩 보인다.
올리브 나무는 없고 아몬드 나무의 꽃이 핀 들녘이 전개된다. 산언덕 위 벽돌집 한채가 보인다. 가끔씩 저런 모습이 보인다. 홀로 떨어져 어찌 살까, 하는 생각을 자꾸 들게 한다. 넓은 나라에서 점 하나로 찍히는 삶의 숨결이다. 기이한 산 풍경이다. 마른 덩이 하나 우뚝 솟은 곳, 그 아래 사람의 집 하나를 만나면 신기하다. 우리 버스는 계속 그런 산 사이의 길을 달린다.
* 스페인 바르셀로나에 내린 눈
내 조국 서울에 눈이 많이 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곳이 이렇게 추운데 한국은 얼마나 추울까. 3월의 기상이변이다. 고속도로변 산자락 들녘에 하얗게 덮인 눈이 시선에 들어온다. 잘못 본 것일까 하여 눈을 크게 뜨고 보아도 정말 눈이다. 바르셀로나에 많은 눈이 내렸다더니 진짜 그 흔적이 선명하다. 나무도 남부와는 다른 상록수다. 산의 풀도 자작한 덩이풀이다. 양 옆으로 눈이 하얗다. 먼 산에도 하얗다.
휴게소에서 휴식했다. 매점에서 나의 큰 며느리 태중에 있는 아가에게 줄 과일 젤리를 샀다. 파란 나무 사이로 눈이 하얗게 쌓여 있다. 바르셀로나의 눈을 만져보며 보았다. 해변도시 바르셀로나에 대한 상세한 안내 지도가 있어서 보았다. 시골집 풍경 등 먼산 눈 풍경이 정겹다. 눈내린 마을 산, 들녘이 참으로 곱다.
* 스페인 바르셀로나 고속도로 주변풍경
고속도로 주변은 다양한 풍경을 선사한다. 멀리 눈 덮인 산도 보이고 가까이 산녘에 들녘에 하얀 눈도 보이고, 그러다가 온화한 시골 마을을 만난다. 정녕 봄은 봄이다. 추위에도 아몬드 나무들이 꽃을 피우고 있다. 도로변의 상록수 나무 숲이 울창하다. 정녕 여기는 스페인 북부다. 바르셀로나는 해안 도시라서 덜 춥단다.
바르셀로나 톨게이트를 통과하여 진입한다. 바르셀로나 초입의 시가지가 보인다. 성당이 보인다. 유럽의 그 많던 성당이 우거진 잡풀 속에 페허로 대부분 남았다던 성찬경 교수님의 말씀이 떠오른다. 아직 이곳은 그래도 성당이 오롯이 남아서 마을을 지키고 있다. 스페인 북부 지역은 산이 많다. 저 멀리 보이는 높은 설산이 스페인 3대 성지 중 하나인 몬세라트다. 톨게이트를 또 통과했다.지붕이 주황색으로 독특한 모습이다. 산자락, 산능선에 곱게 모여 사는 산마을이 아름다운 유럽의 모습이다.
* 스페인 바르셀로나 시가지 공동묘지
고층 빌딩이 보이며 바르셀로나 도심 시가지에 가까이 다달랐을 때 커다란 산에 푸른 나물들이 뾰족뾰족 서 있다. 스페인에서 상록수가 보일 때는 주변에 묘지가 있다고 한 말이 떠오른다. 예상대로 아주 큰 규모의 공동묘지다. 산꼭대기까지 온 산 전체가 한국의 묘지공원처럼 가꾸어져 있다. 우리나라와는 조금 다른 묘지 풍경이다. 얼핏 보면 사람이 사는 소형 아파트 같다. 산벽에 창을 내고 죽어서도 세상을 향해 바라보고 있다.
* 스페인 바르셀로나 해변 풍경
바르셀로나의 해변 풍경은 비경이다. 야자수와 고층빌딩, 항구, 요트, 지중해 바다가 참으로 잘 어우러진 낭만이다. 가슴이 저절로 뜨거운 감성에 젖는다. 높은 빌딩 2개의 트윈빌딩은 올림픽 이후에 지었다. 34층으로 153m다. 바르셀로나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다.
바르셀로나는 까달루니아주의 주도다. 까달루니아주는 인구 700만명이다. 바르셀로나에는 400만명이 모여 산다. 해변도로가 올림픽으로 건설되었다. 바캉스 후 이혼이 하루에 400명씩 나온단다. 싸워서 3분마다 이혼 1쌍이 나온단다. 스페인 여인들은 우울증이 나타날 때 쵸콜릿을 많이 먹는다. 항만 세관 건물과 배 모양의 호텔이 아름답다. 검은 광장과 청동 큰 동상도 보인다. 항구 주변 풍경이 웅장하고 아름답다.
* 스페인 전통음식 해물 빠에야
한국의 해물 볶음밥이다. 새우와 홍합을 섞어 아주 맛있다. 야채 샐러드가 듬뿍 나오고 식탁에는 올리브유가 넉넉하여 실컷 얹어서 먹었다. 해물 빠에야는 스페인의 전통음식으로 특별 현지식이다. 바르셀로나 해변 한블럭이 모두 이런 식당 건물들이다. 아름다운 풍경의 식당들이 즐비하여 진풍경이다.
* 스페인 바르셀로나 지중해 비경
스페인 바르셀로나는 지중해와 접해 있다. 지중해 바다가 비경이다. 바르셀로나는 지중해성 기후라서 겨울에도 영하가 없다. 연평균 온도가 12도다. 그런데 금년은 이상기후로 눈이 없는 도시에, 눈까지 많이 왔다. 그제께는 눈이 무척 많이 내려 교통마비였단다. 스페인은 제설차가 없어서 저절로 눈이 녹기 전에는 대책이 없단다. 어떤 여행객은 구엘공원을 못 가기도 하고, 숙박하려던 호텔에 못 가기도 했단다. 우리는 그런 불편은 없다.
지중해는 그리스에서 많이 보았다. 배를 타고 에기나 섬에도 갔다. 그날의 추억이 떠올라 기쁨은 더욱 크다. 깨끗한 남유럽의 바다가 짙은 낭만이다. 해변의 건물들, 모래사장, 갈매기들 모두 고운 풍경이다. 스페인의 젊은이들이 나와 난간에 앉아 있다. 내 고향 대천바다도 그립고, 그리움으로 사랑으로 한가득 출렁인다. 스페인 지중해의 비경에 젖어 행복한 순간이다.
* 바르셀로나 몬주익 언덕 올림픽 경기장
바르셀로나 도심을 가르지르며 점점 높은 곳으로 간다. 멀리 1503m 산정의 성당도 보인다. 유태인 무덤이 있던 언덕이 몬주익 언덕이다. 173m의 산언덕이다. 1929년에 짓기 시작하여 1982년 수리를 거쳐 1992년에 올림픽을 치른 주경기장이다. 1936년 내란으로 못 치르고 독일에서 치른 올림픽에서는 손기정 선수가 금메달을 땄다. 몬주익 주경기장에 왔다. 황영조가 금메달을 딴 곳이다. 한국교민들은 너무 기뻐서 심장마비를 일으킬 뻔한 곳이란다. 내 조국 한국인의 자랑스런 숨결이 배인 경기장을 보며 흐뭇했다. 경기장 바로 앞, 도로 건너에는 황영조 기념비가 있다.
* 바르셀로나 몬주익 언덕 황영조 기념비
몬주익 올림픽 주경기장 맞은 편에 황영조 기념비가 있다. 한자락 넓게 차지하여 한국을 빛내고 있다. 이곳 사람들은 무심코 보겠지만 우리는 그날의 벅찬 감격으로, 끓는 피로 본다. 한국과 자매결연을 맺었다. 경기도 임창렬 도지사가 바르셀로나와 손잡고 2001년 10월 5일, 이곳에 황영조 기념비를 세웠다. 황영조의 뛰는 모습과 두 발바닥이 부조상으로 새셔져 있다. 또한 대한민국 태극기, 바르셀로나와 경기도가 손잡은 모습, 두 나라의 우정 예찬시 등이 눈시울을 붉힌다. 훈훈한 정경을 한동안 큰 눈으로 바라보고 떠나왔다.
* 스페인 바르셀로나 구엘공원
스페인의 구엘공원은 인터넷에서 그 조경의 름다움을 수없이 보아서 기대되는 곳이었다. 가장 보고 싶은 것은 모지이크 작품이었는데, 그 뿐만 아니라 수많은 조각품과 미적 구성의 공원은 환상적이었다. 구엘공원은 스페인의 유명한 건축가 가우디의 작품으로 해발100m의 위치에 있다. 가우디는 1852년 출생하여 1926년까지 살다가 74세에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가우디는 부모가 일찍 죽었다. 외롭게 살았다. 구엘이 1926년 사망하자, 시에서 그 자손에게 구엘공원을 샀다. 타일로 모자이크, 곡선 건축, 종려열매, +자 모양, 파도 모양 등으로 돌집을 지었다. 1878년 파리 엑스포시 건축물을 출품했다.
구엘 백작은 가우디의 후계자다. 가우디는 쓸모없는 돌산을 공원으로 가꾸다가 미완으로 사망했다.1926년부터 시민공원으로 시에서 사들여서 관리하고 있다. 구엘 백작은 전원 주택지단지로 꾸미려 했는데 실패해서 공원이 되었다. 가우디는 루마티스 환자여서 자연과 친화하려 했다. '우리 집 닭은 날지 못하고 걷기만 잘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직선이 아니고 곡선을 사용했다. 초현대적 세계유일의 천재적 건축가다. 완전해야 건축했던 자다. 처치 곤란한 쓸모없는 곳에 공원을 세웠다. 도로, 종려나무 벽, 회오리 바람, 물줄기 모습 등을 돌로 표현했다. 60여 채의 집을 지으려고 했는데 2채만 지었다. '카사'는 '나의 집'이란 뜻이다. '카사블랑카'는 '하얀 나의 집'이다.
공원 부지도 상당히 넓고, 야자수 등 나무도 울창하고, 높은 고지에 있어서 바르셀로나 시가지가 내려다 보이고, 공원은 여러면에서 큰 관광지로 바르셀로나에게 큰 힘을 부여하고 있다. 이것을 보기 위해 세계인들이 오기에 충분하다. 어느 것 하나 무심히 지나칠 수 없다. 웅장한 돌기둥이 받들고 있는 건축물은 천정까지도 모자이크로 조각하여 눈부시다. 거북이 모지이크상은 흐르는 물과 함께 비경이다. 수많은 인파 속에서 스페인의 문화를 보는 행복한 여정이다.
* 바르셀로나 시내의 가로등
가우디가 설계한 유명한 가로등도 도심에 있다. 철제 조각품인데 곡선을 이용한 빼어난 작품이다. 가로등이라기 보다 예술 작품이다. 한 시대를 살다 간 스페인의 위대한 건축가 가우디에 대하여 곳곳에서 배우고 있다. 도심 풍경도 아름답고 그윽한 정경의 가로등은 더욱 남유럽의 낭만을 자아낸다.
* 스페인 바르셀로나 시가지
바르셀로나는 해변 산쪽 성의 도시다. 성을 헐고 바둑판 모양의 신도시를 형성했다. 해변 서쪽 도시와 산쪽 도시 2개로 구성되어 있다. 산쪽 도시에는 서비스업 시민이 살고, 해변쪽 도시는 섬유, 조선업 등의 공업이나 상업이 발달했다. 관광도시로 72%가 그 업계에 종사한다. 오렌지 나무가 도심 건물 앞에 있다. 지금 그란디아 큰 길로 달려나간다. 도로변에 자전거가 많다. 우리나라와는 아주 먼 거리의 나라인데 도시 외곽의 풍경은 비슷한 향수다. 그러나 시가지는 웅장한 유럽 건물들이 어김없이 중세 유럽의 육중한 향수다.
* 바르셀로나 가우디의 집 카사 바요트
바르셀로나 도심에는 가우디의 건축물 유산이 많다. 그 중에서 도심을 장엄하게 수놓은 카사 바요트와 카사 밀라 두 건축물을 보았다. 내가 버스를 타고 가는 그라시아 거리의 왼편에 있는 집이 가우디가 1904년부터 1906년까지 지은 100년 전의 카사 바요트다. 채색과 모자이크가 독특한 집이며, 가우디가 살던 모습을 전시해두고 있다. 1969년에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일반인에게 관람이 가능한데 입장료는 18유로다. 그 당시의 모습 그대로 현존해서 입장료가 카사 밀라보다 비싸다. 외향만으로도 뺴어난 건축물이다.
* 바르셀로나 가우디 밀라의 집(카사 밀라)
카사 바요트를 보고 조금 더 가니 오른편에 파도 모양 돌집이 있는데 그것이 가우디가 1905년에서 1910까지 지은 건축물로 밀라의 집(카사 밀라)이다. 100년 전 주택인데 초현대식이다. 1984년 구엘공원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건축물이다. 현재는 월세 200만원이고 은행 소유다. 입장료는 9유로다. 카사 밀라가 카사 바요트보다 입장료가 싼 것은 많이 훼손되어서 그렇다. 가우디는 17세 때 여기서 거주했다. 그 당시의 살던 모습을 재현해 놓고 관람을 허용한다. 외형상으로도 거대하고 파도를 연상케 하는 곡선 설계가 두드러진다. 카사 바요트와 함께 두 건축물은 참으로 값진 가우디의 유산이다.
* 스페인 바르셀로나 도심의 건물들
도심의 건물들이 눈부시게 아름답다. 유럽여행에서 항상 느끼는 진한 중세문화의 꽃불이 스페인에서 내 가슴을 흔든다. 단단하고, 구성미가 뛰어나고, 예술적인 웅장한 건물들 앞에서 역시 유럽은 유럽이구나, 동일한 문화가 흐르고 있구나, 부러움으로 감탄한다.
지금 그란디아 큰 길로 달려나간다. 도로변에 자전거와 오토바이가 많다. 지하철 100년 역사다. 현재 5호선인데 공사를 다 하면 7호선이다. 집값이 상승한다. 유럽의 검은 돈이 돈세탁을 거쳐 집을 사기 때문이다. 대부분 월세로 산다. 불법 이민자가 많다. 아프리카 모로코인들이 많다. 중남미 사람들이 많은데 식민지여서 그렇다. 동유럽 루마니아 등에서 불법 이민이 많다. 100년 이상 사용하던 뻬스타가 유로화로 바뀌었다. 그로 인해 부작용이 많다.물가 상승으로 아직도 흔들리고 있다. 이곳 젊은이들은 분리 못하고 부모와 산다. 독립이 소망이다. 화려함 속의 아픔이다.
아파트 내부만 고쳐서 산다. 평균수명은 남자가 78세, 여자가 83세다. 상가는 토,일요일은 문 닫는다. 빵, 꽃, 신문 가게만 연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2시 혹은 5시에 문 닫는다. 오후 2시부터 5시까지는 낮잠 자는 시간이다. 시에스타 시간으로 30분 정도 잔다. 오후 5시부터 8시에 영업하기도 한다. 현재 시간 오후 2시 30분, 상가문이 닫힌 곳은 시에스타, 낮잠 자는 시간이다. 이것도 그리스에서 보았던 낮잠 문화와 동일하다. 바르셀로나의 도심은 곳곳에서 비경을 선사한다.
* 스페인 바르셀로나 약국
나는 세계여행할 때마다 그 나라 도시의 약국을 유심히 본다. 나의 작은 아들이 약사이기 때문이다. 약국의 상호가 유럽과 미주 서로 다르다. 유럽에 가까운 나라에서는 첫 글자가 'F'로 시작한다. 즉 'FARMACIA'다. 어김없이 이곳 스페인 바르셀로나 시가지의 약국 상호도 그렇다. 미주에 가까운 나라는 'P'로 시작한다. 즉 'PARMACIA'다. 이것뿐만 아니라 조금씩 알파벳을 변용하여 그 나라의 언어로 사용한다. 이런 것들을 보고 배워가는 것, 또한 여행 중 얻는 큰 소득이다.
* 스페인 바르셀로나 성가족성당 외경
성가족 성당은 예수, 성모마리아, 요셉의 가족 성당이다. 1만제곱미터, 즉 3천평을 시민주택 지으려고 했는데 못하고 바둑판 한블럭을 사서 1882년 빌라르 건축가가 짓기 시작했다. 150만원을 가지고 1년 짓다가 그만두자 가우디가 31세 때 선택받아 성당을 짓기 시작했다. 1883년~1926년까지 44년간 지었다. 가우디는 멋쟁이로 마차 타고 와서 임무를 지시했다. 성당 짓기에 몰입하다가 자신을 돌보지 못하였다. 그는 마지막 죽는 순간에도 성당 짓기에 빠져 그 성당 앞에서 1926년 전차에 치여 74세에 사망했다. 택시가 3대나 그냥 치고 지나갔다.
가우디는 이 성당을 종교와 자연을 테마로 건축했다. 종교만이 아닌 것이 특색이다. 예수 탄생의 문은 일생의 아침이고, 고난의 문은 일생의 정오이며, 부활의 문은 일생의 저녁을 상징하다. 이 세 문이 20년 후에 완성될 예정이다. 탄생의 문에서 중단되었다. 한국인 교포도 500만원을 기부했다. 처음에는 자료부족과 자금난이 심각했다. 현재는 건축료를 관광객이 많아져서 관광객으로부터 75%, 기여금으로 25%를 확충한다. 앞으로 20년 후 완성하면 세계최대의 성당이 될 것이다. 지금도 석고모형 만들어 계속 짓고 있다.
바르셀로나 도심에서 만난 성가족성당은 놀라웠다. 하늘로 솟구친 첨탑이 아득하다. 8개 사도의 탑과 4개 사도의 탑이 있다. 12개 탑이 100m다. 모두 완성되면 18개의 탑이 되는데 4개의 사도탑은 130m, 1개의 성모탑은 140m, 1개의 예수님탑은 170m다. 몬주익 언덕이 170 m 높이여서 그렇게 짓는다. 그때는 세계최대 성당이 된다. 성당 외벽에 새겨진 조각품들이 빼어난 예술성의 극치다. 물 정원 앞에서 조망한 후에 가우디가 심혈을 기울였던 탄생의 문에 먼저 갔다.
* 바르셀로나 성가족성당 탄생의 문
가우디가 43년간 심혈을 기울여 생시에 만든 문이다. 예수 탄생을 축복하며 동쪽으로 난 문이다. 사람의 일생에서 아침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사도의 탑 4개가 100m의 높이로 솟구쳐 비상하며 전면에는 비둘기들과 펠리칸 새, 등 예수 탄생을 축복하는 조각상들이 온통 새겨져 있다. 자연물을 조각하여서 야자수도 있고, 꽃모양도 있고 그 섬세함이 아기자기하면서도 우아하다. 그 문으로 들어가서 내경을 관람하였다.
* 성가족성당 내경
가우디가 계획했던 모형도가 전시되어 있는데, 참으로 치밀하고 거대한 구상이었다. 그는 완전하지 않으면 건축하지 않았다. 석회로 미리 본을 떠서 만들어 보고 옳다고 판단이 되면 그대로 지은 것이다. 그의 작업 장면들이 곳곳에 있다. 거울을 달아 위와 아래를 정확히 보기도 했다. 성당의 내부는 아직 공사 진행 중이어서 엉성하다. 일부 완성된 천정은 야자수를 상징하는 모형도 있다. 곳곳에서 자연의 숨결이 숨쉬고 있다. 그가 죽기 마지막까지 공사를 지휘하던 사진도 걸려 있다. 그것이 가우디의 마지막 모습이다. 스페인이 낳은 위대한 조각가 가우디, 그의 숨결이 배인 공간에서 숙연해진다.
* 바르셀로나 성가족성당 고난의 문
탄생의 문으로 들어가서 내경을 관람하고 고난의 문으로 갔다. 이곳은 가우디 사망 후 조각한 문이다. 그래서일까. 탄생의 문과는 차원이 다르다. 단조롭고, 웅장함이 덜 하다. 한낮 정오의 상징이니 탄생의 문보다는 화사하다. 그러나 그에 담긴 뜻은 비통하다.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그의 어머니 성모와 제자들이 슬픔에 잠겨 있고, 동아줄이 기둥을 휘감아 있고, 일생의 고난을 예고하는 처절한 조각상들이 새겨져 있다.
* 바르셀로나 성가족성당 고난의 문앞 퇴장문
성가족성당의 동문으로 입장하여 서문으로 퇴장했다. 탄생의 문으로 들어가서 내부를 보고, 고난의 문을 보고 나온 것이다. 퇴장문 또한 아름다운 조형이다. 예술이다. 가우디로 인하여 스페인 바르셀로나는 다른 도시와는 다른 예술적 향기를 분무한다. 퇴장도 아름답게 하고 길을 건너 공원에 잠시 들렀다.
* 바르셀로나 성가족성당 고난의 문앞 공원
고난의 문 앞에는 공원이 있어 석양빛에 물든 쉼터를 바르셀로나 시민들이 거닐고 있다. 가우디의 족적을 따라 나도 입구에서 서성이며 함께 호흡했다. 앞으로 성당이 완공되면 주변이 모두 공원화 된다. 이 공원은 시민들이 모여 쉬기도 하고 산책하기도 하고 고요하다. 고난의 문 건축물과 함께 비경이다.
* 성가족성당 부활의 문 공사
고난의 문에서 나와 남쪽의 부활의 문으로 갔다. 아직 공사 중인 건축물은 온통 철제 구성물로 엉성하다. 그런데 바로 그 곁에서 아베 고속철 공사 중이다. 성가족 성당에 지장을 주어 못하게 하는데도 계속 공사하고 있다. 부활의 문이 완공되면 그 앞 건물들은 무너지고 고난의 문 앞 공원처럼 부활의 문 앞 공원을 조성할 예정이다. 다음에 이곳에 올 때는 없어질지도 모르는 길이라는 생각에 애잔하여서 걷고 또 걸었다.
* 성가족성당 부활의 문앞 모자이크 공예품 가게
언젠가 부활의 문이 완성되면 없어질 가게다. 부활의 문 바로 잎에 있어서다. 완공되면 이곳에 공원을 지을 계획이다. 아직은 훌륭함 모습으로 외객을 맞이 한다. 주로 모자이크 작품이다. 가우디의 뛰어난 예술적 감각을 일상 생활용품에도 적용시켜 만들었다. 값은 상당히 비싸다. 화려하면서도 우아한 공예품들이다.
* 바르셀로나 까달루니아 광장
바르셀로나 최고의 광장이다. 분수대와 동상들이 큰 위상으로 먼저 눈에 들어 온다. 광장 주변에는 노란 택시들이 많다. 바르셀로나 택시는 검정과 노랑색인데 지붕 위 녹색 불이 켜진 택시는 빈차다. 지붕 위에 번호가 있는 택시는 손님을 실은 차다. 시민들이 주말이나 금요일은 대부분 시외로 나기가 때문에 도심이 한산하다. 광장 주면에 세워둔 오토바이도 많다. 바르셀로나에서는 차도 혹은 거리에서 오토바이와 자전거를 많이 볼 수 있다.
광장 곁 대로변에 한국의 삼성전자와 기아모토 큰 건물이 자랑스럽게 우뚝 서서 내 조국의 위상을 드높이고 있다. 지금은 저녁 무렵 석양이 촉촉히 내리고 퇴근하는 바르셀로나 시민들의 걸음이 분주하다. 까달루니아 광장은 유럽의 향수를 듬뿍 머금고 있다. 사방이 대로로 둘러싸여 있어서 도로변 어느 곳에서 보아도 참으로 아름답다.
* 바르셀로나 람블라스 거리
바르셀로나 최고의 광장인 까달루니아 광장 바로 건너편에 있다. 서울 명동과 같은 거리다. 자전거가 많이 매여 있다. 10명 중 8명이 도둑이고 2명만 관광객인 곳이다. 그 만큼 도둑을 조심하라는 뜻이다. 지도 들고 설명하는 자, 구걸하는 자, 과잉 친절자는 모두 수상한 자이며 사양하라는 주의사항을 들었다. 도둑이 일본인을 표적으로 삼는다. 그런데 일본인과 한국인 구분을 못해서 한국인들이 표적이 되곤 한다. 여권 도난시에는 마드리드로 가서 임시 여권을 만들어 가야 된다. 바르셀로나에는 영사관이 없다. 관광객처럼 2~3인조를 짜서 노리고 있다. 자유시간을 5시 50분까지 주어 람블라스거리를 돌아보았다. 차가 다니지 않는 넓은 폭의 거리에 사람으로 꽉 차 있다. 거리 상점도, 휴식 의자도 소중한 한 몫을 한다. 스페인의 토속 상품을 보며 기념품도 살 수 있고 쉴 수도 있어서 좋다.
스페인 유일의 백화점 엘고르떼 잉글리쉬에도 들어가 둘러보았다. 화려한 최고의 상품들이 진열되어 있다. 도로에 나와 잠시 노변 의자에 앉아 길거리 풍경도 보았다. 바르셀로나 시민들의 생활상을 그대로 본다. 젊은이들의 활기찬 모습과 노변 거리 상인이 눈길을 끈다. 나도 그들 속에섞여 잠시나마 바르셀로나의 시민인듯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바르셀로나 낭만의 거리를 지나 석식식당에 갔다. 내일은 1시경 비행기 탄다. 아침 10시경 호텔을 출발한다. 이것으로 스페인의 공식적인 여행코스는 끝났다. 참으로 아름다운 여정이었다.
2010년 3월 11일 목요일 스페인 바르셀로나 출발, 네덜란드 암스텔담 경유
* 바르셀로나 홀리데이인 호텔 출발
바르셀로나의 3월 아침은 쌀쌀했다. 원래는 이렇게 춥지 않다는데 기상 이변으로 그렇다. 호텔 주변에 눈이 하얗게 남아 있다. 언제 또 바르셀로나의 눈을 만져볼까 싶어 눈을 한 웅큼 쥐어보았다. 내 생애에 다시 이곳에 오겠는가. 참으로 아쉬운 시간이다. 호텔 뷔페 조식을 마치고 바르셀로나 공항으로 출발했다. 호텔에서 공항까지는 40분 소요된다. 터미널 1으로 간다. KLM항공을 탑승하기 위해서다.
* 스페인 바르셀로나 공항 가는 길
아침 햇살을 받으며 바르셀로나의 공항길을 달린다. 바르셀로나의 도로 안내표지판이 고가도로에 걸려 있다. 우산 소나무와 바르셀로나 시가지가 아름다운 모습으로 배웅한다. 스페인 북부는 곳곳에서 한국의 풍경과 유사한 것이 많았는데 지금도 멀리 보이는 산풍경이 그내 조국의 향수를 자아낸다. 농토도 그렇고, 들녘도 그렇고, 외곽의 풍경은 참으로 소박하다. 버스는 공항으로 줄기차게 달리고 있다. 네덜란드 암스텔담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서다. 그곳 공항을 경유하여 인천공항으로 가기 때문이다. 순간, 순간 남유럽의 여행을 곱게 접어가고 있다.
* 스페인 바르셀로나 공항
스페인에서 네덜란드로 간다. 바르셀로나 공항에서 암스텔담행 항공권 티켓팅을 하는데 국제선은 개별적으로 짐을 부친다. 우리는 네덜란드에서 다시 인천까지 가야 하므로 티켓 2장을 받아야 한다. 짐표를 비행기표와 동일한 지 꼭 확인해야 한다. 보딩은 부부끼리 해야 수속이 쉬워 우리 부부도 함께 했다. 바르셀로나에서 암스텔담을 경유하여 인천까지 간다. 바르셀로나에서 암스텔담까지는 2시간 30분 소요, 암스텔담에서 인천까지는 10시간 40분 소요된다.
바르셀로나 공항 활주로에 우산 소나무가 많다. 정시에 이륙했다.현지시각 오후 1시 20분 1672 KLM항공이다. 남편과 나는 26E, 26F 창측 좌석이다. 바르셀로나 공항을 이륙하자 해변도시의 시가지와 지중해가 비경이다. 조금 지나자 피레네 산맥 설봉이 또한 비경이다. 기내 중식으로 샌드위치 빵과 쥬스, 커피가 나왔다. 여행 중에 먹는 기내식도 아름다운 여정의 한 목록이다.
* 네덜란드 암스텔담 스치폴공항 경유
바르셀로나 공항을 정시에 이륙한 비행기는 네덜란드 상공에 진입했다. 네덜란드는 이미 내가 몇년 전 여행을 한 곳이다. 그런데도 이 순간 가슴이 설렌다. 지상에 보이는 장면들이 참으로 아름답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농토가 반듯, 반듯하게 정리된 풍경이다. 암스텔담 공항에 정시에 잘 도착했다. 활주로에서 보이는 암스텔담 시가지의 나무들이 아직 잎을 피우지 않는 채 줄지어 서서 나를 반기는 것 같다. 그래, 나도 참 반갑구나. 잠시 스쳐 지나가는 여정이지만 네덜란드는 고운 추억으로 다시 물든다.
그런데 KLM 인천행 비행기가 내부 사정으로 캔슬되어 중국기 남방 항공으로 베이징을 경유하여 가는 코스로 바뀌었다. 공항에서 제공하는 2장의 서비스권을 받았다. 10유로의 석식권과 20분 무료 국제통화권이다. 먼저 한국의 두 아들에게 전화를 했다. 베이징 공항을 경유하여 가느라 인천공항 도착시간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늦어서다. 한국은 지금 3월 12일 새벽, 곤히 잠자는 시간인데 두 아들 내외를 깨워야 했다. 3월 12일 낮 12시경 인천공항 도착인데 밤 10경으로 바뀌어서 알려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공항 식당을 몇 군데 두러보고, 우리 부부는 10유로의 돈에 맞춰 피자와 쥬스로 저녁식사를 하고 암스텔담 스치폴 공항에서 밤 9시 30분 베이징행 비행기에 탑승했다. 이제 유럽을 떠나고 있다. 먼 후일 모두 소중한 회억으로 나를 행복하게 하리라.
2010년 3월 12일 금요일 중국 베이징 공항 환승, 인천공항 도착
* 베이징 공항에서 환승
암스텔담 공항을 출발하여 창공을 밤새 날아와 베이징 공항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다시 인천행 18시 비행기로 환승한다. 베이징 공항은 복잡했다. 환승 대기실에서 기다리는데 인천공항으로 가야할 한국 승객의 짐 일부가 베이징 공항게 함께 내렸다는 연락이 왔다. 나와 일행 몇명이 여행가방을 찾아 다시 인천공항으로 부쳤했다. 가끔씩 이런 누락이 긴장시키는데, 그래도 내 조국 한국에 가까이 왔다는 것에 대하여 마음이 참 편안하다. 비행기는 정시에 이륙하여 석양을 가르며 밤을 맞이하는 내 조국으로 날아가고 있다.
* 인천공항 도착
중국 베이징에서 인천공항에 무시히 도착했다. 오후 9시 30분이다. 참으로 긴 여정이었다. 지난 3월 1일에 집을 나서서 12일만에 집에 가는 것이다. 대한민국 인천공항은 세계3위 공항이다. 그 위상도 대단하고 육안으로도 그 훌륭함이 드러난다. 자랑스런 내 조국의 공항에 발을 밟을 때면 언제나 큰 자부심을 갖게 된다. 나는 잠시 휴식기를 거쳐 또 다른 곳으로 세계여행을 떠날 것이다. 오대양 육대주 50여개국을 다 돌았지만 크루즈 여행을 포함한 지구 곳곳의 미여행지가 나를 부르고 있다. 가장 적은 투자로 가장 큰 교육효과를 거둔다는 여행, 나는 국내와 국외 여행 모두를 사랑한다. 밤 11시경 집에 도착했다. 큰아들과 큰며느리 내외가 우리집에 미리 와서 방도 따뜻하게 해놓고 우리를 맞았다. 항상 고마운 가족의 품에서 행복한 시간이다.
첫댓글 참으로 대단하십니다. 사진과 글 잘 감상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