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목소리”와 “격앙된 표현”
2024년 5월 4일
해외 대법제자
【정견망】 나는 전에 말재주가 뛰어난 사람을 부러워하곤 했는데, 좋은 단어나 구절에 끊임없이 관심을 갖다보니 내 말주변도 점점 좋아졌다. 어떤 사람들은 내가 하는 말을 듣는 것을 좋아했고 나도 이를 꽤 즐겼다. 한번은 큰 모임에서 발언한 한 후 ‘칭찬’을 좀 받자 득의양양해졌다.
나중에 또 다른 큰 모임에서 내가 발언할 때 문자 메시지가 와서 또 ‘칭찬’인 줄 알았다. 하지만 나중에 해결해야 할 번거로운 문제임을 알게 되었고 “멋대로 상상한” 자신에 대해 조소를 금치 못했다. 그날 밤 나는 육체적으로 매우 견디기 힘들었고 또 과시심에 환희심이 더해져서 불러온 마난(魔難)임을 알았다.
큰 목소리로 말하기
나는 수련생들과 교류할 때 청산유수로 말한다. 그런데 때로 ‘큰 목소리로 말하고’ 싶은 순간, 상대방이 갑자기 내 말을 끊는 경우가 있었다. 어떤 사람은 졸린다면서 잘 자라고 하거나 또는 다른 할 일이 있다거나, 또는 주제를 바꾸고 싶어 하는 등등이다. 이럴 때 나는 매번 아직 말이 끝나지 않았는데 맥이 빠짐을 느꼈다.
점차적으로 나는 “큰 목소리로 말하는” 배후에 집착심이 있음을 깨달았다. 우선 과시심이 숨어있는데 왜냐하면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말 잘하는 사람을 높이 평가하기 때문에 “큰 목소리로 말하면” 찬사를 얻기 쉽다. 또 칭찬을 통해 희희낙락하며 뿌듯함을 느끼는데 이는 환희심이 아닌가?
나는 원래 말주변이 그리 좋지 않았지만, 그래도 진보할 수 있었던 이유는 암암리에 ‘명성’을 추구한 노력의 ‘성과’였다. 이 ‘성과’는 무슨 멋진 장식이 아니라 단지 명성을 구하기 위한 ‘도구’가 아닌가? 사실, 이런 것을 참고 쓰지 않는 것이 “명성 추구”를 내려놓는 일종의 노력이다.
비록 말재주를 쓰면 ‘명성’을 얻기 쉽고, 당장은 아무런 후과(後果)도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법(法)에서 내가 이해한 것은 공짜로 얻는 것은 그 어느 것도 사실 공짜가 아니며 모두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헛된 명성은 실질적인 행복을 가져올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수련 제고는 더욱 가져올 수 없고 이는 오히려 불만과 환희심 등이 생긴다.
지금 나는 기본적으로 “큰 목소리로 말하기”를 중단했다. 가끔 여러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듣다 보면 말에 뭔가 요점이 없는 것 같고, 내가 ‘고견(高見)’을 발표하면 반드시 놀라며 나를 흠모’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이 느낌은 정말 간질간질하지만 그래도 참을 수 있었다. 수구(修口)와 수심(修心)의 가치는 헛된 명성이 가져다주는 영광보다 훨씬 가치가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격앙된 표현
얼마 전 어느 이른 아침, 갑자기 머릿속에 한 단어가 떠올랐고, 나는 그것을 단번에 이해했다. 이 단어는 특히 지난 몇 년간 나의 습관적인 표현방식을 아주 정확하게 표현했는데 바로, ‘격앙된 표현 방식’이다. 이 점을 똑똑히 이해하고 난 후 나는 이 방식이 많이 타파된 것을 느꼈는데 마치 간파된 후 폭로된 것 같았다. 나는 곧바로 이런 격양된 표현이 얼마나 가소로우며 정상인이 말하는 그런 말이 아님을 알았다.
이런 방식에선 내심이 평화롭고 안정되기가 어렵고 반대로 격동되거나 동요하기 쉽다. 말을 꺼내기만 하면 쉽게 비분강개하거나 ‘큰 원칙’을 사용해 남을 끌어올리려 한다. 물론 자신은 의식하지 못하고 또 내 말이 아주 도리가 있다고 여긴다. 정상적인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는 것을 모르는데 이것이 바로 “과도하게 힘쓰는 것”으로 어떤 의미에서 말하자면 “선정”성이 있다. 이렇게 말을 해야만 만족스럽고 힘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옳지 않다.
성인은 ‘평온(平)’을 중시해서 말하는 것도 차분하며 심태가 담담하며 말투도 자연스럽고 인간적이다. 도리를 따지는 것 역시 평화롭게 한다. 하지만 소인은 ‘높이(高)’를 추구하고, 말하는 것도 격앙되며 거창하다. 심태도 거만하고 ‘겉만 번지르르해서’ 일상적인 화제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높이’ 말하고 강렬한 말투가 더해지면 분위기를 과장하거나 사람을 흥분시키며 심지어 극단적으로 만들 수 있다. 또는 듣는 사람이 반감하거나 저촉하게 만들 수 있다. 어느 쪽이든, 다 사람의 정서를 이지적이고 냉정하게 만들기보다는 더 강렬하게 만든다.
사실, 생각해 보면 ‘격앙된 표현’ 방식은 노력과는 상관없이 별로 효과적이지 않음을 알게 된다. 왜냐하면 사람의 본성에 의해 거부당해 누구도 이런 방식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심지어 “감정을 선동해” 한 차례 ’수확‘을 얻는다 해도 실제로는 소통 효과가 좋지 않다. 반면 평화적인 소통 방법은 힘도 덜 들고 효율적이며 풍부한 지혜가 있어 흔히 가볍고 자연스럽게 이뤄진다. 왜냐하면 우주의 특성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사부님께서는 《음악과 미술 창작회 설법》〈음악 창작회 설법〉에서 말씀하셨다.
“평화로운 상태야말로 바로 선(善)한 것이고 사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사람의 상태이다.”
나는 몇몇 수련생들이 하는 말이 듣기 싫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들은 말을 격정적으로 표현했고 늘 감정이 고양되어 있었다. 마치 평화로운 방식이 아니라 격정적인 방식으로 무언가를 표현하는 것 같았다. 사실 그것은 그들 심성의 거울이었다.
몇 년 전 내가 말하는데 마치 소리를 지르는 것 같고 너무 격동적이고 초조하다고 어떤 사람에게 지적을 받았다. 나중에 나는 말투를 낮추고 속도도 느리게 하는데 주의했는데 힘을 많이 줄였다. 표면 형식은 좋아졌지만 나는 여전히 모종의 ‘격앙’된 요소가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평범한 말은 익숙하지 않고 뭔가 ‘격정’적인 말이 있어야 힘이 있고 정진하는 것처럼 여겼기 때문이다.
나는 또한 자신을 ‘자조(自嘲)’해서 걸핏하면 격동했다. 그것은 정말이지 틀이 너무 작아서는 안 되며, 시야가 너무 좁아서는 안 된다. 식견이 많다고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나는 또한 진정으로 식견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사회적으로 ‘견문이 넓은’ 사람이 아니라 지혜가 풍부한 사람임을 발견했다.
전통 이야기를 보면 일부 글을 모르는 부인들에게도 식견이 있고 시야가 있다. 부유함[富]은 표면이 아니라 내심을 보아야 하며, 허영이란 내심이 공허하기 때문에 비로소 밖으로 구하는 것이다. 즉 자신을 자랑해 남의 칭찬을 받고 남에게 아첨해 남의 환심을 사려는 것이니 가련하고 불쌍하지 않은가!
결론
일부 수련에 소질이 있는 수련생들은 다년간 모두 묵묵히 자신을 표현하지 않는다. 주의 깊게 관찰하고 생각해 본 결과, 나는 그들이 모두 아주 지혜롭고 침착하고 차분하며 내심이 아주 “명확”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은 진정으로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데 세속에서 추구하는 것은 사실 쓰레기와 같고 떠가는 구름일 뿐임을 안다.
이 수련생들은 대화가 순수하고 솔직하며 과장하지 않는다. 비유하자면, 내가 보기에 그들은 실제로 묵묵히 “차를 음미”하는 즐거움을 알기에 떠들썩하게 함께 “음주”하는 자극과 도취를 좋아하지 않는다. 많은 관련 원칙을 정리한 후 나는 이 수련생들의 가치와 지혜를 점점 더 깨달을 수 있었다.
법륜대법(파룬궁)은 중국 길림성 출신인 李洪志 대사께서 1992년부터 중국에서 전하기 시작한 심신수련법으로, 몸과 마음의 정화효과가 탁월하여 현재 전세계 100여개 국가에 전파되어 있습니다.
현대인들은 과거의 사람들보다 業이 많아 대부분 몸에 질병이 많기에 몸은 등한시하고 마음만 닦는 방법으론 병든 사람들을 해탈시킬 수가 없는 실정입니다. 그래서 이홍지 사부님은 몸과 마음을 함께 닦는 성명쌍수의 大法으로 세계 각지의 사람들을 제도하고 있습니다.
전법륜은 법륜대법의 수련지침서로 끝까지 여러번 읽어보시면 인생을 살면서 꼭 알고 싶었던 진리에 대한 많은 의문점들을 해결하실 수 있을 겁니다.
전법륜 책에는 진정한 나는 누구이며 왜 인간으로 태어나 고생하며 사는지, 우주 만물의 근원인 우주의 특성(우주의식, 우주 정신)은 무엇인지, 업력을 소멸하고 공덕을 쌓는 법, 수련과정 중에 나타나는 각종 문제점과 예방책, 제3의눈(천목), 숙명통, 빙의현상과 방언, 주화입마, 공중부양현상, 몽유병, 자심생마의 실체, 살생과 육식문제, 질병의 원인, 영감, 근기, 청정심 등 깨달음을 추구하는 수행자들이나 종교인들이 꼭 알아야 할 내용들이 담겨 있어 어떤 종교를 믿든, 어떤 수행을 하든 모두 지도적 작용이 있는 책입니다.
사람은 감각기관을 통해 후천적으로 보고 듣고 느끼고 경험하여 인식한 정보를 대뇌에 저장하게 되는데 이런 정보들이 자신의 몸과 마음에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거짓말을 진실이라 믿고 살면 거짓말에 속아 나중에 낭패를 보는 것처럼 평소 우리가 무엇을 자주 보고 자주 듣는가가 아주 중요합니다. 우리가 야동을 보면 음욕이 일어나 음욕을 만족시키려 하듯이 나쁜 사람, 부정적인 기운과 좋지 않은 음식을 늘 가까이 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서서히 물이 들어 몸과 마음이 탁해집니다. 삼겹살 식당에 가면 누린내가 자연히 옷에 스며드는 것처럼 깨닫지 못한 거짓 선지자와 거짓말을 진리로 포장한 글, 좋지 않은 기운이 발산되는 책이나 부정적인 글, 탐욕과 분노와 악행을 일삼는 사람, 술, 담배, 마약, 해로운 가공식품같이 몸과 마음을 오염시키는 것들을 가까이 하면 보약 속에 든 비소처럼 자신을 서서히 해롭게 만들 것입니다. 컵 안에 든 흙탕물을 맑게 정화시키는 방법은 깨끗한 물을 계속 부어서 맑은 물로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옷이 더러우면 맑은 물에 들어가 씻어야 하듯이 우리의 몸과 마음도 청정하게 하려면 맑고 밝은 에너지를 지속적으로 받아서 탁하고 어두운 에너지를 몸 밖으로 배출시켜야 합니다. 그러므로 깨달음을 이루어 큰 지혜와 법력과 자비심을 고루 갖춘 대각자의 고차원 에너지가 발산되는 진실한 가르침이나 경전을 자주 보고, 마음을 고요히 안정시키고 평화롭게 하는 선정과 가급적 유해물질이 없는 순수한 식품을 적당히 먹고, 아울러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나쁜 일을 하지 않는 것이 곧 자신을 정화시키는 길입니다. 따라서 살아생전에 대각자와 正法을 인연하는 것은 우리에게 최고의 행운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만 마음가짐(욕심과 불신여부)과 업력의 크기에 따라 정화효과 또한 다르게 나타나니 단시간에 효과가 크지 않다고 실망하기 보다는 꾸준히 보고 정진하는게 바람직할 것입니다.
성자들이 이르길 사람으로 태어나기 어렵고 사람으로 태어나서도 대각자를 만나기는 더더욱 어렵고, 설령 대각자를 만나도 믿음을 내기가 어렵다고 하였습니다.
자신이 후천적으로 배우고 형성한 지식과 고정관념이 대각자의 가르침과 상충되면 사상이 혼란해져 믿음이 흔들리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자기가 가진 지식이나 관념이 과연 진실한 것인가를 먼저 성찰해보고 관념이 아닌 직관을 통해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지금 시중에는 깨달음을 내세워 돈벌이에 치중하는 수련단체들이 아주 많은데, 수련의 원리에 관한 체계적인 가르침도 없이 이런저런 수련법을 짜깁기해서 가르치는 곳이 많다 보니 수련자들에게 상기증, 빙의, 정신착란, 금전갈취 등의 각종 부작용이 발생하고 있음에도 이를 누구도 책임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무 곳이나 찾아가서 수련하다간 도리어 좋지 못한 결과가 초래될 수 있으며, 특히 스승이 가르친 법리대로 실천하지 않고 자기 맘대로 하다간 문제가 발생할 소지가 많은 게 수련의 세계이니 심신수련에 관심이 있는 분들은 전법륜 책을 꼼꼼히 읽어보시고 수련의 원리와 주의할 점 등을 먼저 정확히 파악하신 후에 수련하시길 바랍니다.
전법륜 보기 => https://www.dafamedia.or.kr/book/HTML/zf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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