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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릭스 총독 앞에서 심문받는 사도 바울
사도행전 24:1~27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에게 체포되어 폭력에 의한 죽음의 위기를 당하였으나 당시 예루살렘에 주재하고 있던 로마의 천부장과의 그의 부하들에 의하여 극적으로 구출을 받았습니다. 그 다음날 유대인 최고 법정인 산헤드린 법정에 서서 심문을 받았으나 유대인 장로들은 사도 바울의 종교적 불법성을 입증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유대주의 극단주의자들 중 사십 여 명이 사도 바울을 죽이기로 맹세하고 그를 살해할 계획을 꾸몄는데 마침 바울의 조카가 이 소식을 듣고 천부장에게 전해줌으로써 천부장이 급히 부하들을 준비시켜 사도 바울을 예루살렘 북서쪽 100km 가량 떨어진 가이사랴의 총독 관저로 한밤중에 출발하여 다음날 안전하게 이송했습니다. 벨릭스 총독은 사도 바울을 그의 총독 관저 곧 과거 헤롯 대왕이 지은 헤롯 궁의 감옥에 두고 예루살렘에서 그에 대한 고발자들이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바울이 도착한 지 닷새가 지나자 마침내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다른 유대인 장로들을 대동하고 세속 법률가 더둘로와 함께 총독 앞에서 바울을 고발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벨릭스 총독은 바울을 감옥에서 불러내어 자기 앞에서 예루살렘에서의 소동 건에 대하여 재판을 진행하였습니다. 맨 처음에는 대제사장측의 변호사 더둘로가 사도 바울을 고발하는 취지의 발언을 하였고 그 다음은 사도 바울이 그에 대하여 답변하고 재판장인 벨릭스 총독이 이 고발과 답변을 다 듣고 결정을 하는 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또한 그 재판 후에 이년 동안 사도 바울이 가이사랴 감옥에서 비교적 자유롭게 구금된 채 지내는 동안에 있었던 일들이 짧게 덧붙여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 말씀을 기록된 순서대로 살펴보면서 몇 가지 영적 교훈을 함께 묵상하도록 하겠습니다. .
첫째로, 사도 바울이 고발된 내용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됩니다.
먼저 1절로부터 3절까지를 다시 함께 읽겠습니다.
“닷새 후에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어떤 장로들과 한 변호사 더둘로와 함께 내려와서 총독 앞에서 바울을 고발하니라 바울을 부르매 더둘로가 고발하여 이르되 벨릭스 각하여 우리가 당신을 힘입어 태평을 누리고 또 이 민족이 당신의 선견으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로 개선된 것을 우리가 어느 모양으로나 어느 곳에서나 크게 감사하나이다”
탐욕스럽고 사나운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예루살렘에서 가이사랴까지 직접 내려온 것은 사도 바울을 얼마나 미워하는 눈엣가시로 여겨서 그를 제거하려고 했는가를 잘 보여줍니다. 그들의 법률적 대리자인 더둘로는 재판장인 벨릭스에게 고발하는 말을 하면서 입에 발린 아첨의 말을 늘어놓는 것을 보게 됩니다. 벨릭스는 당시 유대인들을 잔혹하게 대하여 함부로 학살한 포악한 로마 총독이었습니다. 그리고 교만하고 배은망덕한 자이기도 했습니다.
요세푸스의 역사 기록에 따르면, 벨릭스는 본래 종이었다가 자유민이 된 해방 노예 출신입니다. 그는 형이 로마의 고관이 된 덕분에 이렇게 권력을 쥐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자기를 유대인들을 다스리는 로마 총독의 자리에 올 수 있도록 추천했던 유다의 요나단이라는 대제사장이 종종 자기를 불러서 유대인들을 통치할 때에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고 잔소리를 하는 것이 보면서 몹시 거슬렀습니다. 그래서 요세푸스의 기록을 보면, 벨릭스는 대제사장의 친구이자 예루살렘 주민인 도라스라는 사람을 불러서 요나단을 살해하도록 돈을 주면서 사주하였습니다. 그래서 돈에 눈이 어두워진 도라스라는 사람은 강도떼에게 돈을 주면서 대제사장을 살해하도록 했습니다. 자기를 불러서 자주 훈계조로 이야기하는 나이 많은 유대인 대제사장이 싫어서 사람을 돈을 주고 매수해서 강도를 시켜서 살해하도록 할 정도로 벨릭스는 야비하고 포악한 자였습니다. 당시 강도떼들이 일어나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벨릭스는 가차없이 잔인하게 그 유대인들을 학살하곤 했습니다. 그런데도 지금 이 더둘로라는 사람은 그렇게 유대인들에게 포악하고 야비하고 잔인한 통치를 일삼는 벨릭스에게 입에 발린 아첨의 말을 늘어놓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좋지 않은 행동입니다.
시편 12:3 말씀에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모든 아첨하는 입술과 자랑하는 혀를 끊으시리니”
라고 하였으며, 잠언 29:5 말씀에서도 이르기를
“이웃에게 아첨하는 것은 그의 발 앞에 그물을 치는 것이니라”
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아첨하는 자를 심판하시고 반면에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진실된 마음으로 경책하는 자를 나중에 더욱 사랑받도록 해주십니다. 우리 입술에서 건전한 칭찬과 격려의 말을 좋지만 마음에도 없는 입에 발린 달콤한 말은 피합시다. 어떤 이익을 얻기 위하여 지어낸 말로 상대방에게 추파를 던지는 말은 하나님께서 역겨워 하십니다. 도리어 상대방의 진정한 유익을 위하여 그의 허물을 온유함으로 책망하여 바로잡는 자를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고 축복하십니다. 할렐루야.
변호사 더둘로는 아첨의 인사말을 마치자 사도 바울의 죄목에 대하여 총독에게 말합니다. 4절로부터 9절까지를 함께 읽겠습니다.
“당신을 더 괴롭게 아니하려 하여 우리가 대강 여짜옵나니 관용하여 들으시기를 원하나이다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전염병 같은 자라 천하에 흩어진 유대인들을 다 소요하게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라 그가 또 성전을 더럽게 하려 하므로 우리가 잡았사오니 당신이 친히 그를 심문하시면 우리가 고발하는 이 모든 일을 아실 수 있나이다 하니 유대인들도 이에 참가하여 이 말이 옳다 주장하니라”
더둘로는 다음 세 가지 죄목으로 바울을 범법자로 고발하였는데, 그 세 가지 고발 내용은 사실에 부합되지 아니한 억지 주장입니다.
첫째는 전염병처럼 사람들을 불순사상으로 물들게 하며 로마 제국 각처에 흩어진 유대인들을 다 소란하게 하는 자라고 고발합니다(5절). 사도 바울을 정치적 불순분자, 사회의 불안을 조성하여 로마 제국의 통치를 방해하는 정치범으로 몰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도 덮어 씌웠던 거짓 죄목을 여기서도 사도 바울에게 씌우려고 시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로마 제국에게 세금을 내지 말라고 선동했다고 하여 빌라도 총독을 압박하여 결국 십자가 형에 처하는 데 성공했었는데, 지금도 사도 바울이 온 세상을 소란케 하는 불순분자라고 고발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의 통치에 대하여 반기를 들거나 로마 제국의 통치를 소란케 하기보다 도리어 모든 권력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고 하면서 로마의 통치에 따르도록 가르쳤으며 세금도 내어 세상의 질서를 지키도록 도우라고 로마서 13장에서도 자세히 쓴 바와 같이 로마 제국이나 유대인들을 소란을 일으킨 일을 결코 한 일이 없습니다.
두 번째로 사도 바울을 이단의 괴수로서 유대인의 전통 종교를 배반한 이단으로 몰아세웁니다(5절 하반절). 하지만 사도 바울이 증거한 복음은 결코 구약 성경 곧 모세와 선지자들의 증거한 말씀을 곡해한 바 없이 바르게 해석한 참된 진리를 증거한 것뿐이니 이 고발 죄목도 틀린 말입니다.
셋째로, 사도 바울을 성전을 더럽힌 성전 모독자로 고발합니다(6절). 하지만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 성전의 허용된 이방인 뜰 외에 이방인을 데리고 들어간 적이 없고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머무는 동안 나실인의 서약을 한 사람들과 함께 경건하게 결례 의식을 준수하고 있던 중에 갑자기 소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이 바울 곁에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가 있는 것을 보고 성전에 데리고 간 것으로 오해해서 사람들을 격동시켜서 성전 모독자로 몰아 죽이려고 든 것이니, 이것도 증거 없는 억지 주장입니다.
이처럼 유대인 대제사장측의 고발 내용이 증거된 후에 재판장 벨릭스 총독은 피고인인 사도 바울로 하여금 변론할 수 있도록 기회를 줍니다. 그리하여 사도는 당당하게 유대인들의 고발 내용에 대하여 하나씩 차례로 자기 변론을 시작합니다. 먼저 10절로부터 13절까지 함께 읽겠습니다.
“총독이 바울에게 머리로 표시하여 말하라 하니 그가 대답하되 당신이 여러 해 전부터 이 민족의 재판장 된 것을 내가 알고 내 사건에 대하여 기꺼이 변명하나이다 당신이 아실 수 있는 바와 같이 내가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올라간 지 열이틀밖에 안 되었고 그들은 내가 성전에서 누구와 변론하는 것이나 회당 또는 시중에서 무리를 소동하게 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제 나를 고발하는 모든 일에 대하여 그들이 능히 당신 앞에 내세울 것이 없나이다”
사도 바울은 벨릭스가 여러 해 전부터 로마 총독의 자리에 앉아 유대인 사회를 익히 잘 알고 재판장의 직분을 해와서 자기의 사건에 대하여도 충분히 잘 판단할 수 있는 경험과 지식이 있을 것을 기대하는 말로써 그의 변명을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유대인들의 첫 번째의 고발 내용으로 사도 바울이 세상을 소란케 하는 해로운 불순분자라는 조작된 고발 내용에 대하여 변명합니다.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한 번도 소란을 일으킨 바가 없고 예루살렘에 올라간 지도 열이틀밖에 안 되었고 한번도 사도 바울이 사람들과 변론하거나 시내에서도 소동을 일으킨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밝힙니다. 유대인들의 덮어씌우기 식의 발언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사실을 밝힘으로써 유대인들의 고발이 의도된 거짓말이라고 분명히 증거합니다.
또한 유대인들의 두 번째 고발 내용인 종교적 문제에 대하여서도 사도는 반박하는 말을 이어서 증거합니다. 14절로부터 16절까지 함께 읽겠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당신께 고백하리이다 나는 그들이 이단이라 하는 도를 따라 조상의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과 선지자들의 글에 기록된 것을 다 믿으며 그들이 기다리는 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니이다”
사도 바울은 여기서 유대인들이 그를 이단적인 가르침을 전하는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라고 고발하는데, 이것이 근거가 없는 말이라고 반박합니다. 사도 바울이 전하는 복음은 사실 전통적인 유대교 신자들이 믿는 바 동일한 조상의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을 먼저 말합니다. 다른 하나님이 아니라 조상적부터 믿어오던 그 동일한 하나님을 자기도 섬긴다는 것입니다. 또한 유대인들이 기독교인들과 사도 바울을 율법을 모독한다는 비방하곤 하지만 사실은 자기가 모세 율법과 선지자들의 글의 기록된 것을 다 믿는 철저한 성경주의자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사도 바울은 그 구약 성경을 가지고 가는 곳마다 우리 주님에 대한 구약 성경의 구절들을 가지고 그 약속된 그리스도가 바로 예수님이라고 증언하였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율법과 선지자들의 글을 모독하고 부인한 자가 아니라 그것을 지극히 잘 믿고 성경 제일주의로 살아오신 분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점에서도 유대인들의 고발이 잘못이요 오해라는 점을 확실히 드러내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문제로서 예루살렘 성전을 모독하였다는 문제에 대하여서도 자기의 진실을 밝히고 있습니다. 17절로부터 21절까지 함께 읽겠습니다.
“여러 해 만에 내가 내 민족을 구제할 것과 제물을 가지고 와서 드리는 중에 내가 결례를 해앟였고 모임도 없고 소동도 없이 성전에 있는 것을 그들이 보았나이다 그러나 아시아로부터 온 어떤 유대인들이 있었으니 그들이 만일 나를 반대할 사건이 있으면 마땅히 당신 앞에 와서 고발하였을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이 사람들이 내가 공회 앞에 섰을 때에 무슨 옳지 않은 것을 보았는가 말하라 하소서 오직 내가 그들 가운데 서서 외치기를 내가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하여 오늘 너희 앞에 심문을 받는다고 한 이 한 소리만 있을 따름이니이다 하니”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 성전의 여인들의 뜰 경계에 서 있는 바 경고문에 이방인이 들어가면 죽임을 당하리라는 말을 어기고 이방인을 데리고 들어갔다고 유대인들이 큰 소리로 시내에서 고발함으로 인하여 갑자기 주변 유대인들이 격분하여 사도 바울을 죽이려 들었던 것에 대하여 사도는 당당하게 그런 일도 없을뿐더러 그 때 소란을 일으킨 소아시아 출신의 유대인들이 지금 이 재판자리에 출석하지 아니한 것의 부당함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 아시아 출신 유대인들이 사도 바울이 이방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갔는지를 직접 보았다고 증언을 하려면 이 자리에 와서 증거해야 하는데, 그 증인들도 이 자리에 없다는 점을 밝힘으로써 성전 모독에 대한 고발도 실체 없는 일방적인 조작이라고 말해줍니다.
그리고 며칠 전 예루살렘에서 열렸던 산헤드린 공회에서도 자신은 그 가운데 딱 한 마디 곧 자신이 죽은 자의 부활을 믿는 신앙으로 인하여 심문을 받는다는 말만 했을 뿐인데, 도리어 바리새파 의원들과 사두개파 의원들간에 격렬한 분쟁이 일어났던 것을 상기시키면서 자신이 성전을 모독하거나 공회 안에서 불미스러운 말을 한 적도 없음을 증거했습니다. 이로써 사도 바울은 자기에게 대한 유대인들의 모든 고발장이 아무런 근거가 없음을 하나 하나씩 다 밝혀 자기의 무죄를 입증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번 변증 때에 특별히 복음 증거의 기회로 삼지 않고 자기의 법적 고발 내용이 아무 근거가 없다는 점에만 집중하여 변론하였는데, 이것은 그 재판이 사실상 복음을 증거할 수 있는 여건이 전혀 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입니다. 이것도 사도 바울이 때를 잘 분별하여 행한 지혜로운 행동이라고 봅니다.
이제 재판장 벨릭스는 양 원고와 피고 간의 상호 변론이 끝난 후에 잠정적인 결정을 내립니다. 22절로부터 23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벨릭스가 이 도에 관한 것을 더 자세히 아는 고로 연기하여 이르되 천부장 루시아가 내려오거든 너희 일을 처결하리라 하고 백부장에게 명하여 바울을 지키되 자유를 주고 그의 친구들이 그를 돌보아 주는 것을 금하지 말라 하니라”
총독 벨릭스는 유다 총독으로 몇 년 동안 일해오고 있었기 때문에 전통적인 유대교와 새롭게 일어난 기독교의 교리적 쟁점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고 유대인들이 기독교의 지도자들에 대하여 사무친 미움과 시기심도 갖고 있음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벨릭스는 사도 바울의 문제는 사회 소란을 유발한 범법행위가 있는 것이 아니요 종교적인 이해관계 때문에 일어난 분쟁이라는 것을 잘 알고서, 바울의 무죄함을 분명히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 자리에서 분명한 판결을 내리지 않고 나중에 그 천부장이 내려오면 결정하겠다는 말로 결정을 미루었습니다. 이는 대제사장과 유대 장로들의 반발을 달래고 그들의 비위를 맞추려는 정치적 결정을 한 것입니다. 다만 백부장을 불러서 사도 바울을 구금하되 그에게 자유로운 구금 상태를 유지하라고 하고, 사도 바울에게 기독교 동료들이 자유롭게 방문하는 것도 허락해주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아마도 이 명령대로 가이사랴에 있었던 전도자 빌립과 그의 네 딸과 여러 성도들이 자주 와서 사도 바울을 위로하고 교제하였을 것이 분명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박해를 받고 주님의 이름으로 감옥에 갇힌 자들을 위로하고 방문하고 사랑을 베푸는 것은 주님께서 귀하게 여기는 바입니다. 히브리서 13:1,1 말씀에서 이르기를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 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너희도 함께 갇힌 것같이 갇힌 자를 생각하고 너희도 몸을 가졌은즉 학대 받는 자를 생각하라”
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런 저런 모양으로 주님의 복음 때문에 고생하고 희생하며 여러 시련과 박해 가운데서 주님의 영혼들을 섬기는 주의 일꾼과 성도님들을 접하게 되면 마음을 함께 하며 그들을 돕기 위하여 기도하며 도움을 나누는 귀한 손길이 됩시다.
마지막으로 그 후 이년 동안 사도 바울이 가이사랴 감옥에 있으면서 벨릭스 총독 앞에서 복음을 전한 일에 대한 기록을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24절로부터 27절까지 함께 읽겠습니다.
“수일 후에 벨릭스가 그 아내 유대 여자 드루실라와 함께 와서 바울을 불러 그리스도 예수 믿는 도를 듣거늘 바울이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을 강론하니 벨릭스가 두려워하여 대답하되 지금은 가라 내가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리라 하고 동시에 또 바울에게서 돈을 받을까 바라는 고로 더 자주 불러 같이 이야기하더라 이태가 지난 후 보르기오 베스도가 벨릭스의 소임을 이어받으니 벨릭스가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 바울을 구류하여 두니라”
그 재판정의 변론이 있은 지 며칠 후에 벨릭스 총독은 그 아내와 함께 와서 바울을 불러내어 조용한 대화의 시간을 가지고자 했습니다. 이번에는 재판 문제가 아니라 사도 바울로부터 복음에 대하여 듣고자 시간을 낸 것입니다. 그가 그렇게 한 주된 이유는 그의 아내 드루실라의 요청 때문이었음이 분명합니다. 벨릭스는 로마 사람이요 그 후에도 아예 종교에 대하여 전혀 관심이 없는 태도를 견지한 것을 보면 벨릭스 스스로의 종교적 관심 때문이 아니요 순전히 그의 아내 드루실라가 그에게 요청했기 때문에 마련한 자리임이 분명합니다.
드루실라는 누구냐 하면 십여년 전에 사도 야고보를 칼로 목베어 죽인 후에 베드로까지 죽이려고 했다가 실패하였고 가이사랴 극장에서 연설하던 중에 두로 사람들의 아첨의 말을 받아들여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챘다가 벌을 받아 배에 벌레가 생겨 고통 중에 죽었던 사람입니다. 그에게 아들 하나와 둘 딸이 있었으니 아들은 헤롯 아그립바 2세요 큰 딸은 버니게 공주요 둘째 딸은 드루실라입니다. 그런데 드루실라는 그의 언니 버니게마저 질투할 정도로 절세미인이었습니다. 요세푸스의 유대고대사 기록에 따르면 아그립바 2세는 자기의 여동생 드루실라를 소아시아의 왕 아지주스에게 혼인하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이 결혼은 파탄이 나고 말았는데, 그 이유는 벨릭스 총독이 드루실라를 보고 첫눈에 반하여서 유대인 마법사 시몬이라는 자를 보내어 이렇게 저렇게 설득하고 겁을 주고 마음을 흔들어서 결국 그 남편을 버리고 벨릭스와 결혼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드루실라와의 사이에서 아그립바라는 아들을 얻었습니다.
그러므로 벨릭스라는 자는 남의 아내인 유부녀인 드루실라의 미모에 빠져서 자기의 권력과 술수를 통하여 결국 이혼하게 만들어서 자기 아내로 만든 나쁜 사람인 것입니다. 드루실라 역시 이 이방인과 결혼함으로써 할례받지 아니한 자와 결혼함으로써 유대교 전통에서 벗어난 선택을 한 죄책감도 마음에 늘 갖고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이번에 사도 바울의 소문을 듣고서 남편 벨릭스에게 부탁하여 기독교회의 가르침에 대하여 한번 들어보고자 기회를 만들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 기회를 잡고 그 두 사람에게 복음에 대하여 증거하였고 특별히 의와 절제와 장차 올 심판에 대하여 강론했습니다. ‘의’란 하나님 앞에 감히 설 수 있는 자격이니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를 전했을 것이요 ‘절제’란 하나님 백성으로서 합당한 성화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삶의 열매로서 선하고 진실하고 온유하고 참회하는 삶을 가리킨다 할 것입니다. 특별히 그 두 사람은 로마의 절대 권력을 대표하는 총독의 지위와 헤롯 왕가의 화려한 왕실의 신분을 가진 자이기 때문에 교만하기 쉽고 권력을 낭비하기 쉽고 방탕하기 쉬운 자리에 있었기에 절제의 덕이 정말 요구된 사람들이었습니다. 벨릭스는 포악했고 탐욕스러웠고 방탕하였던 사람이었고 드루실라도 왕실의 공주로 자라나 평생 화려함 속에서 살았고 도덕적인 실패도 겪었기 때문에 절제를 요청하는 사도의 가르침은 매우 적절했습니다. 그리고 ‘장치 오는 심판’에 대하여서 사도가 가르쳤으니 아무리 부유하고 권세가 대단한 자라도 결국은 하늘의 상전이요 만민의 심판장이신 하나님 앞에 서게 될 날이 오게 되며, 그 심판장은 바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도 말씀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공의로우셔서 이 땅에서도 악인과 선인에게 각각 그 행한 대로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는 말씀도 사도가 말씀하셨을 것이 분명합니다.
이 말씀을 듣자 벨릭스의 반응은 두려워함이었습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증거된 사도 바울의 말씀을 듣자 그 마음에 성령의 찔림을 받아 그 양심이 괴롭고 심판의 두려움이 그를 덮치므로 그는 더 이상 계속하여 듣지 못하고 사도 바울의 말씀을 중단시켰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가라 내가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리라”고 말하여 보냈습니다.
아마도 그 아내 드루실라 역시 마음에 큰 찔림을 받았고 마음에 두려움과 영적인 감화 감동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후에라도 그들이 복음의 위대한 교사인 사도 바울을 다시 불러서 하나님의 말씀을 자세히 듣고 구원의 주님 되신 예수님을 영접하여 구원을 얻고 진정한 기쁨과 자유와 행복의 삶을 살아갈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러나 그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드루실라도 잠시는 영적인 감동 감화를 받았고 자기의 영혼에 대한 경각심을 가졌고 저 영원한 나라에 대한 동경의 빛이 그 마음에 잠깐 비추었지만 돌아가서는 다시 현실의 생활 속에서 평안과 화려함과 부유함과 오랜 특권 의식에 젖은 데서 우러나오는 안일함과 교만함에 다시금 붙잡혀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녀에게 일어났던 영적 호기심의 불꽃은 다시 사그러져 꺼져버리고 말았습니다. 물론 본래 천성이 탐욕스럽고 포악하고 교만하고 육신적이고 세상적인 기질을 가졌던 벨릭스는 사도 바울을 다시 자주 불러들였는데 그 불러들여서 대화를 나눈 목적은 뇌물을 받을 욕심으로 그러했습니다. 아마도 천성이 천박한 노예 출신이었던 벨릭스는 사도 바울이 이방 기독교회의 사도로서 수많은 교회를 세웠고 많은 이방 신자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분임을 알고서 사람들이 그의 출옥을 위하여 많은 재물을 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아니면 사도 바울이 그 당시 그의 부유한 부모로부터 재산이라도 상속받았는가에 대하여 정보를 얻어서 그러했는지도 모릅니다. 벨릭스는 하나님의 영적 보화를 풍성히 간직한 위대한 영적 교사 사도 바울을 가장 가까이에 두고도 그에게서 영적인 보화를 구하는 대신에 썩어질 세상 재물, 뇌물을 받으려는 마음으로 그를 자주 불러내었으니, 그는 참으로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자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가 돈이 없는 것도 아니요 권력이 없는 것도 아닌데, 뇌물을 받아 챙기려는 욕심을 가지고 사도 바울을 불러서 자주 이야기를 했다니, 이처럼 어리석고 불쌍한 사람이 달리 없습니다.
하나님은 섭리 속에서 사도 바울을 벨릭스와 드루실라 곁에 두셔서 하나님의 생명의 도를 들을 수 있는 기회를 그들에게 이년 동안이나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끝내 사도 바울로부터 생명의 도를 진지하게 듣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리고 기회의 문이 마침내 닫히고 말았으니, 벨릭스가 결국 유대인들의 원성 때문에 총독의 직무에서 쫓겨나서 로마로 소환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그가 유대인들을 함부로 죽이고 거칠게 대하였던 모든 일로 인하여 불만이 로마 황제에게 계속하여 올라갔기 때문에 결국 그는 파직을 당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또한 요세푸스는 벨릭스와 드루실라의 아들 아그립바 역시 그로부터 19년 뒤 주후 79년 디도 황제 때에 폼페이 화산 폭발 때에 죽고 말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 모든 것은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에게 영혼 구원의 기회를 주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영혼의 눈을 잠깐 열어 영원한 세계의 손짓을 힐끗 쳐다볼 수 있는 기회를 주십니다. 성령께서 잠시 마음 속에 타오르는 영적 호기심의 불꽃을 주시는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그 하나님의 부르심의 손짓을 붙잡고 그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몸부림치지 않고 또 다시 일상 속의 이런 저런 일에 사로잡혀서 하나님의 부르심의 손을 뿌리치고 나중에는 아예 둔감해진 옛 상태로 돌아가버리는 일이 허다합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6:1,2 말씀에서 이르기를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이 은혜의 기회를 놓치지 맙시다. 믿음의 문을 우리 마음에 여시는 그 은혜의 손길을 가볍게 여기지 말고 이 때를 꼭 붙들고 은혜의 충만한 데까지 이르도록 주님을 가까이 합시다. 주님의 진리의 말씀의 자리, 기도의 자리에서 끈덕지게 머물러서 주님께서 예비하신 놀라운 영적인 은혜와 축복들을 다 받아누릴 수 있도록 그 자리에 머무릅시다. 시간만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벨릭스가 이년이라는 긴 기회가 있었지만 뇌물만 받으려는 헛된 마음을 가지고 바울을 자꾸 만났던 것처럼 딴 마음을 품고 있으면 아무리 훌륭한 영적 지도자가 곁에 있다 해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 모두 진실한 마음과 참회하는 마음과 가난한 심령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머물기를 힘씁시다. 그리할 때에 은혜의 주님은 우리 영혼을 품어주실 것입니다. 붙들어주실 것입니다. 우리 영혼과 삶을 성숙하게 해주실 것입니다. 우리와 우리 자녀들의 영혼과 삶을 책임져주실 것입니다. 이 은혜가 우리와 우리 자녀들의 삶에 풍성하기를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