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시 주목 받는 고대 이집트 투탕카멘 무덤
역사상 가장 화려한 부장품들 쏟아낸 무덤 뒤에 또 다른 무덤 가능성
지난 28일(현지 시각) 이집트 정부는 세계 고고학 역사상 가장 화려한 부장품을 쏟아내었던 투탕카멘의 무덤 뒤에 숨겨진 다른 방이 발견될
가능성이 높다고 발표했다. 이 방은 기원 전 14세기 고대 이집트 투탕카멘 왕의 어머니 네페르티티 왕비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맘두 알다마티 이집트 고대유물부 장관은 기자회견에서 '투탕카멘왕의 묘실 뒤에 있는 다른 묘실을 열 때가 됐다고 말할 수 있다'라면서
발굴 가능성을 시사하였다.
지난 8월 이집트 고고학을 연구하는 니콜러스 리브스는 투탕카멘 묘실의 벽 뒤에 두 개의 숨겨진 문이 존재하며, 이것이 네페르티티
왕비의 묘실로 이어질 것이라는 가능성을 제기한 바 있다.
이집트 정부는 리브스의 주장을 처음엔 회의적으로 보았지만 스페인의 한 전문 촬영업체에 의뢰해 투탕카멘의 묘실을 디지털로 스캔한 결과,
이 묘실 뒤에 다른 묘실이 존재한다는 단서를 발견했다고 한다.
네페르티티 왕비는 투탕카멘의 선왕(先王) 아케나톤의 부인으로, 투탕카멘의 양어머니 혹은 장모라는 추측이 있다. 아직 무덤이 발견되지
않았고 그의 흉상만이 현재 독일 베를린의 노이에스 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이집트 제18왕조 제12대 왕이자 '소년왕'으로 유명한 투탕카멘(B.C. 1341~ B.C. 1323)은 9세에 파라오로 즉위해
18세에 사망했고, 룩소르에 있는 그의 묘실은 1922년 영국 고고학자 하워드 카터에 의해 처음 발견됐다.
발굴이 추리소설보다 흥미롭고 핵폭탄 제조만큼이나 광범한 지식을 필요로 함을 실증한 게 1922년 시작된 이집트의 투탕카멘 왕릉
발굴이었다. 고고학자 고(故) 김원룡(金元龍) 씨는 한국미술사에서 금관총을 한국의 투탕카멘 왕릉이라 부른 적이 있다.
중국에서 발굴된 유승<劉勝, 전한(前漢) 경제(景帝)의 아들. 중산정왕(中山靖王)>의 무덤을 중국의 투탕카멘 왕릉이라 쓴
미국기자도 있다. 이것은 투탕카멘 왕릉에 대한 모독이다. 순금 7kg이 나온 금관총이나 옥으로 만든 수의가 발견된 유승(劉勝) 무덤을
순금부장품만 300kg을 쏟아낸 투탕카멘 왕릉에 견주는 것은 무리다.
투탕카멘 왕릉의 발굴은 18세기 폼페이 발굴로 시작된 근대(近代) 고고학의 하이라이트였다. 투탕카멘 왕릉 입구의 발견에서 발굴완료에
이르는 6년간 세계는 이 괴기 서린 3400년 전 무덤이 뱉어내는 황금에 흥분했고 잇따른 발굴관계자의 비명횡사엔 파라오의 저주를 중얼거리며
전율해 마지않았다.
투탕카멘 왕릉 발굴은 부장품에 못지않은 완벽한 기술을 동원한 조사였다. 우연한 것 같이 보였던 입구(入口) 발견도 과학적 자료분석의
당연한 결과였다. 이 발굴의 성공은 영국 부호(富豪) 카나본(Lord Herbert, 5th Earl of Carnarvon,
1866~1923)과 이집트 학자 카터(Howard Carter, 1874~1939)가 악수한 1907년 이미 약속된 것이었다. 카나본은 미국
수집가, 여행가, 스포츠맨, 억만장자 등 다채로운 경력의 소유자로, 영국에서 세 번째로 자동차를 소유한 모험가이기도 했다.
카나본이 이집트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자동차 덕분이었다. 1901년 그는 자동차로 독일을 여행하던 도중 전복사고를 만났다. 이때의
상처로 그는 평생 호흡장애에 시달린다. 겨울을 영국에서 보내는 게 어려울 정도로 악화되자 카나본은 1903년부터 이집트를 피한지(避寒地)로 살게
되었다. 이집트에서 그는 고대 문명에 압도된다. 자동차와 요트에 쏟았던 정열을 그는 무덤에 쏟아 붓게 되는 것이다.
하워드 카터는 카나본이 구비하지 못한 모든 장점을 갖고 있었다. 고대문명에 대한 넓고 깊은 지식, 발굴기술, 특히 ‘왕가(王家)의
계곡’에 대한 사정에 정통했다. 뿐만 아니라 도굴 조직에는 신화적 존재였다. 카터의 사람됨을 보여주는 이런 에피소드가 있다.
그가 왕가(王家)의 계곡에서 발굴 책임을 맡고 있던 1916년, 두 도굴단이 피비린내 나는 유물쟁탈전을 벌이고 있다는 정보를 얻었다.
쟁탈전의 장소는 절벽 중앙이었다. 절벽을 뚫어 만든 고분을 찾아낸 도굴단에서 내분이 일어나 정보가 새는 통에 제2의 도굴 조직이 현장을 덮쳤던
것이다. 카터는 단신으로 이 싸움에 뛰어 들었다. 암벽등반가(Rock Climber)처럼 로프를 타고 암굴로 내려간 카터는 놀라 자빠진
도굴꾼들에게 선언했다.
“너희들이 걸어둔 로프는 모두 치워버렸다. 내가 타고 온 로프로 도망치든지 여기 남아 내일 새벽에 경찰서로 직행하든지 양자택일
하라.”
물론 도굴꾼들은 카터와 유물을 남겨놓고 로프를 타고 올라 사라졌다.
카터와 카나본이 자금과 지식을 합친 1906년, ‘왕가(王家)의 계곡’엔 이제 더 이상 발견될 왕릉이 없다는 게 고고학자들의
정설이었다. 약 100년 동안 이탈리아의 벨조니(Giovanni Battista Belozi), 영국의 페트리(Sir William
Matthew Flinders Petrie)를 비롯한 세계일류의 발굴단이 이 계곡을 샅샅이 뒤졌다.
1884년 프러시아 원정대는 최후의 측량을 마친 다음 ‘남은 왕릉은 없다’고 못 박았다. 그래도 카터는 설득되지 않았다. 그는 이
계곡에서 발견된 투탕카멘 아몬이란 글자가 새겨진 3점의 도자기에서 직감적으로 왕릉의 존재를 믿게 됐다.
8년 만의 투탕카멘 왕릉 입구(入口) 발견
투탕카멘 왕릉 발굴은 입구 발견애 8년, 유물처리에 6년 걸렸다. 한국사상 최대발굴로 일컬어지는 경주(慶州) 155호의 유물수습에 약
70일 걸린 것과 비교하면 부장품의 방대함과 발굴의 정밀함이 짐작된다.
이집트 신(新)왕국(서기전 1570?~1070?)의 왕릉 공동묘지였던 왕가(王家)의 계곡은 카이로에서 나일 강을 약 400km거슬러
오른 고도(古都) 테브 근교에 있다. 나일 강 서안에 있는 황토와 바위로 드리워진 계곡, 황량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곳이다. 신(新)왕국에선
이곳의 암벽을 굴착, 왕릉을 터널식으로 만든 다음 엄청난 부장품을 넣고 입구를 봉쇄하고 도굴단이 모르도록 했다.
카터와 카나본이 이집트 정부로부터 발굴허가를 얻은 것은 1914년이었으나 본격발굴은 1917년에 시작됐다. 수천 만 평에 이르는 이
계곡 어디서부터 꽃삽을 꽂을까. 그것은 심해(深海)에 가라앉은 동전 한 닢을 줍기 위해 잠수지점을 선택하는 것과 같았다. 카터는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람세스 2세의 무덤과 메르넵타 및 람세스6세 무덤을 연결한 삼각형의 내부부터 왕릉(王陵)을 찾기로 했다.
세계의 고고학자들은 누구도 카터의 이 시도를 믿지 않았다. 그러나 이때 벌써 그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뒤에 억지라고 비난을 받겠지만
나는 이곳에서 특정의 왕릉을 찾을 수 있다는 확신을 굳혔다’고 그는 일기에 적고 있다. 슐리만이 허황한 것 같아 보이는 그리스 신화를 쫓아
트로이성(城)을 찾겠다고 나선, 그런 종류의 맹신(盲信)을 카터도 갖고 있었던 모양이다.
카나본이 돈을 대고 카터가 지식을 제공한 이 발굴은 그러나 3년 동안 성과 없이 진행됐다. 발굴허가를 받은 지 3년이 되는 1917년
겨울, 발굴 인부의 꽃삽이 고대 이집트의 노동자 합숙소를 찾아냈다. 이 합숙소 건물은 부싯돌 더미 위에 세워져 있었다. 왕가(王家)의 계곡에서
부싯돌은 그 근처에 고분이 있다는 징조로 해석돼 왔다.
그러나 카터는 이 합숙소엔 주의하지 않고 다른 지점에서 발굴을 5년간 계속했다. 아무 수확이 없었다. 발굴 장소를 옮겨야 하겠다는
얘기가 발굴단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카터는 마지막 운(運)을 걸고 합숙소 주위를 철저히 조사하기로 결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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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년 투탕카멘 무덤 발굴지에서 카터(左)와 카나본경. ⓒwiki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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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1922년 겨울. 합숙소 건물을 제거하자 토사층이 나왔다. 이 지층을 깎아나가자 계단이 나타났다. ‘계단의 발견이 너무나
뜻밖에 이뤄져 나는 실신상태에 빠졌다’고 카터는 쓰고 있다. 이 계단은 왕릉(王陵) 입구로 인도되는 것이었다. 계단 위에 덮인 토사를 헤집고
12단까지 노출시키자 입구를 막은 문이 나타났다.
윗부분에 옻칠한 자취가 남아 있었다. 즉 도굴되지 않은 무덤이었다. 발굴단을 흥분으로 전율케 한 순간이었다. 이집트에서 도굴되지 않은
왕릉이 발견된 예는 없었다. 당장 돌문을 무너뜨리고 들어가고픈 충동을 억제하느라고 진땀을 뺏다. 카터는 자제력을 총동원해 영국에 머물고 있던
카나본 경에게 전보를 쳤다.
전보를 받은 카나본이 이집트로 급행하고 있을 때 카터는 입구 노출 작업에 몰두했다. 카나본이 도착한 11월24일 카터는 입구를 완전노출
시켰다. 거기엔 투탕카멘이란 각인이 콱 박혀 있었다. 카터는 8년 만에 확신이 현실로 나타난 것을 보았다.
그러나 그 환희는 순식간에 실망으로 변했다. ‘드디어 입구가 빛을 받았다. 그러나 이게 무슨 짓인가? 눈앞에 다가온 돌문은 도굴단의
자국을 똑똑히 보이고 있었다. 돌문이 열렸다가 다시 봉쇄된 흔적이 나타난 것이다. 그래도 카터는 엄청난 자제력과 학자적 양심으로 돌문을
열었다.
찬란한 발굴(發掘) <2> 투탕카멘 왕릉- ‘황금의
산’…화려극치의 부장품(副葬品) 700점
‘세계 발굴 역사상 지금 우리들 앞에 나타난 것 같은 유물을 본 학자는 아무도 없었다.’
이집트의 왕릉이 피라미드에서 투탕카멘릉(陵) 같은 암굴(暗窟)로 바뀐 가장 큰 이유는 도굴 방지였다. 5000년에 걸친 이집트
도굴역사의 규모와 기술은 한마디로 압권이었다. 기제의 피라미드처럼 600만t의 화강암을 덮어둔 곳이나, 왕가(王家)의 계곡처럼 100m의 터널을
뚫고 미라를 안치한 곳이나, 그 운명은 꼭 같았다.
도굴조직은 왕릉 축조 수십 년 만에 그 노른자위를 탈취하고 만다. 왕릉 곳곳에 파둔 함정과 미로(迷路)도 이들에겐 통용되지 않았다.
이집트 왕릉의 99%는 당대(當代)에 황폐화된 것이라 봐도 과언이 아니다.
도굴의 수난을 피하기 위해선 오직 우연한 기적을 바랄 수밖에 없었다. 투탕카멘 왕릉(王陵)의 입구를 개봉한 카터와 카나본은 이런 기적을
바랄 처지가 못 됐다. 돌문 뒤엔 터널식의 복도가 나타났고 이 복도는 작은 돌로 메워져 있었다.
도굴꾼들은 이미 이 돌무지에 갱도(坑道)를 뚫고 묘실(墓室)로 들어간 모양이었다. 1963년 경주시 교동에서 최 모 씨는 구조상 도굴
불가능이란 고신라(古新羅) 적석총(積石塚)에 같은 방법으로 구멍을 내고 신라 최고(最古) 금관을 꺼내갔다. 기묘한 도굴기술의 전승(傳承)이라고
할는지?
점토외적층을 뚫어 만든 복도의 길이는 9m. 끝엔 제2의 돌문이 나타났다. 문 뒤 쪽은 전실(前室). 카터는 이 돌문에 구멍을 냈다.
돌문 저쪽에 폭발성 가스가 없음을 확인한 그는 촛불을 구멍 속으로 들이밀었다. 출구를 찾은 열기가 확 몰려나오면서 불길을 흔들었다. 카터는
처음엔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눈이 익자 전실(前室)의 윤곽이, 영상이, 색채가 서서히 시야(視野)에 잡혀오기 시작했다. 구멍에 눈을 들이댄 카터는 탄성을 꾹 참고
침묵을 계속했다. 카터 옆에서 침을 삼키는 발굴자들에겐 영원의 시간이 흘러가는 기분이었다.
“무엇이 보입니까?” 카나본이 물었다.
“보입니다. 어마어마한 것이.” 카터는 마술에 홀린 듯 중얼 거렸다.
카터는 뒤에 이렇게 썼다.
‘세계 발굴 역사상 지금 우리들 앞에 나타난 것 같은 유물을 본 학자는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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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터가 투탕카멘 왕릉 부장품 중, 최대 걸작 중 하나로 꼽은 채색 목조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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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년 11월27일 발굴단은 제2의 입구를 완전 개봉했다. 황금으로 만든 침대, 황금옥좌, 4대의 황금마차, 석고로 만든 꽃병,
황금관, 그 위에서 금방이라도 혀를 날름거릴 것 같은 황금 뱀조각, 황금 옷을 입고 황금 샌들을 신은 등신대(等身大)의 두 파수병상(像)-.
3.6×7.8m 크기의 전실(前室)은 온통 금빛서린 보물창고였다. 일상용구로 꽉 찬 전실(前室)에 투탕카멘왕(王)이 당장 나타날 것만 같은
분위기였다.
칠기의 표면엔 지문(指紋)이, 고별의 인사를 막 끝낸 느낌을 주는 꽃다발은 바닥에 원형대로. 부장품은 도굴단이 거쳐 간 그대로
뒤죽박죽. 그래도 유물은 700점에 이르렀다. 고대 이집트 문화사(文化史)를 바꿔놓기에 충분한 화려극치의 부장품이었다. 그러나 카터는 당황했다.
황금산(山)을 이룬 이곳저곳을 아무리 뒤져도 미라가 보이지 않았다. 무덤이 아닌가? 미라는 도둑맞았을까? 발굴단에선 열띤 토론이
전개됐다.
카터는 흥분을 식히고 전실(前室)을 정밀 조사했다. 두 파수병상(像) 사이에 제3의 입구가 발견됐다. 돌문으로 막혀 있었으나 도굴꾼이
이 문을 넘고 저쪽 방으로 들어간 흔적이 있었다. 카터는 침대 밑에서 제4의 입구를 찾아냈다. 이 입구는 열려 있었다.
최고 수준의 발굴단 구성…생물(生物)·해부학자들도 참여
황금의 마력. 어둠을 뚫고 빛나는 영원한 황금색. 그것이 일종의 환각작용을 한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투탕카멘 왕릉 속에서
발굴학자들은 황금의 마력에 서서히 휩쓸려 들고 있었다. 카터가 전실(前室)의 황금 침대 밑에서 찾아낸 입구는 측실(側室)로 연결된 것이었다.
4×3m 크기의 석실이었다.
여기에도 순금부장품(純金副葬品)이 무더기로 쌓여 있었다. 전실(前室)의 부장품은 일부 정돈돼 있는 데 비해 이곳의 부장품은
뒤죽박죽이었다. 카터는 도굴단이 측실(側室)의 부장품을 전실(前室)로 옮겼다고 추리했다. 하지만 괴상한 일이었다. 부장품 중 도둑맞은 것은 거의
없었으니…. 도굴 현장에서 그들은 일망타진 된 것일까.
카터는 투탕카멘 왕릉 발굴을 그 부장품에 못지 않은 모범적인 것으로 만들려 했다. 금제품을 제외한 부장품은 삭아서 시루떡 같은
상태였다. 사소한 손질의 실수로 와르르 무너질 판이었다. 이집트 발굴사상 이처럼 많은 부장품을 만난 발굴단은 없었다. 부장품을 반출하기 전 발굴
작업에 필요한 물자를 구입하고 작업에 참여할 전문가들을 물색하기 위해 카터와 카나본은 왕릉을 다시 묻기로 결정한다. 그들의 학자적 양심을 우리는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
왕릉을 도굴로부터 보호하는 한편 세계 최고 수준의 발굴단을 조직해야겠다는 게 카터가 무덤을 다시 묻게 된 까닭이었다. 카터의 협조요청에
따라 도움의 손이 국경(國境)을 초월해 몰려왔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은 사진사와 제도가(製圖家)를, 시카고 대학은 인장판독 전문가
브레스테트 박사를 보냈다.
이집트 정부의 화학부 장관 루카스는 공직 은퇴 전 3개월의 휴가 동안 발굴 작업에 참여하겠다고 제의해왔다. 세계적인 해부, 지질,
생물학자들도 끼어들었다. 고고학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것 같은 이들 전문학자에 의해 이 발굴은 완벽한 것이 됐다.
뒷얘기지만 루카스는 《분묘(墳墓)의 화학-금속, 기름, 수지(獸脂), 직물에 대하여》란 대(大)저서를 썼다. 식물학자 뉴베리는 무덤
안의 꽃다발을 연구했다. 꽃과 열매를 분석, 투탕카멘 왕의 매장시기를 3~4월로 추리했다. 카터가 투 왕릉을 재개봉한 것은 다시 묻은 지 13일
뒤인 12월16일. 그들이 조사한 전실(前室)과 측실(側室)의 부장품을 다 소개할 지면은 없다. 카터가 최고의 예술품으로 평가한 것은 나무상자.
얇은 석고막이 씌워진 상자표면엔 채색그림이 새겨져 있었다. 색채의 강렬함, 선의 세련됨. 수렵과 전투도의 교묘한 구도. 현대적 센스로 꿈틀거리는
명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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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室(후에 '대기실'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전경. 왼쪽에 분해해 놓은 황금마차들, 오른쪽에 동물머리
장식을 한 황금침대가 보인다. |
4대의 황금마차, 이것들은 암굴을 통과하기엔 너무 컸다. 그래서 왕릉건축가는 분해하여 운반, 포개놓았다. 금판을 나무 뼈대에
입힌 것이었다. 표면엔 1cm의 여백도 없이 그림이 새겨졌고 다채로운 빛깔의 유리와 보석으로 상감 장식되어 있었다.
3개의 황금침대는 각각 사자머리, 소머리, 반은 하마 반은 악어를 닮은 머리를 지닌 혼성동물 모양으로 장식돼 있었다. 전실(前室)에서만
수습된 약 700점의 유물을 카이로로 운반키 위해 간이철도가 깔릴 정도였으니 그 방대함을 짐작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