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21일
본문 : 빌4:10-13
제목 : 예수님이 일체의 비결이십니다
빌립보서는 서기 61~63년, 로마에 잡힌 바울이 감옥이 아닌 자신의 셋집에 가택 연금을 당했을 때 쓴 옥중서신입니다. 투옥된 바울을 지원하는 빌립보교회에 감사하며, 고난을 기쁨과 감사로 견디고 있음을 알려주어 빌립보교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잘 섬기도록 위로하고 격려하는 믿음의 서신이라 할 수 있습니다.
빌립보는 유럽에서 가장 먼저 교회가 세워진 곳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자주색 옷 장사 루디아의 집이 바로 빌립보교회입니다. 바울은 당시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두 번이나 방문했을 정도로 빌립보교회에 대해 깊은 애정을 갖고 있었습니다. 빌립보교회에 쓴 편지에서 그는 기쁨을 '16번'이나 언급했습니다. 언제 어떻게 지하 감옥에 갇힐지, 고문을 당할지, 노예로 팔려갈지 모르는 상황 속에서도 '기뻐하라'는 말을 16번이나 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전한 기쁨은 외부 환경이나 인간적인 도움에서 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기쁨은 특별했습니다. 그는 빌립보교인들이 그들 안에 있는 기쁨을 함께 나눔으로써 그들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도 내적으로 기쁨이 충만해지기를 원했습니다. 기쁨을 함께 나누고 충만하게 하는 것, 이것이 바울이 빌립보서를 쓴 목적입니다. 그래서 빌립보서를 흔히 '기쁨의 편지'라고도 합니다. 이러한 바울의 모습을 통해 무엇이 바울로 하여금 그렇게 충만한 기쁨을 소유하게 했는지, 바울이 말한 자족의 비결이 무엇인지, 그리고 우리에게 주는 교훈과 격려는 무엇인지 살펴보겠습니다.
10절을 보면 바울은 빌립보교회를 아름다운 교회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변함없이 복음 전파에 열심을 내는 모습과 후원을 재개한 것에 대한 바울의 감사의 표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바울에 대한 후원을 재개하는 섬김은 그 당시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후원할 물품도 충분하지 않았고, 운송 수단도 여의치 않을 만큼 모든 것이 열악했습니다. 또한 교회를 향한 핍박이 매우 심했기 때문에 후원으로 인해 순교까지 할 수 있는 시대였습니다. 이런 환경 속에서 후원은 진정 생명을 건 신앙이 없으면 이루어질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오늘 본문을 보면 빌립보교회는 어떤 사정으로 인해 바울에 대한 후원을 중단한지 10년 만에 다시 그를 후원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바울을 사랑하는 빌립보교회의 마음이 참으로 특별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빌립보교회는 왜 이렇게 바울을 사랑하고 귀하게 여겼을까요? 그것은 바울을 통해 복음을 받았고, 교회를 세웠으며, 믿음의 뿌리를 내렸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바울을 통해 '믿음의 유산'을 물려받은 것입니다. 빌립보서 1장 4-5절에서 바울은 '너희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에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복음은 구원을 위한 기쁜 소식입니다. 이는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입니다. 즉 인간은 무엇이고, 어디서 왔으며, 어떻게 타락했는가, 또한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시고, 왜 이 땅에 오셨으며, 그분의 부활과 승천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리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예수와 사도들의 메시지가 바로 복음입니다. 빌립보교인들은 이 복음을 바울을 통해 들었고, 계속해서 그것을 실천함으로써 믿음이 제자리에 머물지 않고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빌1:27-30).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교회를 하나님의 아버지의 마음으로 아름답고 귀하게 여겼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담임 목회자였던 에바브로 디도를 바울에게 보내 그를 섬기는 일을 직접 감당하게 하였습니다. 에바브로 디도는 바울의 제자이자 동역자였습니다. 그는 늘 바울 곁에서 바울의 신앙을 몸소 배우고 삶에 적용했습니다. 빌립보교인들 역시 최선을 다해 바울을 섬겼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진정으로 섬긴 분은 바울과 함께하신 우리 주 예수님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셨을지 상상만 해도 행복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빌립보교회에 은혜를 주셔서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진정한 교회 공동체의 모습을 갖추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힘을 내서 다시 바울을 후원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그들의 신앙이 성장한 것도 바울을 다시 후원할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우리는 그들의 신앙이 성장한 것을 그들이 바울에게 보낸 선물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그 선물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을 들고 온 사람 때문이었습니다. 앞에서 잠깐 다루었던 것처럼 그 사람은 바로 빌립보교회의 담임 목회자인 에바브로 디도였습니다. 당시 목회자가 교회를 비우고 170km나 떨어진 로마에 간다는 것은 큰 결심을 하지 않고는 단행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단호한 뜻을 따라 그는 선교헌금과 선물을 들고 로마에 갇혀 있는 자신의 믿음 스승이자 동역자인 바울을 찾아갔습니다. 빌립보서 2장 25~30절에서 바울은 에바브로 디도를 '복음의 열정과 사랑이 가득한 자', '자신의 쓸 것을 돕는 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의 모든 사역자들과 신자들에게 이런 모습이 나타나야 합니다. 복음의 열정이 넘치고 사랑이 가득한 믿음의 사람을 찾기가 쉽지 않은 시대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교회는 이런 사람들로 차고 넘쳐야 합니다. 저부터 회개하고 에바브로 디도와 바울 사도의 믿음을 본 받겠습니다. 이렇듯 빌립보교회는 바울을 사랑하고 귀하게 여기며 그의 선교 사역에 동참했습니다.
지금부터는 오늘 본문의 핵심 단어이자 주제인 '자족'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지상 명령을 감당하여 복음의 씨를 온 세상에 심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영적 영역인 자족에 대해 반드시 알아야 하고 배워야 합니다. 본문 11절에서 바울은 '자족하기를 배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 없이 스스로 자족하는 것을 자랑한다면 그는 참으로 위험한 사람입니다. 인간은 결코 스스로 구원에 이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예수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그것이 옳은 일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자족은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함으로써 누리는 세상으로부터의 자유이기에 세상 사람들의 그것과는 개념이 전혀 다릅니다. 이것은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이루어집니다. 믿음이 없으면 자족은 발생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족은 반드시 믿음 위에 세워지는 만족이며 자유입니다. 바울은 율법에 얽매이지 않고 그것을 초월한 신앙인이었습니다. 그것은 나를 버리고 예수로 나를 채워서 나 대신 내 안에 사는 진리가 나를 완전히 정복하여 나를 자유하게 하는 삶입니다(요8:32). 또한 빌립보서 2장 5~11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적 사랑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늘 보좌를 버리고 가장 낮은 자로, 가난한 자들의 아비로, 영혼의 구원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적 사랑이 바로 자족의 동력이자 비결인 것입니다.
다음으로 일체의 비결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본문 12절은 바울이 자족할 수 있었던 구체적인 이유를 3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 비천에 처하는 법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8장 20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지만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비천해지는 모습을 거절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는 하늘의 주인이신 주님께서 가난한 자들의 위로자로 오셨다는 것과 진리 안에서는 가난과 궁핍이 그분을 억제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들을 초월해서 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이런 삶을 본받아 바울 또한 가난과 물질을 초월하여 비천한 가운데서도 풍족하게 사는 방법을 배웠습니다.
둘째, 풍부에 처하는 법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바울도 풍부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 그는 실로 위풍당당한 사람이었습니다. 로마의 시민권자이며 가말리엘의 문하생이었던 그는 먹고 사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는 존경받는 젊은 지도자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로서 풍부한 섬김을 받으며 사역하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풍부에 처할 줄 안다는 것은 풍족한 가운데서도 마음에 평화를 누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가난, 궁핍, 핍박이 그를 억제하지 못했듯 풍족한 삶, 그가 가진 부가 그를 구속하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풍족함으로 인해 교만하지 않았습니다. 언제든 가난한 자들과 복음을 위해 나누어줄 준비가 되어있었습니다.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종의 형체로 내려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것을 배운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족할 수 있었습니다. 욥1:21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부(富)는 개인의 만족이 아닌 복음을 위해 사용하라고 주신 은사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셋째, 일체의 비결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일체란 '모든 형펀' 혹은 '모든 환경'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비결은 '비밀'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는 것은 '모든 환경에서 만족할 수 있는 비밀을 배웠다'라는 뜻입니다. 즉 배부름, 배고픔, 풍부, 궁핍 등 어떤 상황에서도 자족, 즉 자유할 수 있는 비밀을 배웠다는 것입니다. 혹자들은 바울이 고생해서 삶의 의미를 터득한 것이라 말하는데 그건 10점짜리 답입니다. 100점짜리 정답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주님께서 진리를 알게 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인생 경험을 해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화(化) 되는 것, 그것이 우리의 인생이며 경험입니다. 요15: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바울이 열악한 환경에서 자족할 수 있었던 비밀은 바로 그리스도와 하나 되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주님은 우리를 삶 속에서 기도와 감사를 가르치시기 위해 우리의 환경과 처지를 인도하십니다. 따라서 거룩의 연습이나 회개를 요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면 회개하고 거룩으로 돌아서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리스도와 하나 되게 하시기 위해 그분의 섭리를 통해 우리를 만들어가십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말씀 속에는 자족, 일체의 비결과 더불어 중요한 단어가 하나 더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배웠노라'입니다. 바울이 자족할 수 있었던 비결은 자족의 은사를 받아서가 아닙니다. 그는 자신의 인생 경험 속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하면서 배웠습니다. 주님의 모습을 통해 풍부할 때 교만하지 않았고, 비천할 때 비굴함 대신 만족과 자유를 누리는 방법을 배웠던 것입니다. 앞에서 설명 드린 것처럼 '자족'이란 어떤 환경 속에서도 만족하고 자유를 누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냥 주어지는 것 아니라 배우는 것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늘 우리를 훈련하십니다. 목회자는 목회자의 자격을, 성도는 성도의 자격을 갖춰야 그리스도를 드러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주님 안에서 주님께서 주시는 은혜로 자족과 일체의 비결을 배워 하나님의 편지로,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모델로 살아가는 인생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