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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산이씨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후손들 원문보기 글쓴이: 가온해
세상은 불공평해 보인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야훼에게, “악한 자의 길이 형통하며 반역한
자가 다 평안함은 무슨 까닭입니까(예레미야 12장 1절)”라고 따져 묻는다. 그러나 때로
역사는 의(義)의 피가 땅에 떨어져 스며들어야 새로운 싹이 난다는 사실을 증언하고 있다.
매천 황현의 초상. 약간의 사시(斜視)였던 황현의 눈에서 그릇된 세상을 바로 보려는 결기가 느껴진다. [사진가 권태균 제공] |
절망을 넘어서
자결자들
임시한국파견대사령부(臨時韓國派遣隊司令部)에서 일본 정규군을 동원해 호남 지역을 중심으로 이른바 ‘남한 대토벌’을 자행하던 1909년 가을. 전라도 구례의 매천(梅泉) 황현(黃玹:1855~1910)은 창강(滄江) 김택영(金澤榮)의 귀국 소식을 듣고 서울로 향했다.
그러나 순탄한 듯 보이던 그의 벼슬길은
김택영은 중국으로 망명해 상해(上海) 북방 남통(南通)의 한묵림서국(翰墨林書局)에서 교정일을 보았다. 김택영이 김윤식(金允植)의 소개로 만났던 중국인 장건(張<8B07>)이 경영하는 출판사였다.
김택영은 1914년 장건에 대해
김택영은 1927년 끝내 남통에서 사망하는데 현지에서는 ‘한국 굴원(屈原)’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남통시 낭산(狼山)에 ‘한국 시인 창강지묘(韓國詩人滄江之墓)’라는 비석이 있다고 전한다.
1 매천집. 1911년 상해에서 발간됐다. 친구 김택영이 상해로 망명해 출판사에서 일했기에 나올 수 있었던 문집이다. 2 황현 묘. 전남 광양시 봉강면 석사리에 있다. 퇴락한 무덤이 이 시대의 정신세계를 보여 주는 듯하다. |
김택영과 황현은 모두 영재(寧齋) 이건창(李建昌)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었다. 이건창은 철종·고종 때 판서를 역임하다가 고종 3년(1866)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강화를 점령하자 음독 자결한 이시원(李是遠)·지원(止遠) 형제의 손자였다. 또한 조선 양명학을 뜻하는 강화학파의 적자였다. 이건창은 시대에 뒤떨어지지도 않았지만 부화뇌동하지도 않았다. 그의 눈에는 동학(東學)도 문제였고 개화파도 문제였다.
이건창은 고종 13년(1876) 충청우도 암행어사 시절 목도한 농가의 참상을 ‘농가의 추석(田家秋夕)’이란 시로 남겼다.
“서울 부호 집은 항상 좋은 시절이지만, 가난한 농촌사람에겐 추석만이 좋은 때라네(京師富貴地 四時多佳節 鄕里貧賤人 莫如仲秋日)”로 시작된다.
남편은 굶주림을 참으며 작은 논에 모내기를 하고 여름을 넘기지 못하고 굶어 죽었다.
남편이 심은 벼를 수확한 추석날 “유복자 안고 죽은 남편을 향해 오열하다가, 기절한 지 오래지 않아, 돌연히 아전들이 사립문을 부수며, 세금 내놓으라고 소리 지른다(抱兒向靈語 氣絶久不續 忽驚吏打門 叫呼覓稅粟)”로 끝난다.
한성부소윤 시절에는 사실상 상왕 노릇을 하던 청나라 이홍장(李鴻章)의 부하 청국공사 당소의(唐紹儀)에게 맞서 가옥·토지 매매를 금지시킬 정도로 백성을 아꼈다. 이건창에게는 시세(時勢)가 아니라 중심(中心)이 중요했다. 일본군이 서울을 장악하고 동학농민혁명을 무력 진압한 고종 31년(1894) 서울을 떠나 강화도 사기리로 낙향했다. 제1차 김홍집 내각에서 공조참판을 제수했으나 거부했고, 고종 35년(1898) 만 46세로 숨을 거두었다.
김택영이 다시 출국했다는 소식을 들은 황현은 서울에 사는 이건창의 종제 난곡(蘭谷) 이건방(李建芳:1861~1939)과 함께 강화도로 떠나 이건창의 아우 경재(耕齋) 이건승(李建昇:1858~1924)을 만났다. 이건승이 을사늑약 체결 후 황현에게 보낸 편지가 생각났다.
“황운경(黃雲卿:황현)께서는 아직도 인간 세상에 머물고 있습니까?
이보경(李保卿:이건승)은 어리석고 미련해서 구차하게 살아 있을 뿐입니다. 나라는 망했는데 아직 살아 있으니, 사람이 마땅히 죽어야 하는데 살아 있는 것은 다 정상적인 도리가 아닙니다….”
‘나라는 망했는데 아직 살아 있으니’가 그들의 마음이었다.
황현·이건방·이건승은 강화도 양도면 건평리 이건창의 묘를 찾았다. 이건창의 무덤에 술잔을 붓고 절을 올린 황현은 죽은 친구에게 오언율시를 준다.
“외롭게 누웠다고 슬퍼하지 말 것을, 그대는 살아서도 혼자가 아니었던가(無庸悲獨臥 在日已離群).”
잘못된 세태와는 어떠한 타협도 거부했기에 이건창은 살아서도 혼자였다. 이건승은 황현에게 보낸 편지에서 “선형(先兄:이건창)께서 살아계셨으면 의(義)를 어느 곳에 두었을지 알 수 없지만 하늘이 준 수명대로 살지는 못했을 것입니다”고도 말했었다.
그랬다. 성현의 말씀을 가슴에 새긴 선비들은 하늘이 준 수명대로 살기 힘들었던 시대였다. 성묘를 마친 황현·이건방·이건승은 서울로 올라와 남산에 올랐다. 이미 남의 것이 되어 버린, 껍데기만 남은 궁궐이 멀리서 보였다. 통곡한 황현은 다시 고향 구례로 내려갔다.
이듬해(1910)가 되자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 일파와 일진회가 누가 망국에 더 큰 공을 세우는지 서로 경쟁했다. 김택영이 중국에서 쓴 황현의 소전(小傳)인
절명시(絶命詩)!
“난리 속에 지내다 머리가 세었네, 몇 번이나 버리려던 목숨이었나,
오늘은 진실로 어찌할 수 없어 바람 앞의 촛불만 하늘을 비추네
(亂離滾到白頭年 幾合捐生却末然 今日眞成無可奈 輝輝風燭照蒼天)”…
“새 짐승도 슬피 울고 바다 산도 찡그리네, 무궁화 세상이 이미 가라앉아 버렸구나,
가을 등불 아래 책 덮고 천고를 회고하니, 인간 세상 식자 노릇 어렵구나
(鳥獸哀鳴海岳嚬 槿花世界已沈淪 秋燈掩卷懷千古 難作人間識字人).”
난세의 두 처신. ‘인간 세상 식자 노릇’이 어려운 사대부와 ‘인간 세상 식자 노릇’을 기회로 삼는 사대부로 나뉜다.
황현은 독약을 마시고 나서 자제들을 불렀다.
독이 퍼져 가는 몸으로 “내가 죽어야 할 의무는 없지만, 나라가 선비를 기른 지 오백 년에, 나라가 망하는 날, 한 사람도 죽는 사람이 없어서야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吾無可死之義 但國家養士五百年 國亡之日 無一人死難者 寧不痛哉)”라고 말했다.
국록 한 톨 먹지 않은 황현이 나라가 망했다고 목숨을 버려야 할 의무는 없었다.
인조반정 이래 300년 가까이 집권당이었던 노론의 당수 이완용이 통감부 외사국장 고마쓰에게 비서 이인직을 보내 망국 조건을 흥정하는 나라, 자신이 모셨던 황제의 지위를 국왕이 아니라 대공(大公)으로 해 달라고 흥정하던 나라에서 국록 한 톨 먹지 않은 황현에게 죽어야 할 의리는 없었다.
그러나 황현은 “내가 위로는 황천이 준 떳떳한 도리도 저버리지 않고 아래로 평일 읽었던 책도 저버리지 않고서 고요히 죽으면 진실로 통쾌하리니 너희는 크게 슬퍼하지 마라”고 덧붙였다.
‘나라에서 선비를 기른 지 오백 년’이기에 선비는 망국 앞에서 목숨을 끊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달려온 아우 황원(黃瑗)에게 황현은 웃으면서 “죽기가 이리 쉽지 않은가. 독약을 마실 때 입에서 세 번이나 떼었으니 내가 이토록 어리석은가?”라고 토로했다.
세 번이나 약사발을 뗄 정도로 생에 애착도 있었다. 국록 한 톨 먹지 않은 내가 왜 죽어야 하는가?
망국에 사대부가 무한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 성현의 글을 읽은 선비의 처신이었다.
1910년 8월 그렇게 황현은 세상을 떠났다. 약간 사시(斜視)이기에 그릇된 세상을 똑바로 볼 수 있었던 그는
“금산(錦山) 군수 홍범식(洪範植), 주러공사 이범진(李範晋), 승지 이만도(李晩燾), 진사 황현, 환관 반학영(潘學榮), 승지 이재윤(李載允)·송종규(宋鍾奎), 참판 송도순(宋道淳), 판서 김석진(金奭鎭), 정언 정재건(鄭在楗), 감역(監役) 김지수(金智洙), 의관(議官) 송익면(宋益勉), 영양(英陽) 유생 김도현(金道賢)…태인(泰仁) 유생 김천술(金天述)…연산(連山) 이학순(李學純)…(
소설
絶命詩1 / 黃玹(황현)
亂離滾到白頭年 (난리곤도백두년) 난리를 겪다 보니 백두년(白頭年)이 되었구나.
幾合捐生却末然 (기합연생각말연) 몇 번이고 목숨을 끊으려다 이루지 못했도다.
今日眞成無可奈 (금일진성무가내) 오늘날 참으로 어찌할 수 없고 보니
輝輝風燭照蒼天 (휘휘풍촉조창천) 가물거리는 촛불이 창천(蒼天)에 비치도다.
絶命詩2
妖氣掩翳帝星移 (요기엄예제성이) 요망한 기운이 가려서 제성(帝星)이 옮겨지니
九闕沈沈晝漏遲 (구궐침침주루지) 구궐(九闕)은 침침하여 주루(晝漏)가 더디구나.
詔勅從今無復有 (조칙종금무부유) 이제부터 조칙을 받을 길이 없으니
琳琅一紙淚千絲 (임랑일지루천사) 구슬 같은 눈물이 주룩주룩 조칙에 얽히는구나.
絶命詩3
鳥獸哀鳴海岳嚬 (조수애명해악빈) 새 짐승도 슬피 울고 강산도 찡그리네.
槿花世界已沈淪 (근화세계이침륜) 무궁화 온 세상이 이젠 망해 버렸어라.
秋燈掩卷懷千古 (추등엄권회천고) 가을 등불 아래 책 덮고 지난 날 생각하니,
難作人間識字人 (난작인간식자인) 인간 세상에 글 아는 사람 노릇하기 어렵기만 하구나.
絶命詩4
曾無支厦半椽功 (증무지하반연공) 일찍이 나라를 지탱할 조그마한 공도 없었으니
只是成仁不是忠 (지시성인불시충) 단지 인(仁)을 이룰 뿐이요, 충(忠)은 아닌 것이로다.
止竟僅能追尹穀 (지경근능추윤곡) 겨우 능히 윤곡(尹穀)을 따르는 데 그칠 뿐이요,
當時愧不躡陳東 (당시괴불섭진동) 당시의 진동(陣東)을 따르지 못하는 것이 부끄럽구나.
*윤곡(尹穀)과 진동(陳東).
이들은 모두 송나라 사람으로, 윤곡(尹穀)은 몽고병이 쳐들어오자 가족과 함께 자결한 사람이며, 진동(陳東)은 간신배들을 물리치라고 상소문을 몇 차례 올리다가 결국 저자거리에서 효수(梟首)를 당한 사람입니다.
田家秋夕(전가추석) / 寧齋(영재) 李建昌(이건창)
京師富貴地 경사부귀지 서울 부귀한 곳은
四時多佳節 사시다가절 철따라 명절도 많지만
鄕里貧賤人 향리빈천인 시골 가난하고 천한 사람들에게는
莫如仲秋日 막여중추일 추석만한 명절이 없다
秋日有晴暉 추일유청휘 가을 낮에는 햇빛도 많고
秋宵有明月 추소유명월 가을 밤에는 밝은 달이
風景固自佳 풍경고자가 풍경이 참으로 아름답지만
非爲我輩設 비위아배설 우리를 위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但見四野中 단견사야중 다만 보이는 것은 사방 들판에
嘉穀正垂實 가곡정수실 좋은 곡식 좋은 열매들
早禾已登場 조화이등장 이른 벼 벌써 올라와
豆菽亦採擷 두숙역채힐 콩도 손으로 따며
中庭剝於葵 중정박어규 안뜰에서는 해바라기 씨를 까고
後園摘苞栗 후원적포율 뒤뜰에서는 밤을 깐다
團團土火爐 단단토화로 단단한 흙 화로
吹扇紅榾柮 취선홍골돌 부채질에 장작 붉게 타고
煮飯作羹湯 자반작갱탕 밥하고 국 끓여
大家劇啗啜 대가극담철 온식구가 포식 한다
一飽便意氣 일포편의기 한번 포식에 기분이 좋아
散漫雜言說 산만잡언설 시끄럽게 여러 말들이 오가고
去年大凶年 거년대흉년 지난해 큰 흉년
幾乎死不活 기호사불활 죽고 못살 것만 같더니
今年大豊年 금년대풍년 금년 농사는 대풍이라
天意固不殺 천의고불살 하늘이 죽일 뜻은 없구나
恨不腹如鼓 한불복여고 배가 북처럼 불쑥 나오지 않음이 한스럽고
恨不口雙裂 한불구쌍렬 입이 찢어지지 않음이 한스러워
日食十日量 일식십일량 하루에 열흘 양식을 먹어 치웠다
快意償饕餐 쾌의상도찬 기분 좋은 마음 음식도 탐스럽다
父老在上坐 부로재상좌 상좌에 앉으신 어르신이
呼語勿亂聒 호어물란괄 조용히 하라 이르시고는
民生實艱難 민생실간난 민생은 참으로 어려워
物理忌盈溢 물리기영일 세상이치가 가득차 넘치는 것을 꺼려하니
莫已今醉飽 막이금취포 지금 배 부르고 취하였다 해서
或忘舊飢渴 혹망구기갈 지난날의 굶주림을 잊지 말아라
吾老頗經事 오로파경사 우리 늙은이들은 많은 일을 겪었으니
過食則生疾 과식즉생질 과식하면 곧 병이 나는 것은 이치다
南里釀白酒 남리양백주 남쪽 집에서는 막걸리를 빚고
北里宰黃犢 북리재황독 북쪽 집에서는 송아지를 잡는데
獨有西隣家 독유서린가 홀로 서쪽 집에서는
哀哀終夜哭 애애종야곡 슬프고 또 슬퍼 밤새워 곡하는 소리
借間哭者誰 차간곡자수 우는 이 누구냐고 물으니
寡婦抱遺腹 과부포유복 과부가 유복자를 안고 있다
夫君在世日 부군재세일 남편이 세상에 살아있을 적엔
兩口守一屋 양구수일옥 두사람이 한 집을 지키고
門前一席地 문전일석지 문 앞의 한자리 땅으로
歲收僅糜粥 세수근미죽 수확하여 된죽은 끓였는데
去年秋早霜 거년추조상 작년 가을에 일찍 서리가 내려
掃地無半菽 소지무반숙 땅을 쓸어도 콩 반쪽 없고
糠麩雜松皮 강부잡송피 겨와 밀기울에송피를 섞었지만
過冬猶不足 과동유부족 겨울나기도 부족했다오
春來向富人 춘래향부인 봄되어 부자들에게
乞禾得滿匊 걸화득만국 볍씨 한 움큼 얻어
一粒惜不嚥 일립석불연 한톨이 아까워 먹지 않고
持爲種田穀 지위종전곡 두었다 봄에 심었는데
氣力日以微 기력일이미 기력은 날이 갈수록 약해지고
腸胄日以縮 장주일이축 위장은 날로 오그라 들어
同是一般飢 동시일반기 똑같이 굶기는 한가지건만
妾何頑如木 첩하완여목 첩은 어찌 나무같이 모질어 살아 남았나
却送夫君去 각송부군거 남편이 저 세상 떠나 감에
去埋前山麓 거매전산록 앞산 허리기슭에 묻었다오
埋人人骨朽 매인인골후 묻은 사람 뼈 썩어갈 때
種穀穀頭熟 종곡곡두숙 뿌린 곡식들도 익어가
穀頭熟何爲 곡두숙하위 곡식은 익어 무엇한단 말인가
閉門不忍目 폐문불인목 문 닫고 차마 보지 못 하고
卽欲決相隨 즉욕결상수 뒤따라 죽고 싶으나
奈此兒匍匐 내차아포복 발발기는 이 아이는 어찌하나
兒雖不識父 아수불식부 아이는 비록 아버지를 알지 못하나
猶是君骨肉 유시군골육 그래도 내 남편 골육인 것을
抱兒向靈語 포아향영어 아이 안고 영전 향해 혼잣말 하다
氣絶久不續 기절구불속 기절하여 오래도록 못 깨어났는데
忽警吏打門 홀경이타문 문득 관리들 문 두드리는 소리에 놀라니
叫呼覓稅粟 규호멱세속 세속내라고 호통 치네
榾柮 골돌 [명] (장작용)나무 토막. 단독으로 쓰일 수 없으며, ‘榾柮’를 구성하는 형태소가 됨.
啗 먹일 담.啜 먹을 철.
饕 탐할 도.聒 떠들썩 할 괄
糜粥 미국 된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