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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년 나해 2월26일 사순 제1주간 목요일
[수도회] 주님과 흥정하지 말라.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 형제회 프란치스코회 신부 -
† 제1독서 에스테르기 4,17(12).17(14)-17(16).17(23)-17(25);
† 복음 마태오 7,7-12
★ 에스테르는 누명을 벗을 길 없는 억울함 앞에서 주님께 간절히
의탁한다. “당신 손으로 저희를 구하시고, 주님, 당신밖에 없는 외로운
저를 도우소서. 당신께서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제1독서).
★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부모가 자녀에게 필요한
것을 주듯이 하느님께서는 더 좋은 것을 주실 것이라고 하시며, 하느님께서
지니신 부모의 사랑과 자비로운 마음을 보여 주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어떻게 된 일일까? 우리나라 아기의 7.3%가 선천성 기형아로 태어나는데,
이는 6년 전에 비해 2.4배나 증가했다고 한다. 일곱 살까지 본다면
아토피와 자폐, 주의력 결핍 과잉 행동 장애(ADHD), 다운 증후군, 틱, 저능
등은 전체 30%에 육박한다. 아동들의 생리가 점점 빨라지고 키도 커진다.
신혼부부 열 쌍 중 한 쌍꼴로 불임을 호소하고 있다. 몸의 재앙이다.
고기와 빵, 과자와 콜라 같은 탄산음료까지 모든 식품을 추적하면 놀랍게도
옥수수, 콩, 밀 3대 작물이 원료임을 알게 된다. 농부 한 명이 수십만 평의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제초제를 견뎌 내는 ‘유전자 변형 작물’(GMO) 콩과
옥수수 개량종을 만들었다. 그것이 식용유 따위의 식자재로 방부제가
첨가되어 유통되며, 축산 사료가 되어 성장 촉진제와 항생제와 함께 소·
돼지·닭 고기, 우유로 전 세계에 공급된다. 학교 급식에는 늘 튀김이
오르고, 과자와 음료를 입에 달고 살며, 치킨과 맥주를 이른바 ‘치맥’이라
부르며 신이 내린 음식이라 한다. ‘아이에게 과자 한 봉지를 주기보다는
담배 한 대를 피우게 하는 것이 덜 해로울 것이다.’
전자레인지 또한 분자 구조를 충돌케 하는 원리로서 아주 나쁜 도구다.
여러 번의 변조 과정으로 식탁에 오른 음식은 체내에 ‘환경 호르몬’
(내분비 교란 물질)으로 작용하는 것이니, 암과 기형성 질환이 없을 수
없다. 지난 6월의 국제 연합(유엔) 총회의 기조연설에서는 ‘정크 푸드’
(즉석식품)도 담배처럼 규제하자고 했다. 결혼을 앞둔 이들은 몸의 섭생
정화 기간을 가질 일이다. 아기가 무슨 죄가 있는가? 부모가 진정 자식을
사랑한다면 그에게 어떻게 독이 든 음식을 주고 전갈과 뱀을 먹으라고 할
수 있는가? 영원한 구원을 얻기 전에 깨끗한 음식부터 구하라!
- 매일 미사 -
◈ [수도회] 간절(懇切)하고 항구(恒久)한 기도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신부님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5년 나해 2월26일 사순 제1주간 목요일
에스4,17(12.14-16.23-25) 마태7,7-12
제1독서
<주님, 당신 말고는 도와줄 이가 없습니다.>
◎ 에스테르기의 말씀입니다. 4,17(12).17(14)-17(16).17(23)-17(25);
복음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을 것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7,7-12
간절(懇切)하고 항구(恒久)한 기도
기도와 믿음은 함께 갑니다.
간절하고 항구한 믿음의 표현이 간절하고 항구한 기도입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기도입니다.
기도의 힘은 믿음의 힘이며, 바로 하느님의 힘입니다. 인도의 성자 간디는
웬만한 병은 '하느님'이름으로 다 고쳤다 합니다. 저 또한 불편한 몸
부위가 있으면 '예수님'이름을 부르며 조용히 손을 대곤 합니다.
얼마전 예수님 곁에 있고 싶어 감실 옆에서 찍은 사진 역시 일종의
기도입니다. 간절하고 항구한 몸과 맘의 기도를 통해 늘 주님 가까이
머물게 됩니다.
몸과 마음은 하나입니다. 몸의 건강에 선행하는 마음의 건강입니다.
완고하고 교만한 마음이 참 큰 병입니다.
동방수도승을 찾는 구도자가 그 스승과의 나눈 대화 일부를 소개합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늘 마음을 모으기 위해 깨어 있을 필요가 있다.
수도승이든, 은수자든, 세상 누구에나 해당된다.
우선 깨어 일어나면 그날을 기도로 시작하는 것이다. 그가 일어나는
순간부터 마음을 하느님으로 채움으로 출발하는 훈련에 충실할 때,
그의 날은 기도 안에 있게 될 것이고 어떤 내적평화가 자리잡을 것이다.-
"바로 그것이 화강석(granite) 같은 마음을 깨기 시작하는 길입니까?“
-그렇다. 첫 단계다.
바위같이 완고한 마음을 깨기 위해서는 큰 노력과 인내를 필요로 한다.
기도를 통해 마음을 부숴 달라고 하느님의 도움을 청하는 것이다.
다윗 임금의 '하느님은 부숴지고 낮춰진 마음을 업신여기지 않으신다.'
라는 시편 한 구절 처럼 말이다. 바로 이것이 성인들이 기도한 방법이다.
그들은 하느님께 그들의 마음을 부숴달라(crush)고 간청했다.-
바로 복음의 예수님은 이런 간절하고 항구한 기도의 내적자세를 가르쳐
주시며 1독서의 에스텔은 그 모범을 보여줍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참으로 백절불굴의 겸손한 기도의 자세, 믿음의 자세입니다.
이래야 영적탄력도 떨어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는지요. 기도는 간절하고 항구해야 합니다.
산티아고 순례에 대한 조언을 청한다면 역시 저는 다음과 같이 말할
것입니다.
"간다하면 말리진 않겠다. 그러나 가라고 권하지는 않겠다.
체력이나 정신력보다 우선적으로 요구되는 것이 간절한 원의다."
도저히 나이나 체력으로보나 어렵게 생각되는 분들의 완주를 보고 깨달은
결론입니다.
위기에 처한 에스텔의 간절한 기도가 심금을 울립니다.
"저의 주님, 저희의 임금님, 당신은 유일한 분이십니다.
외로운 저를 도와주소서. 기억하소서.
주님, 저희 고난의 때에 당신 자신을 알리소서. 저에게 용기를 주소서.
당신 손으로 저희를 구하시고, 주님, 당신밖에 없는 외로운 저를 도우소서.
당신께서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사순시기는 간절하고 항구한 기도수련에 참으로 적절한 은총의 시기입니다.
주님은 매일의 미사전례기도를 통해
우리의 완고한 마음을 부숴뜨려 온유하고 겸손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마음의 치유에 저절로 따라오는 몸의 치유입니다.
"주님, 제가 부르짖던 날, 당신은 응답하셨나이다."(시편138,3ㄱ참조).
아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요셉 수도원 신부 -
◈ [수도회] 기 프란치스코 신부님 - 주님과 흥정하지 말라.
2015년 나해 2월26일 사순 제1주간 목요일 마태 7,7-12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마태 7,7)
주님과 흥정하지 말라.
사람들은 돈과 명예와 권력을 지녀 아쉬울 것이 없어지는 걸 행복이라고
여기곤 한다. 그래서 누구에게 청하는 것을 자존심 상하는 일로 여기거나
신세를 지면 반드시 갚아야 한다고 생각하기도 하며, 청을 받는 것을
부담스러워하기도 한다. 그러나 먼지에 불과한 것이 인간이지 않은가!
주님께서는 오늘 친히 연약한 우리에게 청하라고 말씀하신다. 제1독서에서
왕비인 에스테르는 자기에게 닥친 죽음의 위험을 느끼고 하느님께 완전히
의지하는 기도를 드린다. 오늘 복음은 ‘주님의 기도’(6,9-13)에서처럼
신뢰하는 마음으로 하느님의 사랑을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라고 한다.
참된 청원기도는 어떻게 해야 할까?
무엇보다도 먼저 청해야 할 핵심적인 것은 오직 하나 성령뿐이고, 삶의
유일한 의미는 예수의 영의 얼굴을 찾는 일임을 의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성 프란치스코는 권고한다. “무엇보다 먼저 갈망해야 할 것은 주님의 영과
그 영의 거룩한 활동을 마음에 간직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항상 기도하고
박해와 병고에 겸허하고 인내하며, 우리를 박해하고 책망하고 중상하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수도규칙10,8-9) 그러나 이기심이나
하느님의 선을 거스르는 것이 아닌 하느님 보시기에 좋고 그분의 뜻을
이루기 위한 것이라면 물질, 건강, 영적인 것들 할 것 없이 청할 수 있고
청해야 할 것이다.
어떤 자세로 청하는 것이 좋을까? 참된 청원기도는 내 뜻대로 하느님께서
움직여주시길 청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원의를 하느님의 뜻에 맞추는
기도이다. 따라서 자기중심적인 착각에서 벗어나 겸허하게 ‘하느님
앞에서’ 청원하고 그 결과에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사실 청원기도의 주요
목적은 요청하는 것을 성취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청원하는 이가 선이신
하느님을 믿고 고백하고 청함으로써 그분의 영과 현존 안에 머물기 위한
것이다. 주님께서는 당신 안에 머물기만 하면 모든 것을 다 채워주시기
때문이다. 하느님을 소유하는 것보다 더 가치있는 것이 있으며 그보다 더
우선 챙겨야 할 것이 있을까? 내가 원하는 때에 내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 주셔야만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하느님을 도구화해서는 안 될
것이다. “믿는 마음으로 청하되 모든 것을 그분의 뜻에 맡기는 것”이 바로
참된 청원기도의 자세다.
자기 것을 얻으려고 하느님의 선하심과 자비심을 들먹거리며 흥정하듯
청하거나, 선행을 내세워 그 대가를 바라는 조건부적인 기도는 잘못이다.
청원기도를 할 때 우리는 하느님 앞에 있는 자신의 가난한 처지를 깊이
깨닫고, 우리 스스로는 아무 것도 이룰 수 없음을 고백하여야 한다.
청원기도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신뢰의 표현이 되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삶을 살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희생과 고통을
피하고 애덕은 베풀지 않으면서, 거저 주어지기만을 바라는 것은 착각이다.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청하는 것보다 좋은 것을 훨씬 더
많이 주신다(7,11). 청원기도의 절정이라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여기에
있다. 나만 생각하고 내가 청하는 것만을 얻기 위한 기도는 결코 순수한
기도라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기도의 혼인 사랑이 빠져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청하는 이에게 필요한 것을 미리 헤아리시고 청하는 것보다
넘치도록 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의 관대함’을 고유하고 나누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청원기도의 사회적 차원을 유념하여야 할 것이다.
청할 때도 청이 받아들여질 때도 주변을 둘러보고 모두가 행복해지고
하느님의 정의 안에 머물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주님은 말씀하신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주어라.”(7,12)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죽음을 두려워하면 삶도 두려워한다
2015년 나해 2월26일 사순 제1주간 목요일
<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을 것이다. >
복음: 마태오 7,7-12
< 죽음을 두려워하면 삶도 두려워한다 >
프랑스의 어느 백만장자 구두쇠가 있었습니다. 그는 얼마나 큰 부자였던지
자기 재물에 연연하여 날마다 그 재물에 기뻐하였습니다. 자기재물을
완전하게 보관하기 위하여 자기 집의 포도주 저장실을 깊이 파고 그
저장실에 다시 깊은 굴을 파서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서 거기에다가 황금을
감추어 두었습니다.
그 부자가 행방불명이 되자 사람들은 그를 찾기 위해 백방으로 애썼지만
찾지 못했습니다. 마침내 그가 살던 집은 다른 사람의 손에 매각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집을 매입한 사람이 지하실을 발견하고 들어가
보니 그 속에서 먼저 살던 주인이 황금을 두 손으로 움켜쥐고 죽어
있었습니다. 그가 그곳에 들어갈 때는 그 문이 자동으로 닫힌다는 사실을
깜박 잊은 것이었습니다.
이런 부자들은 죽기를 두려워합니다. 돈에 집착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돈에 집착하는 것이 죽음을 두려워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삶이 행복해서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일까요? 사실 이 세상에서 권력과 부와 명예를 지녔던 이들은 대부분
죽지 않으려고 발버둥 쳤습니다. 예를 들면 한나라의 무제는 장생불사를
위하여 승로반에 찬 이슬을 받아 마셨다고 하고, 진나라의 시 황제는 늙지
않고 죽지 않는 불로초를 구하기 위하여 동방 삼신산에 동남동녀 500명을
보냈다고 합니다. 그리고 지금도 많은 이들이 죽지 않으려고 경호원을
동원하고 몸에 좋다는 것은 다 찾아 먹습니다. 이런 이들은 대부분 삶에서
성공했다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사실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가 세상에서 성공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자신들이 가진 것을 잃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실제로 자신들이 가지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그 꿈에서 깨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실제로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들은 삶도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행복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죽음을 삶과 반대말로 여깁니다. 그러나 죽음은 삶의
일부이지 삶의 반대말이 아닙니다. 죽음이 삶의 맨 끝자락에 있기는
하지만 삶의 일부가 확실합니다. 왜냐하면 산 사람만이 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삶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오늘 에스테르 왕비는 이스라엘 백성을 모함하여 모두 죽이려는 함만의
계략에 정면대응하기로 합니다. 임금 앞에 당당히 나서 억울함을
토로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임금이 부르지 않았는데도 임금 앞에 나서면
왕비라도 사형에 처해질 수 있습니다. 그때 왕비가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님, 저희 고난의 때에 당신 자신을 알리소서.”
이 죽음의 시간을 통하여 하느님의 권능을 온 세상에 드러내는 기회로
삼으라는 기도입니다. 그리고 주님께 의탁하는 왕비에게서는 전혀 두려움
같은 것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사자 앞에 나설 때 잘 조화된 말을 제 입에 담아 주시고, 그의 마음을
저희에게 대적하는 자에 대한 미움으로 바꾸시어, 그 적대자와 동조자들이
끝장나게 하소서.”
어쩌면 왕은 이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에스테르에게 반했는지도
모릅니다. 목숨을 걸고 자신의 민족을 구하려는 왕비의 청을 들어주고
함만을 처형시키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두 죽이라는 명을 거둡니다. 한
사람의 목숨을 내어놓으니 많은 이들의 생명을 되찾게 된 것입니다.
죄를 지으면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따라서 삶 안에서도 많은 두려움이
생겨납니다. 내가 죽음을 재난처럼 여긴다면 지금 삶도 재난처럼 살고
있는 것입니다. 죽음이 두렵지 않다면 에스테르 왕비처럼 삶도 두려움
없이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 행복이 아닐까요?
에스테르 왕비가 죽음을 두려워했다면 자신은 평생 두려움에서 살고
나머지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은 죽임을 당해야 했습니다. 이렇게 되면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죽는 것이 두렵다면 우리의 믿음을
재점검 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반드시 믿음을 방해하는 무언가에 집착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끊어내고 오로지 주님 섭리에 맡기십시오.
그때부터 지금까지는 느껴보지 못했던 ‘참으로 사는 것 같은 기분’을 느낄
것입니다. 죽음과 삶은 하나입니다.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 수원 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전삼용 요셉 신부 -
◈ [서울] 하느님은 우리에게 사랑을 말하지만
2015년 나해 2월26일 사순 제1주간 목요일
제1독서
<주님, 당신 말고는 도와줄 이가 없습니다.>
◎ 에스테르기의 말씀입니다. 4,17(12).17(14)-17(16).17(23)-17(25);
복음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을 것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7,7-12
하느님은 우리에게 사랑을 말하지만
매스컴은 좋다고 사건들을 먹이고 부모들은 좋다고 재물을 먹이네요.
친구들은 좋다고 술 고기 먹이고 학교에선 좋다고 지식만 먹이고요.
태어나 클 때까지 좋다고 먹고 나선 인생건강 해치고 운명건강 잃더군요.
대자연은 우리에게 신선한 환경을 주지만 고마움을 모르고 한눈만 팝니다.
양심은 우리에게 진실을 말하지만 입 다물라 대항하며 귀 막아버립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사랑을 말하지만 귀 막고 돌아서서 엉뚱한 길 따르지요.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 (마태오 7,11)”
- 서울 대교구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 [기타]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선택에 앞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뜻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2015년 나해 2월26일 사순 제1주간 목요일 복음묵상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을 알거늘,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마태오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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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시간을 뒤돌아볼 때, 부정할 수 없는 일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께 무엇인가를 청했을 때, 결과적으로 안 들어주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설마 그럴 리가?” 라며 반문하는 분도 계시리라 봅니다.
물론, 나 역시 결과를 보고,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는 그분의 마음에 속이
상한 적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비록 내 예상과는 빗나간 결과였다
하더라도,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분께서는 나에게 있어서 가장 좋은 길로
이끌어 주시려 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분께 청합니다.
그리고 반응 없으신 그분께 실망하고 곧 포기를 하고 맙니다.
하지만 우리가 기도를 통해 무엇인가를 청할 때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청하는 것보다 더 좋은 계획이 있으신데, 내가
청하는 내용이 나를 망치는 것인데 그것을 그대로 들어주실 리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청이 이루어지지 않는 듯 한 느낌이 들 때, 우선 나의
지향이, 나의 바람이 정말로 옳은 것인가를 다시 한 번 생각해야만 합니다.
때로는 우리의 눈이 어두워져 옳지 않은 것이 옳게 보일 때도 있습니다.
아니 어쩌면 우리는 대부분, 자신의 욕심이라는 잣대를 들이대면서
하느님께 따지듯이, 강요하듯이 기도하는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청해야 할 것, 그것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가장 좋은 길로 내가
걸어갈 수 있게 해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어야 할 것, 그것은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있어서 가장 행복할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를
아시며, 내가 그 길로 가기를 누구보다도 간절하게 바라신다는 것입니다.
(130221)
-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 [청주] 가장 강력한 힘|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5년 나해 2월26일 사순 제1주간 목요일(마태7,7-12)
제1독서
<주님, 당신 말고는 도와줄 이가 없습니다.>
◎ 에스테르기의 말씀입니다. 4,17(12).17(14)-17(16).17(23)-17(25);
복음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을 것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7,7-12
가장 강력한 힘
“기도는 사람들이 쓸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힘입니다. 전지전능하신 분도
양보하시는 힘이며,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특권입니다. 전능하신
아버지께서 그 자녀의 필요와 염려에 관심을 나타내실 수 있는 길이고,
주 하느님나라의 창고는 기도로 열리며 믿음은 그 열쇠를 돌리는
것입니다.”(작자미상)
그런데 기도의 응답은 때때로 즉각 이루어 주십니다. 가르멜 산위에서
기도한 엘리야의 기도를 듣고 곧 불을 내려 주셨습니다. 천천히 적당한
때에 이루어주시기도 합니다. 다윗왕은 성전을 건축하려 하였지만 아들
솔로몬으로 하여금 성전을 건축케 하였습니다. 어느 때는 이루어주지
않음으로 응답이 되게 하십니다. 기도의 응답은 기도를 하는 사람에게
유익이 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들어주어서 손해가 될 것은 들어주지
않음으로 해서 유익하게 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큰 사랑으로
우리의 필요를 반드시 채워주십니다.
예수님께서도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마태7,8) 라고 하셨습니다. 각자의 바람이 많이
있겠지만 세속적인 만족과 위로를 찾고 구하기보다 먼저 하느님을 찾고
갈망하여 영적인 성장을 이룰 수 있게 해 달라고 청했으면 좋겠습니다.
청해도 얻지 못하는 것은 욕정을 채우려는데 쓰려고 청하기 때문
(야고4,3)이라고 하였으니 헛된 수고의 기도가 되지 않기를 바라며
하느님께 마음의 문을 열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울지 않는 아이는 젖도
못 얻어먹는다.”고 했습니다. 먼저 청해야 합니다. 그러나 “누울 자리보고
발 뻗는다.”는 말도 있습니다. 들어주실 것을 청하십시오.
사실 문이라는 것은 열릴 때 열리고, 닫을 때는 닫을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에는 열고, 악에는 닫아야 합니다. 문을 두드리시는 주님께는 물론
아내에게, 남편에게 ,자녀에게, 부모에게, 형제에게, 이웃에게 문을 열어야
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부와 명예, 명성의 유혹에는 문을 열어서는 안
됩니다. 사랑의 마음은 열고 욕심의 입은 닫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든지 주실 수 있는 분이고 따라서 우리는 받을 수 있으니
행복합니다. 받지 못한다고 생각할 때도 있습니다만 구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오히려 더 고마운 응답일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청하고, 찾고
두드리되 내 뜻이 아니라 주시는 분의 뜻대로 이루어 주시길 바라야
하겠습니다. 내 뜻을 관철시키는 것이 기도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알아채는 것이 기도의 열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마태7,11)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좋은 것을 주시는 아버지 하느님께 좋은 의향을 가지고 마음껏
청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무언가를 반복해서 청하는 것은 기도가
아닙니다. 우리 자신을 그분 손에, 그분의 처분에 맡기고, 마음 깊은
곳에서 그분의 음성을 조용히 듣는 것입니다.” “기도는 심장과 심장의
만남입니다”(마더 데레사). 우리의 바람과 기도가 헛되지 않기를 빕니다.
사랑합니다.
@@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무엇인가? 주는 것인가, 받는 것인가? 내가
무엇인가를 받을 때, 어떻게 감사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는가? 주님과
더불어 베풀 수 있음에 감사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 청주교구 청주 성모병원 행정 부원장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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