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상주의 화가
모네
모네의 [루앵대성당]
모네의 [수련]
프랑스의 인상파 화가. 파리 출생. 소년시절 르 아브르에서 보냈으며, 18세 때 그곳에서 화가 로댕을 만나, 외광묘사에 대한 초보적인 화법을 배웠다.
19세 때 파리로 가서 아카데미 스위스에 들어가, 피사로와 사귀었다. 초기에는 쿠르베나, 마네의 영향을 받아 인물화를 그렸으나 점차 밝은 야외에서 풍경화를 그렸다.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전쟁 때 런던으로 피신, 이때 터너, 콘스터블 등의 영국 풍경화파의 작품들에 접했다.
1872년 귀국, 파리 근교의 아르장퇴유에 살면서 센 강변의 밝은 풍경을 그려, 인상파양식을 개척하였다.
1874년 부터 86년까지 8회 계속된 인상파전에 5회에 걸쳐 많은 작품을 출품하여 대표적 지도자로서의 위치를 굳혔다.
작품은 외광을 받은 자연의 표정을 따라 밝은색을 효과적으로 구사하고, 팔레트 위에서 물감을 섞지 않는 대신 ‘색조의 분할’이나 ‘원색의 병치’를 이행하는 등, 인상파기법의 한 전형을 개척하였다.
모네의 인상주의는 눈에 비쳐지는 '순간성에 대한 끊임없는 추구'였던 것이다. 자연을 감싼 미묘한 대기의 뉘앙스나 빛을 받고 변화하는 풍경의 순간적 양상을 묘사하려는 그의 작화의도는 <루앵 대성당> <수련> 등에서 보듯이 동일주제를 아침·낮·저녁으로 시간에 따라 연작한 태도에서도 충분히 엿볼 수 있다.
마네
마네의 [풀밭위의식사]
파리에서 태어나 한때 선원 견습생이 되었으나 화가를 지망하고 쿠튀르(1815-1879)의 문하생이 되었다.
그러나 스승보다는 루브르 미술관에서 고전작품을 묘사하는 한편 할스, 고야 특히 벨라스케스에게서 강한 영향을 받았다.
현대 미술의 출발점으로 간주되는 1863년의 낙선전에 마네는 <풀밭위의 식사>를 출품하여 큰 반향을 일으킨다.
이작품은 마네가 파리스의 심판 구도를 이용하여 그린 것 이다.똑바로 앞을 보며 두려워하지 않는 나체의 여인 시선은 보는 이를 화폭 안으로 끌어들인다
그린 방법 역시 색조의 조정에 의해 명암효과를 추구하는 전통방식을 버리고 면면이 강조되고 단일 색채로 크게 처리하여 평면적으로 보이는 방법을 선보인다.
마네의 의의는 근대회화의 기틀을 마련하는 새로운 양식의 작가로서 회화의 평면성을 추구하고 있다는 점이다.
일상의 주제를 채택하여 새로운 회화언어를 추구하는 것은 이제 회화이 문제가 무엇을 그리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그리느냐의 문제에 달려있게 되는 것이다.
드가
피사로의 [꽃이 만발한 사과나무]
피사로의 [루브시엔느의 밤나무]
서인도제도의 세인트토마스섬 출생. 1855년 화가를 지망하여 파리로 나왔으며, 같은 해 만국박람회의 미술전에서 코로의 작품에 감명받아 그로부터 풍경화에 전념하였다.
그리고 몇 차례 살롱에 출품하였으나 번번이 낙선하고 70년의 프로이센-프랑스전쟁 때는 런던으로 피난하여 그곳에서 모네와 함께 터너 등의 영국 풍경화를 연구하였다.
전후에는 파리 북서쪽 교외에 정주하면서 다시 질박한 전원풍경을 연작, 74년에 시작된 인상파그룹전에 참가한 이래 매회 계속하여 출품함으로써 인상파의 최연장자가 되었다.
그의 작풍은 인상파 특유의 기법을 바탕으로 수수하면서도 견실성을 보여 모네와 시슬레보다 한층 구성적인 면에 특색을 보였다. 만년에는 시력이 약화되었으나 최후까지 제작활동을 계속하여 인상주의 운동과 운명을 함께 하려는 성실성을 보였다.
인상주의자 그룹의 모든 전시회에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참석했던 유일한 사람.
1884년 이후에 앙데팡당 전시회에서 쇠라 작품에 감명받아 신인상주의로 전향하나 신인상주의의 한계(제작 기간이 너무 오래 걸리며 자신의 감각을 추구하기 어려우며 또한 운동적이거나 순간적으로 사라지는 자연의 아름다운 양상을 추구할 수 없었기 때문에)를 느끼고 1888년부터 1890년경 신인상주의 기법을 버린다. 그 후 연작을 제작하며 인상주의 운동과 운명을 함께 한다
르느와르
르누아르의 [피아노치는소녀들]
르느와르의 [물랭 드 라 갈래트]
르느와르의 [나부]
프랑스 중부 리모주 출생. 4세 때 파리로 이사하였다.
집안이 가난한 양복점이어서 13세부터 도자기공장에 들어가 도자기에 그림그리는 일을 하였다. 이곳에서 색채를 익힌 것이 뒤에 큰 도움이 되었다.
이 무렵부터 점심시간에는 루브르미술관에서 와토나 부셰 등의 작품에 이끌려 화가가 될 것을 꿈꾸었다. 그러나 4년 후 기계화의 물결에 밀려 실직하였다.
1862년 글레이르의 아틀리에에 들어가 모네, 시슬레 등을 알게 되고 또 피사로, 세잔과도 사귀어, 훗날 인상파운동을 지향한 젊은 혁신화가들과 어울리게 되었다.
1874년 제1회 전람회에는 <판자 관람석>을 출품하였고, 계속하여 제2회와 제3회에도 참가하여, 한동안 인상파 그룹의 한 사람으로서 더욱 더 눈부시게 빛나는 색채표현을 전개하였다. <물랭 드 라 갈레트>와 <샤토에서 뱃놀이를 하는 사람들>은 인상파시대의 대표작이다.
1881년 이탈리아를 여행, 라파엘로나 폼페이의 벽화에서 감동을 받고부터는 인상파에서 이탈하여 재차 독자적인 풍부한 색채표현을 되찾아 원색대비에 의한 원숙한 작풍을 확립하였다.
더욱이 1890년대부터는 꽃·어린이·여성상, 특히 <나부>등은 강한 의욕으로 빨강이나 주황색과 황색을 초록이나 청색 따위의 엷은 색채로 떠올리면서 부드럽고 미묘한 대상의 뉘앙스를 관능적으로 묘사하였다.
1900년에는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만년에는 지병인 류머티즘성 관절염 때문에 손가락에 연필을 매고 그렸다. 최후 10년 간은 조각에도 손대어 <모자>와 같은 작품을 남겼다.
고흐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
고흐의 [담배를 물고 잇는 해골]
고흐의 [자화상]
빈센트 반 고흐는 1853년 네덜란드 북부 브라반트의 프로트준데르트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신교의 목사였으며 16세 백부의 소개로 화구상의 점원이 되면서 그림과 인연을 맺었다.
그러나 젊은 시절 고흐는 종교적 정열에 불타 단기 목사 양성소를 졸업하고 전도사가 되어 한 때는 벨기에의 보리나즈 탄광촌을 무대로 정열적인 전도에 몰두했으나 전도사직을 해고당하자 1880년 화가로서의 출발을 결심하였다.
고흐는 27세에서 37세에 이르기까지의 10년 동안에 작품들을 창조하였는데 순수색을 사용하고 물감을 두텁게 바르는 놀라운 색채 구사법을 통해 자신이 선택한 소재들을 더욱 뛰어나게 묘사할 수 있었으며 그것들에다 영원성을 부여하였으나 1890년 37세의 나이에 자살을 함으로써 생을 마쳤다.
세잔
세잔의 [자화상]
세잔의 [카드놀이를 하는 사람들]
프랑스의 화가. 남프랑스의 엑스앙프로방스에서 태어 났다.
모자제품업에서 은행가가 된 사람을 아버지로부유한 가정에서 자랐으며 어린시절 친구 졸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처음에는 아버지의 희망에 따라 엑스의 법과대학에서 법률을 배웠으나 화가를 집념 하고 1861년 파리로 나와서 아카데미 스위스에서 그림 공부를 하였다. 여기에서 기요맹, 피사로와 만난다. 후에 인상파화가들과 인연을 맺는 계기가 되었다.
1861년과 1862년의 에콜 데 보자르 입학에 실패하며 그 사이 고향과 파리 사이를 오가면 서도 그림의 길을 걷는다. 피사로영향으로 색채를 밝게 하고 구성도 강한 질서를 잡고 있다.
제1회 인상파전 에는 <목매다는 집> <오베르 풍경>등을 출품했다.
제3회 인상파전을 고비로 차차 인상파를 벗어나는 경향을 보이고, 구도와 형상을 단순화한 거친 터치로 독자적인 화풍을 개척해 나가기 시작하였다.
“자연은 구형·원통형·원추형에서 비롯되는 것이다”라고 견해를 밝힐 만큼, 자연을 단순화된 기본적인 형체로 집약하여 화면에 새로 구축해 나가는 자세로 일관했다. 즉 빛에 따른 것이 아니라 물체의 형체의 세계에 깊이 파고들었다.
후에 야수파와 입체파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근대회화의 아버지로 불리는 동기가 되었다.
고갱
고갱의 [고귀한 야만인]
고갱의 [타히티의 여인들]
프랑스의 화가. 파리 출생.
고갱은 다른 예술가와 달리 고흐처럼, 예술 외적인 우회적삶을 보낸 작가이다
1876년 처음으로 살롱에 출품하여 피사로를 사귀게 된 것을 계기로 1880년 제5회 인상파전 후로는 멤버가 되었다. 82년 피사로의 소개로 세잔, 기요맹등과 친교를 맺어 화가가 될 결심을 굳혔다.
이듬해인 1883년 35세에 증권거래점을 그만두고 그림에 전념하였다. 그러나 생활이 어려워 아내와 사이가 나빠졌으며 한때는 처가가 있는 코펜하겐에 갔으나 결국 처자식과 헤어져 파리로 되돌아왔다.
1886년 6월 도시생활에 지쳐 브르타뉴의 퐁타방으로 이사하였다. 거기에서 종래의 인상파풍 외광묘사를 버리고 차차 고갱 특유의 장식적인 화법을 지향하여 세뤼지에, 드니, 보나르 등, 후일 나비파(Nabis)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1887년 처음으로 남대서양의 마르티니크섬에 갔다가 이듬해 파리로 왔으며, 이어 고흐와 함께 남프랑스의 아를에서 살았다. 그러나 두 사람은 서로 타협할 수 없는 성격이어서 고흐가 귀를 자른 사건을 계기로 비극적인 작별로 끝났다.
그러나 생활은 여전히 어려웠고 문명세계에 대한 혐오감만 더하여 마침내 91년 남태평양의 타이티섬으로 떠났다.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타이티의 여인들>등은 만년의 작품들이다. 타이티 원주민의 건강한 인간성과 열대의 밝고 강렬한 색채가 그의 예술을 완성시켰다.
첫댓글 사진 크기 조절이 잘 안되네...나름대로 작은걸로 고른다고 했는데 원본이 커서 이렇게 되네...몇개씩 찾아서 올렸으니까 알아서 채크 하도록^^ 내가 신경 좀 쓴거라구.
-_-;; 어떻하냐 형 ㅎㅎ 1사람만 조사 하는거야 ㅎㅎ 글구 이렇게 하면 안될껄 ? ?ㅎ
ㅡ.ㅡ 에이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