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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드디어 떠나는가봅니다. 정말 힘든 여름이었습니다. 어제까지도 에어컨을 작동시켰습니다. 바람 한 점 없이 습하고 더운 공기가 집안 가득하였습니다. 실내 기온 30도, 이른 아침이지만 켤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마도 이 여름 끝이겠지 싶었거든요. 얼마나 더 살겠다고, 뭐 그런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거참! 곧 전월 관리비 청구서가 들어올 텐데 은근히 걱정됩니다. 무슨 폭탄으로 떨어질지, ㅋㅋ 그래도 이 무시무시한 여름을 이겨낸 것만도 감사하지요. 그깟 돈 몇 푼이야, 어찌어찌 채워지리라 믿고 사는 겁니다. ㅎㅎ 8월 말에 기대할 만한 비가 이제 옵니다. 기온이 좀 내려갈 것입니다. 더 이상 열대야는 없겠지요. 이 주말은 정말 이 비가 반갑고 고마워집니다.
다음 주부터는 다시 산행을 시작할 듯합니다. 8월말 잠시 다시 시작하였다가 며칠을 견디지 못하고 중단했었지요. 길지도 않은 시간이지만 땀으로 범벅이 되어 내려오면 하루 일과가 깨집니다. 차라리 방학을 이어가자 싶었습니다. 근 한 달을 더 기다려야 했네요. 이런 여름 더 없으면 좋겠는데 그걸 어찌 알겠습니까? 내년 걱정을 당겨 할 필요야 없겠지만 그래도 참 걱정스럽습니다. 뉴스에 보면 세상 곳곳 별 난리가 많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누구 탓할 필요도 없습니다. 다 우리 스스로 만든 땅이니까요. 그런데 얼마나 조심하며 살고 있는지 하루하루 살기 바빠 신경도 쓰지 않는 듯합니다. 거참! 세상 어찌 되어가려는지 ----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 각자 조금씩이라도 싱경 쓰며 나아가야지요.
어느덧 9월도 하순에 접어듭니다. 파란 하늘을 그리며 행복한 주말을 지내면 좋겠습니다. ^)^ 2024년 9월 21일 김종우 목사 드림
“저에게 먹이려고 가까이 가지고 갈때에 암논이 그를 붙잡고 이르되 누이야 와서 나와 동침하자 저가 대답하되 아니라 내 오라비여 나를 욕되게 말라 이런 일은 이스라엘에서 마땅히 행치 못할 것이니 이 괴악한 일을 행치 말라”
(사무엘하 13 : 11 - 12)
<베테랑2>
‘나쁜 살인, 좋은 살인이 어디 있냐? 그냥 살인이지.’ 그래서 비록 살인전과를 가진 못된 놈조차도 그 생명을 보호해주기 위해 경찰 병력까지 지원하여 보호해줍니다. 글쎄, 이게 될 말인지, 될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국민 세금을 국민의 원망을 사고 있는 자를 위해 사용해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그만큼 생명을 귀중히 여겨준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어야 하겠지요. 이런 작자의 생명까지도 보호해주는데 일반 국민이야 오죽하겠느냐 하는 생각을 하게 해준다 그런 의미입니다. 그야 옳은 말이지만 정말 공감해주기 어렵습니다. 아무튼 맞는 말입니다. 맞는 일이고요. 결국은 잔혹하게 최후를 마치는데 그 모습이 그다지 시원하지는 않습니다.
성폭행은 주로 권력관계가 형성되어 있을 때 발생합니다. 그 위압에 눌려 알면서도 당합니다. 피하기 어렵습니다. 그 상황을 반항으로 벗어난다 한들 자신에게 돌아오는 대가가 훤하니까요. 어쩌면 강제 선택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당하고 자리를 보존하느냐, 아니면 자리를 빼앗기는 것을 각오하고 벗어나느냐, 하는 선택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생존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면 자존심과 자존감을 희생하고 그냥 동물처럼 내주어야 합니다. 물론 그 뒤에 그 상처를 안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큰 고통이고 슬픔인지 아직은 당하고 있지 않기에 어쩔 수 없이 자기를 버립니다. 그 후 망가진 자신을 안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긴 고통의 짐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실제 비슷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교수의 성폭행 사건으로 재판까지 이뤄집니다. 그러나 학생이니 약자이고 여자이니 약자입니다. 우리 사회에 아직도 그런 불평등이 남아있습니다. 한 사람은 인생 자체가 무너지고 있는데 피의자는 날로 출세하며 이름을 날립니다.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생을 마감합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딸을 어떻게 잃었는지 아는 부모도 제대로 삶을 누리지 못하고 끝납니다. 사람들이 이런 사실을 알고는 피켓 시위를 합니다. 하지만 무슨 힘이 있겠습니까? 그런가 하면 살인을 저질렀음에도 심신미약 상태라고 기껏 3년 징역 형을 받고 옥살이 하고 나옵니다. 살인으로 한 가정이 무너졌는데 겨우 3년 살고는 룰루랄라 나와서는 활보합니다. 이게 법이냐? 싶지요.
‘해치’가 등장합니다. 사실 상상의 동물입니다. 선악을 분별할 줄 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끼리 만든 작품일 것입니다. 세상이 하도 제멋대로이니 상상의 산물이 등장하여 대리만족을 시켜주게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세상이 판단해주는 것이 도무지 납득하기 어렵고 억울하고 답답하니 이런 상상의 세계로 빠져듭니다. 그 역할을 하는 존재가 현실로 나타납니다. 마치 홍길동처럼 등장하여 악행을 저지른 자들 특히 법망을 교묘하게 벗어나 활개치는 악당을 찾아 대신 징벌합니다. 법이 해결해주지 못한 것을 처리해주니 억울한 입장의 피해자로서는 시원합니다. 그것을 바라보는 일반시민들도 비슷한 감정을 느낍니다. 마땅히 처벌받아야 할 놈이 사라졌으니 괜찮다 싶은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연쇄살인이 벌어집니다. 평판이 좋지 않았던 바로 그런 작자들이 잔혹하게 살해되는 것입니다. 좀 안 됐지만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존재가 아니라 아예 없어져야 할 악인이 사라졌으니 잘 됐다 싶은 감정이 먼저입니다. 그러면서 한편 두려움도 느끼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살인을 저지르고 있는 존재가 생명을 귀하게 여겨줄까 싶은 것이지요. 그러다 어느 순간 내가 그와 맞닥뜨린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두려워집니다. 마냥 좋아할 일이 아닙니다. 시원하기는 한데 존재 자체에 대해서 두려움도 가지게 됩니다. 아무튼 좋은 살인, 나쁜 살인이라고 할 것이 없습니다. 한 마디로 살인입니다. 그리고 살인범입니다. 잡아야지요.
‘서도철’이 이끄는 강력범죄수사대가 소위 해치라는 존재를 찾아나섭니다. 그리고 수사대에 신참으로 보이는 ‘박선우’가 합류합니다. 정의감에 넘치고 그냥 열심만 있는 것이 아니라 대단한 실력파입니다. 선배 형사들이 쩔쩔매는 가운데 날고 뛰며 현장을 휘어잡습니다. 웬만한 범죄사건은 현장에서 마무리됩니다. 야, 이거 보통이 아니네, 서도철 형사도 감탄하며 아껴줍니다. 함께 하여 범죄수사대를 힘차게 밀고 나갑니다. 사실 그렇게 몸을 다쳐가며 가정도 제대로 돌보지 못하며 현장을 누비고 다니지만 결과가 자기네 생각만큼 나타나지 않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니 마음 같아서는 현장에서 그 나쁜 놈을 반죽음으로 만들어 놓고 체포하기를 원합니다.
서도철의 가정사가 껴드는 것도 그냥 이야기의 흐름에 감초 역할을 하는 것뿐입니다. 초점은 이 연쇄살인범 해치를 수사하고 붙잡는 것입니다. 단서를 찾아가며 조금씩 밝혀지는 것을 보면 전혀 엉뚱한 곳에 범인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바로 그 점이 이야기에 몰입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알고보면 놀랍지요. 그런데 사실 그런 마음을 누구인들 가져보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정의구현이라는 법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세상에서 말입니다. 조금이라도 사람들을 시원하게 만들어주는 존재가 필요하기도 합니다. 탐관오리를 혼내줄 수 있는 홍길동을, 아니면 임꺽정이라도 등장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다는 말입니다. 영화 ‘베테랑2’(I, THE EXECUTIONER)를 보았습니다.
재림 예수를 아는가?
시각장애인이 보게 된다는 일이 요즘은 가능해졌습니다. 누구인가 안구를 기증해주면 개안수술을 통하여 시력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기본 요건이 갖추어져야 합니다. 첫째는 기증되는 안구가 있어야 하는 것이고 둘째는 그것을 가지고 수술할 수 있는 의학적 과학적 기술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시대에 그 기술은 상당히 발전되어 있습니다. 게다가 많은 사람들이 사후 안구기증을 서약하고 있습니다. 생명이 다하면 우리 몸은 흙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냥 땅속에 묻힐 것이 아니라 그것을 필요로 하는 다른 사람에게 주겠다고 사전에 서약합니다. 그렇게 해서 남아있는 다른 사람에게 덕을 끼치는 것입니다. 죽어서도 선행을 하는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갑작스럽게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은 어린 자식의 장기를 여러 사람에게 기증한 부모의 이야기도 보도되었습니다. 한 생명은 떠났지만 여러 사람이 그 덕을 보았습니다. 이러한 선행으로 시력을 회복하여 새로운 삶을 얻는 사람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아무튼 이런 일은 오늘날에나 가능한 일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생각도 꿈도 꾸지 못할 일입니다.
오늘 우리는 성경에서 한 시각장애인을 만납니다. 오늘날에도 장애인들은 대부분 경제력이 약합니다. 혼자 힘으로 무엇을 하기도 힘들고 또 누가 자기를 고용해주는 사람도 없습니다. 멀쩡한 사람이 많은데 구태여 장애인을 고용해서 쓸 일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야말로 고달픈 인생 길을 걸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 등장하는 소경 바디매오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래서 말하기를 “소경 거지 바디매오”라고 하였습니다. 신체적으로 장애인이요 사회적으로는 거지였습니다. 그가 길가에서 구걸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누군가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말을 한 것입니다. 그랬더니 갑자기 소리를 지르기 시작하였습니다. 결국 예수님이 그를 부르셨지요. 예수님께로 달려갑니다. 예수님이 물으셨습니다. 막 10 : 51 “예수께서 일러 가라사대 네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 예수님이 우리를 불러 지금 이렇게 물으신다면 우리는 무엇이라 답하겠습니까? 어느 동화책 이야기처럼 제가 만지는 것은 다 금이 되게 해주십시오. 그렇게 대답하겠습니까?
세 친구가 항해하다가 난파당하여 어느 무인도에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상한 호리병을 얻었습니다. 뚜껑을 여니까 웬 이상한 거인이 안개를 타고 나왔습니다. 그러면서 자기를 풀어줘서 고맙다고, 무엇이든지 한 가지씩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하나씩 말하라고 합니다. 첫째 친구가 신이 나서 말했습니다. 어디어디 바닷가 별장에서 아름다운 여자를 안고 노을지는 풍경을 즐기고 싶습니다. 그러자 휭 - 하고 사라졌습니다. 다음 친구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합니까? 나는 애인과 에쿠우스를 몰고 중앙고속도로를 달리고 싶습니다. 그러자 역시 휭 - 하고 사라졌습니다. 마지막 한 친구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합니까? 그랬더니 조금 멍한 이 친구가 이렇게 말합니다. 여기서 내가 어떻게 혼자 삽니까? 방금 그 친구들을 다 불러주십시오. 그래서 그들이 다시 모여 살게 되었답니다. 우리가 소원을 가지는 것 중요합니다. 하지만 내 소원이 중요하듯이 또한 남의 소원도 중요한 것입니다.
막 10장에는 소경 바디매오와의 만남 바로 앞에 이와 비슷한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당신의 제자들에게 똑같이 질문합니다. 그런데 그들의 대답은 여기 소경 바디매오와 사뭇 다릅니다. 35 - 37절 봅니다. “세배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께 나아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의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 여짜오되 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주옵소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 제자들이 원한 것이 무엇입니까? 자리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제자들과 똑같습니까? 세상에서의 자리, 예 중요하지요. 장관 자리 하나 내놓으면 교수도 뛰어나가고 대학 총장도 발벗고 나갑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무엇이나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필요는 채워주시지만 우리의 욕심을 채우시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할 때 이것이 욕심인지 필요인지부터 분별하면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자 소경 바디매오가 예수님을 만나 당시로서는 꿈도 꿀 수 없는 은혜를 입습니다. 보게 된 것입니다. 놀라운 기적이지요. 어떻게 이 놀라운 은혜를 입게 되었는가? 사실 우리도 그러한 은혜를 받고 싶지 않습니까? 당연하지요. 물론 우리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지금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그 은혜를 받아 누리기를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예수님을 향해 외치십시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고 둘째 예수님께 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선 47절 보겠습니다.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자 예수님이 지나갑니다. 사람들이 누구라고 말해주었습니까? “나사렛 예수시라” 그랬습니다. 그런데 이 소경 바디매오는 그 예수님을 향해 뭐라고 부르지요? “다윗의 자손 예수여” 하고 부릅니다. 그 차이를 알겠습니까? 분명 ‘나사렛 예수’라고 말해주었는데 바디매오는 ‘다윗의 자손 예수’라고 부른 것입니다. 나사렛은 단순히 출신 지역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에는 깊은 의미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신약성경의 첫 마디가 어떻게 시작됩니까? 마 1 : 1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그렇습니다. ‘다윗의 자손’ 그러면 바로 언약의 후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 언약의 자손이요 하나님이 약속하신 메시야를 지칭합니다. 비록 소경 거지였지만 바디매오는 예수를 메시야로 믿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메시야가 지금 자기 앞을 지나가고 있으니 이 때가 바로 구원 얻을 때라고 믿은 것입니다. 그 믿음의 고백이 외침으로 나왔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바디매오가 예수시란 말을 듣고 어떻게 갑자기 소리를 지르게 되었을까요? 뭐라고 소리질렀습니까?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예수가 누군데 자기를 불쌍히 여기고 또 불쌍히 여기면 무슨 일이 일어날 수 있기에 그렇게 간절히 소리를 질렀느냐 하는 것입니다. 분명히 그는 예수에 대해서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평소에 예수님을 만나려는 소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병든 자를 낫게 해준 이야기, 아무 것도 없는 들판에서 많은 사람들을 먹이신 기적의 이야기, 귀신을 쫓아낸 이야기 등등 비록 보지는 못해도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는 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을 가졌습니다. 이야말로 우리 조상 적부터 기다려오던 메시야가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나도 예수님을 만나기만 하면 나으리라. 내가 맘대로 다닐 수가 없으니 답답하구나. 예수님이 이쪽으로 오시는 기회는 없을까? 한번만 다녀가시면 좋겠다. 그런 소원을 가지고 기다렸습니다. 바디매오는 자기 문제를 가지고 누구를 기다렸습니까? 예수님을 기다렸습니다.
우리는 문제가 발생하면 누구를 기다립니까? 아니면 누구에게 찾아갑니까? 힘 있는 사람, 백 있는 사람, 돈 있는 사람 등등 좀 기댈만한 사람에게 갑니다. 세상에서는 유전무죄 무전유죄이니 돈이면 많은 문제가 해결됩니다. 지금도 왜 사람들이 그렇게 돈을 따라다닙니까? 모니모니해도 모니가 최고요 모니가 파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온 세상이 돈에 환장해서 따라가는 것 아닙니까? 예수님이 왜 부자가 하늘 나라 들어가기가 쉽지 않다고 말씀하셨습니까? 하나님 따라가는 시간보다 돈 따라가는 시간이 훨씬 많기 때문입니다. 돈 많은 것이 잘못이 아닙니다. 문제는 돈을 세는 시간이 기도하는 시간보다 훨씬 많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다 부자 되기를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갈 3 : 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아멘! 14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리신 것은 우리를 구원하사 아브라함의 복이 우리에게 미치게 하려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다 아브라함처럼 부자 되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돈을 따라가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을 따라가는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가 돈을 잡으려 하면 잡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붙여주시면 가만있어도 쌓입니다. 믿습니까?
가나 혼인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누가 먼저 알았는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예수님의 어머니도 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였지요? 요 2 : 3 “포도주가 모자란지라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께 이르되 저희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잔치 집에 포도주가 떨어졌으면 당연히 그 집 주인에게 가서 알려야지요. 그런데 마리아는 누구에게 갔다고요? 예수에게 갔습니다. 상식적으로는 이상한 일입니다. 그러나 만약 그 집주인에게 갔더라면 잔치만 혼란스러워졌을 것입니다. 마리아는 문제를 안고 예수께 갔습니다. 그리고 해결을 보았습니다. 우리도 지금 문제 앞에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상식적인 일입니다. 물론 그래야지요. 하지만 그보다 먼저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가기를 원합니다. 문제를 먼저 하나님께 보고합시다. 먼저 하나님께 구하기를 바랍니다. 그리하면 그 상식적인 일에서조차 지혜를 주시리라 믿습니다.
2. 방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바디매오가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소리지릅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런데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막 10 : 48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렇습니다. 이봐, 시끄러워. 좀 조용히 해. 한두 사람이 그런 게 아닙니다. 많은 사람이 그랬습니다. 주눅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디매오는 어떻게 하였습니까? 48절에 “그가 더욱 심히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오히려 더욱 심히 소리질렀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야 눈이 보이니 맘만 먹으면 아무 때고 찾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 바디매오는 시각장애인입니다. 맘대로 움직이기가 어렵습니다. 지금이 일생일대의 기회입니다. 예수님이 이곳에 다시 오실 기회가 평생에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 절박함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을 놓치면 다시는 없다는 각오가 서려있습니다. 그래서 더 크게 소리쳤습니다. 우리 주님이 모르시겠습니까? 물론 아시지요. 그곳을 지나며 누구를 만나리라는 것도 아셨으리라 믿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믿음입니다. 믿음이 깊을수록 간절함으로 표현되는 법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바디매오에게 기적을 베푸실 때도 말씀하신 것이 믿음입니다. 52절 다같이 합독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저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좇으니라”
우리가 예수 믿고 교회 올 때 순탄하게 시작한 분들도 있고 어렵게 시작한 분들도 있습니다. 별다른 방해 없이 시작한 사람들은 복 받은 분들입니다. 그렇다고 어렵게 시작한 분들은 복 받지 못한 분들입니까? 아닙니다. 더욱 복 받은 분들입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마 5 : 11 - 12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우리의 믿음이 깊어져서 말씀 따라 살려고 애씁니다. 그러면 또 뭐라 하지요? 너 광신자야? 너 미쳤냐? 너 정신 나갔냐? 눅 6 : 38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아멘!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주면 엄청난 복으로 돌아옵니다. 그래서 줍니다. 뭘 바래서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렇게 약속하셨기에 그냥 믿고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돌아오는 말이 광신자라는 욕설입니다. 바나바가 은혜 충만히 받고 자기 밭을 팔아 받칩니다. 지금도 그런 일이 있잖아요. 교회 건축할 때 어떤 성도는 마음에 감동을 받아 자기 집 팔아 전세로 옮기고 그 차액을 건축헌금으로 받칩니다. 그러면 믿지 않는 형제들 친지들은 뭐라 하지요? 미쳤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약속하셨습니다. 마 6 : 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아멘!
우리의 믿음을 방해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주눅들지 않기를 바랍니다. 믿음대로 하십시오. 그리하면 하나님의 기적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성령의 감동함을 받고 믿음대로 하는 것과 자기 명예를 위해서 아니면 체면치레로 또는 다른 욕심 때문에 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행 4장과 5장에 나오는 사건은 우리에게 그것을 교훈합니다. 바나바는 칭송을 듣고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는 드리고도 심판을 받습니다. 이 얼마나 어리석고 안타까운 일입니까? 우리 하나님 뭐가 아쉬워서 우리에게 돈을 달라하고 헌금하라 하십니까? 세상 만물이 다 주의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돈이 아니라 오직 믿음입니다. 예수님이 탄식한 것도 바로 믿음입니다. 눅 18 : 8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문제는 그 믿음을 표현하는 가장 확실한 수단이 뭐냐하면 바로 돈이라는 것입니다. 왜요? 마 6 : 21 “네 보물이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보물이 무엇입니까? 쉽게 말하면 돈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돈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헌금하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의 믿음을 짐작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물론 액수가 문제가 아닙니다. 주님은 많은 헌금을 하는 부자보다 두 렙돈을 드린 과부를 칭찬하셨습니다. 다시 강조합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믿음입니다.
3. 부름에 응하는 것입니다.
바디매오가 더욱 심히 소리질렀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랬더니 막 10 : 49 - 50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저를 부르라 하시니 저희가 그 소경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너를 부르신다 하매 소경이 겉옷을 내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 자 드디어 예수님이 부르셨습니다. 그래서 바디매오가 예수님께로 달려갑니다. 어떻게 달려갑니까? “겉옷을 내어버리고” 이 겉옷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거지에게 있어서 겉옷은 낮에는 옷이고 밤에는 이불입니다. 그의 전 재산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했다고요? 내어버리고 예수님께 달려갔습니다. 지금 겉옷이 문제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우선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다. 우리의 필요가 채워집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복이 쏟아집니다. 그래서 그는 겉옷을 팽개치고 예수님께 달려갔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갈 때는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은 필요 없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하나님을 위해 버려라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새 것으로 나아가 더 놀라운 것으로, 더 엄청난 것으로 채워주십니다. 막 10 : 29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아멘! 그런데 아멘이 그렇게 쉽게 나옵니까? 예수님이 여기 언급하신 이 모든 것은 우리가 사실 결코 버릴 수 없는 것들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살며 가장 귀하게 여기는 것들입니다. 어쩌면 우리 목숨을 걸고라도 지키려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버려요? 중요한 것은 그 다음에 나오는 약속입니다. 그렇게 버린 자는 30절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얼마를 받는다고요? 백 배! 할! 어디서 받습니까? 저 하늘나라에서? 아닙니다. 금세에서. 즉 여기서 받습니다. 하늘에서도 받겠지만 여기서 먼저 받는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부르십니다. 고후 6 : 2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아멘! 모든 방해를 물리치고, 열 일을 제쳐두고, 하나님께 나아오면 우리의 문제는 해결됩니다. 우리의 필요가 채워집니다. 믿음으로 하나님께 드린 것의 백 배의 복이 들어옵니다. 그런데 그 출발이 무엇이냐 하면 바로 예수를 아는 것입니다. 당시 소경 거지 바디매오는 예수를 약속하신 목자, 메시야로 믿고 기다렸습니다. 단순히 ‘나사렛 예수’가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예수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메시야, 구원의 주님으로 오신 것을 알고 기다렸습니다. 예수님에게는 하나님의 능력과 말씀이 함께하심을 믿고 기다렸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지금 그 바디매오 사건 후 2천 년의 세월이 지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누구를 기다립니까? 그 때의 예수님이 아닙니다. 초림 때의 예수가 아니라 재림의 예수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예수 천당’ 하며 초림의 예수 타령을 하고 신앙하고 있습니다. 때를 도무지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천국에 갈 생각이나 하고 있지 천국이 내려올 것을 기대하고 있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의 탄식이 여전히 유효합니다. 호 4 : 6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예배 때마다 외우고 있는데 뜻이나 알고 말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그냥 주문 외우듯이 뇌까리고 끝나는 것 아닙니까? ‘나라이 임하옵시며’ 도대체 뭔 나라가 어디에 오기를 기도하는 겁니까? 그러면서 자꾸 ‘천국 가게 해주시옵소서’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 나라는 도대체 언제 와야 하는 겁니까?
바디매오는 초림 예수를 알고 기다렸고 만났습니다. 우리는 재림 예수를 알고 기다려야 합니다. 막연히 오신다만 알고 있지, 어디에 어떻게 오시는지 알기는 합니까? 어디에 오시면 좋겠습니까? 미국에? 영국에? 중국에? 한국에 오면 안 됩니까? 구름 타고 오신다고요? 손오공입니까? 찾아 배우기 바랍니다. 마 7 : 7 - 8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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