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투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 (나훔 1장 1절 – 15절) 1:1 니느웨에 대한 경고 곧 엘고스 사람 나훔의 묵시의 글이라 2 여호와는 질투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진노하시되 자기를 거스르는 자에게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자기를 대적하는 자에게 진노를 품으시며 3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권능이 크시며 벌 받을 자를 결코 내버려두지 아니하시느니라… 4 그는 바다를 꾸짖어 그것을 말리시며 모든 강을 말리시나니 바산과 갈멜이 쇠하며 레바논의 꽃이 시드는도다 5 그로 말미암아 산들이 진동하며 작은 산들이 녹고 그 앞에서는 땅 곧 세계와 그 가운데에 있는 모든 것들이 솟아오르는도다 6 누가 능히 그의 분노 앞에 서며 누가 능히 그의 진노를 감당하랴… 7 여호와는 선하시며 환난 날에 산성이시라 그는 자기에게 피하는 자들을 아시느니라… 9 너희는 여호와께 대하여 무엇을 꾀하느냐… 10 가시덤불 같이 엉크러졌고 술을 마신 것 같이 취한 그들은 마른 지푸라기 같이 모두 탈 것이거늘 11 여호와께 악을 꾀하는 한 사람이 너희 중에서 나와서 사악한 것을 권하는도다 12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그들이 비록 강하고 많을지라도 반드시 멸절을 당하리니 그가 없어지리라 내가 전에는 너를 괴롭혔으나 다시는 너를 괴롭히지 아니할 것이라 13 이제 네게 지운 그의 멍에를 내가 깨뜨리고 네 결박을 끊으리라 14 나 여호와가 네게 대하여 명령하였나니 네 이름이 다시는 전파되지 않을 것이라… 15 볼지어다 아름다운 소식을 알리고 화평을 전하는 자의 발이 산 위에 있도다 유다야 네 절기를 지키고 네 서원을 갚을지어다 악인이 진멸되었으니 그가 다시는 네 가운데로 통행하지 아니하리로다 하시니라 (개역개정) 오늘부터 나훔서를 가지고 설교합니다. “나훔”(1:1)은, ‘안위(자), 위로(자)’라는 이름의 뜻을 가진 선지자입니다. 그래서인지 나훔서의 내용은, 남 유다 왕국에 당시 큰 위협적 존재였던 앗수르 제국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선언한 “나훔”의 선포가 남 유다 백성에게는 큰 위로와 안위가 되었습니다. 모든 예언서가 이스라엘 민족의 죄악에 대한 심판과 함께 주변 이방 국가의 심판 내용이 담겨 있는 반면, 나훔서에는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 내용이 없다는 점에서 거짓 선지자로 오해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 점은 나훔 선지자의 활동 시기가, 종교 개혁이 이루어지던 요시야 왕(주전 641-609년) 때였기 때문이 아닌가 봅니다. 앗수르 제국 곧 그 수도인 니느웨에 대한 심판 선언이라는 점에서, 요나서와 짝을 이루는 성경으로도 봅니다. 요나서는 주전 760년경 니느웨에 죄악이 관영할 때, 하나님께서 요나 선지자를 통해 니느웨의 회개를 외치게 했습니다. 그때, 그는 원하지 않았지만 순종할 때 놀랍게도 요나 선지자의 외침에 니느웨 백성들이 회개하자 하나님께서 심판을 유보하십니다. 이런 상황에 대해 오히려 하나님께 투정했던 독선적이고 배타적인 선민의식에 사로잡힌 요나의 모습을 통해, 이스라엘 민족이 가진 잘못된 신앙이 무엇인가를 드러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어찌 악인이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겔18:23)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나훔서의 시대적 배경은, 요나서보다 100년 정도가 흐른 주전 663-612년경으로 봅니다. 그것은 나훔서가 “니느웨에 대한 경고 곧 엘고스 사람 나훔의 묵시의 글이라”(1:1)는 선언으로 시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죄악에 물든 북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도구로 쓰임 받은 앗수르 제국은 주전 722년에 북 이스라엘을 멸망시키게 됩니다. 그러나 이때부터 앗수르 제국은 그들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망각하고, 영토 확장을 위한 정복 정책으로 극도의 교만에 빠져 남 유다와 주변 국가를 괴롭히며 억압과 착취와 약탈을 일삼았습니다. 결국 이 때문에 “나훔” 선지자를 통한 하나님의 심판 선언이 성취되면서, 주전 612년에 바벨론과 메데 제국 연합군에 의해 앗수르 제국의 수도인 니느웨가 멸망했고, 결국 주전 605년에 앗수르 제국 전체가 멸망하게 됩니다. 1. 왜 질투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입니까? “나훔” 선지자의 고향을 “엘고스 사람”으로 밝히고 있는데, 혹자는 ‘나훔의 마을’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가버나움”(마4:13)으로 추정하기도 하지만, 대체적으로는 남 유다의 서남쪽인 예루살렘과 가사의 중간 지역으로 추정합니다. 중요한 것은, “나훔”서의 전체 내용이 “니느웨에 대한 경고”로서 준엄한 심판을 경고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묵시의 글”이라는 점입니다. 당시 앗수르 제국은 정복 전쟁을 통해 국가적 부를 축적하면서, 특히나 그 수도인 “니느웨”는 타락과 사치와 교만으로 가득한 도시였습니다. 우리가 부를 축적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어떠한 방식으로 부를 축적하느냐가 문제가 된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필요합니다. 따라서 신앙의 백성인 이스라엘 민족을 향해서 하나님께서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내 눈을 너희에게서 가리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사1:15)고 경고하셨습니다. 많은 경우 종교적 예식으로서의 기도와 예배만을 강조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신앙적 삶으로서의 기도와 예배를 강조하시기에,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한 행실을 버리며, 행악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사1:16-17)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2)며,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롬12:1)고 당부하면서,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12:1)고 선언한 것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영적 예배”가 단순히 어떤 은사주의적 예배가 아닌 우리의 전인격적인 삶의 예배를 가리키는 표현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와 이치에 합당한 예배’라는 의미인 것을 아십니까? 이러한 기도와 예배에 대한 거부가, 신앙인들인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가 하나님의 심판으로 멸망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나훔” 선지자는 하나님의 “니느웨에 대한 경고”를 시작하면서, 하나님의 속성과 인격에 대한 계시로부터 시작합니다. 흔히들 우리 하나님을 사랑의 하나님으로 고백하는데, 이와 달리 “여호와는 질투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1:2)고 선포합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속성을 이렇게 저질스러운 인간의 양태로 표현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단순히 이 문장만 보면 그렇게 오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고난당하는 남 유다 백성들 입장에서, 자신들을 괴롭히는 앗수르 제국에 대해 우리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에 대한 선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하는 하나님이시기에 고난과 고통 가운데 있는 자기 백성을 위하여 “질투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선언은 이들에게 위로와 힘이 되는 말씀이었습니다. “질투”는 화를 낼 때 얼굴이 붉어지는 것으로, 자기 백성에 대한 사랑의 열정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질투”와 “보복”의 의미를,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진노하시되, 자기를 거스르는 자에게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자기를 대적하는 자에게 진노를 품으시며”(1:2)라고 선언합니다. “자기를 거스르는 자”와 “자기를 대적하는 자”의 의미가, 하나님께서 단순히 인간처럼 사소한 개인적 감정에 대한 “질투”와 “보복”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을 변함없이 또 차별 없이 사랑하며 살아가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공의의 사랑에 대한 거부를 의미합니다. 이 때문에 이스라엘 족속이 다른 이방 사람들처럼 배타적이고 독선적으로 사람들을 차별하는 죄악을 저지를 때, 비록 택한 신앙의 백성이었지만 동일한 멸망의 길을 걷게 하셨다는 것을 두렵고 떨림으로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혹시 종교적 예배만 열심히 드릴뿐, 하나님께 “거스르는 자”와 “대적하는 자”로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니느웨”의 악행을 당장 심판하지 않고 그들 역시 회개하고 하나님의 뜻 가운데로 돌아올 것을, 길이 참으시는 하나님의 속성으로서 어떻게 계시합니까?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권능이 크시며, 벌 받을 자를 결코 내버려두지 아니하시느니라”(1:3). 하나님께서 “노하기를 더디하시”는 것이 무능하거나 유약해서가 아니라, 우리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공의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는 이들이 복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진노”하시면 그 “권능”이 얼마나 크신지, “여호와의 길은, 회오리바람과 광풍에 있고, 구름은 그의 발의 티끌이로다”(1:3)라고 선언합니다. “회오리바람”과 “광풍”은 가공할만한 파괴력과 “발의 티끌”에 불과한, 인간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큰 능력을 가지셨음을 나타내는 비유적 표현입니다. 2. 니느웨에 대한 심판이 어떻게 선언됩니까? “여호와는 질투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1:2)는 선언은, 잠시 앗수르 제국을 죄악에 물든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를 심판하는 도구로 사용하셨음을 나타냅니다. 또한 이를 오해하고 왜곡해서 다른 민족들 특히 하나님의 백성을 괴롭히는 존재가 되었을 때, 이들에 대해 “환난 날에 산성”(1:7)이 되어주셔서, 악을 행하는 앗수르 제국에 대해 “보복하시는 하나님”으로서 심판하실 것을 “니느웨에 대한 경고”로 선포합니다. 당시 세계의 대제국으로서 영원할 것 같은 막강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자랑하던 앗수르 제국과 그 수도인 “니느웨”의 번영이 어떻게 하루아침에 사라지게 될 것을 경고합니까? “그는 바다를 꾸짖어 그것을 말리시며 모든 강을 말리시나니, 바산과 갈멜이 쇠하며 레바논의 꽃이 시드는도다”(1:4). 하나님께서 “바다”와 “강”을 말리시겠다는 경고는, 과거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올 때 홍해 바다를 말리셔서 건넌 사건과 요단 강을 말리셔서 건넌 구원의 사건에 대한 회상으로 보입니다. 그러한 역사적 사건을 통해서, 무너질 것 같지 않은 대제국 앗수르가 하루아침에 어떻게 폐허가 될 수 있는지를 나타내는 하나님의 권능을 선포합니다. 이것이 “니느웨에 대한 경고”이기는 하지만, 실상은 고난 받는 남 유다 백성들에 대한 위로와 소망의 표현이라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바산과 갈멜”은 요단 동편과 서편에 있는 당시 이스라엘의 중요한 목초지였습니다. “레바논”은 백향목 산지와 아름다운 꽃으로 소문난 곳이었습니다. 이것은 아무리 풍요롭고 아름다운 곳이라도 하나님이 진노하시면 하루아침에 쓸모없는 땅이 될 수 있다는 선언이자, 남유다 왕국 역시 죄악에 물들어 돌이키지 않을 때 하나님의 심판에서 예외가 될 수 없음을 경고하는 선언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벌 받을 자”들에 대한 심판을 시작하시면, 주님의 그 “권능” 앞에서 견딜 자가 없을 것을 어떠한 비유로 선언합니까? “그로 말미암아 산들이 진동하며 작은 산들이 녹고, 그 앞에서는 땅 곧 세계와 그 가운데에 있는 모든 것들이 솟아오르는도다”(1:5).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지진과 화산 폭발로 인한 두려움과 공포와 함께 온 땅이 뒤틀리는 지각 변동으로 비유한 경고입니다. “산들”은 견고한 지반을 상징하며 이 땅의 견고한 것들과 강대국들에 대한 비유라면, “작은 산들”은 주변에 수반되는 것들로서 강대국이 무너지는 상황에서 작은 나라들이 요동치며 붕괴하는 현상은 불가피한 것 아닙니까? “세계와 그 가운데에 있는 모든 것들이 솟아오르는” 엄청난 지각 변동은, 하나님의 심판 앞에 세계의 모든 질서가 초토화되고 붕괴할 것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의 준엄하고 철저한 심판 앞에 그 어느 누구도 견뎌낼 자가 없을 것을, “누가 능히 그의 분노 앞에 서며, 누가 능히 그의 진노를 감당하랴? 그의 진노가 불처럼 쏟아지니, 그로 말미암아 바위들이 깨지는도다”(1:6)라고 선언합니다. “진노가 불처럼 쏟아지니”는, 과거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철저한 심판으로 그 땅이 흔적도 없이 소멸되어버린 상황(창19:24-28)을 연상하지 않습니까? 우리 하나님은 “노하기를 더디하시며”(1:3) 심판 중에도 긍휼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는 분(합3:2)이십니다. 단지 하나님의 “보복”과 “진노”가 주님의 최종적인 목표가 아니라, 자기 죄악을 깨닫고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이들을 구원코자 하는 것이 심판의 목적입니다. 따라서 “나훔” 선지자는 “니느웨에 대한 경고”와 함께 하나님의 본질적인 속성과 인격을 “여호와는 선하시며”(1:7)라고 계시합니다. 그렇기에 구원으로의 초청을 어떻게 선언합니까? “여호와는 선하시며, 환난 날에 산성이시라. 그는 자기에게 피하는 자들을 아시느니라”(1:7). “환난 날에 산성”은, 하나님의 심판에 직면한 때가 우리의 마지막이 아니라, 그 순간에라도 하나님을 우리의 피난처와 바위와 요새로 삼고 그분께로 “피하는 자들” 곧 전적으로 의뢰하는 이들이 되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시18편). “아시느니라”는, 단지 존재의 인식이 아니라 전인격적인 만남과 교제를 나누는 것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때 주님께서 보살펴주시는 위로와 도우심을 얻는 성숙한 신앙의 사람들로 구원하실 것을 나타냅니다. “여호와는 질투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1:2)는 선언은, 인간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차별 없이 행해질 것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니느웨에 대한 경고”는 고난과 고통을 받는 남 유다 왕국에 대한 희망과 구원의 선포이자, 그들 역시 자신들의 죄악으로부터 돌이키지 않을 때 동일한 심판에 임할 것을 경고하시며 자각과 각성의 회개를 요청하시는 구원의 선포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나훔”서가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의 경고가 없는 것이 아니라, 앗수르 제국의 심판 선언을 통한 회개의 요청이자 “나훔”서를 읽게 될 남 유다 백성들을 향한 심판의 경고와 회개의 요청이라는 것을 깨닫는 이들이 복이 있습니다. 성경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읽는 이들을 향한 몫이자 메시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자”와 “대적하는 자”에 대한 심판을 계속하여 어떻게 경고합니까? “그가 범람하는 물로 그곳을 진멸하시고, 자기 대적들을 흑암으로 쫓아내시리라”(1:8). “범람하는 물”은 홍수를 나타내며, 바벨론과 메대 연합군이 홍수처럼 쏟아져 들어와서 앗수르 제국의 수도인 “니느웨”를 초토화 시켜버릴 것을 나타냅니다. 자기 교만에 빠져 하나님을 대적하여 다른 민족과 사람들을 괴롭히는 이들을 “흑암으로 쫓아내시”는 곧 이 땅에서 흔적도 없게 만들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저들의 포악성으로 말미암아 그 자손들조차 이 땅에 남겨놓지 않겠다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나 여호와가 네게 대하여 명령하였나니, 네 이름이 다시는 전파되지 않을 것이라”(1:14)고 말씀합니다. 민족의 멸절에 대한 선언입니다. 따라서 힘이 있는 자들과 없는 자들 모두를 향하여, “너희는 여호와께 대하여 무엇을 꾀하느냐?”(1:9)고 묻습니다. “여호와께 악을 꾀하는 한 사람이 너희 중에서 나와서, 사악한 것을 권하는도다.”(1:11). “여호와께 악을 꾀하는 한 사람”은, 하나님을 대적하도록 미혹하고 선동하는 정치 종교 등 유명 지도자를 지칭합니다. 그 입과 행동에서 나오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을 대적하여 “사악한 것을 권하는” 자라고 말씀합니다. 사람들이 맹종하고 맹신하는 지도자입니다. 아무리 믿는다고 할지라도 그 거짓 지도자들의 선동과 미혹에 휩쓸릴 때, 하나님의 심판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을 경고하며 깨어있는 자가 될 것을 경고합니다. 3. 니느웨의 몰락을 누가 가장 기뻐합니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의 죄악을 경고하고 징계하시기 위해 주변 강대국들과 나라들을 통해 심판하셨습니다. 북 이스라엘이 자신들의 군사력과 경제력에 도취되어 이방인들보다 못한 악들을 자행할 때, 선지자들을 통한 계속적인 경고에도 돌이키지 않자 앗수르 제국을 통해 멸망시켜 버리셨습니다. 따라서 북 이스라엘 왕국의 멸망은, 같은 이스라엘 족속인 남 유다 왕국을 향한 경고의 사건이기도 했습니다. 동일한 죄악을 반복하는 남 유다의 지도자들과 백성들을 향해 하나님께서 수많은 선지자들을 통해서 그들의 악행을 경고하십니다. 당시 북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앗수르 제국은 남 유다 왕국의 최대의 위협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나훔” 선지자로 강대국인 앗수르 제국이 저지르고 있는 악행에 대한 심판의 경고를 통해서 남 유다 왕국의 회복을 어떻게 선언합니까?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그들이 비록 강하고 많을지라도 반드시 멸절을 당하리니, 그가 없어지리라. 내가 전에는 너를 괴롭혔으나, 다시는 너를 괴롭히지 아니할 것이라”(1:12). 이것은 하나님께서 앗수르 제국을 멸망시켜 고통을 당하는 남 유다 왕국을 단순히 회복시키겠다는 선언이 아니라, 그들 역시 왜 자신들이 민족적 국가적으로 고난과 고통을 당하고 있는지를 깨닫고 돌이키라는 당부가 담겨 있습니다. 자신들이 저지르는 사회적 민족적인 악행으로부터 돌이키는 신앙인들이 될 때, 그들을 괴롭히던 “이제 네게 지운 그의 멍에를 내가 깨뜨리고, 네 결박을 끊으리라”(1:13)고 하나님은 선언합니다. 당시 앗수르 제국이 몰락해서 망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나훔” 선지자는 “그가 온전히 멸하시리니, 재난이 다시 일어나지 아니하리라”(1:9)며, 더 이상 앗수르 제국으로 인하여 괴롭힘을 받는 일이 없을 것을 선언합니다. 강대국으로서 누리는 경제적 군사적 힘으로 말미암아 남의 것을 강탈하여 누리는 사치와 타락과 압제의 악행에 도취된 것을 가리켜서, “가시덤불 같이 엉크러졌고, 술을 마신 것 같이 취한 그들”(1:10)이라고 비유합니다. “가시덤불 같이 엉크러졌고”는, 죄악에 깊이 빠져 가시처럼 남을 얽어매어 괴롭히고 고통스럽게 하는 거짓과 저주를 일삼는 아무 쓸데없는 존재로서, 불에 태워 없애 버릴 수밖에 없는 존재를 가리킵니다. 성경에서는 흔히 사악한 자들을 비유하는 표현으로 많이 사용합니다(삼하23:6). “술을 마신 것 같이 취한 그들”은 전쟁의 승리와 부강한 경제력에 도취되어 교만하게 행동하는 것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아무에게도 유익을 주지 못하는 이들을 “마른 지푸라기 같이 모두 탈 것”(1:10)이라며,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으로 “멸절” 곧 완전한 몰락 밖에는 주어질 것이 없다고 선언합니다. 당시 전쟁은 신들의 전쟁이었기에, 패전국의 신전과 신상에 대한 철저한 파괴로 자신들의 승리를 확인하고 자축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앗수르 제국의 철저한 멸망을 “내가 네 신들의 집에서 새긴 우상과 부은 우상을 멸절하며, 네 무덤을 준비하리니, 이는 네가 쓸모 없게 되었음이라”(1:14)고 선언합니다. 앗수르 제국의 철저한 멸망을 누가 기뻐했겠습니까? 그 압제 밑에 있던 이들 아니겠습니까? 이러한 멸망의 소식을 한시라도 빨리 전하고자 하는 발걸음을 가리켜서, “볼지어다! 아름다운 소식을 알리고, 화평을 전하는 자의 발이 산 위에 있도다”(1:15)고 선언합니다. 앗수르 제국의 몰락을 자국민들은 고통스러워하고 슬퍼하겠지만, 압제를 받는 민족에게는 해방과 자유의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신앙인들의 몰락을 세상도 슬퍼하며 애통해하는 삶을 살 것입니까? 아니면 세상 사람들이 시원하게 여기고 통쾌해하는 삶을 살 것입니까? 오늘 하나님께서는 남 유다 백성들을 향하여, “유다야! 네 절기를 지키고, 네 서원을 갚을지어다”(1:15)라고 선언합니다. 막연히 앗수르 제국의 멸망을 기뻐하기만 할 것이 아니라, 그 몰락을 거울삼아서 남 유다 백성들로 잘못된 신앙과 삶의 자세를 회복할 것을 당부합니다. 앗수르 제국의 몰락과 멸망의 의미를 하나님께서 어떻게 밝힙니까? “악인이 진멸되었으니, 그가 다시는 네 가운데로 통행하지 아니하리로다”(1:15). 하나님의 심판으로 남 유다 백성을 억압하고 착취하던 자들이 사라지는 그날에, 단지 그들이 사라졌다는 환호성이 아니라 신앙인으로서의 남 유다 자신의 모습은 무엇인가를 돌아볼 것에 대한 당부이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왜 “나훔” 선지자는 앗수르 제국을 심판하여 남 유다를 구원하실 주님을 “여호와는 질투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1:2)고 계시했다고 생각합니까? 하나님께서는 자신들의 죄악에 사로잡힌 남 유다 왕국을 구원하시기 위해 앗수르 제국을 통해 징계하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저들을 괴롭히던 앗수르 제국의 멸망을 통해, 새로운 백성으로서 하나님 앞에 온전히 살아가기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저들은 이방 세계 사람들보다 못한 모습으로 같은 동족과 다른 사람들을 괴롭히는 존재로 살아갔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이처럼 자기 죄악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남 유다 왕국 역시, 주전 586년에 바벨론 제국을 통해 멸망시키게 됩니다. 요시야 왕 때 남 유다 왕국이 하나님께로 돌아가고자 하는 자각과 각성의 회개 운동이 있었다는 점에서, 이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은 그동안 남 유다 백성을 괴롭히던 앗수르 제국을 하나님의 심판으로 영원한 멸망에 처하게 하겠다는 “나훔” 선지자의 선언이었습니다. 이로써 하나님께서 그동안의 징벌을 거두실 것을, “내가 전에는 너를 괴롭혔으나, 다시는 너를 괴롭히지 아니할 것이라”(1:12)고 선언합니다. 그러면서 “볼지어다! 아름다운 소식을 알리고, 화평을 전하는 자의 발이 산 위에 있도다. 유다야! 네 절기를 지키고, 네 서원을 갚을지어다!”(1:15)라며, 남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를 통해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서의 온전한 예배와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 될 것을 축복합니다. “여호와는 질투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1:2)는 사실을 되새긴다면, 오늘 우리는 어떠한 신앙의 사람으로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다시금 깨닫고 세상에서 악행을 일삼는 신앙인들이 아니라, “아름다운 소식을 알리고, 화평을 전하는 자의 발”이 되어 안위와 위로를 나누는 복된 성도로서의 삶의 여정이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