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1:1의 “태초”와 요1:1의 “태초”는 같은가 다른가?
일반적으로 요1:1의 초두에 기록된 “태초”는 본 절의 “태초”와 동일하지 않다고 설명된다. 그 이유는 대체로 요1:1의 ‘태초’는 ‘말씀’, 즉 제2위 되신 성자 예수와 관계된 시점이고, 후자는 물질과 관계된 시점이므로 양자를 동일시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요한복음의 태초는 ‘영원 전의 태초’이며, 창세기의 태초는 ‘물질계의 태초’라고 한다. 그러나 이 해석은 요1:1의 내용과 전혀 조화롭지 못하다.
의미상의 모순성
만일 태초가 시간과 물질의 창조와 관련된 것이라면 태초 이전의 또 하나의 태초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즉 시간이 시작되는 첫 시점 이전에 또 다른 시간적인 시점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으며, 또한 두 개의 시작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이는 의미상으로만이 아니라 시간적으로도 모순을 일으킨다. 창조 이전의 시간적인 태초가 아무 의미를 갖지 못한다. 시간은 피조된 세계의 존재 형식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어자적 일치성
요한복음에서 태초 (엔 아르케)는 구약의 헬라어 번역 성경인 70인 경의 (레쉬트)와 동치어이다. 여기서 이 단어가 관사 없이 사용되는 것은 70인 경이 관사 없이 쓰였기 때문이다. 이것은 요한복음의 저자가 그 서두의 ‘태초’와 창세기에서의 ‘태초’가 동일한 것임을 밝히려는 의도임에 분명하다.
의미의 연결성
만일 요1:1의 태초를 ‘이전 태초’로 이해한다면, 1절은 ‘태초 이전, 즉 영원 전에 말씀이 계시니라’로 해석해야 한다. 물로 이와 같은 해석이 하나님의 제2위에 관하여 잘못된 것을 말해 주지는 않으나 저자가 본문에서 말하고자 하는 의미와는 거리가 멀다. 그럼 1절의 의미를 보다 확실히 알기 위해 먼저 “계시니라”를 살펴보자. 여기서 헬라어 (엔)은 be동사 (에이미)의 미완료 과거(과거 진행형)로서 직역하면 ‘계시고 있었다’가 된다. 그러므로 1절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고 있었다’라고 해석되며, ‘말씀’은 제2위이신 성자께서 (언제부터 계셨는지는 말하지 않지만) 적어도 천지가 창조되던 때, 즉 태초에는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으로 물질에 대한 말씀의 선재성을 의미한다.
그럼 그는 천지가 창조되던 태초에 무엇을 하셨나? 3절은 그 대답으로 그가 천지 창조에 참여하셨음을 계시한다. 이것이 요한 사도가 1절에서부터 3절까지 말하려는 내용이다. 다시 말하면 요한 사도가 창1:1의 창조의 시점인 태초를 요한복음 서두에서 직접 인용하고 있는 것은 성자께서는 창조 때에 이미 계셔서 만물 창조에 직접 참여하셨다는 것을 보다 분명히 설명하기 위한 것임을 유의해야 한다. 요한 사도는 1절의 첫 문장인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에서 예수님이 물질보다 선재하심을 말하면서 물질과 말씀 둘 중 말씀이 먼저라는 사실을 지적한다. 다음 문장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에서는 성자 되신 예수님을 물질 아닌 존재이신 하나님과 비교하여 시간적으로 같은 지위에 놓았다. 마지막 문장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는 말씀으로서 ‘그러므로 성자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동체’라는 단계적 논법을 펴고 있다. 그런데 요한복음의 초반부에 태초를 영원 전의 한 시점으로 미루어 놓는다면 저자가 창조의 시점으로 인용하는 태초는 사실상 의미 없는 단어가 된다. 이와 같이 이 단어가 과거 진행적 동작을 말해 주는 한 말씀이 태초에 ‘계시기 시작한 것’이 아니라 ‘이미 계시고’ 있었음이 분명할 뿐 아니라 이것으로 말씀의 기존성이 입증되므로 태초를 창조 이전으로 끌어 올려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없다.
유재원, 우주는 하나님의 창조의 미학, pp.21~23
첫댓글 (바로미님의 댓글) 1. 저는 다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창1:1의 태초는 문장에서 처럼 "천지를 창조하시는 시점"을 뜻하는 태초로 번역하는 것으로 알고 있으며, 요1:1 의 태초는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라는 것을 통해 주님이 모든 것의 근원임을 나타내는 태초로 알고 있습니다. --> 바로미님의 댓글 감사드리며, 윗 글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아무나 답변해 주셔도 좋습니다. 윗 글에 문제가 있는지 아니면, 신뢰해도 좋은 견해인지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면 되겠습니다.
위의 해석도 그리 큰 문제는 없어 보입니다. 결국 말할려는 의도가 저와 크게 다르지 않네요.. 요1:1의 태초(바로미: 주님이 모든 것의 근원임을 나타내는 태초) (유재원: 성자께서는 창조 때에 이미 계셔서 만물 창조에 직접 참여하셨다는 것을 보다 분명히 설명하기 위한 것임)
그러나... 저는 영원전의 태초라기 보다는 창조전의 상태를 말하는 것 즉 창조의 첫 시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는 그 시작이 창1:1의 태초라고 말하는 것이며.. 요1:1의 태초도 역시 그러한 해석으로 할 수 있으나 문장상 요1:1의 태초는 창1:1과 같은 태초로 번역될 시 문제가 피조세계의 창조시작시 같이 성자가 계셨다.. 즉 창조 이전에는 없었다라는 반증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요1:1의 태초는 창1:1의 태초보다 더 넓은 영역으로 해석되어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좀더 확장해서 생각해보면.. 요1장 초반절에서 성자가 창조 사역을 하신 것은 그가 창조주이시기 때문이지, 그가 창조를 위한 도구로서 창조된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창1:1의 태초의 범위는 피조세계의 창조의 시작점에 그 범위를 제한을 두는 것이며(문장상으로 보아도 피조창조를 위해 언급된 단어로 보입니다), 요1:1의 태초는 창조의 시작점을 포함.. 창조 이전의 상태까지 모두 포괄하고 있는 단어로 확장해야함을 1-3절을 통해 알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만약 같은 의미의 태초라면.. 혼동될 부분이 꽤 있을 것입니다. 즉 성부가 창조했나? 성자가 창조했냐? 그러면 1절과 2절과 같이 성부가 성자와 함께 창조하셨다. 라고 할 것인데.. 문제는 언제부터 성자가 성부와 함께 있었는가? 창조 이전부터인가? 창조시작부터 함께인가? 할때에 요 1:1-3은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저는 상기 글 중 요1:1절의 태초라는 개념을 영원전의 태초라고 정의 한 것이 잘못 된 것 같습니다. 이것은 영원전에 시간이라는 것이 있다는 암시를 줍니다. 그러나 영원이라는 것은 시간이라는 개념이 없는 것이죠. 이것은 또한 아들께서 물질세계가 있기 직전에 비로서 하나님이 되셨다는 이단적인 주장의 위험성도 있을 것 같네요..저는 사도요한이 아들이 바로 하나님이시며 시작도 끝도없는 영원하신 분임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나서 그분으로 인한여 모든 만물이 지으졌다는 나열식의 문장 구조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그리고 요한복음이 영원하신 하나님 아들을 강조하기 위해 마태나 누가와는 달리 족보도 없는 것을 고려해 보고요~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앎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니라 (요일2:13) --> 그럼 이 구절의 태초도 위처럼 해석한다면... 창조시점부터 계신 분으로 되는 우려가 있지 않을까요?
네, 두 분 말씀 감사합니다. 좋은 참고가 될 것 같습니다. 결론은 두 분 모두 창1:1의 태초와 요1:1의 태초는 다르다는 것이군요. 윗 글에 대해선 생각해 볼 점이 있는 것이구요. 유재원님은 자신의 창조론을 읽은 사람과 안 읽은 사람 모든 사람을 이렇게 둘로 구분한다는군요. 기존의 해석과 자신의 독특한 해석 사이에 차이점을 두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유재원님이 '(그리스도가)계셨다'고 말하지 않고 '계시고 있었다'라고 말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선재성'에 대해 확실히 못박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도 참고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단지, 일반적 견해와 자신의 견해 사이에 차이를 둔다는 점이 있는 것 같아서 혹시 문제될 소지가 있지 않을까 하여 글을 올려 보았습니다. 올바른 성경적 창조론의 정립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유재원님은 지금 따님이 소천하셔서 매우 힘든 상태라는데 제가 괜히 글을 올렸나도 싶습니다. 하지만, 진리에 대해 정확하게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았기 때문에 함께 이 문제를 생각해 보고 싶었습니다.)
<위의 해석도 그리 큰 문제는 없어 보입니다.>--> 라는 위의 저의 글을 전제로 저의 글을 읽어주심... 아마 위의 유재원님도 그리 크게 문제삼지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위의 구절들에 대한 태초에 대한 해석은 크게 두 분류 아닙니까? 같은 의미다. 아니다. .. 이렇게...
네, 그렇군요. 위의 해석도 그리 큰 문제가 없다고 바로미님이 분명하게 말씀해 주셨는데도 제가 유의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태초에 함께 하셨던 엘로힘의 하나님을 표현하고자 한것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원어성경에 무엇이라 말했는지 궁금합니다.
맛소라 사본: 베레쉬트 바라 엘로힘 에트 하샤마임 베에트 하아레츠(창1:1) 참고로, 유재원 님은 엘로힘은 '장엄복수'의 표현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엘로힘은 장엄 복수로 여겨지거나(성경에서는 하나님께 대해 이렇게 쓰인 일이 없다), ---- 생명과 능력의 충만함을 시사하는 집중 복수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 복수는 하나님을 생명과 권능이 충만한 존재로 지칭한다. 개혁주의 신론 헤르만 바빙크 저 이승구 역 P141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