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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14. 묵상글 ( 십자가의 성 요한 사제 학자 기념일. - 병 주고 약 주는 하느님.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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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14. 십자가의 성 요한 사제 학자 기념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병 주고 약 주는 하느님
대림 3주 수요일-2015
“이제 알아라. 나 외에는 신이 없다.
죽이는 것도 나요 살리는 것도 나며
찌르는 것도 나요 고쳐주는 것도 나다.”(신명 32,39)
“내가 주님이고 다른 이가 없다.
나는 빛을 만드는 이요 어둠을 창조하는 이다.
나는 행복을 주는 이요 불행을 일으키는 이다.”(이사 40.6-7)
우리는 하느님을 얘기할 때 구원자 하느님을 얘기하고
구원자 하느님을 얘기할 때 치유, 해방, 구원의 하느님만 얘기합니다.
그래서 병 주는 하느님은 얘기치 않고 약 주는 하느님만 얘기하는데
사실은 하느님이 <병 주고 약 주는>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은 빛이시고 빛을 창조하셨지만
창세기를 보면 빛이 있는 낮과 빛이 없는 어둠이 있게 만드셨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한 생명이시고 생명의 샘이 진정 하느님께 있지만
생명이 끝나는 죽음도 있게끔 우리의 생명을 만드셨습니다.
그러니까 어둠이니, 죽음이니, 불행이니 하는 것들은
빛이 있으면 그늘이 있듯이 창조의 그늘인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죽음이 없도록 우리 생명을 만들지 않고
죽음이 있도록 만드심으로 우리에게 병을 주신 것이고,
애초에 어둠이나 그늘이 없도록 빛을 만드셨으면 될 것을
어둠이나 그늘이 있도록 만드심으로 우리에게 병을 주셨으며
애초에 영원한 행복을 주셨으면 될 것을 이 세상에서는
끝이 있는 행복을 주심으로 불행이라는 병을 주신 것입니다.
이 세상과 피조물을 이렇게 창조하시고
우리 인간도 그렇게 창조하신 것이 병 주시는 하느님이라면
이 세상에 오시어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시고
영육의 모든 질병에서 우리를 구하시며 궁극적으로는
죽음으로부터 우리를 구하시는 예수님은 약 주시는 하느님입니다.
여기서 저는 질문을 합니다.
왜 병을 주고 약을 주셨을까?
병을 안 주셨으면 약을 안 줘도 될 텐데 왜 병을 주셨을까?
다시 말해서 구원이 필요 없게 완전한 창조를 하셨으면
구원이 필요 없을 텐데 왜 구원이 필요하게 창조를 하셨을까?
예수 그리스도로 이루실 구원을 왜 창조 때 진작 이루시지 않으셨을까?
구원자를 보내시고 약을 주신 것은 참으로 고맙지만
병을 주신 것은 못내 아쉽고 원망스럽기까지 합니다.
창조의 그늘이 아니라 창조의 실패가 아닐까요?
창조의 실패를 구원으로 보완 보상하는 것 아닐까요?
아무리 생각해도 현재의 아둔한 제 머리로는
이런 창조의 깊은 뜻을 헤아릴 수 없지만 그래도 좋게 이해하자면
하느님은 사랑이시니 이렇게 하신 것도 사랑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하신 사랑의 의도가 무엇일까요?
당신의 미완성을 예수 그리스도로 하여금 완성하라는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인간이 완성하라는 것일까요?
사실 천국이 아니라 유한한 이 세상에 창조하시는 한 그 창조에
생명도 끝이 있고 행복도 한계가 있는 것은 어쩔 수 없겠지요.
그러니 우리가 겸손하다면 이 찬류세상竄流世上을 원망하지 않고
교만하지만 않다면 여기서 시작된 창조를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완성케 하신 하느님 사랑에 감사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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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14. 십자가의 성 요한 사제 학자 기념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루카 7,19)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루카 7,19)
“오실 분”은 메시아를 가리킵니다(시 118,26;다니 7,13;9,25-27;말라 3,1;사도 19,4;히브 10,37;묵시 1,8;4,8). 그런데, 요한의 이 의구심은 어디에서 왔을까요? 아마도 그는 감옥에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전해 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혼란에 빠졌고, 예수님께서 과연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인지 확인하고자 하였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아마도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이 자신이 선포했던 ‘메시아 상’과는 달랐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실, 요한은 타작마당에서 곡식을 가려 쭉정이를 불태울 심판자인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나쁜 나무를 찍는 도끼의 심판이 아니라, 오히려 죄인과 함께 고통당하는 사랑을 말씀하셨고, 죄인을 심판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죄인을 구하기 위해 용서하셨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메시아 예수님께 대한 의혹과 혼란에 휩싸였을 것입니다. 그러니 그의 혼란과 의구심은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메시아 상’에서 비롯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의 이 다급한 물음, 곧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라는 물음에 예수님께서는 ‘그렇다. 내가 그다’라는 분명한 대답을 주지 않으시고, 예언된 말씀의 실행을 통해, 자신이 “오실 분”임을 증언하십니다. 곧 당신이 손수 하신 일을 <이사야서>를 인용하여 증언하십니다. 그리하여 당신이 하시는 일을 보고 사람들이 당신이 누구신지를 깨달아 알도록 인도하십니다.
“눈 먼 이들이 보고, 다리 저는 이들이 걷고, 나병한자들아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듣고,
죽은 이들이 일어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루카 7,22)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루카 7,23)
이는 의심을 품지 말라는 아주 냉혹한 경고의 말씀입니다. 또한 예수님을 자신의 기존 표상과 관념에 따라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내리는 질책과 경고의 말씀입니다. 자신 안에서 먼저 자기 관념을 깨부수라는 철퇴입니다. 동시에 예수님께 대한 믿음으로 혼란에 빠지지 않는 사람에게 들려주는 행복선언입니다. 곧 자신이 생각했던 메시아의 표상과 일치하지 않더라도,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이는 복되다는 진복선언입니다.
오늘 우리는 “의심을 품지 않는 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처럼, 말씀의 실행을 통해 자신의 신원을 증언하는 일일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루카 7,23)
주님!
먼저 죽고, 나중에 사는 당신의 생명의 길을 가게 하소서.
살기 위해서 애쓰다가, 나중에 모든 힘을 다 쏟고 나서 죽지 않게 하소서.
힘을 다 탕진하고, 나중에 하는 수 없어서 죽지 않게 하소서.
살려고 옥신각신 하다가, 나중에 애를 쓸 힘이 더 이상 없어서 죽지 않게 하소서.
살다가 죽는 것이 아니라, 먼저 죽으면서 살아가게 하소서.
먼저 떨어져 죽고, 나중에 열매 맺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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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14. 십자가의 성 요한 사제 학자 기념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본연의 모습으로 회복시켜 주시는 예수님
우산 장수인 큰아들과 짚신 장수인 작은아들을 둔 어머니는 늘 걱정 속에 살았습니다. 비가 올 때는 작은 아들을 걱정하고, 맑은 날에는 큰아들을 걱정하니 하루도 걱정이 그칠 날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맑은 날에는 작은아들이 짚신을 많이 팔 것이니 좋고, 비가 오는 날에는 큰아들이 우산을 많이 팔 것이라, 생각하니 늘 기뻤습니다. 생각을 바꾸면 세상이 달라져 보입니다.
여러분은 새소리를 들으면 ‘노래한다’고 하십니까? 아니면 ‘운다’고 하십니까? 같은 소리를 들어도 듣는 사람의 마음가짐에 따라 다르게 들리는 법입니다. 주님께서 많은 은혜를 베풀어 주셔도 어떤 이는 감사할 줄도 모르고 불평 불만합니다. 그런데 어떤 이는 아주 작은 것에도 감사하며 기뻐합니다. 마음이 열려있는 까닭입니다. 그는 항시 은총을 담을 그릇이 준비되어있으니 은총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잠에서 깨면서 ‘하느님 감사합니다’ 하면서 하루를 시작해 보시면 어떨지요?
사실 하느님께서 당신 모상을 닮은 사람을 만드시고 당신의 영을 불어넣어 주셨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우리 한 사람, 한사람이 하느님의 걸작품이라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얼마나 기뻐해야 합니까? 그 감사와 기쁨을 잊어간다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잃어버린 은총을 회복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만물을 근본으로 회복시키셨습니다. 질병과 비참함으로 괴로워하는 이들을 자유롭게 해주셨습니다. 악령을 물리치시고 사람들을 하느님과의 화해로 인도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으로 하여금 저마다 본연의 모습을 되찾도록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길을 가르치고 또 이끌어 주셨습니다. 마침내 구원하셨습니다.
이것은 이미 이사야 예언자가 선언한 그대로입니다. “그날에는 귀먹은 이들도 책에 적힌 말을 듣고 눈먼 이들의 눈도 어둠과 암흑을 벗어나 보게 되리라”(이사29,18). “그때에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 그때에 다리저는 이는 사슴처럼 뛰고 말못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터뜨리라”(이사35,5-6).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 하느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마음이 부서진 이들을 싸매어 주며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갇힌 이들에게 석방을 선포하게 하셨다”(이사61,1).
예언의 말씀이 예수님에게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마태11,6. 루카7,23). 스승을 의심하지 않는데 제자의 행복이 있습니다. “내 비록 스승에게 속아서 지옥에 떨어진다 해도 나는 그의 가르침대로 산 것을 후회하지 않을 것입니다” 할 수 있다면 그것이 진정한 믿음입니다.
내가 기대하고 그리는 모습이 꼭 일치하지 않더라도 주님의 말씀을 믿으십시오. 주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본연의 모습에로 인도하십니다. 당신의 걸작품이 훼손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근심걱정이 있다면 생각을 바꾸어 보십시오. 골치덩이를 통하여 더 큰 것을 예비하시니 미리 감사하고 기뻐해 보십시오. 주님께서 분명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도 못한 귀한 것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이나 처지에서도 흔들림 없기를 바랍니다.
‘자살’을 거꾸로 읽어보면 ‘살자’입니다. 아무리 힘들고 고통스러워도 하느님의 모습을 닮은 본연의 모습을 지키고 살아갈 수 있도록 주님께 나 자신을 의탁해야 하겠습니다.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을 보증해 주고 볼 수 없는 것들을 확증”(히브11,1)해 주기 때문입니다. 더 굳건한 믿음의 소유자가 되기를 성모님께 전구를 청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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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14. 십자가의 성 요한 사제 학자 기념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신학생 때입니다. 기숙사에서 생활하면서 청소는 알아서, 스스로 했습니다. 학년별로 맡아 청소하는 구역도 있었습니다. 낙산 오솔길, 테니스 장, 운동장, 학교 정문, 식당, 체육관, 빨래방, 교수관 등이 있었습니다. 대부분은 아침 식사 후 동료들과 함께 하였습니다. 가끔씩 생활지도 신부님들께서 청소상태 점검을 하였습니다. 학년별로 맡은 구역도 하지만, 개인 방을 점검하기도 하였습니다. 신부님들의 점검은 청소상태만 보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규정에 위배되는 물건은 없는지도 보았습니다. 신학생의 품위에 어긋나는 것들은 없는지도 보았습니다. 신부님들의 점검이 있을 때면 알아서 버릴 것들은 버리고, 감출 것들은 감추기도 하였습니다. 4학년을 마치고 군대에 갔을 때도 비슷한 경험을 했습니다. 군대에서도 내무반 별로 청소하는 구역이 있었습니다. 내무반은 물론 각자의 관물대도 청소해야 했습니다. 신학교보다 점검하는 방식이 엄격했지만 방식은 비슷했습니다. 군대의 규정에 어긋나는 것들은 알아서 감추거나 치웠습니다. 이런 점검이 부담이 되었지만, 이런 점검을 통해서 정리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동료 신부님 중에 한 분은 별명이 ‘보물선 선장’이었습니다. 신부님 방에는 물건이 많았습니다. 신부님이 쇼핑을 하기도 하고, 선물을 받기도 하고, 전부터 가지고 있던 것들도 있습니다. 바쁘기도 하지만, 정리하는 습관이 익숙하지 않아서 가끔씩 신부님의 방을 가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밭에 보물들이 묻혀있는 것 같았습니다. 한번은 동료 신부님들이 보물을 찾아도 되는지 물었습니다. 신부님은 기꺼이 신부님들의 방문을 환영하였습니다. 신부님들은 각자 필요한 물건을 찾아냈고, 보물선 선장 신부님은 대부분은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신부님은 방 정리를 하였고, 다른 신부님들은 각자가 원하는 보물을 찾았습니다. 저는 신부님처럼 보물선의 선장은 아니지만 가끔씩 서랍과 사무실의 수납장을 정리하곤 합니다. 유효기간이 지난 것들을 버리기도 하고, 필요가 없어진 서류들을 정리하기도 하였습니다. 가끔씩 보면 동네에서도 창고 정리하는 광고를 봅니다. 예전에는 필요했지만 지금은 필요 없는 물건들을 싼값에 이웃들에게 파는 행사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을 정리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우리들의 마음도 정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쓸데없는 걱정, 불안, 시기, 질투, 분노, 원망은 가끔씩 정리해서 버릴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것들이 마음에 들어오면 온유, 인내, 친절, 나눔, 희생과 같은 것들은 자리를 빼앗기기 마련입니다. 오늘 세례자 요한은 제자들을 보내면서 예수님께 이렇게 질문하였습니다.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마치 신학생들이 생활지도 신부님께 ‘저희가 청소를 잘 했는지요?’ 라고 묻는 것 같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광야에 주님의 길을 닦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회개의 세례를 주었습니다. 요한은 군중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이에게 나누어 주어라.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여라.” 세리들에게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정해진 것보다 더 요구하지 마라.” 군인들에게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아무도 강탈하거나 갈취하지 말고 너희 봉급으로 만족하여라.”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몸에서 태어난 이들 중에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이는 없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이라도 그보다 크다.”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 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 우리가 만들어야 할 세상을 이야기하십니다. 그렇게 사는 사람들은 복음을 사는 사람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면서 우리들 마음의 밭을 깨끗하게 정리하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오늘 이사야 예언자의 말을 마음에 새기면 좋겠습니다. “자애와 진실이 서로 만나고, 정의와 평화가 입을 맞추리라. 진실이 땅에서 돋아나고, 정의가 하늘에서 굽어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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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14. 십자가의 성 요한 사제 학자 기념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어느 책에서 다음과 같은 글을 읽었습니다.
“첫째는 부모의 자랑이고, 둘째는 부모의 사랑이다.”
첫째를 낳았을 때는 자신도 부모가 처음인지라 아이가 예쁘다는 것을 느낄 여력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둘째는 여유와 인내심을 가지고 대하다 보니 너무 예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둘째는 부모의 사랑이랍니다.
첫째는 부모의 자랑이 되어 많은 기대를 받게 됩니다. 그래서 첫째에게는 많은 교육의 기회가 주어지고, 물질적인 풍요도 동생과 비교하면 많이 받게 됩니다. 그래서 부모의 자랑이라는 기대감이 너무 부담된다는 첫째의 하소연을 많이 듣습니다. 또 동생에게 양보하고, 동생을 돌보기도 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둘째는 고충이 없을까요? 아닙니다. 둘째 역시 힘듭니다. 첫째가 쓰던 것을 물려받고, 교육의 혜택도 첫째만큼 못 누립니다.
첫째든, 둘째든, 막내든, 외동이든지... 자기 자리에서 힘들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요? 어떤 처지에서도 자신이 짊어질 무거운 짐 한 두가지는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를 힘들게 하는 짐만이 보입니다. 남이 가지고 있는 짐은 자기 짐보다 너무 가볍다고만 생각합니다.
이런 상태에서 주님께 감사의 기도를 바칠 수가 있을까요? 사랑의 하느님이라는 칭호에 대해 의심하면서, 믿음에 대해 불필요한 감정의 소비라고만 생각합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의 삶을 느끼지 못하게 됩니다.
세례자 요한이 자기 제자를 주님께 보내서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루카 7,19)라고 묻게 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이스라엘이 그토록 기다렸던 메시아이심을 일찍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성모님과 엘리사벳 성녀가 에인카렘에서 만나셨을 때, 즉 뱃속에서 이미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알아보고 기뻐하셨습니다. 그런 그가 의심한다는 것 자체를 받아들이기 쉽지 않습니다.
자기 제자들이 직접 예수님을 뵙고 알아볼 수 있도록 하신 것이 아닐까요?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우리의 나약함 때문입니다. 나약함과 부족함으로 늘 의심한다는 것입니다. 그 완벽해 보이는 세례자 요한까지도 말이지요.
자기 짐을 바라보면서 주님과 함께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 짐이 무겁다면서 불평불만 속에 있으면 당연히 주님으로부터 멀어지기 마련입니다. 하느님의 일을 내 곁에서 볼 수 없기에 행복할 수 없게 됩니다.
모든 의심을 품지 말고 주님과 함께하는 오늘이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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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마음을 얻으려면 충격적이고 독특한 것을 주려고 애쓰지 마라. 그냥 따뜻하고 좋은 것을 주면 된다. 좋은 것만이 영원히 남는다(팀 페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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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14. 십자가의 성 요한 사제 학자 기념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 하느님!"
-인간이 물음이라면 하느님은 답이다-
“주께서 집을 아니 지어 주시면, 그 짓는 자들 수고가 헛되리이다.
주께서 도성을 아니 지켜 주시면, 그 지키는 자들 파수가 헛되리로다.
이른 새벽 일어나 늦게 자리에 드는 것도,
수고의 빵을 먹는 것도 너희에게 헛되리니,
주님은 사랑하시는 자에게, 그 잘 때에 은혜를 베푸심이로다.”(시편127,1-2)
“파수꾼이 새벽을 기다리기보다,
내 영혼이 주님을 더 기다리나이다.”(시편130.6)
한밤중 일어났을 때 저절로 떠오른 시편들입니다. 그대로 제 영혼의 고백같은 시편성구입니다. 저에게 하느님은 평생화두이자 저의 전부입니다. “오, 하느님!”, 23년전 수녀원 피정지도때 강의 주제였고, 아주 오래전 청담성당 대림 특강때 강의 주제였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오늘 축일을 지내는 십자가의 성 요한 사제는 물론 모든 성인들에게 하느님은 그들의 전부였습니다. 성인 빼기 하느님하면 남는 것은 허무요 무지의 어둠일 것입니다. 교회의 밤하늘에 별들같은 존재가 성인들이요, 성인들은 물론 내가 오늘 지금 여기 살아있다는 자체가 생생한 하느님 체험입니다. 우리의 하느님 체험은 늘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서 임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오늘은 대신비가이자 대영성가인 십자가의 성 요한 사제학자 기념일입니다. 참으로 극심한 빈곤과 궁핍한 환경에서 태어나 성장한 성인의 삶은 참 파란만장했으며 고난과 시련으로 점철된 49년 짧은 생애였습니다.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와 함께 가르멜 수도원 개혁에 헌신하다 감옥생활등 죽음의 고비도 수없이 겪었고 1591년에는 병고와 정신적 고통을 겪다가 12월13일밤 선종합니다.
성인은 교회의 가장 위대한 신비가중 한분이며, 영성고전으로 일컬어지는 “카르멜의 산길”, “영혼의 노래”, “사랑의 산 불꽃”이 유명합니다. 요한은 1675년 교황 베네딕도 13세에 위해 시성되었고, 1926년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교회학자로, 1993년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에스파냐 언어권의 모든 시인詩人들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됩니다. 살아서보다도 죽어서 영원히 살아있는 성인들입니다. 교회가 잊지 않고 적절한 하느님의 때에 맞춰 시성하고 교회학자로 선포하여 신자들이 보고 배우게 하는 자상한 배려가 참 고맙고 놀랍습니다.
성인을 기념하고 기억할 뿐 아니라 우리 또한 분투의 노력을 다해 성인답게 살라고 촉구하는 성인 기념일입니다. 우리 모두 주님을 닮은 참 나의 성인이 되라고 불림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얼마전 읽은 교수들이 뽑은 올해의 사자성어와 한편의 시가 생각납니다.
사자성어는 1.과이불개(50,9%);잘못을 하고도 고치지 않는다, 2.욕개마장;덮으려고 하면 더욱 드러난다(14,7%), 3.누란지위(13,8%);여러 알을 쌓아 놓은 듯한 위태로움, 문과수비(13,3%);과오를 그럴듯하게 꾸며대고 잘못된 행위에 순응, 군맹무상(7.4%);눈먼 사람들이 코끼리를 더듬으며 말함의 순서였습니다. 참으로 하느님 없는 무지의 인간들임을 깨닫게 됩니다. 한마디로 지혜의 결핍입니다. 오랜만에 읽은 “녹(綠)의 미학(김상미1957-)”이란 시도 생각납니다.
-“녹은 쓸쓸함의 색깔
염분 섞인 바람처럼 모든 것을 갉아먹는다
세상을 또박또박 걷던 내 발자국 소리가
어느날 삐거덕 기우뚱해진 것도
녹 때문이다
내 몸과 마음에 슨 쓸쓸함이
자꾸만 커지는 그 쓸쓸함이
나를 조금씩 갉아먹었기 때문이다
아주 오래된 건물에 스며드는 비처럼
아무리 굳센 내면으로도 감출수 없는
나이처럼
녹은 쓸쓸함의 색깔
흐르는 시간의 사랑 제때 받지 못해
창백하게 굳어버란 공기”-
세월흘러 나이들어가면서 누구나 겪는 실존적 체험이 영육의 녹슴, 사랑의 결핍, 쓸쓸함, 외로움일 것입니다. “쓸쓸해서 사람이다”, “외로워서 사람이다” 라는 정의도 어울립니다. 그러나 하루하루 깨어 하느님을 믿고 희망하고 사랑하고 만나 체험하며 사는 우리 수도승들에게는 녹틀 틈이 없이 늘 반짝이는 영혼입니다. 사실 저는 쓸쓸함이나 외로움을 느낀 적이 거의 없습니다.
여기 불암산 기슭에서 34년 동안 정주하면서 원망, 절망, 실망한 적도 거의 없습니다. 다만 답답하고 막막할 때는 하느님의 뵙듯 하루에도 수없이 바라다본 불암산과 그 배경의 하늘입니다. 아마 저만큼 불암산과 하늘, 하늘의 별들을 많이 본 분들도 없을 것입니다.
이제 주님을 향한 그리움도 없습니다. 주님과 늘 함께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찌보면 쓸쓸함, 외로움, 그리움은 생명의 하느님을 찾으라는 초대같습니다. 장익주교님의 김수환추기경님에 대한 언급도 생각납니다.
“저는 추기경님이 고독해 하시는 것을 뵌적이 있지만 외로워하거나 쓸쓸해하는 모습은 한번도 뵌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인간이 물음이라면 하느님은 답입니다. 이사야에게 하느님은 너무나 자명한 존재였고 그 고백에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바로 이런 하느님을 체험할 때 참으로 살아있다 할 수 있습니다. 배는 밥으로 채울 수 있지만 허기 가득한 끝없는 빈 가슴은 살아 계신 하느님만이 채울수 있습니다. 텅빈 허무를 텅빈 충만이 되게 하는 분은 하느님뿐입니다.
“내가 주님이고 다른 이가 없다, 나는 빛을 만드는 이요 어둠을 창조하는 이다. 나는 행복을 주는 이요, 불행을 일으키는 이다. 나 주님이 이 모든 것을 이룬다.
하늘아, 위에서 이슬을 내려라. 구름아, 의로움을 뿌려라. 땅은 열려, 구원이 피어나게, 의로움도 함께 싹트게 하여라. 나 주님이 이것을 창조하셨다.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하늘을 창조하신 분, 그분께서는 하느님이시다. 땅을 빚으시고 땅을 만드신 분, 그분께서 굳게 세우셨다. 그분께서는 혼돈으로 창조하지 않으시고, 살아 있는 곳으로 빚어 만드셨다. 내가 주님이다. 다른 이가 없다.
나 주님이 아니냐? 나밖에는 다른 신이 아무도 없다. 의롭고 구원을 베푸는 하느님, 나 말고는 아무도 없다. 땅끝들아, 모두, 나에게 돌아와 구원을 받아라. 나는 하느님, 다른 이가 없다.”(이사45,6ㄴ-8.18.21-22)
얼마나 고무적인 하느님 고백인지요! 너무 단순명료합니다. 이런 하느님을 온힘을 다해 믿고 사랑하고 희망하며 체험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래서 끊임없는 기도, 끊임없는 깨어 있는 삶, 끊임없는 하느님 공부, 성경 말씀 공부, 끊임없는 회개의 삶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고백하는 하느님은 오늘 복음의 예수님을 통해 온전히 체험됩니다. 예수님은 요한의 제자들이 당신이 우리가 오시길 기다리는 메시아 그분인가 물었을 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때 예수님은 질병과 병고와 악령에 시달리는 많은 사람을 고쳐주시고, 또 많은 눈먼 이를 볼 수 있게 해 주던 때입니다.
예나 이제나 여전히 죄도 병도 많은 시절입니다. 아니 날로 늘어나는 온갖 병들입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육신은 물론 영혼과 정신, 마음의 질병과 병고로, 또 갖가지 무지와 탐욕, 분노, 질투, 광신에 눈멀어 악순환의 반복을 살아가는 지요! 참으로 진정한 회개를 통해 주님을 만나는 일이 얼마나 절실한지 깨닫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실현되는 이사야 예언입니다. 예수님이 아니곤 누가 이런 하느님의 일을 할 수 있겠는지요!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
예수님을 통해 만나는 생명과 사랑의 하느님입니다. 예수님을 만남으로 온전한 전인적 총체적 치유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니 하느님대신 예수님을 넣어도 그대로 통합니다. 인간이 물음이라면 예수님은 답입니다. 인간이 병病이라면 예수님은 치유 약藥입니다. 인간이 병자病者라면 예수님은 명의名醫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예수님과 하나됨으로 영육이 온전히 치유되어 참나의 온전한 삶을 살게 된 우리들입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의 영적 권고중 하나입니다.
“그대에게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만으로
충분하기에,
다른 아무것도 필요치 않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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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14. 십자가의 성 요한 사제 학자 기념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믿음>
루카 7,18ㄴ-23 (세례자 요한의 질문에 답변하시다)
그때에 요한은 자기 제자들 가운데에서 두 사람을 불러 주님께 보내며,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하고 여쭙게 하였다. 그 사람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말하였다. “세례자 요한이 저희를 보내어,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하고 여쭈어 보라고 하셨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질병과 병고와 악령에 시달리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시고, 또 많은 눈먼 이를 볼 수 있게 해 주셨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들은 것을 전하여라.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 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
<믿음>
벗을 돌보러
보라 하시니
보는 것입니다
벗을 일으키러
제대로 걸으라 하시니
제대로 걷는 것입니다
벗을 품으러
깨끗해지라 하시니
깨끗해지는 것입니다
벗을 살리러
되살아나라 하시니
되살아나는 것입니다
벗을 깨우러
복음을 들으라 하시니
복음을 듣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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