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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수탈과 강제동원 현장을 찾아보는 세 번째 답사.
오늘(12.19) 박철희 유족회장님의 안내로 17명이 참여한 가운데 해남 옥매광산 현장을 찾아보고 왔습니다.
광복 77년이 지났지만, 이곳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았습니다. 산 정상에 오르기 전 먼저 당시 다이너마이트를 보관하던 장소를 찾았습니다. 입구에는 경계석 기둥이 2곳 서 있었고, 각별한 안전이 필요한 곳이었던 것 만큼 들어가는 통로까지 각이 져서 몇 번 돌아서 들어 가도록 돼 있더군요. 보관시설 2곳이 아직까지 남아 있었습니다.
해발 173m의 산이지만 돌산인데다 정상 부위까지는 한동안 급경사여서 다들 숨이찼습니다. 올라가는 도중에 곳곳에 돌탑을 마주할 수 있었는데, 이 돌탑에는 슬픈 사연이 있습니다.
일제가 패전 위기에 몰리자, 일제는 본토 방어를 위해 제주도를 최후 저지선으로 삼기 위해 요새화했다고 합니다. 이곳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이 1945년 3월 제주도 진지 공사 구축에 동원돼 모슬포 인근으로 강제로 끌려갔는데, 광복 후 해남으로 돌아오는 도중 완도 청산도 인근쯤 올때 선상 화재로 118명이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인근 마을 곳곳에 한날 제사가 많아 그 즈음이면 주변 고기집 고기가 떨어질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날의 억울한 아픔을 잊지 않기 위해 유족회가 중심이 되어 118개의 돌탑을 쌓을 계획이었는데, 이 산 곳곳에 설치된 돌탑은 현재 106개라고 합니다. 시신조차 찾을 수 없던 유족들이 산 곳곳에 시신이 없는 묘를 조성하기도 했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흔적이 없어지거나 일부는 아직 벌초하고 관리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정상에 올라가는 도중 당시 대장간으로 쓰였던 터도 흔적이 남아 있었습니다. 정상에 마주하는 순간 모두 할 말을 잃었습니다. 마치 동물의 내장을 긁어낸 것과 같은 모습이라고 해야할까, 일제가 우리 민중들을 고혈을 짜내 만든 한국판 ‘그랜드캐니언’이라며 혀를 내둘렀습니다.
일제는 군수품 제조에 필요한 알루미늄의 원료인 명반석을 채굴하기 위해 이 산을 깎았는데, 명반석은 워낙 단단해 망치로 깨도 망치가 튀어 나갈 정도로 단단하다고 합니다. 변변한 장비도 없던 시절 원래 산의 형태가 없어져 버릴 정도로 협곡을 만들 정도였다니 당시 이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그저 끔찍할 뿐이었습니다.
옥동 선착장에는 당시 산 정상에서 캐낸 원석을 항구를 이용해 일본으로 반출하기 위해 만든 대형 콘크리트 건물이 남아 있었습니다. 일종의 원석 집하장. 일제는 선착장까지 운송을 위해 철도 레일을 깔아 운반했는데, 그 흔적도 일부 남아 있었습니다.
박철희 유족회장님은 불편한 몸에도 불구하고 옥매광산 노동자 수몰 사건이 잊혀지지 않도록 사비를 털어가며 오랫동안 애쓰고 계십니다. 유족들도 그동안 세월에 뿔뿔이 흩어지고 여러 걱정이 많다고 합니다. 그나마 한 사람의 집념과 노력으로 늦게나마 그 실상이 알려지고 있습니다.
늦은 점심을 마치고, 김남철 선생님의 해박한 역사 지식과 친절한 안내로 이순신 장군과 명랑해전의 유적인 진도 벽파정과 벽파진 대첩비를 찾아보는 것으로 일정을 마쳤습니다. 귀한 시간 함께 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