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祝
癸 卯
송구(送舊) 영신(迎新) 예배(禮拜)
☞1월 새 출발로 아름다운 가족의 달☜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행16:31)
몬1:1-25절) 아름다운 가족
빅톨 위고가 쓴<레미제라볼>이라는 소설을 보면, 빵을 훔쳤기 때문에 감옥에서 19년을 보낸 장발장이 석방이 되어 거리로 나오게 됩니다. 그러나 사회에서는 19년 동안이나 감옥(監獄)에 있었던 죄수를 받아주는 곳은 아무 곳도 없었습니다.
돈이 있어도 재워주는 여관도 없었고, 빵을 파는 가계도 없었습니다. 그 결과 장발장은 쫄쫄 굶게 되었습니다. 도대체 어디에 가야 먹을 것을 구하고, 잠을 잘 수 있을까? 전전긍긍하고 있는데, 누군가가 어떤 사제관(司祭館)을 가르쳐주면서 거기에 가면, 신부님이 그를 재워줄 것 이라고 알려주었습니다.
장발장이 거기에 가니까 신부님은 그를 따뜻하게 맞이 해주고, 먹을 것을 주고, 재워 주었습니다. 그러나 장발장은 또 도둑의 근성이 발동되어 밤에 자다가 그 사제관에 있는 은접시와 은수저를 훔쳐서 달아났습니다.
장발장은 도망을 치다가 경찰에게 다시 붙들려 왔는데, 그는 경찰에게 이 은 그릇은 신부님이 준 것이라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신부님은 경찰에게, 자기가 은 접시와 수저를 주었다면서 은 촛대까지 주었는데, 이 사람이 가지고 가지 않았다면서 억지로 은 촛대 까지 덤으로 주어서 보내었습니다.
여기서 장발장이 감화를 받고, 변하여 새 사람이 되게 됩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과 좋지 않은 관계에서 헤어지게 되면, 그 후는 다시 그 사람을 만나고 싶지도 않고, 그 사람에 대해서 생각하기도 싫을 때가 많습니다.
특히 우리는 주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도 대개 미숙한 상태에서 주님의 일을 하기 때문에 자칫 잘못하면, 서로가 엄청난 상처를 주고받고, 헤어질 수가 있습니다.
그러다가 세월이 많이 흐른 후, 어쩔 수 없이 다시 만나게 되면, 어떻게 될까? 아마 처음에는 그 싫은 사람을 만난다는 사실 자체가 너무나도 싫고, 할 수만 있으면, 얼굴을 마주치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막상 만나보면, 그동안 하나님께서 너무나 내게 많은 은혜를 주셨고, 너무나 나를 많이 성숙하게 하셔서 오히려 그런 만남을 통해 내가 얼마나 많이 변했는가?를 깨닫게 될 때가 많습니다.
오늘 빌레몬서는 감옥에 갇힌 사도 바울이 사랑하는 동역자(同域者) 빌레몬에게 빌레몬의 집에서 도망친, 노예 오네시모를 용서해 주라는 사랑의 편지입니다.
사도 바울이 감옥에서 이 편지를 보내었기 때문에“옥중서신”으로 분류되기도 합니다. 빌레몬은 골로새에 사는 분인데, 아마 돈이 많은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집도 크고, 노예들도 많이 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빌레몬의 노예 중에서 오네시모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어느 날 이 오네시모가 집주인인 빌레몬의 돈을 훔쳐서 도망쳐 버렸습니다. 그런데, 이 오네시모가 다시 붙들렸습니다. 그는 사도 바울이 갇힌 감옥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이제는 도망을 가지도 못하고, 꼼짝없이 사도 바울의 가르침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오네시모는 사도 바울의 가르침을 통해, 완전히 변하여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사도 바울은 오네시모가 빌레몬의 노예였다는 사실을 알고는 오네시모를 다시 빌레몬에게 보내어 용서를 받고, 다시 오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그냥 보내지 않고, 이 사람의 편지를 적어서 함께 보낸 것입니다.
Ⅰ.사랑하는 동역자 빌레몬
기독교는 무조건 부자라고 해서 적대시(敵對視)하거나, 배척(排斥)하지 않습니다. 빌레몬은 재산(財産)이 많은 부자였지만, 온 집 식구들이 복음(福音)에 헌신(獻身)된, 아주 믿음이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1:1-3절)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바울과 및 형제 디모데는 우리의 사랑을 받은 자요 동역자인 빌레몬과 자매 압비아와 우리와 함께 병사된 아킵보와 네 집에 있는 교회에 편지하노니”
여기에 보면, *네 집에 있는 교회*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빌레몬의 집을 교회로 사용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교인들 중에는 빌레몬의 노예들도 있었을 것이고, 가족들과 가까운 곳에 있는 이웃 성도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여기 *자매 압비아*는 빌레몬의 부인(婦人)을 말합니다. 그리고 *우리와 함께 병사 된 아킴보*는 빌레몬의 아들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빌레몬은 자신의 집과 노예들과 부인과 아들까지 모두가 주님을 위해 열심히 봉사하는 아주 믿음이 좋은 집이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빌레몬을 두고 *사랑을 받는 자요 동역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입으로 선교를 하고, 입으로 구제(救濟)하고, 입으로 예배당을 짓는 것은 쉽습니다. 그러나 정작 자기 주머니를 열어서 선교를 하고, 구제(救濟)를 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죤 위슬리 목사는 *자기 주머니가 항상 열려 있어야 진정 회개한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 사회는 자기는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부자(富者)를 욕하고, 입으로만 모든 선한 일을 하는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자(富者)이면서도 돈을 제대로 쓸 줄 아는 부자(富者)는 정말로 귀한 사람인 것입니다. 반대로 부자(富者)이면서 돈을 쓸 줄 모르는 사람(000)은 악한 병에 걸린사람입니다.(전6:2)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는 너무나 불쾌한 이름이었습니다. 즉 노예가 주인을 속이고, 도망을 친 것도 기분이 나쁜데, 돈까지 훔쳐서 달아난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빌레몬은 오네시모를 붙잡기 위해 경찰서 같은데, 신고를 해 놓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오네시모가 다른 데로 도망친 것이 아니라, 사도 바울이 있는 곳(감옥)에 와 있는 것입니다. 이때, 자칫 잘못하면, 빌레몬이 오네시모가 자기에게 잘못한 것만 생각하고,오네시모를 잡으러 갈 가능성이 많습니다.
법적으로 오네시모는 분명히 도망친 노예이고, 이 노예에 대한 모든 권리는 오직 빌레몬에게 있습니다. 여기에는 사도 바울도 관여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만약 빌레몬이 사도 바울이 갇혀 있는 감옥에 가서 오네시모를 찾아가겠다고 말하면, 아무도 그것에 대하여 아무 말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사도 바울은 오네시모를 배신하는 것이 됩니다. 즉 도망친 노예를 주인에게 고자질(告者質)해서 다시 붙들리게 하고, 체벌(體罰)을 받게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때, 빌레몬에게 감사한 것은 그래도 오네시모가 사도 바울에게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가혹한 것인데, 오네시모가 그곳에 붙들려서 바울을 돕고 있다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자기라도 가서 사도 바울을 섬겨드려야 하는데, 도망친 자기 노예가 거기에 가서 자기를 대신하여 이 위대한 하나님의 종을 돕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은 조금만 깊이 생각하면, 너무나 생각이 달라 질 수도 있습니다.
즉 내 돈을 훔쳐서 도망친 것만 생각하면, 당장 가서 잡아와야 하겠지만, 반대로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로 도망을 친 노예가 자기를 대신해서 사도 바울을 섬기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오히려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허물을 생각할 때, 할 수 있으면, 마음을 바다같이 넓혀서 옹졸한 마음을 먹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먼저 빌레몬의 귀한 믿음의 봉사를 인정하고 이렇게 감사를 합니다.
1:4-6절)내가 항상 내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에 너를 말함은 주 예수와 및 모든 성도에 대한 네 사랑과 믿음이 있음을 들음이니. 이로써 네 믿음의 교제가 우리 가운데 있는 선을 알게 하고 그리스도께 이르도록 역사하느니라.”
사도 바울은 아무리 빌레몬이 주 안에서 동역자(同域者)요, 어떤 의미에서 신앙적으로 자신의 제자지만 함부로 오네시모의 일을 꺼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빌레몬이나 오네시모에게 아주 아픈 부분이었고, 또 예민한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레몬을 위해서 항상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이것 하나만 해도 빌레몬에게는 얼마나 엄청난 재산인지 모릅니다. 즉 하나님의 종 사도 바울이 기도할 때마다 빌레몬을 위해 기도한다는 것은 백만 대군이 그를 지키고 있는 것과 같은 힘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빌레몬의 수고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감사하고 있습니다. 특히 이것은 단순히 사도 바울의 귀에만 미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도 모두 상달했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보면 빌레몬이 부자이기도 하지만, 상당히 신앙이 순수(純粹)하고, 열정(熱情)적이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과 또 노예 문제는 다른 문제로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이 당시 노예는 완전히 주인의 개인 재산이었고, 다른 사람이 뭐라고 말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되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같은 교회 안에서 신앙생활 한다 하더라도 웬만해서는 개인의 사생활(私生活)에 대해서는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즉 어떤 교인을 꼭 취직을 시켜 달라고 한다든지, 어떤 사람의 중요한 실수를 눈 감아 달라고 하기가 참 어려운 것입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사도 바울이 모르는 체하고, 계속 오네시모를 데리고 있는 것인데, 결국 이것은 사도 바울이 빌레몬을 속이는 것이 되었습니다. 우리 믿는 자들이 이렇게 애매할 때는 정직(正直)한 것이 가장 좋습니다. 즉 사실 그대로 다 이야기를 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하는 것입니다.
Ⅱ.오네시모의 변화
사도 바울은 아주 조심스럽게 빌레몬의 마음이 상하지 않도록 조심해서 오네시모의 이야기를 이렇게 꺼내고 있습니다.
1:9-10절)도리어 사랑으로써 간구하노라 나이가 많은 나 바울은 지금 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갇힌 자 되어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네게 간구하노라”
사도 바울은 곧바로‘오네시모를 용서해 줘!’라고 하지 않고, 엄청나게 뜸 들이고 있습니다. 이것은 오네시모의 죄가 결코 간단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오네시모의 이야기를 자칫 잘못하면, 지금까지 좋았던 바울과 빌레몬과의 관계가 금이 가게 할 수도 있는 문제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할 수 있는 대로 빌레몬에게 오네시모의 사정을 자세하게 알려주어 이해를 구합니다. 우선 빌레몬은 왜 바울이 이제서야 자기에게 이런 편지를 보내는지? 불쾌할 수도 있습니다.즉 오네시모가 바울의 감옥에 갇혔다면, 상당한 기간이 결렸을 텐데, 왜 지금까지 가만히 있다가 이제 와서 이 사실을 알리느냐? 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사정을 잘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즉 자기가 감옥에 갇혀 있었기 때문에 이런 문제에 다 신경을 쓸 수가 없었고, 또 오네시모도 변화되고 있는 중이기 때문에 시간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복음(福音)이 가지는 능력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오네시모는 참으로 변하기 어려운 사람이었습니다. 즉 자기 집이 교회였고, 주인이 그렇게 복음(福音)에 열성이 있었는데도 오네시모의 마음속에는 전혀 신앙이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바울이 있는 감옥에 와서야 신앙이 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사람이라도 완전히 변하지 않는다고 싶게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누구든지 생명의 말씀의 씨가 들어가면, 시간이 지나, 온도와 습도가 맞으면, 싹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가라지의 비유에서 *가라지를 뽑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가라지처럼 보이는 알곡도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사람이든지, 변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대해야 합니다.
오네시모는 사도 바울이 감옥에서 낳은 믿음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렇게 뺀질뺀질하고, 변하지 않더니, 이상하게 믿음이 한번 들어가고 나니까 사람이 아주 진실해지면서 너무나 착한 사람이 되어 버렸습니다. 바로 이것이 생명의 말씀이 가지는 위력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은 능력이 있어서 늑대가 양(羊)이 되게 합니다. 오네시모는 맹수였다가 한 마리의 양(羊)으로 변한 것입니다.
1:11절)그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가 유익하므로”
원래 *오네시모*라는 이름이 *유익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오네시모가 변화되기 전에는 전혀 이름값을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정말 오네시모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 오네시모를 빌레몬에게로 돌려보냅니다.
1:12절)네게 그를 돌려보내노니 그는 내 심복이라”
오네시모가 가장 하기 싫은 것이 있다면, 옛 주인(主人)에게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고 오네시모는 사도 바울의 심복(心腹)이기 때문에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자기가 아무리 친한 빌레몬이라 하더라도 그의 노예를 붙들고 있는 것은 옳지 않다고 판단을 했습니다.
사도 바울에게 오네시모가 필요하지만, 오네시모를 설득해서 보냈습니다. 그 이유는 사도 바울이 무엇을 하나 하더라도 올바르게 하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축복된 것은 아무 쓸모없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듣고, 쓸모 있는 자로 변하는 것입니다. 즉 어떤 사람은 교회에서 전혀 쓸모가 없고, 사고만 일으키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도 은혜 받고 변하면, 아주 유익한 사람이 됩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갈등을 솔직하게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1:13-14절)그를 내게 머물러 있게 하여 네 대신 나를 섬기게 하고자 하나 다만 네 승낙이 없이는 내가 아무 것도 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의 선한 일이 억지 같이 되지 아니하고 자의로 되게 하려 함이라”
지금 오네시모는 완전히 변하여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감옥에 있는 바울을 너무나 잘 돕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빌레몬을 속이는 것이 되고, 나중에 빌레몬이 승인한다 하더라도, 이것은 억지 순종 밖에 되지 않는 것입니다.
빌레몬은 이렇게 존경하는 사도가 자기에게 도망친 노예 이야기를 알면서도 말하지 않았다면, 아마 불신으로 남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쉽게 빌레몬에게 편지를 보내서 *내가 오네시모를 데리고 있으니 이해를 바란다*고 할 수도 있었는데, 그렇게 하지 않고, 일부러 오네시모를 빌레몬의 집에 가서 용서를 받게 했고, 다시 로마로 오게 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왜 이렇게 복잡하고, 귀찮은 일을 할까? 이만큼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은 쉽게 풀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이 쉽게 해결하려고 했다면, 언제나 빌레몬의 마음속에 오네시모에 대한 나쁜 감정이 남아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완전한 용서가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나중에 사도 바울이 죽은 후, 사도 바울의 서신(書信)을 모두 다 모아 편집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의 이름이 오네시모입니다.
Ⅲ.사랑의 변제
사도 바울은 빌레몬이 돈이 많은 부자이니까 무조건 오네시모를 용서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오네시모가 빌레몬에게 끼친 경제적인 손해를 자기가 책임지겠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1:18-19절)그가 만일 네게 불의를 하였거나 네게 빚진 것이 있으면 그것을 내 앞으로 계산하라 나 바울이 친필로 쓰노니 내가 갚으려니와 네가 이 외에 네 자신이 내게 빚진 것은 내가 말하지 아니하노라”
사도 바울은 빌레몬이 홈쳐간 돈이나, 다른 손해를 자기가 다 책임을 지겠다고 약속합니다. 그리고 여기에 자기의 친필로 씁니다. 옛날에는 친필로 쓰면, 영수증과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다른 사람에게 억지로 선행하라고 강요하지 않습니다. 그는 자기가 오네시모를 믿음으로 낳았기 때문에 오네시모의 빚은 자기가 책임을 지겠다고 약속을 했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바울이 빌레몬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세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미운 감정으로 오네시모를 대하지 말아달라는 것입니다. 오네시모가 빌레몬에게 손해를 끼치고, 달아났을 때는 아직 그는 거듭나기 전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변하여 새 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다른 크리스천도 인정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오네시모에게 탈주노예의 형벌을 가하지 말아달라는 것입니다. 오네시모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이것이었습니다. 옛날 주인들은 도망친 노예는 절대로 용서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돈은 바울이 책임을 지겠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그를 아예 해방시켜서 자기에게로 보내어 달라는 것입니다.
1:16절)이후로는 종과 같이 대하지 아니하고 종 이상으로 곧 사랑 받는 형제로 둘 자라 내게 특별히 그러하거든 하물며 육신과 주 안에서 상관된 네게랴”
사도 바울은 오네시모가 변하여 새 사람 된 후에 이 사람 안에 아주 훌륭한 자질(資質)이 있는 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가능하면, 이 사람의 좋은 자질(資質)을 살리고 싶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사람들을 화해하는 과정을 볼 수 있습니다. 역시 우리를 화해하게 하는 가장 큰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요, 은혜(恩惠)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입고. 손해를 입었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수백 배의 복을 부어주셔서 우리를 훨씬 더 성숙하게 하시고, 더 높아지게 하셔서 옛날의 손해에 구애를 당하지 않게 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쉽게 없어지지 않는 것이 옛날의 감정입니다. 즉 우리는 너무나도 쉽게 과거의 비참했던 시절로 되돌아가 버립니다. 이것을 막기 위해서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의 말씀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마음만 조금 열어버리면, 결국 옛날 감정은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새로운 자질(資質)을 발견하고, 훨씬 더 훌륭한 사람으로 키우게 됩니다. 우리는 새로 거듭난 후에 진짜 자질(資質)이 발견될 때가 많습니다. 즉 우리의 새로운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몇 가지 사실을 보게 됩니다. 역시 가장 중요한 것은 오네시모도 생명의말씀으로 변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오네시모가 변했다면, 변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인의 괴수(魁首) 사울도 사도 바울로 변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사도 바울은 아무리 좋은 일이라 하더라도 다른 사람 모르게나 혹은 손해를 입히면서 하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오네시모의 용서를 받고, 진정으로 거리낌 없이 자기를 도와주기를 바랬습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돈 손해 입힌 것은 자기가 책임을 진다고 분명히 약속을 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의 이 사랑의 힘을 입어서 오네시모는 아주 중요한 바울의 동역자(同域者)로 거듭나서 성경 역사에도 그의 이름이 남는 사람이 되게 됩니다. 교회 생활을 오래 하다보면, 묵은 감정을 품고 있는 교인들이 있습니다. 즉 어떤 사람은 같은 교회를 다니지만, 서로 말도 하지 않고 지냅니다. 그러나 마음이 걸릴 때가 있습니다.
그때는 성찬식을 할 때입니다. 교인들이 성찬식을 하면서 오래 묵은 감정들을 풀어버릴 때가 많습니다. 그것은 자신을 위해서도 너무나 아름다운 것입니다.
또 고부간의 갈등이나, 부부사이의 미움의 감정이나, 형제들 사이의 원한도 모두 다 풀어버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후에 우리는 엄청나게 변해버렸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더 이상 과거의 묵은 상처나 아픔에 얽매여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주 안에서 모두 풀어버리고, 새해(癸卯年)는 천성을 향하여 힘차게 전진하시기 바랍니다.아-멘
찬송가 359장 *천성을 향해 가는 성도들아*
묵상
*가산(家産)이 적어도 여호와를 경외(敬畏)하는 것이 크게 부 (富)하고 번뇌(煩惱)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채소(綵素)를 먹으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 살진(韓牛)소를 먹으며 서로 미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잠15:16-17)
▣알림
癸卯年 카페. 카톡 회원. 2-3명 되면 셀(cell)가족공동체로 주일 예배를 이렇게 드립시다.
▷아빠는 성경읽고. 엄마는 기도하고. 생명의 양식을 공유하고. 자녀는 찬송하다가 지인(知人)을 초대하여 두 가정. 세 가정이 되면, 코로나 이후로 삭막한 세상. 아름다운 이웃이 될 것입니다.
☞가족같은 교회. 교회같은 가족 ☜
셀(cell)가족 공동체 의무는 첫째 예배, 둘째 교육, 셋째 전도, 넷째 성도의 교제
※새벽(冬)5-6시 기도하는 습관을 가집시다.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시46:5) 순종하는 믿음으로 하늘에 보물 쌓을 교갱원 설립 創立member ▽교갱원 설립할 온라인 특별 헌금▽
농협 NH콕뱅크 302-8772-0191-01(헌금 종류)
대한 예수교 장로회(합동)교회갱신 성경연구원
궁금한 내용 문의 ☞ 정 의 영 목사 ☎ 010-8772-0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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