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 기도)
주님,
새 날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백신 때문인지 몸이 무겁습니다.
말씀 앞에 나아갑니다.
십자가 보혈을 의지합니다.
정한 마음과 정직한 영을 허락하옵소서.
성령님, 말씀을 조명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본문)
15. 마노아가 여호와의 사자에게 말하되 구하옵나니 당신은 우리에게 머물러서 우리가 당신을 위하여 염소 새끼 하나를 준비하게 하소서 하니
16. 여호와의 사자가 마노아에게 이르되 네가 비록 나를 머물게 하나 내가 네 음식을 먹지 아니하리라 번제를 준비하려거든 마땅히 여호와께 드릴지니라 하니 이는 그가 여호와의 사자인 줄을 마노아가 알지 못함이었더라
17. 마노아가 또 여호와의 사자에게 말하되 당신의 이름이 무엇이니이까 당신의 말씀이 이루어질 때에 우리가 당신을 존귀히 여기리이다 하니
18.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내 이름은 기묘자라 하니라
19. 이에 마노아가 염소 새끼와 소제물을 가져다가 바위 위에서 여호와께 드리매 이적이 일어난지라 마노아와 그의 아내가 본즉
20. 불꽃이 제단에서부터 하늘로 올라가는 동시에 여호와의 사자가 제단 불꽃에 휩싸여 올라간지라 마노아와 그의 아내가 그것을 보고 그들의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리니라
21. 여호와의 사자가 마노아와 그의 아내에게 다시 나타나지 아니하니 마노아가 그제야 그가 여호와의 사자인 줄 알고
22. 그의 아내에게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을 보았으니 반드시 죽으리로다 하니
23. 그의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우리를 죽이려 하셨더라면 우리 손에서 번제와 소제를 받지 아니하셨을 것이요 이 모든 일을 보이지 아니하셨을 것이며 이제 이런 말씀도 우리에게 이르지 아니하셨으리이다 하였더라
24. 그 여인이 아들을 낳으매 그의 이름을 삼손이라 하니라 그 아이가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에게 복을 주시더니
25. 소라와 에스다올 사이 마하네단에서 여호와의 영이 그를 움직이기 시작하셨더라
(본문 주해)
15~16절 : 마노아가 여호와의 사자를 아직 사람으로(선지자로) 보고 식사를 준비하려고 한다.
그런데 여호와의 사자가 마노아에게, 번제를 드릴 의향이 있다면 마땅히 여호와께 드리라고 한다.
17~18절 : 이때 마노아가 ‘당신의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으며, ‘당신의 말씀이 이루어질 때에 우리가 당신을 존귀히 여기겠다.’고 하는 것이다. 이름을 묻는 것은 그를 파악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에 여호와의 사자가 대답한다.
“야훼의 천사는 "어디라고 내 이름을 묻는 거냐?" 하며 자기 이름은 비밀이라고 잘라 말했다.”(18절, 공동번역)
‘기묘’란 말은 인간의 이해를 초월한다는(beyond understanding) 뜻으로서, 하나님은 우리의 경험과 합리와 실증을 초월해 계신 분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사야서에서 한 아기를 우리에게 보내시는데 그분의 이름도 기묘라고 하였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사9:6)
마노아가 여호와의 사자의 그 말대로 이루어지면 그 이름에 감사를 할 것이라는 의도이지만, 인간은 감히 그런 이름을 물을 가치도 없는 자라는 의미이다.
19~23절 : 마노아가 염소 새끼와 소제물을 가져다가 바위 위에서 여호와께 드리매 이적이 일어났다. 불꽃이 제단에서부터 하늘로 올라가는 동시에 여호와의 사자가 제단 불꽃에 휩싸여서 올라가는 것을 마노아와 그의 아내가 함께 목격한 것이다.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기묘한 일이 일어났다. 마노아 부부는 이를 보고 땅에 엎드려 하나님께 경배드렸다.
구약에서 여호와의 사자가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예표 한다.
이 제사의 제물은 마노아의 제물이 아니라, 그 제물이 불태워질 때에 그 불꽃 속에 휩싸인 여호와의 사자, 즉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속죄되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구원받는 자들은 여호와 앞에서 자신이 죽어 마땅하다는 사실을 평생에 걸쳐 알게 하시는 것이다.
구약의 그 무수한 제물들이 번제로 드려진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 피로 속죄의 제사를 드리실 것을 미리 보여주신 것이다.
마노아가 죽음을 두려워하자 그의 아내가 말한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죽이려 하였다면 그들이 드린 번제와 소제를 받지 않았을 것과 하나님의 이적도 보이지 않았을 것과 아이를 기르는 방법에 대해서도 알려주지도 않았을 것이라고 한다. 마노아의 아내는 죄사함의 은혜를 알고, 마노아를 영적으로 잘 동역한 것이다.
24~25절 : 여인은 아이를 낳아 아이의 이름을 삼손이라 지었다.
삼손은 ‘태양의 사람’이라는 뜻이다.
마노아는 아들이 돋는 해처럼 어두운 시대를 비추어 주기를 원했던 것이다. 삼손이 이스라엘을 블레셋에서 구원해 주시기를 소망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삼손에게 복을 주시니 그의 영이 그를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나의 묵상)
삼손의 출생은 예수님의 출생과 닮았다.
그는 경건한 가정에서 천사의 고지로 태어났다. 또 그는 자라면서 여호와의 복을 받았고 여호와의 영의 인도함을 받았다고 되어 있다.(24~25절)
그럼에도 그의 삶의 과정과 결말은 비극적이다.
하지만 그런 중에도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 하시고자 했던 일, 곧 블레셋을 심판하는 일은 하게 하신다.
“삼손이 이르되 블레셋 사람과 함께 죽기를 원하노라 하고 힘을 다하여 몸을 굽히매 그 집이 곧 무너져 그 안에 있는 모든 방백들과 온 백성에게 덮이니 삼손이 죽을 때에 죽인 자가 살았을 때에 죽인 자보다 더욱 많았더라”(삿16:30)
좋은 가정에 태어났으면 성령충만하게 잘 자라 하나님께서 하게 하신 사명을 잘 감당하고 죽으면 좋을 텐데....이 삼손의 삶에는 참 불만족스러운 내용들이 가득하다.
‘그 아이가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에게 복을 주시더니......여호와의 영이 그를 움직이기 시작하셨더라’(24~25절)
마치 예수님의 어린 시절과 비슷한 삼손이었건만......
성경을 읽다보면 이해되지 않고 심지어 모순처럼 보이는 내용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하지만 이제 투덜대지 않고 마음속에 그 내용들을 남겨둔다. 성령께서 천천히 알게 해 주실 것을 기대하는 것이다. 왜냐 하면 ‘기묘의 하나님’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분명히 나의 경험과 이성을 초월해 계신 분이시다.
삼손은 경건한 가정에서 나실인으로 태어나지만 하는 짓은 영 시원찮다. 그 일생이 여자 꽁무니만 따라다니는 정욕에 눈먼 사사, 영민하지 못하고 힘만 센 사사였다. 그렇다고 앞서 나온 사사들처럼 군사를 모아 적들을 상대로 전쟁하여 승리한 자도 아니고, 그저 여자와 얽힌 일에 자기분을 못 이겨 블레셋인들을 죽이고 난리친 자인데 뭐 이런 것도 사사의 일인가 하는 의문도 든다.
그러나 기묘하신 하나님이시다.
기묘하신 하나님은 인간의 죄악 가운데서도 친히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죄악 가운데서도 친히 놀라운 섭리로 일하신다.
에덴 동산의 타락 가운데서 가죽옷을 준비해 주시는 하나님, 이스라엘의 끝도 없는 배반 중에도 끝까지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 사사 삼손의 혼잡한 삶을 통해서도 이스라엘의 구원을 보여주시는 하나님......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이시다.
“He replied, "Why do you ask my name? It is beyond understanding.”(18절, NIV)
‘beyond understanding’
나의 생각, 나의 이해를 초월하신 하나님이시다.
사실 내가 삼손에 대해 이렇게 부글거릴 이유가 없다.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 기묘하신 하나님은 내게도 기묘하게 행하시기 때문이다.
나는 삼손처럼 거룩한 분위기 속에 출생하지도 않았고, 하나님을 모르는 부모 밑에서 죄악의 구덩이에서 자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내가 변화되어 주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쓰임 받으니 이것이 또한 기묘한 일이요, 이 땅을 살아가면서 영생을 누리게 되었으니 이 또한 기묘한 일 중에 기묘한 일이다.
그렇다고 내 삶이 어디 늘 경건하고 거룩한가 말이다.
이 모든 것을 성령께서 말씀을 통하여 하나씩 풀어주셨다.
기묘하신 예수님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이다.
창세전 아버지와 함께 계셨던 아들이 이 땅에 오신 것이다.
그리고 십자가에 죽으심과 장사되심과 부활하심과 현현하심과 하늘에 오르심과 성령을 보내심.....그리고 다시 오심.....이 모든 것들은 기묘하심으로 가득 차 있다.
그래서 나의 이성을 초월하신 기묘하신 예수님을 오늘도 말씀을 통해 알아가고 있는 것이다.
말씀을 통해 날마다 기묘하신 주님을 뵈오니, 매일이 기적을 누리는 날이 아니고 무엇이랴.
(묵상 기도)
주님,
스스로에게 이해되지 않으면 입을 삐죽였던 지난날을 회개합니다.
어찌나 자기중심인지
이런 은혜도 자기가 경험하고 나서야 머리를 조아립니다.
‘beyond understanding’
제 경험과 이성을 초월하신 하나님 알기를 간구합니다.
매일의 말씀을 통하여 기묘하신 일을 나타내소서.
성령님,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