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훈:
1974년 카톨릭대학교 신학대학을 졸업했다.
1974년 인스부루크대학교로 유학을 가(27세) 1976년 부제품을 받았다.
1977년 신학 석사학위를 받았으나 산행 중 불의의 사고로
1977년 6월 2일 (30세)에 하늘나라로 갔다. 이 유고집은 1978년 9월에 펴냈다.
'산,바람 하느님 그리고 나 베드로'는 그가 인스브루크 유학 중, 산에 올라
그 정상에서 백설위에 손가락으로 쓴 글이라고 한다.
하느님 - 자연 - 인간의 오묘한 섭리를 받아들이는
그의 깊은 신앙심이 마음에 와 닿는다..
이 책을 읽게 된 이유:
신부는 결혼을 포기하는 직업이다.필자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어떤 생각과 신념이면
그것이 가능할까? 그 갈등과 고뇌를 극복해 가는 과정이 궁금했다.
50 년의 시간도 지나고 보면 금세 지나간다.이제, 김 베드로 시대의 사람들은
거의 다 노인이 되었다. 세월의 덧 없음을 실감하게 된다.
그의 글(주로 일기)은 진솔하다. 책을 읽는 동안 필자도, 잠시, 타임 머쉰을 타고
풋풋했던 시절로 되돌아갈 수 있었다. 청춘의 순수함과 불안 그리고 비어있는
그리움에 대하여, 누구나 애틋한 스토리 하나쯤은 가슴 속에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비교적 소원했던, 기독교와 형이상학적인 세계에 대한 관심은 어쩌면,
필자의 의식의 밑바닥에 조금은 잠재해 있었던 것같다..
한 젊은이의 진실하고 순백한 영적 소산물과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감은
옛 고향을 향한 향수같은 것이다 .
과연 세월은 나의 무엇을 바꾸었나?
점점, 속물화, 무감동, 무감성, 무희망 쪽으로 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책은 자신을 성찰할 기회는 물론 슬픔에 대한 위로를 준다.
젊은 영혼의 경건한 삶은 필자에게 맑은 정화제가 될 것이다.
김 베드로의 삶:
그는 독서광이었다. 신학, 철학, 불교,인간학, 문학, 예술 등, 동서양의 인문학과
고전을 두루 섭렵했다. 또한, 그는 재능 있는 아마츄어 화가였다.
생의 본질(근원)에 대하여 끊임없이 사색하며. 영육의 극단적인 순수를 추구했다.
그의 꿈은 신학(신부)을 거쳐 철학을 공부한 후, 교수가 되는 것이었다.
그는 두 개의 실존적 삶 가운데서 방황했다:
하나는, 하느님의 길 (사제, 구원 청빈, 고독, 기도, 공부, 겸손..) 그리고 다른 하나는,
평범한 인간의 길(결혼, 물질, 명예, 열정, 나태, 쾌락, 미움, 슬픔, 호기심..) 이다.
인간 관계에서의 사랑과 행복을 동경했던 그의 고뇌는 그만큼 깊었다.
특히 청춘의 뜨거움과 찬란한 것들을 예찬했다:
'푸르른 창공, 5월의 새순, 한여름의 짜릿함, 늦가을의 햇볕, 만끽하고 싶은..'
'파랗게 반짝이며 뜨거운 눈물속에 무너져 내릴 것 같은 절망속에 뒹글고 싶건만..'
특히, 신학 대학 시절 잠시, 교류했던 여성 J에 대한 미련과 갈등은
유학 가기 전까지 계속되었다.
*
사람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안다는 것은 그만큼 고뇌를 창조하는 일이다.
왜냐하면 세상의 진리는 상호 대립적이며 때로는, 상호 모순적이기 때문이다. (필자 주)
그는 아는 만큼 고뇌도 깊었다. 절대 선에 대한 흠모는 항상 자기 자신에 대한 엄격한
잣대와 채찍 으로 이어졌다. 그는 고뇌하고 방황하는 신앙인이었다.
하느님과 구원에 대한 갈망과 그에 반하는 생동하고 투쟁하는 인간의 삶 사이에서,
'모든 유혹과 갈등을 극복하는 길은 오직 하느님에게 매달리는 것이다.'
이것이 그의 결론이었다.
김베드로가 서품기념상본을 위해 택했던 성구는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생각해 주시며,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돌보아 주십니까?' (시편 8,5) 였다고 한다.
깊은 신앙적 체험을 한 사람만이 이 성구의 심오한 뜻을 알고
기도로 바칠 수 있을 것이다.
'위대한 신적 질서와 위대한 생명의 영속을 위하여..' 그는 고백한다.
'청빈과 고독을 스스로 택하여 사는 것 .이것이 내 사제행의 동기고
또 그런 그리스도인이 되고 싶다.
그리고, 조그만 향기를 풍길수도 있는..'..
젊은 시절, 김수환 추기경의 글(서문)을 읽는 것도 색다름이다.
*
하이네(m choi)
첫댓글 고 김정훈 베드로는 62회 동기로 알고 있습니다. 혹시 친교가 있었던 분 계신가요?
3학년 2반 같은 반이었죠. 안타깝게도 친교를 나눌 행운이 없었습니다. 사실 그 땐 입시전장이었잖아요?
부친이 참 법관으로 유명한 분이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사형수의 아버지'라고 불리던 김홍섭 판사 (바오로)가 부친이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