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덕사의 여승’ 가사 유감>
어느 날 친구가 카카오톡으로 우리 전통가요인 ‘수덕사의 여승’을 보내왔다. 노래의 곡조는 나이 든 사람들이 듣기에 참 좋았다. 요즘 미스 트롯, 미스트 트롯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든 대중에게 사랑을 받고 있음을 새삼 느낀다. 이 노래 또한 틀림없이 누구나 좋아할 곡조이다.
그런데 문득 가사의 내용이 내 마음 한구석을 어둡게 한다. 노래 영상을 보내온 사람이 불법을 따르는 도반인데 아마 그는 가사는 염두에 두지 않고 곡조가 좋아서 보낸듯하다. 나는 대뜸 가사를 바꾸어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너도나도 카카오톡에 묻혀 사니 어찌하겠는가. 나도 그걸 이용하기로 했다. 우선 그 노래를 보내온 카톡 방으로 개사한 가사를 띄웠다, 그 카톡 방을 공유하는 보살한테서 ‘줄 박수’ 이모티콘이 바로 전달되어 왔다.
나같은 불자의 눈으로 보기에 이 노래의 원조 가사는 그 내용이 지나치게 세속적이다. 그 정도가 도를 넘는다. 수행하는 이를 왜곡하는 의미까지 느껴져 발칙하기까지 하다.
특히나 수덕사라면 선원, 강원, 율원과 승가대학을 다 갖추고 있어, 우리 불자들에게는 총림의 위엄이 드리운 곳 아닌가. 그런 수덕사 경내의 여승이, 구도의 일념으로 불법의 수행 정진에 매진해야지, 어찌해서 속세에 맺은 인연을 잊지 못하고, 법당에서 임 타령, 사랑 타령을 하고 있다는 말인가. 아무리 대중가요 가사이지만 법당에서 삼가거나 받들어 조심하는 마음을 배려함이 너무도 없다. 나는 안타깝고 아쉬운 마음이다.
가사의 작사자는 불자도 아니고, 법당의 법향(法香) 같은 말은 듣지도 보지도 못한 속인이리라 생각한다. 작사 당시의 세태에 영합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면, 그동안 누린 대중의 사랑만으로 충분한듯하니 이제는 최소한 개사한 내용으로라도 불렸으면 좋겠다.
나의 이러한 치기는 덕숭 총림 수덕사(修德寺)의 선맥(禪脈)과 그 선풍(禪風)의 위엄 때문이다. 수덕사는 충청남도 예산의 덕숭산(德崇山)에 있는, 한국 불교의 중흥 도량이고 ‘동방 제일 선원’이다.
차령산맥이 서쪽을 향해 달려가며 가야산을 형성하였고, 가야산 서남으로 위치한 명산이 덕숭산이다. 수덕사는 고려 시대 창건 이후부터 수많은 고승 대덕이 출현한 유서 깊은 사찰이다. 근대에는 한국 불교의 선풍을 진작시킨 경허(鏡虛), 만공(滿空) 스님이 주석하였으며, 현재에도 많은 사부대중(四部大衆)이 철야 용맹정진하는 등, 불조(佛祖)의 선맥이 면면히 이어지고 있는, 한국 불교를 대표하는 총림 기도 도량이다.
그러한 수덕사의 위엄과 법향(法香)으로 보아서, 원곡의 가사는 참으로 어울리지 않는다. 곡조까지 버리기는 아깝고 가사만이라도 선풍에 어울리는 것으로 바꾸어 불렀으면 하는 바람이다. 향기로운 법향이 삼천 대천 세계로 퍼지기를 발원하면서.
<옛 가사>
인적 없는 수덕사에 밤은 깊은데
흐느끼는 여승의 외로운 그림자
속세에 두고 온 님 잊을 길 없어
법당에 촛불 켜고 홀로 울 적에
아 수덕사의 쇠북이 운다
산길 백 리 수덕사에 밤은 깊은데
염불하는 여승의 외로운 그림자
속세에 맺은 사랑 잊을 길 없어
법당에 촛불 켜고 홀로 울 적에
아 수덕사의 쇠북이 운다
<고쳐서 추천하는 가사/최수모 改詞>
인적 없는 수덕사의 밤은 깊은데
기도하는 여승의 숭엄한 그림자
속세의 인연들을 여의기 위해
법당에 촛불 켜고 선정에 들 때
아 수덕사의 범종이 운다
산길 백 리 수덕사의 밤은 깊은데
염불하는 여승의 고고한 그림자
속세에 맺은 인연 해탈을 위해
법당에 촛불 켜고 선정에 들 때
아 수덕사의 범종이 운다
2020. 9, 21. 03 염창동 우거에서 法 海
첫댓글 수모씨 개사 능력이 탁월합니다. 좋아요. 수모씨의 깊은 불심을 가사 속에서 찾았습니다.
허나 이 노래가 일엽 스님의 생이 녹아있다고 볼 때 머리가 끄덕여지기도 합니다. 아무리 수행에 들었다고는 하나 번뇌를 무 자르듯 끊을 수 없는 법.
불같은 사랑을 속세에 두고 왔으니 그 괴로움이야 미루어 짐작하고도 남습니다. 일엽 스님은 님뿐만 아니라 자식도 속세에 두고 온 어미이기에 해탈하기 까지 얼마나 어려웠을까.
오래 전 들렀던 수덕사를 눈을 감고 떠올려봅니다.
허허허 너털 웃음으로 다 받아 넘기는 듯하여도 법해가 매우 깊고 그윽한 불심의 소유자라는 것을 이 글에서 알 수 있습니다.
불성에 바탕을 둔 생의 가치와 지향을 비교적 선명하게 보여 주는 글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매사 자유로운 정신의 소유자로 지내는 듯하면서도 종교의 가치를 마음에 심어두고 있는 심성도 엿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