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초부터 ‘신용 사면’… ‘코로나 타격’ 자영업자 대출 길열려
서울에서 카페를 운영하는 박상민 씨(37)는 최근 은행에서 신용대출을 새로 받으려다가 거절당했다. 지난해 말 만기가 된 대출 1500만 원을 못 갚고 두 달간 연체한 것이 발목을 잡았다. 연체 때문에 신용점수는 3등급이나 떨어졌고 대출금을 모두 갚은 뒤에도 연체 기록이 남아 신용점수는 아직 올라가지 않고 있다.
은행 대신 찾은 저축은행 등 제2금융권에서도 박 씨의 대출 금리는 껑충 뛰었다. 그는 “고작 두 달 연체했는데 은행 대출을 이용할 기회를 뺏겼다. 임차료 내기도 버거운 상황에서 대출금부터 갚았는데 억울하다”고 했다.
박 씨처럼 코로나19 상황에서도 연체한 빚을 성실하게 갚은 개인과 개인사업자들은 10월 초부터 순차적으로 ‘신용사면’을 받는다. 이들의 연체 기록이 사실상 삭제돼 추후 대출이나 카드 발급 등에서 불이익을 받지 않는 것이다. 개인 및 개인사업자 약 250만 명이 혜택을 볼 것으로 예상된다.
○ 연말까지 연체액 모두 갚아야 ‘신용사면’
금융권 협회와 중앙회, 한국신용정보원, 신용정보회사 등 20개 기관은 12일 서울 중구 은행연합회에서 ‘코로나19 신용회복 지원’ 협약을 맺었다고 밝혔다.
이번 협약에 따라 10월부터 금융회사들은 코로나19 사태 이후 발생한 개인 및 개인사업자의 연체가 전액 상환되면 해당 연체 이력을 공유하지 않는다. 신용평가사들도 이를 신용평가에 반영하지 않기로 했다. 사실상 10월부터 연체 이력을 없애주는 것이다.
현재는 대출 원리금을 갚지 않으면 금융권에 공유되고 연체된 빚을 갚더라도 상당 기간 연체 기록이 유지돼 신용도가 하락하고 이에 따른 금리 상승, 대출 거절 등의 불이익이 컸다. 금융당국 관계자는 “코로나19 충격으로 일시적으로 연체가 생겼지만 성실하게 갚은 이들을 대상으로 이 같은 불이익을 없애고 재기의 기회를 주겠다는 취지”라고 했다.
지난해 1월부터 이달 31일까지 2000만 원 이하의 채무를 연체했다가 올해 말까지 모두 갚은 개인 및 개인사업자가 혜택을 볼 수 있다. 앞서 2000년에도 연체 이력을 삭제해 신용사면을 한 적이 있는데 이때 기준이 1000만 원이었다. 당국과 금융권은 이를 감안해 이번 연체액 기준을 2000만 원으로 올려 잡았다.
아울러 경제 사정이 일시적으로 어려워진 이들에게 빚 갚을 기회를 늘려주기 위해 연체 상환 기간을 연말까지로 정했다. 예컨대 대출 만기인 8월까지 대출금 1500만 원을 갚지 못했지만 12월에 다 갚으면 이때부터 연체 이력이 삭제된다.
다른 금융사의 연체 이력을 넘겨받지 않아도 자사 연체 기록을 여전히 갖고 있는 금융사들도 해당 대출자가 연체금을 모두 갚았다면 대출 금리나 한도를 정할 때 불이익을 최소화하기로 했다.
○ 개인 및 개인사업자 약 250만 명 혜택 예상
금융당국은 개인 채무자 230만 명과 개인사업자 20만 명이 신용사면의 혜택을 볼 것으로 추산했다. △지난해 1월 이후 연체했다가 이미 빚을 갚은 개인 200만 명 △연말까지 연체된 대출을 갚을 것으로 추정되는 개인 30만 명 △개인사업자 최대 20만 명 등이다.
구체적으로 연체한 대출을 이미 갚은 200만 명은 신용점수(나이스신용평가 기준)가 평균 670점에서 704점으로 34점 높아지는 것으로 평가됐다. 또 신용카드 발급이 거절됐던 12만 명이 추가로 카드를 발급받고, 13만 명의 신용점수가 시중은행 신규 대출자의 평균 신용점수(866점)를 넘어서는 것으로 예상됐다. 대상자들은 연체액을 다 갚은 뒤 신용평가사를 통해 본인이 해당되는지 확인할 수 있다.
당국과 금융권이 신용사면을 재추진하는 것은 코로나19 여파로 경제적 타격을 입은 개인이 많다고 보기 때문이다. 은성수 금융위원장은 전날 관련 간담회에서 “코로나19라는 전례 없는 위기에 개인의 신용회복을 지원하려는 차원”이라며 “과거 외환위기 때도 신용회복을 지원했다”고 했다.
금융권에서는 신용사면 취지에는 공감하지만 정부가 주도해야 할 코로나19 피해계층 지원을 민간 금융회사에 떠넘긴다는 지적이 나온다. 아울러 연체 기록 삭제로 인한 부실 대출의 위험을 금융사가 감수해야 한다는 우려도 있다. 대출 만기 연장, 채무조정 특례 제도 등 취약 차주를 위한 다양한 금융지원책이 실시되고 있는 상황에서 정부가 대선을 앞두고 선심성 금융정책을 내놓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제기된다.
하준경 한양대 경제학부 교수는 “전액 빚을 갚아야 신용사면을 해주기 때문에 채무자들의 성실 상환을 유도하는 긍정적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며 “다만 이번 조치로 신용평가 체계가 흔들릴 수 있는 점은 우려스럽다”고 했다.
김형민 기자, 김자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