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3.14.日. 흐리거나 비
백양사 휴게소에는 비상구가 없다.
동생네 아파트가 등지고 있는 뒷산 쪽을 지나가는 외각도로를 타면 그대로 호남고속도로와 연결이 된다며 동생이 팔을 휘둘러가면서 외각도로 진입로를 가르쳐주었다. 내 머릿속에 입력되어 있는 지도대로 K시 시내를 통과하여 진입로에 들어서려면 족히 2,30분은 걸렸을 고속도로입구가 5분 남짓 외각도로를 달리니 그대로 직통연결이 되었다. 톨게이트를 지나고 이제부터 고속도로답게 제대로 달려주어야지 하고 마음을 먹고 있는데 눈 주위와 어깨가 스르르 풀리며 몸이 노근해졌다.
“여보, 운전하고 가시다 피곤하면 쉬었다 가시든지 저하고 교대를 하셔야해요.”
“글쎄, 여보. 그렇지 않아도 고속도로에 막 들어서니 어깨가 풀리며 잠이 사르르 오는데 아마 엊저녁에 3시간여밖에 자지 않은데다가 호박고구마를 배불리 먹었더니 그런 모양이요. 첫 번째 나오는 백양사 휴게소에 들어가서 간단히 한숨 붙이고 올라갑시다.”
“그래요. 그게 좋겠네요.”
호남고속도로 백양사 휴게소는 그 옆에 있는 정읍 휴게소에 비해 규모가 자그마한데다가 눈에 잘 띄지도 않고 아담해서 항상 차가 별로 붐비지 않아서 좋았다. 20분가량 달려서 도착한 휴게소 안을 한 바퀴 돌아본 뒤 한적하고 나무가 많이 우거진 울타리 아래 차를 주차시켰다. 뒤쪽 창문을 약간씩 열어놓고 도어잠금장치를 누른 후에 좌석 등받이를 있는 대로 뒤로 젖혔다. 그리고 드레스셔츠 맨 위 단추를 하나 풀고 넥타이를 느슨하게 하고나서 그대로 몸을 눕혔다. 갑자기 주위가 아늑해지면서 까마득한 어둠 속으로 내 몸이 빨려들 듯이 밑 모를 곳을 향해 깊숙이 가라앉았다.
“똑 똑 똑...”
“똑 똑 똑...”
“똑 똑 똑...”
“어엉, 거 누구요? 누가 밖에서 차창을 두드리는 게요?”
“어흠, 이제 정신을 차렸느냐? 울림아, 나다. 거 정신 좀 차리려무나. 벌써 너를 깨우기 시작한지 5분이 지났구나.”
“아니, 나라니 내가 누구요? 거참 사람 곤히 잠들어 있는데 왜 깨우고 난리요. 혹시 사람을 잘못 알아보고 그러는 것 아니요?”
“그 녀석도 참, 매우 시끄럽기도 하구나. 사람을 제대로 봤는지 잘못 봤는지는 이 문을 열어보면 알게 아니냐? 문을 열기 싫으면 창이라도 내려 보려무나.”
“아우, 지금 꿈속에서 기가 막힌 대목인데 대박 꿈을 팍 깨버리네. 와아, 이런 꿈 다시 꾸기 어려울 텐데 거 무지 아깝고 짜증나네. 근데 도대체 왜 잠을 깨우고 난리요, 난리는? 도대체 누구시오?”
“어흠, 어흠. 나다, 나라니까.”
“글쎄, 그 나가 누구냐니까? 엉! 아니.. 아니.. 아니.. 부처님, 여기 웬일이세요?”
“호오, 욘석아 이제야 뭐가 좀 보이느냐. 네놈이 방금 나에게 여기 웬일이세요? 라고 그랬니? 고연 놈 이로고. 여기가 백양사 휴게소 아니냐. 그 이름이 괜히 백양사 휴게소이겠느냐. 백양사白羊寺가 여기서 멀어야 10Km 남짓 떨어져 있구나. 요 며칠간 내가 백양사에 와있었는데 조금 전부터 어떤 녀석의 코고는 소리가 천둥 같고 우레같이 들려오더구나. 시끄러운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법당이 울려서 찻잔에 찻물이 넘치지 않았겠니. 그래서 코고는 소리를 향해 관觀을 해보았더니 어디서 많이 본 녀석이 휴게소에 차를 대놓고 백구야, 나 살려라! 하고 잠을 퍼 자는 것은 그렇다 치고 웬 코를 그리 고는지, 평소 시끄러운 놈은 자면서도 매우 시끄럽더구나.”
“아하! 그랬구나. 부처님, 제가요 작은어머니 초상에 문상을 왔다가요 어제 밤에 잠을 조금밖에 못 잔데다가 오늘 장지에서 일을 좀 봐주었더니 피곤했었나 봐요. 그래서 백양사 휴게소에서 잠간 한숨을 붙이고 맑은 정신으로 서울 올라가려고 여기서 쉬고 있었지요. 부처님께서 백양사에 머무시는 줄 알았다면 제가 바로 쏜살같이 백양사로 달려갔을 터인데 저는 부처님께서 아직 통도사에 계신 줄로만 알고 있었거든요. 그리고 부처님께서 택배로 보내주신 쯩은 잘 받았어요. 그런데 부처님, 그 택배 왜 수취인 부담으로 부치셨어요? 내 돈 5000원 들었거든요. 이번 일은 지나간 일이니 그렇다 치고 앞으로 저에게 무얼 부치실 때는 수취인 부담으로 부치시면 안돼요. 부처님 아시겠죠?”
“어흠 어흠, 그래 알았다. 내가 뭐 아까워서 그랬겠느냐, 그때 마침 잔돈이 없는데다 네놈에게 빨리 쯩을 부쳐주고 싶은 급한 마음에 부치다보니 그리된 모양이다. 그건 그렇고 내가 네놈을 깨울 때 네놈 하는 말이 기가 막힌 대박 꿈을 꾸고 있었노라고 불평을 하는 것 같던데 도대체 무슨 꿈을 꾸고 있었느냐? 네놈이 대박 운운 하는 걸보면 대충 짐작이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만.”
“아이참, 부처님도. 옛말에 기가 막히게 좋은 대박 꿈은 함부로 말을 하지 않는 것이라 하잖아요. 쿡쿡쿡...”
“아니 이놈아, 뭐가 좋아서 쿡쿡거리느냐? 네놈이 말을 안 해줘도 내 다 짐작이 가는 바가 있다. 네놈 수준에 대박 꿈이란 게 둘 중 하나겠지. 도리천忉利天 복권당첨부 대외비 금고 안에 들어 있는 차기 로또 당첨 번호를 슬쩍 들여다봤다든가 또는 몽유도원경夢遊桃園境의 으슥한 계곡에서 묘령의 선녀에게 작업을 걸었는데 오늘따라 말빨이 살아 잘 먹혔다든가 이겠지 뭐, 그렇지 않느냐?”
“아니, 아니, 부처님. 제 꿈속의 일을 어떻게 그렇게 잘 알고 계세요. 나는 아무 말도 아직 안했는데요.”
“너같이 단순한 놈이야 그저 눈빛만 척 봐도 네 머릿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딱 알 수 있거든. 그런데 말이다. 네놈이 선녀에게 꿈에서 작업을 건 걸 네 처가 알면 좀 시끄럽지 않겠니? 네놈 바로 옆에서 네 안사람도 잠을 자고 있는데 말이다.”
“제 안사람이 알기는 어떻게 알아요? 더욱이 꿈속에서 살짝 곁눈질 좀 한 것뿐인데요. 그렇지 않아요, 부처님?”
“허어, 이런 어리석은 놈을 봤나. 아니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내가 알고, 네놈이 알고, 선녀가 알고 있는데다 그뿐이더냐 계곡溪谷이 알고, 폭포瀑布가 알고, 청풍淸風이 알고, 명월明月이 알고, 산천초목山川草木이 알고, 몽유도원경이 알고, 천하天下가 알고 있는데 네 아내가 모른다면 그게 이상한 일이지 뭐냐?”
“맞아요, 맞습니다. 부처님 말씀을 듣고 보니 정말 그러네요. 그러면 부처님 제가 어떻게 해야 되지요? 예, 부처님?”
“흠, 그래 네놈의 애절한 눈빛을 보니 내 마음이 또 흔들리는구나. 그래 내 좋은 방법을 알려 줄 터이니 앞으로는 딴 눈을 팔면 안 되느니라. 이제까지 했던 것보다 네 안사람에게 세 배 더 잘 해주도록 해라. 특히 청소하고 식사 준비를 할 때 빈둥거리며 놀고 있지 말고 꼭 도와주도록 하며, 네 안사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늦게 자며, 아침에 일어나서와 밤에 잠자리에 들 때 꼭 볼에 뽀뽀를 해주고, 죽어라 하고 재미있는 글을 써서 돈을 많이 벌어다가 한 푼 남김없이 안사람에게 가져다주도록 하고, 시간이 날 때마다 팔다리를 주물러주도록 하거라. 알겠느냐?”
“저어.. 그런데 부처님.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이 구구절절 다 맞기는 하지만요 꿈속에서 잠깐 실수를 한 걸 가지고 말씀하신대로 다 실행하기는 좀 벅차다는 느낌이 드는데요. 저 부처님, 제가 꾀를 부리려는 건 아닌데요, 꿈속 일인데 정말 아내가 눈치를 챌까요?”
“울림아, 지금도 꿈속이란다. 더 푹 자고 일어나서 맑은 정신으로 집에 돌아가도록 하려무나. 그럼 나는 이만 갈란다.”
“어엉! 지금도 꿈속이라구요?”
(- 이별의 맛, 백양사 휴게소에는 비상구가 없다 -)
첫댓글 너무 하십니다, 꿈속 마저 비상구가 될 수 없다면 포화상태의 욕망은 어디로 분출하라는 겁니까?
아무리 과학이 발달하며 공짜로 "마음스캐너"를 준다고 해도 저는 절대 그것을 흔쾌히 받지 않을 껍니다.
부처님, 제발 제 마음과 머리는 스캔하지 말아 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