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非스포츠 게시판 스크랩 펌))몽골의 서유럽 공격이 어디까지 가능했을까?
꽃페즈 추천 0 조회 1,174 09.08.21 23:48 댓글 15
게시글 본문내용

사람들은 대개 각 지역과 문명권에는 그에 맞는 군사 문화가 발전해 왔다는 점을 쉽게 무시하곤 합니다. 물론 그 군사문화가 상당한 보수성을 띄긴 합니다만, 그 초기에는 분명한 효용성을 찾을 수 있었겠지요. 우리가 보기에는 이해하기 힘들어 보이는 초기 그리스의 방진, 혹은 무거운 판금갑옷을 껴입은 기사들, 모두 일련의 합리성을(물론 그 중에서 기득권을 향한 의도적인 선택도 있습니다만, 그 선택들도 모두 어느 정도의 효용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스의 지형은 기병이 활동하기 어려운 지형입니다. 그리스 지형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해안 지대의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개 산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당연히 기병 동원 자체가 힘들고, 설사 기병을 동원할지라도 그 기동력을 손쉽게 발휘하기 어려운 지형입니다. 따라서 기동력보다는 힘과 방어력에 기본을 둔 방진이 발달하게 되었고, 활이 오래 전부터 소개되어 왔음에도 보병전의 라인 배틀에 적합한 투창병이 경보병의 대세를 차지하게 된 것이지요. 물론 이것을 키건이나 데이비드 핸슨의 주장처럼 서구권의 동양에 대한 우세로 이끌어가는, 적어도 동양인의 입장에서 보면 웃기는 주장과 동치시킬 필요는 없습니다. 키건이나 핸슨의 주장대로, 동양이 서양 내부에서 서양을 결정적으로 격파한 전투도 없지만 알렉산드로스 대왕 같은 천재를 제외하면, 서양도 근대 이전에 없기는 마찬가지거든요.

 

 

 이제 이 전제를 기본으로 삼아서 본 내용으로 들어가 봅시다.

 

 

몽골의 유럽 공격이 바로 그것입니다. 즉, 오고타이 칸의 죽음이 아니었다면 바투의 원정이 유럽을 초토화시켰으리라는 주장, 흔히 자주 보는 주장이지요. 물론 몽골 원정이 유럽에 미쳤던 격렬한 공포나, 그 군사적 탁월성을 부정하자는 내용은 아닙니다만, 저는 설사 오고타이가 죽지 않았더라도 몽골이 서유럽의 심장부까지 진격하여 이를 초토화시켰으리라고 보는 데에는 상당히 부정적인 입장입니다. 이 가정을 고려할 때 유념해야 할 점은, 몽골군의 동원군을 바투의 군단으로 한정하고, 이 군단을 기준으로 생각해 주셔야 합니다. 다시 말해 몽골이 강대했던 중국을 거꾸러트린 것은 정복이 완료된 북중국이라는 후방과 그 생산력, 이들에게 축적된 기술력을 지속적으로 투입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불가능한 실제 역사의 바투의 군단이 서유럽에 대한 공세를 펼쳤을 때 갖는 효과는 별개로 고려해야 합니다.

 

 

(칼카강 전투에서 러시아군을 격파하는 중기병)

 

 당시 상황을 고려해보자면, 몽골은 1223년 칼카 전투에서 키예프 루스의 군대를 결정적으로 격파했고, 1240년에 키예프를 점령하여 러시아 정복을 완료합니다. 그리고 이듬해 동부-중유럽에 대한 공세를 제기하여, 군대를 둘로 나누어 리그니츠에서 폴란드군을, 모히에서 헝가리군을 격파합니다. 유럽은 공포에 떨었고, 몽골군은 계속 전진하려던 와중에 오고타이 칸의 사망 소식을 듣고 군을 뒤로 돌리게 됩니다. 여기까지만 보자면 몽골이 유럽을 공격하여 불바다로 만드는 일은 썩 어렵지 않아 보입니다.

 

 

 하지만 당시의 상황을 보면 문제는 조금 다릅니다. 예컨대 러시아는 정복은 했지만 전체 러시아가 몽골에게 굴복한 것은 아닙니다. 타타르의 멍에는 이반 뇌제의 시대까지 이어지지만 타타르의 멍에를 벗어던지기 위한 러시아의 저항은 계속되었고, 몽골은 이들의 반란을 끊임없이 제압해야 했습니다. 이 뿐만 아니라 폴란드로 진출한 몽골군은 리그니츠에서 승리하고 어떠한 정복작업도 마치지 않고 바로 헝가리로 되돌아왔고, 모히 전투에서 패배한 벨라 4세는 마지막까지 살아남아 몽골군을 저지했으며, 방어선이 돌파된 뒤에도 끊임없이 게릴라전을 펼치며 몽골군의 후방을 괴롭히고 있었습니다. 전략적 상황으로 볼 때 몽골군은 분명히 폴란드와 헝가리의 주력군단을 격파했지만 이 지역에 대한 정지작업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즉, 당시 몽골군의 후방은 안정되지 못한 상태였고 몽골군이 서유럽으로 전진해 들어갈수록 보충병이나 원군을 받을 확률은 줄어들게 된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이런 질문이 나올 수 있습니다.

 

 

“몽골군에게 무슨 보급이 필요가 있냐?”

 

“피해를 받지 않고 이기면 되는 것 아니냐?”

 

 

 전자를 이야기할 때 가장 자주 나오는 이야기가 보르츠입니다. 몽골 특유의 건조식인 보르츠 덕분에 보급이 필요 없다는 이야기입니다만, 전체적으로 그 많은 보르츠를 만들었는지의 문제는 전혀 밝힐 수 없으니 차치로 하고서라도, 무기와 갑옷의 낭비는 어쩔 수 없는 문제입니다. 몽골군이 제 아무리 탁월한 군단이라도 전장에서 수 천, 수 만발의 화살을 써야합니다. 당연히 상당수는 부러지거나 촉이 나가겠죠. 이 화살들의 보충은 어떻게 할까요? 여기에 서유럽으로 돌입할수록 수많은 말을 먹일만한 대초원은 줄어드니 말먹이도 구해야죠. 전투 중에 부러지거나 잃어버리는 무기는 결코 적지 않을 겁니다. 갑옷이 녹슬지 않게 칠할 기름도 구해야 되겠죠. 즉, 아무리 몽골군이 탁월한 군대라도 보급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문제는 직접 전투를 조망해보면서 살필 수 밖에 없습니다.

먼저 생각하여두실 것은, 몽골군이 전부 경기병으로 구성된 군대는 아니라는겁니다. 경기병 외에도 현재의 고고학적 유물을 바탕으로 짐작하여 볼 때, 몽골의 철제 갑주 유물들도 적잖게 발견되고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몽골군은 경기병 외에도 상당수의 중기병을 운영하였다는 점은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몽골군은 경기병을 이용한 기동전 외에도 분명히 최후의 전장을 수행할 백병전 부대를 보유하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몽골 중기병의 갑옷 유물)

 

 흔히 발슈타트 전투에서 몽골군 2천이 유럽 기사 10만을 전멸시켰다는 낭설이 돌고 있습니다만, 통설에 따르면 양쪽의 병력은 2만~3만 수준입니다. 그나마 타타르 연대기, 얀 듀고츠 연대기, 기타 튜턴 기사단의 기록까지 검토한 게라드 라부다 교수에 의하면 몽골군과 폴란드군의 숫자는 양쪽 모두 7~8,000명 수준이고, 이는 상당히 신뢰성 있는 수치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실제 몽골을 방문하고 타타르 연대기를 작성한 프란치스칸에 따르면 몽골군의 규모는 1만 여명(1개 투멘-만인대), 실제 만인대의 병력은 이보다 적으며, Chmielnik , Kornstadt 전투의 손실을 제외하면 7~8,000명일 가능성이 높다고 제시한 바 있습니다.

 

(리그니츠 전투)

 폴란드의 게라드 라부다 교수는 연대기를 기반으로 실제 전투에 참가했던 여러 군단의 동원 병력을 추정하고, 후대에 폴란드의 세력이 훨씬 강해졌을 때와 비교하는 한편, 실제 튜튼 기사단의 참가 병력에 대해 이의를 제기합니다. 리그니츠 전투에 참가하여 사망하였다는 튜튼 기사단장인 포포 본 오스테르나(Poppo von Osterna)는 당시 기사단장도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15년 후 사망합니다. 심지어 4월에 궤멸 당했다는 튜튼 기사단은 그해 7월에 아무 문제없이 동 프러시아에 대한 원정을 재기하여 성공적으로 마무리합니다. 이는 튜튼 기사단이 실제로는 전투에 참가하지 않았거나, 혹은 소수에 불과했으리라는 추측을 뒷받침합니다. 이 점을 고려하여 내놓은 수치가 7~8,000명입니다. 즉 양쪽 모두 실제 참여한 병력은 비슷했으리라는 뜻입니다.

 발슈타트(리그니츠) 전투 자체는 얀 듀고츠 연대기에 따라 재구성할 경우 결코 몽골의 낙승은 아니었습니다. 금광 광부 및 모라비아 인으로 이루어진 폴란드군은 초기에 몽골군 전위의 궁수들을 공격해 격파했으나 깊숙이 뒤쫓다가(물론, 거짓 유인으로 볼 수 도 있습니다만) 몽골군에게 측면을 공격당해 격파 당했습니다. 보다 정예병이었던 폴란드의 2, 3번 부대는 석궁을 이용해 몽골군과 효과적으로 교전하던 중, 몽골인 진영에서 폴란드로 ‘돌아가라!’라고 외치는 말을 듣고 몽골군이 이상한 책략을 쓰는지 의심하여 군대를 물리고 맙니다. 이 경위는 불확실하지만, 기록 자체는 얀 듀고츠 연대기와 타타르 연대기에 모두 남아 있습니다. 특히 타타르 연대기의 신뢰성을 고려해볼 때, 정확하지는 않지만 이러한 상황이 있었던 것은 확실합니다. 마지막으로 남은 실레지엔공 하인리히 2세는 몽골군에게 저항합니다. 전투는 폴란드군이 유리하게 이끌고 있었지만, 몽골군의 술법-악취와 연기가 몰려왔다고 합니다-에 말려들어 패배했다고 전해집니다. 

 

 

 이 마지막 상황에 대해서 신뢰성을 재고해볼 필요가 있고, 얀 듀고츠 연대기가 유럽인의 입장에서 작성된 점에서 중립성을 보장하기는 어렵지만, 이를 바탕으로 전황을 구축하여 볼 때 적어도 몽골군이 백병전으로 돌입하였을 때는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음을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모히 전투도 마찬가지로 전혀 낙승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더욱 심각하게 진행되었습니다.

 

 

(1241년의 몽골의 헝가리 공격)

 

모히 전투는 확실히 수적으로 몽골군의 우위에 있어서, 몽골군의 숫자는 3~5만, 헝가리군은 1만 5천~3만 수준으로 추정됩니다. 벨라 4세가 이끈 헝가리군은 한밤중에 진출, 다리를 건너는 몽골군을 격파하고 석궁으로 상당수를 살상 합니다-13c부터 헝가리군은 활보다 석궁의 빈도가 늘어납니다. 승리를 거둔 헝가리군이 소수의 병력을 남기고 철수하자 사태를 알아차린 몽골군 본대가 사요 강의 다리를 향해 공격을 개시합니다.

 

 

(사조 강의 다리에서 격돌하는 몽골군과 헝가리군)

 

몽골군은 7대의 투석기를 동원하여 다리 저편에서 공격하는 헝가리군을 구축한 뒤(MTW2를 해신 분은, 이 경우에서 석궁병이 얼마나 난감한지 아실 겁니다) 다리를 건너 헝가리군의 본진을 공격합니다. 

 

 

헝가리군은 이번 공격도 소규모 공격으로 파악하고 공격에 나섰으나, 몽골군 본대의 공격이라는 것을 알고 되돌아옵니다. 헝가리군이 부대를 재정비 하는 사이 바투는 그의 군단을 완전히 도하시키는데 성공합니다. 벨라 4세 역시 헝가리군의 대부분을 이끌고 캠프에서 밖으로 나와 몽골군과 교전합니다. 당시 헝가리군은 수적 열세에 있었음에도 전황이 백병전으로 진행되자 전황은 헝가리에게 유리하게 진행됩니다. 즉, 사요 강이 뒤에서 흐르는 몽골군이 기동력을 발휘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백병전을 강요당하게 된 것이지요. 심지어 하마터면 군대 전체가 무너질 뻔 했는데 바투 자신이 직접 헝가리군을 향해 공격하여 전세를 되돌릴 정도였습니다. 이 교전에서 바투는 30명의 수행원과 자신의 부관인 바카투(Bakatu)를 잃을 정도로 심각했습니다. 전황이 치열하게 전개되던 중, 사요 강의 다리 남쪽에서 새로운 부교를 건설한 수부타이의 군대가 도하를 완결하고 헝가리군의 후위를 공격함으로써 몽골군의 승리가 결정되었습니다. 심지어 이 때 바투는 헝가리군의 추격마저 포기할 생각이었는데, 예비대를 이끌고 헝가리군의 후방을 공격한 수부타이가 공격을 적극적으로 주장하여 추격할 정도였습니다.

 

 

(바투와 그의 친위대가 갖췄을 무장)

 

이상의 두 전투가 이야기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물론 몽골군은 매우 탁월한 군단이며, 전술과 부대 운영에서는 당시 상대가 없는 군대였습니다. 그리고 위 두 전투는 그러한 몽골군의 탁월한 부대 운영과 통솔에 기인함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그런 몽골군이라도 그들의 현란한 기동력을 벌이는 것이 한정된 지형에서(예컨대 다리, 요새) 백병전을 강요당할 경우에 그 위력을 완전히 발휘할 수 없다는 것 역시 증명되었습니다. 전투는 몽골의 승리지요. 하지만 몽골은 이제 폴란드와 헝가리를 격파했을 뿐입니다. 폴란드는 당시 중앙집권화가 거의 진행되지 않은 상태였고, 100여년 후에도 튜튼 기사단에게 밀리는 기세를 보였습니다. 헝가리 역시 서구권의 군사문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던 상태입니다(12c까지 헝가리는 강력한 비잔티움의 군사문화 영향력을 받았으나 13c를 기점으로 프랑스, 독일의 것으로 교체되어갑니다) 헝가리는 신흥강국이지, 서유럽의 강대국과 비교해서는 군사적으로 미흡한 상태였습니다. 급격한 팽창의 도움이 되었던 쿠만인들은 그 세력이 너무 커져 벨라 4세와 귀족들이 스스로 제거한 상태였죠.

 

 

(벨라 4세)

 

즉, 몽골이 서유럽으로 진군해 들어갈수록 제 2, 제 3의 모히 전투를 겪어야 한다는 뜻이 됩니다. 상황은 더욱 나쁘게 진행될 확률이 높습니다. 상대적으로 동유럽의 넓은 평원에 비하여 서유럽의 평원은 좁은 편입니다. 구릉과 숲, 습지는 물론, 경작지 비율은 훨씬 넓습니다. 경작지의 고랑과 울타리는 기병의 탁월한 기동력에 방해가 될 것이고, 높은 인구밀도에 따라 요새도 동유럽보다 훨씬 높은 밀도로 펼쳐 있습니다. 

 

 

물론 서유럽에도 평원이 펼쳐져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수십만의 병력이 교전할 수 있는 지평선이 보이는 평원보다는 수 만 단위의 병력이 교전할 수 있는 평원이 많습니다(물론 그런 평원이 있겠습니다만, 상당수는 경작지로 활용되고 있을 겁니다.) 이는 경기병의 현란한 기동이 경작지나 구릉에 의해 방해받고, 상대적으로 중기병의 돌파력과 방어력이 활용될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괜히 서구권에서 경기병의 패러다임을 자신들의 군사문화에 적용하지 않았을까요? 서유럽은 유목민인 마자르와의 투쟁을 겪은 적 있습니다. 상당히 고전했지만 결과적으로 레히펠트 전투에서 동프랑크 왕국은 마자르인의 공세를 좌절시켰습니다. 그리고 경기병에 대한 방안으로 상당수의 중기병을 동원하여 적잖은 성과를 거두기도 했습니다. 그런가하면, 이들은 우트르메르(십자군의 활동 영역)에서 이슬람의 경기병 전술을 인정하고, 비록 우트르메르에 한정되어 있기는 하지만 활로 무장한 경기병부대(투르코폴스)을 운영하기도 했습니다(역으로 이슬람, 특히 살라딘과 아이유브 조의 군대는 서구의 중기병 전술을 인정하고 사슬갑옷과 긴 창, 방패로 무장한 중기병을 도입합니다.)

 

 

 이러한 경기병 부대와 접촉하고 운영한 경험이 있음에도 서구권은 경기병 부대를 운영하지 않았습니다. 브리튼의 아더왕 전설의 기원이 되는 켈트족은 탁월한 경기병 부대를 운영했음에도 앵글로-색슨 족의 보병 부대에 밀려나게 되었습니다. 즉 서구라는 배경에서는 기동력보다는 방어력과 힘이 효과를 발휘할 수 있었다는 뜻이 됩니다. 몽골군이 경기병 외에도 중장기병을 동원한 이유에는 이러한 다양한 전장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충격부대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위의 두 전투에서 충격부대의 역할 수행에서는 서구권이 유리함이 나타났지요. 그리고 13c의 헝가리 기병대의 무장은 당대의 서유럽 군대와 비교하여 볼 때 경무장 상태였습니다. 헝가리는 원래 마자르계 유목민의 군사 전통을 이어받은 국가입니다. 이들이 유목민 전술의 몽골군에게 패배한 모히 전투 이후, 아이러니컬하게도 헝가리의 군사문화는 서유럽의 영향력을 훨씬 더 강하게 받게 됩니다. 기사는 더욱 중장화하고, 석궁의 사용 빈도가 크게 증가합니다. 이는 헝가리 군이 모히 전투에서 내세운 서구화된 전술이 어느 정도 효과를 보았음을, 그리고 그 지형에서는 서구권의 전술이 보다 알맞았음을 나타내는 현상으로 보입니다. 

 

 

(12c 초중반의 헝가리 기사. 원뿔형 조립식 투구와 팔까지 오는 사슬갑옷등, 전체적으로 비잔티움 기병과 유사한 모습을 보입니다)

 

 

(1250년대 이후의 헝가리 기사. 투구의 양식이나 초기형 코트 오브 플레이트 등 전체적으로 독일식 무장의 영향이 커졌습니다. 사슬 갑옷이 길어져 손 끝까지 감싸는 것, 다리를 감싸는 쇼셰의 등장 등 무장에서 강력한 서구권의 영향이 보입니다. 당연히 무장도 훨씬 무거워졌습니다.)

 

몽골군이 야전에서 승리하더라도 이러한 배후 요새들은 상대의 격멸을 방해할 것이고, 당연히 기동에도 제약을 미칠 겁니다(서유럽의 요새들은 대개 적의 보급로와 연락선을 차단할 수 있는 곳에 건설되어 있습니다. 서유럽은 전술 수준에 비해 훨씬 섬세한 전략을 구사했죠) 물론 몽골군이 금과 코라즘을 공격하면서 탁월한 공성수준을 쌓았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요새 공격 자체가 적잖은 병력 손실을 강요하는 일입니다. 당시에는 보다 발전된 형태의 투석기인 트레뷰셋이 쓰이지도 않았고, 설사 쓰였다고 할지라도 트레뷰셋이 성곽 자체의 방어막을 무력화 시킨 경우는 동서양을 통틀어 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성과는 대포가 나오기를 기다려야 합니다. 실제로 벨라 4세가 모히 전투 이후 서구 영향력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전술과 훈련을 재정비하고, 헝가리 곳곳에 돌로 만든 요새를 증축한 결과, 1284-85년에 걸친 몽골의 헝가리 공격은 예전에 비하면 훨씬 보잘것없는 성과만 얻고 끝나고 맙니다. 노가이가 이끈 부대는 트란실바니아를 성공적으로 유린했지만 탈라부가가 이끈 북부 헝가리를 향한 공세는 눈 때문에 카르파티아에서 막힌 뒤, 페스트에서 라디슬라우 4세가 이끄는 국왕군에게 격파당한 뒤, 되돌아가는 길에 Sz?kely인들의 매복에 걸려 패배합니다. 이듬해의 공세도 큰 피해를 못주고 격퇴되고 맙니다. 

 

 

 헝가리의 상황에서 볼 때, 설사 바투의 본대라 할지라도 서유럽을 휩쓸만한 전력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즉, 배후에서 보급을 받아야죠. 하지만 위에서 언급했다시피, 몽골군이 서유럽까지 돌진해 온다면 배후도 안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너무 깊숙이 들어온 상황일겁니다. 보급이든 병력 보충이든 애로사항이 클 것이고 이 상황에서 몽골군이 제 2, 제 3의 모히 전투를 감당해내야 합니다. 

 

 

지속적인 원정을 위해서는 몽골군도 어느 선에서 물러날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바투가 실제로 물러나 킵자크 칸국을 세운 뒤에 어느 정도 세력을 펼쳤나요? 이들은 러시아의 반란을 진압하고, 헝가리와 폴란드에 대해 지속적인 공세를 펼치기는 했지만 결국엔 서유럽에 대한 진출은 펼치지 않았습니다. 물론 동유럽과 서아시아를 향한 몽골의 공세는 강력하게 펼쳐졌지만 예전같은 폭발력은 발휘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도 이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통치체제를 갖춰야했고, 따라서 처음 왔을 때와 같은 주변세력에 대한 전력을 다한 공세는 펼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혹자는 서유럽의 분리를 이용하여 몽골군이 전황을 유리하게 이끌 수 있다고 봅니다. 물론 맞는 말이고, 위협이 코 앞까지 왔는데도 서유럽은 별다른 통합의 모습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미 서유럽은 십자군을 일으킨 경력이 있습니다. 지휘권 내부에 알력이 있었지만 전혀 다른 국가에서 온 군대가 동일한 목적 하에서 하나의 군대로서 통합되어 원정을 펼친 경험이 있습니다. 150년 뒤의 영국과 프랑스는 백년 전쟁 와중이었음에도 투르크의 위협에 대항하여 니코폴리스 십자군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적어도 샤를마뉴 이래에 지속적으로 통합성을 유지하며 세력을 넓혀왔던 유럽이라는 개념을 무시하기에는 그 시간과 통합력이 지나치게 큽니다. 그 중 상당한 요인은 종교일 수도 있습니다. 종교적 관용을 베푸는 것은 어떨까? 그렇다면 가장 큰 문제가 되는 쪽은 교황이겠지요. 설령 종교적인 관용을 베풀더라도 교황이 몽골에게 ‘복종’하는 모습이 되는 것은 ‘신의 절대성’을 해치는 아주 좋은 표본입니다. 군주들이야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교황이 자신의 권위와 위력에 커다란 해를 끼칠 상황을 쉽게 승낙하기란 어렵지요. 더군다나 종교적 관용이 있더라도 몽골의 주요 목적 중 하나가 약탈임을 무시하면 안 됩니다. 봉건제의 약점을 노리더라도 자기 영지가 약탈당할 위협에 노출되어있는데 몽골군에게 굴복하기란 어렵겠지요.

이상의 점으로 몽골의 서유럽 공격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을 정리해보았습니다.

 

 

물론 몇 번씩 말하지만, 이것이 몽골의 군사적 위력을 무시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이미 몽골은 모히와 리그니츠 전투에서 그들의 전력을 여실히 보여줬습니다. 하지만 보급이 어려운 상황에서 전투가 쌓이고 쌓여 피해가 누적되는 상황에서도 서유럽 정복이 가능할지의 여부에는 매우 부정적입니다. 남송과 금에 대한 것처럼 몽골의 지속적인 공세와 보급이 가능한 지역, 그리고 전력이 대부분 투입될 수 있는 상황이라면 모를까, 적어도 바투의 군대만으로 서유럽까지 붕괴시킬 수 있는지의 여부는 개인적으로는 상당히 불투명하다고 보입니다. 뭐, 굳이 의미없는 단순 비교를 하자면 아인잘루트 전투에서 몽골군이 격파되었는데, 이미 이집트 군에 비해 전투력이 처지지 않음을 증명해 보인 유럽군이라고 굳이 몽골군을 격파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고 볼 수 도 있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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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09.08.21 23:59

    첫댓글 당시의 러시아는 우리가 생각하는 통일 러시아가 아니고, 여러개의 공국으로 나뉜 상태였습니다..키에프공국, 모스크바공국 등등 ,,,, 이반대제 시절에 그나마 유럽지역의 러시아가 제 모습을 갖춘 것이지요,

  • 쉽게 정벌하지는 못했겠지만 서유럽이 국가공동체로서의 대항을 하지 않는다면 가능할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몽골의 원정의 특징을 살펴보면 기동력에 있어 거의 상상이상의 움직임을 보여준다는것과 '점령'보다는 '학살'에 의미를 두는게 특징이겠죠 그리고 또 하나의 특징은 현지에서 병력조달(그중 상당수는 몸빵용 비무장 민간인 부대)을 해냅니다 국가vs국가 대결으로 전개가 된다면 병력충원이 어려운 몽골(정확히는 바투를 중심으로 한 군대)의 부대가 밀릴 가능성이 크겠지만 특유의 기동성을 살려 국지전 양상을 전개하는데 도가 튼 몽골의 특징을 기억해본다면 전 가능쪽에 무게를 두고 싶네요

  • 또 하나의 특징은 몽골의 전투양상인데 몽골군은 전투를 할때 마치 동물을 사냥하는것처럼 상대의 힘을 최대한 빼놓고 근접전보다는 원거리에서 전투를 치르는 경향이 아주 큽니다 그렇기에 거듭된 전투를 거쳐도 병력손실은 적은 편이라고 봐야겠죠 단, 문제는 기병대의 핵심인 말인데, 당시 몽골의 군대가 말을 한필만 이끄는게 아니라 여러마리를 조달해야 했을테고(실제로도 말은 여러필이 있었다고 합니다 말은 전투적인 면을 제외하고 비상식량으로서의 기능도 했고요) 그런면에 있어서는 보급이 불가능한 상황과 계절적 요소를 감안하면 큰 어려움이 있었겠네요

  • 09.08.22 00:19

    1은 중국에서부터 인도와 몇몇 동남아시아를 제외하고 동유럽까지 육박한 몽골군이 병참때문에 동유럽에서 서유럽정복에 실패할정도라고는 안봅니다. 동유럽에서 서유럽까지의 거리는 정말 짧습니다. 하다못해 알프스산맥때문에 힘들다하여도 남유럽정도는 가볍게 정복했으리라봅니다.

  • 09.08.22 00:32

    2.비잔틴제국이 코앞에까지 왔는데도 헝가리에 특별한 도움을 주거나 하지않는걸로볼떄는 매우 힘들었을꺼라고 생각됩니다. 더군다나 유럽은 군사를 모으는 시스템이 국가별로 모았다기보다는 귀족들중심으로 자신의 사병이나 농노를 이용하는시스템이였기때문에 오히려 전투력과 지휘시스템에 엉망인게 뻔했습니다. 그리고 공성전으로 버틴다는 이야기가 나왔는데 사실 유럽의 공성시스템은 그렇게 장기간 버틸수없는 시스템입니다.

  • 09.08.22 00:37

    중세유럽은 공성전에 매우 약했습니다. 즉 공성전수비는 쓸만지만 공격은 매우 약했습니다.(십자군원정때 공성전승리는 역사학자도 어이없어하는 공성전입니다. 수비가 최악이였다고 합니다.) 특이한게 일정한 날짜를 정해놓고 그기간내에 정복을 못하면 철수하는 이상한 규약이 있었고 승패는 거의 식량으로 버티냐 못버티냐싸움이였다고합니다. 중국에공성전에 익숙해져있는 몽골이라면 서양에서는 충격적으로 강할 공성전공격일꺼라고 보입니다.

  • 09.08.22 00:53

    유럽인들이 채택하고있던 지도체제가 봉건체제인건 맞습니다. 하지만 간과하고 있는것은..그들은 반기독교 세력에는 적절한 응집력을 보였다는 거죠. 몽고가 침략하기 이전부터 유럽인들은 기독교라는 이름아래 자신들과 뜻을 달리하는 자들에대하여 응집하여 물리치고 나아가 점령까지 한 십자군의 전례가 있습니다.. 유럽세력들은 최초 몽고인들이 등장했을때는 자신들의 적을 물리쳐주는 동방의 기독교 국이라 믿어 아군이라 생각햇었습니다. 실제로 몽고는 종교의 자유국가라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이있었죠(카톨릭에서 이단이라 칭하는 종파가 종교재판을 피해서 동쪽으로 와서 전수 했었던)

  • 09.08.22 00:58

    그래서 유럽세력은 몽고를 아군이라 믿었기에 동부 유럽끝자락에 있는 나라들은 쉽게 정복된감도 없잖아 있었습니다. 하지만 몽고의 군세가 대단한건 맞는말이고 몽고 군세는 이미 중국이라는 광대한 평야지대와 늪지 산악지대로 이루어진 그리고 유럽보다 요새화가 더 잘되있던 국가를 멸망시켰죠. (물론 금나라와 남송으로 갈라져 아주 강력한 상태는 아니었지만. 금나라의 경우 절대 유럽연합보단 약하진 않을 세력입니다.) 아마도 바투의 원정대만으로는 쉽지는 않았겠지만, 병참선을 늘려서 중국본토에서도 일정량의 병력을 늘렷다면 유럽 전역을 정복했을 것이라 생각되네요.

  • 09.08.22 01:31

    서유럽이 관광을 당하느냐 아니냐는 ok. 서유럽이 몽골제국의 일원으로 편입되느냐 아니냐는 no. 리그니츠 대전은 사실상 유럽으로 가는 관문이 열린 것을 의미하고, 몽골은 마음만 먹었으면 신성로마제국을 털을 수 있었습니다. 본문의 가정자체가 기우는 것이 바투는 증원이 없고 서유럽은 현지군이라는 건데, 병참이 가벼운 편에 속했던 몽골은 증원파병과 공성무기 조달만 되면 얼마든 서유럽은 물론이고 이슬람도 깡그리 뭉갤만한 무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다만 오고타이칸 사후부터 분할통치가 정착되고 내전이 통상화되 대외원정을 할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제국이 더 확장하지 못한 것입니다.

  • 09.08.22 01:42

    그리고 중세시대에 몇십만씩 군대를 동원한다는 것은 기실 일반 농노들에게 곡괭이짚고 참전하라는 이야기입니다. 중세부터 유럽은 양적우위보다 질적우위를 점하는 쪽으로 갔습니다. 중장갑을 한 기사하나가 탄생하기 위해서는 재력과 연습량이 필요했기 때문에 아무리 대국이라도 기사를 십수만명씩 보유한다는 건 불가능합니다. 3차 십자군에 프리드리히 1세가 30만명을 일으켜 비잔틴을 거쳐 아시아로 건너갔다고 하는데, 그 인원들이 죄 기사이진 않습니다. 그에 비해 몽골은 전원이 순수기병이었죠. 기동성면에서 서유럽을 휩쓸고 다니면서 초토화하려고 했다면 그렇게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고구려는 산 때문에 기병을 못키웠나요.

  • 09.08.22 03:33

    고구려의 경우는 좀 틀리지 않나요 ; 고구려에는 요동반도의 만주벌판이라는 지형이 있었는데 아무래도 기병이 발달하기 편했겠죠.. 뭐 어쩃든 몽고인 자체가 어려서부터 전쟁의 기술 + 저장식품을 주식량으로 하고 유목민이라 말이 넘쳐났기때문에 기본 병기 같은건 병참선 연결하는데 힘들지 않았을겁니다. 어쩃든 보병이든 기병이든 총이나 대포병기와 함선이 강해지기 전까지 유럽의 전투력은 동양의 전투력에 못믿쳣던건 거의 사실이죠. 정화의 원정때만 해도 정화가 맘먹고 조금만 올라갔어도 유럽의 역사가 바꼇다고 예상들 하니 말이죠..

  • 09.08.22 11:18

    만주벌판이 문제가 아니라 가는곳마다 이동경로에 지뢰처럼 널린 게 산맥이었을텐데, 고구려는 광개토대왕시절에도 그렇고 남북으로 자주 왔다갔다 했죠. 그리스가 구릉지대이고 산이 많아 기병이 돌아다니기 어렵다고 한 부분에 대한 반박입니다. 말도 산을 탑니다. 일본에서 기마전술을(이동용이라고 하지만) 주로 쓴 다케다 신겐은 영지자체가 다 산이었고요.

  • 09.08.22 04:09

    간만에 재밌게 잘 읽엇네요,ㅎ 기병과 활쏘기에 능했던 몽고는 정복전쟁이 뛰어났지만 문화라는 측면에서 정복한 지역을 동화를 못시켰기에 결국 정복전쟁은 실패했다가 정설아닌가요? 그리고 지금 토론들 하시는 IF는 워낙 변수가 많아서, 뭐 사실상 답이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재밌네요. 킹덤오브헤븐이나 몽골같은 영화 추천해주실만한거 없나요?

  • 그런데 초기 몽골, 즉 징기스칸으로 시작해서 오고타이에 이어지는 원정의 대부분은 점령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 모습이 많이 목격됩니다 징기스칸의 이슬람 원정이나 금나라 전투를 살펴보면 점령지에 대해서는 가히 무차별적인 학살이 주로 이루어지죠 기술자나 종교인 등등의 특정 몇명에 약 10% 정도의 인구를 남겨두고 남은 인원은 모두 학살 내지는, 다음전투에 몸빵용으로 밀어붙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점령을 통한 문화적 점령은 처음부터 몽골이 내세우던 기본 방향이 아니었고 문화적 점령을 시도하게 된건 사실 쿠빌라이(그 자신이 중국문명에 점령된) 였죠

  • 그런 측면에서 몽골의 정복전쟁이 실패라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몽골은 종교에 대해서도 아주 관대한 측면이 있었고 실패했다고 보기에는 문화적인 점령은 시도하지를 않았죠 오히려 몽골인들 그 자신이 다른 문화권의 여러가지 기술들을 끌어다가 자기들의 생활이건 전쟁이건 활용하는데 있어 아주 유연한 모습을 보여주는 사례가 많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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