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여성시대 치르치르 미치르
죽은 세계에서 살아가기(8)
-입원-
죽은 세계에서 살아가는 건 생각보다 꽤 고된 일이다. 있어 보이는 척, 살 만하다고 구구절절 적어내렸지만 사실 너무 피곤하고, 지치고, 그냥 콱 죽어버리는 게 더 편한 건 아닐까, 하고 생각할 때도 있다. 그래도 이렇게 꾸역꾸역 살고있는 건 내가 (아마도) 마지막 인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다.
혹시 과거의 공룡 복원도를 본 적이 있을지 모르겠다. 지금에 와서는 새로운 복원도가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과거에는 그 말도 안되는 짧은 앞다리가 정설이었다. 그것도 몇백년 동안이나! 이미 공룡이 멸종해버리고 그 후에 한참이나 지나서 인류가 나타났기 때문에 그 말도 안되는 복원도가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직접 본 적이 없으니까.
나 혼자만이 작게 가지고 있는 알 수 없는 의무감은 여기서 기인한다.
그러니까, 이런 말이다. 아마도 다음 세대의 주인일 것들에게 인간의 원래 모습을 최대한 노출해, 말도 안되는 ‘인간 복원도’가 나오는 일은 없게 하자고. 그냥. 나중에 아주 먼 미래에 ‘이게 인간이란다!’하고 점액질로 뒤덮인 모습이나 깃털이 나 있는 모습과 같은 복원도가 나오면 싫을 것 같아서.
그래서 작고 연약한 인간인 나는 나의 세계가 죽어버린 지금도 꿋꿋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삶이란 언제나 그렇듯 녹록지 않은 것이어서, 의식주 문제를 해결하기도 벅찬 나에게 드디어 올 것이 와버리고 말았다.
감기에 걸렸다.
제대로 된 의료시설은커녕 제대로 된 약을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세계에서 아프다는 건 심각한 문제다. 어디에 걸려 찢긴 상처만으로 죽을 수 있는 게 사람이란 말이다. 그런데 감기라니. 콧물이 계속 나는 것도, 기침이 계속 나오는 것도 불편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열이 나는 것이었다.
머리가 너무 지끈거린다.
아프다고 길바닥에 주저앉아 쉴 순 없으니 부지런히 발을 놀렸다. 열이 떨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머리가 팽글 도는 느낌이다. 아니, 도는 건 눈앞인가.
건물을 찾아야 한다. 아무튼 몸을 숨기고, 비바람을 막을, 그런 공간을 찾아서, 찾은 다음에,
그렇게 쉬어서 뭘 어쩌자는거지.
아. 사람이 보고싶다. 그게 누구든.
“눈을 뜨니 보인 건 낯선 하얀 천장이었다.”
크. 이 문장 언젠가 한번쯤은 말해보고 싶었는데! 중2때부터 간직해온 작은 꿈이 이뤄지는 순간이었다.
...근데 왜 천장이 보이지. 그러고보니 며칠동안 지독하게 욱신거렸던 머리가 더이상 아프지 않았다. 킁, 하고 내쉬어본 숨은 편안했다. 분명 길바닥에서 쓰러졌던 것 같은데.
고개를 돌려 옆을 바라보자 팔에 꼽힌 주사 바늘이 보였다. 고개를 들자 병에 담긴 녹색 액체가 튜브를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놀라서 몸을 일으키니 삐-하는 소리와 함께 주변이 파란색으로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뭐야..? 뭔데?!
타닥, 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더니 이내 내 몸이 뒤로 다시 눕혀졌다. 그러자 반짝거리는 불도, 시끄러운 소리도 사라졌다. 나는 내 몸을 누른 발을 보고 진정하려고 일단 애는 써봤다. 아무리 봐도 이거 앞발이지...? 눈앞에 아가리가 들이밀어졌다. 노란색 동공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깜빡, 하고 눈이 좌우로 닫혔다가 열렸다. 하하하. 생긴 건 꼭 호랑이처럼 생겨가지고!
그다음 기억은 없다. 기절했다는 뜻이다.
정신을 차린 나는 냉철하게 상황을 분석했다. 그 냉철해지는 과정에서 한번 더 기절하고, 두 번정도 울었지만....아무튼 지금은 괜찮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입원한 상태였다. 길가에 버려진 유기물인 줄 알고 집으로 가져가려던 병원 간호사가 내가 숨을 쉬고 있는 걸 깨닫고 병원에 입원시켜 준 것이었다. 그리고 그 간호사가 호랑이를 닮은...동공은 파충류지만...앞발은 호랑이고 뒷발은 산양 발이지만...아무튼....그분이었다.
내가 걸린 병은 너무 지독한 바이러스라 다른 환자들에게 피해가 갈 수 있으니 격리실에 있어야 한다는 말에 아무것도 없는 격리실에서 며칠이나 노랗고 녹색이고 빨간 약들을 주사받고서야 일반실로 옮길 수 있었다. 일반실에는 나 말고도 다른 환자들도 입원해 있었다.
....맞겠지, 환자들?
뭘 어떻게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먼지덩어리가 침대에 묶여있었다. 그 먼지덩어리는 가끔 갈색 분진을 토하기도 했는데, 그때마다 번쩍이는 빛이 먼지덩어리 주위를 맴돌았다. 그 옆옆에는 형광분홍색 액체를 뚝뚝 흘리는 무언가가 침대에 널부러져 있었다. 뚝, 하는 소리와 함께 점액질이 바닥으로 떨어지면 치이익, 하고 바닥이 타들어갔다. 바닥에 커다란 구멍이 뚫릴만할 때쯤이면 성인 여성만한 거미가 들어와 바닥을 꿰맸다. 그 시간이 회진 시간이나 다름없었는데, 거미는 바닥을 꿰맨 후에 병상 하나 하나를 살폈다. 물론 그 병상에는 나도 포함이었다.
거미는 겹눈을 가지고 있었다. 내 생물학 지식이 와장창 박살나는 기분이었지만, 이 세계에서 내 지식이 뭐 얼마나 통할까. 그보다도 크기가 크기인지라, 그 겹눈 하나하나가 나에게 보인다는 게 문제였다. 그 육각형의 눈 하나하나에 내가 비추는 모습은 썩 유쾌하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털이 너무 자세히 보였다. 앞발로 내 체온을 재려 할 때는 눈을 꼭 감고 이건 사람 솜털이랑 다를 게 없다는 말을 속으로 한 백번은 한 것 같다.
사람 털은 이렇게 뻣뻣하지 않지만 아무튼.....!!!!
의사는 도통 뭐가 뭔지 모를 생물이었다. 해삼...? 산호...? 여튼 육지에서 살 것 같지는 않은 외양이었는데, 얘가 의사라고 생각한 건 항상 혼자 몸(인지 뭔지. 어디까지가 몸이고 얼굴인진 모르겠지만)에 뭔갈 두르고 나타나기 때문이다. 한번은 어디서 가져왔는지 크리스마스 트리를 장식할 법한 꼬마전구를 몸에 칭칭 두르고 나타났는데, 전구가 현란하게 반짝거려서 눈부셨다. 몸 어디에 전류가 흐르나. 어떻게 전구가 반짝거리지...?
그렇게 입원한 지 며칠이나 흘렀을까.
감기는 진작에 나은 것 같은데 내 퇴원은 미뤄지고 있었다. 몇 번이나 병원 밖으로의 탈출을 시도해봤지만, 매번 다시 잡혀 들어왔다.
식사를 제대로 할 수 없는 날들이 이어졌다. 그야, 누구든 정체 모를 연기가 피어오르는 음식에는 선뜻 손이 가지는 않지 않을까. 아마도 수액일, 내 팔에 꽂히는 약물을 거부해봐도 먹히지 않았다. 약물의 색이 점점 진해졌다.
바이러스는 사라졌지만 머리에 이상이 있다는 그네들의 말을 엿들었다. 너네가 뭘 아는데. 그날 나는 창문을 깨고 뛰어내렸다. 거미가 내려와 나를 칭칭 감아올렸다.
나는 거미줄에 묶인 채 알 수 없는 치료를 계속해서 받았다. 약이 들어온다.
아, 잠이 오는 것도 같다.
깜빡, 하고 시야가 점멸했다 밝아진다.
다시 한 번 깜빡,
깜빡.
첫댓글 헉 머야 실험당하는건가...
헐 뭐야 실험당하는거야? 하루빨리 탈출하길
인간아 죽지마
허걱.. 이대로 잡혀서 게임오바인가ㅜ
안돼 ㅠㅠ 인간아 ㅠㅠㅠ 탈출하자 ㅠㅠ
안돼 마지막인류
의사간호사 쌤들도 심란하지않을까 환자가 밥을 안먹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