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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사지 서탑에서 나온 금동제사리외호
며칠 동안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리다 기어이 봄비까지 내렸다. 오랫동안 벼르고 벼르던 답사길이라 걱정이었다. 그래도 두근대는 가슴을 겨우 진정시키며 잠이 들었는데 눈을 떠 보니 새벽 4시20분이었다. 12시를 훨씬 넘겨 잠자리에 들었으니 겨우 4시간 남짓 잤을 뿐이었다. 어린 시절 소풍가기 전날 설레는 마음으로 잠 못 이루던 기억, 혹여 비나 내리지 않을까 문밖에 귀를 기울이던 추억이 되살아나는 신새벽이었다.
일찍 출발하리라던 다짐은 그뿐이었고,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 그러다 봇짐을 꾸리고 해가 중천에 떠서야 출발을 했다. 걱정과 달리 그동안 밀렸던 햇살을 한꺼번에 보답하기라도 하듯 하늘은 맑아있고, 햇살은 따스했다. 그러나 간간히 불어오는 바람에 찬 기운이 여전히 묻어있다. 내비를 장만하고 처음 가는 답사라 꼬진 지도 들고 빙글빙글 돌아가며 길 찾아 헤매지 않아도 될 것이지만 과연 경상도 내비女(?)가 전라도 촌길까지 다 꿰고 있을까? 걱정도 있었지만 일단 현재의 기술의 이기를 믿어보기로 했다.
진안을 지나자 말의 귀를 닮았다는 마이산이 파란 하늘에 두 귀를 쫑긋 세우고 반긴다. 고대하던 답사여행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몇 해 전이던가? 암마이봉엔 아무리 가뭄이 들어도 마르지 않는다는 그곳에 샘물을 마시면 아들을 점지해 준다는 전설을 믿고 줄지어 올랐으나 막상 오르고 나니 발 디딜 틈 없어 성질 급한 이 몸은 곧바로 돌아서 내려왔었다. 그 산이 선 듯 내 코앞으로 다가오다 점점 뒤를 돌아 사라진다.
잠시 옛 기억을 더듬자면 동봉은 수마이산, 서봉은 암마이산 이라 하여 남여 양신兩神으로 믿어오기도 하며, 조선시대 처사 이갑용이 목성에 해당되어 목성은 금(金)과는 상극이라 하여 金의 기운을 묶어 두자는 뜻에서 속금산束金山이라고도 했다. 그 넘어 은수사란 절이 있으며, 이갑용이 공중부양해서 올렸다는 돌탑군락이 유명세를 타고 있는 곳이다. 바로 제갈공명의 팔진도법을 응용해서 만들었으며 천지탑, 일광탑, 월광탑, 궁탑, 용탑등 음양의 이치와 상생과 오행의 원리에 따라 배치했다고 한다. 삼국지의 제갈량이 8진도법을 펼쳐서 육손을 당황하게 만들었으며 길을 찾지 못하고 헤매자 죽은 제갈량의 장인인 황승언이 나타나 빠져나왔다는 그 8진도법. 그래서 폭풍우가 몰아쳐도 약간 흔들릴 뿐 무탈하게 서있다 하니 신기할 따름이다.
전라도 땅, 이름 하여 백제의 땅이며, 현재에는 민주당 땅이다. 역사는 승자의 몫이라지만 여전히 그 맥을 면면히 이어오고 있는 땅을 편한 길을 찾아 든다. 이루지 못한 백제의 꿈이라던가? 그만큼 그 속에는 전설이 살아 숨쉬고, 이루지 못한 꿈에는 한 많은 사연이 숨어있게 마련이다. 지난날의 백제의 흔적과 민초들의 신앙인 벅수, 즉 돌장승과 한 말 농민항쟁의 현장들을 찾아가는 길이다. 사연이 이러하니 마냥 즐거워 할 수만은 없는 답사길이었으며, 옛날을 찾아가는 즐거움 속에 농민들의 피맺힌 절규가 함께 접목되니 동선을 그리고 고정된 테마를 정해 답사할 수 없음이 아쉽다. 과연 내 마음이 왔다 갔다 할 수 있을지 그것이 걱정이었다.
익산, 전라도의 가장 위쪽에 위치하며 충청도 부여와 논산을 금강줄기를 경계로 하는 땅이다. 드넓은 평야가 기름져 세종 때 만든 인공저수지 벽골제가 있는 김제 다음으로 소출이 많은 이곳이며, 서동과 선화공주의 아름다운 사랑이 설레는 곳이며, 우리나라 목탑의 유형을 띤 최초의 석탑이 있는 미륵사지가 있는 곳이다. 때문에 부여와 공주를 포함하여 백제문화의 중심지가 되는 곳이기도 하다.
*미륵사지 서탑, 지금은 복원중이라 볼 수 없다.
미륵사터
이곳은 백제 전성기인 무왕 때 지은 사찰이다. 처음 특이한 가람의 형태와 그 스케일이 터만 바라보았지만 장중한 느낌을 갖는다. 동석탑 가운데 목탑터가 있고, 다시 서석탑이 있으며 그 뒤로 각각의 금당터가 있다. 각각의 영역에 경계선 회랑이 있어 가만히 보면 신라에 처음 불교가 들어왔을 때 삼금당 일탑의 형식이나(신라는 감은사 이후 일 금당 쌍 탑의 양식이 고정화 되었다) 고구려의 회탑식의 양식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백제 전통적 양식과 크게 변한 것이 없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전체 가람의 영역에 회랑을 두었고, 서탑 영역과 중앙의 목탑영역 그리고 동석탑 영역사이 회랑을 둘렀을 뿐이다. 그 뒤로 금당과 요사채를 두었으니 각각의 독립된 영역을 가지고 있다. 다만 전통적 양식 셋을 하나로 합쳐진 것뿐이며 하나씩 나누어 보면 특이한 형태는 아닌 것이다. 미륵삼존의 상징적 의미를 부여할 수도 있지만 그렇다 해도 권력의 힘에 접목되어 변화를 준 것이 멋을 만들어 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탑 앞으로 넉넉한 공간을 두고 동과 서에 같은 모양의 당간지주가 우뚝 솟아있다. 약간의 폭력흔적 말고는 단정하고 깔끔한 모습이다. 지대석 위에 사각의 기단을 올리고 그 위로 지주의 바깥 부분을 군더덕 없이 깔끔한 선으로 돋을새김 해 놓았다. 측면에서 바라보면 돌기둥 가운데 다시 세로로 한 줄의 홈을 돋을새김 해 놓아 바라보는 시선을 직선으로 잡아매는 혜안이 있다. 당간지주의 상륜부를 살짝 꺾어 가운데로 시선을 모이게 하였으며, 당을 고정시키기 위한 지주 가운데 별도의 부재로 홈을 파놓았다. 당간을 세워 고정시키는 공구가 지주 안쪽 아래위로 두 개씩 나있으며. 기단에는 안상眼象이 음각되어 약간의 멋과 믿음의 상징을 조각해 놓았다.
각각의 탑 뒤로 움푹 파여진 곳에 토단이 담장처럼 되어있는 금당터가 둘러 쌓여있다. 그동안 참았던 궁금증을 애써 누르며 목탑터를 향한다. 동서 석탑 가운데 목탑터가 당시의 모습을 상상해 보기에 충분하다. 안내문에 의하면 네 면의 중앙에 계단석과 면석, 갑석이 출토되었으며, 수막새, 기와를 고정시키는 쇠못 등이 출토되었다고 되어있다. 또한 목탑이 소실되면서 그대로 폭삭 내려앉았다는 추정이다. 안내문을 읽으면서 얼마 전 화마에 내려앉던 숭례문이 떠올라 가슴을 쓸어내린다.
이곳 미륵사는 삼국유사의 기록대로 연못을 메워서 조성했다. 목탑지 기단의 면적만큼 연못을 메웠던 흙을 다시 350Cm 파내고 사람머리 크기의 돌을 150Cm 다져 채운 후 그 위해 황갈색 마사토와 점질토를 섞어 3~5Cm두께로 층층이 46단 193Cm를 올렸다고 되어있다.
목탑터에 정리된 주초들을 보면서 기둥의 크기나 굵기를 가늠해 보며, 가운데 좌대위에 미륵의 좌불보다는 우뚝 솟은 미륵입상을 상상한다. 또한 비록 지금의 터는 황량해 보이나 바깥의 기둥과 건물 속 이중 기둥이 견고했을 것, 최소 삼층 까지 통층으로 올렸을 것이며, 그 위로는 상징적 층수를 쌓았을 것이라는 상상을 한다. 온전한 상륜부까지 노반 복발 앙화 보륜 보개 수련 용차 보주 찰주까지 상상하니 하늘 공간이 꽉찬 느낌이다. 인간세상의 소망을 담아 미륵세상이 오기를 기원하는 상징적인 모습을 본다. 화순 쌍봉사 삼층목탑, 속리산 법주사 팔상전을 상상하며 작은 바람에도 흔들리는 풍경소리를 상상한다.
탑의 크기와 금당의 크기를 비교하며 가늠해 보고, 금당터 앞에 깨어진 석등의 받침을 감상한다. 지대석 위에 사각의 받침을 올렸으며 볼륨이 크지도 작지도 않은 전체 비율에 알맞게 여덟 매의 연꽃잎이 가라앉아있다. 금방이라도 살짝 들려질 것 같은 버선코를 닮아 전체의 비율이 아름답다. 마음을 깨끗이 씻어주는 향공양과 월천공덕, 그리고 부처님 세상에 불을 밝히는 석등을 그려본다. 고복, 즉 장구를 세워놓은 모습의 고복(鼓腹)형 석등과, 이형의 쌍사자 석등과 함께 팔각의 정형화 된 석등은 우리나라에서 화려하게 승화된 세 종류의 석등이다. 석등은 네팔이나 중국에 두 개만 전해져 오지만 우리나라에는 280여점이 내려오고 있다. 그 중에서 90%가 불교관계의 것이니 이 땅에서 화려하게 승화된 석재미술품이라 할 수 있다.
*미륵사지 서탑 복원공사
그렇게 화려하게 고려 때 까지 이어오던 사찰이 언제 어떤 연유로 이지경이 되었는지 알 수는 없으나 지금의 후손들이 오랫동안 복원이 한창인데 여전히 건물 속에서 복원을 꿈꾸며 잠들어 있다. 그 옆에 깨끗하게 분칠한 듯 허우대 멀쩡한 동석탑만이 전체의 모습과는 동떨어진 이단자의 모습으로 위용을 자랑한다. 그것을 바라보며 서탑을 상상하나 그림이 잡히지 않는다. 다만 당시 온갖 전쟁과 잡역에 시달렸을 힘없는 백성들의 모습만 잡히니 편율된 마음이라 미술작품 감상하듯 대충 지나치고, 해부된 서탑의 몸속에 들듯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석탑의 부재들이 가지런히 놓여있다. 탑의 장대석과 탱주석의 우람함에 놀라고, 석탑의 터를 내려다보며 정사각의 건물 가운데 각각 계단을 올리는 목탑의 형식을 가늠해 볼 수 있다.
서탑 사리장엄구에서 193자의 사리봉안기 명문이 발견됐단다. 내용인즉 미륵사는 선화공주가 아니라 왕후인 백제 사택적덕沙宅積德의 딸의 발원으로 639년에 완공됐다는 것이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미륵사는 무왕(서동)과 선화부인이 길을 가다 용화산 아래 큰 못에 이르렀을 때 미륵 삼존이 나타났다. 두 사람은 예를 올리고 이후, 선화부인의 간청으로 연못을 매우고 이곳에 절을 세웠다는 전설이 있다. 그러나 이게 어찌 된 일인가?
善化公主主隱 선화 공주니믄(선화공주님은)
他密只嫁良置古 남 그즈지 얼어 두고(남 몰래 시집가 두고)
薯童房乙 맛둥방을(맛둥 서방을)
夜矣卯乙抱遣去如 바매 몰 안고 가다.(밤에 몰래 안고 간다.)
-네이버 사전 검색-
서라벌에 이 노래를 퍼트려 선화공주를 취한 서동은 백제의 왕이 된다. 그리고 당시 백제의 명문가 사택적덕의 딸을 왕비로 맞이한다. 다분히 내 식으로 이야기 하자면 명문가의 후원을 얻어 정권을 안정시키며, 사랑하는 선화공주는 왕후가 아니라 그 한 단계 아래 반열인 부인夫人이 되었다. 비록 적국이지만 한 나라 공주와 백제 명문가의 딸과 힘의 균형도 어느 쪽이든 작게나마 작용했을 것이며, 지아비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던 선화부인의 힘이 더욱 크게 작용했을 것이라는 게 나의 생각이다. 물론 전문가가 아니라 순 아마추어의 시각이지만 가공이든 아니든 국경을 초월한 사랑이야기의 주인공인 선화공주를 중심으로 두고 싶은 여린 욕심이다.
서탑의 명문만으로 지위를 인정하여 사택왕후가 대표선수로 발원문에 올리고, 미륵사 중심사찰인 가운데 목탑이 선화공주의 믿음신앙을 발원하지는 않았을까? 일전에 읽었던 스크랩한 기사를 인용하자면, “미륵을 본존으로 하는 미륵사에 미륵이 없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중략) 때문에 중원中院·중앙탑과 가운데 금당 건립에는 미륵신앙에 돈독한 다른 한 명의 발원자가 선화공주였을 것"이라고 주장한다.(경향신문/ 조경철 박사)
나는 이러한 글을 읽으면 저절로 신이난다. 관중은 대형을 원하기 때문이라는 다분히 저자거리 농이지만 어떻게 결론이 나든 나는 그동안 경계인의 줄타기에 재미를 붙였기 때문이다. 또한 답사도반 선배의 말처럼 ‘모르는 만큼 자유로운 상상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참에 하나만 더 인용하자면 '선화(善花)공주'의 이름인 '선화'를 주목했다. < 삼국유사·탑상 미륵선화미시랑진자사 > 는 "신라 흥륜사 진자(眞慈) 스님이 '화랑으로 화신하여 세상에 나타나게 해달라'고 간청하자 꿈에서 '웅진(熊津)의 미륵선화(彌勒仙花)'를 찾아가라"고 했다. 즉, 선화(善花·仙花)라는 이름은 미륵과 관계가 깊다는 것이다.
삼국유사의 내용을 신뢰하건 아니하건 내가 믿고 싶은 것은 믿고, 나머지는 소설 쓰듯 해 버리는 버릇이 있다. 그렇다고 서동과 선화의 사랑이야기에 무조건 집착하는 것도 아니고, 또한 단순히 서탑의 봉안기에 나온 기록만 가지고 미륵사 창건에 결론을 지을 수만은 미진한 면이 있기 때문이다. 그 기록만을 토대로 보자면 미륵사란 명칭에도 변형을 가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때문에 조경철박사의 의견에 무게를 두고 싶은 욕심이다.
복원 중 섭섭함을 달래고 가라는 듯 서탑 옆에 작은 전시장이 마련되어 있다. 화려하게 세공된 사리 장신구에 감탄을 하고, 봉안기에 나왔다는 명문을 읽어본다. 또한 무지개 빛깔의 사리들을 보면서 마음도 무지개 빛깔이었을까? 시답잖은 생각에 잡히며 당시의 불교문화에 대한 이해와 세공기술, 자고나면 치러야 하는 부역과 목숨을 건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과연 우리들의 민초들은 무었을 생각하며 하루를 났을까. 라는 온갖 상념에 잠긴다. 그래서 미륵사란 절집 이름이 더 가까이 다가오는 까닭이다.
허기진 배를 도시락으로 달래며 쌍릉으로 향한다. 바로 서동, 즉 무왕과 선화부인의 무덤이라 생각되는 곳이다. 가는 길 내내 서동요 티비 드라마의 주인공 모습이 각인되어 아무리 떨쳐버리려 해도 졸졸 떠올라 미치겠다.
익산 쌍릉
익산 쌍릉, 정확한 근거에 의한 것은 아니지만 『신증동국여지승람』의 명문이나, 『고려사』의 기록으로 짐작할 뿐이며, 도굴 후 발굴당시 수습유물이 백제 말기의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미륵사나, 서동의 출생전설이 있는 마룡지가 가까이 있으니 무왕의 능이라는 것에 더욱 힘이 실린다. 대왕묘와 소왕묘, 이름하여 무왕의 묘와 선화부인의 묘이다. 백오십여미터 떨어져 서로를 바라보는 형식이지만 이 또한 도굴 뒤에 자연히 따라오는 발굴이 이루어 졌다. 그놈의 도굴범들 몽땅 모아 일본으로 수출(?)해 버리면 어떨까? 용감무쌍하게 반출된 우리의 문화재를 찾아오지 않을까? 참으로 씰데 없는 생각이다.
햇살은 더욱 맑고, 솔숲을 걷는 발길에 청량한 기운이 감돈다. 한적한 오솔길에 젖무덤 같은 봉분이 오롯이 솟아있다. 답사를 떠나기 전 찾아본 자료에는 석상들과 망주석, 문무인석이 주위에 보였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차라리 단정한 모습에 더 편하게 다가온다.
학습하듯 되집어 보자면 온조가 BC18년경 하남에 나라를 세운 뒤, 8대 고이왕古爾王 때 한강 유역을 통합하고 율령律令을 반포하였다. 13대 근초고왕近肖古王 때 와서 마한馬韓 전역을 통합하여 크게 발전하였다.(참고자료/ 네이버 백과사전)
고대일본의 문화의 전달자요 선구자 역할을 할 만큼 발전하였던 백제는 역대 31왕王으로 이어지면서 660년까지 존속하였다. 그렇게 화려하게 꽃피우던 고대 왕국이 무왕 다음으로 장자인 의자왕대에 와서 멸하고 만다. 역사는 아무리 승자의 몫이라 하지만 그곳에는 교훈도 있을 것이며, 전승되고 계승되어야 할 우리 선조들의 지혜도 담겨 있을 것이다. 다만 현재의 위정자들의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해석하고 선동하는 것을 경계한다.
햇살을 받고 있는 무왕의 능을 돌아 오솔길을 걸어가면 선화부인의 능이 있다. 크기는 무왕의 능보다 조금 작으나 봉분의 곡선이 같은 기울기이다. 나도 모르게 얼레꼴레리 하는 심정으로 서동요를 흥얼거리는 중간 까르륵 넘어가는 아이들 웃음소리가 들린다. 그것은 선화공주의 호통소리로 미천한 놈 나간정신 돌아오게 만드는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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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시 - 백제탑
문효치
몸에는
무한정한 시간들이
둘둘 감겨 있습니다.
댕겨진 불길로 저리 탈 때
호쾌하게 내지르던
소정방의 고함소리도
아비규환의 와중에서
달아나는 백성의 비명소리도
이제는 둘둘 감긴
시간의 현絃위에서
아련한 음율이 되어 퉁겨져 나옵니다.
아무리 큰 아픔이라도
오래오래 묵혀
우리네 장醬처럼 삭히고 삭혀
전혀 다른 새로운 맛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
마감하기가 아쉬워 詩 한편 찾아 올립니다.
감사합니다.
첫댓글 박초시님, 잠깐 들어왔는데...귀한 글 맛나게 읽고 갑니다. 다시 곱씹어 읽겠습니다.
초시님 여행기에도 아련함이 묻어나네요...... 잠시 시공을 초월하여 선화공주를 보는 듯 했습니다....좋은 글 감사합니다.^^
움메~~~ 기죽어~~~~ 가족과 나들이 삼아 가는 하루짜리 답사도 이렇게 방대한 역사의식이 실려 있으니.... 오늘은 미륵사터까지만 따라 가겠습니다.
가족도 아이고, 하루짜리도 아인데...^^*..
운제 댕기 오셨는교?초시햄.....
잘 보았습니다...역사공부에 도움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