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8년 9월 26일 충남 서산 앞바다.
한국 역사상 최초의 미사일 발사 실험은 성공했다.
마침내 한국이 세계 7번째 미사일 보유국이 되는 순간이다.
핵탄두만 개발하면 핵보유국이 된다는 신호탄이었다.
바로 6년 전,
박정희의 비밀계획에 따라 탄생한 지대지 미사일 <백곰>은,
대통령의 자주국방 의지와 국방연구소의 피와 땀과 눈물의 결정체였다.
현장에서 직접 참관한 박정희는 이날 일기에 이렇게 쓴다.
“유도탄 등 무기 개발방침이 수립된 지,
불과 4년 만에 역사적인 시험 발사가 있었다.
이제 대전차 로켓-다연발 로켓-중거리 로켓에 이어,
장거리 유도탄, 까지...
네 종목 모두 성공적이다.
우리 과학자들과 기술진의 노고를, 높이 치하한다,“
박정희의 자주국방을 상징하는, 핵 개발의 전모와 그 비밀 프로젝트의 생사(生死) 과정을 보여주는 책이 나왔다.
박정희 집권 18년 중 16년이나 측근에서 보좌한 심융택(沈瀜澤) 씨는
<백곰, 하늘로 솟아 오르다.>(기파랑 발행)에서
당시 생생한 자료를 바탕으로 국민이 몰랐던[유신 7년] 간의 내막을 입체적으로 보여준다.
이 책은 극비리에 진행된[핵무기 개발] 과 그 종막의 미스테리를 집중 조명한다.
Scene 1: 핵 개발 결심은 이래서 나왔다
1969년 7월 25일.
닉슨 미국 대통령은 <닉슨 독트린>을 발표한다.
요지는, 베트남 군사개입 종료, 아시아의 내란이나 침략에 불개입,
아시아 국가엔 군사원조 대신 경제원조 중심으로 바꾼다, 등이다.
방한한 닉슨은, 박정희에게 <닉슨 독트린>을 설명하고 베트남 철군을 알린다.
1970년 3월.
미국대사는 주한미군 2만 명 감축을 한국에 통보.
이어 8월. 방한한 애그뉴 부통령은 주한미군 5년 내 완전 철수를 공언.
<닉슨 독트린>은 숨 가쁘게 진행됐다.
1971년 3월.
주한미군 7사단 철수 단행.
이때 북한의 핵 개발계획은 상당 수준 진척된 상태.
박정희는 결심한다.
“빠른, 시일 내에 자주국방을 실현해야겠다.
궁극적 해결책은 핵 개발이다.”
Scene 2: 미국의 집요한 반대와 협박
박정희의 계획은 이렇게 진행됐다.
▲ 1971년 11월, 청와대에 제2 경제수석비서관실을 신설,
과학기술처-국방연구소-원자력연구소와 함께 [방위산업 육성정책]을 전담시킨다.
[프랑스 드골 대통령의 핵 개발 정책] 검토, 핵폭탄 개발계획서 작성.
▲ 1972년 10월 유신을 단행, 중화학-핵 개발-새마을사업 집중 추진.
▲ 1974년 10월 한불(韓佛)원자력 협력 협정 체결.
1975년 1월 프랑스 핵연료 제조 장비-기술 도입 계약.
같은 해 4월 프랑스 핵연료 재처리공장 설계-기술용역 계약.
미국은 1974년부터 핵연료 처리 시설 도입을 반대하며,
계약 취소를 강요했다.
“미국의 요구를 거부하면, 모든 분야에서 관계를 단절하겠다.”
최후통첩 협박이었다.
- 이에 대한 박정희의 설명은?
“주한미군 2사단도 철수할 것이니, 우리 핵 개발은 엄포도 아니고 협상용도 아니다.
미군의 핵 보호를 믿을 수 없는 사태를 맞아, 우리가 핵 무장해서, 미국이 내정간섭과 주권 침해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자주 국방력은 핵을 보유할 때 완성될 수 있다.“
그러나 1976년 1월에 프랑스와의 계약 파기 결정이 내려졌다.
Scene 3: [목사] 카터의 대통령 당선, 일방적 철군 발표
1977년.
목사 출신의 이상주의자 카터가
미국 대통령 취임 직후 박정희에 철군 편지를 보냈다.
박정희의 답신.
“우리는 미군이 이 땅에 영원히 주둔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다만 지상군 철수에 대한 보완책을 완성한 후에 철수하기, 바란다.“
카터는,
자신의 선거공약인 주한미군 철수를 4~5년 내 완결하겠다고 기자회견서 확인했다.
또 한국 정부에 대해 이를 [인권 문제]와 연계했다.
미군 철수 계획을 몇 차례 일방적으로 발표했다..
박정희는, 동요하는 여야 정치권과 국민, 들의 불안감에 적극적인 대응 자세를 주문했다.
“국회를 열어서 우리 입장을 당당히 밝히세요.
외무부는,
미국대사에게 4년이니 5년이니 하는 소리 말고
당장 미국의 계획을 밝히라고 요구해요.
인권 문제 운운하는 것은 우리를 얕보고 하는 말 같은데,
구차하게 호소하는 따위 말은 하지 마시오.
보완책은 협의할 수 있지만, 철군은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남에게 의지한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주한미군을 빨리 가라고 할 필요는 없지만,
간다는데, 가지 말라고 애걸할 필요도 없어요.
4~5년 뒤, 우리 국력이 계획대로 강대해지면
나가라고 해도 안 나가고 주둔하겠다고 할, 것입니다.
이 위기를
자주 자립의 계기로 삼고 전화위복의 전기로 삼아야, 떳떳하고 당당합니다.“
1978년.
3단계 철군 계획, 전폭기 추가 배치, 한미연합사령부 새로 창설이 한미간에 합의됐다.
▲ 방한한 카터 부부와 포즈를 취한 박정희. 퍼스트레이디 역할은 영애 박근혜가 대신했다.
Scene 4: 박정희와 카터 [운명의 정상 회담]
1979년 6월 30일 오전.
청와대 소 접견실에서 열린 한미 정상과 관계자들의 전체 회의.
박정희는,
먼저 환영 인사를 하자마자 곧바로 미군 철수에 관한 소신을 털어놓았다.
“주한미군의 영구주둔은 생각지도 않는다.
북한의 전쟁 도발시 미군의 참전을 기대하지도 않는다.
우리 힘으로 북한의 공격을 막을 수 있다.
우리의 목표는 전쟁에서의 승리가 아니라
전쟁 자체를 예방, 하자는데, 있다.
주한미군의 필요성은 바로 전쟁, 억지 효과 때문이다.
그렇다고 무기한 있어 달라는 것이 아니다.
우리 국군 전력 증강 5개년계획이 완료되는 시점까지 만이라도
미군 2사단 주력부대는 남아있기를 바란다.“
무려 45분간 철군 반대 [강의]를 마치자,
카터는 일언반구도 않고 얼굴만 찌프 렸다.
훗날 밴스 국무장관은 회고록에서
“카터 대통령이 화를 참아내고 있음을 느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고 기록했다.
카터는,
청와대를 나서자마자 밴스에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고 5분이나 화풀이를, 했다.
정동에 있는 미 대사관저에 도착해서도 글라이스틴 대사를 힐책하며
“이런 망신을 주려고 나를 불렀느냐?”고 분을 삭이지 못했다.
이날 오후 단독회담에서 카터는 [긴급조치 9호]를 해제하라며 인권 문제를 거론했다.
Scene 5: 김재규는 왜 박정희를 쏘았는가?
“김재규는 미국의, 하수인이다”
“박정희는 미국 몰래 핵 개발을 강행하다가 당했다”“ 미 8군 장성들이 한국 장성들에게 박정희 이후의 문제를 논의했다.” 등등
10.26, 사태 이후 서울에서 나돌던 소문의 진상은 과연 무엇인가.
과연 김재규는,
특별한 동기도 없이 살의도 없이 [엉겹결]에 대통령을 시해했을까?
당시 한국군부와 경찰 등 정보기관에서는
박정희를 제거하기 위해 미국이 쿠데타를 추진하고 있고,
중앙정보부와 김재규가 관련되어있다는 근거를, 갖고 있었다고 한다.
미국의 언론들도,
국무성이 “한국에 쿠데타가 났다,” 고 발표하고
"미국은 관련 없다," 고 강조하자,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미국 관리들의 [올 것이 왔다]는 듯한 담담한 태도에서
쿠데타 계획을 사전에 알고 있었던 것 같다고 보도했다.
특히 미국 CIA 요원이, 한국 정보부 간부에게 [집권자 교체론]을 거론했으며,
주한 미국대사 글라이스틴이, 김재규를 자주 접촉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사주] 또는 [교사] 가능성이 제기되기도 했다.
더구나 김재규가,
사건 직후 각료들과 군부 요인들이 모인 육군본부 지하 벙커에서
“나의 뒤에는 미국이 있다,”고 주장한 대목이다.
또한 7년 후 글라이스틴이 <인권외교>라는 책자에 기고한 경험담이 주목을, 끌었다.
“쿠데타 계획은 철회되었으나
인권에 대한 모든 조치는
박 대통령의 죽음과 일련의 불행한 사태를 야기, 시켰다.”
* 저자의 주장
박근혜 정부가 들어선 후,
우리도 북한 핵에 대응하는 핵 개발을, 하자는 주장과
반대하는 주장이 엇갈리고 있다.
핵 개발과 별개로
전두환-노태우 정부가,
미국의 압력에 굴복해 포기한 [핵 주권]은 반드시 원상회복해야 한다는 것이
절대다수 국민의 공감대이다.
미국은,
일본과 유럽 동맹국들 에게는 원자력 발전과 핵 개발에 거의 제한 없이 용인하면서
왜 유독 한국만 손발을 묶어놓고 차별 대우, 하는가?
만기가 지난 원자력협정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개정할 수 없다면, 폐기가 마땅하다.
도서출판 <기파랑> 발행
[출처] 박정희의 [핵 개발] 비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