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진명 시 모음 45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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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겨울
성진명
발가벗은 감나무엔
먹다만 까치밥이
대롱대롱
행인들의 입술엔
추월이가
대롱대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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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戒계盈영杯배
성진명
나도 모르는 새
잔이 채워졌나 보다
재물이
그리고 또,
무엇인가가
새기 시작하고 있다
까짓,
빈손으로 왔다가는 것
어찌하리
다 쏟아지고 나면
다시
한 방울
또 한 방울
채우면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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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구봉산에 오르다
성진명
정해 년 삼월 셋째 주 토요일
청내 등산 동호인들과
천황사 뒷길을 따라 구봉에 올랐다
어젯밤 코흘리개 동창들하고
허리띠 풀러놓고
권커니
자커니 시끌벅적
새 날이 지나도록
목운동을 해서인지 버겁다
오르막 초입부터
봄을 속삭이는 풀잎들의 반김도
눈치 채지 못하고
발정 난 숫돼지 같은 숨결은
비탈진 경사에서
끝내 턱을 차고 오른다
딴에는 명당이었을 자리에
파가가 되어버린 고인들의
안식처를 몇 개나 지나치며
봉긋 부퍼 오른 진달래
불긋한 꽃망울이 반갑다
구봉의 팔부쯤 오를 즈음
벼랑에 우뚝 솟은 선녀송하나
잘록한 허리 보듬어 안고
빵빵한 엉덩이 두드리니
간지런 속삭임과 체취가 온몸을 파고든다
솔잎을 흔들고 찔러오는 향기에
동면에 들었던 무딘 세포들이
하나씩, 둘씩,
기지개를 켜고
삶에 찌든 영혼에 활력이 샘솟는다
구봉산 정상에 오르니
크고 작은 봉우리들이 발아래
부복하고, 바람소리 청명하니
하늘의 왕,
천왕이 바로 나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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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그곳에 가고 싶다
성진명
산은 높고, 골이 깊어
산골이 된 동네
살구꽃 그늘아래 선녀들 놀다가고
낮은데 갈아 나락심고
높은데 갈아 고추 따며 어울러 살던 곳
칠석날 까막까치 오작교 밟으러 가고
노상 사립문 열어두어도
걱정 없는 곳
앞산에서 이야호 부르면
뒷산에선 호야이 답하고
성주봉, 큰 재 너머
나무꾼 장단에 신명나는 곳
산은 즐거워 더엉실 춤추고
물은 흥겹게 노래하는
꿈에라도 발 벗고 달려가고픈 그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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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그럴 수 있다면
성진명
목마른 나무에게
한줄기 비가 될 수 있다면
배고픈 새에게
벌레가 되어 줄 수 있다면
사랑하는 이에게
베개가 되어줄 수 있다면
난 그렇게 되고 싶다
누군가 알아주지 않아도
내 몸 어디선가
들려오는 소리를 적을 수 있고
공기 속을 떠돌며
방황하는 아름다운
이야기들을 붙잡을 수 있다면
난 연필을 들어
하얀 종이위에 그리고 싶다
바람타고 훨훨
날아가 세상을 아름다움으로
꽃피우는 민들레처럼
인생길에 지친 나그네의
발걸음을 잠시 잡아두고
목마름을 달래주는 옹달샘처럼
내 작은 속삭임 하나하나가
장미꽃의 가시를 눕힐 수 있다면
나는 작은 시인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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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기도
성진명
쉬지 말고 기도하라
막히면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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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꽃
성진명
올라갈 때 못 취한 꽃
내려올 때 볼 수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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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나이아가라
성진명
나이야 가라고 외치는 사람들에게
엿이나 먹으라는 듯
수 만폭의 옥 병풍을 빚어내는
물보라에
피어나는 쌍무지개
그 앞에 서서
쉴 새 없이 셔터를 눌러대는 무리들
무리 중에
늘씬하고 쭉빵한 아가씨
장밋빛 입술에서
피어나는 담배연기
목이 터져라
외쳐대는 소망에
홀라당 모자를 벗겨 달아나는
바람꼬리,
이마에 한줄 더 그어지며
떠나가는 나이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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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내 사랑 황진이
성진명
세상의 남정네를 품기 위해
스스로 자애할 수 없었으니
마침내 이 지경에 이르고 말았구나
나 죽거든 수의도 꽃가마도 쓰지 말고
동문 밖 강가 모래밭에 던져
천하의 사람들이
나에게 돌팔매를 던지게 하시고
늑대와 개미와 파리가
내 몸을 갈기갈기 물어뜯고 나누어
허공중에 한점 흔적도 남지 않게 하시오
달같이 곱다 하리, 양귀비 같다 하리
으스름 달밤에 거문고 타는 소리에
왕산악이 울고 가는 구나!
아! 진현학금이여!
폐주연산이 보낸 채홍준사에
절색에 기예를 보태 천과흥청으로
낙점을 받았구나!
하지만 어이 하리!
폭군에 꺾이는 꽃이 되느니
약을 먹고 맹인 되어 팔도강산 유람할제
황한량과 배가 맞아 핏덩이를 낳았구나!
남자는 귀하고 여자는 천하며
양반은 높고 천기는 짐승과 같은 세상이니
본처의 꼬임에 핏덩이를 넘겨주고
세상을 등졌구나!
곱다 고와
황진사댁 맏딸이여!
선녀가 하강한 듯 나비가 춤을 추듯
서희가 환생한 듯
백리를 간다는 백련향이
물씬 물씬 묻어나는
곱디고운 저 자태 깨물어 주고도
으스러지게 안아보고도 싶구나!
비익조를 꿈꾸고 연리지를 상상하며
열다섯 처녀가슴 부풀어 오르건만
아! 하지만 말이 씨가 된다더니
다리 밑에서 주워온 아이라 농으로 놀리던 말이
신씨부인의 절명에
맹인천기 현금의 소생으로 드러나
어둠의 나락으로 떨어질 줄 뉘라서 알았으리
하늘이 무너진들 이보다 무서우랴
땅이 꺼진 단들 이 아픔보다 깊으랴!
이 세상 보기 싫다
까무라치고 곡기를 끊다보니
앞 못 보는 장님이 되고 말았구나!
고집불통 황진사는 가문의 채신이
두려워 눈먼 딸 진이를 진관스님에 딸려
절로 보내는구나!
종은사 종소리에 진이가슴 열리고
진관스님 설법에 사상이 깊어
감겨진 눈이 떠지는구나!
인권이란 오로지 하늘만이 주는 것이요
반상이니 서얼이니
남존이니 여비니 하는 것이 모다 허무맹랑한
유학이니 사림에 물든 상투쟁이들의 주장이다
생로병사는 무엇이며 이 험하고 덧없는 세상
그저 점하난 찍었다 가는 게 무에 그리 어렵겠나
동안거에 든 스님들 삼부족에 시달리니
선녀 같은 진이 볼까 별채에 깊숙이 숨었구나
홀어머니 봉양하는 떠꺼머리 선비하나
눈밭에서 만난 진이
백 여시에 홀린 듯 몽롱히 꿈속을 헤매이다
홀어미 여의고 서신하나 남겨두고
홀연히 떠났구나!
유기공방 집 아들 수근이
품어서는 아니 될 사랑을 품었구나!
선녀가 하강한 듯
한 마리 나비인양 너울대는 진이를
한번 보면 설레지 않을 사내 있으랴!
더구나 황진사댁 맏딸에서 천기출신으로
수직 하강한 천하디 천한 상것이 아닌가?
산위로 올라가 화전 농가 바라보며
수근이 꿈을 아씨에게 펼치누나!
우리 손잡고 도망가서
저들처럼 정인으로 살자구요
차라리 그리 살았으면 좋았으련만,
하지만 운명은 인간의 것이 아니거늘
어찌할꺼나!
청모란 골방에서 퇴기 옥섬으로부터
진현학금 어미일과
출생내력을 알아내는 진이
아비와 어미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놀음에 희생양이 되어버린 몸
인생이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누가 죄인이고 누가 선인이란 말인가?
이 세상에서 누가 누구를 벌할 수 있단 말인가?
천근 만금 같은 바위가 가슴을 짓누르고
목이 찢어지는 고통이 엄습하는구나
아! 박연이 그립다.
미련 없이 아무런 미련 없이
큰 소리 지르며 한 없이
밑으로 밑으로 자신을 낮추며 흘러가는
저 박연 폭포가 그립다
가문의 위상으로 보아
그래도 반가의 소실자리나 후처로라도
보내려는 집안에 멍울진 꽃망울
너무 아퍼 붉은 피 토하는구나
아! 이건 또 무슨 횡액인가?
절에서 본 떠꺼머리 선비가
상사병이나 온몸의 피가 말라붙어
저승으로 가고 말았구나!
상사로 죽은 자는
은애하는 여자의 속것을 상여에
덮어주어야 상여가 움직인다는구나
이 또한 업보로다
전생에 무슨 인연이 있었길래,
고심하던 진이 맨발로 빗속을 걸어나와
두 번 절하고 속것을 씌워
한 많은 총각 상여를 저승길로 보내는구나!
옥섬에게 달려가
기생수업을 받는구나
노래도 배우고 거문고도 배우고
이니 정해졌던 운명의 굴레
어찌 피할 수 있으리오
노류장화에 헤어화든
눈밭에 향기를 흩날리는 매화든
진흙속에 피어난 연향이든
옥황상제에 죄를 지어 귀향 온 선녀든
천지간에 집도 절도 없는
들꽃으로 피어나려 하는구나!
진흙땅에 떨어진 연의 씨앗이니
그 땅에 향기 나는 꽃을 피우려 하는구나!
기생수업 이태만인 열여덟에
진이 머리 올리는 구나!
이름도 밝은 달 높이 떠
이 어두운 천지를 밝히고자 명월이라 했던가?
몰려든다 몰려든다
조산팔도 호색한들
방구깨나 뀐다하는 한량들!
옥섬이모 매니저에
송도방송 발 없는 말들 파발마를 띄우니
명월이 개런티가 하늘로 솟는구나!
송도제일 천하절색 명월이
처녀딱지 떼는데
생화를 꺾는데 천금이 아까우랴
만금인들 아까우랴!
아! 드디어 낙찰자가 생겼구나!
대리로 문서를 보내어
고대광실 같은 집을 장만하고
홍등을 내걸고 목욕재계 한 후
첫날밤을 기다리는구나!
하늘이 울고 땅이 우는구나!
검은 점 다섯은 오성인가! 오복인가!
남녀결합의 이치도 완벽하게 배우고
분바르고 연지곤지 찍고
비단 보선에 명월이라 수놓아 기다리건만
하지만, 첫날밤
정인은 새벽닭이 울고
동창이 밝아 노고지리 우짖어도
어이해서 안 오시나!
길이 멀어 안 오시나
부끄러워 못 오시나!
활짝 핀 꽃잎은 꿀물을 머금은 채
다시 봉오리를 오므리고 마는구나!
송도 유수 젊은 서생
대낮에 뜬 명월에 입이 벌어지는구나!
빼어난 자태에 풍부한 식견에
거문고의 선율에 나자빠지는구나!
사랑채에 불러들여
시문답을 주고 받으니 더욱 놀라워라
진이는 먹을 갈고 유수는 시를 쓰고
밤이 깊어 귀또리가 조는 줄도 모르는구나
자다깨다를 예닐곱 번
유수는 명월의 발에 雪泥와 鴻爪를
써놓고는 너무 좋아 다시 끌어안고
방안 가득 백련의 꽃봉오리가 터져
흐르는 피 냄새가 진동 하는구나!
사흘 낮밤을 그렇게 유수는 꽃을 탐하고
명월은 토끼의 절구공이를 받아들였구나!
이렇게 명월이의 땅은
처음으로 하늘을 맞이하였구나!
명월관에는 비단과 쌀가마가 쌓이고
유수는 말을 한 필 선사하고
만원대니 박연폭포니 절이니 예성강이니
조선의 절경을 가보자 한다
세월이 가는 줄도 모르고
사랑에 풍경에 흠뻑 취하다
유수는 한양으로 부름 받아 떠나고
명월을 소실로 탐을 내나
명월의 길은 그게 아니다 했다
이렇게 첫정인과의 이별을 하고
열아홉 명월은 인생길에 접어든다.
가야금 선생 따라온
서얼출신 미남 서생
이야기를 나누니 대화가 되는구나!
가진 것 없는 떠돌이 신세건만
진의 눈에 사랑스런 남정네가 되었구나!
정분난 남녀는 떨어질 줄 모르누나!
가야금 선생은 천재적인 기질에
가르칠 바를 잃어 지리산으로 떠나가고
서생은 연꽃을 송두리째
잘근잘근 깨물어 삼키는구나!
하지만 어이하리!
관기의 사슬에 매인 몸뚱아리
수청을 드는 날 눈물로 정인을 떠나보내고
밤새도록 사내에게 꿀물을 퍼주어야 했다
백옥 같은 연꽃잎은
생채기 난 홍련으로 붉어지고
님 떠난 빈 가슴은 갈가리 찢기누나!
소낙비는 사흘 동안 줄줄 내리고
명월은 구름 속에 자취를 감췄구나!
떠났던 님이 못잊어 돌아오매
불붙는 두몸은 하나인가 둘인가?
애끓는 정 싹둑 잘라 치마폭에 넣어두고
오년을 기약하고 이별주를 나누누나!
선녀가 하강한 듯 경국지색의 미모에
누에가 고치를 짓듯 빼어난 시작에
천상의 음률로 빚어내는 거문고 솜씨에
명월의 줏가는 하늘로 치솟는다
소세양이란 판서가 화담을 찾는다는 핑계로
명월관에 여장을 풀고
온갖 선물을 내놓고 산해진미에 배불리고
명월의 거문고 선율에 취하는구나!
연에서 나는 향기를 맡으며
너무 아까워 차마 첫날에 덥썩
꽃을 취하지 않는구나!
만월대에서 시흥에 취해 마주보고 웃고
침실에서 다시 시문답을 하다가
댓잎에, 장독에, 기와에, 유기대야에, 명월이 가슴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둘은 한 몸을 이뤄 어둠을 밝히는구나!
서경덕의 제자들 안내받아
오관산 화곡 화담으로 드는구나!
화담은 절세미인 명월을
그저 소 닭 보듯 담담히 대하매
명월이 존경심에 가슴 부풀어 오르누나!
학문의 말뜻을 배우고
기와 이 수를 배우고
티 없이 맑디 맑은 화담의 호수에
존재가치를 깨달으며 풍덩 빠져 버린다
소세양도 떠나고 울적한 마음에
수근이 보내온 놋쇠 신을 번쩍번쩍 닦는다
명월관에 홍의원 찾아와
내자가 될 것을 간청하나
자신의 길을 끝내 고집하는 명월이
조선팔도에 없는 외국의 여자 같다 하니
이 나라와 이 시대가 낯설다 하는구나!
어쩌면 천상에서 귀양 온 선녀거나
타임머신을 타고 온 이방인이 아닐까?
홍의원 욕정을 불태우며 다섯 번을 사정하고
어르고 달래며 원대로 할 것이니
같이 살자 하건마는, 사서 드시란다
명월은 술을 마시고 거문고를 잡고
노래를 부르다 몸살이나 드러눕는다.
옥섬이모 관아에 가
진이를 기적에서 빼냈구나!
아! 이제 멍에를 내려놓은 소요
새장에서 풀려난 새로구나!
푸른 창공을 훠어훨 날아보고 싶고
대로를 질주하여 보고 싶구나!
매니저 이모 옥섬은
화류계에서 진이를 건져내고
영원히 깊은 잠속으로 빠져버렸다
창공을 잡아 노래하고
거문고줄 타는데, 박연폭포 노랫소리
꿈인양 들리더니 정인이 연기처럼 나타난다
눈물로 바다를 이루며 재회를 기뻐하나
아! 약조한 님은 나뭇가지에 둥지를 틀었구나!
미어지는 가슴 쓸어안으며 잘했다 하고
상상을 초월하는 계약동거를 약조한다
풍덕군수 도와 민정을 살피고
낭군님 내직에 부름 받아
한양으로 들어가
본부인, 시모님 지극정성 봉양하고
계약기간 도래하여 송도로 돌아온다
송도 거상의 사별한 뒤
매파 보내 본처자리 간청하나
단칼에 거절하고화담에 들어
청산리 벽계수를 노래하고 춤을 추어
서화담을 불러내는구나!
노자를 논하고 도덕경을 논하며
화담의 명쾌한 설법에
세상을 내려놓고 스르르 잠이든다
화곡동에 담객이 하나 더 늘었다고 남녀차별 없이
대하라 화담이 말하고 모두들 수긍한다.
황진사 와병으로 찾아가니
노망이 들어 진을 현학금으로 알고
횡설수설하는구나!
영화롭던 생가는 허물어 질 듯
퇴락의 길로 달리고 있어
추억이 깃든 옛일들이 아스라이 스쳐간다
황진사는 도솔천을 건너가고
진은 장례를 치르고 명월관으로 돌아온다.
기다리는 정인 이사종은 아니오고
간혹 비몽사몽중에
피에 젖은 모습으로 사라지고
화담의 나쁜 일이나 좋은 일이나
이미 정해졌던 일이니 희노하지 마라한다
인왕동에 기별 넣어
정인이 왜구와 싸우다 전사한 소식 전해 듣고
진은 까무라치는 구나!
무당패를 불러 사흘 낮밤으로 살풀이를
치르고 드러누웠다 일어나니
천지 사방에 깔린 봄눈이 온통 핏빛이다.
청량봉 지족사에 청년스님하나
훼불책에 반기들고
천일단식으로 등신불을 꿈꾸누나!
아! 알고 보니 이게 누구더냐!
명월이 머리를 허공중에 올려주고
명월관을 장만해준 짝사랑 수근이가 아니더냐?
가산을 진에게 털어바치고
인삼장사차 연경에 들었다가
화적떼에 밑천 다 뺏기고 혀조차 잘렸다나
지족사에 들어가
혀 짤린 벙어리 앞에 번쩍이는 놋쇠 신 끌러놓고
그래! 화전 살자! 우리한번 살아보자!
얼르고 달래나 묵묵부답 눈물만 흐르누나!
성불을 했는지, 체념을 했는지
진이 우유빛 젖통으로 수근의 목을 채우고
치마말기를 풀어 생불을 감싸누나!
말 못하는 수근이!
아! 이미 늦었소! 아씨, 아씨, 아씨
나는 이미 극락에 들었소이다
내가 화전살자 했을때
나비처럼 훨훨 날았으면 좋았으련만!
천일을 채우고 수근은 순교하고
지족사는 화마에 휩싸이고 마는구나!
생불한 수근이의 원망을
깡그리 불살라 버리는구나!
여우같은 이생과 평생소원이던
금강산 유람에 나서는 우리 진이
어찌 내가 사람을 좋은 사람 나쁜 사람
구분할 수 있으리오
인생이란 뜬구름 같은 것
어디서 오는지도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게 인생이라
금강산에 속죄하러 들어간다
구름처럼 바람처럼
청산유수로 흐르며 부처도 모시고
남사당패거리도 되었다가
몸팔아 문둥촌에 간호도 했다가
산골에 산림도 살았다가
자신을 불태워 빛을 주는 촛불처럼
세상사람들에게 젖과 꿀을 나누어 주는구나!
이년이 흘러 명월관에 비루먹은 망아지로
돌아와 가산을 정리하여
지족사에 아미타 절을 짓고
화곡동에 들어 화담과 문답하니
속세를 떠난 신선들의 선문답이 이 같을까
진이 몸은 길이었다
한 걸음 한 걸음 길을 밟아 버리고 온 길처럼
진의 몸도 여기에 이르렀다.
사내들은 진의 몸을 지나 제 길로 갔고
진이도 제 몸을 지나 제 길로 돌아왔다
화담은 줄 없는 거문고를 타고
진은 이별노래를 눈물로 부르누나!
화담이 도솔천을 건너간 후
삼년이 지나
진은 초파일에 지족암에 돌아왔다
등신불이 머물렀던 자리란
소문이 돌고 돌아
영험한 기운이 돌아 병자가 낫고
원근에서 수많은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죽었단 소문이 송도에 파다한데
유령인 듯 우아하게 현신한 진을 보고
사람들은 홀린 듯 수근댄다
법회를 마치고 나비처럼 훨훨 내려가는
진을 따라 이목구비 반듯한 젊은 사내
대금을 등에 지고
사뿐사뿐 진의 발자국을 되밟아 내려간다.
아!
백리를 간다는 백련의 향인들
월궁의 항아인들
옥황상제 시중드는 선녀인들
어찌 내 사랑 진이를 따를 소냐!
진아! 진아! 내 사랑 황진아!
이 몸이 유수요!
이 몸이 이사종이요!
이 몸이 소세양이요!
이 몸이 수근이요!
이 몸이 서화담이니
오늘밤 오작교에서 우리 한번 놀아보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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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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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진명
우리가
어느 별, 또는 우주너머의
어느 신이 쓴
책에 나오는 사람이고
어느 별의 독자가 읽고 있다면
우리는
무언가를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다
책이 다 쓰여진 것이라면
그대로 따라야 할 것이고
미완성이라면,
뭔가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달라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스스로 다음페이지를
볼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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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돌아 오라 지킴이
성진명
동구 마을 샘에서 표주박으로
물동이에 물길어 먹던 시절
찬바람 막아주던 숲 속엔
참매미, 뜰매미, 쇠대가리, 불협화음에
꾀꼬리, 박새, 물까마귀, 뱁새, 참새, 꾸지내
나무구멍에 나뭇가지에 둥지 틀고
굴밤나무 고목에
집게벌레, 대추벌, 호랑나비, 풍뎅이 날아와 붕붕거리고
둥구나무 가지에 그네 뛰던 단오
호박꼬누 두던 넙적 바위 그늘
굴밤 줍다 낙엽 쓸어 모으고
눈 내리면 가지마다 솜사탕 가득하던 숲
잠잠하던 사냥재에 먹구름 밀려와
뽕나무 밭 토란잎에 후두두둑
소낙비 내리면
둥구나무 밑 돌탑 속 먹구렁이
빗줄기 사이로 황소울음 토해
동네를 지켰는데....
어느 날
숲의 나무는
부자영감 삼판 손에 넘어가고
숲속 돌탑도 둥구나무 밑 돌탑도
도깨비장난이라도 하듯
삼베바지 방구 새듯
하나 둘 달아나고
집 잃은 먹구렁이 지킴이도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초가지붕위에 박 넝쿨 올라 앉아
해거름이면 일터에서 지친 몸
하얀 미소로 반겨주던 박꽃도
토담위에 이엉 붙잡고 올라타
푸짐하게 노란 얼굴로
벌을 불러 모으던 호박꽃도
길가에서 미소 짓던 민들레도
처마에 둥지 틀던 제비도
스레트, 세멘트에
경운기가 뿜어대는 연기와 고함소리에
모두모두 달아나버렸다
옹기종기 모여 살던 사람들도
하나 둘 트럭에 솥단지를 싣고
남은 사람들
허리가 꼬부라지고
몹쓸 종양이 돋고
괴물이 들이 받아
하나 둘 도솔천을 건너는 구나
돌아오라!
지킴아!
너의 돌탑 쌓아주마!
돌아오라!
꾀꼬리야
너의 나무 심어 줄께!
시작설명문
우리 동네 아랫여러니에 마을 숲이 있었고 동구 밖에는 샘이 있어 50여 가구가 길어다 먹었습니다. 동네 입구에 300년이 넘은 동구나무가 있었고, 숲과 동구나무 밑에 돌탑이 하나씩 있어서 마을은 참으로 평화롭고 인심 좋고 살기가 좋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산업화가 밀려오고 새마을사업으로 돌담이 헐리고 초가지붕이 벗겨지더니 돌탑도 석축하는데, 뭣하는데 하나씩 헐리고 돌탑 속에 들었던 지킴이도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후 언제부턴가 동네에 교통사고가 자주 나고 몹쓸 질병에 걸려 죽는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그래서 마을에서는 7월 1일 돌탑을 복원하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평화와 행복이 가득한 마을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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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또 유월
성진명
풀잎 들이 일어선다
거센 바람에도
쓰러질 듯
쓰러질 듯
숨소리보다도 약하디 약한
풀잎이
바람이 불어오면
누웠다가
우루루루
다시 일어선다
봄, 보리처럼
밟으면 밟을수록
뿌리는 더욱 더
파랗게 파랗게
핏물을
뚝,
뚝 떨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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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마음을 풍요롭게
성진명
편안한 자세로 앉아
두 눈을 감으세요
가장 원하는 것 열 가지를
가슴에 담아보세요
부귀든 명예든 사랑이든
무엇이든 좋아요
이제 하나씩 꺼내서
버려 보세요
열 개를 모두 버리세요
다 버렸으면 조용히 눈을 뜨세요
이제 당신은
마음이 가장 풍요로운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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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마이산
성진명
그대는 대지에 누운 여인,
어찌,
말귀 따위와 비길쏘냐?
봉긋 솟은 두개의 젖가슴은
하늘나라 애기신들
배불리고도 넘치는구나!
하늘의 신들이여!
이 여인의 가슴에 안겨
이 땅에 축복을 내리소서!
용담호의 에메랄드 빛 눈동자는
대대손손 이어갈
여인의 자궁이로구나!
여인의 물줄기는
목마른 호남을 적시고 삼한 강토를
풍요로 넘치게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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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마이산 연가
성진명
백두산 천지에서
금강석 같은 도령하나
괴나리 봇짐 싸들고
사랑하는 님 찾아
백두대간 따라
남으로 남으로 내려왔다네!
한라산 백록에서
꽃사슴 같은 낭자하나
꽃바구니 옆에 끼고
사랑하는 님 찾아
바다건너 산 너머
북으로 북으로 올라왔다네
북에서 남에서
사랑 찾아 내려와 만나
선남선녀 첫눈에 반해
보금자리 틀고 눌러 앉은 땅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곳
바로 진안이었네!
아들 낳고 딸 낳고
잘 먹고 잘 살다가
하늘로 올라가기로 한 날
하늘보다 이 땅이 너무 좋아
천세, 만세 영원무궁 살자고
굳은 맹세 부부산이 되었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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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매화
성진명
여보게, 친구,
무얼 그리 망설이나!
세상근심 내려놓고
매향에 빠져보세!
곱디고운 자향(姿香)이
어찌,
한량이나 시인묵객들의
발길만 바라겠는가?
서릿발 희끗거리고
잔주름 늘어가는
오춘기(五春期)에 접어든 우리도
속편하게 취해보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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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멋진 고백
성진명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도,
나를 사랑하세요?
내가 아무리 죄를 지어도
용서를 구하면
아버지께서는
용서를 해주신답니다.
진정으로 믿는다면……
그래서
용기를 내어 죄를 빌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멋진 말을 지어내서
고백하려해도 죄는 죄일 뿐입니다.
거짓을 위선이라고 해도
도둑을 절도라고 해도
간음을 부적절한 관계라 해도
아버지께서는 이미 다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밖에 살아오면서 저지른
알아내지 못하는 모든 죄들도 용서를 빌고
아버지께서는 사제를 통해 용서해 주셨습니다.
이제 솜털같이 깨끗하고
수정같이 맑은 영혼으로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다만,
다람쥐 같은 인생이 되지 않기를 바랄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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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無所有(무소유)
성진명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은
더욱 많은 것을 가질 수 있다는
희망이 있기에 행복합니다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은
더 이상 잃을 것이 없기에
더욱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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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바람에게
성진명
소리 없이 스쳐 지나갈 땐
그냥 바람이었다
그렇게 수없이 많은 바람이
수없이 많은 시간을
흘러서 오고 또 갔다
그 중에 우연히
손 내밀어 마주잡은 손 하나
아픔이 되고
그리움 되어
자꾸만 자꾸만 빈 가슴을
헤집고 다니는 을씨년스런
바람이 되어 창공을 떠돈다
스치고 지나갈 땐
그저 바람이었던 것이
손을 잡고 나니
꽃이 되고
이름이 되어
어떤 의미를 만들어 가고 있다
파도가 밀려오면
부서져 버리고 말
모래성에 담아 놓은
수수께끼 같은 속삭임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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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버리자
성진명
하늘이 무너질까?
땅이 꺼질까?
하는 기우도,
내 것 두고
그것도 못 채우면서
남의 궁전을 탐내는
욕심도,
거지처럼
훌훌
털어버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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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사랑
성진명
사랑하게 하소서
아버지께서 하신 것처럼
저희도
서로 사랑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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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사월을 보내며
성진명
봄꽃을 잉태해
마이산처럼 부풀어 오른
삼월이,
자궁을 들어내고
자리 잡은 사월이는
자궁 없이도
풍성하게 꽃들을 낳았다
하얀 벌집 같은
벚나무에서는 바람 따라
함박눈이 흩날리고
꽃비가 내리고
이산저산 골골마다
빨치산 마냥
진달래가 바위 뒤에 진을 치고
개나리는 밤무대 나가는
무명배우 소품마냥
노란별 반짝이로 치장을 하고
공원벤치를 지키는
목련은
연인들 속삭임에 샘이 난 듯
삼파장 전구 빛을 밝히고
길가에 민들레는
노란 맥시칸 모자를 쓰고
꼬마군악대마냥 행진을 하며
송홧가루 날리는
고갯마루를 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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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새소리
성진명
이른 아침부터 무어라고 조잘거린다.
온 동네가 시끄럽게 종알대는데
도대체 무슨 말인지는 못 알아듣겠다.
그냥 새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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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수수깡 안경
성진명
가을걷이 끝난 들판에
수숫대가 지천으로 널렸다
매끈하게 잘빠진 몸으로 골라
옷을 벗겨내고
마디마다 뚝뚝 부질러
껍질을 벗긴다
하얀 수수깡에 동그랗게
껍질을 감아 끼우면
렌즈가 되고
길게 끼우면 다리가 된다
수수깡 안경을 끼니
이야기책에 나오는 박사님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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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쌍 다래끼
성진명
고기가 부족한지
한쪽 눈에 다래끼가 났다
눈썹을 하나 뽑아
고샅에다
다래끼 솥을 걸었다
골목에 숨어
누가 차나 망을 보았지만
아무도 걸려들지 않았다
애꿎은 친구하나 꼬드겨
끌고 가다가
아뿔싸! 그만
제 발로 걷어차고 말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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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아름다운 동향
성진명
산 높고 골 깊어 아름다운 산골
굽이굽이 구량천 옥같이 흐르네!
왜가리 돌아오면 봄꽃이 만발하고
여름이면 수박축제 신바람 더덩실
대평들 황금물결 가을하늘 살찌우고
문필봉 붓끝으로 겨울연가 읊어보세!
달도 밝다 명덕봉, 명필일세 문필봉
바람 좋은 관풍정, 성주풀이 성주봉
사자꼬리 사미대, 벼락친다 뇌수정
명사수라 사정, 나라스승 국사봉
두억봉 노적가리 올해도 풍년이라
아름다운 동향산천 영원무궁 빛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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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아침 이슬
성진명
긴 밤 지새우며
쉬지 않고 맴도는 지구의 땀방울이
알알이 풀잎 끝에 영글고
영근 이슬방울 속에는
사막의 모래 바람도
지중해의 열기도
태평양의 짠 내도
남북극의 찬바람도
녹아 농축액으로 뭉쳐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가
산들 불어오는 바람결에
곡예사처럼 그네 타던 이슬방울
‘툭’ 떨어져 지축을 흔들자
깜짝 놀라 깨어난
개미들의 함성에
둥지의 산새들도 푸르르렁
날아올라 게으름뱅이 동녘을 깨우고
햇살에 눈부신 방울은
스르르 대지에 스며
탱탱한 열매를 준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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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양귀비
성진명
아내의 입원으로
홀로 새우는 밤은
석 달 째 깊어가고
씨 없는 고추 심을
밭뙈기도 없어
뒤척이는 오월 밤
비몽사몽 중에
문 두드리는 소리 있어
나가보니
일편단심 민들레 홀씨는
훨훨 날아가고
휘영청 달빛아래
빨가벗은 양귀비들이 손짓하는데
솔로로 긴 밤 지새우는
솔로몬은 어이할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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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오줌싸개
성진명
꿈속에서
어딘가를 가다가
오줌이 마려워서
시원하게 갈겼는데
이불속에서
왜 이리 아랫도리가
따뜻하다냐?
엉중겅중거리며
소금 뿌린 듯 서릿발
하얗게 얼어붙은 고샅길로
검정고무신 꿰차고
챙이 둘러쓰고 뒷집에 가서
소금 한 사발 얻어 왔다
아랫집 순이 가시내한테
안 들켰나 모르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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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옹기 가마터에서
성진명
에스키모의 얼음집 같기도
반달 같기도 한
아궁이 속으로
참나무, 소나무 판자들이
새빨간 혀를 날름거리는 불 뱀이 된다.
불 뱀은
가마 속을
휘휘, 휙휙 날아다니며
엉겨 붙어 금새 불새를 낳고
불새 떼들은 바닥에
번쩍번쩍 빛나는 황금알을
낳아두고 동굴 속으로 빨려든다
동굴 속으로 날아든
불새들은 도깨비감투 쓴
돈쥬앙이 되어
아홉 고개 구렁이 뱃속을
통과하면서
무른 아줌마 궁둥이 같은 단지를
슬그머니 쓰다듬어 긴장시키고
물컹한 아가씨 젖무덤 같은 사발에
훅훅 단김을 뿜어 굳힌다
옹기 터 가마 속은
교접과 탄생의 아우성으로
터질 듯 봉긋 부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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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욕심쟁이 다람쥐
성진명
함박눈이 소담스레 내리던
겨울밤,
군불지핀 아랫목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화롯불에 알밤을 구워 먹으며
할머니가 들려주시던 옛날이야기인데,
다람쥐란 놈은
가을에
아주 많은 여자를 데리고 산단다
여자들은
들로 산으로 부지런히 쏘다니며
알밤이랑, 도토리랑,
겨울 식량을 굴 안에 저장했단다
겨울이 오면
눈먼 각시 하나만 남겨두고
모두 쫒아낸단다
눈먼 각시한테는
도토리만 주고
알밤을 까먹으면서
“아이구 달공달공” 한단다
눈먼 각시는
“에퉤퉤 떫은 거”하지만
욕심쟁이 다람쥐는
저 혼자만 맛있는 알밤을 먹고
눈먼 각시에게는 떫은 도토리만 주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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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이름 바꾸기
성진명
아버지 날 낳으시고
어머니 날 기르시며
노상 부르시던 이름 진수야!
누나, 형, 동생들
다정히 불러주던 이름 진수야!
동네에서 학교에서
동무들이 불러주던 이름 진수야!
사회에 나와 사람들이 불러주던 이름
성진수씨!
사랑하는 아내와 데이트하며
주고받은 사연 그리고
달콤한 속삭임에 숨어 있는 成성眞진洙수
그런 이름으로 50년을 살았는데
…………
이젠,
지천명 할 나이가 되었으니
내의지로 살아보고 싶어
법원 가족등록계에 개명신청서를 냈다.
성은 바꿀 수 없으니
그대로 이고
참眞을 별辰으로 물가洙를 밝을明으로
구태여
파자한다면 별, 해, 달을 이룬다는 뜻이로다.
읍사무소에서 이런저런 서류 발급받는데
육천 팔백원
법원에 인지대 천원, 송달료 일만 오천 삼백원
도합 이만 삼천 일백 원에
나를 바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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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입춘대길
성진명
육십년만에 찾아왔다는
이천십년 경인년 백호의 해,
대한이가
소한이네 집에 놀러갔다가
얼어 죽었다는 소문이 자자하다.
의기양양한 소한이
입춘에게 수청 들라고
뒷짐을 지고, 곰방대를 물고
거드름을 피우며 찾아왔다가
붕R이 꽁꽁 얼어붙었다.
그래도,
얼음장 밑에서 물고기가 노닐고
찬바람 속에서 매향이 짙어지듯
저 바람결 어느 자락에
깜박이는 꽃눈이의 윙크,
꼼지락거리는 새싹의 기지개가 숨었다.
입춘이 대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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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장님
성진명
눈은 있으나
시력이 없어
사물을 못 보는 사람들은
몸이 불편하지만,
사랑이 없거나
해서는 안 될 사랑에
눈이 먼 사람들은
마음이 불편하고,
신이 없거나
믿음이 없어
미래가 없는 사람들은
영혼이 불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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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지구가 뿔났다
성진명
기실,
오래 전부터
모든 것들이 알고 있었다
푸른 하늘을 나는 새들도
파란 바다를 헤엄치는 물고기도
두 팔을 벌린 나무들도
항상 웃음 밖에 모르는 꽃들도
...........
하지만,
세상에서 제일 잘난
인간들만이
제 무덤인줄도 모르고
죽는 날까지
땅만 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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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진달래 꽃
성진명
마법에 걸린
열다섯
순이,
부끄럼 감추려고
엄마
치맛자락 끌어당겨
자꾸만 숨는구나!
서툰
몸짓에
온 산을 벌겋게
물들이는
봄날의 수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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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찔레꽃
성진명
나날이 푸르러 가는 산골짝마다
붕붕, 나폴 나폴, 쑥쑥, 꿩꿩……. 빛나는 함성은
새 생명 원소를 실어 나르는
사랑의 세레나데이던가?
구렁이 기어간 듯
구부렁구부렁 산골짝 다랑논에는
못줄도 뛴 듯 만 듯, 공일 맞은
식구들 옹기종기 모내기한다.
콩자반 가죽무침 간고등어 비린
무시지짐에
보리밥 배불리 점심을 채우고
새참엔 국시에 막걸리도 댓 사발 먹었다.
저문 해 비끄러맬 수 없어
초가둥지 찾아 돌아오던 길가에
흐드러진 찔레꽃,
하얗게 웃을 땐 제법 곱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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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천년고찰 목탁소리
성진명
주승은 오수에 들고 불심 깊은 딱따구리가
법당기둥을 쪼아대누나!
세월
그댄, 나이가 들수록 어찌 그리 젊어지누?
아내
스물여덟, 저물어가는 가을 날, 평생을
같이 할 깨복쟁이 동무하나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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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촛불
성진명
이 한 몸 살라
어두운 세상
밝힐 수 있다면
길바닥에 떨어진
쇠똥처럼 문드러져도 좋다
거센 바람 앞에
꺼질 듯 깜박이는
미약한 몸짓이지만
하나가 둘이 되고,
둘이 넷, 제곱으로 불어나니
물대포 세례에도
꺼지지 않고
소화분말가루에도
더욱 활활 타오르고
창과 방패로
군화발로 짓밟으려는 기도는
미친 소보다도
더 큰 분노를 증폭시켰다.
아아!
이천팔년 유월 신록의 아우성이여!
민중의 촛불이여!
영원히 꺼지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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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치통에 대하여
성진명
“치통은 토요일 오후부터 시작 된다.” 더니
꼭 그렇게 되었다.
토요일 밤새 앓으며
약상자며 서랍을 뒤적여서
진통제로 겨우겨우 밤을 새웠다.
다음날도 약국 셔터가
내려와 있어
진통제로 밤을 보냈다.
월요일 아침
치과에 가니 왼쪽아래 어금니가 깨졌으니
뽑아야 한다며
혈압 약을 먹느냐고 묻는다.
그렇다 하니 내일부터 혈압 약 끊고
일주일 후에 이를 뽑으러 오란다.
아파 죽겠으니 약이라도
지어 달라하니 3일분 처방전을 써준다.
약국에서 약을 지어
우선 이틀을 견뎌 보았지만
죽을 맛이고
참을 수 없는 고통에 다른 치과를 찾았다.
왼쪽 아래 어금니에 실금이 갔는데
신경치료를 해보기는 하겠지만
안되면 뽑아야 한다고 한다.
그리하자고 하니
입안에 사진을 찍고
마취를 시키고 이를 갈아내고
약을 처방해 준다.
일주일에 거쳐서 신경을 죽이고
금이 간 곳을 때우고 나니 살맛이 난다.
내 어금니 신경이 죽으니 내가 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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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패랭이꽃
성진명
해송나무 솜털이 짙 푸러 가면
위뜸 무시둠벙 언덕에는
연분홍 은하수가 떨어져 내렸다.
동네 아이들 삼곶에서
감자서리 해먹다가
삘리리리 보리피리 불며
언덕에 모여 앉아 소꿉놀이 즐겁다
패랭이꽃 목걸이 만들어
꼬마각시 목에 살그머니 걸어주고
청보리 익어 가는 바람결에
얼굴 살짝 붉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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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하지감자
성진명
연중 낮이 제일 길다는 날
감자 밭에 나왔다
기나긴 해는 저물 줄 모르고
줄기 따라 토실토실 한 감자는
알토란 같이 따라 나온다
아침에 밥솥이 고장 났다는
아내의 혼잣말이 생각나
감자를 팔면 실한 압력전기 밥솥이나 사줘야겠다는 생각과
작년 동지 밤
황매가 기워 논 이불을 덮고
날 새는 줄 몰랐던 기억에
식은땀이 앞가슴을 지나 사타구니로 흘러내린다.
불총처럼 쏘아대는
지루한 햇살을 서산에 넘기고
연중 제일 짧다는 밤이 오기 전에
둠벙에서 후다닥 목간을 마치고
텃밭에 감자 캐러간
서방님 오시면
냄비에 감자나 푹푹 삶아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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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호박벌 꿀 빼먹기
성진명
호박꽃이 복스럽게
돌담위에 피어나
달콤한 꿀샘을 열어
호박벌을 불러들인다
벌은 꿀단지에 꿀을
가득가득 담는다
살금살금 다가간 개구쟁이
호박꽃 봉오리를
오무려 벌을 가둔다
꽃을 따가지고 뱅글뱅글
잡아 돌리다 땅바닥에
패대기치면 벌은 어지러워서
기절을 한다
꼬챙이로
침을 빼내고 몸통을 갈라
꿀단지의 꿀을 빨아먹는다
어제는 꿀 빼먹으려다
벌에 쏘여 손가락이 퉁퉁 부었다.
☆★☆★☆★☆★☆★☆★☆★☆★☆★☆★☆★☆★
《44》
홍시
성진명
어찌 저리 붉은 가을을 잉태했을까?
무슨
큰 잘못을 저질렀나?
아니면
저렇게 낮 붉힐 리 없잖아
그도 모자라 숨는 것 좀 봐
어쩌면
거짓말이 탄로났나봐
초록은 동색이라며
어울리더니
터질 듯 부끄럼 타는 것 좀 봐
아마
저 푸른 심연의 하늘에
풍덩 빠지고 싶을 거야
혼자는 외로워서
저리 달콤한 몸짓을 하는 게지.
☆★☆★☆★☆★☆★☆★☆★☆★☆★☆★☆★☆★
《45》
황금박쥐
성진명
새들과 짐승들의 전쟁에서
새들이
유리하게 이길 때는
나는 새라오
짐승들이
유리하게 이길 때는
기는 쥐라오
오늘 나는,
나는 새가 될 것인가?
기는 쥐가 될 것인가?
☆★☆★☆★☆★☆★☆★☆★☆★☆★☆★☆★☆★
첫댓글 성진명님의 시어..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그도세상김용호님의 수고하심에
여러 작가님들의 시어 접하게 되네요.
넘 감사하고 고맙습니다.
휴일
즐겁게 보내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