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성이씨 백송파 유래와 선몽대 白松派 22세 李翰邦
1. 세거지 이동; 시조 청송군 진보면 이촌리--2세 송안군 안동 풍산읍 마애--3세 부정공
와룡면 주하리 주촌(두루)-5세 노송정 온혜-7세 상계-8세 백송 영해-9세 하계 단사 계남
원촌 의인 부포 내신 고미 원천 노루골 늘목
2. 시조묘소: 청송군 파천면 신기리 감람 기곡재사 ;금계포란형
송안군 묘소: 안동 서후면 명동 두솔원재사
선산부사공: 북후면 물한리 작산정사 입구 왼쪽 산등
노송정 진사1424-1488 찬성공 진사1463-1502 :온혜입향 1454년 수곡재사/
송재1469-1517 신도비 1498년 文科
충순위潛1479-1536/예천훈도공河1482-1544 금당실 함양 朴華女/충순위漪1494-1532외가 대죽/온계1496-1550 1528년 文科,원암 삼봉서원/澄1498-1582/퇴계 1534년 文科/寅1502-30 고산/
진사 기암完1512-96,기린도찰방 李宏1515-73
3.眞城李門 各派 異稱; 周村宗 二十四世 門裔孫 李載賢 謹識
5-3.大派7-2온혜종파溫惠宗派-온혜파溫惠派,老松亭派,老松亭公派,判書公派,進士公派,
眞城君派,企庵公派 훈도공河 長子기암 完(마곡서원 享/樂山亭)
백송파白松派- 예천 호명면 백송리 행솔이
원고파元皐派-영해파(寧海派) 영덕 축산면 상원리
권희정女(李云侯)-禎----遇陽 縣監 (眞城李氏 上系)
府使 女 南伯庚 (英陽南氏中領公派)
女 鄭普文 (淸洲鄭氏 鄭枓,鄭琢의 高祖)
女 柳鳳壽 甲孫------女 安建----嗣宗
陽孫 順興人 繼宗
興陽 參軍
繼陽 - 埴-------潛--女 琴輔, 寅, 女권육-권호문
河--溫惠宗派(老松亭)
의-大竹派 외손 김윤사 윤안
瀣-貞愍公 溫溪 大司憲(三栢堂宗派)
澄-莘野(옥천파,東澗亭派)
滉-文純公 退溪(上溪宗派)
우松齋(松堂派)=女曺孝淵-조윤신-조광익 호익
女 오언의-오수정-죽유 오운
오수영:춘당 선성3필당
*연안이씨 사곡(송곡) 입향조 李垙용인-진사梅村 李愈1521-93, 栗里 李熹1532-92, 生員 訥軒 李應1536-97
**온계 長子 이복(내신 못뒤 장가)-고암 李沖(송재 셋째 손자/종산동 고미마을/孤山派)과
온계5子 혜 2子 李味道(종산 개금터/내신동 양지마/신당파)가 侍養孫으로 이거
***하리면 은산리 은풍파(은풍 현촌)/愚谷洞:邑谷 亭子村:솥정자//虎鳴面 白松洞:행소리.
內新洞(양지마(내동,신동,못뒤,범장골),종산동(고미,개금터)/知保面 大竹里(퇴계외가)/甘泉面 泉香里 石坪
***古山서원 경북 예천군 호명면 종산리 1779년 창건 1869년 훼철 난은 이동표 主享
----------------------------------------------------------
眞城李氏 文科 及弟者(아허헌 자료)
諱 字 호 시험 等位
이동표(李東標) 군칙(君則) 나은(懶隱) 숙종9년(계해, 1683) 증광시(增廣試) 丙科1
이령(李土+令) 자첨(子瞻) 지와(芝窩) 숙종4년(무오, 1678) 증광시(增廣試) 丙科29
이명익(李溟翼) 만리(萬里) 반초당(反招堂) 인조27년(기축, 1649) 정시(庭試) 丙科9
이문구(李文求) 고종31년(갑오, 1894) 전시(殿試) 丙科7
이문표(李文標) 정칙(正則) 인헌(仁軒) 숙종39년(계사, 1713) 增廣試 丙科41
이열도(李閱道) 정가(靜可) 우암(遇巖) 선조9년(병자, 1576) 별시(別試) 丙科1
이제겸(李濟兼) 사달(士達) 두릉(杜陵) 영조1년(을사, 1725) 증광시(增廣試) 丙科4
이래(李崍) 언첨(彦瞻) 주봉(柱峰) 인조2년(갑자, 1624) 式年試 丙科19 신당파
이충국(李忠國) 효이(孝而) 회우(悔尤) 영조26년(경오, 1750) 식년시(式年試) 丙科7
이돈(李燉) 광중(光仲) 호봉(壺峰) 선조34년(신축, 1601) 식년시(式年試) 丙科22
이회보(李回寶) 문상(文祥) 석병(石屛) 인조7년(기사, 1629) 별시(別試) 乙科1
이희무(李希楙) 덕자(德滋) 인재(仁齋) 인조26년(무자, 1648) 식년시(式年試) 丙科3
-------------------------------------------------------------
1. 집성촌(백송리 행소리마을)의 형성배경
경북 예천군 호명면 백송리는 퇴계의 둘째 형인 예천훈도醴泉訓導 이하(李河)公이 처가 함양박씨
세거지인 용문 금당실에 우거寓居하다가 둘째아들인 이굉(李宏 1515-1573)이 백송리로 입향하게
된다. 卵山에는 입향조인 찰방공 이굉과 우암 이열도의 묘가 있고 사두혈이라고 한다.
백송마을은 연소형국(燕巢形局)이라고 한다.
정조4년(1780년) 예천군수인 아버지 정재원을 따라 다산 정약용이 형 약전과 함께 와
반학정(伴鶴亭)에서 공부하였는데 예천 관아 서편에 있었다고 한다. 뒷날 정약용은 젊은 시절
예천에서 공부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예천을 공자와 맹자의 고향처럼 유학이 성행한 곳이란 의미에서
추로지향(鄒魯之鄕)이라 하였다. 정재원은 정약용과 함께 고평에 있는 정탁의 영정을 배알한 후 호명면 백송리의 선몽대에 올라 7대조인 정사우의 낡은 현편을 다시 새겨 걸어 놓고 ‘선몽대기’를 남겼다.
조동윤, 《길 따라 사람 따라 예천기행》, 역사만들기, 2003, pp.128~129.
2. 집성촌(세거지)의 풍수 ;신라시대나 고려시대에는 지배층들이 경주나 개성 같은 수도에 모여 살았다. 고려 말 두문동 72현 이후에는 양반 지배층들은 읍치(도시)에서 떨어진 향촌에서 주로 거주하였다. 1650년 이전까지는 남녀균분상속이어서 친족 외척 척족들이 혼거하였고 외가나 처가동네로 이주해 가는 경우가 흔했으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농토가 황폐화되면서 적장자(嫡長子) 위주로 상속법이 변화되면서 집성촌이 세거지로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집성촌에는 유교문화경관인 종가 서당 서원 정자 불천위사당 재실 정려 등이 잔존하고 있다. 집성촌의 입지나 집터와 서원터를 잡는데 풍수이론이 결정적으로 작용하고 있어 풍수형국론과 입지선정과정, 입향 배경들을 검토하는 것이 필요하다.
백송리 건지산과 난산(卵山)
3.선몽대; 백송리 내성천변에 선몽대(仙夢臺)는 퇴계 이황의 종손(從孫)이며 문하생인 우암 이열도(1538~1591)공이 1563년 창건한 정자로 선몽대 대호 세 글자는 퇴계선생의 친필이다. 퇴계선생이
신선이 나오는 꿈을 꾼 후 지은 퇴계 친필 현판과 퇴계선생의 시에 약포 정탁, 서애 류성룡, 학봉
김성일, 한음 이덕형, 금계 황준량, 청음 김상헌, 다산 정약용 등의 차운(次韻) 친필시가 게액되어 있다. 선몽대 위에 오르면 내성천 백사장의 평사십리가 펼쳐진다. 서당마을 28문중 오천서당
선몽대 현판(퇴계 친필,1563년) 퇴계 친필 시(가정嘉靖 계해癸亥 도산陶山)
松老高臺揷翠虛 白沙靑壁畫難如 吾今夜夜凭仙夢 莫恨前時趁賞疎
솔은 늙고 대는 높아서 푸른 하늘에 꽂힌 듯하고,
강변에 흰 모래와 푸른 벽은 그림 그리기보다 어렵구나.
내가 지금 밤마다 선몽대에 기대니 전날에 가서 기리지 못하였음을 한탄하노라.
(藥圃,西厓,鶴峯,금계,漢陰,愚伏,淸陰,茶山의 次韻詩,1563년 건립/ 마을숲 163p)
엎드려 종조부 퇴계선생 시를 차운하다
선인의 끼친 법이 오래도록 빈데 돌아갔으나, 끼친 뜻이 아직 있으니 이어받는 뜻도 그러 하도다.
두어칸 집과 기둥을 이제야 얻었으니 숨어 산 삶이 세정에만 소홀함이 아니었네. 작은 정자와 높은
시릉이 물 가운데 맑고 빈 것 같은데, 먼 개와 긴 내를 바라보면 뜻이 넓어지는 것 같다. 외로운
곡새와 떨어지는 나오리는 일만 형태를 드리니 늦은 바람 나는 비 또 뜸뜸이 나리네. 산에 비기고
물에 다다르니 층층한 봉우리가 공중에 솟았는데, 안개 끼인 문과 소나무 창문이 비단과 같도다.
오래 한가한 중을 짝하니 신선의 자리가 고요한 듯 가까이 오므로 특별히 세상 인연 먼 것을 깨닫겠네. 주인 이열도(1538-1591/ 1576년 문과), 자 정가, 호 우암, 진성인, 퇴계선생 종손從孫 門人
謹次 退溪先生韻;主人能自卜淸虛 閬苑玄都此不如 夢罷幾回臺上臥 滿天明月看星疎
삼가 퇴계선생시를 차운하다
주인이 능히 스스로 맑고 빈 곳을 점쳤는데 낭원(郎苑)과 현도(玄都)가 이보다 못하도다
꿈을 깨고 몇 번이나 대(臺) 위에 누워서 하늘에 찬 달과 별을 보았을까
*약포 정탁, 자 자정, 청주인, 퇴계문인, 시호 정간 *낭원은 신선이 사는 곳이요, 현도는 옥경산에 있다.
謹次仙夢臺韻 ; 高臺登眺若憑虛 漁釣生涯我不如 花落半庭春事晩 碧簾松影蕭疎(西厓)
삼가 선몽대 시를 차운하다
높은 대(臺)에 올라보니 공중을 의지한 것 같구나
고기잡고 낚시질하는 것, 나는 그러하질 못하였네
꽃이 뜰에 떨어지니 봄이 이미 늦었는데
푸른 주렴 솔 그림자가 다시 소조(蕭條)하도다
*서애 류성룡, 자 이현, 풍산인, 시호 문충, 퇴계문인
謹次仙夢臺韻 ; 半畝松陰倒碧虛 玉壺今日興何如 憑君更聽儒仙句 便覺塵緣立地疏
퇴계선생의 仙夢臺 韻을 공경히 次韻하다.(鶴峯續集 제1권)
넓다란 솔 그늘이 푸른 허공 가렸으니 술 마시는 오늘의 그 흥취가 어떠한가
그대 인해 유선儒仙의 시구 다시 들으니 속세 인연 그 자리서 멀어짐을 깨닫겠네.
*학봉 김성일, 자는 사순, 의성인, 시호 문충, 퇴계문인
(國譯 鶴峯全集 2, 정선용 譯, 1999, 민족문화추진회)
경건하게 선몽대 시를 차운하다
옥 같은 구름과 구슬 같은 달이 빈 대(臺)에 비치는데 유묵(遺墨)을 새로 새기니 그림 같구나
늘 이 대에 올라 신선의 꿈을 꾸고자 하니 주인이 나를 기다려 드리웠던 발을 걷는구나
*한음 이덕형, 자 명보, 광주인, 시호 문익
경건히 선몽대 시를 차운하다 敬次仙夢臺韻
모래가 희고 내가 맑아서 담담해 빈 것 같으니 沙白川明澹若虛
옥 같은 산이요 구슬 같은 전원에 비교하는 곳이 어떨까 玉山瓊圃較何如
신선의 땅이 하도 멀어 오기가 어렵다 하나 仙區萬里應難到
이 정자에 오고감을 게을리 하지 말자 來往斯亭旦莫疎
*청음 김상헌1570-1652; 윤근수 문인, 좌의정 鄭惟吉 外孫, 石室山人, 서간노인
경건히 벽위에 있는 운을 차운하여 선몽대 주인에게 드리고 겸하여 자리 위에 있는 여러분에게 보이다. 물 속에 있는 신선의 집과 같이 거울처럼 비치는데 주인의 마음마저 담박한 듯하네. 이틀 동안 선몽대에 오르내리니 천척이나 높은 세상 티끌이 생각에 소원하도다. 난정(蘭亭)의 옛 자취가 이미 허무하게 되었으니 좋은 일 이 때에 누구와 함께 할 것이냐. 거북이와 학 같은 분들이 거듭 놀게 되니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가을이 오매 서신을 보내는 것을 소흘하지 말진저
*다산 정약용(1762-1836)의 7대조 정사우(丁士優)
속인(俗人)이 이에 이르니 자연스레 마음이 허명하구나
신선을 꿈꾸는 마당에는 나래가 돋는 것 같도다
퇴계 선생이 먼저 시를 쓰고 우리 할아버지가 화답하였으니
예로부터 내려온 운치가 소흘하지 않았지요 * 정재유
정약용-선몽대기(記)
예천에서 동쪽으로 10여리 가면 한 냇가에 닿는다. 그 시내는 넘실대며 구불구불 이어져 흐르는데
깊은 곳은 매우 푸르고 낮은 곳은 맑은 파란색이었다. 시냇가는 깨끗한 모래와 흰 돌로 되어 있어,
바람이 흩어지는 노을의 아름다운 모습이 사람의 눈에 비쳐 들어온다. 시냇물을 따라 몇 리쯤 되는
곳에 이르면, 높은 절벽이 깎아 세운 듯이 서 있는데 다시 그 벼랑을 올라가면 한 정자를 볼 수 있다.
그 정자에는 선몽대라는 방(榜)이 붙어 있다. 선몽대의 좌우에는 우거진 수풀과 긴 대나무가 있는데,
시냇물에 비치는 햇빛과 돌의 색이 숲 그늘에 가리어 보일락 말락 하니 참으로 이색적인 풍경이었다.
대개 태백산 남쪽에서 시내와 산의 경치가 뛰어난 곳은 오로지 내성, 榮川(지금 영주), 예천이 최고인데 선몽대는 유독 그 기괴한 모양 때문에 여러 군에 이름이 났다. 하루는 아버지를 따라 정상국(鄭相國,
정탁)의 유상(遺像)을 배알하고, 길을 바꾸어 이 누대에 올랐다. 배회하며 바라보다가 이윽고 벽 위에
여러 시가 잇는 것을 보았는데, 그 중에 하나는 관찰사를 지내신 나의 선대 할아버지(7대조 정사우)께서 일찍이 지으신 것이었다. 시판(詩板)이 깨어져 글자가 갈라지고 한쪽 구석이 떨어져 나가기도 했으나, 字句는 빠진 것이 없었다. 아버지께서 손수 먼지를 떨어내시고 나에게 읽으라 하고서 말씀하시길,
"공이 일찍이 영남에 관찰사로 내려 왔을 때 이 누대에 오르신 것이다. 공이 지금부터 200여년 전에
사셨던 분인데 나와 네가 또 이 누대에 올라와서 즐기니, 어찌 기이한 일이 아니겠는가?" 하셨다.
그러고는 나에게 명하여 그 시판의 시를 옮겨 본떠서 번각(飜刻)하고 다시 단청을 입혀 걸어 놓게
하시고, 이윽고 나를 불러 기(記)를 쓰라고 하셨다.
* 정조4년(1780년) 예천군수인 아버지 정재원을 따라 19세의 다산 정약용이 형 손암 정약전(1801년
천주교 신유박해로 흑산도 유배 중 자산어보 저술)과 함께 와 책방도령으로 반학정(伴鶴亭)에서
공부하였는데 예천 관아 서편에 있었다고 한다. 뒷날 정약용은 젊은 시절 예천에서 공부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예천을 공자와 맹자의 고향처럼 유학이 성행한 곳이란 의미에서 추로지향(鄒魯之鄕)이라
하였다. 정재원은 정약용과 함께 고평에 있는 정탁의 영정을 배알한 후 호명면 백송리의 선몽대에 올
라 조상인 정사우의 낡은 현편을 다시 새겨 걸어 놓고 ‘선몽대기’를 남겼다.(기문을 작성함) 200년 전
7대조 선조가 시를 써 놓은 것을 아버지와 함께 다시 선몽대에 올라 기문을 쓰는 감회는 남 달랐으리라!
조동윤, 앞의 책, pp. 117-130.
*지난 가을 백송파 문중 시사 직전에 도둑이 들어와 선몽대의 문짝을 12개나 떼어 가서 선몽대 현판만 남겨 놓고 약포 서애 학봉 한음 청음 다산 제공의 시판을 떼어서 종가에서 보관하고 있다. 불행 중 다행으로 퇴계친필현판과 시들은 떼어 가지 않았다. 기껏 민속주점 장식용으로 팔려고 이런 짓을 하다니...
4.진성이씨 백송파 문중
1)진성이씨 백송파 입향조; 찰방공 이굉
온혜종파 7세 훈도공 하河공의 2子 이굉(李宏, 1515- 1573)-백송파 8세
이굉은 자字가 대용大容이며 이완李完의 아우이다. 정덕 을해년(1515년)에 났으며 예천으로 옮겨
살았고,관직은 찰방察訪을 지냈다. 퇴계 문인, 숙부叔父인 퇴계선생의 편지 2통이 전한다.
찰방공, 1530년대에 온혜에서 처가인? 백금리(행소리)로 移居하여 백송파 행소리 입향조이다.
묘는 백송 卵山에 있고 백담 구봉령선생이 묘갈명墓碣銘을 썼다. 配 안동 金遂良 部將 女
李宏:1515년생. 完(기암)의 弟. 滉의 문인. 詩文 알려짐. 기린도(황해도)察訪 역임.
▣참고:退溪門人錄 집필:이원걸/공람할 편지가 한 편이 있다.
*조카 굉宏과 아들 준寯에게 보냄
다른 것들은 전번 편지에 말하였다. 조카 치(온계공 4子)가 병을 얻은 지 이틀만인 오늘밤에 그만
구하지 못하고 말았으니 너무나 비통하다. 지난 겨울에 말에서 떨어진 뒤 점점 비약憊弱해지더니 2월
이후에는 목구멍이 막히고 목소리가 쉬었다. 그런데도 병은 생각지 않고 교(온계공 3자,현감 원암)와
함께 명복命福의 집에 와 있으면서 글을 읽었다. 그러다가 16일 부터 좀 불편한 것 같아서 온계에
올라갔는데 그 이튿날 구토를 하고 상기上氣와 내열內熱로 물만 입에 넣어도 토했다. 그러더니 오늘밤 이경二更에 기어코 이렇게 되고 말았다. 우리 가문이 무엇을 잘못했기에 연달아 이런 일이 생긴단 말이냐? 너무도 상서롭지 못하니 아무리 통곡하여도 끝이 없겠다. 더구나 저 잉부孕婦를 어떻게 한단 말이냐? 밤에 가서 임곡臨哭하고 병이 날까 두려워 집에 돌아 왔다. 정신이 어지러워 대강 이만 적는다.
**완完 굉宏 재宰에게
문손文孫이 와서 너희들의 편지와 차원差員(중요한 임무를 지워 임시로 파견하던 관원/차사 差使員)이 전후하여 논보論報한 글을 보았으나,일의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를 못하니 한갓 괴롭고 답답한 마음만 더할 뿐이다. 감사의 처치處置한 뜻을 자세히 살펴보니 매우 헤아려서 하였는데, 이것은 전적으로 차원이 보고를 좋게 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조공趙公이 고쳐서 보고한 내용은 역시 가벼이 하여
용서하지 않음이 심하니 어찌 해야 하느냐? 그 뒤에 차원을 고쳐서 정했는지의 여부는 알지 못하겠으나 고치든 안고치든 간에 일의 관련등은 반드시 다시 조사 문초할 것이다. 다시 문초할 때에는 박성림
朴成林이 공초한, 빈 가마를 멜 사람을 구하기 위해 아전을 시켜 찾아서 잡아왔다는 말은 다시
거론하지 말고, 고쳐서 공술(供述)하기를,처음에도 역시 들어왔다는 단락의 어느 조항은 들어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있지 않았음이 사실임을 알았다는 등으로 하게 해야 할 것이다. ...
官의 납초사納招事에 대하여 잘 밝히라는 이야기였다.
2) 9세 李閱道, 1538-1591)字 靜可 號 遇巖, 殯所골 侍墓(13세) 從祖父퇴계 門下-
2편의 퇴계서찰이 있다. 조상의 추증을 알리고,학문을 열심히 할 것과 ‘항상 충(忠直),신(信義),
겸(謙讓),근(勤愼)으로 조신(操身)하라’고 가르쳤다. 퇴계가 손자대에서는(道자 항렬) 가장 훌륭한
인재로 촉망했다. 선몽대를 만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편액과 제시를 써 주었다.(권오봉,1988,
예던길,160쪽) 퇴계가 손자들 중에 가장 촉망을 두터이 한사람이며, 忠信 謙謹의 상조훈常操訓을
끼쳤다. 선몽대를 쌓아 퇴계의 시를 얻었다.(권오봉, 1996, 이퇴계의 實行儒學,185)
*열도閱道에게 답함;
편지를 보고 잘 있다니 반갑다. 여기는 모두 여전하다. 추증한 직함을 별지에
써서 보내니 삼가 기억하거라. 그리고 시험응시에 조심하여 노력하여라.
**열도에게 답함; 사람이 와서 편지를 보고 잘 알았다. 이 곳은 모두 여전하다. 다만 혜(온계공 5子)의
병이 걱정인데 지금은 좀 차도가 있다. 네가 이번에 오지 못한 것은 노마奴馬의 사정 때문이니 전날에 증조의 묘제에 아무 까닭없이 안 온 것과는 비교할 수 없다. 무슨 잘못이 있겠느냐? 당부하는 것은
학업에 힘써서 충신忠信과 겸근謙謹으로 일상의 조신操身을 삼는 것이 좋겠다. 門徒錄 이열도
*1563년 仙夢臺 건립, 퇴계 친필 현판 시1수 ,약포, 서애, 학봉, 금계 황준량, 한음 이덕형,
우복 정경세, 청음 김상헌, 茶山 정약용, 절강성 주대승, 이동은 次韻詩,
*이열도(李閱道):1538(중종 33, 무술)~1591(선조 24, 신묘). 본관眞城. 字 靜可. 號 遇巖. 宏의 子. 1576년(선조 9) 문과 급제. 승문원 정자, 사헌부 감찰,예조정랑,평안都事, 고령군수, 경산현감/
영양인 牧使 남희석女. 은퇴후 仙夢臺에서 소요하며 지냄. 유고 1924년 소실 ▣참고:國朝榜目
眞城李氏譜; 집필:김태안
*白松里(백송리)는 흰 소나무가 있어 힌소리가 변하여 행소리 또는 백송(白松).
◇ 백송파 9세 이열도(李閱道) : 본관은 진보요, 자는 정가이며 찰방 굉의 아들이고, 퇴계선생의 從孫
이다. 1576년 별시문과 2등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들고 벼슬이 예조좌랑에 이르고 만년에 선몽대를
지어 놓고 자연의 절정을 마음껫 즐겼으며 명공과 거경(퇴계 이황 서애 유성룡 학봉 김성일 약포 정탁 한음 이덕형 청음 김상헌 다산 정약용)이 많이 노닐고 시를 읊었으며 호명의 백금리에 살았고 광지가
있다. 공의 이름은 열도에 자는 정가이니 그 선대의 세계와 관훈과 이력은 경의 종조부 문순공
(퇴계선생)의 묘갈과 그 아버님 찰방공의 광지에 자세하였다. 공이 1538년(중종33)년에 태어났고
남달리 영특하여 스스로 글을 읽을 줄 알았으며 열세살에 어머니 안동김씨를 여의었어도 예법대로
집상하였고(빈소골이라는 지명이 남아 있음) 자라서는 문순공 퇴계 문하에서 수업하였다.
1573년 가을에 아버지가 임지에서 별세하였다는 기별을 받고 달려가 시신을 받들고 모셔와 장사를
치루고 3년 여묘하고 복을 벗은 다음 1576년에 별시문과에 병과 제일인으로 급제하여 곧 승문원에
들고 정자 박사 감찰 예조좌랑을 역임하다가 오래지 아니하여 뜻에 맞지 아니하는 동료들의 시기로
은계도(강원도 회양군 화북면) 찰방으로 나갔고 임기를 마치자 고령현감으로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사임하니 얼마 뒤에 평안도 도사로 임명되어 부임했으나 병으로 사양하고 돌아온 후 형조좌랑,
금산군수, 강원도 도사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다음해에 경산현감에 부임하여 정사가 매우
엄격하면서도 분명하니 아전이나 백성이 속이지 못하였고, 4년후 사임하고 집에 돌아와 사벽이
소연하여 아무것도 없고 다만 책과 뜰에 핀 꽃 뿐이더라. 공이 평소 잔병이 많더니 몸져 누운지
반년 만에 의약의 효험도 없이 1591년(선조 24)에 춘추 54세로 작고하였다.
*허백당 김양진 대지재사-호명면 본리 약포묘소-백송마을 선몽대 난산-원곡리 안질 연복군 묘-
사곡리 무릉정-지보면 익장 정묘를 연결하여 입향조 묘소를 연계한다면 풍부한 내용이 있고
관광자원이 있는 풍수인물기행도 가능하다.
■ 솔경지 쑤-십승지인 금당실 쑤, 대수의 향나무-석송령-선몽대 송림 등의 비보
퇴계학파의 핵심 학자들이 이렇게 망라하여 선생의 시에 차운한 현판이 걸린 정자는 어느 곳에서도
찾아보기 어렵다. 또한 누마루에서 보는 내성천의 유장한 흐름, 십리백사장과 송림(잘 생긴 노송 숲)은 장대한 경관을 연출하고 있다. 문화역사 인물사적 측면에서 퇴계학맥을 한말까지 이어간 수제자인
서애와 학봉, 임진왜란을 극복한 공이 큰 약포 정탁,한음 이덕형, 서애 수제자이며 임란의병장이었던
우복 정경세,실학을 완성했던 다산 정약용 등 전국 어느 누각에도 뒤지지 않는다. 전국 최고의 밝은
모래 백사장 과 맑은 내성천 물과 솔숲도 또한 그러하다.
*仙夢臺(선몽대)- 최윤상; 풍수학인의 시각; 선몽대는 맑은 하늘을 배경으로 물위에 살포시 떠오른
芙蓉[부용]과 같았다. 내성천 모래밭 明沙十里를 한눈으로 볼 수 있고 정자주변에 천년을 자랑하는
울창한 노송이 있으며 주변에는 빼어난 경관과 더불어 서당마을과 조선중기 건축사의 귀중한 자료인
연안 이씨 별좌공 종택, 약포 정탁 선생의 유물을 보존하고 있는 정충사. 흐르는 물줄기를 그대로
보내기에는 아쉬워서인지 군데군데 水中에 돌이나 흙이 점차 퇴적하여 쌓여진 羅星(나성)들을 보았다. 平沙落雁形 平沙下雁形 飛雁投水形./卵山 사두혈(巳頭穴)노서하전(老鼠下田)
----------------------------------------------------------
참고문헌
안동대학교 안동문화연구소, 2004, 예천 금당실 맛질마을: 정감록이 꼽은 길지, 예문서원
안동대학교 안동문화연구소, 2005, 터를 안고 仁을 펴다: 퇴계가 굽어보는 하계마을,예문서원
국학진흥연구사업추진위원회, 2002, 예천 맛질 박씨가 일기 1.일용 편(日用) 2.일기 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권문해 저, 남명학연구소ㆍ경상 한문학연구회 역, 2003, 대동운부군옥 1-10, 소명출판
권오봉, 1988, 예던 길-퇴계선생의 생활실사, 우신출판사
권오봉, 1996, 이퇴계의 실행 유학, 학사원
조동윤, 《길 따라 사람 따라 예천기행》, 역사만들기, 2003, pp.128~129.
최원석, <영남 지방의 裨補>, 고려대학교 지리교육과 박사학위 논문. 2001
국민대학교 국사학과,2003, <<우리 역사문화의 갈래를 찾아서 안동문화권>>, 역사공간
권기모, 1999, <<정겨운 예천산하>>, 예당
권상로, 1994, <<한국지명연혁사전>., 이화문화출판사(1961, 韓國地名沿革考, 동국문화사).
김학범ㆍ장동수, 1994, <<마을숲>>, 悅話堂
서주석, 2000, 안동문화산책, 이화문화사
송지향, 1983, 안동향토지 상하, 대성문화사
안동대학교 민속문화연구소, 안동양반의 생활문화, 안동대 민속학연구소
안동대학 안동문화연구소, 1988, 경북북부지방의 전통문화, 경상북도
안병직ㆍ이영훈, 2001, 맛질의 농민들-한국 근세 촌락생활사-, 일조각 (일기형 가계출납부)
이완규, 2001, 안동풍수기행: 돌혈의 땅과 인물, 예문서원
이완규, 2001, 안동풍수기행: 와혈의 땅과 인물, 예문서원
최원석, 2000, 도선국사 따라 걷는 우리 땅 풍수기행, 시공사
최원석, 2001a, 영남 지방의 裨補, 고려대학교 지리교육과 박사학위 논문.
최창조, 1997, 한국의 자생풍수, 민음사
황위주, 2000, “예천지역의 퇴계학파”, 한국의 철학 28호, 113-148, 경북대학교 퇴계연구소
경북마을지 하권, 1992, 경상북도ㆍ경북향토사연구협의회
경상북도지명유래총람, 1984, 경상북도교육위원회
<<내고장 전통가꾸기>>, 1981, 예천군
<<내고장 예천>>, 1984, 예천군
예천군지편찬위원회, <<예천군지>>, 1988, 예천군
예천향토문화연구회, <<예천의 숨결>>, 1991, 예천군
예천향토문화연구회, <<예천촌락사>>, 1992, 예천군
예천향토문화연구회, 1994, <<國譯 襄陽誌(1661)>>
예천문화원, 1995, <<예천문화 제8집>>
장병창 편저, 2002, <<예천 대사전 제10권>>
예천군 기획감사실, 2001, <<사진으로 보는 예천 50년사>>
진성이씨온혜종파세보, 1981, 회상사
이동수, 1986, 국역 진성이씨 白松派先世文蹟
진성이씨 백송파 종중, 1994, 仙夢臺略誌
仙夢臺誌 上下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