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장. 밤비
나루터에 닿았을 때 해는 서편으로 엄치 기울어져서 사선으로 보내오는 빛살을 받고 물결은 번득번득 황금빛으로 희번덕이고 있었다. 강구를 향해 떠내려가는 긴 뗏목배, 장대를 든 뗏목꾼은 은자와도 같은 모습으로 이켠 나루터를 바라보는 것이었다. 철새가 무리를 지어서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들꽃들이 피어 있는 곁을 흰모시 두루마기 입은 길상이 성큼성큼 걸어가고 회색 양복바지에 누리끼한 세루 양복저고리, 역시 누루끼한 여름 모자를 쓴 송장환도 함께 걷는데 길상이보다 키는 약간 낮은 편이다. 이들이 회령에 들어서니 땅거미가 질 무렵, 잡화상 점두로부터 비쳐 나온 몇 개의 등불은 희미하고 칠월로 접어든 초여름의 저녁 바람이 살랑거린다. 오는 사람 가는 사람, 거리는 철새가 무리를 지어서 날으던 하늘처럼 어수선하다. 짐을 진 지게꾼은 헝클어진 상투에 땀을 흘리며 가고 화주인 듯 땅딸보의 사내는 팔자걸음으로 따라간다. 한 팔은 머리에 인 곡식 자루를 잡고 한 팔만 휘저으며 바삐 가는 아낙의 등에는 띠로 얽어맨, 잠든 어린것의 고개가 힘없이 흔들거리고 양복쟁이가 가는가 하면, 샤벨을 철거덕거리며 순사가 지나간다. 담뱃가게 창구 안에는 마루마게(기혼 여자들 머리 모양)의 기생 퇴물 같은 일녀가 뜨개질을 하고 있었다. 그 옆의 검정고양이가 거리를 향해 기지개를 켠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송 선생께서는?" 기름이 없는 머리칼을 더풀거리며 걷고 있는 송장환에게 길상이 묻는다. "여관에 들어야지요. 함께 듭시다." 이들은 우연히 한 마차를 타고 같이 왔다. 송장환은 청진까지 교사를 데리러 간다고 했다. 이들 앞을 지팡이를 짚은 늙은 일본인 한 사람이 걸어간다. 쥐색 히도에(홑겹옷) 아랫도리를 양켠 다리에서부터 걷어올려 검정 오비(허리끈) 사이에 끼우고, 그러니까 정강이는 물론 엉덩이도 아슬아슬한데, 와라지(왜 짚새기)를 신은 늙은 사내는 등에 봇짐 하나를 짊어지고 있었다. "애크망이나! 개상놈으, 망칙스럽다." 사내의 드러난 정강이를 보고 기겁을 한 아낙이 얼른 길을 비켜선다. "저 늙은 것은 뭘 해처먹겠다고 여까지 왔을까? 송장환이 중얼거렸다. "자식놈이라도 찾아온 게지요. 행색을 보아하니 죄 없는 백성인 성싶소." "그래요? 내 눈에는 굶주린 늙은 짐승 같소." 송장환은 길가에 침을 탁 뱉는다. "하늘 아래, 아마 거지들은 모두가 다 동족일 게요... 도적놈들이 황금덩이를 가져와서 나누어 쓰자 할 리도 없을 게고." "하여간에 나, 저것들 꼴 보기 싫어서 강만 넘어오면 속이 뒤틀려요. 용정에선 그래도 손님 처신은 하는데 여기 것들은 사뭇 주인 행셀 한단 말이오." 그들은 한양여관으로 들어간다. 한양여관은 회령 출입이 잦은 길상의 단골집이다. "어서 오시오! 아주머니, 용정 손님 오셨수." 사환아이가 소리친다. "용정 손님이라니?" 방문이 드르르 열린다. "어서 오시오. 자주 보겠구먼요." 사십을 넘긴 듯 뚱뚱한 여자는 붙임성있게 말했다. "한 분은 초면이구... 석아, 조용한 별채로 어서 모셔라." "예에 - 손님." 사환아이는 손가방을 받아들면서 덧니를 드러내고 웃는다. 주근깨 투성이의 얼굴이다. 옆집을 사들여서 개조한 여관은 ㄹ자 집이라고 할까. 몇 번이나 모퉁이를 돌아서 들어간 곳에 본채와는 반대 방향으로 마루가 난 한옥인데 담장에 붙여서 장작이 쌓여 있다. 사환아이는 입구에서 안쪽, 끄트머리 방의 방문을 활짝 열어놓더니 방석 두 개를 한 손에 한 개씩, 마치 손뼉을 친 모양으로 툭툭 먼지를 털어낸다. "함께 드실 거죠?" "음." 송장환의 대꾸다. 남폿불을 켜놓은 사환아이는 다시 물었다. "저녁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먹어야지." 이번에도 송장환이 말했다. 사환아이가 나가자 퀴퀴한 냄새가 나는 방안으로 들어선 송장환은 옆벽 높다란 곳의 들창을 살펴보더니 모자와 양복저고리를 벗어 걸어놓고 자리에 앉는다. 길상은 두루마기 자락을 걷으며 앉는다. "비나 오시지 말아야겠는데." 송장환이 열려진 방문 밖을 내다본다. 하늘에는 별이 나돋기 시작했으나 어째 희미하다. 연푸른 하늘에는 군데군데 검은 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올 때는 잘 구워진 벽돌짝처럼 칠월 햇볕에 탄탄해진 길을 마차는 기세 좋게 달려왔었건만. 옆방에서 손님이 든 모양이다. 방문을 화다닥 열어젖히는 소리가 났다. "이봐! 색시!" "옛꼬망." 장작을 안고 가던 젊은 여자의 대답이다. "재떨이도 없구 성냥도 좀 갖다놔요." "옛꼬망." 송장환은 방문을 닫는다. "청진에는 여러 날 묵으시오?" 길상이 묻는다. "곧 돌아와야지요. 학교 일이 마음에 놓이지 않아서 말입니다. 아이들이도 무슨 짓을 할지." 하고 송장환은 허허 웃는다. 며칠 전에 사소하긴 했으나 크게 벌어질 수도 있는 사건이 하나 있었던 것이다. 홍이가 저질렀던 일이어서 길상도 관여했는데, 그러니까 큰 아이들이 모여서 계획하고 있던 배일운동을 홍이가 남 먼저 행동으로 나간 것이지만 그것은 즉흥이요 우발이었다. 길 가다가 만난 간도보통학교 생도의 책보를 빼앗아 달아나던 홍이가 책보를 강물에 집어던지고 뒤쫓아온 상대 아이에게 왜놈의 종이라 욕지거리를 하고 주먹질까지 했던 것이다. 이 사건이 벌어지면서 송장환은 비로소 생도들이 저지를 뻔했던 일을 알고 당황하였다. 상대편 아이의 아비는 규모가 작은 곡물상으로 길상과는 천면이 있어서 송장환과 세 사람이 술자리를 마련하게 되었고 일이 밖에 퍼지지 않게 마무리되긴 했다. 그러지 않아도 배일사상의 온상인 사립학교에 대해서는 티끌을 찾고 있던 일본 영사관이고 보면, 상대편 아이 아비가 친일분자 아니어서 다행이었지 덕분에 송장환도 미연에 아이들을 무마할 수 있었다. 그러나 송장환은 내심 매우 만족해 있었다. "손님, 여기 재떨이 가져왔소꼬망." 여자의 목소리가 문밖에서 들려왔다. "안주인이 버릇을 잘못 가르쳤구먼." 옆방 손님의 잡음이 섞여 목쉰 듯한 음성이다. "가져왔으면 방에 들어와서 놓아두고 나갈 일이지, 아 그래 날더러 받으라 그 말이냐?" 여자는 방으로 들어가는 기색이다. "이봐, 색시." "옛꼬망." "사람이 그리 눈치가 없어서야 어떻게 사누?" "무시기 말심입매까?" "내 아까 들어오면서부터 눈여겨봤지. 외양이 그만했으면 사내 눈치도 볼 줄 알아야 안 그래?" "..." "어때? 오늘밤 나하고 잘까?" "양이 어디새 그런 말으 하지비?" 여자의 목청이 쨍! 하고 울린다. "허허어, 이 맹꽁이 좀 보게? 아, 누이 좋고 매부 좋고, 돈 벌고 재미보고." 음탕스런 웃음소리. "앙이! 어째 이러지비!" 사내가 손목이라도 잡았는지 송장환은 눈살을 찌푸리고 길상은 얼굴을 숙인다. "앙이! 이 불한당놈으! 놓지 못하겠니야," 말소리가 뚝 끊어지면서 버둥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순간 송장환이 벌떡 일어섰다. 옆방으로 쫓아간다. 방문은 반쯤 열려져 있었다. "이 무슨 짓이오!" 사내는 여자의 손목을 잡은 게 아니었고 목을 누르듯 껴안고 있었다. 움찔하고 놀란 사내가 팔의 힘을 빼는 순간 여자는 노여움과 수치심에 얼굴이 자줏빛이 되어 달려나가고 염치 좋은 치한은, 나이도 오십이 다 돼 보이는데, 우르르 마루로 쫓아나온다. "대관절 넌 누구냐?" 오히려 삿대질이다. "나는 옆방에 든 손이오." "손이면 손이지, 발이 아니고 손이라면 남의 방에는 왜 와서 기웃거리는 게야!" 비쭉한 턱수염이 덜덜 떤다. "보아하니 체면 차릴 연세도 되셨는데 무슨 추태시오. 여기가 청룬줄 아시었소?" "아아니 이놈 봐라? 이마빡에 피도 안 마른 놈이, 그래 네놈이 그년의 서방이더란 말이냐?" "말씀 삼가시오." "이놈이!" "이 양반이 왜 이러시오?" "뭣이 어쩌구 어째?" 주먹을 휘두르는데 그 팔목을 송장환이 재빠르게 낚아채서 꽉 누른다. "젊은 사람한테 봉변을 당해야겠소?" "이놈이 사람을 치네!" 팔목을 잡힌 채 어정쩡해가지고 사내는 엄살을 부린다. "송선생, 그만 내버려두시오." 길상이 언제 나왔는지 뒤에서 말을 걸었다. 그와 동시 여관집 안주인과 사환아이가 황황히 쫓아왔다. "왜 이러시오, 장 주사." "아아니 안주인, 이런 법도 있소?" "허허 장 주사아." "젊은 놈들이 당을 지어 나잇살이나 먹은 사람한테 행패라니!" 제 한 일은 선반 위에 올려놓고 멀찍이 서 있는 길상이까지 몰아서, 무안쩍어 그랬을 테지만 크다만 눈알이 빠져나올 만큼 부릅뜨고 호통치는 꼴이 가관은 가관이다. 기가 막힌 송장환과 길상이 마주보며 쓴웃음을 짓는다. 안주인은 대강 사정을 알고 온 모양이었으나 산전수전 다 겪은 풍상꾼이라, "장 주사, 고정하시오. 그놈의 계집이 본시 성미가 못돼놔서, 우리 집에 온 지도 얼마 되지 않았어요. 그러니 장 주사가 어떤 양반인지 알 턱이 있나요?" 사내 팔을 잡고 등을 두드리는 시늉까지 한다. "계집은 그렇다 치고, 어디 순 불한당놈들이 장유유서도 모른다 그 말인고?" 마당을 향해 침을 뱉는다. "젊은 사람들이 사정도 모르고, 자아 방으로 들어가시오." 안주인은 송장환과 길상을 떼민다. 두 사람이 여전히 쓴웃음을 머금은 채 방으로 들어오는데 "나 여관 옮기겠소! 천정에 뱀 든 걸 참았지, 저놈의 불한당놈들하고는," 안주인은 계속 달랬으나 사내는 나갈 채비를 차리는 기색이다. "장 주사, 어째 이러시오? 수년 주객인데, 내 그 계집 불러다 혼을 내겠소. 석아!" "예!" "옥이에미 좀 오라고 해!" "여기 아니면 여관이 없나?" 사내는 떨어진 위신을 기어 세울 심산인지 말리는 안주인 손을 뿌리치고 나가는 모양이다. "입맛 씁쓸하군." 송장환이 피식 웃는다. "아주망이 부르셨습매까?" "부르셨습매까? 그래 불렀다!" "..." "너 여기가 어딘 줄 아니?" "..." "설마 여염집으로 잘못 안 건 아니겠지?" "미안합꼬망." "내 애당초 뭐래든? 견디기 어려울 거라 하지 않았어? 잘 생각해 보라구 하지 않았느냐 말이야. 더구나 애까지 달구서, 애걸하길래 사정을 봐준 건데 이렇게 손님을 쫓아버린대서야 장사가 되겠어?" "손님이," "손님이 널 잡아먹겠다던? 설사 좀 지나쳤다손 치더라도 이런 영업집에 있는 이상 비위 상하지 않고 슬쩍 받아넘길 줄 알아얄 거 아니냐 말이다. 그런 투로 톡톡 쏘아대다간, 손발 끊어지기 십상이지. 본시부터 여관업이란 별의별 손님들이 드나들고 이런 사람 저런 사람, 어디 사람이면 다 같은 줄 아니?" "아주망이 앞으로 조심하겠습매다. 한 번만 너그럽기 용서하옵소." "아니할 말로 손님이 손목 한번 잡았음 어때? 닳아지는 것도 아니겠고 그러구러 너도 돈푼이나 얻어 쓸 게 아니냐? 물정 모르는 계집애도 아니겠고 손님이 등을 긁어 달래면 긁는 시늉이라도 해야 하는 게야." "아주머니 그만들 하시오. 여관 간판 갈아단다면 모르까, 여관업에 청루업까지 겸할 수야 있소?" 방안에 앉은 채 따끔하게 한마디, 길상이 찌른다. "아니 그, 글쎄 그자의 버릇을 내 모르지는 않는데 시끄러운 게 귀찮아서 말이오." 안주인은 당황한다. "앞으로 조심해, 사람이 살자면 별의별 일을 다 겪는 게야. 밥 먹는 일이 그리 수울한 줄 아니?" 하다가 우물쭈물 나가는가 아뭇소리가 없다. "밥 먹는 일이 그리 수울한 줄 아느냐구... 하긴 그렇지." 송장환의 말이다. 저녁을 먹은 뒤 사환아이가 밥상을 물리자 송장환은 양복저고리를 내려 입고 모자를 쓰면서 "나 잠시 나갔다 오겠소." "그러시오." 혼자 된 길상은 두루마기를 벗어 걸고 조끼주머니 속에 꼬기꼬기 접어 넣은 신문을 꺼내어 남폿불 밑으로 옮겨 앉는다. 앞뒤의 기사를 대강 훑어보고 만주 방면에 조선인 모발을 수출한다는 제목의 기사를 읽기 시작한다. 내용인즉 요즘 조선인들 간에 단발하는 풍이 성행한다는 것이요, 잘라낸 모발은 청국인 편체에 쓰이기 때문에 만주로 수출되어 그 값세가 수월찮다는 것이다. 서울서 발행되는 총독부의 어용 신문 매일신보다. "손님 계십매까." 길상이 고개를 든다. "손님." "네. 어째 그러시오." 길상은 아까 소동을 일으켰던 여인이라는 것을 알았다. "저어 이부자리를 가져왔습매다." "아아 네." 여자는 방문을 열었다. 길상은 읽던 신문을 접고 한켠으로 비켜 앉는다. 여자는 얇삭한 요 이부자리 한 벌을 방에 들여놓고 "손님." "네." "아까는 소란을 피워서 죄송하옵꼬망." "아니, 뭐." 하다가 놀란다. 석 달 전에 불이 난 다음 다음날 길상이 응칠이를 데리고 회령으로 오던 마차 속에서 만나 여자였다. 배고프다고 우는 계집아이를 잡으러 왔었던, 응칠이 말로는 가스집이라던. 아직 길상을 알아보지 못하는 모양이었고 여자는 경황이 없었던 그때보다 훨씬 아름다웠다. 남폿불이 어른거리는 눈시울에 눈물이 맺힌 듯. 길상은 이상한 감동과 흥분을 느낀다. '아까 안주인이 옥이 에미라 했던가?' 나머지 이불 한 채와 베개를 방안으로 옮겨온 여자는 "손님." "네." "자리를 깔아드리옵께나?" "괜찮소!" 화난 목소리에 껌적 놀라며 여자는 눈을 든다. "나중에 동행이 오면 우리가 깔고 자겠소." "아니," "..." "저어 손님으... 신평리에서," 길상은 웃는다. 왜 웃었는지 아까는 또 왜 화를 냈는지, 미묘한 감정의 틈바구니 속에 끼여든 것을 느낀다. "애기는 잘 크오?" "옛꼬망. 염치없습매다." 눈에서 눈물이 왈칵 쏟아진다. "그때는 인사도 양이 하고서리... 이곳서 참말입지 우세스럽소꼬망." "그런 말씀 마시오. 벌어먹고 사는 일이 우세스러울 것 조금도 없습니다." 울음을 참으며 "동행하신 손님으 오시거든 감사스럽다는 말씀 전해주옵소." "조금도 개의하지 마시오." "그, 그라믄 안녕히 주무시옵께나." 여자는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며 물러선다. 신돌 위에서 신발 신는 소리, 마당을 밟고 가는 발자국 소리, 그리고 사라진다. 길상은 이불 위에 놓인 베개 하나를 낚아채서 벌렁 누워버린다. 갑자기 사방이 적막의 덩어리처럼 길상의 가슴을 내리누른다. '여자...' 천장에 환을 그려놓은 남폿불의 등피 그림자를 멀거니 올려다본다. 용정에서 풀려나왔다는 기분, 그것은 주술에서 풀려 나온 기분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몸이 자유로워졌다는 자각이 왜 이리 무거운가. 그 이유를 길상은 물론 알고 있다. 그 동안 잠재워둔 젊은 육신이 반란을 일으키기 때문이라는 것을. 강을 넘고 일단 회령에 오기만 하면, 회령 땅은 길상에게 있어서 자유와 죄업의 고장이었는지도 모른다. '여자... 계집... 그만 송애 그 계집애를 얻어서 살까?' 눅진눅진하게 솟아나는 땀과도 같은 유혹의 감각이 춘일관의 작부 화심을 연상케 한다. 지폐 한 두 장을 던져주면 기다란 손가락으로 얼른 주워들던 화심이, 부스스한 머리칼이며 조그마한 눈과 주걱턱 위에 불빛이 미끄러지고, 그 주걱턱을 때려 부숴버리고 싶었던 미움, 어금니를 베물고 지긋이 누르면 다시 솟아오르는 것은 구토증이었다. 자기 자신에 대한 구역질나는 혐오였다. 늦은 밤길 그림자를 밟고 여관으로 돌아오면 술에 취해서 잠이 들고. 처음 여자와 동침했던 날 밤에는 여관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낯선 주점에서 술을 진탕 마시고 그곳에서 쓰러져 잤다. 손님, 봉순이라는 사람이 뉘신데 내내 부르고 울고 하셨지요? 해장국을 권하며 주점의 사내가 놀려대듯 물었었다. 내가요? 하다가 길상은 허허헛 하고 웃었다. 별안간 빗방울이 후둑후둑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온다. 장작을 덮은 함석을 때리는 소리다. 그러더니 싸아 하고 들려오는 빗소리, 빗발은 고르게 쏟아진다. '기어 비가 쏟아지는군.' 길상은 송장환이 날씨 걱정을 하던 일을 생각하긴 했으나 실컷 비가 왔으면, 강물이 범람하고 길이 끊어지고 그러면 용정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돌아가지 못하면 어떻게 되나? 어떻게 되나? 어떻게... 하다가 길상은 깜박 잠이 들었다. "어이쿠!" 신돌 위에 후닥닥 뛰어오르는 구둣발 소리가 났다. 송장환이 돌아온 것이다. "이거 야단났구먼." 방문을 열고 송장환이 들어섰다. "김형 주무시오?" "아, 아니오." 길상이 일어나 앉는다. 송장환의 머리칼에서 물방울이 반짝인다. "비를 맞았군요." "뛰어왔는데도, 아 글쎄 술을 사는데 비가," 하다가 술병을 치켜들어 보이며 "김형하고 함께 할려고, 술상 보아달라 일렀으니 곧 가져올 게요." 송장환은 윗도리를 벗어 걸고 가방 속에서 수건을 꺼내어 얼굴, 머리를 닦고 양복바지를 슬쩍슬쩍 닦는다. "이런 날엔 술 안 마시고는 못 견딜 것 같소." "모자는 어떻게 했소?" "아니, 내가... 깜박 잊고 그 댁에 놔두고 왔구먼." 껄껄껄 웃을 줄 알았는데 송장환은 얼굴을 찌푸린다. "에잇! 좋은 소식이란 하나도 없고 정신도 나가게 됐수다." 수건을 던지고 펄썩 주저앉는다. 이윽고 사환아이가 상을 보아왔다. 두 사람은 술상을 마주하고 "김형, 잔 드시오." "네." 비에 쫓겨 들어왔는지 조그마한 부전나비 한 마리가 주변을 어지럽게 맴을 돌다가 술상 가까이로 온다. 나비를 후려 잡은 송장환이 방문을 연다. 굵은 빗발, 높아지는 빗소리, 나비를 버리고 방문을 닫는다. 술을 마시고 붓고 권하고 하면서 취해오기를 기다리는지 서로 말이 없다. 길상과 송장환은 꽤 터놓고 지내는 사이였다. 한집에서 기거하는 상현은 손님으로 조심스럽게 대접하면서 어느 면으로든지 거리가 먼 길상을 형님 대하듯 친구 대하듯, 송장환의 기분에는 상현보다 길상이 맞는 모양이었다. 길상도 그의 신실한 인간성을 신뢰하여 무관하게 대하는 듯싶었다. 언제였던가 술자리에서의 일이었는데 동학란 얘기가 나왔던 것이다. 술김에 그랬을 테지만 송장환은 동학의 접주 김개주를 찬양하며 열광적으로 한바탕 떠들어댔던 것이다. 길상은 온건한 성품의 그가 살인귀로까지 구전되어 온 김개주를 찬양하는 게 이상했다. 그도 술김에 "거 김 아무개, 실은 내 삼촌뻘 되는 사람이란 말이오." 하고 한방 터뜨렸던 것이다. "뭐라구요!" "하하핫... 하하핫... 내 그 내력을 얘기하리다. 실은 삼촌은 고사하고 부모도 없는 놈이오만 김 아무개 그 사람한테 우관이라는 형님이 계시었소. 중이지요. 그 스님께서 나를 줏어다 길러주셨는데 부모 없는 놈한테 성씨인들 있었겠소? 해서 그 스님 성씨를 따서 김가이니, 따져 보슈. 삼촌뻘이 안 되는가." "허허, 이거 참으로 기연이오. 그래 김형은 그 영웅을 만나보신 일이 있소?" "내가 여덟 살 아니면 아홉? 그쯤해서 세상을 하직한 사람을 어디서 만납디까?" "그거 유감이오, 유감. 허허 참, 그러면 그분의 형 되는 우관?" "우관 스님 말씀이오?" "그 분은 어떠했소?" 송장환의 눈에는 호기심이 넘실넘실했다. "독수리 같은 중이었소. 늙으 독수리... 대자대비하시고, 준열무비하시고, 교활무쌍하시고, 호방음탕하시고. 나는 그 어른이 비구인지 세간인인지 잘 모르겠오. 하하핫..." 이런 정도쯤 이들은 무관한 사이었다. 송장환은 술이 반쯤 오르는 모양이다. "일각이 여삼춘데 이기 비가 와서 야단이구먼." "나는 비가 한 사나흘 쏟아졌음 좋겠소." "에이, 악담 마시오. 겨우 줄을 잡아서 선생 한 분 모시러 가는데." "세월이 긴데 뭘 그리 서두르시오." "용정에 데려다놔야, 그래야 마음을 놓지요. 세상 돌아가는 꼴 보아하니, 마음이 바쁘오." "..." "얼마 전에는 그놈의 사립학교 규칙이라는 것을 공포해가지고 총독놈이 반일운동에 쐐기를 박으려 했고 작년에는 심지어 그네들 앞잡이 노릇을 했던 단체까지 해산했고, 신문도 경성일보, 매일신보 두 여용 신문만 남겨놓고 모조리 폐간을 했는데 이놈들이 그래도 마음이 안 놓이는가 총독 암살이라는 터무니없는 사건을 날조해 가지고 신민회를 때려잡고 있는 판국이니 하기는 사립학교 규칙이라는 것을 공포했기로 사립학교가 존재하는 이상 항일을 아니 하겠소? 하니 그네들이 그걸 모를 리 없고, 국내 사립학교가 된서리를 맞는 게지요. 신민회 뿌리를 뽑는다면 신민회의 조직체인 사립 학교들이 무너질 것은 뻔한 일. 그러니 국외에 있는 사람들만이라도 정신을 바싹 차려야잖겠소?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나는 지금의 교육 사업을 보다 더 확장해나갈 심산이오. 그래서 내 마음이 이리 서둘러지는 게 아니오?" "우리 지금은 술이나 마시고 학교 일은 맑은 정신이 들 때," 열중하여 더 말을 계속할 판인데 송장환은 좀 머쓱해한다. "김형은 내 하는 일에 이해가 없구먼요." "이해는 하지만 문외한이고 보니, 비 내리는 이런 날씨처럼 술이 들어가서 흐려진 마음에 여자 생각이나 하지. 나는 내내 여자 생각만 하고 있었소." 길상은 송장환을 골탕먹이듯 쳐다본다. "주정으론 아직 이르오." 얼굴이 빨개진다. "누가 누군지 빤히 알고 있는 용정에서 풀려나왔으면 접장 감투는 멀찌감치 벗어놓고," "하, 참." 하다가 송장환은 술을 훌쩍 마신다. "내가 알기론 우리 사내새끼들이란 본시부터 아까 그 치한하고 같은 종자여서, 성인군자도 여자와는 무관하지 않았고 하물며 우리네 범부들이야. 흐음, 사실 왈가왈부할 것도 아니었지." "그, 그래..." '부처님이라고 안 하까? 중놈이라고 어디 안 하더나? 하기로는 마찬가지니께. 하하핫... 성인군자도 그거는 한다. 절손은 불효니께로.' 봉기의 딸 두리를 수수밭에서 범한 삼수가 하던 말이 길상의 의식 속에 퍼뜩 떠올랐다. "김형이나 내나 장갈 가야 하는 건데 좀 늦었지요." 송장환은 감정 처리가 좀 곤란했던지 허둥지둥 방문을 열고 사환아이를 불러대더니 돈을 꺼내어주며 술을 사오라고 이른다. "술은 아직 있는데 그러시오?" "마시다 떨어지면, 기다리는 동안 김이 새니까요." "송 선생." "네." "우리 지금부터 색시집에 안 갈래요?" "접장이 그럴 수 있나요? 그나저나," 다시 허둥지둥 술을 마신다. 좀 성이 난 얼굴이 되어 "내 아까 잠시 들렀던 친저 집에서 들은 소식이오만 아버님하고 친면이 있는 윤 참봉이란 어른이 자결하셨다는 게요. 세상이 이리 우울해서 참말이지 못 견디겠소." 길상의 입에서 여자 말이 나올까봐 겁이 났던지 송장환은 성급히 말을 잇는다. "지금 총독부에서 외부에 새나지 못하게 철통같이 막고 있어서 그렇지 우리가 들을 수 있는 소식만으로도 합방 이후, 방방곡곡에서 유생들이 연이어 자결을 한다는데 도대체 자기 한 몸 죽어서 어쩌겠다는 게지요?" "..." "분통이 터지요." 송장환은 연거푸 술을 들이켠다. 길상도 계속해 술을 마신다. "자결을 했다는 대부분의 유생들이 육순, 칠순의 고령이라니, 허 참,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요? 나는 본시 옹졸하고 편협한 유생들을 별로 좋아하진 않았지만 나라를 이 지경으로 이끌어온 그네들 책임을 용서할 수도 없거니와 그러나 생각해보니 절식을 해서 죽고 물에 빠져 죽고 목을 찔러 죽고 아편을 먹고... 칠순, 육순의 늙은이들이 말입니다. 늙은이들한테는 참말이지 자결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닐 게요. 그러고 보니 유교적 윤리관 속에는 확실히 무슨 비밀이 있긴 있는 모양이오. 나는 어디까지나 그런 행위를 퇴영으로밖엔 생각지 않습니다만 그러나 아름다운 건 아름다운 거니까요. 뭔지 몰라? 꽃잎이 할랑할랑 지는 것 같고 설원에 한 마리 사슴이 서 있는 것 같고, 왜놈들이 배때기 갈라 제치고 죽는 것과는 사뭇 다른 게 있단 말입니다. 그 살기하고는 자못 다른," "송선생." "네." "거 거룩한 얘긴 좀 그만둘 수 없소?" "..." "나같이 상전에게 모이나 부지런히 물어 나르는 개미 같은 인생에겐 값비싼 얘기요." "아 누가 김형 저력을 모르는 줄 아시오?" "저력이라?" "의병 나간 일 말이오. 김생원한테 들었소" "허허 왜 이러시오? 꽃잎도 사슴도 못 된 김생원께서 잠꼬대를 하신 게요. 동병상련, 총각끼리의 따로 얘기가 있을 게 아니오." "네, 네, 그럼 노총각끼리의 따로 얘기합시다." 하는 수 없이 송장환은 웃는다. "송선생, 아까 그 과부 어떻소?" "아까 과부라니요?" "조금 전에 봉변을 당한 여자 말이요. 거 인물 좋습디다." "과부인 걸 어떻게?" "용정소 재봉소 하던 여자요." "그래요? 허나 그건 절대로 안 될 의논이지요." "왜, 과부는 수절을 해야 하기 때문에?" "그럼 김형, 그 여자한테 장갈 들겠다 그 말씀이요?" "안 될 것도 없지요. 장갈 못 든 늙은 총각은 흔히 과부 얼굴에 보자기를 씌워서 데려와 사는 게 불문율 아니오?" "그런 소리 마슈. 멀쩡한 총각이 과부장가라니." 사환아이가 새 술을 가져오고 해거 어지간히 취한 이들은 횡설수설 늦게까지 마시고 지껄이고 하다가 길상이 문득 생각이 난 듯 "송선생." 하고 불렀다. "말하시지, 총각 형." "우리 상전 애기씨를 어찌 생각하시오?" "뭐라구요?" "당신네들은 이 고장에서 신식 양반이 된 사람이고 하니 구식 앵반댁 우리 상전 애기씨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 말 아니오. 할말은 아닌지는 모르나 내 장가드는 일보다 우리 상전 애기씨 혼인이 더 시급한 일이오." "거 참 이상하다?" "뭐가 이상하다는 게요." "아 글쎄 며칠 전에 이선생이 날 보고 그런 얘길 하더란 말이오. 혹 서로 의논이라도 했었소?" "이선생이? 이부사댁 서방님이 그런 말씀을 하시더라 그 말씀이오?" 불그레했던 길상이 얼굴에서 핏기가 가셔진다. "공연히 놀리지 마시오. 부부란 인물이 거이방해야지, 나같이 못생긴 놈이 될 법이나 한 일이오? 내가 김형만큼 자알 생겼다면야 서슴없지요. 망설일 일이 뭐 있겠소?" 무섭다는 둥, 그런 여잔 좋아하지 않는다는 둥 상현에게 한 말은 입 밖에 내지 않고 은근슬쩍 길상에게 충돌이질한 것이다. 그도 심상치 않은 소문은 다소 들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