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정상을 중심으로 시작된 화려한 가을의 번짐은 매번 우리의 가슴 한가운데로 스며들어 알수 없는 고독을 남긴다 종자골에 노란 들국이 아무리 많은 꽃송이를 매달고 피어나고 아무리 많은 벌들이 기쁨의 노래를 불러도 봄날의 꽃같은 생기는 찾을 수 없고 특히 카메라가 우리의 나이를 꼭 집어서 찍어내듯 스러져 가는 쓸쓸함을 어쩔 수 없다
낙엽을 떨구는 나무들처럼 가벼워지고 있다는 허전함의 이 계절에 수확의 기쁨은 진정한 위안이 된다 오늘은 호박 고구마를 몇 뿌리 수확해 보았다 고구마는 봄에 심어 가을까지 기다려야 하는 농사이니만큼 기대가 크고 기대에 어긋나지 않을 때의 재미가 한층 더 쏠쏠했다 한 뿌리를 잡아다니면 날씬하고 매끈하게 생긴 고구마가 대여섯개 줄줄이 붙어서 뒤따라 나왔다 원조 호박 고구마인듯 하다 작년도 호박 고구마는 모양도 못생기고 일단 빛깔이 호박처럼 연한 주황색과는 거리가 먼 잡종이었었다 고구마 캐는 일은 청솔님 몫이다.깊숙히 박힌 고구마는 거의 삽으로 푹 퍼내야하므로 중노둥에 가깝기 때문이다 고구마를 캘 때마다 높이 쳐들어 소리를 지르면서 나에게 보여준다.그럴때 청솔님은 꼭 초등학생의 얼굴이다 그 웃음이 정겹다 나도 초등학생이 되어'으와! 대단하다' 긴 말이 필요치 않다 고구마 캐는 일이 쉬운 것은 아니다 처음에 비닐을 베껴내고 고구마 줄기는 잘라내어 다음 농사를 위해 한쪽에 모아 두고 고구마 줄기는 나중에 말려서 태워야 하므로 잘 마를 수 있는 곳에 널어두어야 한다 고구마에 상처가 나면 오래 보관이 되지 않으므로 살살 흙을 달래가며 고구마를 뽑아줘야 하는 일이므로 소중한 마음가짐이 필요할 듯 하다 어느해인가는 고구마만 캐려는 사람들이 비닐과 줄기를 범벅을 해놓아서 그걸 다시 파내어 정리하느라 혼이 난 적도 있고 아무렇게나 호미로 파내는 바람에 고구마에 상처가 많았던 해도 있었다 남의 일을 내 일처럼 하기가 어디 그리 쉬운 일인가
그걸 바라는 사람이 오히려 욕심이 많은 사람일 것이다 불현듯 옛날 우리 부모님 세대에 머슴부부가 생각이 난다 순한 소처럼 주인이 시키는 일을 아무말 없이 할 뿐만 아니라 마음을 다한 진실함이 느껴졌었다 그래서 할머니와 어머니는 무엇이든 나눠먹고 나눠주고 싶어하셔서 중간에서 그 심부름으로 한때는 내가 바쁘면서도 흡족했다 나는 그들처럼 진실하고 성실하게 살고 있는지 뒤돌아보게 된다
나는 알타리 무우를 수확했다 알타리 무우는 일반 무우보다 늦은 시월 초순경에 씨를 뿌리고 일반 무우보다 일찍 수확을 서둘러야 한다 시기를 놓치면 무우에 단단한 심이 생겨서 아삭한 맛이 줄어들고 줄기가 길어지기만 해서 줄기 또한 제 맛을 잃게 된다 골고루 크기가 커지지는 않아서 굵은 것만 뽑아내었다 줄기는 싱싱하고 뿌리는 아삭하면서 물기가 충분해서 김치를 담그면 최고의 알타리 김치가 될 것이라는 자신감이 생길 정도로 만족스럽게 컸다 나도 소리를 친다 '알타리 무우가 이렇게 예쁘네' 단풍나무가 족두리를 쓴 것처럼 어여쁜 앞쪽 뜰을 바라보고 앉아서 무우를 다듬었다 도시에서는 급하게 움직이다가도 종자골에 오면 느긋해져서 무우 한개 다듬어 놓고 나무 한번 쳐다보고 무우 몇개 다듬어 놓고 허공을 바라보기도 한다 그래서 더 많은 것을 보게 되고 본 것을 통해서 더 많은 것을 느끼게 되었던 듯 싶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것들을 보지 못하고 지나치는가 그래서 요즈음에는 산 정상을 오르는 사람들에 역행하는 산행 방법으로
산 중턱쯤을 오르는 사람들 모임이 생겨나고 있단다 그냥 어슬렁거리며 여기저기 기웃거려 더 많은 것을 구경하다가 경치 좋은 곳에 앉아 쉬다가 다시 어슬렁 거리며 내려오는 산행! 그 모임에 있는 사람이 한 말이다 '내가 본 것은 오직 정상 뿐이었다는 것을 이제서야 깨닫습니다' 천천히 살아볼 일이다. 더 많은 것을 만나 볼 일이다. 그리고 느껴 볼 일이다
오늘도 고구마만 수확한 게 아니다 알타리 무우만 수확한 게 아니다 자연은 그 언저리 지혜도 수확하게 만든다 종자골! 우리의 스승님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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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렇게 바라보고 있으면 일년간 흘리신 땀은 안 보이고 수확한 알타리 무만 보이니~~ 직접 땀을 흘리지 못해서 못 본것이겠지요?ㅎㅎㅎ 올해엔 햇살이 좋아서 과일도 맛있고,, 배추 농사도 아주 잘 되었다고 하더라구요~ 풍성한 추수, 땀흘린 것에 대한 당연한 결과이지만,,, 축하드립니다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