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토정(土亭) 이지함(李之函 1517~1578)은 조선조 16세기 처사형(處士型)의
유학자로서 <토정비결(土亭秘訣)>의 저자로 더욱 유명하다. 그는 충남 서천
한산 출신으로 자는 형백(馨伯) 호는 토정(土亭) 또는 수산(水山) 본관은
한산(韓山)이다. 고려말 거유 가정(稼亭) 이곡(李穀) 목은(牧隱) 이색(李嗇)
부자의 후예가 된다. 그는 분명 유학자였고 또 유학자로서 살았지만
천문 지리 의학 산수 율여 복술 등 다방면에 능통했던 통유(通儒)였다.
그는 가난하고 고통 받는 백성들의 민생을 걱정하고 나라의 부국강병을
모색하였지만 다른 한 편으로 시대를 조롱하며 그 무엇에도 구애 받지 않고
살았던 처사였다. 특히 바다를 좋아하고 해양의 가치를 일찍이 깨달은 선각자로서
그 스스로 '海上에 사는 狂人'이라 했고율곡은 제문에서 '水仙'이라 일컫기 했다.
토정은 어린 시절 형 이지번(李之番)에게 학문의 기초를 배웠고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을
찾아가 그의 문인이 되었다.그는 책상 앞에 앉아 현학(玄學)을 논하는 학자가 아니라
온 강산을 돌아다니며 보고 듣고 체험한 속에서 진리를 탐구하고 경세의 대안을 제시한
실사구사형(實事求型)의 학자였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이론이 아니라 실천이었고 말이 아니라 행동이었다.
유학의 이상이 수기치인(修己治人)에 있고 왕도(王道)에 있다고 할 때
토정은 실천을 통해 몸소 모범을 보였다. 그는 주색(酒色)에 흔들리지 않을 만큼
자기관리가 철저했고 가난과 추위 그리고 질병에 신음하는 민초들의 아픔을 보고
옷을 벗어 주는가 하면 소금을 만들어 식량을 도와주기도 하였다.
그가 아산현감과 포천현감으로 있으면서 시행한 여러 정책과 그의 생각은
한 나라를 살리고 부흥시키는데 부족함이 없었다.
그런데 토정은 기인(奇人)으로 널리 알려져 있고 그의 기행(奇行)에 얽힌 일화도 많다.
그것은 토정이 민중과 소통했던 흔적이며 그를 통해 민중의 한을 풀고자 했던 단면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토정에 관한 연구는 많은 편이 아니다.
신병주의 <이지함 평전>은 토정에 관한 대표적인 연구서적이라 할 만하고
그 밖에 여러 분야의 연구 성과가 있다.토정에 관한 연구는 주로 사회경제사상이나
<토정비결>을 비롯한 민속학적 연구가 대부분이다.
토정의 성리학이나 순수 철학 사상을 연구한 논문은 없는 것 같다.
그것은 애당초 그의 문집이 매우 적기 때문이며 또 그 스스로가 글을 쓰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본고는 기존 연구 성과를 참고로 하여 토정의 삶을 통해
그의 인품과 학문적 성과를 고찰해 보고저 한다.

토정은 1517년 아버지 이치(李穉)와 어머니 광주(光州) 김씨(金氏) 사이에서
충청도 보령 청라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이치는 1504넌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이미 사망한 조부 이파(李坡)의 성종 때의 폐비(廢妃)사건에 연루되어
진도에 유배되었다가 1506년 중종반정이 일어나자 유배에서 풀려났다.
그는 1507년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며 의금부도사 수원통판(水原通判) 등의 관직을 지냈다.
토정의 아내인 종실(宗室)인 모산수(毛山守) 정랑(呈琅)의 딸이었다.
그는 14살 때 부친이 별세하자 형인 이지번(李之番)에게 학문을 배웠다.
이지번은 인종 때 천거를 받을 때 '白衣宰上'이라고 불릴 만큼 청렴한 학자였으며
그의 아들 이산해(李山海)는 북인(北人)의 영수였는데 계부(季父)인 토정에게 학문을 배웠다.
1543년 조카 이산해를 가르치고 약관(弱官)의 서기(徐起)를 데리고 한라산 등지를 유람하였다.
1559년 동주(東洲) 성제원(成悌元)을 데리고 속리산에 서경덕(徐敬德)과 함께 방문하였고
1571년에는 배움을 청하는 중봉(重峰) 조헌(趙憲)에게 이이(李珥) 성혼(成渾) 송익필(宋翼弼)을
스승으로 삼도록 권유하였다.
1573년 5월 탁행지사(卓行之士 행실이 아주 뛰어난 선비)로 천거되어 6품관에 오르게 되는데
조목(趙穆) 성혼(成渾) 최영경(崔永慶) 김천일(金千鎰) 유몽정(柳夢井) 유몽학(柳夢鶴) 정구(鄭逑)
등과 함께 천거되었다. 이 때 포천현감이 되어 부임하였다.1574년 8월 그는 포천의 '활민책(活民策)'을
조정에서 받아들이지 않자 병을 핑계로 현감을 사직하고 서울 남소문동에 우거하였다.
1575년 형 이지번의 상을 당하여 보령에서 서울로 올라와 심상(心喪) 3년을 행하였다.
그 이듬해 겨울 마포에 토정을 짓고 잠시 기거하였는데 여기서 그의 호가 되었다.
이때 이항복(李恒福) 한준겸(韓浚謙)이 왕래하며 강화(講話)하였고 보령에 머물다가
순천으로 가서 정철(鄭澈)의 서하루(棲霞樓)를 거쳐 증심사(證心寺)에 유숙하고
고경명(高敬命)을 만나 '不己'라는 재명(齋名)을 지어주기도 했다.
1578년 3월 이이(李珥)의 사직을 적극 만류하였다.
그해 5월 아산현감이 되어 걸인청(乞人廳)을 만들어 노약자와 고통을 받는
백성들의 구호에 힘을 기울였으며 자신이 현감으로 경험한 시무책(時務策)을
담은 상소를 올렸다.그러나 7월 17일 서울 마포에서 62세의 나이로 세상을 마치고
보령현 서쪽 고만(高巒) 선영에 묻히었다.
토정은 1713년(숙종 39) 이조판서에 증직되고 '文康'의 시호를 받았다.
그런데 토정이 상업 어업 유통경제 등 경제사회에 눈을 뜨게 된 것은
그가 활동하던 마포가 바로 물산의 집산지였으며 또 그의 주된 근거지가
충청도 서해안 지역이었던 점과 무관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토정은 그의 생애에서 볼 때 민중과 매우 밀접히 소통한 인물이었다.
물론 그것은 <토정비결>의 작자가 이지함이라는 데서 더욱 유명해지기도 했지만
그밖에 토정 자신의 삶 속에 드러난 민중에 대한 뜨거운 사랑과 애민의식
그리고 신분을 초월한 인간미에 기인한 것이기도 하다.그러므로 토정에 관한
기이한 이야기들은 야사류의 책에 많이 등장한다.
<대동기문(大東寄聞)>에는 토정이 스스로 상업행위에 종사한 일과 거지 아이에게
옷을 벗어 준 일화 등이 소개되어 있다. <동패낙송>에는 그가 괴상한 행동을 하다가
노인의 놀림을 받았다는 이야기와 계집종의 유혹을 뿌리친 일화, 간질병에 걸린 사람을
치료했다는 이야기,음율(音律)을 아는 이인(異人)과 장도령을 만난 이야기,
서기(徐起) 성제원(成悌元)과 함께 한라산에 올라가 남극노인성(南極老人星)을
구경한 일 등이 기록되어 있다. 또 하나 특이한 것은 바다라는 배경의 관련성이다.
그는 바다를 좋아했고 해양의 가치를 일찍이 깨달은 선각자였다.
부국강병 민생의 안정이 바다에 있음을 알았다.
그는 제주도를 몇 번이나 갔다 왔고 여러 섬을 자주 드나들었다.
조카 이산해가 쓴 그의 <묘갈명>에 의하면 "배타기를 좋아하여
큰 바다를 마치 평지처럼 밟고 다녔다. 나라 안 산천을 멀다고 가보지 않은 곳이
없으며 험다고 건너지 않은 곳이 없다.간혹 여러 차례 추위와 더위가 지나도록
정처없이 돌아다니기도 하였다."고 한다.그래서 토정 스스로 '海上에 사는 狂人'이라
칭하였고 실록에서도 이지함은 "안명세(安明世)의 처형을 보고 해도(海島)를
주유(週遊)하며 미치광이로 세상을 피했다'고 적고 있다.
이지함은 어렸을 때 어머니의 장지가 해안에 가까이 있어 조수가 밀려옴을
걱정하여 옮기려 했다. 성품이 배타기를 좋아하고 항해 중에 조수의 흐름을
미리 알아 위험을 피했으며 해상의 경제활동에 대한 대책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율곡은 그의 제문에서 토정을 가리켜 '水仙'이라 표현하기도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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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글은 토정 이지함 선생 탄신 500주년 학술세미나에서 황의동 충남대 명예교수가 발표한 논문
<토정 이지함의 인품과 학문적 특성>에서 일부를 옮겨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