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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부터 쏘아붓듯이 내리던 빗발이 오후가 되면서 더욱 거세지기 시작하였다.
요즘 며칠사이로 장맛비가 끈질기게 내리더니 오늘은 여느날과 다르게
더욱 많이 내리는 것 같아서 마음 한컨이 영 개운치가 않았다.
함지박으로 붓듯이 내리는 장대비는 머리까지 뒤집어 쓴 우비를 비웃기라도 하듯
얼굴은 말할 것도 없고 가슴팎 깊숙히 파고 들어 온다.
산본천 옆에 위치한 우리집은 덕분에 장마철이 되면 청개구리 심정이 되어
항상 노심초사 동분 서주 불안하고는 하였다.
퇴근 무렵에 소주한잔 꺽으러 가자며 은근한 눈길을 보내오는
동료들을 뿌리치고 궁안말에 있는 집으로 일찌감치 발길을 옮겨 놓았다.
저녁이지만 해가 길어져서 아직은 대낮인데도 불구하고
오늘만큼은 한 발치 앞도 안 보일 만큼 사방이 어둑어둑하다.
땡땡거리 철도 건널목을 건너서 자전거로 내달리는 산본리 길은
요 며칠 장맛비로 여기 저기가 파여 있기에어 여간 조심스럽지가 않았다.
그동안 몇 년째를 아침 저녁으로 마르고 닿토록 다니던 길인지라,
"여기는 쌍둥이네 집 근처네, 여기쯤은 광쟁이 다리깨네" 하면서
눈감고도 다닐 수 있는 환한 길인데, 오늘 따라 자전거 페달 밟기가
여간 조심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봄 부터 가을 까지는 명학동 뒷산을 가로 지르며 안양에 있던 직장으로
산등성이를 바람같이 넘나들었지만,
오늘 만큼은 웬지 불안한 마음 때문에 건널목길을 넘어
집으로 가기로 하고, 자전거 페달를 열심히 밟는다.
산본리 15번 종점에서 한 정거장 쯤 못 미쳐 구부러진
개울가에 터를 잡고 있는 우리 집은 위치 덕분에 해마다 물난리을 겪곤 한다.
장마철이 오면 수리산 납짝골과 용진사 골짜기를 타고
내려오는 거센 물줄기가 집으로 들어와 고생을 하였다.
한술 더 보태서 우리집 뒤에는 수천평이나 되는
배나무 밭이 있어 그 곳으로 부터 쏟아져 들어오는 물의
양도 엄청나게 많아서 장마철 비가 오는 날이면 잠은 고사하고
온 가족이 동원되어 삽과 곡괭이를 손에 들고 두럭도 치고,
도랑도 파고하면서 밤새 동동걸음을 치다가,
훤한 아침을 맞는 일이 다반사였다.
해마다 뒤풀이 되는 일이지만, 집 팔고 이사를 가지 않는한
우리네 가난한 집안 형편으로는 별 뽀족한 수가 없었기에
여름이 오면 올해도 무탈하게 지나가 주기만을 하느님께
기원하는 마음이 외어 장마철이 지나가는 것이 여삼추 같이 길게만 느껴지고는 했다.
심신을 힘들게 하던 장마가 지나가고
빗발이 잣아들고, 황토가 가라앉은 맑은 물은 수리산 용진사 긴골짜기를
구비구비 돌아서 내려오기에 산본천의 개울물은 그냥 손으로 떠서 마셔도
좋을 만큼 수정같이 맑고 깨끗하다.
여울이 져서 물줄기가 멈칫거리는 곳에는
피래미, 송사리, 빠가사리, 미꾸라지, 모래무지, 물장어, 가재 등
크고 작은 물고기들이 심심찮게 올라 오기도 하였다.
아주 재수가 아주 좋은 날은 한강서 부터 물길을 차고 거슬러 올라 온
물고기도 가끔은 구경할 때가 있다.
밤새 요란한 장마가 지나고 난 후의 이른 아침이면 물고기를 잡겠다고
연신 족대질을 해대는 아이들의 모습이며, 물구경 나왔던 동네 사람들이
"철없는 것들 하고는" 하며 혀를 차면서도 물고기를 얼마 만큼이나 잡았을까 하는 호기심에
다릿께로 모여드는 것이 비가 온 후의 풍경이다.
긴긴 밤을 가슴 졸이며 지낸 이 놈의 속내를 알길 없는 아이들은 두루박 속에
반 쯤 담긴 물고기를 자랑하듯 들어 보이며,
물길을 따라 도장골과 용진사 골짜기로 왁자지껄하면서 올라간다.
오랜만에 밝은 태양이 구름 사이로 고개를 삐죽이 내밀면 산본천 냇가에
서는 한 동안 밀렸던 빨래거릴 함지박에 담아 나온 동네 아낙들이
삼삼오오 모여 하얀 비누거품을 날리며 빨래를 한다.
바닥 자갈돌이 훤하게 들여다 보이는 냇물에 히멀건 다리를 풍덩 담근채,
이불 소청이며, 옷가지들에 비누칠 하랴,
흐르는 물길에 빨래감을 헹구랴,
온동네 이야기를 소잿거리삼아 수다를 떠랴! 참으로 바쁘다.
그렇게 도장골 골짜기와 용진사골 개울에서는 아낙네의 수다 소리, 엄마를
따라와 물장구 치며 노는 아이들의 해맑은 웃음
지루하게 이어졌던 장마에 한풀이나 하듯,
청명한 대지위로 울려퍼져 나가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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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부터 내리던 비가 저녁 무렵 부터 제법 굵어 빗줄기가
요란스럽게 지붕의 덧챙을 때린다.
한참 시간이 지나도 끝칠 줄 모르고 양동이로 퍼붓듯 내리고 있다.
어른거리는 사람들의 모습과, 칠흑 같이 어두운 물줄기를 살펴보는
손전등 불빛이 불안한 듯 이리 저리 물위에서 춤을 춘다.
더욱 격해진 냇물이 웅웅거리며 흐르는 소리에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우산도 못쓴 채 나가 보니, 싯누런 흙탕물이 이미 디라위를 타고
넘나들고 있다.
구부러진 개울의 경사지를 타고 급박하게 내려오던 물줄기 때문에 무너진
뚝이 이미 깊이 파여 나가고 있었다.
다급한 마음에 개울가에 서있던 팔뚝만한 아카시아 나무를 베어
밧줄로 단단히 옰아 맨후 무섭게 패어 나가고 있던 뚝을 따라
물위에 띄워놓으니 급한 물살을 임시로 막았다.
위급한 상태를 겨우 벗어 났다 싶어 빗줄기를 피할 겸, 집으로 돌아와
담배 한대를 피우는 동안에도 사태가 더욱 심각해 졌는지,
밖에서는 사람들의 발소리가 더욱 소란하다.
이미 집을 포기한 이들은 이부자리며, 살림도구들을 높은 지대에 위치한
이웃집으로 옮기느랴 혼이 절반 정도는 빠져있는 듯 하다.
우리 집에도 불안해 하며 떨고 있던 가족들을 달래서 덮을 수있는
이부자리 몇개와 당장 생활에 필요한 살림도구을 물길이 닿지
않았던 이웃 명호네 집으로 옮기게 했다.
가족들이 안전하게 대피한 것을 확인 한 다음,
뒤 돌아 온 우리집 마당에는 물이 이미 무릅까지 차오르고 있었다.
활짝 열어 놓았던 대문을 통해 빠져나가던 물줄기는 이미 한계
상황을 지나 버린 듯하다.
급한 마음에 맷돌을 던져 담장 밑을 뚫어 보기로하고 물속으로
집어 던져 본다.
묵직한 맷돌에 맞은 담장은 다행히 밑이 환하게 뚫리고
집안에서 맴돌던 물들이 쫘아~ 하며 시원하게 잘들 빠져 나간다.
어두운 하늘에서는 끝도 없이 장대 같은 빗줄기를 퍼부으니
하느님께서 나에게 어려운 시련에 들게 하나보다.
어두움 속에서 가까이 붙어 있던 옆집은 우지끈하는 굉음을 남긴채로 어둠속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져 갔다.
길건너의 앞 집은 절반이 공중에
떠있는 상태로 점차 무너져 내리고 있다.
텔레비젼을 구해 보겠다고 그 집 사람들은 손에 손을 잡고
위태로운 모험을 하고 있다.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나를 보고 얼굴을 붉히던 옆집 소녀는
어떻게 잘 살고 있는지?
우리의 소중한 추억들이 물과 함께 모두 사라져 갔다.
덕분에 나의 어릴적 사진이 한 장도 없다.
드디어 먼동이 트고, 우리집은 신기하게도 그 자리에 아직 있었다.
땅이 5미터만 더 파였다면?,
비가 십분만 더왔다면....
우리집도 옆집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터인데..
어두운 칠흑 속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 옆집,
그 자리에는 깊고 넓은 물 웅덩이가 물을 머끔은 채로
괴물같은 입을 떡 벌리고 있다.
앞 집은 거세게 흐르는 물위에서 끼우뚱한
아직도 위태롭게 걸쳐있다.
물이 줄어든 산본천은 거친 바닥을 들어내 보였고,
떠내려와서 죽은 양계장 닭들이 지천으로 널부러져 있다.
앞집에서 셋집 살던 보살 할머니는 떠내려 가버린 보석함을 찾을까
싶어 냇가의 돌들을 헤집고 다닌다.
눈 앞에 벌어진 수해의 참상들은 참으로 가혹 하였다.
거리에 넘치는 진흙과 쓰레기 더미,
퀴퀴한 인분 남새와 곰팽이 냄새가 코를 찌르면서 유령처럼
떠 돌고 있는 듯하다.
밤새 놀란 사람들이 질척이는 진흙탕길을 휘청거리면서 걷는다.
사방천지가 곱게 다져놓은 진흙 앙금속에 갇혀 있는 것 같다.
너나 할것 없이 얼굴과 몸에 뽀얗게 진흙 분칠을 한 모습들이다.
진흙 뻘은 장화가 없이는 한 발짝국도 허락치 않았다.
물에 젖어 못쓰게 되어버린 가재도구들이 산더미 처럼 쌓인
골목길은 발 조차 디딜 틈없이 어지럽다.
장마가 끝났어도 수재민들은 오물과의 전쟁을 한 번 더 치루게 되었다.
앞산과 뒷산은 물론 수리산까지 수마가 남기고 간 자리는 참혹 하였다.
긴손톱으로 할킨 듯 산사태가 나서 길고 가는 생채기 투성이다.
뿌리채 뽑힌 소나무, 상수리나무, 떡갈나무, 오리나무, 잣나무, 참나무,
박달나무, 벗나무와 집채 만한 바윗 덩어리들이 얽키고 설키고
뒤엉켜 개울이 따로 없었다.
경작 중이던 자리에는 깊고 넓은 물 웅덩이들이 지천으로
널려 있어 농사를 짓던 전답 자리인지, 연못이 있던 자리인지
분간이 안갈 정도다.
산본천 아래 있는 안양천에서는 더욱 가혹하였다.
지붕위에 드럼통이 올라가 앉아 있는 집,
하수구로 빨려 들어간 후 안양천 모래톱에서 발견된 사람
대피도 못해 보고 잠결에 불의의 객이 된 사람들이 너무도 많았다,
물이 빠진 냇가 모래을 파면 시신이 나왔다고 할 정도이니
그때 안양천에서 죽은 사람들이 부지기수 였음을 알 수 있다.
적십자사에서 구 물품이라고 나왔다는데...
산본 국민주택 보다 위에 있던 광쟁이, 궁안말, 도장골, 느티울 마을에는
구호의 손길이 못미쳐, 우리가 받아 본 것은 라면 한상자와 도배지 한 묶움이
전부였다.
물 난리 통에도 장대로 떠내려 온 돼지를 건져 올려 횡재 한사람,
냇가에 널 부러진 씨암닭 주워다가 포식한 사람,
떠내려 온 패물을 주워 떼 돈 번사람,
안양 천변에는 실종된 가족을 찾으러 나온 사람들 말고도
휭재 하고 싶은 사람들로 우굴벅쩍 했다는 말들이 한 동안 나돌았다
믿거나 말거나...
1977년도 안양천 일대를 황폐화 시킨 대홍수는 많은 인명 피해는 물론 ,
물결에 휩 쓸려 떠내려간 집도 부지기수 였고,
산본천과 안양천 저지대에서 살고 있던 서민들에겐
치명타를 가하고는 막을 내렸다.
** 추어탕 **
수해 복구가 마무리 되어 한 시름 놓이자 마을 앞에 파인 물웅덩이 구경을
갔다가 새까맣게 려다니는 미꾸라지를 발견하고 득달 같이 달려가
족대 하나를 구해 왔다.
물 웅덩이에 족대를 쓱하고 흩어 보니 미꾸라지가 반이요, 물이 반이라
그 많은 물웅덩이을 뒤지고 다니느랴 해저무는 줄도 몰랐다
며칠 후에 가보니 또 미꾸라지가 많이 잡혔다.
수해 덕분에 추어탕은 실컷 먹게 되었다.
우리 고향에서는 미꾸라지나 미꾸리를 모두 미꾸리지라 부른다.
여름철 황새가 유난히 드나드는 논에는 틀림없이 미꾸라지가 많으니, 눈여겨
보았다가 가을 추수걷이 후 여유로운 시간을 이용하여
천엽에 나서곤 한다.
추어탕을 유난히 즐기시던 아버지를 따라 살얼음이 살짝 언 물 도랑을
앞 뒤로 막고는 물을 양동이로 퍼낸 후 삽이나 손으로 논 흙을 살살 뒤집으면
통통하게 살이 오른 미꾸라지를 소쿠리가 묵직 할 만큼 많이 잡을 수 있다.
여름철에는 장맛비가 끝친 후 도랑을 따라 가며 얼개미질을 해대면 힘 좋고
잘생긴 미꾸라지가 펄쩍 거리면서 올라 오곤 한다.
가끔은 물길 따라 마당까지 올라온 미꾸라지를 하늘에서 떨어져다며 주워
담기도 하였다.
비린내가 많이 나는 여름 미꾸라지는 소금을 적당히 뿌려 혼절 시킨 후
호박잎으로 빡빡 문지르면 비린내는 물론 미끄러움이 사라지고 뽀득한
추어탕 재료가 준비된다.
옛 문헌에 의하면 미꾸라지는 가을 고기라 해서 추어(鰍魚) 라고 했다.
미꾸리와 미꾸라지는 같은 것으로 생각하나 분명히 다르다.
미꾸라지는 꼬리 부분이 납짝하고 미꾸리 보다 커서 150~200
미리 미터가 넘는 것도 흔히 발견된다.
미꾸리는 몸의 길이가 외소해서 100~170 미리 미터로 몸통은 가늘고
원통형으로 생겨서 둥글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중략~~~
삭제된 댓글 입니다.
여기로 이사와서 겪은 내용이라네...그때는 참으로 난리였지 이곳에만 450미리나 되는 비가 쏟아졌다네..수해로 세상을 등지신 분들이 참 많았지..그때 박대통령이 헬기로 시찰하고 갔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했었던 사건이라네...
고생 많이 했었겠구먼
지난번 책에 올렸던 글이야..그 시절은 참 어려운 때였지....그 경험으로 이제는 군포 지역에서도 제일 높은 곳에다 집을 지었다네...그러다 보니 너무 높아 걸어다니기 힘들다고 식구들이 첨엔 난리였지만....이제는 운동이 되어 좋아고 하대....전망도 좋고 옥상에 올라가면 인근 3개시가 환히 보인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