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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남정맥 제 6 구간(부련이재~장전고개)
1. 산 행 일 : 2011. 6. 12(일)
2. 산 행 지 : 경남 고성군 ---> 대곡산, 무량산, 백운산
3. 날 씨 : 흐림(무덥고 가끔 비 오락가락, 습도가 많음)
4. 참 가 자 : 김명자, 노승애, 박봉하, 박상호, 이용준(5명)
5. 준 비 물 :
[1] 전 체- 차량, 안전장구, 구급약, 사진기, 지도
[2] 개 인- 비상식, 등산화, 배낭, 윈드쟈켓 및 우의, 예비옷(보온)과 양말, 모자, 장갑, 후레쉬, 식수, 세면도구, 신분증, 다용도칼, 휴지, 비닐봉투, 간식 등 개인용품
6. 회 비 :
7. 산행정보 및 일정
[1] 총 산행 거리 및 소요시간 : 약 16.4km, 8시간 30분 정도 소요
[2] 산행길잡이 :
【 산의 고도가 높고 기복이 삼하며 길이 정비가 되지 않아 잡목이 길을 덮어 길을 헤쳐 가는데 애로가 많았음 】
지난 5구간에서 고도를 낮출 대로 낮춘 낙남정맥은 6구간에 들어서면서 다시금 그 콧대를 높이기 시작한다. 백운산(대곡산, 391m)을 시작으로 426봉, 380봉으로 이어지다가 배곡고개(195m)를 만나 잠시 숨을 고른 정맥 길은 추계재(가리고개) 지나 404봉, 489봉, 대곡산(542.8m) 등 제법 산줄기다운 풍모를 보여준다. 이후 532봉, 무량산 갈림길(555m), 578봉, 501봉, 백운산(486m) 등 3,4구간과는 확연히 다른 고도의 봉우리들이 이어지며, 조망도 트이고, 잡목구간도 훨씬 줄어든다.
문고개, 배곡고개, 가리고개, 화리치(양화고개), 큰재, 1009번 등 여러 고개들을 지나게 되는데, 그만큼 오르내림 또한 심하다.
부련이재에서 13분이면 245봉 지나 콘크리트 포장 임도가 지나는 문고개에 닿는다. 여기서 10여 분이면 325봉에 이르고, 대곡산까지 약간의 오르내림만 있을 뿐 걷기 좋은 길이 이어진다. 대곡산에서 15분 거리인 425봉을 지나면서 다시 고도가 낮아진다. 배곡고개는 지형도와는 달리 1차선 임도가 지난다.
배곡고개에서 24분이면 부포와 망림리 방향으로 조망이 훤히 트이는 천황산에 닿는다. 여기서 비교적 평탄한 길을 따라 15분가면 가리고개와 404봉, 대곡산, 화리치까지 조망되는 370봉이다.
고성군 상리면과 영현면 경계인 추계재는 1016번 지방도가 지난다. 왼쪽 100여m 아래에 추계마을이 있어 물을 구할 수 있다. 404봉으로 이어지는 정맥길 왼쪽으로 대가면 갈천리로 이어지는 2차선 포장도가 추계재에서 나뉜다. 'S'자로 뒤틀며 오르는 포장도 따라 100여m 오른 다음 오른쪽 능선으로 정맥길이 붙는데, 30분이면 몇 개의 바위가 모인 404봉이 나온다. 고압선 철탑 지나 489봉에 이르는 길은 방화선으로 생각되는 띠 모양 공간을 따라 길이 이어진다. 약 8분이면 닿는 안부는 왼쪽으로 사슴농장 울타리가 나타나며, 그 앞에 넓은 공간이 있다.
542.8m의 대곡산은 20여분 거리. 대곡산에서 왼쪽으로 급하게 꺾여 내려서는 길은 농장으로 인해 올바른 마루금을 잇지 못한다. 485봉 지나 532봉에 이르기까지 마루금에서 조금 오른쪽으로 치우친 농장 울타리를 따라 정맥길이 이어진다. 억새와 잡목이 섞여 자라 길이 사나우며, 532봉 오르기 전 산딸기나무로 인해 길이 막히는 곳이 있다. 오른쪽으로 돌아 올라야 한다. 532봉에서 화리치까지는 계속되는 내리막으로 약 20분이면 닿는다.
화리치는 네 갈래의 임도가 만나는 곳이다. 왼쪽 임도 따라 20여분 내려서면 종생이 마을이다. 길은 정면 동백나무 사이로 이어지지만 웃자란 가시덤불로 진행이 쉽지 않다. 무량산 갈림길까지는 조금 가파른 길을 25분 올라야 한다.
비교적 날카로운 능선 따라 18분이면 578봉에 닿고, 곧 길은 왼쪽으로 꺾여 가파른 사면을 따라 내려선다. 약 20분이면 큰재 전 임도를 만나고, 다시 완만한 길 따라 10분이면 1차선 아스팔트 포장도가 지나는 큰재다.
큰재에서 가파른 길을 숨가쁘게 15분 오르면 501봉이다. 여기서 10분이면 임도 지나 전망 좋은 백운산이다. 25분이면 제일목장을 지나 1009번 지방도인 장전고개에 닿는다.
<퍼온글>
[3] 구간별 거리
부련이재(176m,9번도로)--0.5km--문고개--1.7km--백운산(대곡산, 391m)--0.4km--426봉--3.0km--배곡고개(189m)--0.6km--천황산(342.5m)--1.4km--가리고개(추계재184m,1016번도로)--2.1km--대곡산(542.8m)--1.7km--527봉--0.7km--화리치--1.8km--578봉--0.7km--큰재(354m)--1.1km--백운산(486m)--0.7km--장전고개(장밭고개, 1009번도로)
[4] 산행 코스 및 시간
(1) 산행지 이동
① 교통편 : 택시
② 이동경로 : 금곡면(05:30) ∼ 부련이재(05:40)
(2) 산행코스
부련이재(05:50)→문고개(06:05)→백운산(06:45/06:55)→임도(07:30)→배곡고개(08:00/08:10)→천황산(08:25)→추계재(08:55)→451m봉(09:35/09:45)→대곡산(10:25/점심/10:55)→마장고개(11:10/11:20)→화리치(12:10/12:20)→무량산(583.0m, 12:50)→578m봉(제3전망대, 13:10/13:20)→큰재(13:30)→백운산(14:00)→장전고개(14:20)
(3) 산행 후
장전고개(14:40) ∼ 진주(15:10/점심, 휴식/17:10) ∼ 대전통영, 경부고속 ∼ 수원(21:00)
(4) 편의사항 :
○ 금곡개인택시(055-754-2580),
○ 춘향맛고을(055-752-4477)
○ 진주-수원(17:10 - 우등 25,500원)
8. 산 행 기
[1] 산행전
(1) 약속을 우습게 아는 우정장어집
○ 기상(04:30) ∼ 아침식사(05:15/05:50) ∼ 부련이재(06:05)
어제 17.7km 산행과 산행 후 저녁 식사(숙소 앞 우정장어 : 경남 고성군 영오면 오서리 영천강변 / ☎ (055) 673-922, H.P 019-510-3232 / 장어요리 전문점)를 겸한 반주(김명자부장님 제공)를 하며 오늘 산행 과정과 내일 산행 일정 등을 논의하며 和氣靄靄한 이야기를 나누다 늦은 시간에 숙소로 돌아와 잠자리에 든 때문인지 기상시간(04 : 30분)인데도 깊은 잠에 빠져 있는데 대장은 어느새 일어나 짐을 챙기고 기상을 하라고 한다. 떨어지지 않는 눈을 부비고 일어나 고양이 세수를 하고 배낭을 꾸린 후
05 : 20분경, 아침식사를 하기 위해 식당으로 갔다. 배추김치와 콩나물 무침에 장어국이 식사 찬으로 내 놓았는데 입안이 깔깔해 밥 생각이 전혀 나지를 않는다. 그래도 산행을 걱정해 억지로 식사를 하고 어제 얼려두라고 맡겨 둔 물병을 찾았는데 냉동이 전혀 되지 않았고 지난 저녁 식사를 하며 재첩국도 주문(노부장)을 했는데 준비가 되지 않았다며 장어국을 내 놓는다. 참 고약한 상술이다. 울며 겨자 먹기로 식사를 끝내고 숙소로 돌아와 다시 배낭을 점검을 했다.
(2) 산행 들머리 부련이재로의 이동
05 : 50분, 어제 이용했던 택시(금곡 개인택시 : 055-754-2580)를 호출해 오늘 산행 출발지인 『부련이재(芙蓮峴)』로 이동을 했다.
[2] 시작부터 예사롭지 않다.
06 : 05분, 부련이재 도착을 했다. 이 재(176m, 문고개 북쪽에 있는 고개)는 고성군 영현면 영부리와 상리면 고봉리를 연결시켜 주는 9번 지방도로다.
대장은 다음 산행구간을 단축하기위해 『장전고개』에서 약 4km를 더 진행하여 『배치고개』까지 가겠다며 서둘러 출발하고 우리는 다소 시간적 여유를 가지고 천천히 산행준비를 한 후 도로 철망과 전봇대 사이의 옹벽을 통과(06 : 17분경)하면서 6구간(부련이재~장전고개)) 산행을 시작했다.
선답자들에 따르면 오늘 산행 구간은 起伏이 심하고 500m 이상의 산도 몇 개를 넘어야 된다고 했는데 시작부터 급경사를 이룬 봉이다. 그리고 어제와는 달리 잡초와 잡목이 마루금을 완전히 점령하여 헤쳐 나가는 것도 부담스럽다.
[3] 문고개
06 : 30분, 다리에 힘을 주며 어렵사리 묘 3기가 있는 봉에 올라 크게 숨 한번 몰아쉬고 우측 내림 길로 들어서서 내려오기를 약 3, 4분 시멘트 포장길인 『문고개(188m)』로 내려섰다.
『문고개 (188)=고실재=큰고개』는 부촌 남쪽에서 상리면 고봉리로 가는 고개로 조선 시대에는 아주 큰 길로서 행인이 많이 다녔다고 한다.
<출처> 한국지면총람 권 8, p220
[참고자료 1] 고성군 영현면(永縣面)
영현면(永縣面)은 본래 영선현(永善縣)의 지역인데 신라때에는 일시 고성군에 예속되었다가 고려 현종 9년에 진주군(晋州郡)에 예속되었으며, 서기 1096년 9월 24일자 칙령 제49호로 다시 고성군으로 귀속되면서 영현면으로 개칭하여 연동(蓮洞), 화촌(花村), 신촌(晨村), 분촌(盆村), 침촌(砧村), 봉림(鳳臨), 영동(永洞), 부촌(芙村), 대촌(大村),봉대(鳳台), 발촌(鉢村), 추촌(楸村)의 14개 동리를 관할하였다. 서기 1914년 3월 1일자 경상남도령 제2호로 고성군의 면을 병합할때 영현면으로 존치하여 관할에 연화(蓮蓮), 신분(晨盆), 침점(砧店), 봉림(鳳林), 영부(永芙), 대법(大法), 봉발(鳳鉢), 추계(楸溪)의 8개동리를 두었다.영현면은 1915년 10월 10일에 면이 설치되어 1984년 8월 22일자 고성군 조례 제858호로 행정구역을 조정할 때 그대로8개 법정리에 16개 행정리 22개 반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영현면은 고성읍에서 20.3㎞ 북서쪽에 위치하여, 동쪽은 대가면, 서쪽은 진주시,사천시, 남쪽은 상리면, 북쪽은 영오면,개천면과 접하여 있다.면사무소의 소재지는 침점리 354-1번지에 위치하여 총면적은 32.18㎢이고 가구는 552가구에 인구 1,066명(남자:505명, 여자:561명)으로 고성군 총가구의 3.8%, 총인구의 3.3%가 거주하며 경지면적은 526㏊에 임야가 2,436㏊이고 특용작물 재배면적은 38㏊에 22.5M/T을 생산하며 농가수는 434호로 인구밀도는 34인/㎢이다. 면내에는 초등학교 1개교가 있으며 취락은 영천강 주변의 가로를 따라 발달해 있다. 그리고 문화 유적지 현황은 성터로서 연화리 성터와 대법리에 배병복(配兵伏)이 있으며 영현지석묘(支石墓)가 있고 사찰지로 대법리사지(寺址)등이 있다.
○ 영부리(永芙里)
영부리는 본래 부연촌(浮蓮村)이라 하였는데 진주군 영선면(永善面)에 속하였다가 광무(光武) 10년(서기 1906년)에 고성군에 편입되어 1914년 3월 1일 경상남도령 제2호로 군의 행정구역 통·폐합시 영동리 일부와 부촌을 병합하여 영현면의 영부리로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행정리로 영부(永芙)와 영동(永洞)의 2개 마을이 있다.
[마을의 지세(地勢)] 영부마을은 면 소재지와 인접한 영동마을의 윗쪽에 위치하여 서쪽으로 "부련이' 재를 경계로 상리면 고봉리에 접하고 있으며 동, 서, 남쪽이 산으로 둘러싸인 마을로 농경지는 비옥하며 마을 위에 영부저수지가 있어 수원도 양호한 지대이다.
<출처> 고성군 영현면 홈
http://www.goseong.go.kr/yeongh/
『문고개』시멘트 포장도로를 횡단하여 농장 철조망을 따라 오른다. 또 한 차례 땀을 비 오듯 쏟으며
06 : 46분, 314봉에 올라 쉼 없이 진행,
07 : 13분, 묘지봉을 지나
07 : 24분, 삼각점이 있는 『백운산=대곡산』에 도착했다.
[4] 백운산(白雲山)=대곡산
『백운산(白雲山=대곡산』은 고성군 영현면 봉발리와 상리면 고봉리 경계에 있는 산으로 잡목과 풀이 산 정상을 차지하고 있어 조망이 거의 되지 않는 봉이다.
[참고자료 2-①] 봉발리(鳳鉢里)
봉발리는 본래 진주군 영선면(永善面) 지역으로서 광무(光武) 10년(서기 1906년)에 고성군으로 편입되어 1914년 3월 1일 경상남도령 제2호로 고성군의 면을 병합할 때 봉대(鳳台)와 발촌(鉢村), 금능(金陵)을 병합하여 영현면의 봉발리로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행정리로 봉발1구, 봉발2구, 금능의 3개 마을이 있다.
봉발리는 임란(壬亂)전부터 사람이 거주하게 되면서 마을명을 지동(枝洞)이라 불러오다가 그후에 마을 서쪽 산밑에 사찰(寺刹)이 들어서게 되면서 발리(鉢里 : 산승의 식기를 발(鉢)이라함)또는 발촌(鉢村)으로 부르게 되었으며 1914년 8월 22일자 고성군 조례 제858호로 이동명칭 및 행정구역 확정시 봉발1구와 2구로 분동하여 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마을의 지세는 동, 서, 남이 산으로 둘러싸인 지대로 마을 좌·우 산세가 마을을 포용한듯하여 안락한 풍미가 있으며 천왕산으로부터 원류하는 천류(川流)는 영천강으로 흐르고 있고 계곡의 농경지는 비옥하여 수원도 추계저수지 몽리구역으로 양호한 편이다.
<출처> 고성군 영현면 홈
http://www.goseong.go.kr/yeongh/
[참고자료 2-②] 영현면 계승사의 석간수(石間水)
계승사는 신라 문무왕 15년 의상조사가 창건한 절로 「금태사」로 불리어 오다가 임진왜란 때 병화에 의해 소실, 지난 63년 지금의 주지 법진스님의 재 창건 불사에 의해 중건되었다.
산세가 수려하고 기암괴석이 즐비한데다 유서가 깊어 많은 신도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계승사는 절벽사이에서 솟아나고 있는 석간수로도 그 명성이 높다.
용두봉에서 발원되어 기암괴석과 절벽사이로 흐르고 있는 이 석간수는 그 옛날에는 매일 서되 두 홉의 공양미가 쏟아졌다는 전설이 있다. 그러나 욕심 많은 시봉행자가 더 많은 공양미를 받기 위해 구멍을 키웠더니 공양미가 약수로 변해 버렸다는 설과 함께 지나친 욕심이 화를 부른다는 평범한 진리를 깨우쳐주고 있다. 이 약수는 피부병을 비롯해 각종 질병에 효험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주말이면 인근 사천, 진주, 마산 등지에서 약수를 받기 위해 차량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또한 고려말 이성계가 왜구를 토벌하기 위해 삼남도를 내려왔다가 이 절에서 수행, 조선 창건의 꿈을 키웠으며, 이후 조선 건국을 이룬 후 태조 이성계가 이 산의 이름을 「금태산」이라 지어 하명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여기에다 최근 공룡발자국화석과 물결무늬화석 등 역사적 가치와 학술적 가치가 높이 평가되는 자연유산이 발견돼 사찰로서의 면모뿐만 아니라 문호재로서의 가치도 높이 평가되고 있다.
<출처> 세상구경 이야기
http://cafe.daum.net/black-yak/Cs2y/125?docid=1GQ5s|Cs2y|125|20110614175651&q=%B0%ED%BC%BA%B1%BA%20%BF%B5%C7%F6%B8%E9%20%B0%E8%BD%C2%BB%E7
[5] 야베스 농장
『백운산』정상은 잡목과 풀이 정상을 차지하고 있어 쉼을 취하지 못하고 계속 진행,
07 : 30분, 돌이 많은 봉을 지나 또 하나의 봉(426봉?)에 올랐다가 철탑이 있는 안부로 내려서니(07 : 46분) 빗방울이 한 두 방울 떨어지기 시작한다. 비옷을 준비하나 마나로 망설이다 그대로 진행
08 : 10분,「야베스 농장」표지판을 세워 놓은 시멘트 포장도로로 내려서서 휴식. 휴식도 잠시, 다시 걷기를 약 3분, 嘉善白氏의 묘가 있는 곳에 도착했다. 엉겅퀴 꽃이 만발했다. 꽃묘(花墓)라 이름 붙여주고 걷기를 20여 분, 임도가 나온다.
[6] 拜谷고개
08 : 35분 임도를 따라 진행을 했다. 잠시나마 잡목을 벗어난 길을 걸으니 숨통이 트인다. 잠시 후 임도를 벗어나 숲속으로 진입,
08 : 45분, 시멘트 포장길(우)과 2차선 아스팔트길(좌)로 된 『拜谷고개』에 도착했다. 이 고개는 영현면 봉발리 배곡(절골)마을과 上里面 望林里 龜尾마을을 연결시켜주는 고개다.
[참고자료 3] 상리면(上里面)
상리면(上里面)은 삼한시대(蔘韓時代)에는 변한(弁韓)의 성한(星韓)땅이었으며 소가야(小伽耶) 때에는 보령향(保寧鄕)에 속하였고, 고려현종(高麗顯宗) 9년(1018년)에 고성현(固城縣)으로 개칭되면서 "상리(上里)" 또는 "오산(烏山)"으로 호칭하였다.
1895년에 지방제도를 개정할 때(고종 32년·칙령 제98호) 고성군 상서면(上西面)으로 조정되었으며 행정구역을 고봉(古鳳)·봉곡(鳳谷)·비고곡(比古谷)·가슬(歌瑟)·오산(烏山)·동산(東山)·가동(柯洞)·척정(滌亭)·무이(武夷)·망림(望林)·구미(龜尾)·선동(仙洞)·자은(自隱)·부포(夫浦)·조동(槽洞)등 15개 동리를 관할하였고 면사무소는 가동에 두고 있었으며, 1913년 12월 19일에 오산리(烏山里) 13번지로 이전하여 면정을 보아 오다 이듬해(1914년) 3월 1일에 조선총독부 경남 도령 제2호로 고성군의 면을
병합 조정할 때 상리면(上里面)으로 개칭하고 행정리를 9개로 조정 고봉(古鳳)·가슬(歌瑟)·오산(烏山)·조정(槽亭)·동산(東山)·무선(武仙)·망림(望林)·자은(自隱)·부포(夫浦)로 조정하였으며 1934년 5월 20일에 면의 교통 및 지리적 중심지인 조동리(槽洞里) 388번지에 면청사를 이전 신축하였고 1938년 행정구역 재조정시 "가슬"을 신촌(新村)"으로 "조동"을 "척번정리(滌煩亭里)"로 행정지명을 바꾸었으며 1984년 8월 22일자 고성군 조례 제858호로 법정리 9개리에 17개 행정리 28개 반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고 1982년에 현청사를 신축하였다.
○ 구미(龜尾)마을
구미 마을은 1914년 3월 1일, 조선총독부 경상남도령 (朝鮮總督府 慶尙南道令) 제2호로 면의 명칭 및 구역을 정할 때 망림리에서 분동되어 망림2구(望林2區)로 하였다가 광복후에 구미(龜尾)라 칭하게 되었는데 그 유래는앞산의 형세가 거북이와 같고 마을의 위치가 거북이의 꼬리부분이라 하여 거북이 구(龜), 꼬리 미(尾)자를 붙여 구미라 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마을의 형성(形成)] 마을이 생긴 연대는 신석기시대라고 하고 있으나 기록이 없어 알 수가 없고 다만 입촌한 성씨(姓氏)들의 년대를 추정해 보면 서기 1600년경(지금부터 약 400년 전후)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 당시 입촌한 성씨는 맨 먼저 합천이씨(陜川李氏), 다음으로 김해김씨(金海金氏), 고성박씨(固城朴氏), 원주원씨(原州元氏), 밀양박씨(密陽朴氏), 달성서씨(達城徐氏)등 여러 성씨가 입촌하여 마을을 형성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마을의 지세(地勢)]
마을의 위치는 고성읍에서 진주, 사천 방향으로 국도를 따라 14km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구미마을은 옛날에 산 정상(頂上)에 깃발을 꽂았다는 "깃대산" 자락에 자리잡은 양지바른 마을이다. 마을 앞들은 경지정리가 되었으며 수원도 풍부하고 토질도 비옥한 지대이다.
[지명 일화(地名 逸話)]
◇ 찬바람 고개깃대산 서쪽 능선 중턱에 있는 조그마한 고개로 무더운 여름철에도 이 고개에는 찬바람이 난다하여 찬바람 고개라 부르고 있다.
◇ 구미동(龜尾洞)옛날 노승이 이곳을 지나다가 터를 잡았다는 설이 있으며 지금도 기와장과 질그릇 조각 등이 출토되기도 하며 우물은 지금도 남아 있어 식수로 사용되고 있다.
◇ 장재(長財)터이곳에 옛날 부자가 오래 살았다 하여 장재터라고 부르고 있으며 불땐 숯과 깨친 그릇조각 등의 흔적이 지금도 남아 있다.
○ 망림(望林)마을
망림마을은 망림리(望林里) 본동마을로 1500년 경에 전주최씨(全州崔氏), 밀양박씨(密陽朴氏), 창원황씨(昌原黃氏)가 거주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마을 앞 산세가 뛰어나고 문수암 밑의 팔송정 숲이 아름다워 숲을 바라보면서 항상 희망을 갖고 살기를 바란다는 뜻에서 바랄망(望), 수풀림(林)자를 따서 망림(望林)이라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마을의 형성(形成)] 마을이 생긴 연대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으나 서기 1500년경부터 전주최씨(全州崔氏), 밀양박씨(密陽朴氏), 창원황씨(昌原黃氏)가 입촌하여 살았으며 지금은 10여 성씨가 마을을 형성하여 거주하고 있다.
[마을의 지세(地勢)] 망림 마을은 국도를 따라 고성에서 진주방향 12km 지점에, 면소재지에서 2km 떨어진 곳에 위치하여 마을 뒤에는 산으로 영현면과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마을 앞들은 경지 정리가 되어 토질은 비옥하고 수원도 좋은 편이다. 그리고 예로부터 효(孝)의 마을로 명석한 인재들이 많이 나온 마을로 이름나 있다.
[7] 천황산(天皇山)
배곡고개를 횡단하여 급경사를 이룬 산으로 올라붙었다. 바람 한 점 없는 날씨라 평지를 걸어도 연신 땀이 흐르는데 급경사를 오르다보니 눈언저리로, 등판으로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땀이 흐른다. 연신 땀을 훔치며 다리에 힘을 주고 오르기를 20여 분,
09 : 25분, 드디어 봉정상에 도착했다. 여러 개의 마루금 표지기와 『천황산(342.5m)』정상임을 알리는 코팅지가 눈에 들어온다.
『천황산(天皇山, 342.5m)』은 고성군 상리면 망림리와 영현면 봉발리 경계에 있는 산이다. 천황산 정상만 확인하고 쉼 없이 진행.
[8] 추계재=가리재
09 : 40분, 『370봉』에 도착했다. 모처럼 전망이 툭 터진다. 앞으로 올라야할 대곡산의 모습이 조망된다. 잠시 휴식.
10 : 05분, 『370봉』을 뒤로하고 우측 급 내림 길로 들어서서 천천히 내려오기를 12, 3분 「상리면」표지판을 세워 놓은 2차선 포장도로에 내려섰다. 『추계재=가리고개=가리재=楸峴』에 도착한 것이다. 이 도로는 영현면 추계리와 상리면 부포리를 연결하는 1016번 지방도로로 고갯마루에는 영현면과 상리면의 경계표지판을 세워 놓았다.
도로로 내려서서 「종생 녹색 농촌 / 체험마을 / 종생마을 1km」표지판을 세워 둔 삼거리로 이동, 그늘진 곳을 찾아 휴식을 가졌다.
갈재(일명 가래재=楸峙)는 상리면 부포리(夫浦里 33번국도)와 영현면 대법리(大法里 1009번지방도로)를 연결하는 고성군내 3번 도로가 낙남정간 주능선을 가로지르고 있는 곳으로 고갯길은 2차선 포장도로이고 고갯마루에는 영현면과 상리면의 경계 표지판을 세워 놓았다.
[참고자료 4] 영현면 추계리(楸溪里)
추계리는 단일 법정리로 형성된 마을로 본래 진주군 영선면(永善面)의 지역으로서 가리재 고개 밑에 마을이 있다하여 "가리재" 또는 "추현"이라 하였는데 광무 10년(서기 1906년)에 고성군에 편입되어 1914년에 고성군의 행정구역 통·폐합시 영현면의 추계리로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마을의 형성(形成)] 추계리는 서기 1650년경에 달성서씨(徐氏)와 진양정씨(鄭氏)가 맨먼저 입촌하여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전하고 있으며, 지금은 김해김씨(金氏), 진양강씨(姜氏), 장흥마씨(馬氏)등 여러 성씨가 마을을 형성하여 살고 있다.
[마을의 지세(地勢)] 추계마을은 면 소재지로부터 약 5㎞ 동남쪽에 위치한 큰땀, 새땀, 반장땀으로 형성되어 있으며 동, 서, 남쪽이 병풍처럼 둘러싸인 산골마을로 선바위산 골짜기에서 원류하는 냇물이 마을 앞을 지나 영천강으로 흐르고 있고, 농경지는 계단식 천수답이 많으나 수원은 비교적 양호한 편이다.
[지명일화]
◇ 화짓등 : 과장산 맥을 따라 내려앉은 자그만한 봉우리로 조선조 말엽 마상화가 과거에 급제하여 화줏대를 세웠다고 하여 "화줏등"이라 불러오다가 지금은 "화짓등"이라 하고 있다.
◇선바위등 : 마을의 동남쪽 산 능선에 옛날 마을 아낙네들이 들에서 품앗이 일을 하다가 쉬는 시간에 한 아낙네가 산을 보고 "바위가 걸어간다"고 외치자 여럿이 보는 순간 바위가 그만 산 등선에 우뚝섰다고 하여 이 등을 "선바위등"이라 전하고 있다.
<출처> 영현면 홈
http://www.goseong.go.kr/yeongh/03village/0102.asp
[참고자료 5] 상리면 부포리(夫浦里)
부포리 부포마을의 지명은 옛날부터 감티, 부개, 부포로 불리어져 왔는데 "감티"는 통영에서 70리, 진주에서 70리 되는 지점이 이곳으로서 옛날 사천, 진주, 지리산지역의 산적과 통영, 마산, 부산등지의 산적이 서로 만나 감투싸움을 한 고개로서 감티(재)라 부르게 되어으며 "부개"는 천황산 줄기가 지아비 부(夫), 클개(날개) 포(浦)자 모양을 하고 있다 하여 이곳을 지나던 원님이 지어준 지명을로 부개라 하였다 한다. 그리고 "부포"는 일제시 행정구역 개편으로 부포리로 하였다가 광복후 분동이 되면서 부포(夫浦)와 내부포(內夫浦)로 개칭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마을의 형성(形成)] 마을이 생긴 연대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으나 구전(口傳)에 의하면 지금부터 약 500여년전에 수원백씨(水原白氏)가 이곳에 정착하여 살기 시작하면서 수원백씨(水原白氏)가 임란때 입촌하였고 그후에 밀양박씨(密陽朴氏), 전주최씨(全州崔氏), 평택임씨(平澤林氏)등 지금은 10여 성씨가 마을을 형성하여 살고 있다.
[마을의 지세(地勢)] 부포마을은 고성에서 사천∼진주방면 국도의 갑문에 위치한 감티고개 마을로 뒤에는 천황산(天皇山), 앞은 선당산 자락에 자리잡은 마을로 군내에서 높은 지대로 겨울에 춥기로 전라도 운봉(雲峯) 다음가는 마을로 알려져 있으며 농토가 비옥하지 못하고 수원도 좋지 못한 지대이다
<출처> 상리면 홈
http://www.goseong.go.kr/sangri/03village/0110.asp
[9] 대곡산은 아직도 멀었는가?
추계재를 지나면 오늘 산행의 첫 고비인 542.8m『대곡산』을 올라야 한다. 10 : 20분경, 『추계재』삼거리에서 약 15분여 휴식을 가진 후 포장길 오르막을 따라 진행. 전봇대가 있는 곳에서 옹벽을 타고 넘어 숲속으로 진입을 했다. 꽤 높은 산이 앞을 가로막고 있다. 계속 아스팔트길을 따라 오르다 고개 마루에서 치고 오르면 쉽게 산 정상을 오를 수 있을 것 같다. 유혹을 진정시키고 땀을 연신 훔치며 산 정상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10 : 45분경, 큰 바위가 있는 峰(404m)에 올랐다. 『대곡산』정상이라 생각하고 오른 봉인데 정상석도 없고 마루금 표지기도 보이지 않는다. 앞에 보이는 더 높은 봉이 『대곡산』정상이라 생각하고 쉼 없이 진행. 약 3, 4분을 더 진행하니 「贈嘉善大夫行兵曺參議仁同張公諱昌麟之墓」라고 새긴 무덤이 나온다. 박사장, 오늘은 힘이 넘치는지 부지런히 앞서간다. 부지런히 뒤를 따르는데도 거리를 좀처럼 좁힐 수가 없다.
11 : 00시경, 또 다시 바위가 있는 봉에 올랐다. 이쯤이면 박사장도 쉬어갈만한데 보이지를 않는다.
11 : 10분경, 철탑을 지나
11 : 20분경, 더 이상 오를 봉이 없는 능선봉 끝에서 내림 길로 들어섰다. 대곡산은 아직도 멀었는가?
[10] 깍두기 찬으로 점심 식사
11 : 25분, 묘 2기가 있는 곳에 도착해서 배낭을 내리고 후미로 오는 김부장과 노부장을 기다리며 휴식을 가졌다. 약 7, 8분을 쉬고 있는데 박사장 소리가 들린다. 앞서 간 줄 알았는데 잠시 옆길로 빠졌던 모양이다.
11 : 35분경, 후미로 오던 김부장과 노부장 도착. 허기가 져 더 이상 갈 수 없다며 점심 식사를 하자고 한다. 아침에 식당에서 마련해 준 도시락과 찬을 꺼냈다. 깍두기 찬이 고작인데 시장이 반찬이라 밥맛이 절로난다.
[11] 대곡산(大谷山) 정상
12 : 00시에 식사를 끝내고 앞을 가로막고 있는 높은 봉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산을 오르다보니 마루금 좌우로 두릅과 빨갛게 익은 딸기가 지천으로 널렸다. 見物生心이라 그냥 지나칠 수 없어 딸기를 한줌 따 입에 넣으니 달콤하고 새큼한 맛이 입안에 침을 가득 고이게 만든다. 점심 식사 후의 후식을 딸기로 대신하고 정상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정산 직전 「낙남정맥을 종주하시는 / 산님들 힘힘힘 내세요! / 희.준」라고 쓴 코팅지가 눈에 띈다. 산행을 하면서 자주 대하던 이름이라 반갑고 격려의 말이 너무 고맙다.
12 : 42분, 드디어 산 정상에 올랐다. 「낙남정맥 / 대곡산, 542.8m / 준.희」라 쓴 코팅지와 마루금 표지기가 나무에 매달려 있고 삼각점을 비롯하여 작은 돌탑도 만들어 놓았다.
『대곡산(大谷山, 542.8m)』은 산이 높고 산골이 우거졌다 하여 「대곡산」이이란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산 정상은 고성군(固城郡)의 3개 읍면(대가면, 고성읍, 상리면)이 접하고 있는 곳으로 이곳에서 왼쪽(동동남쪽)으로 철마산(鐵馬山 418m : 대가면 연지리와 삼성면 이당리 경계에 있는 산)을 이으며 뻗어나간 지능선을 경계로 하여 대가면(大可面)과 고성읍(固城邑)이 접하고 있고, 이곳에서 앞쪽인 남쪽(남남서쪽)으로 감치재를 향해 뻗어나간 지능선을 경계로 하여서는 고성읍과 상리면(上里面)이 접하고 있으며 이곳에서 오른쪽(서쪽+서북쪽)으로 뻗어있는 낙남정맥 주능선을 경계로 하여서는 상리면과 대가면이 접하고 있다. 따라서 이곳에서부터는 낙남정맥 주능선의 오른쪽(북쪽,동쪽)은 고성군 대가면(大可面)이고 왼쪽(남쪽,서쪽)은 고성군 상리면(上里面)이다.
[참고자료 5-①] 대가면(大可面)
대가면은 본래 고성군의 지역으로서 고려현종(高麗顯宗) 9년(1018년)에 고성이 현(縣)이 되면서 대둔면(大屯面)과 가동면(可洞面), 시달면(時達面)으로 나누어 졌고, 대둔면은 척곡(尺谷), 행정(杏亭), 관동(冠洞), 박달(博達), 가산(佳山), 동지동(同志洞), 괴정(塊亭), 장전(場田), 송계(松溪), 신전(新田), 갈천(葛川), 종생(宗生)등 12개 동리를 관할하여 면소재지를 척곡에 두었다.
가동면은 암곡(岩谷), 부수암(浮水岩), 마전(麻田), 유동(柳洞), 신흥(新興), 각계(覺溪), 가동(可洞), 신화(新化), 세동(細洞), 월촌(月村)등 10개 동리를 관할하여 면소재지를 암곡에 두었으며, 시달면은 양화동(楊化洞), 수치곡(修治谷), 터골(垈谷), 방화곡(芳花谷), 연동(蓮洞), 평동(坪洞), 지동(芝洞)등 7개 동리를 관할하여 면소재지를 양화동에 두었다.
서기 1914년 3월 1일자 조선총독부 경상남도령 제2호로 고성군의 면을 병합 할때 3개면을 병합하여 대가면이라 개칭하고 암전(岩田), 유흥(柳興), 금산(琴山), 연지(蓮芝), 양화(楊化), 척정(尺停), 송계(松溪), 신전(新田), 갈천(渴川)의 9개 리를 관할하였다.
대가면은 1913년 11월 7일에 면이 설치되어 1984년 8월 22일자 고성군 조례 제88호로 행정구역을 조정할 때 종전 그대로 9개 법정리에 19개 행정리 40개 반으로 형성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가면은 고성읍에서 6.5㎞ 북쪽에 위치하여 동쪽은 고성읍과 마암면, 서쪽은 상리면과 영현면, 남쪽은 고성읍, 북쪽은 개천면에 접한다.
면내의 문화재 현황으로는 양화리 석조여래좌상(石造如來坐像), 금산리 선사유적(先史遺蹟), 봉수지(烽遂址, 양화리), 송계리 고분(古憤), 암전리 지석묘(支石墓), 대둔사지(大屯寺址, 신전리), 법천사지(法泉寺止) 및 부도군(浮屠群, 양화리), 갈천서원(갈천리), 운곡서원(척정리), 숙청사(척정리), 육영재(갈천리), 송계리 이씨고가(李氏古家)등이 있으며, 노거수(老巨樹)로 척정리 은행나무(도나무)와 금산리 팽나무(마을나무)등이 있다.
[참고자료 5-②] 연지리(蓮芝里)
연지리는 본래 고성군 가동면(可洞面)의 지역으로서 1914년 3월 1일 고성군의 행정구역 통폐합시 연동(蓮洞)과 지동(芝洞)·평동(坪洞)을 병합하여 연동과 지동의 이름을 따서 연지리로 하여 대가면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연지리는 옛날 늪지가 있던 곳에 연(蓮)을 많이 재배하였다 하여 연동이라 하고 평동은 넓고 평평한 들가운데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혀진 이름으로 지금은 행정리로 지동과 평동 마을이 있다.
<출처> 고성문화관광 문화와 역사
http://visit.goseong.go.kr/03history/0603.asp#tab
[12] 마장잇재(馬場고개)
대곡산 정상에서 주변 경관을 살피고 단체 사진 촬영을 한 후 급경사 내림 길로 들어섰다. 이곳 역시 고도가 500m 이상인데도 잡목과 잡초가 길을 완전히 뒤덮어 내려오는데도 여간 조심이 되지 않는다.
대곡산 정상을 뒤로한지 약 12분, 농장 철망을 따라 2, 3분 진행
13 : 05분, 사슴농장 진입로인『馬場고개=마장잇재(아스팔트 포장도로)』에 내려섰다. 고성군 대가면 갈천리에 있는 고개다.
이 고개가 위치한「마장(馬場)마을」은 범호산 동남쪽에 있는 마을로 고려 말기에 말을 길렀다고 하며 「마전(馬田)」은 신라시대 화랑도들이 말을 타고 훈련한 곳으로 「마장」에서 유래된 이름으로 지금은 이곳에 사슴목장이 들어서 있다.
[참고자료 5] 갈천리(葛川里)
갈천리는 본래 대둔면(大屯面)의 지역으로서 내(河川)가 갈라져 있다 하여 "갈내" 또는 "갈턴"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시에 종생(宗生)마을을 병합하여 대가면 갈천리(법정리)로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행정리로 외갈(外葛)과 내갈(內葛), 종생(宗生)마을이 있다.
○ 외갈(外葛)
외갈은 갈천리에 속한 마을로서 1984년 8월 22일자로 고성군의 이동명칭 및 구역확정에 관한 조례에 의거 행정리로 분동되면서 갈천리의 바깥쪽 마을이라 하여 외갈로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마을의 형성(形成)] 마을이 형성된 영내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으나 전하는 바에 의하면 안악이씨(李氏)가 맨 먼저 들어와 살았다고 하며 그후 서기 1700년 경에 양천허씨(許氏)와 전주최씨(崔氏)가 입촌하고 지금은 김해김씨(金氏), 김해허씨(許氏)등 9개 성씨가 마을을 형성하여 살고 있다.
[마을의 지세(地勢)] 갈천리는 무량산(無量山:해발 581m)이 서쪽을 그리고 학남산이 서북쪽을 에워싸고있는 산간오지 마을로서 외갈천은 갈천리 입구 바깥쪽에 위치하여 산이 높고 물이 맑아 산자수려한 마을로 1985년도에 갈천저수지가 마을 위에 설치되어 경지 정리가 된 비옥한 농지로 수리가 완전하여 영농은 편리하나 지방도에서 약 2㎞ 떨어진 마을로 교통이 불편하다.
○ 내갈(內葛)
내갈은 갈천리의 중심마을로서 1984년 8월 22일자로 고성군의 이동명칭 및 구역확정에 관한 조레에 의거 외갈과 종생마을로 분동되면서 갈천리의 안쪽마을이라 하여 내갈로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마을의 형성(形成)] 마을이 형성된 연대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으나 1700년경에 맨 먼저 유씨(劉氏)와 안씨(安氏)가 입촌하였고 그후에 함인이씨(李氏)가 입촌하여 대성을 이루었으며 그 다음에 김해허씨(許氏), 양천허씨(許氏), 고성이씨(李氏), 진양강씨(姜氏), 전주최씨(崔氏), 김녕김씨(金氏), 광산김씨(金氏)등 각성이 입촌하여 마을을 형성하여 거주하였으나 지금은 각성 공히 도시로 떠나고 몇 호만 살고 있다.
[마을의 지세(地勢)] 내갈천은 무량산과 학남산이 서북쪽을 에워싸고 있는 갈천리의 중심지에 위치하여 고봉(高峯)이 만장흘(萬丈屹)하고 청간(淸澗)이 백회류(百廻流)라는 두암시(杜岩詩:중국고승)와 같이 농지는 경지정리가 된 사질양토로 1985년도에 갈천 저수지가 설치되어 수원도 풍부하다. 그리고 교통은 지방도에서 약3㎞ 떨어져 있어 불편한 마을이다.
○ 종생(宗生)
종생마을은 본래 대둔면의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시에 대가면 갈천리에 편입되었다가 1984년 행정구역 확정시 갈천리의 행정리로 분동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종생(宗生)"이란 마을명은 지금은 한자로 종(宗)자를 쓰지만 옛날에는 종(種)자를 썼다는 구전이 있는데 이는 7년 대한(大旱) 가뭄으로 씨앗들이 멸종되었을 적에 이곳에서 씨앗을 퍼뜨렸다는 전설에서 유래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마을의 형성(形成)] 종생마을에 사람이 언제부터 살게 되었는지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으나 옛날의 마장(馬場)터가 있는 것으로 보아 삼국시대 이전부터 사람이 살았음을 예측할 수 있으며, 지금은 30호에 70여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그러나 30년전만해도 70여호에 400여명의 주민이 거주하던 마을로 진씨(陳氏)가 대성을 이루고 강씨(姜氏), 김씨(金氏), 천씨(千氏)등 각성이 살고 있다.
[마을의 지세(地勢)] 마을의 지세는 무량산·천황산·백등산 등 동서남북 4면이 산으로 둘러싸고 있으며 천황산 중턱에서 골짜기를 형성한 해발 250m 산중턱에 자리잡은 마을로 산을 넘어 양화리 영현면 추계를 경계로 하고 있고 큰땀·건땀·절골·마전 등 취락으로 형성되어 있는 심심 산골 마을로 좁은 농경지는 천수답으로 자연수가 넉넉하여 수리는 안전하며 교통은 하루 두차례 왕복하는 벽지 노선버스가 있으나 불편한 실정이다.
[지명 일화(地名 逸話)] 백등산
마을 서쪽을 가로막고 있는 산으로 산꼭대기에 흰 바위가 있는데 마을에서 이 바위가 보이면 마을에 아무 탈이 없고 숲이 우거져 바위가 보이지 않으면 꼭 산불이 나서 불에 타 바위가 보이게끔 된다고 하여 붙혀진 이름으로 지금도 전설에 걸맞게 10년 주기로 산불이 난다고 한다.
http://www.goseong.go.kr/01goseong/0205.asp#m
[13] 이번에도 미완주 산행이 되고 말았다.
사슴농장 진입로(마장고개)에 내려서서 배낭을 내리고 앞서간 대장에게 전화를 해 보니 『무량산』을 지나 『587봉』을 오르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잡목과 풀이 많아 산행 속도를 내기도 힘들고 풀독이 올라 온 몸이 가렵다고 한다. 아무래도 배치고개까지 산행은 어려울 것 같다며 장전고개에 도착해서 전화를 하겠다고 한다.
원 계획대로면 11 : 10분에 우리가 도착한 마장고개에 도착을 해야 하는데 무려 2시간이나 지체되었다. ‘마장고개’에서 ‘장전고개’까지 6km(대곡산(542.8m)←[1.7km]→527봉←[0.7km]→화리치←[1.8km]→578봉←[0.7km]→큰재(354m)←[1.1km]→백운산(486m)←[0.7km」→장전고개)로 부지런히 걸어야 16 : 00시에나 도착할 것 같다. 그래서 아쉽지만 이곳(마장고개)에서 산행을 끝내기로 하고 산에서 흘러내리는 몰에 땀이라도 닦을 요량으로 소매를 걷으니 온 팔뚝이 붉은 점이다. 풀독이 올랐거나 벌레에 물린 자국인 모양이다. 나만 그러가하여 박사장, 김부장, 노부장에게 팔뚝을 살펴보라 하니 마찬가지라고 한다. 계획된 산행을 완주 하지도 못하고 상처만 얻은 산행이 되고 말았다.
[14] 산행 후
13 : 40분경 대장으로부터 전화. 『장전고개』에서 산행을 접겠다고 한다. 아침에 이용했던 택시 기사에게 전화, 사슴농장에서 장전고개로 이동, 대장이 시원한 켄맥주를 마시고 싶다고 하여 장전고개로 가는 도중 맥주를 구입, 장전고개에 도착하니 대장이 그늘에 앉아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잠시 휴식을 취하며 찬 맥주로 열기를 식힌 후 진주 고속버스 터미널로 이동. 약 1시간 30분 정도 시간 여유가 있어 터미널 옆에 있는「춘향맛고을 ☎ 055-752-4477」에 들려 삼겹살에 이스리로 산행 뒤풀이를 한 후 17 : 10분, 버스에 승차하는 것으로 1박 2일간의 산행 일정을 마쳤다.
2011. 6.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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