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보리 (가평군문화원 )
대보리는 경기도 기념물 제 28호인 조종암(朝宗岩)과 대보단(大報壇)이 있어 대보리라고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상대리, 하대리, 다복리, 망동 일부를 병합하여 대보리가 되었다고 한다. (가평군지 1123p 참조) 일설로는 상 대리·하 대리의 큰 대(大)자와 다보산(多報山 : 多福山, 多富山)의 갚을 보(報)자를 합성하여 대보리라고 하였다고 전한다.
그러나 대보단은 병자호란의 패전으로 심양까지 인질로 끌려갔다가 귀국 후 그 치욕을 씻고자 북벌계획을 세워 추진하던 효종 때 조성된 것이며, 이미 그 때부터 전국 각지의 유림은 물론, 상감도 대보단 제향(祭享)에 참여하였다는 전설(상면 항사리의 망배고개 참조)도 있으니, 대보 마을의 이름은 오래 되었을 것이며, 한일 합방 이후인 1914년에 대보리라고 하였을까? 하는 의문이 인다.
신하교를 건너서, 조종천 남쪽 하안(河岸)을 끼고 포장도로가 개설되어 있다. 이 도로는 상면 항사리에서 대보리로 들어가는 대보교로도 연결되며, 마일리의 진입도로이기도 하다. 이 신하리 다리에서 은개 마을까지를 대보리라 한다.
대보리는 1리와 2리로 구분되며, 그 명칭부터 의미가 깊고, 역사적으로도 우리 겨레가 신의가 있고, 주체성이 강하며, 어떤 역경에서도 독립을 유지하려는 민족정신이 강하다는 것을 산간벽지 대보리에서 엿볼 수 있으니 그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으리라.
임진왜란 당시 우리 나라를 도왔던 명나라는 7년 간 약 40만 명의 군사를 파견하여 우리를 도왔던 우방국이었다. 그런데 그 후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 우리 나라는 청(淸)나라에 패하게 되고, 당시 임금이던 인조대왕(仁祖大王)은 끝내 삼전도 나루에서 치욕적인 항복을 하고 말았다. 오랑캐 청나라는 만고에 없는 굴욕적인 항서를 바치고, 삼학사를 비롯하여 대신들의 자제들을 인질로 하고, 우리의 무고한 청춘 남녀를 수 없이 포로로 잡아가는 등 악랄한 폭행을 자행하였다.
당시 청나라에서 9년 간이나 인질로 잡혀 있다가 풀려난 봉림대군(鳳林大君·후의 孝宗大王)은 심양에서 돌아올 때, 함께 포로로 잡혀있던 명나라 구의사(九義士)를 대동하고 귀국했는데, 이는 장차 청나라를 쳐서, 삼전도 나루의 치욕을 씻기 위한 북벌정책(北伐政策)의 일환이었다.
효종대왕은 귀국하여 국가세입의 3분의 1을 군자금으로 비축하고, 군대를 비밀리에 양성하며, 북벌의 때가 오면 복수를 한다는 굳은 결의가 서 있었지만 효종은 북벌의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서거하고 말았다.
그러나 북벌계획에 성공을 기다리고 함께 준비하던 우암 송시열(宋時烈)은 이 거룩한 뜻이 계승되기를 비는 뜻에서 당시 명나라에서 청은 김상헌(淸隱 金尙憲)이 구해 온 의종황제(毅宗皇帝)의 어필로 된 사무사(思無邪 : 사악한 생각이 없다, 마음이 순수하다. 세 글자와 효종대왕의 어필인 日暮途遠 至痛在心 (갈 길은 먼데 날이 저무니, 쓰라린 마음 이룰 데 없다.)이란 글을 가평군수 이제두(李薺杜)에게 부탁하여 바위에 새기게 되었으니, 이 바위를 조종암(朝宗岩)이라 하고, 제향(祭享)을 올리던 단을 대보단(大報壇)이라 부른다.
그 곳에 세운 조종암기실비명(朝宗岩紀實碑銘)을 역문(譯文)으로 적어둔다.
"모든 물이 바다로 흘러가니, 바다가 물의 왕이 되고, 왕자의 일은 제후가 조회하는 것보다도, 더 높은 것이 없는 까닭에 양자강과 한수가 동쪽으로 흘러가는 것을 "조종"이라고 부른다. 서경(書經)에 우공(禹貢)부터 시작하여, 공자가 춘추(春秋)를 지음에 이르러 그 뜻이 바로 밝아졌으니, 그것은 대일통(大一統)하는 까닭이다.
대체로 빈 이름만 가지고, 천하 후세에 이름하게 됨에, 사람들은 슬퍼하고, 분히 여겨, 소매를 떨치고 일어나려고 아니하는 이가 없는 것은, 누가 그렇게 하는 것이냐?
이것으로 말미암아 "조종암"이란 이름이 나온 바다. 조종암은 가평군에 있으니 가평이란 한국의 조그마한 고을이다. 조종이라고 특별히 부른 것은 의(義)를 좋아하는 사람이 이곳을 지나가다가 그 이름에 느껴서 탄식하며 말하기를 "이곳은 천하에 간정한 곳이다. 옛날 임진왜란 때 한국 전체가 왜군에게 점령당하는 것을 면하게 된 것은 명나라 황제의 힘이 아니었으랴"
"아아! 슬프다 명나라 사직이 벌써 폐허가 되고, 중국이 피비린내 나는 곳이 되어, 우리들의 그 사모함을 붙일 곳이 없더니, 이제 여기에서 얻었구나."
하고 드디어 동네 북쪽에 있는 동그란 바위에 명나라 의종 황제의 어필(御筆)인 사무사(思無邪) 세자를 받들어 새기니, 바로 배신(陪臣) 문정공 김상헌(金尙憲)께서 심양(瀋陽)에 구금되었을 때에 얻어 온 것이다. 다음에 만절필동(萬折必東 : 만 번 꺾이어도 반드시 동방에 이른다) 네 자는 우리 소경왕(昭敬王 선조대왕)의 어필이며, 약간 왼쪽으로 주를 비켜 새긴 재조반방(再造潘邦 : 나라를 재건한다)이란 글은 무술년(戊戌年), 상주문(上奏文)에서 나왔고, 일모도원(日暮途遠), 지통재심(至痛在心)이라 한 것은 효종대왕께서 재상 이경여(李敬輿)에게 비사(批辭)로 내린 말로써 이것들은 모두다 문정공 송시열(宋時烈)선생이 쓰신 것이다.
그 이마에다 전자(篆字)로 조종암이라고 새긴 것은 낭선공자(朗善公子 : 선조의 손자) 우(沑)이다. 처음에 일을 시작한 이는 창해 허격(許格)이고, 이 일을 도운 사람은 가평군수 백해명(白海明)이다. 또 사당을 세워 위로 신종황제를 제사 드리려고 하였는데, 우암 송시열 선생이 이 말을 듣고 말씀하시기를, "명나라 의종 황제는 어찌해서 빼었는가" 하셨는데 일이 채 이루기 전에 선생이 돌아가심에 그 문인 권상하(權尙夏)선생이 이것인 즉 조종암이 그 시작이 된 것이다.
또 대보단을 창설할 때, 선조 대왕과 효종 대왕 두 임금을 배향코자 하였다가, 의론이 한결같지 아니하여 비록 그만 두었으나, 의리를 미루어 보면, 문(文)이 거기에 있지 아니한가. 신하가 그 임금을 따르는 것과 여러 제후가 천자를 쫓는 것 같은 것이다. 이것은 또 하나 대보단에 대한 의론을 아직 다 말하지 못한 것이 아니겠느냐. 대체로 덕을 사모하는 것은 순리이고, 자나깨나 비풍하천(匪風下泉 : 시경에 옛적 주나라 백성이, 쇠해진 고국 주나라를 추모하는 비분강개한 뜻을 담은 시) 시를 읊음은 때가 불행한 때문이며, 비유컨대 물이 쉬지 않고, 같이 바다로 흐름과 같음이니, 혹 평지로 갈 때는 아무 일도 없으나, 넓은 여울과 급한 파도가 되어서 용문산(龍門山 : 중국 황하 하류에 있는 산)을 흔들면 천하의 변괴가 여기에서 극도에 달하니, 그것이 어찌 물이 기뻐하는 바이겠는가? 그 형세로 말하면 그러한 것이다.
정종 갑진년(甲辰年 1784), 상서벼슬에 있는 황승원(黃昇源)이 가평군수로 있을 때에, 조종암 앞에 여섯 개의 집을 짓고, 조종암(朝宗菴)이라고 이름했었는데, 여러 해가 되어 집이 파손됨에 근방 사람들이 동지를 규합하여 집을 보수하고, 또 돌을 깎아서 이 글(조종암 기실비)을 새기니 이곳이 어찌 "열 집이 사는 적은 고을에 충성되는 사람이 많다."고 한 공자의 말씀과 같다고 아니하리오,
옛날 우암 선생이 조창강 선생 속(涑)과 더불어, 신만(申曼)처사를 방문하여, 밤이 늦도록 말을 심하게 하니, 조공(趙公)이 김탁영(金濯纓)의 조천부(朝天賦)를 모시고, 서로 크게 한숨쉬며,
"예전에 사대부가 중국에 들어가서 유람하던 때는 오늘날 사람과 같지 아니하였으니, 아아! 오늘날 이 의리를 알 자도 또한 드물 것이다. 그 파멸되지 않은 것은 오직 돌 위에 빛나는 먹 흔적(글씨)뿐이 아니랴, 천자의 나라에 조회 가서 차디찬 말을 하는 것 같은 것이 오히려 양추(陽秋)의 한 맥이 천지의 사이에 붙어 있는 것이라고나 하지 않겠는가?" 라고 말하였다.
永歷一百五十八年純祖四年(1804년) 立
승록대부 호조판서 홍문관제학 조진관 짓고
정헌대부 이조판서 성균관사 김달순 쓰고
승록대부 좌의정 춘추관사 서매주 전서쓰다
조종암 대보단은 1958년 가평 관민유지들의 발기로 대통묘제향을 다시 지내기 시작하였고, 1975년 경기도 지방문화재 제 28호로 지정되었다. 1977년 전국유림 600 여명의 성금으로 조종재를 중건하고, 이듬해에 다시 대통행묘를 창건하여 중앙에 태조·신종·의종 세황제를 모시고, 동쪽에는 金尙憲선생, 洪翼漢학사·尹集학사·吳達濟학사·金應河장군·林慶業장군·李 浣장군·李恒老선생·柳麟錫대장 등 아홉 분을 모시고, 그 서쪽에는 명나라 王美承·徬三仕·黃功·鄭先甲·楊福吉·裵三生·王文祥·王以文·柳溪山 등 아홉 의사를 모시고, 매년 음역 3월 19일 제향을 받들게 되었다.
여기 이 조종암 바위에 뭉쳐진 정의로운 정신만은 우리 나라 주체성에 커다란 교훈이 될 것이고, 이 은의를 잊지 아니하는 예의동방의 찬란한 정신이 전 세계에 퍼져 나갈 때 천하는 길이 화평할 것이니 이곳이야말로, 의로운 역사의 살아있는 표상이라고 할 것이다. (가평의 자연과 역사 p320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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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어렷을적 외가인 항사리에 가면 대보리앞 개울에서 물고기 잡든 시절이 생각 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