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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사상>, 2022년 겨울호
【김현경의 회고담 16】
김수영 시 읽기 (6)
일시 : 2022년 6월 15일. 6월 17일.
장소 : 경기도 용인 자택
맹문재 : 오늘은 「자장가」부터 읽어볼게요. 『현대문학』 1959년 3월호에 발표한 작품이에요. 김수영 시인이 “아가야 아가야”라고 부르고 있는 데서 볼 수 있듯이 아주 행복한 가정의 모습으로 보이네요.
김현경 : 이 작품에서의 “아가”는 둘째 아이예요. 김 시인은 둘째를 특히 사랑했어요. 자기하고 똑같이 생겼다고 했어요. 실제로 아이가 영특했어요. 이때가 우리 집 행복의 절정이었어요.
맹문재 : 작품에서 “열 발가락이 다 나와 있네”라거나 “만들어 준 빨간 양말” 같은 표현이 나오는데, 어떤 상황인지요?
김현경 : 둘째가 돌이 아직 안 되었을 때 김 시인이 쓴 작품이에요. 내가 낡은 스웨터의 실로 양말을 만들어 신기었어요. 그런데 천이 약하고 아이가 자꾸 움직이니 빵꾸가 났어요. 둘째가 1958년생이니 가난한 시절이었잖아요. 김 시인이 있는 서재는 아무래도 썰렁해 아가를 안방의 아랫목에 누이고 포대기를 덮어주었어요.
맹문재 : 이 작품에는 “기저귀 위에는 나일론 종이까지 감겨져 있네”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상황을 좀 들려주세요.
김현경 : 나일론 종이는 비닐을 말하는 것이에요. 아기에게 헝겊으로 된 기저귀를 채우고 난 뒤 그 위에 비닐을 입혔어요. 바지가 아가의 오줌에 젖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어요.
맹문재 : 작품에는 아가의 “머리도 한번 깎지를 않”았고, “되놈이라고 부”른 것으로 되어 있어요. “국민학교 놈의 국어 공책을 집어 주”기도 했네요.
김현경 : 아가가 아주 잘생겼고 귀여웠어요. 머리가 노르끼리하고 얼굴이 희었어요. 그래서 귀여운 장난으로 되놈이라고 부른 것이었어요. 아가가 8개월이 된 무렵이어서 머리를 깎지 않았어요. 아가에게 마땅히 집어줄 것이 없어 빈 공책을 집어준 것이에요. 김 시인은 초고를 쓸 때 꼭 원고지나 편지 봉투를 뒤집어서 썼어요. 줄이 처지지 않은 종이에다 쓴 것으로 그만큼 소박하고 겸손했어요.
맹문재 : 다음의 작품이 『모리배』예요. 『신태양』 1959년 5월에 발표했네요. 이 작품에서 모리배는 어떤 의미인지요?
김현경 : 자신의 이익을 챙기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들을 모리배라고 했어요. 그 당시의 경제 상황은 마땅한 생산 공장이 없었지요. 그러다 보니 독점해서 팔면 이익을 많이 남길 수 있어 그렇게 하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가령 냉동회사를 세워놓고 고등어가 많이 잡힐 때 사서 보관하다가 고등어가 귀할 때 내다 팔면 더 비싼 값을 받게 되니 이익을 많이 챙길 수 있는 것이지요.
맹문재 : 이 작품에는 독일의 철학자인 “하이데거”가 등장해요. 어떤 의미를 띠는지 아주 주목하게 되어요. 작품의 전문을 우선 읽어볼게요.
언어는 나의 가슴에 있다
나는 모리배들한테서
언어의 단련을 받는다
그들은 나의 팔을 지배하고 나의
밥을 지배하고 나의 욕심을 지배한다
그래서 나는 우둔한 그들을 사랑한다
나는 그들을 생각하면서 하이데거를
읽고 또 그들을 사랑한다
생활과 언어가 이렇게까지 나에게
밀접해진 일은 없다
언어는 원래가 유치한 것이다
나도 그렇게 유치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내가 그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다
아아 모리배여 모리배여
나의 화신이여
―「모리배」 전문
김현경 : 김 시인이 이 시를 쓸 때는 하이데거 전집을 읽은 것이 아니라 단행본으로 된 것을 읽었어요. 일본어판이었어요. 김 시인은 하이데거를 읽으면서 아주 좋아했어요. 자기가 생각하고 행동하려는 것이 하이데거와 똑같다고 했어요. 김 시인은 모리배를 하이데거의 적이라고 생각한 것이지요. 하이데거 전집은 충무로 초입에 외서를 파는 서점이 있었는데, 거기에서 샀어요. 그 서점에는 주로 일본어로 된 책이 많았어요. 거기서 잡지와 문예지를 사기도 했어요.
맹문재 : 작품에서 “나는 그들을 생각하면서 하이데거를/읽고 또 그들을 사랑한다”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김수영 시인이 마치 이열치열의 자세로 모리배에 맞서는 것으로 읽히네요. 이러한 자세는 정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드네요. 이 작품을 발표한 뒤 얼마 되지 않아 4·19혁명이 일어나잖아요.
김현경 : 김 시인이 4·19혁명 당시 시를 쓰는 데 하이데거의 영향이 있은 듯해요. 김 시인은 자신의 사상과 하이데거가 같다고 생각했고, 사회참여에도 같다고 생각했어요. 그 당시 모리배는 당연히 정치와 관계가 있었지요. 정치인들이 돈이 필요하니까 되레 모리배에게 손을 벌리는 형편이었어요.
맹문재 : 작품이 “아아 모리배여 모리배여/나의 화신이여”라고 마무리되고 있는 것이 새롭게 와닿네요. 모리배를 감정적으로 비난하지 않고 자기반성과 성찰을 토대로 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언어는 원래 유치한 것이다/나도 그렇게 유치하게 되었다/그러니까 내가 그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다”라는 인식도 마찬가지네요.
다음의 작품이 「생활」이에요. “시장 거리의 먼지 나는 길옆의/좌판 위에 쌓인 호콩 마마콩 멍석의/호콩 마마콩이 어쩌면 저렇게 많은지/나는 저절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로 시작하고 있어요.
김현경 : 김 시인이 해방 직후에는 쉬르리얼리즘의 작품들을 썼는데, 이 무렵에 와서는 스타일이 사뭇 달라졌어요. 이 작품에서의 시장은 동대문시장이에요. 그곳에 김 시인과 둘째 아이와 함께 가곤 했어요. 큰아이는 학교에 다니니까 함께 가지 못했어요. 반찬거리도 사고, 그때 내가 <엔젤>이라는 양장점을 내고 옷을 만들고 있으니까 바느질 부속품을 샀어요. 마포에서 동대문시장까지 버스가 있었어요. 1번 버스였는데, 정릉까지 갔어요.
맹문재 : 이 작품에 나오는 “호콩”과 “마마콩”은 어떤 콩 종류인지요?
김현경 : “호콩”은 낙화생, 즉 땅콩이에요. “마마콩”은 수입 콩 같기도 한데,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어요. 한 됫박씩 팔았어요.
맹문재 : “마마콩”을 인터넷에서 검색해보니 “잠두콩”으로 불리네요. 이 작품은 “무위와 생활의 극점을 돌아서/나는 또 하나의 생활의 좁은 골목 속으로/들어서면서/이 골목이라고 생각하고 무릎을 친다”라고 마무리되고 있네요. 이 구절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김현경 : 김 시인은 문학을 하는 길에서 상업주의와 타협하지 않았어요. 따라서 그 길을 가는 것이 외롭다고 생각했어요. 그렇지만 문학의 길을 놓지 않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리하여 “무릎을 친다”라고 했는데, 좋은 뜻으로 읽히네요.
맹문재 : 다음의 작품이 「달밤」이에요. 『현대문학』 1959년 8월호에 발표했어요. “언제부터인지 잠을 빨리 자는 습관이 생겼다”라는 구절로 작품이 시작되는데, 상황을 알고 싶네요.
김현경 : 김 시인은 나하고 재회해서 살림을 차린 뒤에는 많이 달라졌어요. 마포로 이사해서 양계도 하고 농사도 짓고 하니 생활이 달라진 것이지요. 점점 명동에 나가는 일도 줄였어요. 김 시인이 금연, 금주, 금차라고 쓴 것을 보셨지요. 외출을 줄이고 술을 안 먹으니 밤거리를 방황할 필요가 없었고 잠자리에 일찍 들 수 있었지요.
맹문재 : 작품에서 “시골에 사는 나는”이라고 표현하고 있어요. 실제로 시골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셨는지요?
김현경 : 그럼요. 김 시인도 그렇고,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지금 푸른사상사 서울사무소가 들어 있는 한국출판콘텐츠센터의 자리가 그때는 버스 종점이었어요. 그전에는 전차 정거장이 있는 곳이 버스 종점이었지요. 나중에는 버스 종점이 서강으로 들어갔지요.
맹문재 : 김수영 시인이 이 작품을 쓴 때가 “서른아홉 살의 중턱”으로 보이네요.
김현경 : 지금 생각하면 한참 청춘의 나이였지요. 나이를 생각하면 참으로 아까워요. 그런데 그때는 서른이 넘으면 청춘이 아니라고 생각을 했어요. 나도 그렇게 여겼어요. 김 시인이 세상을 떴을 때 내가 마흔둘이었어요. 그래서 나는 여자로서는 끝났다고 생각했어요. 김 시인이 돌아가신 뒤 최정희 소설가가 모 대학 총장을 데리고 왔어요. 혼자 사는 분이었어요. 최정희 소설가가 나에게 재혼 자리를 마련해준 것이지요. 그렇지만 나는 그분을 다시 만나지 않았어요. 아이들이나 키워야겠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최정희 소설가는 김 시인을 무척 좋아해 우리 집에 자주 놀러 왔어요. 마포에 있는 아파트에도 살았고, 합정동에 살았기 때문에 가까워 걸어서 왔어요. 우리 집의 계란을 사고, 차 마시고, 얘기를 나누다가 갔어요. 김 시인이 돌아가셨을 때도 가장 먼저 적십자병원에 조문을 온 분이에요. 최정희 소설가가 나도 무척 이뻐했어요. 그분은 김동환 시인과 결혼했지요. 지원이와 채원이 딸이 있었는데 아주 재치가 있었어요. 지원이 웨딩드레스를 내가 만들어주었어요. 최정희 소설가는 김동환 시인과 세 번째 결혼을 했는데, 남편을 무척 사랑했어요. 최정희 소설가의 소설책이 잘 팔려 경제적으로 어렵지는 않았어요. 『지맥』『인맥』『천맥』이 있었는데, 불행한 여성들을 아주 잘 그렸어요. 김동환의 시 「산 너머 남촌에는」이 아주 좋지요. “산 너머 남촌에는 누가 살길래/해마다 봄바람이 남으로 오네/꽃 피는 사월이면 진달래 향기/밀 익는 오월이면 보리 내음새/어느 것 한 가진들 실어 안 오리/남촌서 남풍 불 제 나는 좋데나”라는 노래가 있잖아요.
맹문재 : “밤이여 밤이여 피로한 밤이여”라고 작품이 마무리되고 있는 것을 보면, 김수영 시인은 빨리 잠자리에 든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피곤을 완전하게 풀지 못한 것으로 보여요. 피곤한 이유는 아무래도 시대적인 상황에 대한 고민이라고 보여요. 위의 시를 쓴 시기가 4·19혁명이 일어나기 6개월 전이므로 자유당 독재 정권이 진행되고 있었잖아요.
김현경 : 그렇지요. 편하지 않았지요. 현실에는 편한 것 같았지만 그것이 세상과 일종의 타협하는 것으로 생각해 행복한 것이 아니었지요.
맹문재 : 실제로 마포구 집에서 두 분이 달밤 구경을 했는지요?
김현경 : 마당이 넓고 앞이 터져 있어 달이 잘 보였어요. 더욱이 내 생일이 오월 보름이잖아요. 달밤에 마당에 나가 얘기를 나누기도 했어요. 내가 얘기를 많이 하는 편이었어요. 내가 쓴 「내가 가장 행복했던 순간들」이란 산문이 있잖아요. 김 시인이 작은아이를 업고, 내가 큰아이의 손을 잡고 시어머니댁에 갔다가 달밤에 걸어온 이야기이지요.
맹문재 : 참으로 좋은 산문이지요. 합동 산문집 『우리는 영원하고 사랑도 그렇다』에 실려 있지요. 생신날 김수영 시인이 선물을 주기도 했는지요?
김현경 : 생일 선물은 아니지만, 6·25전쟁이 나기 전 돈암동에서 살 때 선물을 받은 적이 있어요. 클로버 시계와 상아로 된 거울 등 지금도 가지고 있어요. 마포로 이사를 온 뒤에는 선물을 받은 적이 없는 것 같아요. 김 시인 대신 시어머니가 저의 생일을 꼭 챙겨주셨어요. 고기를 사서 집으로 오셨어요. 그래서 함께 식사했지요. 시어머니는 참으로 훌륭한 분이셨어요. 오이지를 담그라고 오이를 단으로 사서 오시기도 했어요. 내가 살림을 할 때 실수를 해도 시어머니는 야단을 치는 법이 없고, 늘 당신의 실패담을 들려주시며 다독여주셨어요. 남편이 몸이 아파 경제 활동을 할 수 없는 데다가 여덟 명의 자식들을 키우는 가장이셨으니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시어머니가 만주에 있을 때 고춧가루 장사를 한 것을 언젠가 들려주었지요.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아파요. 시아버지가 지전상을 잘하지 못한 것도 생각해보면 무능하거나 불성실하기 때문이 아니지요. 일제 강점기였기 때문에, 즉 전쟁 중이니 장사가 잘될 수 없는 것이었지요.
맹문재 : 다음으로 읽어볼 작품이 「사령」이에요. 1958년 8·9월호 합병호로 발간된 『신문예』에 발표되었네요. 기억나시는지요?
김현경 : 그럼요. 내가 원고지에 정서한 작품이지요.
맹문재 : 이 작품은 “그대는 반짝거리면서 하늘 아래에서/간간이/자유를 말하는데/우스워라 나의 영(靈)은 죽어 있는 것이 아니냐”라고 마무리되고 있어요. 이승만 독재 정권에 대해 마음으로는 저항하면서도 실제로는 행동하지 못하는 자신을 반성하는 것으로 보여요. 실제로 두 분이 4·19혁명이 일어나기 전에 정치나 사회에 관한 대화를 나누셨는지요?
김현경 : 우리는 죽은 목숨처럼 살았어요. 그래도 김 시인과 이승만 정권의 부패에 대해 많은 얘기를 나누었어요. 우리는 호흡이 맞았어요. 결국 4·19혁명은 이승만 독재 정권이 곪아 터진 것이에요. 4·19혁명이 일어나기 전에 『사상계』를 간행한 장준하 같은 분도 김 시인을 인정하고 있었어요. 우리 큰아이가 중학교 3학년 때 패혈증에 걸려 연세대 세브란스에 입원한 적이 있었어요. 그런데 장준하 씨가 어떻게 알았는지 병문안을 왔어요. 병원에도 우리 아이를 잘 부탁한다고 당부까지 하고 가셨어요.
맹문재 : 다음으로 살펴볼 작품이 「가옥 찬가」이에요. 『자유문학』 1959년 10월에 발표한 작품이네요. 마포 구수동에 사실 때 쓴 작품으로 보이는데요.
김현경 : 구수동으로 이사 간 초창기에 쓴 작품이에요. 1년쯤 지난 이야기로 보이네요. 김 시인이 처음 이사를 했을 때 좋아했어요. 성북동에서 시달렸던 소음이 들리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처음에 이사했을 때 넓은 밭 가운데 우리 집이 한 채 놓여 있었어요. 한 100미터 아래에 집이 한 채 있을 뿐이었어요. 그 집은 지대가 낮아서 한강에 장마가 지면 물이 차기도 했어요. 캐비닛 공장은 나중에 생긴 것이에요. 가을에는 온통 배추밭이었어요. 서울 시민들의 김장 배추를 공급한 것이지요.
맹문재 : 이사를 할 때의 상황을 좀 들려주세요.
김현경 : 아침 일찍 출발했어요. 연탄까지 싣고 갔어요. 나와 아이는 트럭의 기사 옆에 앉아서 갔고, 김 시인은 다른 교통편으로 갔어요. 김 시인은 이사 가기 전에 그 집을 보지 않았어요. 집은 한 20여 평이 되었어요. 그 뒤에 내가 증축해나갔어요.
맹문재 : 작품에 “하얗게 마른 마루 틈 사이에서/들어오는 바람”이란 구절이 나오는데 어떤 상황인지요?
김현경 : 이사를 가보니 집에 차양이 없었어요. 그래서 비가 오면 신발이 다 젖었어요. 그리고 툇마루가 햇빛에 바래 하얗게 되었어요. 남향집이었어요. 그 상황이에요. 그래서 차양을 좀 넓게 달았어요. 그 비용도 그렇게 싸지 않았어요.
맹문재 : 그래서 “멋진 양철 차양이 있다”고 작품에서 썼는가 보네요. 다음으로 “벌거벗고 지내는/나는 여름”이란 구절도 나오는데, 김수영 시인이 집에서 이런 차림으로 지내셨는지요?
김현경 : 여름에는 날씨가 무척 더우니 런닝구(러닝셔츠) 차림으로 있기도 했지요.
맹문재 : “석간에 폭풍경보를 보”았다고 했는데, 댁에서는 무슨 신문을 구독하고 있었는지요?
김현경 : 석간으로 『동아일보』를 구독했어요. 『조선일보』도 구독했어요. 그 당시에는 광화문 지하에서 신문을 팔았지요.
맹문재 : 말씀을 듣고 보면 김수영 시인의 시들은 모두 사실에 토대를 두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어요. 그냥 읽었을 때는 아주 낯설어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도 여사님의 말씀을 듣고 보면 이해가 잘 되어요.
김현경 : 다 사실이에요. 어떤 때는 김 시인이 너무 사실적으로 그려 창피하다고 생각했어요.
맹문재 : 마포구 구수동으로 이사를 하신 뒤 어떤 생활을 하셨는지 궁금하네요.
김현경 : 처음에 이사했을 때 막연했어요. 그래서 시장에서 가서 병아리를 열 마리 사고 한 마리 덤을 얻어 가지고 와 키우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가을 어느 날 새끼 돼지를 지게에 지고 팔러 온 사람이 있어 샀어요. 땅이 넓으니 키우고 싶다는 욕심이 난 것이지요. 우리 집에서 좀 떨어진 곳에 두붓집이 있었는데, 그 집의 비지와 순물을 얻어다가 먹였어요. 최고의 사료였지요. 그 두붓집 주인이 인정이 많았어요. 비지를 얻으러 가면 좀 기다려야 할 때는 따뜻한 방에 들어가 기다리라고 했고, 두부찌개를 해서 밥을 먹으라고 했어요. 그렇게 해서 그 집하고 친해졌어요. 그 집 딸이 우리 집에 놀러 오곤 했어요. 도배도 도와주었어요. 그렇지만 겨울에는 돼지가 자라지 않았어요. 돼지는 봄에 사다 키워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지요. 이듬해 봄에 돼지를 처분했어요. 가을부터 닭들이 알을 낳기 시작했어요. 달걀이 돈이 되니 재미있고 신기했어요.
큰아이가 서강국민학교에 다녔어요. 같은 서울인데도 시골 아이들하고 차이가 났어요. 어떤 아이는 한복 바지에 조끼를 입고 학교 다닐 정도였어요. 집에 수도가 없어 공동 우물에서 물을 길어다 먹어야 해 불편했기 때문에 펌프를 설치했어요. 그랬는데 금세 수도가 들어와 부엌에 끌어들였어요.
맹문재 : 다음의 작품이 「싸리꽃 핀 벌판」이에요. 이 작품도 마포구 구수동 집을 배경으로 쓴 것으로 보이네요. 작품의 전문을 인용해볼게요.
피로는 도회뿐만 아니라 시골에도 있다
푸른 연못을 넘쳐흐르는 장마통의
싸리꽃 핀 벌판에서
나는 왜 이다지도 피로에 집착하고 있는가
기적 소리는 문명의 밑바닥을 가고
형이상학은 돈지갑처럼
나의 머리 위에서 떨어진다.
― 「싸리꽃 핀 벌판」 전문
김현경 : 집 앞이 산언덕이었어요. 그 언덕에 파출소가 있었어요. 그리고 그곳에 싸리꽃이 피었어요. 보랏빛 분홍 꽃이 아주 이뻤어요. 만용이가 싸리를 베어 빗자루를 만들어 계사의 닭똥을 쓰는 데 사용하기도 했어요.
맹문재 : 이 작품은 “피로는 도회뿐만 아니라 시골에도 있다”라고 시작하고 있어요. 김수영 시인은 왜 피로하다고 느꼈을까요?
김현경 : 집에서도 번역하는 일이 힘들어 피로하다고 말한 것이 아닐까요. 번역하는 것이 돈 버는 일이니, 시골에서 하든 도시에서 하든 피곤할 수 있지요.
맹문재 : “형이상학은 돈지갑처럼/나의 머리 위에서 떨어진다”라고 마무리되고 있는 것과 연관시켜보니 그런 것 같네요. 한 가장으로서 번역 일도 번역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으니 피로할 수 있지요. 혹 아내가 너무 부지런하니 그렇지 못한 자신과 대비해 피로하다고 느낀 것은 아닐까요? (웃음)
김현경 : 글쎄요. 김 시인이 『평화신문』을 그만두고 번역 일에 매달렸는데, 피로를 느낄 만하지요. 그래도 닭장에 들어가 달걀은 잘 주워왔어요. 달걀 줍는 일을 재미있어했어요.
맹문재 : “푸른 연못을 넘쳐흐르는 장마통”이라는 표현이 있는데, 한강의 장마 상황을 그린 것으로 보이는데요.
김현경 : 장마철에 한강이 넘쳤어요. 심할 때는 밭까지 물이 들어찼어요. 당인리 발전소는 서강다리 건너편에 있었는데, 동풍이 부는 날에는 시커먼 연기가 우리가 사는 쪽으로 오기도 했어요. 한강 기슭에는 얼음 창고가 있었어요.
맹문재 : 다음으로 읽어볼 작품이 「동야(凍夜)」에요. 1960년 3월호 『현대문학』에 발표한 작품이네요.
김현경 : 겨울에는 한강이 꽁꽁 얼었어요. 아이들이 강기슭에서 썰매를 많이 탔어요. 어른들도 그 언 강으로 다녔어요. 나도 한 번 다녔는데, 혼났어요. 구로동에 내 땅이 있어 영등포의 대서방에서 서류를 떼어 한강 위로 걸어 집까지 온 것이에요. 평소에는 노량진에서 서울역으로, 서대문으로, 다시 마포로 와야 하는데, 그날 영등포 네거리에서 밤섬이 빤히 보이길래 구수동까지 걸어온 것이지요. 그런데 왜 그렇게 멀고 먼지, 그리고 겨울 강바람이 왜 그리 추운지, 정말 애먹었어요.
맹문재 : 좀 전에 구로동에 땅이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무슨 땅인지요?
김현경 : 우리 아버지가 내 이름으로 1,000평을 해놓은 것이 있었어요. 그 땅이 농경지가 아니라 잡종지로 되어 있어 토지개혁에 걸리지 않았던 것이에요. 가보니 둑 밑이었는데, 어떤 사람이 돼지를 기르고 있었고, 철조망이 쳐져 있었어요. 그런데 수성 시동생이 공사를 맡았는데, 계약금이 없다고 해서 그것을 보증으로 선 것이지요. 시동생이 서울시청에 다녔는데, 그 땅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어요. 나는 그 땅이 있는 줄 몰랐어요. 시동생이 어머니와 대식구를 모시는 데다가 사업의 타당성이 있다고 보여 서류를 건네준 것이지요. 수성 시동생은 프랑스의 영화배우 이브 몽탕(Yves Montand)처럼 잘생겼어요. 중절모자를 쓰고 명동에 나서면 영화감독이 쫓아올 정도였어요. 술을 좋아했고, 화술이 대단히 좋았어요. 부인은 산부인과 간호사로 아이를 얼마나 잘 받는지 몰라요. 몇 년 지나 나의 셋째 동생 남편인 이상홍 씨가 그 땅이 어떻게 되었느냐고 물었어요. 그 땅값이 백억 정도 한다고 했어요. 제부는 건설부 도시과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경주의 양반으로 아주 훌륭한 사람이었어요. 정주영 씨가 현대에 스카우트하려고 애썼을 정도였어요. 나중에 삼한기업으로 들어가 일했어요. 현대아파트에 함께 살기도 했는데, 아들이 서울공대를 나와 미국 플로리다대학에서 환경공학 박사학위를 받고 부인과 함께 대학교수로 있어요.
맹문재 : 김수영 시인은 겨울을 좋아했는지요? 한강이 얼었을 때 두 분이 나가 산보를 하시기도 했는지요?
김현경 : 김 시인은 겨울을 좋아하지 않았어요. 서울 변두리의 겨울은 무척 추웠어요. 한강이 가까우니 더욱 그러했어요. 집도 추우니 스토브를 마루에 놓고 방에도 놓고 김 시인의 서재에도 놓았어요. 한번은 연탄가스에 중독되어 식구들이 큰일 날 뻔했어요. 깨어나 동치미 국물을 마셨어요. 그다음부터는 식초를 흠뻑 적신 솜을 방안에 놓아두었어요.
맹문재 : 다음으로 읽어볼 작품은 「미스터 리에게」인데,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에 대해 언젠가 말씀해주셨지요.
김현경 : 탤런트 최불암 어머니가 운영하는 <은성>에 자주 온대요. 이 씨 왕조의 후손이고 고려대학교를 나왔대요. 장가도 가지 않았고 어머니하고 큰 기와집에서 사는데, 방을 세준 돈으로 생활을 하는가 봐요. <은성>에 와서는 이봉구 등 문인들과 어울리면서 술값을 내주곤 한대요. 그분이 김 시인을 아주 좋아했어요. 그래서 함께 술 마시는 것을 무척 바랐는데, 김 시인은 그와 어울리는 것을 아주 싫어했어요. 내가 왜 그런 사람의 술을 얻어먹어야 하냐고 했어요. 그분은 김 시인을 만나러 우리 집에 찾아오기도 했어요.
맹문재 : 이 작품은 “태양이 하나이듯이/생활은 어디에 가 보나 하나이다”에서 보듯이 생활을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요.
김현경 : 무위도식하지 말고 정신 차리고 살라고 말하는 것으로 읽히네요. 나도 그분을 몇 번 보았어요. 키가 자그마하고, 두루마기를 입었고, 얌전하게 팔자걸음을 걸어요. 이름을 알았는데, 지금 잊었네요.
맹문재 : 김수영 시인이 <은성>에 자주 가셨는지요? <은성>을 운영한 이명숙이란 분은 문인들이 외상술을 마시고 장부에 이름을 쓸 때 본명이 아니라 별호라든가 별칭을 적었다고 알려졌지요. 그만큼 문인의 자존심을 지켜주려고 했던 것이지요.
김현경 : 김 시인이 <은성>에 외상값이 있을 것 같아 돌아가신 뒤에 들렀어요. 장부에 ‘짝짝이 양말’이라고 적혀 있었어요. 그렇지만 외상값은 없었어요. 김 시인은 틀림없이 외상을 갚는 분이에요. 동네 약국에서도 기관지 약이나 소화제 등을 외상으로 산 적이 있어요. 김 시인이 돌아가신 뒤 약국에도 들러 외상값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없다고 했어요. 그러면서 양말을 짝짝이로 신고 오신다는 말을 했어요. 내 동생이 한국은행에 다닐 때인데, 한번은 김 시인이 500원인가 빌리려고 은행에 왔는데 짝짝이 양말을 신고 와서 창피해서 죽을 뻔했다고 했어요. (웃음) 그래도 김 시인은 빌린 돈을 꼭 갚았어요.
<은성>을 운영한 이명숙 씨는 구수동에 살았어요. 마포종점 근처의 높은 위치에 있는 집에서 살았어요. 가게에서 함께 일하는 젊은 여성과 함께 살았어요. 젊은 여성은 아주 멋쟁이였어요. 이명숙 씨는 내가 운영하는 양장점에 와서 옷도 한 번 맞추었어요. 길에서 가끔 만났어요. 김 시인이 <은성> 마담을 한 번도 흉보지 않았어요. 문인들에게 외상도 잘 주었어요. 박인환 시인의 <세월이 가면>도 <은성>에서 불렸지요.
맹문재 : 다음의 살펴볼 작품이 「사랑」이에요. 독자들이 많이 좋아하는 작품이지요. 『동아일보』(1960년 1월 31일)에 발표한 것인데, 한번 읽어볼게요.
어둠 속에서도 불빛 속에서도 변치 않는
사랑을 배웠다 너로 해서
그러나 너의 얼굴은
어둠에서 불빛으로 넘어가는
그 찰나에 꺼졌다 살아났다
너의 얼굴은 그만큼 불안하다
번개처럼
번개처럼
금이 간 너의 얼굴은
― 「사랑」 전문
김현경 : 나에 대한 사랑이라고 느껴져요. 나한테 정서하라고 부탁하지 않은 작품이에요. 김 시인은 설움이나 죽음에 관한 시도 많이 썼지만, 사랑에 관한 시도 많이 썼어요. 이종구 씨와 서로 좋아하다가도 틀어져 얼마 동안 안 만나기도 했어요. 그러다가 또다시 만나 문학을 얘기하며 잘 지냈어요.
맹문재 : 다음으로 읽어볼 작품이 「꽃」이에요. 『동아일보』(1960년 2월 14일)에 발표한 작품이에요. 이 작품의 배경도 마포구 구수동 집으로 읽히네요. 가령 “돼지우리에 새가 날고” 같은 구절에서 느껴지네요.
김현경 : 그럼요. 우리가 돼지를 키울 때의 풍경이에요. 생활 감정을 노래한 작품이에요.
맹문재 : “올겨울에도 산 위의 초라한 나무들을 뿌리만 간신히 남기고 살살이 갈라 갈 동네 아이들……/손도 안 씻고/쥐똥도 제멋대로 내버려 두고/닭에는 발등을 물린 채” 같은 상황을 좀 들려주세요.
김현경 : 아이들이 땔감을 마련하려고 산에 올라가 나무를 베어갔어요. 웬 아이들이 그리도 많은지요. 손도 제대로 안 씻고 제멋대로 다녔지요. 그때 구수동에서 사는 사람들 중에는 연탄을 때지 못하는 사람도 있었어요. 길가에 초가집이 한 채 있었는데, 다 무너져가는 집이었어요. 그 집 아낙이 눈이 사팔뜨기이고 다리도 약간 절었는데, 참기름을 팔러 다녔어요. 그런데 하루는 기름통을 길에 쏟아 주저앉아 아까워하며 울고 있었어요. ‘순아’라고 불리는 그 아낙의 딸이 있었는데 얼굴이 뽀얗고 이뻤어요. 그 아이하고 우리 큰아들하고 어울려 놀았는데, 가끔 우리 집에도 놀러 왔어요. 어느 날 그 아이가 “아야꼬 아야꼬” 하며 제 엄마가 슬퍼하는 흉내를 내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어요. 그렇게 살기가 어려운 사람들이 많았어요. 어떤 때는 우리 아이들이 입던 옷 중에 여분의 것을 동네 아이들에게 나누어주기도 했어요. 그런데 애들이 그 옷을 입어도 별 귀티가 안 났어요. 내가 그러한 얘기를 하면 김 시인은 그냥 흘려보내지 않고 귀를 열고 들었어요. 무심하게 보지 않았어요. 실제로 닭들이 발등을 쪼았어요. 양계장에 들어가 알을 주울 때 쪼기도 했어요.
맹문재 : 이 작품은 쓰레기와 먼지, 똥과 오줌, 즉 “진개와 분뇨를 꽃으로 마구 바꿀 수 있는 나날”이며 “누구에게든 얽매여 살아야” 하는 것을 추구하는 것으로 보여요. 따라서 “꽃”은 “미소”라고 읽히네요.
김현경 : 거듭 말하지만 생활 감정을 나타낸 작품이에요. 김 시인은 어려운 사람들의 실상을 무심하게 보지 않았어요. 자기가 지향하는 꿈과 현실에서 느끼는 차이를 생각했어요. 정직한 자기 의지가 있었던 것이었지요. 다른 사람들의 생활상을 투명하게 보려고 했어요. 그런 양심이 없다면 시를 못 썼지요.
맹문재 : 다음으로 읽어볼 작품이 「파리와 더불어」(『사상계』 1960년 3월)에요. 실제로 구수동 집에 파리통이 있었는지요?
김현경 : 파리통이 부엌에도 있었고, 마루에도 있었어요. 서너 개가 있었어요. 닭을 키우니 파리가 생겨 파리통이 필요했던 것이지요. 김 시인이 아주 위생적인 데가 있었어요. 내가 파리통을 사달라고 하면 아주 잘 사 왔어요. 음식 등에 파리가 앉을까 봐 그랬던 것이지요. 파리통이 유리로 되어 있어 깨지기 쉬웠기 때문에 아주 조심히 가져와야 했어요. 김 시인은 동대문시장에서 사 가지고 버스를 타고 왔는데, 새끼나 노끈으로 묶어서 잘 가져왔어요. 넥타이를 맨 신사가 파리통을 가지고 들고 오면서도 불평을 하지 않았어요. (웃음)
맹문재 : 이 작품은 “나는 죽어 가는 법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고 마무리 짓고 있어요. 참으로 의미심장한 표현이네요.
김현경 : 김 시인의 철학이에요. 김 시인은 6·25전쟁 때 북한에서 탈출하다가 잡혀 총살형에 처해졌는데, 살아남았잖아요. 그 뒤에도 충무로 파출소장에게 잡혀 죽도록 맞았고, 포로수용소에서도 죽음의 공포심을 가졌지요. 그렇게 죽음에 대한 체험을 많이 해서 죽음에 의연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여요.
맹문재 : 이 작품에서 김수영 시인은 자신은 “다병(多病)”하다고 진단하고 있어요.
김현경 : 김 시인은 어릴 때부터 병이 많았어요. 가을 운동회 때 바나나를 먹고 병이 나서 운명이 달라졌잖아요. 기관지 천식에 위장병에 치질에, 술 과음도 있었지요. 집에 항상 약을 비치해 놓아야 했어요. 국산은 없었고 모두 일제나 미제여서 시청에 나가야 살 수 있었어요. 약이 떨어지면 눈에 발목이 빠지는 날에도 사와야 했어요. 김 시인은 문학은 비애에서부터 출발한다고 했는데, 하도 겪고 나니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으로 보여요. 문학이 김 시인을 구원해주었다고 생각해요.
맹문재 : 다음으로 읽어볼 작품이 「파밭 가에서」예요. 『자유문학』 1960년 5월호에 발표한 작품이에요. 이 작품은 3연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연마다 “얻는다는 것은 곧 잃는 것이다”라고 마무리되고 있어요. 무슨 의미인지 궁금하네요.
김현경 : 밭에 파를 키웠는데 아주 잘 되었어요. 닭똥 기운이 있어서인지 싱싱하고 쪽쪽 올라왔어요. 그래서 집에서 먹기에는 파가 너무 많아 생선가게에 팔았어요. 처음에는 반찬을 교환해서 먹기도 했어요. 그런데 그냥 뽑아다가 주는 것이 손해라는 생각이 들어 단을 묶어 가져다주었어요. 그렇게 하니 돈이 곱으로 생겼어요. 내가 김 시인에게 이 얘기를 했더니 돈이라면 사족을 못 쓴다고 놀렸어요. 그리고는 이 시를 쓴 것이에요.
맹문재 : 돈을 얻은 대신 자연을 잃었다는 것, 인심을 잃었다는 의미로 들리네요.
김현경 : 그렇지요. 내가 닭을 키우고 농사를 짓다가 시내에 외출할 일이 있어 옷을 차려입고 버스에 오르면 동네 사람들이 다들 놀랐어요. 로션도 바르고, 입술도 칠하고, 세련된 가방도 들고, 구두를 신었어요. 평상시에는 고무신을 신고, 포플린 치마를 10년씩 입었거든요. 어떤 아주머니는 나를 자세히 보다가 “저기 양계하는 분 아니에요?” 하고 묻기도 했어요. (웃음)
■ 김현경
1927년 서울 종로구 사직동에서 태어나 경성여자보통학교(현 덕수초등학교)와 진명여고를 거쳐 이화여자대학교 영어영문학과에서 수학했다. 김수영 시인과 결혼해 두 아들을 두었다. 에세이집 『낡아도 좋은 것은 사랑뿐이냐』『우리는 영원하고 사랑도 그렇다』(공저) 『먼 곳에서부터』(공저)가 있다.
■ 맹문재
대담집으로 『행복한 시인 읽기』 『순명의 시인들』, 시론 및 비평집으로 『한국 민중시 문학사』 『지식인 시의 대상애』 『시학의 변주』 『만인보의 시학』 『여성시의 대문자』『시와 정치』 『현대시의 가족애』가 있다. 현재 안양대 국문과 교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