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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전서 5:5-11 마귀를 대적하라 2006. 6. 21
5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6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7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 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9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니라 10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간 고난을 받은 너희를 친히 온전케 하시며 굳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케 하시리라 11 권력이 세세무궁토록 그에게 있을찌어다 아멘
지난주에 장로들에 대한 권면을 보았습니다. 오늘은 그 장로들의 다스림을 받는 젊은 자들에게 권면하는 말씀입니다. 그렇다고 장로에게 해당되지 않는 말씀이 아닙니다. 지난주에 장로에 대한 권면의 말씀도 모든 성도가 다 알아야 하는 것처럼 오늘 이 말씀도 모두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말씀은 내가 필요한 부분을 취사선택하는 말씀이 아니라 말씀 전부가 자기 백성을 향하여 살아 움직이는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먼저 8-9절 말씀을 봅니다. 우리의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처럼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근신하고 깨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을 굳게 하여 마귀를 대적하라고 합니다. 이는 세상에 있는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고 합니다. 베드로전후서가 다 성도들이 현재 수많은 고난을 당하는 중에 위로하고 권면하는 말씀입니다.
6절에 보시면 하나님의 능하신 손아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많은 고난이 오는가 하면서 믿음에서 떨어질까 봐 근신하여 깨어서 마귀를 대적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마귀가 하는 일은 궁극적인 일은 한가지입니다. 시편 2편에서 보면 여호와와 그 기름부음 받은 자에게서 끊어내려고 하는 것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서 떠나게 만들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하여 온갖 작전이 다 나오는 것입니다. 그 작전들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하시는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5절입니다. 젊은 자들이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다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신다고 하십니다. 그러면 마귀의 작전은 사람으로 하여금 교만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 교만케 함의 원천이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를 유혹한 일입니다. 선악과를 따 먹으면 너도 하나님처럼 되리라고 한 것입니다. 이것이 아담과 하와로 범죄 하게 한 유혹인 것입니다.
너도 하나님처럼 되리라! 너도 누구처럼 되리라! 너도 할 수 있다! 왜 바보처럼 당하고만 있느냐? 빼앗아라! 차지하라! 정복하라! 네가 최고다! 너는 충분히 그럴 능력이 있다! 강해야 산다! 지시를 받고 사느냐! 지시하면서 살아라! 우리의 모든 삶의 현장에서 자연스럽게 피어나는 모습이 자족을 모르는 모습입니다. 더 높게 더 멀리 더 빠르게 성취하고자 합니다. 그 결국이 어디를 향하겠습니까? 나도 하나님이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는 이유를 알 수가 있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심판은 모든 교만한 것과 높아진 것들에 대하여 심판을 행하시는 것입니다. 잠언서 몇 구절을 봅니다. 16:18-19절입니다. “18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19 겸손한 자와 함께하여 마음을 낮추는 것이 교만한 자와 함께하여 탈취물을 나누는 것보다 나으니라” 18:12절입니다.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 21:4절입니다. “눈이 높은 것과 마음이 교만한 것과 악인의 형통한 것은 다 죄니라” 이런 말씀들은 많이 들어보았습니다.
이사야 2:5-22절의 말씀을 봅니다. “봉독” 여호와의 날이 임하는데 어떤 여호와의 날입니까? 야곱의 족속이 여호와를 버리고 동방풍속이 가득하면 블레셋 사람 같이 술객이 되고 이방인으로 더불어 손을 잡고 언약 한 것입니다. 그러니 여호와의 언약을 배신한 것입니다. 언약을 배신한 저변에는 무엇이 있는가 하면 그 땅에 은금이 가득하고 보화가 무한하며 마필이 가득하고 병거가 무수하며 우상도 가득하여 자기 손으로 지은 것을 공경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믿을 것들이 가득하기에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다. 그러니 심판을 행하시는 것입니다.
그 심판의 날에 사람들이 바위틈에 들어가며 진토에 숨어 여호와의 위엄과 그 광대하심의 영광을 피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 날에 눈이 높은 자가 낮아지며 교만한 자가 굴복되며 여호와께서 홀로 높임을 받으실 것입니다. 교만하고 거만한 자와 자고한 자를 낮아지게 할 뿐만 아니라 레바논의 높고 높은 산과 모든 백향목과 바산의 모든 상수리나무와 모든 높은 산과 솟아오른 작은 산들과 아름다고 좋다는 것들까지 다 낮추어 버리심으로 여호와 홀로 높이심을 받는다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22절에서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으니 수에 칠 가치도 없다고 하십니다.
수에 칠 가치도 없는 인생들이 높아지고자 안달을 하면서 사는 것이 바로 선악과를 따먹고 나서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교만이 그 마음에 내장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온 세상이 바벨탑을 쌓기에 바쁜 것입니다. 월드컵에서 우리 이름을 내자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축구 감독이 목사인데 그 목사가 토고 전에서 승리하도록 간절히 눈물로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토고는 우상을 섬기는 주술사가 선수들에게 기도를 해준다고 하면서 더욱 강력한 기도가 요청이 된다는 편지를 후원교회에 보낸 것입니다.
그러면 스위스 전에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가 그렇게 많이 들어온 종교개혁자 칼뱅이 스위스 제네바에서 종교개혁을 한, 기독교 전통이 아주 오래된 나라와 시합이 붙을 때 하나님은 어느 편을 들어주어야 합니까? 이런 식으로 하면서 승리하고 성공하여 높아지면 하나님의 영광인줄 압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말하면서 자기 이름도 덩달아 높아지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스위스편도 한국편도 아닙니다. 홀로 높으심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6절 말씀에 보시면 하나님의 능하신 손아래 겸손하라고 하면서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고 하는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겸손하게 있으면 언젠가는 하나님께서 높여주신다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그 높여주심이란 세상이나 세상의 속한 것이 아닙니다. 그 높여주심이란 홀로 높임을 받으시는 주님을 높이는 자리에 참예하는 것입니다. 보좌에 계신 이와 어린 양께 찬양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세세무궁토록 돌리는 그 높은 자리에 참예하여 주께 영광을 돌리는 그 자리가 얼마나 높은 자리입니까!
베드로가 직접 체험한 것입니다. 세상에서 스스로 높아지고자 제자들과 다투고 예수님을 따르면서도 세상에서 높아지고자 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죽는 자리에 간다고 하니 말리려고 하다가 사단아 물러가는 말씀을 듣고, 또 죽는 자리까지 함께 하겠다고 하였으나 그 맹세도 죽음 앞에서는 부인하고 저주하고 도망간 것입니다. 그러니 베드로가 스스로 따르고자 한 것은 젊어서 스스로 띠를 띠고서 높은 자리에 이르고자 하였지만 그러나 노년에는 남이 띠를 띠우고 원치 않는 곳으로 데려간다고 요한복음 21장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원치 않는 자리가 십자가의 자리이며 세상이 알지 못하는 영광의 자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모든 높아지고 교만한 것들을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이 일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시작이 되었습니다. 한나의 찬양과 마리아의 찬양 속에 이미 그 내용이 들어있습니다. 누가복음 1:46-55절입니다. “봉독” 세상을 뒤집어엎는 것입니다. 세상의 교만한자를 내리치시고 비천한 자를 높이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비천한 자란 세상에는 자신의 도움이 없어서 오직 여호와의 도우심만 바라는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와 같은 심정을 가진 자들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들입니다. 이들은 교만할 것이 없는 자들입니다. 오직 주의 긍휼만 바라보는 자들입니다. 이들을 높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예수님을 믿음으로 인하여 환난을 당하는 자들에게 권면을 하는 것입니다.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시는 주님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7절입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버리라는 것입니다. 마귀의 유혹이 무엇인가 하면 세상에 대한 염려입니다. 내일에 대한 염려입니다. 예수님께서 씨 뿌리는 비유를 통하여 가시떨기 밭에 떨어진 비유를 하시면서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막혀 결실하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염려들로 인하여 재리의 유혹에 넘어가는 것입니다. 그런 염려들을 주께 다 맡겨버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귀는 염려를 자꾸만 하도록 만듭니다. 그러므로 세상 근심은 사망에 이르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회개하여 구원에 이르는 것입니다.
마귀의 작전이 무엇인지 두 가지를 말씀드렸습니다. 첫째는 교만하게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세상에 대하여 염려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마귀의 유혹은 날마다 있는 것입니다. 늘 교만하고 싶고 자랑하고 싶은 것이 우리에게서 나옵니다. 그리고 늘 세상에 대한 염려 내일에 대한 염려에 사로잡히기 만듭니다. 이것이 바로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두루 찾아다니는 모습입니다. 그러니 교만하고 싶은 자에게 교만하게 될 방법과 기회를 주는 것이며, 없는 염려까지 만들어 넣어주는 것입니다.
이런 마귀를 어떻게 대적해야 합니까? 8절입니다. 근신하여 깨어야 합니다. 그리고 겸손해야 합니다. 염려를 주께 맡겨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귀를 대적하는 것은 믿음을 굳게 하라는 것입니다. 믿음을 굳게 하라는 말씀은 내가 겸손해야지! 염려를 주께 맡겨야지! 근신하여 깨어 있어야지! 나는 할 수 있어! 나는 마귀를 이길 수가 있어! 이렇게 자신에게 다짐을 하는 것이 믿음을 굳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다는 자신을 믿는 것입니다.
9절을 봅니다.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고 합니다. 마귀를 대적하는 것은 믿음입니다. 요한일서 5:4-5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4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5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 세상을 이기는 것은 우리의 믿음이라고 합니다. 그 믿음이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입니다. 그 예수님께서 세상에서 승리하셨습니다. 십자가로 승리하셨습니다. 마귀를 십자가로 이기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승리란 그 십자가 안에 있는 것입니다.
물론 세상이 볼 때는 십자가 안에 머문다는 것은 죽은 모습입니다. 그러나 십자가 안에서 세상을 보면 세상이 죽은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 인하여 세상에서 믿는 형제들이 동일한 고난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한 자들입니다. 왜 승리한 자들입니까? 10절을 봅니다.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간 고난을 받은 너희를 친히 온전케 하시며 굳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케 하시리라”
너무나 놀라운 말씀입니다. 세상이 받을 수 없는 말씀입니다. 어떻게 이런 말씀이 선포가 되는 것입니까? 지금 현재적으로 성도들이 여러 가지 고난을 받고 마귀의 시험과 유혹에 노출되어 있는데 이미 그리스도의 영광에 들어가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분이 잠간 고난을 받는 너희를 온전케 하시며 굳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면 터를 견고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고난은 성도로 하여금 그리스도 안에 속하여있다는 사실을 더욱 견고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미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자에게 허락되는 것입니다. 바울사도도 로마서 8장에서 미리 아신 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자를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자를 영화롭게 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믿는 것은 사람의 능력 밖의 일입니다. 우리는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기에 장래 일은 아직 장담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미 장래일이 확증이 된 것이며 하늘에서는 이미 이루어진 일로 보는 것입니다. 여기에 그 누구도 항의 할 수 없는 말씀이 이어서 나옵니다. 11절에 권력이 세세무궁토록 그에게 있을 찌어다 아멘. 이것을 믿는 믿음이, 이것이 믿어지는 믿음이 세상을 이기고 마귀를 이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