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도 게임처럼 재밌게” 증명해 낸 ‘엄마’ 창업가
[아무튼, 주말] 일론 머스크도 반한 회사
‘에누마’ 창업자 이수인
남정미 기자
입력 2023.04.29. 03:00업데이트 2023.04.29. 12:34
이수인 대표는 "세상 아무도 모르는 나만 아는 진실이 뭘까에 대해 늘 답하려고 노력했다"며 "학습이 어려운 아이들의 교육을 디지털로 정말 잘해줄 수 있다는 게 내가 찾은 답"이라고 했다. /이경호 영상미디어 기자
공부가 게임만큼 재밌을 수 있을까. 모두가 바라는 이 상상을 현실로 만든 기업이 있다. 엔씨소프트 게임 디자이너로 일했던 이수인(47)과 같은 회사 테크니컬 디렉터였던 남편 이건호(47)가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만든 ‘에누마(enuma)’다. 시작은 아이를 위해서였다. ‘리니지’ 등 최고의 게임을 제작해본 부부는 아이가 발달 장애로 일반 학교 교육이 힘들 거란 이야기를 듣자 결심한다. 학습이 어려운 아이도 혼자 사용할 수 있는, 게임처럼 재밌는 디지털 도구를 만들자!
그렇게 세상에 나온 앱(app)이 2014년 출시된 ‘토도 수학’이다. “내 아이에게 가장 좋은 걸 주려고” 만들었더니 금방 다른 부모들에게 소문이 났다. 등장하자마자 세계 20국 애플 앱스토어 교육 부문 1위, 미국 유치원과 초등 저학년 등에서는 누적 사용 5000학급을 돌파했다.
에누마는 이 경험을 바탕으로 교사와 학교, 부모가 없는 열악한 상황에 놓인 아이들을 위한 프로젝트에도 도전한다.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가 총상금 1500만달러(약 200억원)를 걸고 2014년부터 약 5년간 진행한 장기 교육 프로젝트, 바로 ‘글로벌 러닝 엑스프라이즈’다. ‘디지털 기술이 아프리카 오지 아이들을 문맹에서 구해낼 수 있을까’를 주제로 세계 40국 700여 팀이 신청한 이 프로젝트에서 에누마는 영국 비영리 단체 ‘원 빌리언’과 함께 공동 우승을 차지한다. 학교를 경험해보지 못한 탄자니아 어린이가 15개월간 태블릿 PC 등으로 에누마가 만든 ‘킷킷 스쿨’을 사용하자, 1년가량 학교에 다닌 것과 비슷한 학습 성과를 보였다. 에누마는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필리핀 등에서 비슷한 실험을 해나가고 있다.
한국에서 에누마는 역설적이게도 사교육 시장에서 먼저 알려졌다. ‘킷킷 스쿨’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토도 영어’는 ‘영유(영어 유치원) 안 가도 유명 학원 레테(레벨 테스트) 통과가 가능한 앱'으로 통한다. 지난달 24일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서울 광화문으로 날아온 이수인 대표는 “한·중·일은 B2C(기업과 소비자 간 거래)에서 가장 큰 고객”이라며 “교육 격차를 줄이려고 시작한 일인데, 우리 물건이 팔릴 때마다 교육 격차가 커지는 것 같아 처음엔 좀 괴로웠다”고 했다.
한국 사교육 시장에서 인기, 괴로웠다
–잘 팔리면 좋은 일 아닌가.
“토도 수학은 미국 유치원부터 초등 2학년 사이, 선생님이 가르치는 속도를 못 따라가서 보충 수업이 필요한 아이를 목표로 만들었다. 공부 잘하는 아이를 위한 앱이 아니다. 그런데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 부모들은 ‘세 살짜리도 덧셈·뺄셈 배울 수 있는 앱’으로 받아들이더라!”
–그 괴리감을 어떻게 극복했나.
“‘공교육을 돕는 좋은 제품을 만들었더니, 사교육 시장도 호응하는구나’로 마음을 바꿨다(웃음). 다섯 살 아이가 유치원 입학 시험을 위해 3세 때부터 과외를 받는 세계가 있다. 부모들이 그렇게 해야만 하는 사정이 있다면, 좋은 도구를 사용하는 게 낫지 않을까 생각했다. 학습식 문제 풀이보다 괴롭지는 않을 테니까.”
–토도 영어와 한글이 그렇게 해서 나오게 된 것인가.
“한국에서 영어 유치원 나오지 않은 아이들이 잘못한 건 없다. 그런데 학교에 들어가면 벌써 주눅이 들고, ‘영포자(영어 포기자)’가 된 것 같은 마음이 든다. 엑스프라이즈에서 아무 교육 기반이 없었던 아프리카 아이들도 2년이면 영어 읽고 쓰기가 가능했는데, 한국 아이들은 더 잘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킷킷 스쿨’을 한국 상황에 맞게 개선했다. 한글은 진짜 만들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느린 학습자(경계성 지능인)와 다문화 가정 아이들, 소수긴 하지만 이제 한국에도 이민자 자녀가 생기고 있다. 특히 코로나를 거치면서 이런 계층 아이들은 그 교육 취약성이 더 커졌다. LG유플러스 같은 기업과 함께 특수학교나 다문화 센터 등을 통해 그들을 지원하고 있다.”
–엑스프라이즈엔 어떻게 도전하게 됐나.
“미국에선 ‘학생 40%가 입학할 때 이미 또래 평균보다 뒤떨어져 있다'는 통계가 있다. 개발도상국에선 코로나 전엔 아이들의 60%, 그 후엔 70%가 졸업할 때까지도 기초 학력 미달이라고 한다. 세 문장 정도를 스스로 읽고 답을 쓸 수 있는지, 두 자릿수 덧셈·뺄셈을 할 수 있는지 물어보면 못 한다는 것이다. 이게 안 되면, 아무리 학교에 다녀도 다음 단계로 갈 수가 없다. 이런 아이들을 모두 가르치려면 교사가 약 7000만명이 필요하단 유네스코의 최신 통계가 있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지 않나. 기술로 해결해줄 수 있느냐고 물은 게 엑스프라이즈였고, 우린 ‘그렇다’고 답한 것이다.”
–에누마가 엑스프라이즈에서 우승한 비결은.
“에누마를 쓴 아이들의 학습 성과와 유지율이 가장 높았다. 처음 프로그램 시작할 땐 덧셈·뺄셈을 할 줄 아는 아이들이 10% 미만이었는데, 15개월 후엔 70%로 올랐다. 탄자니아 아이들은 사과를 잘 모른다. 먹어보거나 사진으로 볼 기회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관성적으로 A는 apple이라고 하면 와 닿지 않는다. 아이들을 먼저 이해하는 데 많은 시간을 들였다.”
–에누마를 창업하게 한 자녀의 영향도 있을까.
“물론이다. 아이를 키우는 부모로서, 아이 입장에서 완전히 몰입해 프로그램을 만든 게 우리의 성공에 굉장히 큰 역할을 했다고 본다. 디지털 형식의 교육은 아이가 하고 싶게 만드는 게 첫 번째다. 아이가 공감해서 보지 않으면 놓치는 게 많다. 사람들이 너무나 당연하게 ‘이거 알지?’하고 넘어가는 부분도, 장애가 있는 아이 부모에겐 다르게 다가온다.”
2019년 엑스프라이즈 시상식에서 이수인(오른쪽에서 셋째) 대표가 일론 머스크(가운데) 테슬라 CEO와 함께 우승 트로피를 들고 있다. /에누마
인공지능(AI) 잘 이용하는 아이로 길러야
–한국도 2025년 디지털 교과서를 도입한다.
“종이 교과서 시대엔 교과서의 품질이 좀 떨어져도, 교사가 커버할 수 있었다. 디지털은 다르다. 엑스프라이즈를 했을 때, 가장 좋은 제품과 가장 나쁜 제품의 학습 격차가 4배 이상 났다. 어떤 제품이냐에 따라 그 결과는 엄청나게 달라진다. 기업이 최신 소프트웨어를 쓰는 게 그런 이유 아닌가. 디지털 교과서만큼은 다른 논리를 대지 말고, 가장 최신이자 최고의 기술로 만들어야 한다. 우리도 기여할 부분을 찾고 있다.”
–디지털 교육은 장비 격차는 물론이고 저소득층일수록 혼자서 집중할 수 있는 독립 공간의 부재나, 인터넷 접속 환경 등의 문제에 부닥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학교에서 디지털 기기를 쓰는 게 가장 이상적인 형태라고 본다. 미국은 이미 모든 아이에게 1대1 태블릿 지급이 완료됐다. 독립 공간이 없는 경우, 지역에 공부방을 마련해 해결할 수 있다. 코로나 때 미국이 그 방법을 썼다.”
–한국 부모들은 여전히 디지털로 공부한단 생각을 잘 못한다.
“한국은 IT 강국이지만, 디지털을 도구로 사용하는 법은 가르치지 못했다. 노는 것, 손대면 안 되는 것으로 치부한다. 그런데 지금 아이들에게 필요한 건 디지털을 막는 게 아니라, 디지털을 다루는 능력이다. 우리 사회가 이런 담론을 이야기하기에 굉장히 좋은 시기라고 본다. 챗GPT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챗GPT가 제일 잘하는 게 우리나라 아이들이 공부하는 방식이다. 문제 내고 답 맞히는 것. 이렇게 가르치면 아이들을 인공지능(AI)에 패하는 사람으로 기르게 된다. 챗GPT가 잘하는 거 말고, 디지털을 도구로 사용해 완전히 새로운 질문과 답을 창출하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
–지난해가 창업 10주년이었다. 실리콘밸리가 아니었어도 할 수 있었을까.
“나는 이민자 여성인 데다, 영어도 못했다. 문법이 다 틀린 영어를 하는데도, 실리콘밸리에서 만난 모든 사람이 내 말에 일단 귀를 기울여줬다. 이 사람이 영어를 못하더라도, 머릿속엔 좋은 게 들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한국말 잘 못하는 이주민 여성이, ‘아이가 장애가 있는데 이런 아이디어가 있다’고 찾아오면 친절하게 맞아줄까. 한국에선 내게 ‘아이가 아프면 엄마가 집에 있어야지’ 한 사람도 있었다. 실리콘밸리에서 언어 치료사가 한 말이 잊히지 않는다. ‘당신 아이는 내가 치료할 테니, 당신은 그 멋진 것을 만드세요.’ 그런 환경이 없었다면 내 창업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보람을 느낀 순간이라면.
“우리 아이가 이제 중학교 3학년이다. 학교에선 자기 학년 수학을 못 따라간다. 그런데도 자기소개를 할 때 ‘아이 라이크 매스(수학이 좋아요)’라고 한다. 수학을 못하지만 ‘수포자’는 아닌 셈이다. 이런 태도가 아이에겐 큰 자산이 된다. 나에겐 가장 뿌듯한 순간이다.”
편집국 문화부 기자
남정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