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영화에 대한 리뷰입니다. 간단히 쓰려고 했는데, 쓰다보니 쓰잘데기 없이 말만 많아져서 너무 길어졌어요. 긴 글이니 한가하신 분들만 읽어 보시길요.
나아가거나 머물거나
- '박쥐'를 읽는 또 다른 시선
1. 수요일 운동 끝나고 '박쥐'를 봤어요. 봐야지 하면서 차일피일 미루다 마침내 천안에서의 마지막 상영일 마지막 상영 시간에까지 밀려와서야 부랴부랴 몸을 움직였네요. 열광적인 지지와 시니컬한 비판의 목소리로 확연히 찬반이 갈렸던 개봉 초기의 전쟁과도 같은 분위기가 거의 사그라든 지금의 상황을 반영하듯 영화관은 퍽 한산하더군요. 덕분에 영화의 씬 하나 대사 한 마디 방해받지 않고 음미하듯 즐길 수 있었으니 내게는 꽤 고마웠던 한산함이었어요.
2. '박쥐'는 왜 박찬욱이 이 시대의 가장 문제적인 감독들 가운데 한 명인지를 다시금 확인시켜 준 영화라 하겠어요. 신작을 발표할 때마다 매번 격렬한 논쟁을 유발시켜 왔던 박찬욱의 전력을 생각해 보면, 그 격렬함의 정도가 박찬욱 영화의 문제성을 가늠하는 척도가 되어 왔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거예요. 2006년의 '싸이보그지만 괜찮아'가 건너 뛰고 쉬어 간다는 느낌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비교적 조용히 관객의 시선에서 비껴갔던 데 비해, '박쥐'의 문제성은 지금까지 드러난 상황만으로 봤을 때 논쟁의 격렬함과 그 파급력의 측면에서 '올드 보이'와 견주어서도 모자라지 않아 보이니까요. 그러나 이것이 관객들에게는 꼭 좋은 일만은 아닌 것 같아요. '박쥐'를 둘러싼 논쟁의 와중에서 감독이 관심을 한 몸에 받으며 '행복한 낭패감'을 즐기는 동안 찬성과 반대 어느 한쪽에 서기를 강요당한 관객들은 자신을 발가벗기우는 불편한 진실과 마주해야만 했으니까요. '박쥐'는 인간 내부에 존재하는 선과 악의 경계, 꿈틀거리는 욕망의 파괴적 속성, 삶과 죽음의 이율배반적 동일성에 대한 자각, 죄와 구원 등 우리가 부딪쳐야 할 모든 근본적 문제들 앞에 관객을 불러 세워요. 이러한 오랜 문제들 앞에 관객을 불러 세운 뒤, 이 영화는 인간 내면의 깊고 어두운 진실을 향해 달려나가는 두 인물을 통해 비극적 파국의 세계를 열어 보여 주죠. 그런데, 뱀파이어가 된 신부가 친구 아내와의 치정극에 얽혀들어 살인을 저지르고 결국엔 한 줌 재로 바스러져 사라지고 만다는 기이한 내용을 내러티브로 갖는 '박쥐'는 뱀파이어 장르 관습만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영화적 구조를 갖고 있어요. 시적이고 서정적인 비주얼 아래 숨겨진 음습하고 어두운 죽음의 세계, 과장되고 장식적인 인물들의 말과 행동 사이로 비집고 튀어오르는 뒤틀린 인간 욕망, 평이하고 일상적인 상황과 계속 엇갈리며 충돌하는 블랙 유머 등을 통해 현실의 부조리함을 끊임없이 일깨우고 인간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불신의 시선을 조장하는 '박쥐'는 몇 마디의 말로 간단히 정리되지 않는, 복합적이고 중층적 해석의 층위를 갖는 영화예요. '박쥐'가 뱀파이어 장르 프레임을 걸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치정 멜로극으로도, 죄와 구원의 종교영화로도, 또 범죄드라마로도 읽힐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할 수 있겠죠.
3. 이처럼 다양한 해석과 수용의 가능성을 열어 둔 '박쥐'는 영화가 우리에게 제공하는 매혹의 강렬함만큼 깊고 큰 의혹을 만들어 내요. 길짐승도 아니고 날짐승도 아닌 채 익숙한 어둠의 세계를 미끄러지며 활강하는 박쥐란 동물이 그 자체로서 경계에 위치한 존재이듯 바이러스 실험에 자원했다 뱀파이어가 되어 돌아온 신부 상현(송강호)은 삶과 죽음, 죄와 구원, 도덕과 반도덕 등 여러 갈래로 뻗어나가던 지선(支線)들이 한데 모여 다시 얽혀드는 경계의 집약점 위에 선 인물이죠. 경계에 선 존재로서 상현은 관객들로 하여금 많은 질문을 하게 만들어요. 뱀파이어 상현은 이승과 명부(冥府) 어느 세계에 속하는 존재인지, 불치병 환자를 낫게 하려는 선의에서 이루어진 바이러스 실험 지원이 나중에 흡혈과 자살 방조라는 나쁜 행위를 낳게 되었을 때 도덕적 책임 소재는 어디까지 추궁될 수 있는지, 또 사랑하는 사람을 구하려고 누군가를 죽였을 때 그 죽임의 정당성의 한계는 어디까지인지, 그리고 더 이상의 악행을 저지르지 않기 위해 장엄한 핏빛 바다 앞에서 떠오르는 해를 맞이함으로써 스스로 재가 되어 사라지는 그에게 구원이 주어질 수 있을 것인지 등의 질문들이 바로 그것이죠. 물론 우리는 이에 대한 답변을 어쩌면 쉽게 준비할 수 있을지는 몰라요. 그러나 알다시피 모범답안을 안다는 사실과, 그 모범답안의 내용을 그대로 실천할 수 있다는 사실이 꼭 일치하는 것만은 아니예요. 만약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이 질문의 상황 한가운데로 호명당해 던져진다면 그 누구든 준비한 답안을 아무런 주저없이 곧장 실행하기란 쉽지 않을 테니까요.
4. 내가 박찬욱 영화에서 일관되게 읽어내고자 하는 것은 근대주의의 해체에 관한 박찬욱의 열망이예요. 선의가 악행을 낳으며, 삶과 죽음이 서로 분리할 수 없는 자웅동체의 한 몸이고, 현세의 죄악이 내세의 구원과 맞닿아 있음을 뱀파이어가 된 신부 상현을 통해 보여줌으로써 '박쥐'는 근대적 질서의 익숙한 이분법을 무화시키려 하죠. 그러나, 사회적 금기에 도전했다 지배적 권력인 '말(이성)의 힘'에 의해 쓸쓸히 패퇴당했던 '올드 보이'의 이우진처럼 '박쥐'에서 상현의 시도 역시 실패하고 말아요. 태주(김옥빈)의 유혹에 무장해제당한 상현이 죄악에서 발을 빼지 못한 채 부끄러움과 죄의식에 시달리는 것은 그가 여전히 신부로서의 자의식을 버리지 못했음을 보여 주거든요. 이우진의 죽음이 전적으로 인물 외부에서 강제된 힘 때문이었다면 상현의 자살은 '모든 쾌락'에 몸을 던지고자 했으면서도 스스로 제거하지 못한 내면의 신성(神性) 때문이었죠. 이미 영화의 시작에서부터 예견된 것처럼 보이는 이 실패는, 짐작건대 독실한 카톨릭적 전통 안에서 성장해 온 박찬욱의 개인적 이력과도 무관하지 않을 테죠. 영화 속에서 상현이란 인물을 욕망의 극단으로 밀어부치지 못하고 신성과 타협하도록 만들며 질주를 멈춰 서게 한 이 지점이 나는 불만스러워요. 상현의 심장에서 신부의 피를 완전히 뽑아냈어야만 했다고 봐요.
5. 나는 개인적으로 '박쥐'를 상현이 아니라 태주를 위한 영화라고 생각해요. 괴이쩍은 내러티브도 그렇고, 사건이 벌어지는 주요한 영화적 공간이자 온갖 이질적인 것들의 조합인 '행복한복집'이나, 생기없이 죽어 있는 듯한 영화의 인물들의 면면을 봐도 그렇고, 확실히 '박쥐'는 이상한 영화예요. 주검처럼 하얗고 창백한 회색 분장의 라여사(김해숙)와 어딘지 모자란 듯보이는 아들 강우(신하균)를 비롯 수요일 마작 모임의 참석자들인 영두(오달수)·승대(송영창) 들은 불균질적인 것들이 뒤섞여 칙칙하고 눅눅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행복한복집' 속에 그대로 들러붙은 화석과도 같은 느낌을 주거든요. 상현조차도 평면적인 인물로 변해 버리는 이 분위기 속에서 그래도 유일하게 살아 있는 존재이며 활력에 찬 인물이 바로 태주예요. 상현에게 강우의 살해를 교사하고, 뱀파이어가 되어 욕망의 극단을 향해 달려나가 끝내 파멸을 맞이하는 그녀야말로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죠. 청순함과 관능미, 천진함과 악마성을 체현한 그녀는 상현의 반대편에 선 인물로서 상현을 욕망의 축제로 이끌어 올리고 신권(神權)과 부권(父權)이 사라진 새로운 세계에 발을 디디게 할 진정한 구원자였으니까요.
6. 근친상간 모티프의 변주로서 의사(擬似) 남매 관계에 있던 강우와 태주가 부부로 등장하는 사실에서 확인되듯 '박쥐'는 '올드 보이'의 모티프를 차용하고 있지만, 순전히 재미의 측면에서만 봤을 때 오히려 '올드 보이'보다 더 나은 영화라고 생각돼요. 그러나, 안타깝게도 재미 그뿐이예요. '박쥐'는 '올드 보이'가 극단적인 방식으로 밀고 나간 반근대주의를 더 진전시키지 못하고 모호한 지점에서 주저앉고 말거든요. 그래서 이 영화의 중요한 씨퀀스 가운데 하나인, 고아인 상현을 키워주고 신앙적으로 후원해 준 노신부(박인환)의 살해 장면에서 존속살해 모티프의 변주를 읽어낼 수 있으되, 이것이 신권(및 부권)에의 도전을 의미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 없어요. 나아가거나 머물거나 박찬욱의 영화 이력에서 중요한 변곡점에 위치한 이 영화의 후속작이 기다려지는 이유는 이 때문이예요.
7.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현이 태주에게 '우리 지옥에서 만나요'라고 말하는 영화의 마지막 씬이 내게는 이성(또는 계몽)의 허황된 낙관을 지옥으로 초대하는 말처럼 느껴진 건 왜인지 모르겠어요. 짧고 간단히 몇 마디만 쓰려고 했는데, 쓰다보니 많이 길어졌어요. 글이 이렇게 길어졌는데도, 아직 못한 말이 남아 있으니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절제의 미덕과 촌철살인의 요령이지 싶네요. 정말 줄일게요.
-<2009.06.13>